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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들과 말이 통하는 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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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짐승과 말이 통한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미친 무당'이라 손가락질받던 고아 처녀 다래. 어느 날, 그녀를 유일하게 품어주던 늙은 농부가 벼랑에서 떨어져 숨지고, 외양간의 늙은 소가 피눈물을 흘리며 끔찍한 살인의 진실을 털어놓습니다. 게다가 산에서 수만 마리의 쥐 떼가 쏟아져 내리며 거대한 산사태까지 경고하는데…! 짐승의 말을 알아듣는 처녀는 과연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마을을 덮친 대재앙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말 못 하는 미물이 전하는 인과응보의 감동 야담, 지금 시작합니다.

    ※ 1: 미친 무당이라 불린 처녀

    충청도 어느 첩첩산중, 해가 일찍 지고 달이 늦게 뜨는 깊고도 후미진 산골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뒤편으로는 마치 거대한 병풍이라도 쳐놓은 듯, 깎아지른 듯 가파르고 험악한 토산이 시커멓게 솟아 있어 사시사철 서늘한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산세가 워낙 험하고 골짜기가 깊다 보니, 마을 사람들은 늘 산신령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며 폐쇄적이고 미신에 기대어 살아가는 곳이었지요. 이 차갑고 척박한 마을 어귀, 찬 바람이 쉴 새 없이 들이치는 낡고 허름한 외딴 오두막에는 올해로 열아홉 살이 된 고아 처녀 다래가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다래는 맑고 커다란 눈망울에 티 없이 고운 자태를 지닌 처녀였으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걸음을 쫓기듯 재촉하거나 땅바닥에 침을 탁탁 뱉으며 삿대질을 해대곤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 다래는 그저 귀신이 단단히 씌어 재앙을 불러오는 '미친 무당년'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래에게는 아주 어릴 적부터 남들에게는 없는 기이하고도 신비한 능력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숲을 누비는 길짐승과 하늘을 나는 날짐승, 심지어 발밑을 기어 다니는 아주 작은 벌레들의 소리까지 마치 사람의 또렷한 말소리처럼 알아듣고 그들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래의 귀에는 세상의 모든 미물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허공에 대고 홀로 중얼거리는 다래를 보며 소름 끼쳐 했고, 짐승들과 교감하는 그녀를 기이한 요물로 취급했습니다.

    어느 몹시도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다래가 땔감을 구하러 깊은 산속에 들어갔을 때, 산중턱에서 사냥꾼이 쳐놓은 덫에 걸려 다리몽둥이가 부러진 채 피를 철철 흘리는 어린 고라니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고라니는 살려달라며 구슬프게 울부짖고 있었고, 그 처절한 목소리를 들은 다래는 짐승의 피와 진흙으로 자신의 옷이 엉망이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덫을 맨손으로 비틀어 열었습니다. 그러고는 덜덜 떠는 고라니를 품에 안고 내려와, 약초를 정성스레 찧어 바르고 자신의 낡은 치맛자락을 찢어 상처를 동여매 주었습니다. 그리고 짐승들이 덫에 걸려 억울하게 죽어간다는 하소연을 듣고는, 온 산을 뒤져 사냥꾼들이 숨겨놓은 올무와 덫을 모조리 치워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사냥꾼들과 사내들은 분노로 길길이 날뛰며 다래의 오두막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다래를 마당으로 꿇어앉히고는 무자비하게 돌팔매질을 해대며 모진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에잉, 저 몹쓸 미친년! 귀신 씐 요물 단지 같은 년! 짐승 새끼들하고 쑥덕거리더니 기어코 온 마을 사람들 밥줄까지 싹 다 끊어 놓으려 드네! 저년이 우리 마을에 있는 한 산신령이 노해서 큰 재앙이 내릴 것이여! 당장 이 마을에서 흠씬 두들겨 패 내쫓아야 혀!"

    날아오는 짱돌에 맞아 이마가 찢어지고 붉은 피가 뺨을 타고 흘러내려도, 다래는 겁에 질린 고라니를 등 뒤로 숨긴 채 사람들을 원망 없는 슬픈 눈으로 그저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사람의 뾰족한 말보다 짐승의 투명하고 솔직한 마음을 먼저 배운 그녀에게, 인간 세상은 너무나도 차갑고 두려운 가시밭길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다래를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하며 짐승 부리듯 멸시할 때, 이 얼음장 같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다래를 사람으로 대접해 주고 따뜻한 곁을 내어준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을 한가운데서 평생 흙을 파먹으며 작은 옥토를 일구고 살아가는 늙고 주름진 농부 김 첨지와, 그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핏덩이 같은 일곱 살배기 어린 손주 돌이였습니다.

    "쯧쯧쯧… 가여운 것. 사람들이 몰인정하게 돌을 던져대니 속도 상하고 무섭고 서러웠지유? 이리 와서 아궁이 불 좀 쬐고, 이 따순 밥이나 한 술 크게 뜨고 가유. 남들 삿대질하고 눈치 볼 거 하나도 없어유. 짐승 말 좀 알아듣는 게 대체 무슨 그리 큰 대역죄라고, 다 똑같이 숨 쉬고 사는 처지에 저리들 모질게 구는지 원… 내 속이 다 시커멓게 타들어 가네."

    김 첨지는 구수하고 정겨운 충청도 사투리를 쓰며, 상처투성이가 된 다래를 가만히 집 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는 귀한 가마솥 밥을 고봉으로 꾹꾹 눌러 담아 다래의 거친 손에 쥐여주곤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그 따뜻한 품성을 그대로 빼닮은 돌이 역시 다래의 해진 치마폭에 매달려, 산새들이 오늘은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토끼들은 숲속에서 무얼 먹고 사는지 꺄르르 웃으며 묻곤 했습니다. 다래에게 김 첨지네 집은 세상의 매서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소중한 안식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집 외양간에는 김 첨지와 평생을 함께 밭을 갈고 짐을 날라온, 크고 순한 눈망울을 가진 늙은 소 누렁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누렁이는 다래가 다가오면 그 무거운 고개를 들어 긴 혀로 다래의 상처 난 손등을 부드럽게 핥아주며, 사람들은 절대 듣지 못하는 깊고 그윽한 목소리로 다래에게 인사를 건네곤 했습니다.

    '다래야, 쯧쯧… 오늘도 그 여린 몸에 상처가 참으로 많구나.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았느냐. 우리 마음씨 좋은 영감이 지어준 따뜻한 밥 많이 먹고 어서 기운을 차리렴. 네 마음이 세상 누구보다 곱고 따뜻하다는 건 하늘이 알고 땅이 다 안단다. 울지 말아라, 아가.'

    다래는 누렁이의 넓고 단단한 이마에 얼굴을 비비며 남몰래 꾹꾹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아냈습니다. 듬직한 누렁이의 곁에 가만히 기대어 있으면, 세상의 모든 시름과 아픔이 눈 녹듯 잊히는 듯했습니다. 김 첨지의 대가 없는 따뜻한 보살핌과 천진난만한 손주 돌이의 웃음소리, 그리고 말 못 하는 늙은 소 누렁이와의 깊은 영적인 교감은, 다래가 이 모진 세상을 하루하루 버텨내는 유일한 빛이자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평화롭고 따스했던 어느 늦은 가을날 해 질 녘, 핏빛처럼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 사이로 다래의 오두막 앞마당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 까치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앉았습니다. 평소 반가운 손님을 부르는 경쾌한 울음소리가 아니라, 마치 피를 토하며 절규하듯 찢어지는 흉하고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빈 마당을 섬뜩하게 울렸습니다.

    '피 냄새가 난다! 억울한 피 냄새가 진동을 한다! 까악! 까악! 검고 썩은 마음이 저 산비탈을 타고 다가온다! 큰비가 쏟아지고 죽음이 내릴 것이다!'

    까치의 불길하고도 소름 끼치는 경고에 다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숨이 턱 막혔습니다. 불안하게 요동치는 눈빛으로 서산 너머로 흉흉하게 떨어지는 시뻘건 해를 바라보며, 다래는 곧 다가올 거대하고도 무자비한 비극의 그림자가 이 평온한 마을을 통째로 덮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몸을 바들바들 웅크렸습니다.

    ※ 2: 벼랑 아래 떨어진 김 첨지

    까치의 흉흉하고 찢어지는 울음이 온 마을의 밤공기를 휩쓸고 지나간 다음 날 아침, 마을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짙고 축축한 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인 이른 새벽, 산나물을 캐러 바구니를 들고 산에 올라갔던 어느 아낙의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이 토산의 무거운 정적을 갈기갈기 찢어발겼습니다. 놀란 마을 사람들이 잠결에 헐레벌떡 뛰어 올라간 곳은, 마을 뒤편의 아찔하게 높고 가파른 벼랑 아래였습니다. 그곳에는 마을에서 가장 인자하고 부지런하여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노인, 김 첨지가 뾰족한 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붉은 피를 흥건하게 흘린 채 싸늘하게 굳은 주검이 되어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습니다. 평소 산나물을 캐고 나무를 하러 산길을 제집 안방 드나들듯 훤히 알고 있던 노인이었기에, 어찌하여 비 오는 늦은 밤 그 험한 벼랑 끝까지 올라가 굴러떨어졌는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곧이어 소식을 듣고 관아에서 파견된 게으른 아전들과 오작사령이 귀찮다는 듯 하품을 해대며 대충 시신을 살폈습니다. 그들은 시신의 상처를 꼼꼼히 살피지도 않은 채, 겉으로 보기에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지며 바위에 머리를 부딪힌 것이 분명하다며 서둘러 결론을 지으려 했습니다.

    "쯧쯧, 노인네가 비 오는 밤에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무얼 하러 산에 올랐누. 밤눈이 어두워 이끼 낀 바위를 헛디뎠구먼.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명백한 실족사이니, 더 이상 조사할 것도 없이 서둘러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나 치르도록 하여라. 사또 나리도 안 계신 마당에 괜히 시끄럽게 일 키울 것 없다."

    그렇게 김 첨지의 억울하고도 허망한 죽음은 한순간의 안타까운 사고로 철저히 덮여버리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차갑게 식어버린 시신을 작은 두 팔로 부둥켜안고 목이 터져라 통곡하는 일곱 살 돌이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온 마을을 슬픔으로 물들였습니다.

    "할아버지! 눈 좀 떠봐유! 나 두고 어디 가유, 할아버지이!"

    하루아침에 하늘 같던 유일한 핏줄인 할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된 가여운 돌이를 보며 동네 사람들은 동정의 혀를 찼지만, 자신들의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그 누구 하나 선뜻 그 가여운 핏덩이를 책임지고 거두겠다고 나서는 이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비극적인 순간을 오래전부터 간절히 기다렸다는 듯,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비열한 미소를 띠며 나타난 자가 있었으니, 바로 마을의 모든 상권을 쥐고 흔드는 토호이자 가장 많은 땅을 거머쥐고 있는 탐욕스러운 권 부자였습니다.

    "아이고, 참으로 애통하고 원통한 일이로다! 심성이 그리 고왔던 김 첨지 영감이 어찌 이리 허망하게 세상을 뜬단 말인가! 돌이야, 쯧쯧. 이 가여운 것,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네 할아비가 생전에 내게 빌린 돈이 제법 있어 남기고 간 저 문전옥답은 빚을 대신해 내가 잘 거두어 관리해 줄 터이니. 네 녀석은 당분간 갈 곳도 없을 터, 내 집 넓은 하인 방에서 땔감이나 패고 잔심부름이나 하며 밥이나 든든히 얻어먹고 살면 될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

    권 부자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거짓 눈물을 흘려 슬퍼하는 척 연기를 해댔지만, 그의 번뜩이는 탐욕스러운 시선은 이미 김 첨지가 평생을 피땀 바쳐 기름지게 일구어놓은 탐스러운 옥토를 향해 꽂혀 있었습니다. 사실 권 부자는 오래전부터 마을 한가운데 노른자위처럼 자리 잡은 김 첨지의 땅을 빼앗아 자신의 영지로 합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김 첨지가 헐값에 땅을 넘기라는 권 부자의 끊임없는 협박과 회유를 번번이 단호하게 거절해왔던 터라, 꼬장꼬장한 노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권 부자에게는 앓던 이가 시원하게 빠진 격이었습니다. 권 부자는 노인의 장례가 채 끝나기도 전에 건장하고 험악한 하인들을 시켜 김 첨지의 땅 가장자리에 거대한 말뚝을 박아버렸고, 관아의 부패한 아전들에게 뇌물을 먹여 집문서와 땅문서를 강제로 빼앗아 제 이름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쫓겨나다시피 권 부자네 행랑채로 멱살이 잡혀 끌려간 돌이의 운명은 지옥보다 더 참혹했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몸보다 큰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려야 했고, 조금이라도 지쳐 쓰러지면 하인들의 모진 매질이 떨어졌습니다. 다래는 멀리서 커다란 고목나무 뒤에 숨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매를 맞고 울먹이는 돌이의 가녀린 뒷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가슴을 치며 피눈물을 쏟아야만 했습니다. 미친 무당이라 손가락질받는 비천한 자신이 당장 달려가 나섰다가는, 권 부자의 심기를 거슬러 가여운 돌이가 뼈도 추리지 못할 만큼 더 큰 핍박을 받을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끔찍한 비극 속에서, 그 누구보다 가장 깊은 슬픔과 분노에 잠긴 것은 바로 김 첨지의 오랜 벗이자 평생의 동반자였던 늙은 소, 누렁이였습니다. 김 첨지가 피투성이가 되어 벼랑 아래서 발견된 그날부터, 누렁이는 어둡고 축축한 외양간 구석에 풀썩 주저앉아 찰진 여물도, 맑은 우물물도 일절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누렁이의 커다랗고 맑은 두 눈에서는 끊임없이 굵고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져 짚단 위를 축축하게 적셨고, 초점을 잃은 텅 빈 시선은 오직 김 첨지가 떨어져 죽은 저 험악하고 높은 토산의 벼랑 끝만을 원망스럽고 애처롭게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밤이 깊어 사위가 고요해지면, 누렁이는 하늘을 향해 무거운 목을 길게 빼고 온 산천이 떠나가라 가슴을 찢는 듯한 길고 구슬픈 울음을 짐승처럼 토해냈습니다.

    음모오오-

    그것은 배가 고파 우는 단순한 짐승의 울부짖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끔찍하고 잔혹한 진실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가슴에 품고 있으나, 차마 사람의 언어로 뱉어내지 못해 답답함에 피를 토하는 짐승의 절규였습니다. 그 한 맺힌 구슬픈 울음소리는 매일 밤 마을 전체를 유령처럼 배회하며 사람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지만, 오직 단 한 사람, 미친 처녀 다래만이 그 처절한 울음 속에 담긴 진짜 의미를 직감하고 서서히 진실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 3: 소가 눈물로 전한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곯아떨어진 깊고 고요한 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다래는 숨소리조차 죽인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김 첨지네 빈집의 낡은 외양간으로 향했습니다. 며칠째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해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늙은 누렁이는, 인기척을 느끼자 바닥에 누운 채 힘없이 고개를 들어 다래를 쳐다보았습니다. 누렁이의 커다랗고 맑은 눈망울에는 주인을 잃은 깊은 슬픔을 넘어선, 지독한 원한과 억울함이 시퍼렇게 서려 있었습니다. 다래는 말없이 다가가 차갑게 식어가는 누렁이의 거친 목덜미를 두 팔로 꽉 껴안았습니다. 다래의 따뜻한 체온과 눈물이 맞닿는 순간, 누렁이의 가빠지던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며, 다래의 머릿속으로 누렁이가 똑똑히 목격한 그 비 내리던 밤의 끔찍하고도 선명한 기억들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다래야… 내 말을 들어다오. 우리 불쌍한 영감은 절대 빗길에 미끄러지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돌아가신 게 아니란다. 억울하게, 참으로 원통하고 억울하게 돌아가셨어.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내 두 귀로 그 악마 같은 자들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어…'

    누렁이의 깊고 슬픈 영적인 파동을 통해, 다래의 눈앞에 며칠 전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 밤의 끔찍한 광경이 환상처럼 너무나도 생생하게 펼쳐졌습니다. 그날 밤, 쏟아지는 비를 피해 벼랑 근처 커다란 바위틈에 임시로 묶여 있던 누렁이의 시야에, 삿갓을 깊게 눌러쓰고 비옷을 겹겹이 두른 두 사내의 거무스름한 그림자가 김 첨지를 벼랑 끝으로 거칠게 몰아붙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횃불의 희미한 빛에 드러난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을의 권력자 권 부자와 그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덩치 크고 악독한 하인 억보였습니다. 권 부자의 손에는 다 구겨진 김 첨지의 땅문서가 들려 있었고, 억보의 손에는 빗물에 씻겨 번쩍이는 서슬 퍼런 낫이 들려 있었습니다.

    '어허, 김 첨지. 이보시게. 늙은이가 어찌 이리 눈치가 없고 고집이 센가. 내 좋게 말할 때 이 문서에 지장을 꾹 찍으시게나. 곧 겨울이 닥칠 터인데 며칠 굶은 핏덩이 같은 손주 녀석 입에 따뜻한 쌀밥이라도 밀어 넣어줘야 할 것 아니오? 이깟 죽으면 가져가지도 못할 흙덩이가 대체 무어라고 내 호의를 무시하며 그리 고집을 부리시는가.'

    권 부자의 능글맞고도 비열한 목소리가 빗소리를 날카롭게 뚫고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김 첨지는 이미 억보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 끔찍한 얼굴로도, 끝까지 땅문서를 쥔 권 부자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으며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안 돼유! 절대 안 돼유! 그 땅이 어떤 땅인데… 우리 돌이 에미 애비가 밤낮없이 피땀 흘려 일구다 억울하게 죽어간 땅이유! 내 죽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땅만은 당신 같은 흡혈귀한테 못 내놓아유! 우리 불쌍한 돌이 몫으로 유일하게 남겨둔 거란 말이유! 권 부자, 당장 그 문서 이리 내놔유! 하늘이 무섭지도 않슈!'

    김 첨지가 필사적으로 다리에 매달리며 발악하자, 권 부자는 극도로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등 뒤에 선 억보를 향해 턱짓을 까닥했습니다. 그 잔인하고 서늘한 눈빛의 의미를 단숨에 알아챈 억보는, 망설임 없이 거칠고 무자비한 발길질로 김 첨지의 마른 가슴팍을 사정없이 걷어찼습니다.

    '에잇, 퉤! 냄새나는 늙은이가 명줄 긴 줄 모르고 더럽게 귀찮게 구네! 땅이 그리 좋으면 지옥 밑바닥에나 가서 평생 흙이나 실컷 파쇼!'

    억보의 솥뚜껑같이 억세고 두꺼운 두 손이 김 첨지의 앙상한 어깨를 강하게 밀쳤고, 김 첨지는 저항할 새도 없이 "아악!" 하는 짧은 외마디 비명조차 빗소리에 묻힌 채 아득하고 시커먼 벼랑 아래로 힘없이 떨어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쿵' 하고 바위에 둔탁하게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빗물 위로 검붉은 피가 참혹하게 번져가는 광경을, 누렁이는 바위틈 기둥에 목이 묶인 채 핏발 선 두 눈을 부릅뜨고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스란히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다래야… 우리 가여운 영감의 억울한 한을 제발 풀어다오.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독한 무리들이 언젠가 이 땅의 진짜 주인인 우리 돌이마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지도 모른단다. 제발, 제발 세상 사람들에게 이 잔혹한 진실을 알려다오. 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영감의 원수를 갚아다오.'

    끔찍한 환상에서 깨어난 다래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잔혹하고 구역질 나는 진실에 숨이 막혀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점잖은 양반 행세를 하던 권 부자가 한낱 땅뙈기를 탐내 노인을 잔인하게 밀어 죽이고, 관아를 매수해 그 모든 것을 단순한 실족사로 위장했다니! 마을에서 하늘을 찌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권 부자의 끔찍한 살인 행각을 알아버린 다래의 심장은 지독한 공포로 미친 듯이 요동쳤습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알아서는 안 될 끔찍한 진실을 알아버렸어. 하지만… 하지만 관아에 고발한들 도대체 누가 미천한 내 말을 믿어줄까? 사람들은 나를 미친 무당년이라 부르며 돌을 던지는데. 목격자이자 증인이라고는 사람의 말을 뱉지 못하는 늙은 소 한 마리와, 귀신 들렸다고 손가락질받는 처녀뿐인데… 관아에 달려가 피를 토하며 고변을 한다 한들, 이미 권 부자의 뇌물에 푹 찌든 썩어빠진 아전들이 콧방귀나 뀔까. 오히려 날 무고죄로 몰아넣어, 나마저 권 부자의 하인들 손에 소리소문없이 끌려가 벼랑 밑으로 던져져 죽어 나갈지도 몰라.'

    본능적인 죽음의 두려움이 온몸을 납덩이처럼 짓눌렀지만, 다래의 뇌리에는 한겨울 얼어붙은 손을 녹여주며 언제나 고봉밥을 내어주던 김 첨지의 주름진 미소와, 지금 이 순간에도 권 부자네 마당에서 차가운 비를 맞으며 매질을 당하고 있을 가여운 돌이의 퉁퉁 부은 얼굴이 아른거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파고들어 애처롭게 피눈물을 쏟아내는 늙은 소 누렁이의 절박한 심장 박동이 다래의 꽁꽁 굳어있던 심연의 용기를 일깨웠습니다. 평생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그림자처럼 숨어 살았던 다래였지만, 생명을 걸고 호소하는 짐승의 진실된 마음 앞에서는 차마 고개를 돌려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다래는 입술이 터져 피가 나도록 꽉 깨물며 굳게 결심했습니다. 설령 이 하찮은 목숨이 갈가리 부서지고 찢겨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해도, 반드시 저 추악한 악인들의 가면을 벗겨내고 김 첨지의 원한을 풀어주리라고.

    ※ 4: 그 말을 누가 믿으랴

    이튿날 새벽, 동이 채 트기도 전에 날이 밝기가 무섭게 다래는 밤새 헝클어진 머리를 무명천으로 질끈 동여매고 험한 산길을 미친 듯이 내달려 고을 관아로 향했습니다. 공포와 긴장감으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거칠게 쿵쾅거렸지만, 억울하게 죽은 김 첨지와 모진 고초를 겪고 있을 돌이, 그리고 피눈물을 흘리던 누렁이를 생각하며 애써 두려움을 삼키고 또 삼켰습니다. 이윽고 관아의 육방청 앞 너른 마당에 이르러, 다래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차가운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리쳤습니다.

    "원통하옵니다! 사또 나리, 제발 이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시옵소서! 며칠 전 벼랑에서 떨어져 돌아가신 김 첨지 할아버지의 죽음은, 결코 밤눈이 어두워 발을 헛디뎌 떨어진 것이 아니옵니다! 권 부자와 그의 잔인한 하인 억보가 문서와 땅을 몽땅 빼앗기 위해, 무고한 노인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워 밀어 죽인 명백한 살인이옵니다! 제발 이 억울하고 참혹한 살인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조사하여 죗값을 물어 주시옵소서!"

    다래의 찢어지는 듯한 처절한 고변에 관아 마당이 잠시 찬물을 끼얹은 듯 섬뜩하리만치 조용해졌습니다. 청소하던 사령들도 빗자루를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누각 마루에 비스듬히 누워 곰방대를 빨던 늙고 탐욕스러운 형방 아전이 코웃음을 치며 느릿느릿 걸어 나왔습니다.

    "허허, 아침 댓바람부터 이게 어느 마을 미친년이 기어와 행패인가 했더니, 짐승 새끼들하고 소꿉장난이나 치며 귀신 씌었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 다래 년 아니더냐? 네 이년, 감히 뉘 안전이라고 터진 주둥이로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전임 사또께서 떠나시고 신임 사또 나리께서 부임하시기도 전이라 관아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요망하고 가벼운 입을 놀려 관아를 능멸하려 들어?"

    "진실이옵니다! 제가 그날 밤의 모든 진실을 다 듣고 보았사옵니다! 김 첨지네 늙은 소 누렁이가 벼랑 밑에 묶여 있다가, 그날 밤 권 부자와 억보가 저지른 끔찍한 악행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제게 한 치의 거짓 없이 말해주었사옵니다!"

    다래의 입에서 기어코 '소가 나에게 말해주었다'는 황당한 소리가 튀어나오자, 관아 마당에 모여 있던 아전들과 사령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배를 잡고 미친 듯이 박장대소를 터뜨렸습니다.

    "푸하하하! 아이고, 내 배야! 소가 말을 해? 늙은 소가 말을 한다고? 미친 줄은 알았지만 단단히 돌았구먼! 야 이 미친년아, 차라리 지나가는 개구리가 천자문을 읊고, 똥개가 시조를 읊는다고 해라! 감히 어디서 평소 행실이 올바르시고 점잖으신 권 부자 어르신을 살인귀로 모함해?"

    조롱과 멸시가 화살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어느새 발 빠른 사령의 연락을 받고 헐레벌떡 달려온 권 부자가 겉으로는 한없이 인자하고 억울한 얼굴을 가장하며 관아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는 능구렁이 같은 표정으로 혀를 차며, 소매 밑으로 형방 아전의 손에 묵직한 엽전 꾸러미를 슬쩍 찔러주었습니다.

    "쯧쯧쯧, 참으로 가엾고 불쌍한 처녀로구나. 부모 없이 홀로 자라며 며칠씩 굶어대더니 결국 헛것이 보이고 환청이 들리는 모양이네. 사또 나리도 안 계신데 이 미친년이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로 신성한 관아를 어지럽히니, 내 마을 어른으로서 참으로 낯이 뜨겁고 부끄럽소이다. 짐승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요망한 재주로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동냥질이나 하던 년이, 이제는 억울하게 명을 달리한 김 첨지를 핑계로 내게 돈을 크게 뜯어내려 저열한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니겠소. 내 당장이라도 저년을 포도청에 넘겨 무고죄로 다스리고 싶으나, 내일이 마침 내 환갑 생일잔치라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 그만 적당히 쫓아내 주시오."

    권 부자의 능수능란한 거짓말과 손에 쥐여진 뇌물의 묵직함에 형방 아전은 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 호통을 쳤습니다.

    "네 이놈들! 당장 저 미친 무당년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주리를 틀고 매질을 하지 않고 뭣들 하느냐! 감히 선량한 양반을 모함하여 뜯어먹으려 들고, 관아의 위신을 능멸한 죄, 몽둥이로 뼈저리게 다스려 두 번 다시 헛소리를 짓지 못하게 할 것이다!"

    건장한 사령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다래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마당 한가운데로 내동댕이쳤습니다. 거칠고 두꺼운 형장 몽둥이가 다래의 여린 등과 허벅지를 무자비하게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악! 아닙니다! 제발… 제발 제 말을 한 번만 믿어주십시오! 소가… 누렁이가 진짜 사람을 죽인 범인을 알고 있단 말입니다! 억울합니다!"

    살갗이 터지고 붉은 피가 흰옷 위로 배어 나와도 다래는 악착같이 진실을 부르짖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숨이 끊어질 듯한 더 잔혹한 매질뿐이었습니다. 결국 반쯤 실신한 상태로 관아 밖 진흙탕에 내동댕이쳐진 다래의 귓가에, 다가온 권 부자가 허리를 굽혀 차갑고 악독한 목소리로 뱀처럼 속삭였습니다.

    "네 이년, 한 번만 더 그 미친 입을 놀려 내 심기를 건드렸다간, 그 유일한 목격자라는 늙은 소 새끼부터 당장 내일 백정의 칼에 목이 뎅겅 달아날 것이다. 내일 내 생일잔치에 그 늙은 소를 잡아 온 마을 사람들에게 푹 고아 고깃국을 대접할 참이니. 소가 죽고 나면, 너 같은 미친년도 밤사이에 멍석에 말려 산짐승 밥이 될 줄 알아라!"

    권 부자는 눈에 가시 같은 증인인 누렁이를 핑계 삼아 잔칫날 잡아먹고, 다래마저 마을에서 영원히 축출하여 모든 끔찍한 진실을 땅속 깊숙이 묻어버릴 참이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하는 차가운 가을비를 맞으며 쓰러진 다래는, 쏟아지는 빗물 속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오열했습니다. 진실을 외치려 발버둥 칠수록 다가오는 것은 거대한 죽음의 위협뿐이었습니다. 당장 내일이면 유일한 목격자인 누렁이의 목이 잔인하게 잘려 나가고, 김 첨지의 억울한 한은 영영 풀리지 않을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절망의 나락으로 속절없이 떨어진 다래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던 바로 그때, 저 멀리 마을 뒷산 거대한 토산 쪽에서부터 기이하고도 스산한 짐승들의 다급한 울음소리와 땅을 뒤흔드는 진동이 다래의 귓전을 맹렬하게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살려달라는 애원이 아니라, 피하라 외치는 거대한 재앙의 전조였습니다.

    ※ 5: 산에서 쏟아져 내린 쥐 떼

    관아 앞마당에서 억울하게 죽도록 매를 맞고 진흙탕 속에 버려진 다래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다음 날, 마을의 하늘은 불길하리만치 무겁고 칙칙한 먹구름으로 겹겹이 뒤덮여 있었습니다. 며칠째 그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질척이던 서늘한 가을비는 어느새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장대비로 변해, 마을 전체를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 무섭고 사납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온몸의 뼈마디가 모조리 부서지고 살점이 찢겨나가는 듯한 끔찍한 고통 속에서 끙끙 앓으며 겨우 눈을 뜬 다래는, 지붕을 때리는 거센 빗소리 사이로 기묘하게 섞여 들어오는 미물들의 다급하고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습니다.

    "찍찍! 찌지직! 도망쳐! 흙이 운다! 흙이 피를 토한다! 거대한 산이 무너져 내린다! 위가 무너진다, 어서 아래로, 더 낮은 곳으로 뛰어!"

    그것은 아주 작고 하찮은 미물들이 내는, 극도의 공포에 질린 처절한 절규였습니다. 다래가 피딱지가 엉겨 붙은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문지방을 기어 마당으로 힘겹게 나섰을 때, 그녀의 퀭한 두 눈 앞에는 평생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기괴하고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마을 뒤편을 병풍처럼 둥그렇게 둘러싼 가파른 토산에서, 셀 수조차 없는 수만 마리의 검은 쥐 떼가 마치 새까만 먹물 강물이 범람하듯 산비탈을 타고 징그럽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쥐 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온기를 좋아해 처마 밑에 아늑하게 집을 지었던 제비들은 아직 깃털도 채 자라지 않은 어린 새끼들을 입에 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험한 하늘을 피해 가장 낮게 날며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고, 마당 구석의 개미 떼마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줄을 지어 자신들의 높은 둥지를 버리고 미친 듯이 낮은 둑을 향해 맹렬한 행렬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짐승과 미물들은 본능적으로 대자연의 파국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수일째 이어진 폭우로 인해 거대한 흙산의 지반이 썩어 들어가, 곧 산 전체가 형체도 없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대재앙이 닥칠 것임을 그들은 미련한 인간들보다 훨씬 먼저 알아채고 살기 위해 도망치는 중이었습니다. 다래의 귓가에는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짐승들의 처절하고도 긴박한 경고가 웅웅거리며 어지럽게 맴돌았습니다.

    '곧 산이 무너진다! 저 끔찍한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모조리 흙더미에 생매장될 것이다! 도망쳐라! 시간이 없다! 산이 운다!'

    다래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가 가시며 하얗게 질렸습니다. 마을은 산비탈 바로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저 거대한 흙산이 무너지면 마을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꼼짝없이 생매장을 당할 끔찍한 참사가 뻔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며 미친 무당이라 조롱하고 핍박했던 일들, 그리고 어제 관아 마당에서 당한 그 모진 매질과 피눈물 나는 억울함이 떠오르며 순간적으로 다래의 발걸음이 무겁게 멈칫했습니다.

    '내가 왜? 도대체 내가 왜 저들을 살려야 한단 말인가. 나를 짐승보다 못한 요물로 취급하고 짓밟았으며, 심지어 유일하게 나를 품어주었던 김 첨지 할아버지의 원통한 죽음마저 콧방귀를 뀌며 비웃은 저 무지하고 악독한 사람들을 내가 어찌 살린단 말인가. 저들은 내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또다시 나를 매질하고 내쫓으려 들 텐데…'

    하지만 그 절망적인 순간, 권 부자네 마당에서 차가운 비를 흠뻑 맞으며 억울한 매를 맞고 있을 가여운 어린 돌이와, 오늘 밤 권 부자의 생일잔치에 짐승들의 고깃국이 될 운명에 처해 칼날 앞에서 슬피 울고 있을 누렁이의 애처로운 두 눈망울이 다래의 찢어진 가슴을 세차게 때렸습니다. 말 못 하는 짐승들조차 살려달라 아우성치며 제 새끼를 물고 뛰는데, 하물며 수백 명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을 어찌 모른 척하고 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래는 입술을 꽉 깨물고 피투성이가 된 치마폭을 움켜쥐며,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미친 듯이 마을 한가운데를 향해 절뚝이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산이 무너집니다! 산이 무너져 내려요! 어서 도망치십시오! 산새들이 떠나고 제비가 도망치고 수만 마리의 쥐 떼가 산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짐승들이 피를 토하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모두 가재도구를 버리고 당장 산 아래 집에서 벗어나 평야로 대피하셔야 합니다! 당장 도망치십시오!"

    다래는 미친 사람처럼 마을 곳곳의 대문을 두드리고 빗속을 뛰어다니며 목이 터져라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비를 피해 따뜻한 방안에 틀어박혀 있던 사람들은 문틈으로 다래의 절규를 듣고도 코웃음만 치며 오히려 역정을 냈습니다.

    "저 미친년이 어제 관아에서 몽둥이찜질을 덜 당했나, 이젠 멀쩡한 산이 무너진다고 헛소리를 쳐대네! 아주 단단히 미쳐 돌아버렸어!"

    "재수 없는 요물 같은 년! 어딜 감히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아침부터 부정 타게 악을 쓰고 지랄이여! 썩 꺼지지 못할까!"

    아무도 다래의 처절한 경고를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늘 저녁 성대한 환갑 잔치를 벌이기로 한 권 부자가, 시끄러운 소리에 심기가 뒤틀려 건장한 하인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다래의 앞을 흉험하게 가로막았습니다.

    "네 이년! 어제 주리를 틀어 그 숨통을 끊어놓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감히 내 귀빠진 날 생일잔치에 재수 없는 곡소리를 내며 초를 치려 들어? 미친 무당년이 마을 사람들을 홀려 흉흉한 소문을 퍼뜨리고 잔치를 망치려 하니, 억보야! 저년을 당장 포박하여 내 집 곳간 구석에 처박아 가두어라!"

    권 부자는 사람들이 산이 무너진다는 말에 현혹되어 대피라도 하면 자신의 화려한 잔치가 망쳐질 것이고, 혹여나 집을 비운 사이 도둑이라도 들어 재물을 잃을까 두려워 대피를 극구 방해하려 들었습니다. 살인귀 억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래를 향해 굵은 밧줄을 들고 짐승처럼 덤벼들던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더러운 손 당장 멈추어라! 수백 백성의 목숨이 달린 중차대한 일에, 한낱 촌부 주제에 뉘라 감히 함부로 백성을 포박하라 명하느냐!"

    거센 빗소리를 단칼에 가르는 서슬 퍼렇고 강직한 목소리와 함께, 창을 든 여러 명의 포졸을 늠름하게 거느린 붉은 관복 차림의 사내가 위풍당당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로 며칠 전 부임한, 대쪽 같은 성품과 명석한 두뇌로 소문난 신임 현감이었습니다. 현감은 길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미물들의 사체와, 비정상적으로 새까맣게 떼를 지어 산을 등지고 도망치는 쥐들의 기괴한 행렬을 이미 굳은 얼굴로 예의주시하며 마을을 순찰하던 참이었습니다. 다래는 살얼음판 같은 빗길을 기어가 현감의 장화 신은 발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사또 나리! 짐승들이 피눈물로 경고하고 있사옵니다. 제발, 제발 비천한 제 말을 한 번만 믿어주십시오. 저 토산은 이미 속이 썩어 문드러져, 반 시진(한 시간) 안에 형체도 없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지금 당장 저 산 아래 집들을 모두 비우고 평야로 백성들을 이끌지 않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흙더미에 깔려 떼죽음을 당할 것이옵니다! 부디 백성을 살려주시옵소서!"

    현감은 빗물과 눈물, 핏물이 뒤섞여 엉망이 된 다래의 간절하고도 핏발 선 눈동자를 깊고 날카롭게 응시했습니다. 주변에 서 있던 늙은 아전들은 "저 요망한 미친 무당년의 헛소리에 속으시면 아니 되옵니다"라며 현감을 극구 만류했고, 권 부자 역시 "근거 없는 미신이자 민심을 어지럽히는 요언이옵니다!"라며 핏대를 세우며 반대했습니다. 현감 역시 내심 몹시도 갈등했습니다. 만약 이 미친 처녀의 말 한마디만 믿고 한밤중에 수백 명의 백성들을 강제로 대피시키는 큰 소동을 벌였다가 정작 산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자신은 요언에 홀린 무능하고 어리석은 수령으로 낙인찍혀 당장 파직을 면치 못할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다래의 두 눈에 서린 목숨을 건 진실됨과, 평생 본 적 없는 짐승들의 기이한 대이동은 분명 무언가 거대한 재앙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째깍째깍, 산이 무너질 운명의 시간은 미친 듯이 다가오고 있었고, 백성들의 수백 개의 억울한 목숨과 현감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모두 그의 입술 끝 결단 하나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 6: 산이 무너지던 밤

    빗줄기는 아까보다 더욱 거세져 살을 에는 듯 매섭게 쏟아지고 있었고, 현감의 무거운 침묵이 길어질수록 다래의 심장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습니다. 다래는 바닥의 날카로운 돌부리에 이마를 쾅쾅 찧으며 이마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목 놓아 호소했습니다.

    "나리! 정녕 비천한 제 말이 근거 없는 요망한 거짓이라면, 내일 아침 동이 트자마자 관아 마당에서 제 목을 치셔도 한 치의 원망 없이 달게 받겠사옵니다! 하오나 만에 하나 참으로 산이 무너진다면, 흙더미에 산 채로 파묻힐 저 무고한 백성들의 억울한 목숨은 도대체 뉘가 책임진단 말이옵니까! 탐욕스러운 인간들은 밥 먹듯이 거짓을 말하여도, 대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짐승들은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사옵니다! 부디 백성을 살려내시옵소서!"

    피를 토하듯 부르짖는 다래의 절박한 외침에, 현감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펴며 마침내 무거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수백 백성의 목숨을 눈앞에 두고 알량한 벼슬아치의 체면과 안위 따위를 저울질하고 있던 자신의 나약함을 뼈저리게 부끄러워했습니다. 현감은 허리에 찬 서슬 퍼런 장검을 허공으로 단숨에 빼어 들고는, 마치 산군 호랑이처럼 쩌렁쩌렁하게 매섭고도 지엄한 호령을 내렸습니다.

    "관아의 모든 아전과 사령, 포졸들은 내 명을 똑똑히 들어라! 지금 당장 비치된 징과 꽹과리를 모조리 쳐서 잠든 마을 사람들을 남김없이 다 깨워라! 남녀노소 신하와 양반 할 것 없이 가재도구를 버리고 몸만 빠져나와 관아 앞 넓은 평야로 즉시 대피시켜라! 늦장 부리는 자나 대피를 방해하며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는 내 이 칼로 군율에 따라 그 자리에서 엄벌할 것이다! 당장 실시하라!"

    사또의 벼락같은 불호령이 떨어지자, 아전들과 포졸들은 사색이 되어 허둥지둥 징을 치며 미친 듯이 빗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징! 징! 징! 요란한 징소리와 포졸들의 다급한 고함소리가 비바람을 뚫고 온 마을을 거세게 뒤흔들었습니다. 반신반의하며 콧방귀를 뀌던 마을 사람들도, 칼을 빼 든 사또의 지엄하고도 살기 등등한 명령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잠결에 아이들을 둘러업고 비단이불이나 봇짐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비를 맞으며 관아 앞 평야로 꾸역꾸역 좀비 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오직 단 한 사람, 자신의 눈앞에 쌓인 황금빛 탐욕에 눈이 완벽하게 멀어버린 권 부자만이 코웃음을 치며 끝까지 자신의 대궐 같은 기와 저택에 짐승처럼 남았습니다.

    "흥, 젊은 사또가 단단히 미쳐 돌아버렸구나. 저 천한 무당년의 헛소리에 놀아나 밤중에 이 무슨 해괴망측한 난리란 말인가. 나는 평생을 긁어모은 내 금은보화가 가득 찬 이 소중한 곳간을 두고는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움직일 수 없다! 억보야, 너는 당장 저 두꺼운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몽둥이를 들어라.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곳간을 철저히 지키거라!"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습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관아 앞 평야에 옹기종기 모여 덜덜 떨고 있던 백성들 사이에서, 서서히 불만과 원망 섞인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거 보시오! 벌써 반 시진이 지났건만 저 거대한 토산은 아무렇지 않게 멀쩡하지 않소! 저 미친 무당년의 말장난과 사또의 성급한 판단에 우리만 이 비를 맞으며 헛고생을 하고 병을 얻게 생겼구먼!"

    사람들의 험악하고 원망스러운 시선이 다래를 향해 화살처럼 쏟아질 무렵, 갑자기 하늘을 찢어발기는 듯한 섬뜩하고 거대한 번개가 번쩍 내리치며 시야를 하얗게 밝히더니, 산 쪽에서부터 기괴하고도 웅장한 굉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쿠구구궁-! 콰아아앙!

    마치 수천 마리의 거대한 짐승이 분노하여 동시에 울부짖는 듯한 끔찍한 그 소리는 땅바닥을 맹렬하게 진동시켰습니다.

    "사, 산이! 하늘 맙소사, 진짜 산이 무너진다!"

    누군가의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마을 뒤편을 막고 서 있던 거대한 토산이 마치 물 먹은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양의 시뻘건 흙더미와 거대한 바위들, 수백 년 된 뿌리 뽑힌 고목들이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괴물처럼 산비탈을 타고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와, 순식간에 텅 빈 마을의 수십 채 집들을 잔인하고 자비 없이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우르르 쾅! 콰아아앙!

    대포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을은 생지옥으로 변했습니다. 평야에 대피해 있던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바닥에 엎드렸고, 방금 전까지 자신들이 누워 자고 있던 따뜻한 안방과 집들이 거대한 진흙탕 속으로 흔적조차 없이 바스러지며 짓이기듯 사라지는 참혹한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오직 다래의 처절한 외침과 현감의 결단에 따라 미리 산 아래를 벗어나 평야로 피신한 사람들만이,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온전히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폭풍우가 잦아들고 서서히 먼동이 트는 새벽, 마을이 있던 자리는 집의 형태조차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하고 끔찍한 진흙과 바위 무덤으로 완벽하게 변해버렸습니다. 날이 밝아 참상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안도와 환희의 눈물을 쏟아내며, 다래를 향해 엎드려 큰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친 무당이라 짱돌을 던지며 침을 뱉었던 그들이, 이제는 수백 백성의 목숨을 통째로 구한 하늘이 내린 은인이라며 다래의 피투성이가 된 발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오열했습니다.

    현감 역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래에게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그의 눈빛에는 촌부인 다래를 향한 무한한 경외심과 굳건한 신뢰가 가득 차 넘치고 있었습니다.

    "네가 정녕 수백 명 백성의 목숨을 살렸구나. 짐승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너의 그 비범하고도 성스러운 능력이, 알량하고 얕은 나의 판단보다 백번 천번 옳았다. 내 너를 요물이라 의심했던 것을 뼈저리게 사과하마. 너는 이 고을의 진정한 은인이다."

    모두가 안도하는 그 순간, 멍하게 산을 바라보던 다래는 번쩍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현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다급히 외쳤습니다.

    "나리! 아직 끝난 것이 아니옵니다! 권 부자네 저택 외양간에… 그 좁은 외양간에 권 부자 생일잔치에 도살당할 아직 어린 돌이의 누렁이가 목줄에 묶여 있사옵니다! 제발 김 첨지 할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아는 그 가여운 늙은 소를 서둘러 구해주시옵소서!"

    현감은 지체 없이 포졸들을 이끌고 반쯤 거대한 흙더미에 파묻힌 권 부자네 저택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습니다. 놀랍게도 쏟아져 내린 흙더미는 권 부자의 화려하고 오만했던 안채와 금은보화가 가득한 곳간을 완전히 박살 내버리고 집어삼켰지만, 저택 끄트머리에 외롭게 있던 낡은 외양간 기둥만큼은 기적처럼 흙더미가 비껴가 아슬아슬하게 화를 면해 있었습니다. 현감의 지엄한 명으로 포졸들이 외양간 문을 거칠게 부수고 들어가자, 굵은 목줄이 묶인 채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던 누렁이가 달려오는 다래를 보며 구슬프고도 안도 섞인 우렁우렁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반면, 재물에 완벽하게 눈이 멀어 끝까지 대문을 걸어 잠그고 곳간을 지키려 했던 탐욕스러운 권 부자와 살인귀 억보는, 왈칵 쏟아진 무너진 흙더미와 부서진 기둥에 하반신이 끔찍하게 짓눌린 채 돼지처럼 꽥꽥 비명을 지르며 포졸들의 손에 비참하고 초라하게 질질 끌려 나왔습니다. 제발 살려달라며 진흙투성이가 되어 손이 발이 되도록 애원하는 권 부자의 추악하고 더러운 몰골 위로, 다래의 말에 생명을 빚진 수백 명 백성들의 분노와 경멸 어린 시선이 불화살처럼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 7: 짐승이 밝힌 하늘의 저울

    폭우가 씻겨 내려간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청명했고, 눈부신 아침 햇살이 폐허가 된 마을과 흙더미를 찬란하게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현감은 곧바로 관아 앞마당에 멍석을 깔고 임시 수청을 열어, 흙더미에서 간신히 기어 나와 목숨만 부지한 권 부자와 억보를 마당 한가운데 꿇어앉혔습니다. 그리고 다래와 살아남은 돌이, 그리고 누렁이를 그들 앞에 당당히 세웠습니다. 다래의 신들린 예견으로 온 마을의 목숨을 건진 수백 명의 백성들은, 이제 미친 무당이 아닌 지혜롭고 영험한 은인 다래의 입에서 나올 진실에 숨을 죽이며 귀를 쫑긋 기울였습니다.

    현감이 서늘하고도 맹렬한 눈빛으로 벌벌 떠는 권 부자를 굽어보며 벼락같이 호통을 쳤습니다.

    "권 부자! 너는 어젯밤 끔찍하게 무너진 하늘의 분노와 대자연의 심판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아직 네 추악한 죄를 뉘우치지 못하느냐! 다래야, 이제 저들의 잔인한 죄상을 내 앞에서 낱낱이 고하거라. 내 이제 너의 말을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하늘의 뜻으로 믿을 것이니라."

    다래는 누렁이의 거친 숨결에 가만히 고운 손을 얹은 채, 며칠 전 누렁이가 피눈물을 흘리며 전해주었던 비 오는 밤의 끔찍한 살인 사건을 한 치의 거짓 없이 또렷하고 단호하게 관아 마당에 쏟아냈습니다. 권 부자가 노른자위 땅문서를 탐내어 가여운 김 첨지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억보를 시켜 밀어 죽이라고 사주한 일, 억보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발길질까지 모두 묘사하자 백성들 사이에서 분노의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권 부자는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끝까지 악을 쓰며 발악했습니다.

    "사또 나리! 참으로 억울하옵니다! 저 미친 무당년이 기어코 말 못 하는 짐승을 핑계 삼아 죄 없는 선량한 양반을 끔찍한 살인귀로 옭아매려 하고 있사옵니다! 늙은이가 제풀에 떨어져 죽는 것을 짐승 새끼가 어찌 안단 말입니까! 명백하고 뚜렷한 증좌를 당장 내놓으시지요! 증거가 없다면 이는 나를 모함하는 극악무도한 무고죄이옵니다!"

    권 부자가 핏대를 세우며 발악하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가만히 서 있던 누렁이가 갑자기 억보를 향해 미친 듯이 뜨거운 콧김을 뿜으며 온 마당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습니다. 음모오오-! 그러자 참으로 기이하고도 소름 돋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누렁이의 억울한 울음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어디선가 까치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현감의 발앞에 무언가를 툭 떨어뜨리고는 날아갔습니다. 그것은 흙이 잔뜩 묻어있는 피 묻은 낡은 옥가락지였습니다.

    다래가 그 가락지를 가리키며 외쳤습니다.

    "사또 나리! 저것은 김 첨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손가락에 소중히 끼고 계시던 유품이옵니다! 억보가 벼랑에서 할아버지를 무참히 밀어붙일 때, 할아버지께서 살기 위해 억보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매달리다 뜯어져 나간 것이 분명하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평소 다래가 산속에서 밥을 주어 다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동네 삽살개 한 마리가 컹컹 짖으며 뛰어오더니, 꿇어앉은 억보의 바짓가랑이를 맹렬하게 물어뜯었습니다. 그러더니 흙더미에 반쯤 파묻힌 권 부자네 마당 구석으로 바람처럼 달려가 미친 듯이 앞발로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포졸들이 삽살개가 파낸 땅을 삽으로 깊게 뒤집자, 그 썩은 흙구덩이 속에서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억보의 낫과 흙투성이가 되어 구겨진 김 첨지의 땅문서가 고스란히 튀어나왔습니다. 하늘의 뜻을 품은 짐승들이 억울한 죽음의 증좌를 직접 세상 밖으로 파헤쳐 관아 마당에 내놓은 것입니다.

    이토록 빼도 박도 못할 완벽한 물리적 증거들 앞에 억보의 험악했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창백해졌고, 공포와 귀신에 씐 듯한 상황에 겁에 질린 그는 결국 모진 형장을 받기도 전에 바닥에 엎드려 권 부자의 모든 악행과 지시를 술술 자백하고 말았습니다.

    "사, 살려주시옵소서 나리! 권 부자 어르신께서 시킨 일일 뿐, 뼛속까지 천한 소인은 그저 주인이 시키는 대로 늙은이를 절벽에서 밀어버린 종놈의 도리를 다한 죄밖에 없사옵니다! 목숨만 살려주시옵소서!"

    진실이 백일하에 명백하게 밝혀지자 현감은 분노로 크게 노하여 사령들에게 명했습니다.

    "저 재물에 눈이 완벽하게 멀어 인명을 잔혹하게 해치고 하늘을 기만한 짐승만도 못한 권 부자와 살인귀 억보를 당장 하옥하고 능지처참의 엄벌에 처하라! 그리고 권 부자가 그동안 고혈을 짜내어 불법으로 빼앗은 이 마을의 모든 토지는 즉시 김 첨지의 손주 돌이와 억울한 백성들에게 모조리 돌려주도록 하라!"

    마을 사람들의 환호성과 권 부자의 처절하고 비참한 비명 소리가 교차하며, 하늘이 내린 인과응보의 통쾌한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현감은 돌이의 작은 손에 김 첨지의 땅문서를 꼭 쥐여주며, 다래의 가녀린 어깨를 따뜻하고 자애롭게 다독였습니다.

    "사람의 말을 뱉지 못하는 미물일지라도, 그들에게 네가 대가 없이 베푼 그 따뜻한 정과 숭고한 은혜가 기적처럼 진실과 거대한 복이 되어 네게로 돌아왔구나. 너는 정녕 귀신 씐 미친 무당이 아니라, 하늘의 깊은 뜻을 읽고 수백 명의 사람을 살려낸 참으로 지혜롭고 고귀한 여인이니라."

    그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두 번 다시 다래를 향해 돌을 던지거나 뒤에서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래를 마을을 구한 하늘이 내린 귀한 어른처럼 존경하며, 앞다투어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옷을 가져다주며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다래는 고아가 된 어린 돌이를 거두어 친동생이자 자식처럼 품어 안았고, 누렁이는 다시 예전의 활기를 되찾아 다래와 돌이의 곁에서 평화롭고 한가롭게 여물을 씹으며 여생을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서로의 끔찍했던 상처를 보듬어 안은 그들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단단한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달빛이 창호지 너머로 곱게 부서지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 곤히 잠든 다래의 꿈속에, 생전보다 더 환하고 인자한 미소를 띤 김 첨지가 새하얀 도포를 입고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김 첨지는 다래의 고운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그 특유의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깊고 다정한 인사를 건넸습니다.

    "다래야, 참으로 고맙구먼. 참으로 고생 많았슈. 우리 착한 다래 덕분에 이 늙은이의 억울했던 한이 봄눈 녹듯 싹 다 풀렸어. 우리 가여운 돌이를 네게 부탁하네. 이제는 남들 뾰족한 눈치 보지 말고, 예쁜 어깨 쫙 펴고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어유. 알았지유?"

    잠에서 깬 다래의 볼그스름한 뺨에는 어느새 슬픔이 아닌 따뜻하고 벅찬 안도의 눈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창밖에는 비바람이 지나간 맑게 갠 밤하늘 위로, 수많은 반딧불이들이 찬란한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다래의 새로운 평화로운 내일을 축복하듯 조용히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가장 작고 힘없는 미물에게 베푼 아주 작은 선의가 온 마을의 생명을 구하고 웅장한 기적을 만들어낸, 가슴 벅차고도 감동적인 밤이 그렇게 아름답게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미물에게 베푼 작은 선의가 온 마을을 구하고 통쾌한 기적을 만들어낸 다래의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사람의 얄팍한 욕심은 하늘을 속이려 하지만, 말 못 하는 짐승들은 결코 은혜와 의리를 잊지 않는다는 깊은 여운을 남겨주네요. 오늘 이야기가 가슴 따뜻하셨다면 저희 '양반야담' 채널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꾹 부탁드립니다. 다음 시간에도 시청자 여러분의 귀를 쫑긋하게 만들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조선의 야담으로 찾아오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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