티스토리 뷰

목차



    반응형

    객귀문(客鬼門) - 망자의 첫 번째 관문 『청구야담』

    부제: 억울하게 죽거나 제 명에 죽지 못한 객귀들이 저승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이는 객귀문. 이승의 한을 풀지 못한 영혼들이 염라대왕에게 올리는 애절한 탄원서와 눈물의 사연을 조명합니다.

    ※ 본 대본은 원 소재를 바탕으로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각색한 창작물 입니다.

    ※ 태그 (15개)

    #객귀문, #염라야담, #저승이야기, #무주고혼, #원귀, #청구야담, #조선야담, #저승사자, #염라대왕, #탄원서, #오디오드라마, #전래이야기, #권선징악, #한국전설, #옛날이야기
    #객귀문 #염라야담 #저승이야기 #무주고혼 #원귀 #청구야담 #조선야담 #저승사자 #염라대왕 #탄원서 #오디오드라마 #전래이야기 #권선징악 #한국전설 #옛날이야기

     

    ※ 후킹멘트 (263자)

    저승 문 앞에는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억울하게 맞아 죽은 사람, 속아서 죽은 사람, 시신조차 거둬지지 못한 사람. 이들을 객귀라 부르고, 그 문을 객귀문이라 하지요. 삼백 년 동안 그 문 앞의 탄원함은 늘 비어 있었습니다. 사연이 없어서가 아니었어요.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등짐장수 하나가 그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장부를 적을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그가 붓을 든 순간, 삼백 년 만에 처음으로 일이 벌어집니다.

    ※ 1: 발자국이 남지 않는 눈길

    눈이 내리고 있었더랍니다. 함박눈도 싸락눈도 아닌, 아궁이 재를 한 줌 흩뿌린 것 같은 잿빛 눈이었지요.

    곽만수는 그 눈발 속에서 눈을 떴습니다. 충청도 회덕 고을에서 스무 해 넘게 등짐 지고 팔도를 돌아다닌 보부상, 나이 마흔둘 곽만수였지요.

    '거참, 내가 어쩌다 여기 누워 있누.'

    몸을 일으키려는데 어깨가 이상하게 가벼웠습니다. 소금이며 무명이며 바늘쌈지가 그득 담겼던 그 지게가 온데간데없더랍니다. 잠잘 때도 등에서 떼어 놓지 않던 짐이었는데 말이지요. 그게 없어졌는데도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어요. 오히려 등판이 허전해서 자꾸 손이 뒤로 갔습니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더 이상했어요. 눈이 정강이까지 쌓였는데 걸어온 자리에 발자국이 하나도 없더랍니다. 와, 이거 진짜 황당하죠. 일부러 두어 걸음 쿵쿵 밟아 봐도 눈은 그대로였어요. 밟히지도 녹지도 않고, 그저 발등을 스르르 통과해 버리더랍니다.

    '내가 아직 잠이 덜 깼구나. 술을 마셨나? 나는 술을 안 마시는데.'

    고개를 들자 눈앞에 길이 하나 나 있었습니다. 흙길도 아니고 자갈길도 아닌, 오래된 삼베를 길게 깔아 놓은 것 같은 잿빛 길이었지요. 그 길 위로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둘이 아니었어요. 앞을 봐도 사람, 뒤를 봐도 사람,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이 말없이 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더랍니다.

    곽만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 틈에 끼어들었습니다. 장돌뱅이가 뭡니까, 사람 많은 데가 제일 편한 사람 아닙니까.

    "여보시오, 여기가 어디쯤 되오? 내가 길을 잃은 모양인데."

    아무도 대답을 안 하더랍니다.

    "아니, 어르신. 말씀 좀 물읍시다. 여기가 문경 새재요, 아니면 회덕 고개요?"

    바로 옆에서 걷던 흰 저고리 노인이 고개를 아주 천천히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눈이 곽만수를 보는 게 아니었어요. 곽만수를 지나쳐, 그 너머 아주 먼 데를 보고 있는 눈이었지요. 노인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걸었습니다.

    그제야 곽만수는 알아챘습니다. 이 행렬에서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더랍니다. 발소리도 없었어요. 수천 명이 걷는데 소리가 하나도 나지 않는 길, 여러분은 상상이 가십니까.

    등줄기가 서늘해졌습니다. 곽만수는 걸음을 늦추다가, 멈추었다가, 결국 그 자리에 우뚝 섰지요.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제 가슴께에 손을 얹어 보았습니다.

    뛰지 않더랍니다.

    스무 해를 팔도 고갯길을 넘으며 헐떡거리던 그 심장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했습니다.

    '아. 내가 죽었구나.'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어요. 오래 지고 다니던 짐을 내려놓았을 때처럼 어깨가 텅 빈 느낌만 들었지요.

    그런데 곽만수를 정말 겁나게 한 건 따로 있었습니다. 아무리 더듬어 봐도 자기가 어떻게 죽었는지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눈보라였어요. 회덕 고개를 넘던 밤, 눈이 사람 키만큼 쏟아지던 그 밤. 그리고 품 안이 따뜻했던 느낌. 뭔가를 꼭 끌어안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가 지워진 듯 없더랍니다.

    '내가 뭘 안고 있었지? 소금 자루였나? 아니야, 그건 지게에 있었지.'

    애를 써도 그 대목만 하얗게 비어 있었습니다.

    곽만수는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고개를 하나 넘자 안개가 자욱해지더니, 그 안개 너머로 시커먼 것이 우뚝 솟아 있었지요.

    문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문이었어요. 성문보다 높고 대궐 정문보다 넓은데, 통나무를 그대로 세운 것 같은 검은 기둥에는 이끼가 손가락 두 마디만큼 두껍게 끼어 있었지요. 그 위에 낡은 현판이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굵게 파인 글자가 셋이었어요.

    객귀문(客鬼門).

    곽만수는 장부에 물목 적을 만큼은 글을 아는 사람이라 그 글자를 더듬더듬 읽었습니다.

    "손 객, 귀신 귀, 문 문이라. 손님 귀신의 문이라는 말인가."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 끝없던 행렬은 문 앞에 이르자 스르르 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랍니다. 문이 열리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저 문에 닿는 순간 사람들이 물에 잉크 스미듯 사라졌지요.

    그런데 문 앞 너른 마당에는,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수백인지 수천인지 모를 혼백들이 그 마당을 서성거리고 있더랍니다. 어떤 이는 문짝을 두 손으로 두드리고, 어떤 이는 등을 돌리고 주저앉고, 어떤 이는 마당 끝에서 끝까지 하염없이 왔다 갔다만 하고 있었지요. 그 사람들에게서 나는 소리라고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뿐이었습니다.

    곽만수도 홀린 듯 문 쪽으로 걸어가 손을 뻗었습니다. 그런데 문에 닿는 순간, 퉁 하고 튕겨 나오더랍니다. 돌담에 부딪힌 것처럼 어깨가 얼얼했지요. 다시 대 봐도 마찬가지였어요. 세 번째로 몸을 던졌을 때, 등 뒤에서 낮고 마른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헛수고다. 그 문은 네 힘으로는 안 열린다."

    돌아보니 검은 도포에 검은 갓을 쓴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얼굴이 무쇠처럼 딱딱하고, 눈썹이 하얗게 센 늙은 차사였지요. 손에는 두꺼운 명부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름."

    "예? 아, 곽만수올시다. 충청도 회덕 사는 등짐장수 곽만수."

    늙은 차사가 명부를 한 장 한 장 넘겼습니다. 그러다 어느 대목에서 손가락이 멈추더니, 무쇠 같던 얼굴이 아주 조금 굳더랍니다.

    "곽만수. 회덕. 마흔둘. 여기 있군."

    "거보시오, 있지 않소. 그럼 나도 들어가면 되는 것 아니오?"

    "이름 위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다."

    "붉은 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늙은 차사가 명부를 돌려 보여 주었습니다. 과연 곽만수라는 이름 위에 주사 빛깔 줄이 쭉 그어져 있고, 그 옆에 넉 자가 적혀 있었지요.

    무주고혼(無主孤魂).

    "임자 없는 넋이라는 뜻이다. 뼈를 거둬 준 이가 없고, 밥 한 그릇 올려 준 이가 없고, 이름을 불러 준 이가 없는 자. 그런 자는 이 문을 넘지 못한다."

    곽만수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평생 남의 것 한 톨 훔친 적 없소. 됫박 눈금 속인 적도 없고 외상 떼먹은 적도 없소이다!"

    "죄가 있어서 못 들어가는 게 아니다."

    늙은 차사가 명부를 탁 덮었습니다.

    "죄 있는 자는 저 문으로 들어가 심판을 받고 지옥이든 극락이든 제 갈 데로 간다. 헌데 너 같은 자들은 심판대에 설 자격조차 못 얻어. 억울하게 죽은 자, 제 명을 다 못 채운 자, 시신이 거둬지지 못한 자. 이승에서 매듭이 안 풀린 넋들이지."

    "그럼 나는 언제 들어갑니까?"

    늙은 차사는 대답 대신 마당 저 끝을 턱으로 가리켰습니다. 거기 흰머리 노파 하나가 문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어요. 몇만 번은 해 본 듯 익숙한 절이었지요.

    "저 할멈이 여기 온 지 백스무 해다."

    곽만수는 무릎에서 힘이 쭉 빠졌습니다.

    "그럼 저는요? 제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뭘 어떻게 풀라는 말씀입니까!"

    늙은 차사는 그 말에 처음으로 곽만수를 똑바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짧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요.

    "기억이 없다고. 그거 참 딱하게 됐구나. 여기서 제일 오래 서 있는 자들이 꼭 그런 자들이더라."

    ※ 2: 삼백 년째 비어 있던 함

    곽만수는 그 마당에서 첫 밤을 보냈습니다. 아니, 밤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객귀문 앞에는 해도 달도 없었거든요. 그저 잿빛 하늘이 조금 어두워졌다 조금 밝아졌다 할 뿐이었지요.

    성질 급한 사람이면 미쳐 버렸을 겁니다. 그런데 곽만수가 어떤 사람입니까. 스무 해를 장터에서 굴러먹은 보부상이에요. 낯선 데 떨어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뭐다? 사람 사귀는 것 아니겠습니까.

    곽만수는 마당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말을 붙인 건 아까 그 노파였어요. 백스무 해째 절을 하고 있다던 그 할멈이지요. 곽만수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넉살 좋게 웃었습니다.

    "할머니, 절을 그렇게 하시면 무릎 나갑니다. 좀 쉬었다 하시지요."

    노파가 절을 멈추고 곽만수를 물끄러미 보더랍니다. 백스무 해 만에 처음 말을 걸어 준 사람이라는 눈빛이었지요.

    "새로 왔는가."

    "예, 어제요. 아니 그젠가. 여기는 날짜를 알 수가 없어서."

    노파는 삼월 할멈이라고 했습니다. 순조 임금 때 강원도 정선 산골에 살았다지요. 흉년이 하도 심해서 손자 둘이 사흘을 굶었더랍니다. 그래서 관가에 환곡을 꾸러 갔대요. 그런데 아전이 곳간 문을 열어 주지 않더랍니다. 이미 장부에는 삼월 할멈네가 곡식 두 섬을 받아 간 것으로 적혀 있었거든요.

    "내가 안 받았다고, 손도장 찍은 적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곳간에서 곡식을 훔치러 온 도둑년이라고 하데. 그 길로 멍석말이를 당했어."

    "세상에."

    "매를 맞다가 죽었는데, 시신을 관에 넣어 주지도 않고 거적에 말아서 뒷산 골짜기에 던졌더라고. 도둑년 시체를 어느 땅에 묻느냐면서."

    곽만수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럼 손자들은요?"

    "모르지. 백스무 해 동안 그게 제일 궁금했어. 그 애들이 그날 저녁을 먹었는지 못 먹었는지, 그것만 알면 나는 지금 당장 흩어져도 좋아."

    곽만수는 그 다음 말을 못 했습니다. 그저 할멈 옆에 한참을 같이 앉아 있었지요.

    마당을 조금 더 돌자 이번에는 붉은 옷자락이 눈에 띄었습니다. 활옷이었어요. 시집가는 새색시가 입는 그 붉은 혼례복 말입니다. 그걸 입은 처녀 하나가 문 옆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더랍니다. 나이가 열예닐곱이나 되었을까요. 머리에는 족두리까지 그대로 얹혀 있었지요.

    "아가씨는 어쩌다가."

    처녀는 대답 대신 제 가슴께를 손으로 꼭 쥐었습니다. 그러고는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어요.

    "숨이 안 쉬어졌어요."

    이름은 연이라고 했습니다. 경기도 광주 고을 사람인데, 열여섯에 시집을 가게 되었더랍니다. 혼삿날 아침에 가마를 탔는데, 고갯길을 넘어가던 중에 가마 안이 갑자기 매캐해지더래요. 문을 열려고 했는데 밖에서 무언가로 단단히 묶여 있었고, 아무리 두드려도 가마꾼들이 대꾸를 안 하더랍니다.

    "연기였어요. 누가 가마 밑에 뭘 피워 넣었어요."

    "아니, 왜요?"

    "모르겠어요. 다만 마지막에 가마 문이 열렸을 때, 얼굴을 봤어요. 우리 집 먼 아저씨뻘 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제 혼수 궤짝을 들고 있었어요."

    곽만수는 주먹이 절로 쥐어졌습니다.

    "그럼 사람들은 아가씨가 뭘로 죽은 줄 압니까?"

    "급체라고요. 신부가 긴장해서 아침에 먹은 게 체했다고. 그래서 시집도 못 가고 친정 뒷산에 그냥 묻혔어요. 혼인 안 한 처녀는 조상 산소에도 못 들어가니까요."

    그 옆에는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름은 돌이라고 했어요. 이 아이는 자기 사연을 말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저 곽만수 소매를 붙들고 같은 말만 되풀이했지요.

    "아저씨, 우리 엄마 못 봤어요? 나 물에서 나왔는데 엄마가 없어요."

    곽만수는 이 마당을 세 바퀴 돌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여기 있는 수천 명이 전부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을요. 억울하게 맞아 죽은 사람, 속아서 죽은 사람, 빠져 죽고도 건져 주는 이가 없던 사람, 전쟁통에 이름도 없이 묻힌 사람.

    '이거 참,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나.'

    곽만수는 늙은 차사를 찾아갔습니다. 차사는 문 옆 바위에 앉아 명부를 넘기고 있었지요.

    "차사님, 여쭐 게 있소이다. 저 사람들 사연을 염라대왕께 아뢰면 안 되는 겁니까? 저 정도면 대왕께서도 들으실 것 같은데."

    늙은 차사가 명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곽만수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있소이까? 있으면 진작 말씀을 하시지!"

    차사는 턱으로 마당 한구석을 가리켰습니다. 거기 잡초에 반쯤 덮인 돌함이 하나 놓여 있더랍니다. 무릎 높이쯤 되는 네모난 석함이었는데, 뚜껑에는 손바닥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지요.

    "저것이 탄원함이다. 백 년에 한 번, 대왕께서 저 함을 여신다. 안에 사연을 적은 글이 들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직접 심리하신다. 억울함이 밝혀지면 문이 열리고, 이승의 매듭도 풀린다."

    곽만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런 게 있으면서 왜 아무도 안 넣습니까? 저 할머니 백스무 해나 계셨다면서요!"

    늙은 차사가 그제야 명부를 덮고 곽만수를 보았습니다. 그 눈이 아주 오래 지친 눈이었지요.

    "저 함을 마지막으로 연 것이 백 년 전이다. 그때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아느냐."

    "뭐가 들었습니까?"

    "비어 있었다. 그 전에도, 그 전전에도 비어 있었다. 삼백 년째 저 함은 빈 채로 열리고 빈 채로 닫혔다."

    "아니 왜요! 사연이 이렇게 넘쳐나는데!"

    "글을 쓸 줄 아는 자가 없다."

    곽만수는 순간 멍해졌습니다.

    "여기 있는 자들은 대개 농사꾼이고, 아이고, 종이고, 아녀자다. 살아생전 붓을 잡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지. 억울함은 가슴에 넘치는데 그걸 종이에 옮길 손이 없는 게다. 더구나 이곳에는 종이도 붓도 먹도 없다. 저승에는 이승 물건이 없으니까."

    곽만수는 마당을 돌아보았습니다. 수천 명의 혼백이 여전히 말없이 서성이고 있었어요. 저 사람들 하나하나가 가슴에 사연을 품고, 그걸 말할 데가 없어서 삼백 년을 저러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때 늙은 차사가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참. 다음 달에 함이 열린다."

    곽만수의 심장이, 뛰지도 않는 그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뭐라고요? 백 년에 한 번이라면서요!"

    "백 년째 되는 해가 올해다. 이레 뒤지."

    ※ 3: 붓을 든 등짐장수

    그날부터 곽만수는 마당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녔습니다.

    이레라고 했습니다. 삼백 년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이레라니, 이건 하늘이 준 기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똑같았어요. 종이도 없고, 붓도 없고, 먹도 없다는 것 말입니다.

    '가만있자. 나는 명색이 장돌뱅이다. 장돌뱅이가 뭐냐, 없는 물건을 있게 만드는 사람 아니냐.'

    곽만수는 먼저 삼월 할멈을 찾아갔습니다.

    "할머니, 백스무 해 동안 여기 계셨으면 이 마당 사정을 제일 잘 아시겠네요. 혹시 종이 비슷한 거 보신 적 없습니까?"

    "종이?"

    "예. 뭐든 좋아요. 글자를 얹을 수만 있으면."

    삼월 할멈이 한참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러고는 마당 구석, 죽은 나무 밑동 쪽으로 곽만수를 데려갔지요. 거기 흙을 손으로 파내니 낡은 보자기가 하나 나오더랍니다.

    보자기를 풀자 곽만수는 숨을 삼켰습니다.

    종이였어요. 아니, 정확히는 종이 조각이었습니다. 이승에서 상갓집마다 태우는 지전이며 부적이며 만장 쪼가리가, 저승 나루를 타고 이 마당까지 떠내려온 것이었지요. 그걸 백스무 해 동안 한 장 한 장 주워 모은 것이었습니다.

    "이걸 왜 모으셨어요?"

    노파가 쑥스럽게 웃었습니다.

    "언젠가 우리 손자들이 나한테 편지를 써서 태워 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그럼 그 종이가 여기로 떠내려올 거 아닌가. 그래서 종이만 보면 다 주웠지. 하나하나 다 펴 봤어. 백스무 해 동안 내 이름이 적힌 건 한 장도 없더구먼."

    곽만수는 그 보자기를 두 손으로 받아 들었습니다. 손이 떨렸지요.

    "할머니. 이거 제가 좀 쓰겠습니다. 나중에 손자분들 편지 오면, 그건 제가 두 배로 갚아 드릴게요."

    다음은 붓이었습니다. 곽만수는 활옷 입은 연이한테 갔지요.

    "아가씨, 미안한 부탁 하나 합시다."

    "뭔데요?"

    "머리카락을 좀 주시오. 한 줌만."

    연이는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조선 시대 처자한테 머리카락 달라는 소리가 어떤 소린지 아시지요. 그런데 연이는 곽만수 얼굴을 잠깐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족두리를 벗고 쪽진 머리를 풀더랍니다. 그러고는 제 손으로 한 줌을 잘라 내밀었어요.

    "제 사연도 적어 주실 거예요?"

    "제일 먼저 적어 드리리다."

    곽만수는 마당 끝에 자라던 마른 싸리 가지를 하나 꺾어, 그 끝을 실오라기로 칭칭 감아 머리카락을 매었습니다. 스무 해 동안 장부를 매고 짐을 묶던 손이라 매듭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짓는 사람이었지요. 어설프지만 붓 비슷한 물건이 하나 생겨났습니다.

    이제 먹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도무지 답이 없더랍니다. 검댕도 없고, 숯도 없고, 흙도 이 마당 흙은 손에 묻지를 않았어요. 곽만수는 제 손가락을 이로 콱 깨물어 보았습니다. 피 한 방울 안 나오더랍니다. 혼백한테 무슨 피가 있겠습니까.

    한나절을 궁리하다가 곽만수는 결국 늙은 차사한테 갔습니다.

    "차사님. 먹은 어디서 구합니까."

    늙은 차사가 처음으로 곽만수를 오래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지요.

    "정말 쓸 셈이냐."

    "예."

    "그럼 알려 주마. 이 문 앞에서 글을 쓰는 먹은 딱 하나뿐이다."

    "뭡니까?"

    "쓰는 자의 넋이다."

    곽만수는 무슨 소린지 몰라 눈만 껌뻑였습니다.

    "붓끝에 네 기운을 밀어 넣으면 글자가 나온다. 대신 한 자 쓸 때마다 네 넋이 그만큼 닳는다. 열 장을 쓰면 네 형체가 반쯤 흐려질 것이고, 백 장을 쓰면 너는 여기서 흩어진다. 흩어진 넋은 저승에도 이승에도 없다. 환생도 없고 극락도 없고 지옥도 없다. 그냥 없어지는 것이다."

    마당이 조용해졌습니다. 마침 근처에 있던 혼백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요.

    곽만수는 한참을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봤어요. 스무 해를 지게 끈에 눌려 굳은살이 두껍게 박인 손이었습니다. 죽어서도 그 굳은살은 그대로 남아 있더랍니다.

    '살아서도 남의 짐만 지고 다녔는데, 죽어서도 짐을 지는구나.'

    그런데 이상하게 무섭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곽만수는 피식 웃었지요.

    "차사님. 제가요, 살아 있을 때 무거운 거 지는 게 직업이었습니다. 무명 열 필에 소금 두 가마 지고 새재를 넘었어요. 그거 지면 사람들이 그럽디다. 그거 지면 허리 나간다고. 그래도 졌지요. 왜냐? 그거 안 지면 안동 아지매가 무명이 없고, 상주 어른이 소금이 없거든요."

    곽만수가 붓을 고쳐 쥐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삼백 년 지고 있는 짐, 제가 이레만 대신 지겠습니다."

    그러고는 종이 한 장을 무릎 위에 폈습니다.

    첫 장은 약속대로 연이 것이었어요.

    곽만수는 연이를 앞에 앉히고 물었습니다. 몇 살에 죽었는지, 어느 고을 사람인지, 아비 이름이 무엇이고 어미 이름이 무엇인지. 가마가 어느 고개를 넘고 있었는지. 그 아저씨뻘 되는 사람의 얼굴에 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목소리가 굵었는지 가늘었는지.

    연이가 말하는 동안 곽만수의 붓이 움직였습니다. 붓끝에서 검은 물이 배어 나와 종이에 글자가 앉았지요. 그리고 글자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곽만수의 손등이 아주 조금씩 흐려지더랍니다.

    "광주 고을 사는 김 아무개의 딸 연이. 나이 열여섯. 무자년 삼월 초닷새 혼인길에 나섰다가, 가마 안에서 연기에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은 급체라 하였으나, 그날 가마 문을 밖에서 묶은 자가 있었고, 혼수 궤짝을 들고 달아난 자가 있었다."

    연이는 그 글자를 보면서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제 이름이... 제 이름이 저기 적혀 있어요."

    "그럼요. 아가씨 이름이지요."

    "아무도 안 불러 줬어요. 죽고 나서 한 번도요."

    곽만수는 붓을 멈추고 연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또박또박 불러 주었지요.

    "연이."

    그 순간이었습니다.

    마당 저편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가 곽만수의 손에서 붓을 낚아챘습니다.

    늙은 차사였어요. 그 무쇠 같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곽만수는 난생처음 그 차사가 다급해하는 걸 봤지요.

    "멈춰라!"

    "아니, 차사님. 먹을 알려 주신 건 차사님 아니오!"

    늙은 차사가 붓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내뱉었어요.

    "내가 하나를 말 안 했다."

    "뭘요."

    "이 문 앞에서 남의 사연을 대신 적은 자가, 삼백 년 전에 딱 한 사람 있었다."

    곽만수의 등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 사람은 어찌 되었습니까?"

    늙은 차사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주 천천히, 제 검은 도포의 소매를 걷어 올렸지요.

    그 팔뚝에, 붉은 인두로 지진 글자가 하나 박혀 있더랍니다.

    ※ 4: 팔뚝에 새겨진 글자

    붉은 인두 자국이었습니다. 살가죽이 아니라 넋에 지진 자국이라, 삼백 년이 지나도 그 자리만 검붉게 일그러져 있었지요. 글자는 하나, 지킬 수(守) 자였습니다.

    곽만수는 숨을 삼켰습니다.

    "차사님... 그럼 차사님도?"

    늙은 차사가 소매를 도로 내렸습니다. 그러고는 바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삼백 년 만에 처음 하는 말인 듯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지요.

    "내 이름은 철목이다. 원래는 이 문 앞에 서 있던 객귀였다."

    숙종 임금 무렵 황해도 시골에서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던 훈장이었다고 했습니다. 흉년에 관곡을 빼돌린 아전을 고발했다가 도리어 무고죄를 뒤집어쓰고 옥에서 곤장을 맞다 죽었지요. 시신은 옥사한 죄인이라 하여 거적에 말려 나갔고, 그렇게 객귀문 앞에 섰더랍니다.

    "나도 너처럼 생각했다. 여기 사연이 이렇게 넘치는데 왜 아무도 안 쓰나. 글을 아는 자가 나뿐이라면 내가 쓰면 되지 않느냐고."

    "그래서 쓰셨습니까?"

    "아흔아홉 장을 썼다."

    곽만수의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아흔아홉이요? 아니, 그럼 차사님 넋이."

    "거의 다 닳았지. 마지막 장을 쓸 때는 손가락이 안 보였다. 그래도 함에 넣었어. 그날 함이 열렸고, 나는 삼백 년 만에 처음으로 사연이 들어 있는 함이 열리는 걸 봤다."

    철목의 목소리가 거기서 아주 낮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신 분은 대왕이 아니었다."

    "예?"

    "대왕을 대신해서 온 아랫녘 판관이었지. 그자가 종이를 한 장 들춰 보더니 그러더구나. 글씨가 흐려서 읽을 수가 없다고. 획이 반쯤 지워져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곽만수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넋으로 쓴 글씨니 뒤로 갈수록 흐려졌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태웠다."

    "뭐라고요?"

    "아흔아홉 장을 그 자리에서 태웠다. 헛된 문서가 함을 더럽혔다면서. 그러고는 다음 백 년까지 함을 봉하고 갔지."

    마당이 조용했습니다. 어느새 혼백들이 빙 둘러 모여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요.

    "나는 그 자리에서 흩어져야 했다. 그런데 저승 법도가 나를 붙잡더구나. 남의 사연을 대신 적은 공은 있으니 흩어지는 대신 이 문을 지키라고. 팔뚝에 지킬 수 자를 지지고, 그날부터 삼백 년이다."

    철목이 곽만수를 노려보았습니다.

    "이제 알겠느냐. 나는 네가 무섭다. 네가 아흔아홉 장을 쓰고 나서 또 그 꼴을 당하면, 나는 그걸 삼백 년 더 보고 있어야 한다."

    곽만수는 한참을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물었지요.

    "차사님. 하나만 여쭙시다. 그 아흔아홉 장에 적힌 사람들, 지금 여기 있습니까?"

    철목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흩어졌다. 다들 기다리다 흩어졌어."

    "그럼 그 사람들은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철목의 어깨가 흔들렸습니다.

    "고맙다고 하더구나. 태워졌어도, 살면서 처음으로 제 사연이 종이에 적히는 걸 봤다고."

    곽만수는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러고는 철목의 손에서 붓을 도로 가져갔지요.

    "차사님. 그럼 됐습니다. 저는 씁니다."

    "이 미련한 놈아!"

    "글씨가 흐려서 못 읽으신다면, 이번엔 안 흐리게 쓰면 될 일 아닙니까."

    곽만수가 종이를 무릎에 폈습니다. 그리고 스무 해 장돌뱅이 머리가 그제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지요.

    '가만있자. 내 넋 하나로 아흔아홉 장을 쓰니까 뒤로 갈수록 흐려진 것이다. 그러면... 아흔아홉 사람이 한 방울씩 내면 되는 것 아닌가.'

    곽만수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여러분! 잠깐 제 말 좀 들어 보십시오!"

    수천 혼백이 웅성거렸습니다.

    "먹은 넋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제 넋 하나로 다 쓰면 뒷장은 글씨가 흐려집니다. 그러니 이렇게 합시다. 제 사연을 적을 때는, 그 사연 임자가 붓끝에 손가락을 대십시오. 제 넋 반, 여러분 넋 반. 그러면 마지막 장까지 글씨가 진할 겁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넋이 닳는다는데 누가 선뜻 손을 대겠습니까.

    그때 붉은 활옷 자락이 스윽 나섰습니다. 연이였어요. 연이가 아무 말 없이 걸어와 붓끝에 손가락을 얹었습니다.

    "저는 이미 열여섯에 다 잃었어요. 더 잃을 게 뭐가 있겠어요."

    그 다음이 삼월 할멈이었습니다. 백스무 해 절만 하던 그 무릎으로 절뚝절뚝 걸어와 손가락을 얹었지요.

    "내 이름 석 자만 진하게 써 주게. 그거면 돼."

    그 다음은 돌이였습니다. 돌이는 손가락이 하도 작아서 붓 끝을 겨우 잡았어요.

    "우리 엄마 이름도 같이 써 주세요."

    그러자 줄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가 서니 열이 서고, 열이 서니 백이 섰습니다. 삼백 년을 말없이 서성이기만 하던 마당에, 난생처음 줄이라는 게 생긴 겁니다.

    그날부터 이레 동안 곽만수는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한 장에 한 사람. 이름, 고을, 나이, 죽은 날, 죽은 까닭, 그리고 남은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 한 줄. 곽만수는 장부 적던 솜씨 그대로 또박또박 적어 나갔지요. 글자는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붓끝에 두 사람 손가락이 닿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곽만수의 몸은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사흘째에는 손목 아래가 안 보였고, 닷새째에는 팔꿈치까지 흐려졌지요. 엿새째 밤에는 목소리가 반쯤 지워져서 연이가 옆에서 대신 물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레째 새벽.

    아흔아홉 장이 다 찼습니다.

    곽만수는 종이 뭉치를 두 손으로 안고 탄원함 앞으로 갔습니다. 뒤에서 수천 혼백이 따라왔지요. 삼백 년 만에 처음으로, 그 마당에서 발소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함 앞에서 곽만수가 우뚝 멈춰 섰습니다.

    종이 뭉치 맨 아래, 한 장이 비어 있었거든요. 백 번째 장이었습니다.

    "차사님. 이건 누구 겁니까."

    철목이 명부를 펴 보더니 굳은 얼굴로 말했습니다.

    "네 것이다."

    곽만수는 그 백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습니다.

    이레 동안 아흔아홉 사람의 이름과 억울함을 적어 준 사람이, 정작 제 사연은 한 글자도 쓸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저는... 제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모릅니다."

    바로 그때, 하늘이 쩍 하고 갈라졌습니다.

    ※ 5: 백 년 만에 열린 함

    잿빛 하늘이 좌우로 벌어지더니, 그 틈으로 불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삼백 년 동안 해도 달도 없던 마당이 대낮처럼 환해졌지요.

    가마 행렬이 내려왔습니다. 앞에는 창을 든 신장들이, 뒤에는 두루마리를 안은 판관들이 늘어섰고, 그 한가운데 진홍빛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염라대왕이었습니다.

    수천 혼백이 일제히 엎드렸습니다. 곽만수도 무릎을 꿇었는데, 이미 무릎 아래가 사라져서 꿇는 시늉만 했지요.

    대왕이 탄원함 앞에 서더니 손짓 한 번으로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러고는 삼백 년 습관대로 안을 슬쩍 들여다보다가,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셨어요.

    "이것이 무엇이냐."

    판관 하나가 종이 뭉치를 꺼내 두 손으로 받쳐 올렸습니다. 대왕이 첫 장을 펴셨지요.

    "경기도 광주 김 아무개의 딸 연이. 나이 열여섯. 무자년 삼월 초닷새 혼인길."

    대왕의 눈썹이 꿈틀했습니다.

    "글씨가 진하구나. 이곳 넋으로 쓴 글이 이렇게 진할 리가 없는데."

    철목이 앞으로 나가 이마를 땅에 대었습니다.

    "아흔아홉 사람이 한 방울씩 보탠 먹이옵니다."

    대왕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아흔아홉 장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다 읽으셨지요. 그 사이 마당에는 숨소리 하나 없었습니다.

    다 읽은 대왕이 첫 번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연이."

    붉은 활옷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업경을 대령하라."

    거울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사람 키보다 큰 거울이었어요. 거기 무자년 삼월 초닷새 아침이 그대로 비쳤습니다. 꽃가마, 고갯길, 가마 문에 감기는 밧줄, 가마 밑에 밀어 넣어지는 젖은 쑥더미. 그리고 궤짝을 들고 산길로 내려가는 사내의 얼굴.

    "저 자는 지금 어디 있느냐."

    판관이 명부를 넘겼습니다.

    "광주 고을에서 곡물상을 하며 살아 있사옵니다. 나이 예순하나, 재산이 만 석이옵니다."

    "그 자의 명부에 오늘 밤을 적어 넣어라. 죽어서 오거든 이 아이 앞에 무릎 꿇려 사연을 듣게 하라. 백 년을 듣게 하라."

    연이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스무 해 만에 처음 소리 내어 우는 울음이었지요.

    "삼월."

    이번엔 흰머리 노파가 일어섰습니다.

    "네 사연에 손자 둘의 안부를 묻는 줄이 있구나. 판관은 읽어라."

    판관이 두루마리를 폈습니다.

    "정선 고을 아무개의 손자 둘, 형은 여든여덟에, 아우는 아흔하나에 명을 다하였사옵니다. 그날 저녁은 이웃집 김 서방이 좁쌀 한 되를 가져다주어 먹었다 하옵니다."

    삼월 할멈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먹었대... 그날 저녁을 먹었대..."

    "한 가지 더 있사옵니다. 그 후손들이 지금도 해마다 시월이면 뒷산에 상을 차린다 하옵니다. 다만 이름을 몰라 그저 할머니라고만 부른다 하옵니다."

    대왕이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이름을 모르면 명부에 닿지 않는다. 그래서 백스무 해를 여기 서 있었구나."

    그러고는 대왕이 친히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셨습니다.

    "정선 사람 오삼월."

    순간 노파의 이름 위에 그어져 있던 붉은 줄이 스르르 지워졌습니다. 백스무 해 만이었지요.

    돌이 차례가 되자 판관이 아뢰었습니다.

    "이 아이의 어미는 함께 빠져 죽어 서편 문 앞에 서 있사옵니다."

    "데려오라."

    잠시 뒤 젖은 치마를 입은 여인이 달려왔습니다. 아이가 그 품으로 뛰어들었어요. 마당에 있던 수천 혼백이 그 광경을 보고 저마다 소매로 눈을 눌렀습니다.

    그렇게 아흔아홉 장이 다 읽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이 남았지요.

    백지였습니다.

    대왕이 그 빈 종이를 들어 보셨습니다.

    "이것은 어찌 비어 있느냐."

    철목이 대답했습니다.

    "이 아흔아홉 장을 쓴 자의 것이옵니다. 헌데 이 자가 제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옵니다."

    "이름."

    "충청도 회덕 등짐장수 곽만수이옵니다."

    대왕이 곽만수를 보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곽만수는 형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어요. 어깨 위쪽만 겨우 사람 모양으로 흐릿하게 떠 있었지요.

    "어찌 이 지경이 되도록 남의 글을 썼느냐."

    곽만수가 사라져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소인이 지게 지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요."

    대왕이 한참 그를 보다가 명하셨습니다.

    "업경을 다시 대령하라. 이 자의 마지막 밤을 비추라."

    거울에 눈보라가 몰아쳤습니다.

    회덕 고개였습니다. 눈이 사람 키만큼 쌓인 밤길에 등짐 진 사내가 걸어가고 있었어요. 그러다 길가 눈더미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우뚝 섭니다. 파란 얼굴로 눈에 반쯤 묻힌 대여섯 살 사내아이였지요.

    사내는 지게를 그 자리에 팽개칩니다. 그리고 제 솜옷을 벗어 아이를 둘둘 감싸고, 저고리 바람으로 아이를 품에 안고 걷기 시작합니다.

    십 리를 걸었습니다. 이십 리를 걸었습니다. 눈썹에 고드름이 얼고 다리가 풀려 몇 번을 넘어지면서도, 아이를 품에서 놓지 않았지요.

    마을 어귀 서낭당 불빛이 보이자 사내가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습니다.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드는데, 그 손이 그대로 툭 떨어집니다.

    사내는 눈밭에 옆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러고는 마지막 힘으로 아이 쪽에 손을 뻗어, 솜옷 자락을 한 번 더 여며 주고 눈을 감았지요.

    마당에서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났습니다.

    거울은 계속 비췄습니다. 이튿날 아침, 마을 사람들이 서낭당 앞에서 아이를 발견합니다. 그 집 양반댁 도련님이었어요. 아이는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낯모르는 등짐장수 시체가 있으니,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놈이 도련님을 업어다 팔아먹으려던 게로구먼."

    시신은 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들판에 버려졌습니다. 이름을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지요.

    대왕이 거울을 물리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무거운 목소리로 말씀하셨어요.

    "이름을 불러 주는 이가 없으면 제 죽음조차 잊힌다. 이 자가 제 마지막 밤을 기억하지 못한 까닭이 이것이다."

    곽만수의 흐릿한 얼굴이 아주 조금 움직였습니다. 그가 물은 것은 딱 한 마디였어요.

    "대왕님. 그 아이는... 살았습니까?"

    ※ 6: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

    대왕이 그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감으셨습니다.

    "저 지경이 되고도 남의 아이 안부부터 묻는구나."

    그러고는 판관을 돌아보셨지요.

    "이승 회덕을 비추라. 지금 이 시각으로."

    거울에 다시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회덕 고을 어느 기와집 안방이었어요. 대여섯 살 사내아이가 이불에 누워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사흘째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지요.

    "아저씨 추워요, 아저씨 추워요. 아저씨한테 옷 돌려줘야 해요."

    아이 어미가 울면서 아이를 붙들고 있었고, 아버지 되는 양반은 문지방에 앉아 담뱃대만 물고 있었습니다.

    그때 늙은 하인 하나가 마당에서 뭔가를 안고 뛰어들어 왔어요. 눈이 녹으면서 서낭당 뒤에서 나온 물건이었습니다. 지게 하나, 반쯤 젖은 소금 자루, 그리고 무명 보퉁이였지요. 보퉁이 안에는 팔다 남은 바늘쌈지와 함께, 손때 묻은 장부가 한 권 들어 있었습니다.

    양반이 그 장부를 폈습니다. 첫 장에 이름 석 자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어요.

    회덕 곽만수.

    그리고 그 아래로 스무 해치 물목이 빼곡했습니다. 안동 아지매 무명 두 필, 상주 어른 소금 한 말, 진천 과부댁 외상 닷 냥은 받지 말 것.

    거기서 양반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아이가 감고 있던 솜옷을 집어 들었지요. 등짐장수가 겨울마다 입는 두툼한 솜옷이었고, 안쪽 깃에 역시 이름이 박음질되어 있었습니다.

    양반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 아이를 안고 이십 리를 걸었구나. 제 옷을 벗어 주고...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람을 들판에 버렸구나."

    그날로 마을이 뒤집혔습니다. 양반은 상투 바람으로 들판으로 달려가 눈을 파헤쳤고, 사흘 만에 곽만수의 시신을 찾아냈지요. 그러고는 제 집 선산 양지바른 자리를 내어 장사를 지냈습니다. 상주 노릇도 제가 했어요. 비석에는 이렇게 새겼습니다.

    남의 아이를 품고 이십 리를 걸어간 사람, 회덕 곽만수.

    거울 속에서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부르고, 살아난 아이가 부르고, 아이 어미가 절하며 불렀지요.

    곽만수, 곽만수, 곽만수.

    그 순간이었습니다.

    객귀문 마당에 서 있던 흐릿한 형체가, 아래에서부터 위로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발이 생기고, 무릎이 생기고, 굳은살 박인 손이 돌아왔지요. 이름을 불러 주는 소리가 넋을 도로 채워 준 겁니다.

    대왕이 명부를 펴셨습니다. 곽만수라는 이름 위에 그어져 있던 붉은 줄이 스르르 지워졌어요.

    "무주고혼이 아니다. 이제 임자가 있는 넋이다."

    그러고는 대왕이 객귀문을 향해 손을 드셨습니다.

    삼백 년 동안 꿈쩍도 않던 그 검은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습니다.

    아흔아홉 명이 그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연이는 활옷 자락을 걷어 올리고 사뿐사뿐 들어갔고, 삼월 할멈은 무릎을 짚고 천천히 들어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봤지요. 돌이는 어미 손을 꼭 잡고 들어갔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삼월 할멈이 곽만수의 손을 잡았습니다.

    "자네 덕에 내 이름을 백스무 해 만에 들었네. 고맙네."

    "할머니, 종이 갚아 드린다고 했는데 못 갚았습니다."

    "갚았어. 자네가 벌써 갚았어."

    대왕이 이번엔 철목을 부르셨습니다.

    "삼백 년 전 이 함을 태운 판관이 누구냐."

    판관 하나가 새파랗게 질려 앞으로 나왔습니다. 대왕이 그 자를 내려다보셨지요.

    "글씨가 흐리면 등불을 밝힐 일이지 어찌 불에 태웠느냐. 네가 태운 것은 종이가 아니라 아흔아홉 사람의 마지막 목소리다. 오늘부터 백 년 동안 이 마당에 서서, 흩어져 간 그 아흔아홉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찾아 오너라."

    그리고 대왕은 철목의 팔뚝을 잡으셨습니다. 지킬 수 자 낙인 위에 손바닥을 얹으시자, 삼백 년 묵은 검붉은 자국이 김처럼 스러졌지요.

    "너는 이제 가도 좋다."

    그런데 철목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소인은 남겠나이다. 이 문 앞에 아직 수천이 서 있사옵니다. 저들 사연을 다 적어 올리기 전에는 못 가옵니다."

    대왕이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그럼 사람이 하나 더 있어야겠구나."

    대왕이 곽만수를 보셨습니다.

    "곽만수. 너는 지금 문으로 들어가 극락에 날 수도 있고, 이승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헌데 내가 자리를 하나 만들려 한다. 이 문 앞에서 글 모르는 넋들의 사연을 대신 적어 주는 소임이다. 대필차사라 부르겠다. 백 년만 하면 그 뒤에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곽만수는 잠깐 생각하는 척하더니, 대뜸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왕님. 종이는 대 주십니까?"

    마당이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삼백 년 만에 그 마당에서 처음 나는 웃음소리였지요.

    "종이도 주고 붓도 주고 먹도 주마. 이제 네 넋을 갈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럼 하겠습니다."

    그날부터 객귀문 앞은 달라졌습니다. 마당 한가운데 평상이 하나 놓이고, 그 위에 지필묵이 놓였지요. 등짐장수 출신 대필차사가 거기 앉아 아침부터 밤까지 사연을 받아 적었습니다. 옆에서는 늙은 차사 철목이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었고요.

    그리고 탄원함은 백 년에 한 번이 아니라, 해마다 열리게 되었답니다.

    여러분, 우리가 조상 기일에 상을 차리고 술 한 잔 올리면서 무엇을 합니까. 이름을 부릅니다. 아무개 할아버지, 아무개 할머니 하고 부르지요. 옛사람들이 그걸 왜 그렇게 중히 여겼는지,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이 있는 한, 그 사람은 임자 없는 넋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짐은 쌀가마도 소금가마도 아니라,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남의 사연이라는 것 말입니다.

    곽만수는 오늘도 그 문 앞에 앉아 붓을 들고 있을 겁니다. 혹시 여러분 집안에, 이름도 못 남기고 억울하게 가신 어른이 계시거든 오늘 저녁에 한 번만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보십시오.

    객귀문 마당에 서 있던 누군가의 붉은 줄이, 그 소리에 스르르 지워질지도 모르니까요.

    유튜브 엔딩멘트 (247자)

    오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억울한 사연보다 더 서러운 것이 아무도 그 사연을 들어 주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등짐장수 곽만수가 대신 말해 준 것 같습니다. 여러분 곁에도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계신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하루는 그 말을 한 번 들어 주시면 어떨까요. 이야기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댓글로 여러분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남겨 주세요. 다음 시간에 더 깊은 저승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