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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의 강에 명부를 빠뜨린 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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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저승사자가 실수로 망자의 명부를 물에 빠뜨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칠흑 같은 저승길, 망각의 강물에 명부를 떨어뜨린 풋내기 차사 초행이! 하필 지워져 버린 이름의 주인공은 평생 제 이름 석 자 한 번 불려보지 못한 불쌍한 늙은 종이었습니다. 이승에도 저승에도 속하지 못한 채 떠도는 영혼. 풋내기 차사는 과연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 그를 무사히 인도할 수 있을까요? 해학과 눈물이 교차하는 기막힌 사연 속으로 지금 들어갑니다.

    ※ 1: 명부를 빠뜨린 풋내기 차사 초행이

    음산한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저승의 길목. 죽은 자들이 이승의 미련을 버리고 건너야 한다는 망각의 강, 삼도천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먹물처럼 검었고, 수면 위로는 이름 모를 영혼들의 희미한 탄식 소리가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 강기슭을 따라 두 명의 저승차사가 걷고 있었다. 앞장서 걷는 이는 검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는 늙은 차사 묵산이었고, 그 뒤를 허둥지둥 따르는 이는 갓 저승차사가 된 풋내기 초행이었다. 초행이는 얼마 전, 꼿꼿한 선비의 호통에 기가 눌려 실수를 연발하다 저승사자 체면을 구겼던 바로 그 어리바리한 신참이었다.

    "아이고, 선배님! 묵산 선배님! 같이 좀 가십시다요. 안개가 어찌나 짙은지 한 치 앞도 안 보입니다요."

    "이놈아! 명색이 저승을 오가는 차사라는 놈이 안개 좀 끼었다고 이승의 어린애처럼 징징대는 것이냐. 걸음을 재촉하여라.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염라대왕님 전으로 명부를 올려야 한단 말이다. 네놈이 들고 있는 그 명부가 어떤 물건인지 알기나 하느냐? 이승 사람들의 목숨줄과 운명이 고스란히 담긴 저승의 보물 중의 보물이니라. 행여나 흠집이라도 낼까 두 손으로 꽉 부여잡고 따라오너라."

    '쳇, 툭하면 호통이시람. 꽉 부여잡고 있건만.'

    초행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품에 안고 있던 붉은색 명부를 고쳐 안았다. 명부에는 오늘 이승에서 수명을 다하고 저승으로 와야 할 사람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저승의 특별한 붓과 먹으로 쓰인 이 글자들은, 한 번 마르면 웬만한 불에도 타지 않는 신묘한 것이었지만, 단 한 가지 쥐약이 있었으니 바로 이 망각의 강물이었다. 이승의 모든 기억을 지우는 이 강물에 명부가 닿으면 그 어떤 굳건한 글자도 속절없이 녹아내리고 만다는 것을 초행이는 아직 깊이 알지 못했다.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에 오르려는 찰나였다. 나루터 주변으로 미끄러운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고, 성미 급한 초행이가 선배를 따라잡으려 잰걸음을 치다 그만 돌부리에 발이 걸려 크게 비틀거리고 말았다.

    "어, 어어어? 앗 뜨거라!"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리던 초행이의 품에서 붉은 명부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명부는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포물선을 그리더니, 찰랑거리는 검은 강물 속으로 풍덩 빠지고 말았다.

    "아이고! 명부야! 저승 명부야!"

    그 광경을 본 늙은 차사 묵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묵산은 체면이고 뭐고 내던진 채 뱃머리에서 강물로 엎어지듯 몸을 날려 허우적거리며 명부를 건져 올렸다.

    "이, 이 칠칠치 못한 놈아! 네가 기어이 대형 사고를 치는구나! 명부를, 명부를 물에 빠뜨리다니!"

    "선배님,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발이 미끄러져서… 얼른, 얼른 닦겠습니다요!"

    초행이가 사색이 되어 제 도포 자락을 찢어 명부의 물기를 다급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겉표지는 멀쩡해 보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떨리는 손으로 명부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던 묵산의 얼굴이 순간 잿빛으로 변했다.

    "이런 옘병할! 초행이 이놈아, 여기를 보거라! 글자가… 글자가 씻겨 내려갔다!"

    초행이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명부의 칠십사 쪽, 이승의 어느 마을에 사는 예순여덟 살 난 사내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 시커먼 먹물 번진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이름뿐만 아니라 그가 어디에 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적어둔 공덕의 기록마저 깨끗하게 지워져 버린 것이다. 망각의 강물이 이름에 담긴 혼의 기억마저 삼켜버린 탓이었다.

    "아이고, 선배님! 이를 어쩝니까! 이름이 완전히 지워졌습니다요!"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저승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진 자는 이승에도, 저승에도 속하지 못하는 법이다. 명부가 그의 존재를 놓아버렸으니, 그는 이제 산 자도 아니고 죽은 자도 아닌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 것이야. 네놈이 기어이 한 인간의 존재를 천지간에서 지워버렸구나!"

    '어이구, 내 팔자야. 차사 노릇 시작하자마자 지옥불에 떨어지게 생겼네.'

    초행이는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름이 지워진 자는 이승의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끔찍한 고립 속에서 서서히 영혼이 흩어지게 된다. 저승으로 데려올 수도, 이승에서 살게 할 수도 없는 미아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묵산은 긴 곰방대를 꺼내 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든 수습을 해야만 했다.

    ※ 2: 지워진 이름, 사라진 존재

    같은 시각, 이승의 어느 으리으리한 기와집 마당. 평생 이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하며 뼈가 부서져라 일해 온 예순여덟의 늙은 종 만식은 헛간 한구석의 짚더미 위에서 눈을 번쩍 떴다.

    '어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평소 같으면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아파서 일어나는 데 한참이 걸렸을 터인데, 어찌 이리 몸이 깃털처럼 가벼운가.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구나.'

    만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늘 짓누르던 허리의 통증도, 눈앞을 가리던 침침함도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만식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당 구석에 세워둔 빗자루를 집어 들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만식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빗자루를 쥐려는 그의 거칠고 투박한 손이, 마치 허공을 가르듯 나무 손잡이를 통과해 버린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조화인가? 내 눈이 잘못된 것인가?"

    만식은 당황하여 양손을 비벼보기도 하고 허벅지를 꼬집어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자신이 꼬집고 있는 허벅지가 마치 물안개로 만들어진 것처럼 스르륵 통과해 버렸다. 그때였다. 안채에서 비단옷을 차려입은 안주인과 이 집의 젊은 상전이 인상을 찌푸리며 걸어 나왔다.

    "아니, 해가 중천에 떴건만 마당을 쓸지 않고 어딜 간 게야! 개똥아! 이놈의 늙은이가 어디 가서 또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냐!"

    "개똥아! 당장 튀어나오지 못할까!"

    만식이 평생을 불려 온 이름, 개똥이. 비록 번듯한 이름은 아니었으나, 그는 일곱 살에 이 집에 팔려 온 이후로 늘 그렇게 불리며 살아왔다. 만식은 황급히 상전들 앞으로 달려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마님, 도련님! 소인 예 있습니다요! 제가 잠시 몸이 이상하여…."

    하지만 안주인과 상전은 만식이 바로 코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짜증만 낼 뿐이었다.

    "어허, 이 늙은 것이 보이지를 않네. 설마 도망이라도 친 것인가? 평생 먹여주고 재워주었건만 은혜를 원수로 갚아? 당장 사내종들을 풀어 주변을 샅샅이 뒤져보아라! 잡히는 날엔 아주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놓을 테다!"

    "마님! 저 여기 있습니다! 개똥이 여기 있다고요!"

    만식이 다급하게 안주인의 소매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무심하게 옷자락을 통과해 버렸다. 안주인은 마치 서늘한 바람이라도 분다는 듯 어깨를 르스스 떨며 돌아서 안채로 들어가 버렸다. 만식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투명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목소리도 닿지 않고, 몸도 만질 수가 없다니. 나는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평생을 소처럼 일만 하다 늙어버린 인생이었다. 단 하루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 없이, 그저 주인의 호통에 고개를 조아리며 묵묵히 마당을 쓸고 장작을 패던 삶.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투명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차라리 저승사자가 찾아와 목숨을 거두어 간다면 편히 쉬련만, 이것은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끔찍한 형벌이었다.

    그때였다. 헛간 지붕 위에서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치더니,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초행이가 뛰어내렸다. 초행이는 땀범벅이 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마당 한가운데 주저앉아 넋을 잃고 있는 만식을 발견하고는 다급하게 달려왔다.

    "영감님! 아이고, 영감님! 여기 계셨군요!"

    만식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했는데, 눈앞에 나타난 기괴한 복장의 사내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뉘, 뉘신데 나를 보시는 게요? 내가 보이오?"

    "보이다마다요! 영감님,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저승차사인데, 그만 실수를 하는 바람에 영감님의 이름 석 자를 저승 명부에서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요. 이름이 지워지는 바람에 영감님은 지금 이승에도 저승에도 속하지 못한 떠돌이 영혼이 되신 겁니다."

    "저, 저승차사? 그럼 내가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이오? 그런데 이름이 지워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입니다. 명부에 이름이 없으니 저승 문을 통과할 수도 없고, 이승 사람들에게는 아예 존재 자체가 지워져 버린 겁니다요. 영감님, 어서 저에게 본래 이름 석 자를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명부에 다시 영감님의 이름을 적어 넣어야만 이 기막힌 굴레에서 벗어나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습니다요!"

    초행이가 다급하게 붓과 명부를 꺼내 들며 재촉했다. 하지만 만식은 허망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내 이름 석 자라…. 차사 양반, 나는 그런 거 모르오. 일곱 살에 흉년이 들어 부모 손에 끌려 이 집에 팔려 온 이후로, 나는 평생을 '개똥이'로 불리며 살았소. 부모님이 지어주신 본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육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불려본 적이 없어 내 머릿속에서도 하얗게 지워져 버렸소. 이제 와서 내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어찌 알겠소이까."

    초행이의 들고 있던 붓이 허공에서 멈췄다.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노인. 저승 명부의 룰에 따르면, 망자 스스로가 기억하거나 이승 어딘가에 공식적으로 남아있는 진짜 이름이 아니면 명부는 그 글자를 뱉어내 버린다. 평생 개똥이로 살아온 늙은 종의 진짜 이름을 대체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초행이의 눈앞이 다시 한번 캄캄해졌다.

    ※ 3: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라

    저승의 한가운데, 망자들의 죄업을 심판하는 판관의 집무실 앞. 호랑이 같은 눈매에 길고 뻣뻣한 수염을 기른 판관 엄장이 분노로 수염을 부르르 떨며 서류 뭉치를 집어 던졌다.

    "이런 멍청하고 한심한 놈을 보았나! 명색이 저승의 차사라는 놈이 칠칠치 못하게 명부를 강물에 빠뜨려 망자의 이름을 지워버려?! 천지개벽할 노릇이로다! 당장 저놈을 끓는 기름 가마에 처넣어라!"

    "판관 어르신!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그 영감님의 이름을 반드시, 기필코 찾아내어 명부를 원상복구 해 놓겠나이다!"

    초행이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싹싹 빌었다. 옆에 엎드린 늙은 차사 묵산도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판관 나리, 이놈이 아직 차사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몹시 어리석사옵니다. 하오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옵고, 이승을 떠도는 저 불쌍한 영혼을 구제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저희가 이승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 망자의 본래 이름을 찾아내 명부에 새겨오겠사옵니다."

    엄장 판관은 분을 삭이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초행이를 내려다보며 호통을 쳤다.

    "좋다. 이승의 시간으로 딱 칠 일. 이레의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그 늙은 종의 진짜 이름 석 자를 찾아내 명부에 다시 올리지 못한다면, 그 노인의 영혼은 구천을 떠돌다 영원히 흩어져 소멸할 것이고, 초행이 네놈은 저승의 형벌을 받아 망각의 강기슭에 영원토록 굳어있는 돌덩이가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요! 감사합니다, 판관 어르신!"

    그길로 다시 이승으로 쫓겨나듯 내려온 초행이와 묵산은 다급한 마음으로 만식이 살고 있는 대감집으로 향했다. 기한은 단 칠 일. 그 안에 평생 '개똥이'로 불렸던 늙은 종의 호적상 진짜 이름을 찾아내야만 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 집안의 노비 문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야심한 밤, 두 차사는 몰래 곳간을 지키는 집사의 방으로 스며들었다. 집사가 코를 골며 잠든 사이, 묵산이 도술을 부려 두꺼운 궤짝의 자물쇠를 열고 오래된 노비 문서들을 꺼내 펼쳤다. 초행이는 눈을 부릅뜨고 수십 장의 서류를 넘기며 예순여덟 살 된 사내종의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찾았다! 선배님, 여기 있습니다요! 나이 예순여덟, 출신은 충청도…. 그런데…."

    문서를 짚고 있던 초행이의 얼굴이 허탈감으로 일그러졌다. 누렇게 바랜 한지 위에 먹물로 적힌 노비의 이름 칸에는, 버젓한 이름 석 자 대신 그저 '개똥(介糞)'이라는 두 글자만이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성씨도, 번듯한 이름도 없는 완벽한 하층민의 기록. 상전들에게 그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언제든 부려 먹다 버릴 수 있는 소나 말과 같은 재산에 불과했던 것이다. 관아에 바치는 문서에조차 개똥이로 기록되어 있다면, 도대체 그의 진짜 이름은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어휴, 딱하기도 하지. 평생 뼈 빠지게 일해주고도 문서에조차 짐승 같은 이름으로 남아있구나."

    묵산이 끌끌 혀를 차며 문서를 덮었다. 초행이는 답답한 마음에 자신의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선배님, 이러다 저 돌멩이 되는 거 아닙니까요? 문서에도 없고 영감님 본인도 기억을 못 하시는데, 무슨 수로 이름을 찾습니까! 이 넓은 이승 바닥에서 육십 년 전에 지어진 촌부의 이름을 어찌 알겠습니까요!"

    그때, 곳간 밖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들렸다. 마당 구석에서 쓸쓸하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만식이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이 하나 없는 세상에서, 만식은 차가운 댓돌 위에 걸터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록 그림자조차 생기지 않는 투명한 몸이었지만, 평생 굳은살이 박인 투박한 두 손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어깨는 한없이 작고 쓸쓸해 보였다.

    '부모님이 날 처음 안아주셨을 땐, 분명 다정한 이름으로 불러주셨을 터인데. 그 한 번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이리 귀신도 뭣도 아닌 신세가 되었구나.'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초행이의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뭉클함이 피어올랐다. 단순히 벌을 받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평생 이름 없이 살아온 저 가엾은 노인에게, 마지막 가는 길만큼은 온전한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해주고 싶다는 강한 오기가 솟구쳤다.

    "선배님,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 영감님이 이승에 태어나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흔적을 남긴 적이 분명 있을 겁니다요. 칠 일 동안 이 집안의 낡은 서책부터 관아의 기록까지 제가 다 뒤져보겠습니다!"

    초행이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늙은 차사 묵산은 그런 초행이를 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디 한번 죽을힘을 다해 찾아보거라. 나도 옆에서 거들어는 주마."

    이름을 잃어버린 자와, 그 이름을 찾아야만 하는 풋내기 차사. 칠 일간의 유예 속에서, 육십 년간 묻혀있던 한 인간의 서글픈 족적을 쫓는 추적이 시작되고 있었다.

    ※ 4: 평생 불려본 적 없는 진짜 이름

    염라대왕의 판관이 허락한 이레의 기한 중, 어느덧 야속하게도 나흘이라는 시간이 모래알처럼 속절없이 흘러가 버렸다. 초행이와 늙은 차사 묵산은 그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감집의 묵은 서고와 도성의 호적 창고를 그야말로 이 잡듯 샅샅이 뒤졌다. 퀴퀴한 곰팡내가 진동하는 수백, 수천 권의 고서적과 문서 더미 속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낡은 한지들을 넘기고 또 넘겼다. 하지만 육십 년 전, 지독한 흉년에 부모의 손에 이끌려 헐값에 팔려 온 천민 아이의 번듯한 기록 따위가 이 비정한 세상에 제대로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호적 대장과 노비 문서 그 어디를 뒤져보아도, 오로지 주인이 짐승 부르듯 지어준 '개똥이'라는 서글프고 천박한 흔적만이 무성한 잡초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름 석 자를 찾는 일은 그야말로 드넓은 모래사장에서 녹슨 바늘 하나를 찾는 것보다 더 막막하고 요원한 일이었다.

    초행이는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을 부여잡고, 마침내 지친 다리를 끌며 대감집 안채의 낡은 툇마루 구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마당 한가운데서는, 늙은 종 만식이 굽은 허리로 빗자루질을 하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육십 년 평생 뼈가 부서져라 일만 해온 탓에 몸에 지독하게 배어버린 습관이었다. 비록 빗자루의 나무 자루조차 쥘 수 없는 투명하고 허망한 몸이 되었건만, 노인은 무의식적으로 허공을 쓴다며 이리저리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 지독하게 애처롭고도 구슬픈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초행이가,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불쑥 입을 열었다.

    "영감님, 제발 부탁입니다요. 정말 단 하나의 기억도 나지 않으십니까? 아주 어릴 적, 일곱 살 꼬마이던 시절 부모님이 다정하게 불러주셨던 그 이름의 첫 글자라도 좋으니, 제발 억지로라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영감님의 영혼이 이승과 저승 그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영원히 구천을 떠돌며 소멸하기까지, 이제 고작 사흘밖에 남지 않았단 말입니다요. 제발 한 번만 더 기억의 끈을 잡아보십시오."

    초행이의 절박한 외침에, 만식은 허공을 정성스레 쓸어내리던 서글픈 손짓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사람 좋은, 그러나 너무나도 씁쓸하고 텅 빈 미소를 지으며 초행이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차사 양반, 참으로 미안하고 또 면목이 없구려. 나 같은 늙고 천한 종놈 하나 때문에, 그 젊고 창창한 양반이 저승의 돌덩이가 되게 생겼으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하지만 차사 양반, 내 아무리 밤새워 머리를 쥐어짜 내고 가슴을 쳐보아도 도무지 생각나는 것이 없소이다. 일곱 살 적, 흉년에 굶어 죽어가는 식구들을 살리겠다며 어머니가 내 손을 이끌고 이 낯선 대문 안으로 들어서던 날… 그때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내 작은 손에 쥐여주셨던 차갑게 식은 주먹밥의 까끌까끌한 감촉은 아직도 손끝에 이리 생생하게 남아있건만, 나를 부르시며 오열하시던 그 목소리만큼은 가을밤 멀어지는 풀벌레 소리처럼 희미하고 아득하기만 하오. 그저 이 집 상전들이 육십 년간 내게 매질을 하며 소리치던 '개똥아! 이놈 개똥아!' 하는 그 지독한 호통 소리만이 귓가에 단단한 딱지처럼 눌어붙어, 내 진짜 이름을 완전히 갉아먹어 버린 모양이오."

    만식의 깊게 파인 주름진 눈가로 어느새 투명한 이슬이 맺혀 흘러내렸다.

    "차라리 이대로 이름 없는 먼지가 되어 조용히 흩어져 버리는 것이, 내게 주어진 서글픈 운명인 모양이오. 육십 년 평생을 남의 집 개똥이로 살았는데, 이제 와 죽어 저승 문턱을 넘는다고 새삼 번듯한 이름표가 무슨 소용이겠소. 차라리 다행이지요. 이승에서의 그 지독한 고단함마저 이름과 함께 다 지워질 터이니…. 차사 양반, 나 같은 미물을 위해 이리 며칠 밤낮을 고생해 주어 참으로 고맙소."

    "아이고, 영감님! 어찌 그리 가슴 찢어지는 섭섭한 소리를 하십니까! 저승 명부에 이름이 오르는 것은 그저 단순한 이름표 하나 달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영감님이 이승에서 살아온 한 평생의 모진 고단함과 인내, 남을 위해 흘린 그 귀한 땀방울 하나하나가 하늘의 거대한 장부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그 누구보다 정당하고도 고귀한 평가를 받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거룩한 증명의 자리란 말입니다! 평생 개똥이로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사셨으니, 저승에서만큼은 온전한 사람 대접을 받으며 극락정토에 오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요!"

    초행이의 목소리가 억울함과 안타까움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마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때, 툇마루 한쪽 구석에 말없이 앉아 긴 곰방대만 툭툭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늙은 차사 묵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보게 만식 영감, 지레 포기하지 말고 곰곰이 생각해보게. 평생을 살면서 이 상전집 말고, 관아나 옥사에 끌려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가? 양반네들이야 자기 집 종놈들을 소나 말 취급하며 대충 기록한다 쳐도, 나라의 법을 집행하는 관아의 형벌 기록만큼은 다르다네. 죄를 묻고 형벌을 내릴 때는 행여나 억울함이 없도록 죄인의 인적 사항과 출신, 심지어 몸에 난 점 하나와 흉터 하나까지도 깐깐하게 특정하여 기록하는 법이지. 그곳이라면 필시 영감의 진짜 이름 석 자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네."

    그 묵직한 조언에 만식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흐릿한 기억의 심연을 더듬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관아… 무시무시한 포졸들이 있는 관아라…. 아, 그러고 보니 내 평생 딱 한 번, 죽어서도 잊지 못할 끔찍한 일로 관아에 끌려간 적이 있긴 하오. 내가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의 섣달그믐이었지. 지금의 영감마님이 혈기 왕성한 젊은 도련님이던 시절이었소. 도련님이 기방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 난동을 부리다, 그만 시비가 붙은 양반집 자제의 머리를 내리쳐 의식을 잃을 만큼 크게 다치게 한 적이 있었지요. 다음 날 관아에서 포졸들이 들이닥쳐 도련님을 하옥하려 하자, 대감마님은 도련님 대신 나를 포박하여 관아로 끌고 가 옥살이를 시키고 곤장을 맞게 하셨소. 내가 도련님 대신 살인 미수의 무시무시한 죄를 모두 뒤집어쓰고 옥에 갇혀, 엉덩이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는 태형 쉰 대를 맞고는 석 달 열흘을 멍석에 말려 반죽음 상태로 앓아누웠었지."

    "그거다! 선배님, 바로 그거예요! 관아에서 중한 죄인을 옥에 가두고 곤장을 쳐서 처벌할 때는, 무조건 죄수 명부를 따로 작성하여 보관하게 되어있습니다요!"

    초행이의 두 눈에 죽어가던 희망의 거대한 불꽃이 다시금 확 타올랐다. 단숨에 툇마루에서 벌떡 일어난 초행이와 묵산은, 더 지체할 시간도 없이 축지법을 써서 순식간에 도성 한복판에 자리한 관아의 낡은 문서 창고를 향해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 5: 관아 창고에 잠든 사십 년 전의 진실

    대낮에도 한 줄기 햇빛조차 제대로 스며들지 않는 어둡고 습한 관아의 깊은 지하 창고. 수십 년, 아니 수백 년간 켜켜이 쌓인 지독한 먼지와 코를 찌르는 곰팡내가 가득 찬 그 밀폐된 공간 속에서, 초행이와 묵산 두 차사는 흔들리는 희미한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사십 년 전의 낡은 죄수 명부들을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천장에 거미줄이 엉켜있고 바닥엔 쥐들이 돌아다니는 열악한 곳이었지만, 두 사람에게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이레의 기한이 다 끝나가기 전에 만식 영감의 이름을 찾아내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그들의 핏발 선 두 눈을 번뜩이게 만들고 있었다. 초행이의 손가락이 바스러질 듯 낡은 종이 위를 미친 듯이 내달렸다.

    "사십 년 전… 사십 년 전 섣달그믐… 대역죄로 하옥되어 태형 쉰 대를 맞은 자…. 여긴 없고, 이 책도 아니고…. 쿨럭, 선배님, 제발 찾아야 합니다요. 이대로 영감님을 흩어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아! 찾았습니다! 선배님, 여기 있습니다! 사십 년 전의 결안 서류입니다!"

    초행이가 떨리는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든 누렇게 변색된 낡은 책자에는, 분명히 그날의 사건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양반집 자제에게 상해를 입힌 죄목, 그리고 그 죗값으로 태형 쉰 대를 처하고 옥살이를 시켰다는 끔찍한 형벌의 기록이 뚜렷하게 먹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서류의 상단, 죄인의 인적 사항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초행이의 흙빛 얼굴은 금세 깊은 절망과 실망감으로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관아의 엄중한 공문서 기록에조차, 노인의 이름은 여전히 '개똥(介糞)'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대감집 상전이 미리 관아의 아전들에게 뇌물을 먹이고 철저하게 짜놓은 거짓 대역극에 속수무책으로 희생된 채, 만식은 나라의 기록에서마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주인이 지어준 천박한 이름으로 모진 옥살이를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하아… 세상에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여기도 개똥이, 저기도 개똥이뿐입니다. 대체 영감님의 그 억울한 진짜 이름은 이 세상 어느 깊은 땅속에 파묻혀 있단 말입니까! 하늘도 무심하시지, 평생을 남을 위해 희생만 한 노인네에게 이리도 가혹할 수가 있습니까요!"

    초행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낡은 명부가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탁한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좌절감이 무거운 침묵과 함께 지하 창고를 짓눌렀다. 그때, 조용히 촛불을 들고 낡은 명부 주변을 찬찬히 살피던 묵산이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더니 촛불을 문서 쪽으로 바짝 들이대었다.

    "잠깐, 멈추어라 초행아. 섣불리 절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것 좀 자세히 들여다보거라."

    묵산이 주름진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개똥'이라는 굵고 반듯한 먹물 글씨가 적힌 종이의 가장자리, 거무스름하고 얼룩진 핏자국과 땀에 찌든 손때가 겹겹이 묻어있는 아주 구석진 여백이었다. 초행이가 황급히 눈을 비비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분명 붓에 먹물을 묻혀 쓴 평범한 글씨가 아니었다. 무언가 아주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으로 두꺼운 한지를 꾹꾹 눌러 거칠게 긁어낸 듯한, 미세하고도 불규칙하게 파인 자국들이 옹기종기 모여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이, 이건… 붓글씨가 아니라, 누군가 손톱으로 힘주어 종이를 파낸 자국 아닙니까?"

    "그렇다. 관아의 붓과 먹을 함부로 쓸 수 없었던 천한 죄인이, 제 손톱 끝이 다 닳아 붉은 피가 맺히도록 단단한 한지를 꾹꾹 눌러서 악착같이 파낸 흔적이야. 초행아, 촛불을 종이 바로 뒤로 가져가 은은하게 비추어 음영을 만들어 보거라. 그러면 긁힌 자국이 만들어낸 글자의 그림자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초행이가 떨리는 손으로 촛불을 종이 뒤편으로 조심스럽게 비추자, 푹푹 파인 자국들이 불빛을 막아내며 짙은 음영을 만들어냈고, 그 그림자들은 놀랍게도 또렷한 한자 두 글자를 빚어내고 있었다.

    "가득 찰 만(滿)…. 심을 식(植)…. 만식? 만식입니다, 선배님! 가득 차게 심는다는 뜻의, 찰 만에 심을 식! 영감님의 진짜 이름이 만식(滿植)이라는 이름입니다요!"

    그것은 사십 년 전 섣달그믐의 그 끔찍했던 밤, 억울하게 태형 쉰 대를 맞고 온몸의 뼈와 살이 찢겨나가 피투성이가 된 만식이 관아의 춥고 어두운 문서방 바닥에 거적때기처럼 버려져 있을 때, 마지막 젖먹던 힘을 짜내어 벌인 일임이 분명했다. 자신은 평생 남의 집 개똥이로 살며 주인 대신 억울하게 매를 맞고 이 차가운 바닥에서 죽어갈지도 모르지만, 나라에 남기는 공식 문서의 한 귀퉁이에만큼은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낳고 사랑해 주었던 부모가 지어준 진짜 이름을 온전히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종이 구석에 피가 맺힌 손톱으로 꾹꾹 새겨 넣었을 늙은 종의 처절하고도 서글픈 마지막 저항이자, 육십 년 평생 단 한 순간도 놓지 않고 가슴 깊이 간직해 온 영혼의 진짜 이름이었다.

    "만식(滿植)… 텅 빈 그릇에 넉넉하게 가득 채워 심는다는 참으로 고운 뜻이로구나. 평생 남의 배만 불려주며 자신은 빈 껍데기처럼 살아온 가엾은 노인에게, 이리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을 줄이야."

    묵산이 곰방대를 만지작거리며 깊은 탄식과 함께 혀를 찼다. 초행이의 눈시울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붉어져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육십 년 동안 세상 그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불려보지 못해 자신조차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름. 하지만 죽음이 코앞까지 닥쳐온 끔찍한 고통의 문턱에서, 본능적으로 짐승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려 손톱으로 새겨 넣을 만큼 그의 영혼과 뼛속 깊이 사무쳐 있던 진짜 이름. 초행이는 낡은 한지 위를 쓰다듬으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가시지요, 선배님! 당장 이승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감님의 이 귀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찾았으니, 더 늦기 전에 어서 저승 명부에 정성껏 올려드려야 합니다요!"

    초행이가 품속 깊이 간직했던 붉은 저승 명부와 특수하게 제작된 저승의 붓을 비장하게 꺼내 들었다. 붓끝에 먹물을 듬뿍 적시는 초행이의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 굳세고 단호했으며, 그의 눈빛에는 한 인간의 잃어버린 존엄을 되찾아주겠다는 사명감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 6: 마침내 불린 이름, 다시 쓰이는 공덕

    염라대왕이 허락한 칠 일간의 기한 중 마지막 날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먼동이 트며 푸르스름한 여명이 대감집 마당을 비추는 가운데, 헛간 앞 낡은 평상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인 만식의 몸은 이제 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반투명한 상태로 서서히 흩어져가고 있었다. 빗자루를 쥐어볼 힘조차 잃어버린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우주의 먼지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만식의 귓가로, 돌연 거친 숨을 헐떡이며 누군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영감님! 만식 영감님! 눈 좀 떠보십시오! 우리가 마침내 찾아냈습니다요!"

    초행이와 묵산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채 헛간 앞마당으로 들이닥쳤다. 초행이의 두 손에는 붉은 명부가 소중하게 쥐여 있었다. 힘겹게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린 만식이 멍한 시선으로 두 차사를 바라보았다.

    "영감님의 진짜 이름! 사십 년 전 관아 문서방 바닥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을 때, 영감님이 이빨을 꽉 깨물고 직접 손톱 끝으로 종이 귀퉁이에 꾹꾹 눌러 새겨놓으셨던 그 고귀한 이름 말입니다!"

    초행이의 외침에 만식의 텅 비어있던 두 눈이 벼락을 맞은 듯 크게 흔들렸다. 사십 년 전의 그 차갑고 끔찍했던 밤, 곤장에 맞아 정신이 혼미하게 부서지는 와중에도 짐승처럼 '개똥이'로 죽어 관아의 시구문에 던져지기 싫어, 덜덜 떨리는 피 묻은 손가락으로 두꺼운 한지를 악착같이 파냈던 그 흐릿한 기억이 강렬한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식… 가득 찰 만(滿)에 심을 식(植). 내 이름이, 만식이었구려.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던 내 밥그릇에, 언제나 하얀 쌀밥이 가득 심어지기를 바란다며 눈물짓던 어머니가 지어주셨던… 바로 그 이름…."

    만식의 깊게 파인 주름진 뺨 위로, 억겁의 세월 동안 꾹꾹 억눌러왔던 굵고 뜨거운 눈물이 봇물 터지듯 주르륵 흘러내렸다. 초행이가 붉은 명부를 활짝 펼치고 저승의 붓을 힘주어 쥐었다. 강물에 씻겨나가 텅 비어있던 칠십사 쪽의 빈칸 위로, 먹물을 가득 머금은 붓끝이 한 마리 학이 춤을 추듯 유려하게 미끄러지며 글자를 정성스레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충청도 목천 출생! 나이 예순여덟! 이름… 만식(滿植)!"

    초행이가 이름의 마지막 획을 힘차게 긋고 붓을 떼는 순간이었다. 붉은 명부에서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찬란하고 눈부신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헛간 주변은 물론이고 대감집 전체를 환하게 밝혔다. 그러자 천지개벽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허공의 먼지처럼 흐릿하게 흩어져가던 만식의 몸이 서서히 뚜렷한 형상과 생기를 갖추기 시작하며 완벽한 인간의 형태를 되찾은 것이다.

    그때, 이른 아침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로 향하던 대감집의 늙은 상전과 비단옷을 입은 안주인이 헛간 앞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그들의 눈에 완벽한 투명 인간이었던 늙은 종이 마침내 그들의 시야에 선명하고 뚜렷하게 들어온 것이다.

    "아니, 이 늙은 것이 대체 일주일 동안 어딜 도망갔다가 이제야 뻔뻔하게 기어 나타난 것이야! 당장 이리 와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이놈 개똥…."

    안주인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버럭 호통을 치고, 육십 년 평생 그래왔듯 입에 붙은 '개똥아'를 부르려던 찰나였다. 안주인의 입술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강하게 움찔거리더니,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을 맴돌던 전혀 엉뚱하고도 낯선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보게, 만식아! 대체 며칠 동안 어딜 그리 쏘다녔나. 자네가 없으니 안채 마당 꼴이 엉망진창이 아닌가!"

    "만식아! 어서 헛간에서 나와 부뚜막에 물 좀 길어오너라!"

    옆에 섰던 늙은 상전마저도 자신을 대신해 곤장을 맞았던 그 사내를 향해, 개똥이가 아닌 '만식'이라는 묵직한 이름을 불렀다. 저승 명부에 정식으로 이름이 새겨지자, 이승의 견고하던 법칙과 인연마저 그 이름의 거대한 무게와 우주의 섭리에 완벽하게 굴복하여 사람들의 머릿속에 '만식'이라는 온전한 존재를 강제적으로 각인시킨 것이다.

    육십 년 평생 처음으로 이승의 상전들에게서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진짜 이름을 불린 만식은, 그대로 차가운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오열했다.

    "예… 예, 마님! 제가 만식이옵니다. 제가 바로 사람이옵니다, 만식이옵니다…!"

    평생 가슴에 응어리졌던 지독한 설움과 한이 뜨거운 눈물과 함께 씻겨 내려갔다. 만식의 몸 위로 부드럽고 따사로운 후광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미련과 억울함이 모두 풀어진 것이다. 만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구원해 준 초행이와 묵산을 향해 깊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였다. 평온하고 따뜻한 부처의 미소가 노인의 맑아진 얼굴에 가득 번져 있었다.

    "차사 양반들, 참으로 고맙고 또 고맙소.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전한 사람 대접을 받아보고 떳떳하게 떠나게 해주어서… 참으로 잊지 못할 은혜요."

    만식의 모습이 서서히 투명해지더니, 한 줄기 따스한 봄바람이 되어 아침 햇살을 타고 평화로운 저승길을 향해 사뿐히 날아올랐다.

    얼마 후, 저승 한복판의 판관 엄장의 집무실. 엄장은 새롭게 황금빛으로 채워진 만식의 명부와 이승에서의 행적을 낱낱이 읽어 내려가며 깊은 탄식과 함께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득 찰 만에 심을 식이라…. 평생 자신의 번듯한 이름조차 없이 남의 끔찍한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하늘을 향해 원망 한 번 내뱉지 않고 묵묵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참으로 훌륭하고 거룩한 공덕이로구나! 당장 이 맑은 영혼을 극락정토의 가장 따뜻하고 좋은 자리로 인도하여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라! 그리고 만식의 귀한 이름을 빼앗고 짐승처럼 부려 먹은 저 악독한 상전 집안의 공덕부는 모조리 깎아내어, 다음 생엔 필시 지렁이나 구더기 같은 미물로 태어나게 하여 그 오만을 단죄할 것이다!"

    판관의 추상같고도 속 시원한 판결이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엄장은 헛기침을 몇 번 흠흠 하더니, 곁눈질로 엎드려 있는 초행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초행이 네놈, 시작은 비록 어설프고 한심하였으나 끝내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을 잃지 않고 어찌어찌 훌륭하게 수습을 잘하였구나. 네놈이 망각의 강물에 빠져 돌덩이가 되는 무시무시한 벌은 기꺼이 면해주겠다. 대신, 오늘부터 네놈에게 저승의 새로운 소임을 주마. 이승 구석구석을 누비며 이름조차 없이 고통받고 억울하게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이 있는지 샅샅이 살피고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무명(無名) 차사'의 고귀한 직분을 너에게 내리노라!"

    그 말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초행이의 얼굴에 환한 함박웃음이 활짝 피어올랐다.

    "예! 명심하겠습니다요, 판관 어르신! 이승 천지에 억울하게 이름 없는 자들의 그 깊은 한을, 제가 모조리 다 털어주겠습니다요!"

    초행이는 가슴 깊이 간직한 붉은 명부를 품에 꽉 끌어안고는, 자신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늙은 차사 묵산과 함께 씩씩하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저승의 그 어떤 지독한 망각의 강물도 끝내 지워내지 못했던 한 가엾은 인간의 진짜 이름은, 어리바리하지만 가슴 따뜻한 풋내기 차사의 마음속에 영원토록 훈훈한 온기로 남게 되었다.

    유튜브 엔딩멘트

    평생 개똥이로 살며 짐승 취급을 받았던 늙은 종 만식. 하지만 곤장 맞던 밤 손톱으로 꾹꾹 눌러 새긴 진짜 이름 '만식'은 그의 고결한 영혼을 증명하는 찬란한 이름표였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계신가요? 이름 속에 담긴 따뜻한 의미와 인생의 무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재미있게 들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잊지 마시고요! 다음에도 더 흥미진진한 「염라야담」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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