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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향스님의 저승세계 유람기 [청구야담]

    죽을 날이 아닌데 저승에 끌려간 스님은 염라대왕에게서 단 사흘 안에 이름 없는 선행의 주인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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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죽을 날이 아직 삼십 년이나 남은 묘향스님이 저승사자의 명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염라대왕은 실수였다며 돌려보내는 대신 기묘한 부탁을 합니다. 평생 악행만 저지른 욕심쟁이의 가슴에 단 하나 남은 따뜻한 빛. 사흘 안에 그 선행의 정체를 찾지 못하면 스님도 이승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 1: 산사에 찾아온 두 저승사자

    조선 숙종 무렵, 충청도 속리산 자락의 작은 암자에 묘향이라는 스님이 살았다. 법당은 낡고 처마는 기울었지만 묘향의 얼굴에서는 언제나 편안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묘향은 어려운 경전을 길게 설명하기보다 사람들의 사연을 오래 들어 주는 스님이었다. 부부가 다투며 찾아오면 따뜻한 차부터 내주었고, 농사를 망친 농부가 죽고 싶다며 울면 함께 밭으로 내려가 돌을 골랐다.

    "스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누군가 물으면 묘향은 배를 두드리며 웃었다.

    "내 마음도 하루에 열두 번씩 변하니 남의 마음이 변하는 것이야 이상할 게 없지요."

    그해 늦여름, 산 아래 마을에 큰비가 내렸다. 개울물이 불어나 돌다리가 잠겼고, 뒷산에서는 작은 산사태가 일어나 초가집 세 채가 무너졌다.

    묘향은 암자의 쌀독을 열어 남은 쌀을 전부 마을로 보냈다. 동자승 법운이 빈 쌀독을 들여다보며 걱정했다.

    "스님, 이것까지 모두 나누면 우리는 무엇을 먹습니까?"

    "내일 탁발을 나가면 되지."

    "비 때문에 산길이 끊겼습니다."

    "그럼 물을 많이 넣어 죽을 끓이면 두 사람이 먹을 밥으로 열 사람이 먹을 수 있겠구나."

    "쌀이 하나도 없는데 물만 넣으면 그냥 물입니다."

    묘향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도 부처님 말씀 못지않게 옳구나."

    법운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날 저녁, 묘향은 무너진 집을 살피러 마을에 내려갔다. 물가에서는 한 아낙이 울부짖고 있었다. 어린 딸 순이가 불어난 개울 건너편에 고립되어 있었다.

    "순이야, 움직이지 마라!"

    아이는 바위 위에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물살은 점점 거세졌고, 떠내려온 나무가 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아이의 몸이 움찔했다.

    묘향은 허리에 굵은 밧줄을 묶었다.

    "스님, 위험합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날이 밝기 전에 저 바위가 물에 잠길 것 같구나."

    "수영도 못하시잖아요!"

    "그래서 밧줄을 묶는 것이지."

    묘향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살이 허벅지와 허리를 때렸다. 몇 번이나 발이 미끄러졌지만 밧줄을 붙잡고 아이가 있는 바위까지 건너갔다.

    그는 순이를 등에 업고 돌아왔다. 아이를 어머니 품에 안겨 주는 순간 묘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스님, 괜찮으십니까?"

    "오랜만에 물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구나."

    묘향은 농담하듯 웃으려 했지만 그대로 쓰러졌다.

    사람들은 그를 암자로 옮겼다. 열이 오르고 숨이 가늘어졌다. 의원은 산길이 끊겨 올 수 없었다. 법운은 밤새 젖은 수건을 갈아 주며 울었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묘향은 눈을 떴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자리에서 일어났는데도 법운은 그를 보지 못했다. 침상에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몸이 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몸을 두고 일어난 모양이구나.'

    묘향이 머리를 긁적이는데 방문 밖에서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검은 도포를 입은 사내 둘이 들어왔다. 한 명은 키가 크고 얼굴이 길었으며, 다른 한 명은 키가 작고 둥근 얼굴에 콧수염이 삐죽 솟아 있었다. 둘 다 조선식 관모를 썼고 허리에는 명부와 나무패가 매달려 있었다.

    키 큰 사내가 명부를 펼쳤다.

    "속리산 묘향암의 승려 묘향, 나이 마흔둘. 오늘 자정에 데려가라는 명이오."

    묘향은 침상에 누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죽은 것이오?"

    "죽었으니 우리가 왔겠지."

    키 작은 사내가 나무패를 뒤집어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형님, 이 사람은 수명이 일흔둘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뭐라고?"

    "마흔둘에 데려오라는 붉은 글씨 아래에 일흔둘까지 산다는 검은 글씨가 있습니다."

    키 큰 저승사자가 명부를 빼앗아 눈앞에 바싹 붙였다.

    "저승 서기가 붉은 먹물을 흘렸나?"

    "지난번에는 동명이인을 데려왔다가 염라전 마당을 백 바퀴 쓸었잖습니까."

    "그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지."

    묘향은 두 저승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잘못 찾아오셨다면 그냥 돌아가시면 되지 않소?"

    키 큰 사자가 헛기침했다.

    "저승사자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사유서를 열 장 써야 하오."

    "사람을 잘못 데려가면 몇 장을 씁니까?"

    "스무 장이오."

    "그럼 열 장 쓰는 편이 낫겠군요."

    키 작은 사자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키 큰 사자는 난처한 얼굴로 명부를 살폈다.

    "묘향이라는 이름 옆에 염라대왕의 직인이 찍혀 있소. 수명이 남아 있더라도 직접 데려오라는 뜻이오."

    "염라대왕께서 나 같은 산승에게 무슨 볼일이 있겠소?"

    "그것을 우리가 어찌 알겠소. 가서 직접 물어보시오."

    법운은 침상 곁에서 스승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스님, 제발 눈을 뜨십시오. 저를 혼자 두고 가시면 안 됩니다."

    묘향은 동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손이 안개처럼 통과했다.

    '이 아이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가야 하는가.'

    키 작은 사자가 묘향의 표정을 살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몸의 숨이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소?"

    "이승 시간으로 사흘입니다. 그 안에 돌아오면 다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사흘을 넘기면요?"

    키 큰 사자가 명부를 덮었다.

    "그때는 장례 준비를 해야겠지."

    저승사자 둘이 방문을 나서자 암자 밖에 희뿌연 길이 나타났다. 산길과 닮았지만 눈도 비도 내리지 않았고, 길 양쪽에는 푸른 등불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묘향은 마지막으로 법운과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합장한 뒤 저승길에 첫발을 내디뎠다.

    뒤에서 키 작은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고로 저는 먹쇠고 저분은 강림입니다."

    "저승사자도 이름이 있소?"

    "스님도 스님이 되기 전에는 이름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저승에서도 이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잊어버릴 뿐이지요."

    세 사람의 모습이 푸른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암자의 등잔불이 까닭 없이 길게 흔들렸다.

    ※ 2: 삼도천으로 가는 기억의 길

    저승길은 어둡지 않았다. 달도 해도 없는데 사방이 새벽처럼 희미하게 밝았다. 길옆에는 흰 꽃이 피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멀리서 종소리 같은 울림이 들렸다.

    묘향은 자신보다 앞서가는 망자들을 보았다. 어떤 이는 커다란 보따리를 등에 지고 있었고, 어떤 이는 빈손으로 가볍게 걸었다. 이상한 것은 보따리가 천이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한 사내는 금빛 동전을 산처럼 짊어지고 있었다. 동전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내 돈이다. 아무도 가져가면 안 된다."

    사내는 보따리를 내려놓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다른 노파는 금이 간 놋숟가락 하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숟가락은 작았지만 노파는 거대한 바위를 안은 사람처럼 힘들어했다.

    묘향이 먹쇠에게 물었다.

    "망자들이 짊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미련입니다. 이승에서 놓지 못한 마음이 저승에서는 짐으로 보이지요."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무거운가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진 것보다 놓지 못한 것이 많으면 무겁습니다."

    먹쇠가 앞쪽의 젊은 여인을 가리켰다. 여인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지만 아무 짐도 없이 걸었다.

    "저 여인은 큰 부잣집 딸이었지만 죽기 전에 가진 것을 모두 동생과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발걸음이 가볍지요."

    반대로 누더기를 입은 노인은 빈 쌀자루를 끌고 있었다. 평생 한 줌도 남에게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자루 안에서 돌처럼 구르고 있었다.

    세 사람은 놋숟가락을 품은 노파 곁을 지나게 됐다. 노파는 길가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이 숟가락을 버리면 안 돼. 내 아들이 처음 사 준 것이야."

    강림이 재촉했다.

    "삼도천의 배가 곧 떠납니다. 짐을 내려놓지 않으면 탈 수 없소."

    "이것만은 가져가게 해 주시오."

    "저승에는 밥도 없는데 숟가락을 어디에 쓰려는 것이오?"

    노파는 숟가락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묘향은 노파 앞에 앉았다.

    "아드님이 이 숟가락을 드릴 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첫 품삯으로 산 것이니 오래오래 밥을 드시라고 했지."

    "아드님이 준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오래 살라는 마음이었군요."

    노파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아이는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어."

    "그러면 숟가락을 품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드님의 마음은 이미 어르신 안에 있으니까요."

    노파는 한참 망설이다 숟가락을 길가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놋숟가락은 작은 빛이 되어 노파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굽었던 허리가 펴지고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먹쇠가 감탄했다.

    "스님은 저승에 와서도 일을 하시는군요."

    "울고 있는 사람을 보고 지나치면 길이 더 멀어지는 법이지요."

    강림은 무뚝뚝한 얼굴로 앞장섰지만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노파가 뒤처지지 않도록 속도를 맞춘 것이었다.

    한참을 걷자 길가에 커다란 주막이 나타났다. 처마에는 붉은 등불이 달렸고 마당에는 망자들이 줄을 서 있었다.

    주막 안에서는 갓 지은 밥과 된장국, 구운 생선 냄새가 흘러나왔다. 묘향은 자신이 사흘 가까이 굶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배를 움켜잡았다.

    "저승에도 주막이 있습니까?"

    "기억주막입니다. 음식은 없고 냄새만 팔지요."

    "냄새를 돈 주고 산다고요?"

    "망자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음식의 냄새를 한 번 맡게 해 줍니다. 값은 이승의 기억 하나입니다."

    주막 주인은 쪽진머리를 한 중년 여인이었다. 그녀는 망자에게 작은 빈 그릇을 내밀었다. 사내가 그릇에 코를 대자 뜨거운 국밥을 먹는 듯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가 끓여 주시던 무국 냄새요."

    냄새가 사라지자 사내는 어머니 얼굴에 관한 기억 하나를 주막에 남겼다. 그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묘향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운 냄새를 맡고 그 사람의 얼굴을 잊는다면 너무 비싼 값이 아닙니까?"

    먹쇠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많은 망자가 줄을 섭니다. 죽어서도 사람은 당장 달콤한 것을 참지 못하니까요."

    노파도 주막 쪽을 바라보았다. 아들과 먹었던 팥죽 냄새가 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줄에 서지 않았다.

    "얼굴을 잊느니 배고픈 채로 가겠네."

    묘향이 미소 지었다.

    "이제 숟가락을 제대로 내려놓으셨군요."

    기억주막을 지나자 넓은 강이 나타났다. 강물은 검지도 붉지도 않았다. 수많은 기억이 녹아든 듯 빛깔이 계속 변했다. 어느 곳은 봄 논처럼 푸르고, 어느 곳은 저녁노을처럼 붉었다.

    삼도천이었다.

    나루에는 배 세 척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림이 설명했다.

    "남을 원망한 마음이 무거운 사람은 물살 센 길로 갑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친 사람은 잔잔한 길로 가고, 아직 삶의 인연이 끝나지 않은 사람은 가운데 배를 탑니다."

    묘향은 가운데 배에 올랐다. 노파는 잔잔한 강 쪽의 배에 탔다. 떠나기 전 노파가 묘향에게 합장했다.

    "스님 덕분에 아들 마음을 잃지 않고 갑니다."

    "어디에 가시든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받으시길 바랍니다."

    배가 강 위로 나아갔다. 강물 아래에서는 수많은 장면이 비쳤다. 누군가 태어나는 순간, 혼례를 올리는 날, 부모를 떠나보내는 모습, 아이의 첫걸음이 물결마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묘향은 자신의 삶도 보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놓친 날, 처음 머리를 깎던 순간, 굶주린 아이에게 밥을 내주었던 모습이 지나갔다.

    그러다 강물 한가운데서 이상한 장면이 비쳤다.

    마귀팔의 저택만큼이나 큰 기와집 앞에서 초라한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집주인으로 보이는 뚱뚱한 사내는 노인을 발로 밀어내며 대문을 닫았다.

    그런데 대문 옆에 있던 어린 하인이 몰래 나와 노인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반쪽짜리 보리떡이었다.

    장면은 잠시 뒤 흐려졌다.

    묘향이 물었다.

    "저것은 누구의 기억입니까?"

    먹쇠가 강물을 들여다보았다.

    "배가 저승 재판에 필요한 기억을 미리 보여 줄 때가 있습니다. 아마 염라대왕께서 스님을 부른 이유와 관련이 있겠지요."

    배가 강 건너에 닿자 거대한 성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문 위에는 붉은 구름이 흐르고, 안쪽으로 수많은 전각이 끝없이 이어졌다.

    강림은 허리의 나무패를 문에 댔다.

    "묘향암 승려 묘향을 데려왔소."

    성문이 낮은 울림과 함께 열렸다.

    문 안에서는 수천 장의 종이가 바람도 없이 날아다녔다. 종이마다 사람의 이름과 살아온 날들이 적혀 있었다.

    그중 한 장이 묘향의 얼굴 앞에 멈췄다.

    묘향, 마흔둘. 이승의 수명 삼십 년 남음. 저승 체류 허가 사흘.

    그 아래에는 붉은 글씨로 한 줄이 더 쓰여 있었다.

    사흘 안에 판결을 끝내지 못할 경우, 이승의 육신과 인연이 끊어짐.

    묘향은 처음으로 웃음을 거두었다.

    ※ 3: 염라대왕의 이상한 부탁

    저승의 성 안은 묘향이 상상한 모습과 달랐다. 사방에서 비명과 불길이 솟는 곳인 줄 알았지만, 오히려 큰 관아와 장터가 한데 모인 듯했다.

    푸른 도포를 입은 서기들이 장부를 들고 뛰어다녔고, 저승사자들은 데려온 망자의 이름을 확인받기 위해 줄을 섰다. 여기저기서 동명이인을 잘못 데려왔다거나 생년월일이 다르다며 다투는 소리도 들렸다.

    한 서기가 명부를 들여다보다 소리쳤다.

    "김복동을 데려오랬더니 왜 김복순을 데려왔소?"

    "글씨가 번져서 순 자가 동 자처럼 보였습니다."

    "지난달에도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소!"

    먹쇠가 묘향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승도 결국 사람이 살다 오는 곳이라 실수가 없지는 않습니다."

    "염라대왕께서 들으시면 혼나지 않겠소?"

    "이미 다 듣고 계실 겁니다."

    먹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세 사람은 염라전으로 들어갔다. 높고 넓은 전각 한가운데에 염라대왕이 앉아 있었다. 붉은 관복에 검은 수염을 길렀으며, 눈빛은 매서웠지만 얼굴에는 밤샘 업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탁자 양쪽에는 죄와 선행을 적은 장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염라대왕은 한 손으로 판결문을 읽고 다른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속리산의 묘향이냐?"

    묘향이 합장했다.

    "그렇습니다."

    "죽을 날도 아닌 사람을 데려와 미안하게 됐다."

    강림과 먹쇠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직인이 분명히 찍혀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누가 너희를 나무랐느냐?"

    "아직 아무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조용히 있거라."

    두 저승사자는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묘향이 물었다.

    "명부의 실수가 아니라 대왕께서 직접 부르셨습니까?"

    "그렇다. 네게 맡길 일이 하나 있다."

    염라대왕이 손짓하자 전각 중앙에 사람 키보다 큰 거울이 솟아났다. 거울 테두리에는 눈과 귀, 입 모양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이것이 업경이다. 죽은 자가 살아서 한 일을 한 장면도 빠짐없이 비춘다."

    거울 안에 기와집과 넓은 논밭이 나타났다. 오십대의 뚱뚱한 사내가 소작농들을 앞에 세우고 곡식가마니를 빼앗고 있었다.

    "저자는 최만석이라는 자다. 평안도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객주를 운영했으며 사흘 전 죽었다."

    만석은 쌀에 모래를 섞어 팔았고, 글을 모르는 사람의 빚문서를 고쳐 썼다. 흉년에는 창고를 잠가 곡식값을 올렸으며, 빚을 갚지 못한 과부의 집을 빼앗았다.

    거울 속 장면이 바뀔 때마다 죄를 적은 검은 돌이 저울 위에 쌓였다. 반대편의 선행을 재는 접시에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판결은 이미 끝난 것 아닙니까?"

    "원래라면 탐욕의 옥에서 오십 년 동안 남의 굶주림을 제 배로 느끼게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까?"

    염라대왕이 최만석의 가슴을 가리켰다. 거울 속 만석의 심장 근처에서 콩알만 한 붉은 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저 빛은 무엇입니까?"

    "선행의 흔적이다."

    "평생 악행만 저질렀다면서요?"

    "그래서 너를 불렀다."

    염라대왕은 두꺼운 장부를 펼쳤다. 만석의 삶은 태어난 날부터 죽은 날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열일곱 살 겨울의 하루만 먹물이 번져 읽을 수 없었다.

    그날의 선행이 무엇인지, 누구에게 베풀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업경에도 같은 하루가 흐릿하게 가려져 있었다.

    "작은 선행 하나가 수많은 악행을 없애 줄 수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다. 선행은 죄를 지우는 지우개가 아니고, 죄도 선행을 삼키는 먹물이 아니다. 각각 따로 판결해야 한다."

    염라대왕은 저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한 선행을 빠뜨리면 저승의 판결이 불공정해진다. 아무리 선한 자라도 한 잘못을 감춘 채 상을 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왜 저에게 그 선행을 찾으라 하십니까?"

    "저승의 관리들은 장부와 업경에 기록된 것만 본다. 하지만 너는 저승길에서 놋숟가락을 든 노파에게서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보았다더군."

    묘향은 강림과 먹쇠를 돌아보았다. 먹쇠가 눈을 피하며 휘파람을 부는 시늉을 했다.

    염라대왕이 말을 이었다.

    "최만석의 열일곱 살 겨울로 들어가 그날의 진실을 찾아라. 기한은 이승 시간으로 사흘이다."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곧바로 이승으로 돌려보내 주마."

    묘향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억지로 시키지는 않으시는군요."

    "선행을 강요하면 이미 선행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면 굳이 제 수명과 인연이 끊어진다는 글을 명부에 적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염라대왕은 서기들을 돌아보았다. 한 서기가 놀라 명부를 확인하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체류 허가 사흘이라고 적어야 하는데, 사흘 안에 판결하지 못하면 육신과 인연이 끊어진다고 잘못 적었습니다."

    염라대왕의 수염이 꿈틀거렸다.

    "누가 썼느냐?"

    서기가 떨리는 손으로 옆 사람을 가리켰고, 옆 사람은 다시 먹쇠를 가리켰다. 먹쇠는 억울한 얼굴로 강림을 보았다.

    "저는 글씨를 못 씁니다."

    "그게 자랑이냐?"

    염라전 한쪽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묘향도 긴장이 풀려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염라대왕의 표정은 곧 다시 무거워졌다.

    "장부의 문구는 실수지만 이승의 육신이 사흘 이상 혼 없이 버티기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전에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거절해도 되지만, 진실을 찾으려면 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셈이군요."

    "미안하지만 그렇다."

    묘향은 잠시 생각했다. 평생 악행을 저지른 사람의 작은 선행 하나를 찾기 위해 자신의 남은 삶을 걸 이유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한 사람의 선행을 하찮다고 버리기 시작하면 저승의 저울도 이승의 저울과 다를 것이 없겠지.'

    묘향은 합장했다.

    "가 보겠습니다."

    염라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업경 표면이 물결처럼 흔들리더니 눈 내리는 한양 거리가 나타났다. 열일곱 살의 최만석이 허름한 객주 앞에서 떨고 있었다. 아직 부자가 되기 전인지 옷은 누더기였고 얼굴은 굶주림에 야위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반쪽짜리 보리떡이 들려 있었다.

    바로 삼도천의 물결에서 보았던 장면이었다.

    묘향이 거울에 손을 대자 몸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강림과 먹쇠도 뒤따라 뛰어들었다.

    세 사람은 눈 내리는 한양 골목에 떨어졌다. 하지만 업경 속 사람들은 그들을 보지 못했다.

    젊은 만석은 보리떡을 품에 숨긴 채 골목 끝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초라한 노인 하나가 비틀거리며 따라가고 있었다.

    "저 노인에게 보리떡을 나누어 준 것이 선행 아닙니까?"

    먹쇠가 묻자 강림이 장부를 살폈다.

    "이상하군. 장부에는 만석이 노인의 떡을 훔쳤다고 적혀 있다."

    젊은 만석은 골목 모퉁이에 이르자 노인을 거칠게 밀쳤다. 노인이 눈밭에 쓰러졌고, 품에서 남은 보리떡 반쪽이 떨어졌다.

    만석은 떡을 주워 들고 달아났다.

    묘향의 표정이 굳었다. 삼도천에서 본 장면과 정반대였다.

    그때 눈밭에 쓰러진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눈도 코도 입도 없었다. 텅 빈 얼굴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억이 바뀌었다."

    순간 한양 골목 전체가 먹물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업경 속에 들어와 최만석의 단 하나뿐인 선행을 훔쳐 갔다."

    ※ 4: 업경 속에서 사라진 하루

    업경 속 겨울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묘향스님과 강쇠, 공림은 눈 덮인 장터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세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곳은 이미 지나가 버린 기억 속 세상이었다.

    젊은 최만석이 떡전 앞에서 반쪽짜리 시루떡을 움켜쥐고 있었다. 며칠을 굶은 듯 얼굴이 누렇게 뜬 노인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젊은이, 한입만 나누어 주게. 내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네."

    만석은 노인의 손을 뿌리치려다 멈칫했다. 주머니에는 엽전 한 닢도 없었다. 떡은 그가 품삯 대신 받은 유일한 끼니였다.

    '이걸 주면 내가 굶는다. 하지만 저 노인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지도 몰라.'

    그는 떡을 다시 반으로 갈랐다. 큰 쪽을 노인에게 내밀고 작은 쪽을 자기 입에 넣었다.

    "이것밖에 없으니 천천히 드시오."

    그 순간 노인의 몸에서 희미한 금빛이 피어났다. 그런데 검은 먹구름 같은 손 하나가 허공에서 뻗어 나오더니 그 빛을 움켜쥐었다. 만석의 선행이 기록되어야 할 자리에 텅 빈 얼룩만 남았다.

    "저 손이다!"

    강쇠가 쇠사슬을 던졌으나 검은 손은 땅바닥에 떨어진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묘향스님이 합장하며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숨은 자가 있다면 나오시오. 남의 죄를 대신 질 수 없듯, 남의 공덕도 빼앗아 가질 수 없소."

    그러자 떡전 뒤편에서 갓을 눌러쓴 사내가 걸어 나왔다. 관아의 아전 차림이었지만 얼굴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공덕은 주인 없는 재물과 같소. 기록되지 않았다면 먼저 집어 드는 자의 것이지."

    공림이 호패를 펼쳤다.

    "저승의 기록을 건드리는 것은 염라전의 대죄다. 이름을 밝혀라."

    사내가 비웃으며 갓을 벗었다. 얼굴에는 눈과 코가 없었고, 이마에 커다란 붓 자국 하나만 찍혀 있었다.

    "나는 기록에서 지워진 자다. 산 자였을 때는 한양 관아의 서리였고, 죽어서는 업경전의 말단 필경사였지. 내 이름은 문필재다."

    업경 속 풍경이 일그러졌다. 장터의 기와지붕이 녹아내리듯 사라지고, 끝없는 문서 창고가 나타났다. 선반마다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이 적힌 두루마리가 빼곡했다. 문필재의 뒤에는 금빛 글자가 든 항아리 수백 개가 놓여 있었다.

    "저것들이 모두 훔친 공덕이냐?"

    "사람들은 작은 선행을 기억하지 못한다. 길가의 돌을 치운 일, 굶은 개에게 밥을 준 일, 남몰래 눈물을 닦아 준 일 말이다. 잊어버린 공덕을 내가 거두어 무엇이 잘못인가?"

    묘향스님은 항아리 하나에 손을 얹었다.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늙은 어머니의 감사, 가난한 이의 안도하는 숨이 들려왔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인이 없는 것은 아니오. 씨앗이 땅속에 묻혔다고 남의 것이 되는 것도 아니지."

    문필재가 붓을 휘둘렀다. 검은 먹물이 뱀처럼 솟아올라 세 사람의 발목을 감았다. 먹물이 닿은 곳마다 묘향스님의 기억이 흐려졌다. 산사의 이름도, 자신의 얼굴도, 구해 낸 아이의 모습도 희미해졌다.

    "스님, 마음속 이름을 놓치지 마시오!"

    강쇠의 외침이 멀리서 들렸다. 묘향스님은 눈을 감고 목탁 소리를 떠올렸다. 그러자 작은 아이의 목소리가 가슴속에서 울렸다.

    "스님,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한마디가 등불이 되어 먹물을 갈랐다. 묘향스님은 염주를 풀어 항아리들 사이로 던졌다. 염주알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금빛 글자가 제 주인을 찾아 날아갔다. 문필재의 몸을 덮고 있던 화려한 관복도 한 겹씩 벗겨졌다.

    마침내 최만석의 공덕이 담긴 항아리가 깨졌다. 반쪽 시루떡 모양의 빛이 떠올라 만석의 가슴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문필재가 마지막 두루마리를 품에서 꺼냈다.

    "이것까지 돌려주면 나는 다시 무명귀가 된다. 누구도 내 이름을 불러 주지 않을 것이다!"

    두루마리에는 문필재가 살아 있을 때 저지른 죄가 적혀 있었다. 그는 뇌물을 받고 가난한 백성들의 호적을 지웠고, 죽은 뒤에도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남들의 공덕을 훔쳐 이름을 꾸며 왔다.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또 다른 죄를 쌓았구려."

    "이름 없는 혼이 되는 것보다 낫다!"

    문필재가 두루마리를 찢으려는 순간, 묘향스님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니오. 죄를 인정하면 비로소 진짜 이름을 되찾을 수 있소."

    문필재의 몸이 떨렸다. 얼굴을 가리던 안개가 걷히며 겁에 질린 늙은 사내의 눈이 나타났다. 그가 두루마리를 놓자 문서 창고 전체가 흔들렸다. 수천 개의 항아리가 깨지고, 훔쳐 온 공덕들이 별빛처럼 저승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그 빛 사이로 붉은 종 하나가 떨어졌다. 종이에는 선명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묘향, 육신이 식기까지 남은 시간 한 시진.

    공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큰일 났습니다. 사흘이 아니라 한 시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세 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저승의 문들이 하나씩 닫히기 시작했다.

    ※ 5: 지옥문을 닫은 작은 친절

    세 사람은 닫혀 가는 저승길을 달렸다. 문필재도 쇠사슬에 묶인 채 뒤따랐다. 삼도천의 물은 처음 건널 때보다 거칠었고, 강물 속 망자들이 손을 뻗어 배를 붙잡았다.

    "내 이름을 찾아 주시오."

    "내가 베푼 일도 기록되어 있소?"

    "우리 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주시오."

    묘향스님은 그 손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하나씩 잡아 주다 보니 배의 속도가 느려졌다. 강쇠가 다급하게 외쳤다.

    "스님, 지금은 산 사람의 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지체하면 정말 죽습니다."

    "이들의 한이 나보다 가볍지는 않소."

    "하지만 모두를 구할 수는 없소!"

    묘향스님은 잠시 눈을 감았다. 강물 건너편에서는 염라전의 북소리가 울리고, 뒤편에서는 망자들의 울음이 따라왔다.

    '한 사람을 살리려다 다른 사람을 밀어낸다면 그것이 자비일까. 하지만 내가 여기서 죽으면 산사의 아이도, 기다리는 이들도 슬퍼할 것이다.'

    그때 문필재가 고개를 들었다.

    "배 밑에 숨겨진 종을 울리시오. 망자들의 사연을 염라전까지 전하는 신문고요. 다만 그 종을 울린 자는 자기 공덕 하나를 대가로 내야 하오."

    강쇠가 노려보았다.

    "또 무슨 속임수를 꾸미느냐?"

    "이제 속여서 얻을 이름도 없소."

    묘향스님은 망설이지 않고 배 밑의 작은 청동 종을 꺼냈다. 종을 울리자 맑은 소리가 삼도천을 가로질렀다. 망자들의 손에서 사연이 적힌 흰 종잇조각이 피어올라 종소리를 타고 염라전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묘향스님의 가슴에서 금빛 하나가 빠져나갔다.

    그 빛은 산골짜기에서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한 공덕이었다.

    공림이 놀라 물었다.

    "그 공덕이 없으면 스님이 저승에 잘못 끌려왔다는 증거도 약해집니다."

    "아이를 살린 일은 상을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니 없어져도 괜찮소."

    배가 강기슭에 닿자 거대한 재판문이 열렸다. 염라대왕은 붉은 관복을 입고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좌우로 판관과 저승사자들이 늘어서고, 가운데에는 최만석의 혼이 무릎 꿇고 있었다.

    최만석은 살아 있을 때처럼 두툼한 비단옷을 입었지만 얼굴은 메말라 있었다.

    "나는 평생 빼앗기만 했소. 어릴 적 떡 한 조각을 나눈 것이 무슨 소용이겠소?"

    염라대왕이 업경을 비추자 만석의 악행이 줄줄이 나타났다. 흉년에 곡식을 숨긴 일, 빚진 농부의 밭을 헐값에 빼앗은 일, 품삯을 미룬 일, 병든 하인을 내쫓은 일이었다. 마지막에 작은 금빛 하나가 나타났다. 눈보라 치던 장터에서 노인에게 떡을 건넨 모습이었다.

    "작은 선행 하나가 큰 죄를 지울 수는 없다."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그러나 그 선행마저 없었다면 이자는 다른 이를 불쌍히 여긴 적이 한 번도 없는 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제 진실이 돌아왔으니 죄는 죄대로, 선은 선대로 판단하겠다."

    최만석이 고개를 숙였다.

    "벌을 받겠소.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내 창고 밑에 감춰 둔 곡식을 풀어 굶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오. 떡을 나누었던 그날의 내가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소."

    업경 속 저택 마당이 비쳤다. 큰 느티나무 아래 묻힌 쇠 열쇠와 비밀 창고가 나타났다. 판관이 산 자의 꿈에 그 위치를 전하도록 기록했다.

    이번에는 문필재가 재판대 앞에 섰다.

    "남의 공덕을 훔치고 기록을 고친 죄가 무겁다. 할 말이 있느냐?"

    문필재는 떨리는 손으로 엎드렸다.

    "제 죄를 모두 받겠습니다. 다만 제가 지워 버린 백성들의 이름부터 되찾게 해 주십시오. 그 일을 마치기 전에는 어떤 벌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염라대왕은 잠시 침묵하다가 낡은 붓 한 자루를 내렸다.

    "천 명의 이름을 바르게 써야 네 이름 한 획을 돌려받을 것이다. 거짓 한 글자를 적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

    문필재는 붓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러나 판관이 묘향스님의 생사부를 펼친 순간 대전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생사부에는 붉은 줄이 두 개 그어져 있었다.

    "묘향의 남은 수명이 사라졌습니다."

    "어찌 된 일이냐?"

    공림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문고를 울리며 아이를 구한 공덕을 내놓았습니다. 그 공덕이 스님을 산 자로 증명하던 표식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묘향스님을 바라보았다.

    "네가 돌아갈 문은 공덕으로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제 그 문을 열 열쇠가 없다."

    그때 삼도천의 망자들이 보낸 흰 종잇조각들이 대전 안으로 날아들었다. 수백, 수천 장의 종이가 묘향스님 주위를 돌았다. 종이마다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우리의 말을 들어 준 이가 산 자라면, 그를 산 자의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종잇조각들이 모여 거대한 흰 연꽃이 되었다. 염라대왕의 굳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기 공덕은 내놓았으나 타인의 마음이 새 공덕을 만들었구나."

    그가 판결봉을 내리쳤다.

    "묘향의 귀환을 허락한다. 단, 산 자의 세상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대전 바닥이 갈라지며 세 개의 문이 솟아올랐다. 첫째 문에서는 산사의 목탁 소리가 들렸고, 둘째 문에서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며, 셋째 문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향 한 자루가 타는 동안뿐이었다.

    ※ 6: 이승으로 돌아온 묘향스님

    향불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강쇠가 첫째 문 앞에 귀를 댔다.

    "산사의 목탁 소리입니다. 스님의 몸이 있는 곳이 틀림없소."

    공림은 둘째 문을 살폈다.

    "물에 빠졌던 아이의 울음입니다. 스님을 기다리는 인연이니 이쪽일 수도 있습니다."

    묘향스님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셋째 문 앞에 섰다. 문에는 손잡이도 글씨도 없었다. 검은 나무판 하나만 걸려 있었다.

    "왜 아무 소리도 없는 문을 보십니까?"

    "목탁 소리도 아이의 울음도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소리요. 저승길에서 욕심은 금은보화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소. 그리움도 때로는 눈을 가리는 법이지."

    "그럼 아무것도 없는 문이 정답이란 말씀이오?"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미 아는 곳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날을 향해 가는 일이 아니겠소."

    향불이 마지막 불씨만 남겼다. 묘향스님이 셋째 문에 손바닥을 대자 나무판에 글자가 떠올랐다.

    돌아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묘향스님은 잠시 생각했다. 최만석의 죄와 작은 선행, 이름을 잃은 문필재, 삼도천에서 손을 내밀던 망자들이 떠올랐다.

    "산 사람의 말을 더 많이 듣겠소. 선행은 기억해 주고, 잘못은 숨기지 않도록 이르겠소.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저승도 거짓 없는 곳이라고 전하겠소."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 너머에는 찬란한 빛도 무서운 어둠도 없었다. 다만 새벽 안개가 낀 좁은 산길이 이어져 있었다.

    강쇠가 쇠사슬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스님 때문에 사흘이 열흘처럼 길었소."

    공림은 낡은 장부를 품에 넣었다.

    "다음에는 생사부의 이름부터 제대로 확인하겠습니다."

    묘향스님이 웃었다.

    "다음에는 만나지 않는 것이 서로 좋지 않겠소?"

    강쇠가 무뚝뚝한 얼굴로 엽전 모양의 나무패를 건넸다.

    "저승사자가 살아 있는 자에게 물건을 주면 안 되지만, 길에서 주운 것이니 어쩔 수 없군."

    나무패 한쪽에는 들을 청 자가 새겨져 있었고, 다른 쪽에는 빌 공 자가 새겨져 있었다. 묘향스님이 의미를 묻기도 전에 산길 아래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강쇠와 공림의 모습이 안개 속으로 멀어졌다.

    "스님, 산 자의 말도 망자의 말처럼 귀하게 들으시오!"

    마지막 외침과 함께 묘향스님의 몸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산사의 법당에서는 스님들이 그의 몸을 둘러싸고 염불을 외고 있었다. 구해 낸 아이는 방문 밖에서 울음을 삼켰다. 묘향스님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이자 누군가 소리쳤다.

    "스님께서 숨을 쉬십니다!"

    묘향스님은 사흘 만에 눈을 떴다. 첫 숨을 들이마실 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두 번째 숨에서는 산사의 향 냄새가 느껴졌다. 세 번째 숨을 내쉬자 지붕 위에 쌓인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스님, 저 때문에 돌아가실 뻔하셨습니다."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엎드렸다. 묘향스님은 야윈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살아 있으니 내가 한 일도 살아 있구나. 그러니 미안해하지 말거라."

    그날 밤, 마을의 최만석 저택에서는 이상한 꿈을 꾼 하인이 느티나무 아래를 팠다. 꿈에서 붉은 관복을 입은 왕이 쇠 열쇠를 찾아 곡식을 풀라고 명했던 것이다. 땅속에서는 정말로 녹슨 열쇠가 나왔고, 저택 뒤편의 이중 벽 안에서 커다란 비밀 창고가 발견되었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이 나누어지자 사람들은 최만석이 죽기 전에 속죄할 길을 남겼다고 수군거렸다. 그가 저지른 악행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마지막 선택은 누군가의 목숨을 살렸다.

    묘향스님은 그 뒤로 산문 곁에 작은 누각을 지었다. 이름은 청공루라 했다. 누구든 억울하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그곳에 앉아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스님은 옳고 그름을 서둘러 가르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어느 봄날, 남루한 노인이 찾아와 말했다.

    "스님, 평생 좋은 일을 한 적이 없는 사람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까?"

    "숨이 남아 있다면 한 번은 할 수 있고, 한 번을 했다면 두 번도 할 수 있소."

    "그 작은 일이 저승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묘향스님은 반쪽짜리 시루떡을 노인 앞에 놓았다.

    "큰 죄를 작은 선행으로 덮을 수는 없소. 하지만 작은 선행은 사람이 완전히 어둠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님을 보여 주지. 그 빛을 따라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오."

    세월이 흘러 묘향스님의 머리와 수염이 눈처럼 희어졌다. 그가 입적하던 날, 제자들은 베개 밑에서 엽전 모양의 나무패를 발견했다. 들을 청 자는 닳아 희미해졌으나 빌 공 자는 새것처럼 선명했다.

    같은 시각, 저승의 생사부를 정리하던 공림이 묘향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죽을 날짜 대신 짧은 문장 하나만 적혀 있었다.

    남의 말을 끝까지 들은 자는 죽어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강쇠가 저승문 밖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모시러 갈 필요가 없겠군."

    멀리 삼도천 위로 흰 연꽃 한 송이가 떠내려왔다. 연꽃 안에서는 늙은 스님의 목탁 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망자들이 하나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묘향스님은 빈손으로 저승길을 걸었다. 이번에는 누구도 그의 이름을 잘못 부르지 않았다.

    유튜브 엔딩 멘트

    작은 선행 하나가 큰 죄를 지워 주지는 못하지만, 어둠 속에서 다시 걸어갈 길을 밝혀 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일 역시 귀한 공덕이겠지요. 오늘 이야기가 마음에 남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로 함께해 주세요. 다음 청구야담에서는 더욱 기이하고 따뜻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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