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종이에 염라대왕을 그리게. 상상이 아닌 '진짜'를 봐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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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이에 염라대왕의 진짜 얼굴을 그려주게."
한양 최고의 화공이라 불리던 사내가 있었다. 왕실의 의궤를 그리고, 사찰의 탱화에 부처의 미소를 새기던 천재.
그러나 지금 그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것은 양반 댁 뒷방에 은밀히 감춰질 춘화뿐이다.
술에 절고, 분노에 삭아, 신을 저주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타락한 천재.
그에게 어느 폭풍우 치는 밤, 검은 삿갓을 쓴 노승이 찾아와 기이한 의뢰를 던진다.
능화지 한 장과 눈이 멀 만큼 번쩍이는 금괴 하나를 내밀며 말한다.
미친 소리라 여기며 내치려는 순간, 노승이 속삭인다.
"그림을 완성하면, 자네 죽은 누이가 겪고 있는 저승의 고통을 멈출 수 있다네."
붓끝 하나로 저승의 문이 열리고, 산 자의 피가 능화지 위에 스며들 때,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공포인가, 구원인가. 이것은 누이를 죽인 죄를 안고 살아가는 한 사내가, 죽음의 왕 앞에서 붓으로 속죄하는 이야기다.
※ 1단계: 첫 장면 (오프닝 이미지)
사각, 사각. 붓끝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가 마치 마른 장작이 타는 소리처럼 거칠고 메마르다. 한양 도성 안, 제법 이름깨나 날린다는 환쟁이 도원의 화실이라지만, 이곳을 채우고 있는 건 그윽한 묵향이 아니라 코를 찌르는 싸구려 탁주 냄새와 축축하게 쩐 지분 냄새뿐이다. 붓을 쥔 손끝이 덜덜 떨린다. 수전증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덜 깬 술기운 때문인지 본인조차 알 수 없다. 눈앞에 펼쳐진 종이 위에는 벌거벗은 남녀가 낯 뜨거운 자세로 엉겨 붙어 있다. 양반 댁 마님들이나 뒷방 늙은이들이 은밀하게 주문한다는 춘화.
'한때는 왕실의 의궤를 그리고,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를 화폭에 담던 손이... 이제는 고작 이런 살덩어리나 그리며 엽전 몇 푼에 팔려 다니고 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탁주가 쓰다. 속이 타들어 가는데도 취기는 좀체 오르지 않고, 오히려 정신은 징그럽게 맑아진다. 빈 술잔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구석진 곳을 곁눈질한다. 먼지 쌓인 궤짝 위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낡은 종이 뭉치. 마름꽃 무늬가 은은하게 박힌 최고급 능화지.
'저 귀한 종이에는 오직 부처님의 말씀이나 임금님의 교지만이 적힐 수 있다지. 하지만 지금 저것은 그저 땔감보다 못한, 내 비참한 몰락을 조롱하는 흉물일 뿐이다.'
저 종이를 펼쳐 놓고 부처를 그리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던 때가 있었다. 한 획 한 획에 경건한 마음을 실어 중생을 구제할 그림을 그리겠노라 다짐하던 때가. 하지만 그런 시절은 이미 검은 먹물 아래 묻혀버렸다.
"빌어먹을... 그림이 다 무슨 소용이야."
붓을 내던지고 다시 술병을 집어 든다. 차라리 취해서 이 구질구질한 현실을 잊고 싶다. 병을 기울이니 탁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려 미완성의 춘화 위에 뚝뚝 떨어진다. 먹선이 번지고 살색이 뭉개진다.
'상관없다. 어차피 껍데기 위에 껍데기가 덧씌워질 뿐이니까.'
밖에서는 파루 종소리가 느릿하게 울려 퍼지고, 화실 안에는 사내의 거칠고 고른 숨소리만이 남는다.
※ 2단계: 주제 제시
"도원 자네, 붓에 혼을 담아야 그림이 산다지 않았나. 어찌 껍데기만 그리고 있는가."
술상을 치우러 들어온 늙은 행수 어른이 혀를 차며 던진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팍에 꽂힌다. 픽, 하고 코웃음이 새어 나온다.
"혼? 그따위 것이 밥을 먹여줍니까. 그림은 그저 손기술이고, 먹고사는 수단일 뿐이오. 혼 따위 팔아먹은 지 오래니 쓸데없는 훈계는 거두시오."
입에서 나온 말은 가시가 되어 상대를 찌르지만, 정작 피를 흘리는 건 제 마음이다.
'혼을 담으라니. 그 혼이라는 게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삼 년 전, 그 지독했던 역병이 도성을 휩쓸고 지나간 뒤, 내 안에 있던 뜨거운 무언가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식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증발해 버렸다.'
행수 어른이 길게 한숨을 쉬며 나간다. 닫힌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차다.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다.
'껍데기만 그린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내 그림에 더 이상 생명이 없다. 그저 욕망을 자극하는 기교와 돈을 쫓는 탐욕만이 덕지덕지 묻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하는 순간, 내가 버텨온 이 알량한 자존심마저 무너져 내릴 테니까.'
애써 부정하며 다시 춘화 위로 붓을 가져간다. 그러나 붓끝은 자꾸만 미끄러지고, 먹물은 검은 눈물처럼 번져 나간다. 예전에는 붓을 쥐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종이 위에 선 하나를 긋는 것이 세상과 대화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라 믿었다.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그림은 그리는 자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지금 그 거울에 비치는 것은 텅 빈 허깨비뿐이다.
'내가 가장 두려운 건, 다시는 예전처럼 진짜를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혼을 팔아먹은 게 아니라,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 서늘한 진실을... 나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탁주 한 모금으로 그 진실을 목구멍 아래로 억지로 밀어 넣는다. 쓰디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순간적으로 공포를 눌러준다. 하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누르고 눌러도 올라오는 것이 있다. 어째서 이 꼴이 되었는지, 그 시작점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떠오른다.
※ 3단계: 설정 (준비)
사실 붓을 꺾고 세상과 담을 쌓은 건, 누이 연화를 잃은 뒤부터였다. 부모 없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온 유일한 피붙이. 연화는 오라비의 그림 한 장에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던 아이였다. 들꽃 한 송이를 그려 주면 종일 가슴에 품고 다니고, 산새 한 마리를 그려 주면 진짜 새가 날아왔다며 손뼉을 치던 아이.
'그런 누이가 병에 걸렸을 때, 나는 그림을 팔아 번 돈으로 좋은 약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했다.'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드리면 낫는다던 스님들의 말만 철석같이 믿었다. 매일 밤 차가운 법당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살려만 달라고,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으니 누이만은 살려 달라고. 두 무릎이 까져 핏물이 배어도, 이마가 터져 먹물 같은 핏줄기가 눈을 가려도, 그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부처님은 침묵했고, 누이는 고통 속에 피를 토하며 품 안에서 식어갔다. 마지막 순간 연화의 손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오라버니... 좋은 그림 많이 그려."
그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찬바람이 부는 늦가을이었다. 낙엽이 마당에 수북이 쌓이던 날이었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신도 부처도 없다는 것을. 만약 저승이 있다면, 죄 없는 내 누이를 데려간 염라대왕이야말로 천하의 악귀이자 위선자일 것이라고.'
그 뒤로 사찰에 걸린 탱화들을 모조리 찢어발겼다.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불상들이 가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남은 건 믿음의 상실과 구원받지 못한 죄책감뿐이다. 누이의 기일이 다가올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다. 꿈속에서 연화는 늘 운다.
"오라버니, 나 좀 구해줘..."
그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아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래서 술을 마신다. 취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밤들이 너무나 길다.
'내 그림 속에 신은 없다. 오직 고통과 환멸만이 있을 뿐이다.'
※ 4단계: 사건 발생 (촉발)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치던 밤이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혀 문 두드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는데, 낡은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검은 삿갓을 쓴 기이한 노승이 들이닥쳤다. 비에 젖은 승복에서 풍기는 냄새는 비릿한 물비린내와 오래된 향 냄새가 뒤섞인, 묘하고 불길한 것이었다. 삿갓의 처마에서 빗물이 또르르 떨어져 마루 위에 작은 웅덩이를 만든다. 노승은 말없이 앞에 섰다. 그리고 품속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하나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최고급 능화지 한 장. 마름꽃 무늬가 촛불 아래서 은빛으로 일렁거린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눈이 멀 것 같이 번쩍이는 금괴였다.
"이 종이에 염라대왕의 진짜 얼굴을 그려주게."
노승의 목소리는 긁힌 쇳소리처럼 거칠었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염라대왕? 미친 소리 작작 하시고 나가시오. 나는 귀신 따위 안 그리니까."
쫓아내려는데 노승이 팔을 잡았다. 그 악력이 어찌나 센지 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삿갓 아래서 번뜩이는 눈빛이 온몸을 꿰뚫어 본다.
'그 눈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어둠 그 자체가 응축되어 형상을 이룬 듯한,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눈이었다.'
"단, 상상으로 그린 가짜가 아니라 자네가 직접 보고 느낀 진신을 그려야 하네."
'도대체 무슨 수로 염라의 진짜 얼굴을 본단 말인가. 미친 중이 분명하다.'
하지만 노승이 덧붙인 한마디에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그림을 완성하면, 자네 누이가 겪고 있는 저승의 고통을 멈출 수 있다네."
'누이라고... 연화가 고통받고 있다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밖에서 번개가 내리치고, 화실 안의 촛불이 거세게 흔들린다. 노승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간다.
※ 5단계: 고민 (망설임)
'혼란스럽다. 죽은 자의 고통을 멈춘다니, 허무맹랑한 헛소리다. 저승이 어디 있다고, 염라가 어디 있다고. 다 사기꾼들의 수작질이다. 하지만... 만약 정말이라면? 밤마다 꿈속에서 울부짖는 누이의 목소리가 환청이 아니라 진짜라면?'
떨리는 손으로 탁자 위의 능화지를 만져본다. 종이의 감촉이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매끄럽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의 가죽 같기도 하고, 저승으로 통하는 차가운 문고리 같기도 하다. 손가락 끝으로 마름꽃 무늬를 더듬으면 알 수 없는 진동이 손목을 타고 올라와 어깨를 감싼다.
'이 종이는 보통 종이가 아니다. 무언가 담겨 있다. 혹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금괴를 본다. 저 정도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 술도 원없이 마시고, 춘화 따위 그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돈 때문이 아니다. 내 마음을 움직인 건 누이의 고통이라는 그 한마디였다.'
삼 년 동안 묵혀뒀던 감정의 댐에 균열이 간다. 죄책감과 미안함과 그리움이 뒤섞인 탁류가 금이 간 틈 사이로 주르르 새어 나온다.
'밑져야 본전이다. 어차피 이대로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목숨이다.'
주먹을 꽉 쥔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어 피가 맺힌다.
'그래, 기어이 그 염라 놈의 낯짝을 그려 따져 묻기라도 하리라. 왜 죄 없는 내 누이를 데려갔냐고,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아직도 고통받게 하느냐고. 내 붓끝으로 그 오만하고 잔인한 신의 얼굴을 낱낱이 파헤쳐 주겠다.'
먹을 간다. 벼루 위에서 먹이 돌아갈 때마다 검은 물이 고인다. 검은 먹물이 벼루 위에서 춤을 춘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선전포고다. 죽은 자의 세계에 산 자의 분노를 가지고 쳐들어가겠다는, 미친놈의 선전포고다.'
※ 6단계: 2막 진입 (새 세계로 들어감)
먹을 듬뿍 찍은 붓을 들어 능화지 위에 첫 점을 찍는 순간, 화실의 공기가 기이하게 뒤틀린다. 훅, 하고 촛불이 꺼지는가 싶더니 이내 시퍼런 불꽃으로 다시 타오른다.
"어, 어?"
당황할 새도 없이 종이 위에 찍힌 먹물이 검은 소용돌이가 되어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한 점이었던 먹이 제 스스로 번져 나가더니 종이 전체를 삼키고, 종이가 탁자를 삼키고, 탁자가 방 전체를 삼킨다. 바닥이 꺼지는 듯한 현기증과 함께 몸이 빨려 들어간다. 붓도, 벼루도, 사내 자신도 검은 먹물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진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압도적인 어둠. 숨을 쉴 수 없다. 위아래도, 앞뒤도, 시간도 공간도 없는 칠흑의 틈새를 끝없이 떨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 낯선 땅에 서 있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잿빛 안개가 자욱한 강가다. 하늘에는 해가 없다. 달도 별도 없다. 그저 붉으스름한 빛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이 세상 전체를 물들이고 있다. 땅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대신 뼈처럼 하얀 자갈이 깔려 있다. 강물은 검붉게 흐르는데, 그 안에서 수많은 손들이 허우적대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친다. 창백한 손가락들이 수면 위로 나왔다가 빨려 들어가고, 다시 나왔다가 다시 빨려 들어간다.
"여기가... 어디지?"
목소리가 메아리치지 않고 허공에 먹혀버린다. 강가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망자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들을 채찍질하는 괴물 같은 옥졸들이 보인다. 소머리를 한 놈, 말머리를 한 놈, 눈이 셋 달린 놈.
'삼도천. 이승의 이치가 통하지 않는 곳. 죽은 자들의 통곡 소리가 바람이 되어 부는 곳. 나는 산 채로, 붓 한 자루 달랑 들고 저승에 발을 들인 것이다.'
※ 7단계: B 이야기 (감정 줄거리)
어디선가 들려온 희미한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수많은 망자들의 행렬 속에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낡고 해진 옷을 입고, 발목에는 무거운 쇠사슬을 찬 채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여인.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 가녀린 어깨와 풍기는 은은한 꽃향기가 분명 누이, 연화다.
"연화야!"
목이 터져라 불러보지만, 그녀는 듣지 못한 듯 비틀거리며 안개 속으로 멀어져 간다. 반사적으로 달려가려 하지만 발이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는다. 쇠사슬이 자갈밭 위를 끌리며 내는 소리가 뼈를 긁는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프다. 내 누이가 왜 저런 꼴을 당하고 있단 말인가. 평생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못 하고,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했던 착한 아이가 왜 저 무거운 쇠사슬을 끌고 지옥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연화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미워한 적 없는 아이였다. 오라비가 술에 취해 붓을 꺾고 상을 뒤엎어도, 웃어 주던 아이였다.
"괜찮아, 내일 다시 그리면 돼."
그 말이 귓가에 맴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동시에 명확한 목표가 생긴다.
'나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러 온 게 아니다. 내 누이를 구해야 한다. 저 빌어먹을 염라대왕을 만나 따지고, 필요하다면 멱살이라도 잡아서 내 누이를 풀어달라고 해야 한다. 호기심 따위가 아니다. 이것은 처절한 속죄이자, 목숨을 건 구원의 여정이다.'
안개 속으로 사라진 누이의 뒷모습을 눈에 새기며 이를 악문다.
'연화야, 조금만 기다려라. 오라비가 반드시 너를 구해줄 테니.'
손에 쥔 붓이 이상하게 뜨겁다. 마치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듯.
※ 8단계: 재미 구간 (볼거리·핵심 장면들)
저승 차사들의 눈을 피해 바위 뒤에 숨어, 눈앞에 펼쳐지는 지옥의 풍경을 목격한다. 실로 끔찍하고도 기이한 광경이다. 첫 번째로 마주한 것은 발설지옥. 살아생전 거짓말로 남을 속인 자들이 끌려와 혀를 뽑힌다. 시뻘건 집게가 입 안으로 들어가 쭈욱 혀를 잡아당기면 질긴 살점이 떨어져 나온다. 뽑힌 혀는 밭에 꽂히고, 또 새 혀가 돋아나면 또 뽑힌다. 끝이 없다. 그 옆에는 화탕지옥이 있다. 남을 헐뜯고 시기한 자들이 펄펄 끓는 똥물에 던져진다. 사람의 형체가 녹아내리면서도 의식은 살아 있어 고통을 온전히 느낀다. 살점이 타들어가는 냄새와 귀청을 찢는 비명소리가 지옥도를 완성한다.
'공포에 질려 토악질을 하면서도, 붓을 놓을 수가 없다. 이 참혹함을 기록해야 한다. 이것이 염라가 다스리는 세상의 실체라면, 나는 그 잔혹함을 낱낱이 그려낼 것이다.'
붓을 놀릴 때마다 능화지 위에는 기괴한 형상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떤 망자는 귀를 바짝 대고 속삭인다.
"염라대왕은... 피를 마시는 거대한 호랑이요."
또 어떤 망자는 손을 덜덜 떨며 말한다.
"아니오, 눈이 세 개 달린 악귀라오."
증언을 옮길 때마다 그림 속의 염라는 시시각각 변한다. 뿔이 돋았다가, 이빨이 길어졌다가, 검은 연기처럼 흩어진다.
'도대체 무엇이 진짜란 말인가.'
미친 듯이 스케치한다. 불교 미술의 화려한 색채와 지옥의 기괴함이 뒤섞여 그림은 점점 광기로 물들어간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 저주다. 나는 저주의 굿판을 벌이는 무당처럼 춤추듯 붓을 휘두른다.'
※ 9단계: 중간 전환점 (미드포인트)
우여곡절 끝에 염라의 궁전, 시왕청에 도달한다. 저 멀리서 보았을 때부터 숨이 막혔다. 하늘을 찌를 듯한 석조 기둥이 수십 개 서 있고, 그 사이사이를 붉은 장막이 드리우고 있다. 기둥에는 금빛으로 경문이 새겨져 있는데,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며 읽는 자의 죄를 소리 없이 묻는다. 장막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천둥 같기도 하고, 수만 명이 동시에 우는 소리 같기도 한 묵직한 울림. 그리고 마침내, 장막 뒤에 앉아 있는 거대한 실루엣과 마주한다. 산 하나가 앉아 있는 것 같다. 형체의 윤곽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떨리는 손으로 그려낸 그림을 펼쳐 보인다. 뿔이 달리고 입에서 불을 뿜는, 세상에서 가장 흉측하고 잔인한 악귀의 형상.
"여기 있소! 당신의 그 추악한 본모습이! 내 누이를 고통 속에 몰아넣은 악마의 얼굴이 바로 이것이오!"
악을 쓰며 외친다. 목이 찢어져 피가 넘어와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장막 뒤에서는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크하하하... 어리석은 놈."
그 웃음소리에 건물이 흔들리고 고막이 터질 것 같다. 기둥에 금이 가고 장막이 펄럭이며 바닥의 돌이 들썩인다.
"이것은 나의 얼굴이 아니다. 이것은 네 마음속에 있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네가 만든 허상일 뿐."
염라의 손짓 한 번에 공들여 그린 그림은 순식간에 시퍼런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어버린다.
"너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몸이 튕겨져 나간다. 바닥을 뒹구는 눈앞에 거대한 거울, 업경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 10단계: 위기 압박 (악재가 몰려옴)
업경대. 생전의 죄를 비추는 거울. 사람 키의 열 배는 되는 거대한 청동 거울이 공중에 떠 있다. 표면이 물결치듯 일렁이더니 서서히 형상이 맺힌다. 거울 속에 삼 년 전의 자신이 있다. 비싼 안료를 사기 위해 돈을 흥청망청 쓰고 있다. 최고급 주사, 석청, 금박. 한 점의 탱화를 완성하기 위해 한 달 생활비를 통째로 안료에 쏟아붓는다. 그리고 그 뒤에 누이 연화가 보인다. 오라비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밤낮으로 남의 집 빨래를 하고 짐을 나른다. 손이 갈라지고 허리가 휜다. 기침이 시작되어도 약 한 첩 지어 먹지 못한다.
"오라버니 그림 그릴 물감 사야 해..."
웃는 누이. 그 웃음 뒤에 감춰진 고통을 왜 몰랐을까. 아니, 알면서도 외면한 것이다. 거울은 더 잔인한 진실을 보여준다. 누이가 피를 토하는 밤. 약을 사러 가겠다고 뛰쳐나간 자신이 도착한 곳은 약방이 아니라 화방이었다. 마침 구하기 어려운 안료가 들어왔다는 소식에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그리로 향한 것이다. 불과 반 각. 하지만 그 반 각의 지체가 약을 쓸 마지막 시간을 빼앗았다.
'누이는 역병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가난과 과로, 그리고 오라비라는 짐 때문에 병을 얻어 죽은 것이었다. 누이를 죽인 건 염라대왕도, 역병도 아니었다. 바로 나, 도원이었다. 나의 무능과 예술에 대한 이기심이 하나뿐인 혈육을 잡아먹은 것이다.'
숨이 막혀온다. 죄책감이 거대한 뱀처럼 목을 조여온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긁는다.
"아냐... 내가 죽인 게 아냐..."
부정하고 싶지만 거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저주했던 신은 죄가 없었다. 진짜 악귀는 바로 나였다.'
능화지는 점점 검게 변해 가고, 노승이 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붓을 쥔 손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그려야 한단 말인가. 살인자인 내가 감히 누구를 단죄하고, 누구를 구원한단 말인가.'
※ 11단계: 최악의 순간 (모든 게 끝난 듯)
"나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다..."
툭, 하고 붓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쇠붙이가 돌바닥에 떨어지는 것처럼 차갑고 건조한 소리가 울린다.
'자신의 추악한 죄를 직면한 화공에게 그림은 더 이상 구원이 아니라 형벌이다. 붓을 잡을 자격조차 없다.'
두 손을 내려다본다. 이 손이 누이를 죽였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겠다는 욕심이 담긴 이 손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놓아버렸다. 저 멀리, 업화 속으로 걸어가는 누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발목에 채워진 쇠사슬이 짤그랑거리며 끌려간다. 한 걸음, 한 걸음, 불꽃을 향해.
"안 돼, 연화야, 가지 마..."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목구멍이 막혀 공기조차 통하지 않는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일어설 수도, 기어갈 수도 없다.
'모든 것이 끝났다. 누이를 구하기는커녕, 내 죄를 확인하고 그녀를 두 번 죽이고 말았다. 절망이라는 단어조차 사치스럽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눈물이 바닥의 차가운 돌 위에 떨어져 작은 얼룩을 만든다.
"차라리 나를 저 불구덩이에 던져다오... 나를 찢어 죽여다오..."
바닥에 머리를 쳐박고 짐승처럼 오열한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였습니다... 제발..."
이마가 깨져 피가 눈을 가리지만 멈추지 않는다. 삼 년 전에 하지 못했던 참회가, 삼 년 동안 술로 눌러왔던 죄가, 터진 둑처럼 쏟아져 나온다.
'이곳이 지옥이라면, 여기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 누이 대신 내가 저 쇠사슬을 차야 한다. 내가 저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 12단계: 영혼의 밤 (깊은 절망)
칠흑 같은 어둠 속, 바닥까지 떨어진 자신을 응시한다. 눈물도 마르고, 비명도 다하고, 남은 것은 텅 빈 껍데기뿐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 시진인지, 하루인지, 백 년인지 알 수 없다. 그때, 불타는 업화 속에서 누이가 뒤를 돌아보는 것이 보인다. 불길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고통스러운 표정이 아니다. 그녀가 미소 짓는다.
"오라버니의 그림은... 언제나 따뜻했어."
그 목소리가 맑은 종소리처럼 지옥의 소음을 뚫고 들려온다. 오래전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가난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살던 시절. 겨울밤, 찬 방에서 오들오들 떠는 누이에게 그림을 그려 주었다. 작은 들꽃 한 송이. 비싼 안료는 없었으니 땅바닥의 흙과 부엌의 숯, 마당에 떨어진 꽃잎을 갈아 만든 허름한 물감으로 그린 들꽃. 그 그림에는 화려한 기교도, 값비싼 재료도 없었지만 사랑이라는 진심이 있었다. 누이는 그 그림을 가슴에 품고 잠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이야."
'잊고 있었던 것. 그림은 세상을 비웃는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이어야 했다.'
그 순간, 머릿속을 번개처럼 관통하는 깨달음이 있다.
'염라대왕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죄지은 자를 비추는 거울이자, 그 죄를 씻겨주기 위해 가장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자비로운 존재다.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꾸짖을 때 매를 드는 것처럼, 염라 또한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지옥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지장보살이 지옥에 남아 모든 중생이 성불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듯이, 염라대왕이 곧 지장보살의 화신이라는 것을.'
'그래, 내가 그려야 할 것은 공포가 아니다. 슬픔이다. 죄지은 중생을 바라보는 신의 슬픔. 벌을 내리면서도 아파하는 아비의 슬픔이다.'
※ 13단계: 3막 진입 (다시 일어섬)
다시 붓을 잡는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붓이 손에 닿는 순간, 차가웠던 몸에 온기가 돌아온다. 먹이 다 말라버렸다. 먹물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다.
'상관없다.'
망설임 없이 검지 손가락을 깨문다. 이빨이 살을 뚫고 뼈에 닿는 듯한 통증이 팔 전체를 타고 올라오지만 개의치 않는다. 비릿한 피 맛과 함께 붉은 선혈이 솟구친다. 피 묻은 손가락을 붓끝에 적신다. 누런 짐승의 털로 만든 붓이 선혈을 빨아들이며 붉게 물든다.
'나의 피로 그릴 것이다. 나의 진심으로, 나의 참회로, 남은 생명을 모조리 쏟아부어 그릴 것이다.'
떨리지 않는 손으로 검게 변해버린 능화지 위에 선을 긋기 시작한다. 첫 획은 느리지만 확고하다. 공포가 아닌 슬픔을, 분노가 아닌 연민을 담아 붓을 움직인다.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이 아니라, 세상 모든 고통을 짊어진 고뇌하는 왕의 얼굴을 그린다. 눈을 그린다. 세상의 모든 죄를 보아야 하는 눈. 보고 싶지 않아도 결코 감을 수 없는 눈. 그 눈가에 눈물 한 줄기를 더한다. 입을 그린다. 벌을 선고해야만 하는 입.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의 비통함이 서린 굳게 다문 입.
붉은 피가 종이에 스며들며 기이한 빛을 발한다. 검게 변했던 능화지가 피를 먹으며 서서히 원래의 빛을 되찾는다. 한 획 한 획 목숨을 걸고 그린다. 죄를 씻어내는 마음으로, 누이를 향한 사랑으로. 손끝에서 피가 멈추면 다시 깨물어 짜낸다.
'이것은 내 생애 마지막 그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생애 최초의 진짜 그림이 될 것이다.'
※ 14단계: 결말 (클라이맥스 해결)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었다. 능화지 위에는 뿔 달린 악귀가 아닌, 눈가에 붉은 눈물을 머금은 채 중생을 내려다보는 장엄한 염라대왕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무서우면서도 슬프고, 엄하면서도 자비로운 얼굴. 관을 쓰고 홀을 쥔 왕의 형상이되, 그 눈빛에는 만겁의 세월 동안 지옥을 지켜온 존재의 무한한 슬픔이 서려 있다. 그것은 염라이자 곧 지장보살의 형상이다. 화공의 피로 그려진 신의 얼굴이다.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능화지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 처음에는 실오라기 같던 빛이 점차 거세져 시왕청 전체를 가득 채운다. 기둥이 진동하고, 장막이 빛에 녹아내리듯 스러진다.
그리고 장막이 걷히며 염라대왕이 현신한다. 그림과 똑같은 슬픈 눈을 한 채. 거대하되 위압적이지 않고, 엄하되 차갑지 않은 존재가 앞에 앉아 있다.
"네가 드디어 나를 보았구나. 네 죄를 뉘우친 그 마음이, 곧 나의 진짜 얼굴이다."
염라의 굵은 눈물 한 방울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그 한 방울이 바닥에 닿는 순간 파문이 퍼져나가듯 지옥의 불길이 사그라든다. 타오르던 업화가 꽃비처럼 흩어지고, 누이의 발목을 옥죄던 쇠사슬이 가루가 되어 바스러진다.
"오라버니... 고마워."
누이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삼 년 만에 보는 그 미소.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온전한 미소다. 그녀의 몸이 하얀 빛으로 산산이 부서지더니, 이내 한 마리 하얀 나비가 되어 지옥의 천장 너머로 훨훨 날아간다.
"잘 가라... 연화야... 미안하다... 사랑한다..."
바닥에 엎드려 오열한다. 하지만 그것은 삼 년 전의 눈물과는 다르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의 눈물이다.
※ 15단계: 마지막 장면 (파이널 이미지)
다시 현실의 화실. 창호지 문을 뚫고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능화지 위에 쏟아진다. 종이에는 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압도적이면서도 자비로운 염라대왕도가 그려져 있다. 붉은 핏빛 선이 아침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난다.
'꿈이었을까. 아니, 내 손가락에 남은 깊은 이빨 자국과 붓끝에 묻은 검붉은 핏자국이 모든 게 현실이었음을 말해준다.'
붓을 내려놓고 깊은숨을 내쉰다. 방 안 가득했던 썩은 술 냄새는 간 곳 없고, 은은한 묵향만이 감돈다.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술병들이 아침 빛 아래서 초라하게 빛난다. 자리에서 일어나 화실의 창문을 활짝 연다. 상쾌한 아침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한양 도성의 지붕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새소리가 들린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듣는 새소리다.
'더 이상 술은 필요 없다. 나는 이제 돈을 위해 그리지 않을 것이다. 내 붓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죄를 씻는 도구가 될 것이다. 그것이 누이가 남긴 마지막 말의 뜻이었음을, 이제야 안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능화지 위의 염라대왕 그림, 그 붉은 눈물이 맺힌 눈가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나비의 날개가 천천히 접혔다 펼쳐진다. 마치 누이가 손끝으로 쓰다듬어 주는 것만 같다. 입가에 처음으로 편안한 미소가 번진다.
'이것은 내 생애 최고의 명작이자, 나 스스로에게 바치는 참회의 기록이다.'
엔딩 (300자 이내)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공 도원이 그린 염라대왕도는 한양에서 가장 큰 사찰에 봉안되었다고 한다. 그 그림 앞에 서면 누구든 이유 모를 눈물을 흘렸고, 마음속 깊이 숨겨 둔 죄를 고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 위에는 늘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앉아 있었는데, 아무리 쫓아도 날아가지 않았다고 전한다. 도원은 이후 다시는 춘화를 그리지 않았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그림은 손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