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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정의 아들 훈장 딸의 도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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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트로:

    "여러분,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하던 조선시대 천민 중의 천민, 백정의 아들이 어떻게 서당 훈장님의 금지옥엽 외동딸과 백년가약을 맺고 마침내 암행어사까지 될 수 있었을까요? 글자가 너무나 배우고 싶어 찬 서리가 내리는 서당 담장 밑에서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몰래 글을 쓰던 소년과, 그 소년에게 남몰래 책을 건네주며 운명을 바꾼 당찬 아씨의 기막힌 만남! 훗날 마패를 높이 치켜들고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멸시받던 백정 아버지의 거친 손을 잡고 관아 대청마루 한가운데에 당당히 오르기까지,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는 통쾌한 대역전극!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 1: 서당 담장 밑의 흙글씨와 모욕

    조선 후기, 충청도 홍주 땅의 산자락 끝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림자조차 밟기를 꺼리는 외딴 움막촌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소와 돼지를 잡아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손질하는 천민 중의 천민, 백정들이 모여 사는 고리백정 마을이었습니다. 당시 백정들은 호적에도 오르지 못해 사람 수에 끼지도 못했고, 길을 걸을 때는 양반은 물론이고 평민이나 상민 앞에서도 고개를 푹 숙여야 했으며, 심지어 어른이 되어도 상투를 틀고 머리에 갓을 쓰거나 비단옷을 입는 것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된 기구한 신세였습니다. 마을에 경조사가 있어 소를 잡을 때면 온갖 궂은일은 다 도맡아 하면서도, 정작 고기 한 점 대접받기는커녕 피 묻은 손이 더럽다 하여 마당 구석에 던져 주는 찬밥 덩어리를 감지덕지 받아먹어야 하는 서러운 삶이었습니다.

    이 백정 마을 어귀에 사는 늙은 백정 황 서방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열네 살짜리 외아들 바우가 있었습니다. 황 서방은 일찍이 아내를 병으로 잃고 홀몸으로 바우를 애지중지 길렀는데, 이 바우라는 소년은 비록 피비린내 나는 도살장 구석에서 자라났지만 어릴 때부터 기골이 남다르고 눈망울이 샛별처럼 맑았습니다. 게다가 한번 귀로 들은 말이나 눈으로 본 모양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통째로 외워버리는 비상한 총명함을 타고났습니다. 황 서방이 읍내 양반 댁에 잔칫상 고기를 배달하러 갈 때면 바우는 늘 작은 지게를 지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는데, 소년의 발길이 자석에 이끌리듯 멈추어 서는 곳은 언제나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박 훈장네 서당 담장 밑이었습니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담장 너머 넓은 대청마루에서 고운 명주 도포를 차려입은 양반집 도령들이 몸을 좌우로 흔들며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가 들려오면, 바우는 지게 작대기를 세워 두고 황토 담장에 귀를 바짝 붙인 채 숨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발밑에 떨어진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담장 밖 흙바닥에 서당 개구멍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글자들의 모양을 상상하며 조심스럽게 획을 그어 보곤 했습니다.

    어느 따스한 봄날 오후였습니다. 그날도 아버지 심부름으로 고을 갑부인 조 진사 댁에 고기 꾸러미를 배달하고 돌아오던 바우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서당 담장 밑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마침 서당 안에서는 박 훈장이 도령들에게 소학의 구절을 붓으로 크게 써서 대청 기둥에 걸어 두고 뜻을 풀이해 주고 있었습니다. 바우는 개구멍 사이로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 그 먹글씨의 삐침과 맺음을 눈으로 삼키듯 바라보며, 마른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로 똑같이 글자를 베껴 쓰고 있었습니다.

    '아하, 저렇게 왼쪽에 말씀 언 변이 들어가고 오른쪽에 몸 기 자가 붙으면 기록할 기 자가 되는구나. 참으로 신기하고도 오묘하다. 아아, 나도 저 도령들처럼 하얀 종이 위에 까만 먹물을 찍어 붓으로 글씨를 한 번만 써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릴 것만 같은데...'

    바우가 나뭇가지 끝으로 흙바닥에 한창 글씨를 써 내려가며 혼자만의 행복에 젖어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서당 쪽문이 벌컥 열리더니, 수업이 끝난 양반집 도령 대여섯 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맨 앞장서서 걸어 나온 자는 고을 최고의 부호이자 악명 높은 토호인 조 진사의 외아들 조 도령이었습니다. 조 도령은 공부는 뒷전이고 제 아비의 권세를 믿고 거드름을 피우며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데에만 이골이 난 안하무인 망나니였습니다. 조 도령은 담장 밑에 쭈그리고 앉은 바우의 남루한 잠방이와 손에 든 나뭇가지를 보더니, 비단 소매로 코를 감싸 쥐며 역겹다는 듯이 바닥에 침을 카악 뱉었습니다.

    "어이구, 이 고약한 피비린내! 난 또 어디서 죽은 개 썩는 냄새가 나나 했더니만, 아랫마을 소 잡는 백정 놈의 새끼가 감히 서당 담장 밑에까지 기어들어 와 있었구나! 야, 이 천한 백정 놈아! 네놈이 지금 감히 성현의 귀한 글자를 저 더러운 땅바닥에 흉내 내어 그린 것이냐?"

    조 도령의 서슬 퍼런 호통에 바우는 깜짝 놀라 얼른 나뭇가지를 등 뒤로 숨기며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도, 도령님...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소인은 그저 글 읽는 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아 잠시 길가에서 다리를 쉬어가던 중이었사옵니다. 도령님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바우가 차가운 땅바닥에 이마가 닿도록 엎드려 빌었지만, 심술궂은 조 도령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바우가 흙바닥에 정성껏 써 놓은 반듯한 글자들을 자신의 비단 가죽신 발바닥으로 사정없이 문질러 뭉개버렸습니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도령님..."

    바우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글자를 가리고 나뭇가지를 줍자, 조 도령의 눈빛이 사납게 변하더니 나뭇가지를 쥐고 있는 바우의 여린 손등을 가죽신 발굽으로 지그시 밟아 힘껏 비틀었습니다.

    "으윽!"

    거친 자갈과 신발 바닥 사이에서 손등의 살갗이 벗겨지며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바우는 이를 악물고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참았습니다. 조 도령은 허리에 손을 얹고 발에 더욱 힘을 주며 거만하게 조롱했습니다.

    "하하하! 얘들아, 이 미련하고 건방진 백정 놈 하는 짓 좀 보아라! 제 아비는 평생 도살장에서 소 대가리나 치고 가죽이나 벗기는 천출 주제에, 그 아들이란 놈이 글자를 배워서 대체 무엇에 쓰겠다는 게냐? 백정 놈이 공자 맹자를 논하면 지나가던 소가 웃다가 꾸정물 통에 빠져 죽겠다! 야 이놈아, 네놈 손가락은 고귀한 붓을 잡을 손이 아니라 평생 소 가죽 벗길 식칼이나 잡을 손이니, 다시는 서당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아라! 네놈 몸에서 나는 더러운 피 냄새가 우리 서당의 신성한 글기운을 망친단 말이다!"

    뒤에 서 있던 다른 도령들도 까르르 웃으며 발길질로 바우의 등에 흙모래를 뿌려대고는 시시덕거리며 장터 쪽으로 사라졌습니다. 텅 빈 골목길에 홀로 남겨진 바우는 피가 맺힌 손등으로 무참히 지워진 흙바닥의 글자 자국을 쓸어만지며, 참았던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그날 저녁, 어둑해진 움막으로 돌아온 바우는 아버지가 걱정할까 봐 퉁퉁 부어오른 손을 등 뒤로 숨긴 채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글을 향한 타오르는 갈증을 이기지 못해, 왼손으로 타다 남은 부지깽이를 쥐고 아궁이 앞의 하얀 재 위에 다시 낮에 보았던 글씨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때 도살 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온 아버지 황 서방이 부엌문을 열었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우뚝 멈추어 섰습니다. 아들의 퉁퉁 부어 피가 말라붙은 오른손을 발견한 황 서방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바우의 손을 거친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습니다.

    "아이고, 내 새끼 바우야... 또 서당 담장 밑에 갔다가 그 모진 양반 도령들에게 밟힌 게로구나. 이 못난 아비가 백정으로 태어난 죄로, 저리도 총명한 네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구나. 바우야, 제발 이 아비 소원이니 글공부 생각은 이제 그만 접어라. 우리 같은 고리백정이 글을 깨친들 과거 시험장에 들어갈 수가 있느냐, 갓을 쓰고 양반 행세를 할 수가 있느냐. 오히려 건방지다고 양반 댁에 끌려가 멍석말이나 당하기 십상이니, 그저 아비 따라 조용히 고기나 썰며 목숨이나 부지하자꾸나..."

    늙은 아버지의 눈물 섞인 만류에 바우는 아버지를 안심시키려 고개를 끄덕였지만, 소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오히려 그 어떤 물로도 끌 수 없는 뜨거운 불길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어찌 양반의 머리와 백정의 머리를 따로 내셨겠습니까. 비록 낮에는 양반들의 눈이 무서워 서당 근처에 가지 못하더라도,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는 그 누구도 제 귀와 눈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날 밤부터 바우는 낮에는 아버지를 도와 누구보다 성실하게 소가죽을 손질하고, 밤이 깊어 온 고을이 잠들면 몰래 움막을 빠져나와 서당 뒤편 대나무 숲 담장 밑으로 숨어들었습니다. 학문이 깊기로 소문난 박 훈장이 밤늦게까지 홀로 등불을 켜고 앉아 낭독하는 사서삼경과 주역의 글귀를 담장 너머로 한 자도 빠짐없이 귀에 담아 암송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서당 담장 밑의 그림자가 된 지 어언 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 2: 달빛 아래 건네진 책 한 권

    바우가 열일곱 살의 훤칠하고 기골이 장대한 총각으로 자라난 어느 해 늦가을 밤이었습니다. 그날 밤은 유난히 찬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아 얇은 무명 잠방이를 입은 바우의 어깨가 오들오들 떨렸습니다. 입김을 불면 허연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지만, 바우는 서당 안방에서 들려오는 박 훈장의 주역 강독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달빛에 의지해 언 손가락 끝으로 땅바닥에 주역의 팔괘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지난 삼 년 동안 밤마다 귀동냥으로 듣고 땅바닥에 수만 번씩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끝에, 이제 바우는 천자문과 소학은 물론이거니와 대학, 논어, 맹자, 중용에 이르기까지 사서(四書)의 내용을 줄줄 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안방에서 주역의 난해한 구절을 읽던 박 훈장이 마른기침을 쿨룩거리며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담장 밖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바우가 자신도 모르게 그다음 이어질 구절과 그에 대한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을 나직하고도 묵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곤괘의 육이는 곧고 바르며 크니,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 하였거늘... 이는 곧 대지가 만물을 품어 기를 때에 높고 낮음이나 귀하고 천함을 가리지 않고 오직 바른 도로써 생명을 피워내는 천지의 이치와 같구나."

    바로 그때였습니다. 바우의 머리 위쪽, 서당 후원 대나무 숲으로 통하는 작은 쪽문 너머에서 바스락거리는 마른 낙엽 소리가 들리더니,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 맑고 조심스러운 처녀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내려왔습니다.

    "거기 담장 밑에 계신 분은 뉘시기에, 이 깊은 밤에 홀로 찬 서리를 맞으며 저희 아버님께서도 해독하기 어렵다 하시는 주역의 이치를 그토록 막힘없이, 그것도 그토록 깊고 바른 뜻으로 읊으시는 것입니까?"

    바우는 마치 심장이 멎는 듯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구름 사이로 나온 밝은 보름달 빛 아래, 후원 쪽문을 반쯤 열고 놋쇠 찻주전자를 든 채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박 훈장의 금지옥엽 외동딸인 열여섯 살 연화 아씨였습니다. 연화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박 훈장의 膝下(슬하)에서 자라며, 어깨너머로 글을 배워 웬만한 사대부 가문의 학자 못지않은 학식과 넓고 어진 성품을 갖춘 고을 최고의 규수였습니다. 그날 밤 밤늦도록 책을 읽는 아버지의 밤참으로 내어 갈 따뜻한 대추차를 끓여 오다가, 우연히 후원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깊고도 낭랑한 총각의 목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추었던 것입니다.

    "아, 아씨!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소인은... 소인은 그저 지나가던 아랫마을 백정..."

    바우는 달빛에 드러난 자신의 초라한 행색과 천한 신분이 탄로 나면, 이 고귀한 양반 댁 아씨조차 조 도령처럼 코를 막고 침을 뱉으며 더러운 것 취급을 할까 봐 덜컥 겁이 났습니다. 바우는 얼굴이 화끈거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뒷걸음질을 쳐 어둠 속으로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러자 연화 아씨가 찻주전자를 툇마루에 내려놓고 다급하게 쪽문 밖으로 한 걸음 나서며 바우를 불러 세웠습니다.

    "잠시만 멈추십시오! 도망치지 마십시오!"

    연화의 간곡한 외침에 바우의 발걸음이 멈칫했습니다. 연화는 바우가 서 있던 담장 밑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와, 달빛 아래 언 땅바닥에 가득 적혀 있는 바우의 손가락 글씨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바우의 얼어 터져 피가 맺힌 손끝을 보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나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동안 아침마다 후원 담장 밑을 쓸 때마다, 누가 써 놓았는지 모를 명필의 글자 자국들이 땅바닥에 남아 있어 늘 신기하게 여겼사옵니다. 손끝이 다 얼어 터지도록 차가운 땅바닥에 글을 쓰며 지난 삼 년 동안 밤마다 이곳을 찾아오신 분이 바로 총각이셨군요. 어찌 그리 고개를 숙이십니까? 제 눈에는 총각의 해진 옷이나 신분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저 차가운 흙바닥 위에 꽃처럼 피어난 성현의 반듯한 글씨와 총각의 맑고 깊은 눈빛만 보일 뿐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을 고기 써는 천민이나 짐승이 아닌, 학문을 아는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해 주는 연화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바우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했습니다. 북받쳐 오르는 감격에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연화는 바우가 땅바닥에 써 놓은 주역의 괘와 해설을 찬찬히 살펴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스승 한 분 없이 오직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귀동냥만으로 이 깊은 경지에 오르시다니, 총각은 하늘이 내린 기재이십니다. 이렇게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도 책 한 권, 붓 한 자루 없이 맨땅에 글을 쓰시다니요... 잠시만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연화는 총총걸음으로 서당 안채의 작은 서고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자신이 아껴 읽던 서책인 논어와 맹자, 시경, 그리고 깨끗한 한지 세 묶음과 벼루, 먹, 붓 두 자루를 보자기에 정성껏 싸 들고 나와 바우의 두 손에 살며시 안겨 주었습니다.

    "아, 아씨! 이렇게 귀한 보물 같은 책과 지필묵을 소인 같은 천출에게 주시면 어찌합니까! 만일 훈장 어르신께서 아시게 되면 아씨께서 큰 꾸중을 들으실 것이옵니다!"

    바우가 놀라 손을 내젓자, 연화는 고운 미소를 지으며 바우의 거친 손에 보자기를 꼭 쥐여 주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아버님 서고에는 같은 책이 여러 벌 있으니 모르실 것입니다. 성현의 말씀에 배우고자 하는 자에게는 가르침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학문을 사모하는 그 순수한 마음 앞에 어찌 양반과 백정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부터 이 책들을 가져가 마음껏 읽으시고, 다 읽으시거든 매달 달이 가장 밝은 보름밤에 이 후원 담장 밑으로 오십시오. 제가 다음 읽으실 책을 내어 드리고, 혹여 공부하시다가 막히는 구절이나 의문이 있으면 제가 아버님께 여쭈어 알아낸 뜻을 총각께 고스란히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씨... 이 은혜를, 이 하늘 같은 은혜를 소인이 죽어서라도 어찌 다 갚겠사옵니까..."

    달빛을 받아 백옥처럼 빛나는 연화의 단아한 얼굴과, 보자기를 건네며 스친 보드라운 손끝의 온기가 바우의 거친 손을 타고 심장으로 전해졌습니다. 그 순간, 열일곱 총각 바우와 열여섯 처녀 연화의 가슴속에는 학문에 대한 존경을 넘어선 애틋하고도 운명적인 연정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조용히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이후로 서당 후원 담장 밑은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글방이자 달콤한 밀회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바우는 낮의 고된 도살장 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골방 호롱불 아래에서 연화가 빌려준 책을 종이가 닳아 해지도록 읽고 또 읽었으며 한지 위에 한 획 한 획 혼을 담아 글씨를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손꼽아 기다리던 보름밤이 되면 냇가에서 얼음물을 깨고 깨끗이 목욕재계를 한 뒤 담장 밑으로 달려가 연화를 만났습니다.

    연화는 담장 너머로 새로운 서책과 함께 직접 만든 따뜻한 떡과 강정을 건네주었고, 바우가 한 달 동안 공부하며 깨우친 이치를 적어 온 시와 문장을 읽으며 감탄을 쏟아냈습니다. 그렇게 다시 삼 년의 세월이 흘렀을 무렵, 스무 살 청년이 된 바우의 학문적 깊이는 이미 홍주 고을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팔도의 웬만한 대제학도 혀를 내두를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삼 년의 세월 동안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쌓아 올린 두 청춘 남녀의 사랑은, 그 어떤 신분의 성벽으로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깊고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깊어가는 가을 보름밤이었습니다. 바우가 연화에게 자신이 밤새워 지은 책문, 즉 나라의 부정부패를 바로잡고 백성을 살리는 치국(治國)의 방책을 적은 두루마리를 건네며 담장 너머로 서로의 두 손을 애틋하게 맞잡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뒤쪽 서당 대청마루 어둠 속에서 쩌렁쩌렁한 헛기침 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뜨렸습니다.

    "에헴! 지난 삼 년 동안 내 서고의 책이 귀신 곡할 노릇으로 한 권씩 자리를 옮기고, 내 딸아이의 밤걸음이 유독 후원 쪽으로만 향하더니만... 과연 저 담장 밖에 범상치 않은 밤손님이 와 있었구나!"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돌아보니, 달빛 아래 백발의 박 훈장이 뒷짐을 진 채 매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3: 훈장의 결단과 떠돌이 선비의 장원 급제

    아버지 박 훈장에게 한밤중의 밀회 현장을 들키자, 연화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우의 앞을 가로막으며 차가운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습니다. 담장 밖에 서 있던 바우 역시 연화에게 불똥이 튈까 봐 쪽문 안으로 뛰어 들어와 마당 돌바닥에 이마가 깨지도록 찧으며 절규했습니다.

    "훈장 어르신! 아씨는 아무런 죄가 없사옵니다! 모두가 이 천한 백정의 자식인 소인이 분수를 모르고 성현의 글을 탐하여 벌어진 일이옵니다! 아씨께서는 그저 불쌍한 짐승 같은 소인에게 적선하듯 책을 던져 주셨을 뿐이오니, 매를 치시든 관아에 고발하여 다리를 부러뜨리시든 모든 벌은 오직 소인 한 사람에게만 내려 주시옵소서!"

    박 훈장은 엎드려 떨고 있는 바우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화의 손에 들려 있던 바우의 책문 두루마리를 조용히 거두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대청마루의 등불 아래로 걸어가 그 두루마리를 펼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 한 자 찬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조차 멎은 듯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마당을 짓눌렀습니다.

    그런데 글을 읽어나가던 박 훈장의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조금씩 벌어지더니, 백발의 수염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줄까지 다 읽은 박 훈장은 두루마리를 든 손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향해 긴 탄성을 내뱉었습니다.

    "허어... 세상에, 하늘이시여! 이 궁벽한 시골 땅에 이토록 놀라운 기린이 숨어 있었단 말입니까! 이 글의 필체는 천 년 묵은 창룡이 구름을 박차고 하늘로 승천하는 듯 힘차고 막힘이 없으며, 백성을 구제하고 나라의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자는 논리는 당장 한양 조정의 영의정 대감이 보아도 무릎을 치며 탄복할 경세지재(經世之才)의 대문장이로구나! 거기 엎드린 총각아,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아라! 네가 정말로 아랫마을 도살장에서 소를 잡는 황 백정의 아들 바우란 말이냐?"

    "예, 어르신... 부끄럽지만 그러하옵니다..."

    그때 옆에 무릎을 꿇고 있던 연화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도포 자락을 부여잡고 목숨을 건 듯 간절하게 호소했습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평생 소녀에게 공자님과 맹자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군자는 사람의 태어난 껍데기나 가문이 아니라 그 가슴에 품은 뜻과 덕행으로 사람을 헤아려야 한다고 일러주셨사옵니다. 이 사람은 비록 백정의 움막에서 태어났으나, 그 마음은 가을 서릿발처럼 곧고 학문은 바다처럼 깊사옵니다. 소녀는 지난 삼 년 동안 이 사람의 인품을 보며 이미 평생의 지아비로 섬기기로 하늘에 맹세하였사옵니다! 만일 아버님께서 신분이 천하다 하여 이 사람을 내치시고 소녀를 다른 양반 가문으로 시집보내려 하신다면, 소녀는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거나 머리를 깎고 깊은 산속 절로 들어가 평생 나오지 않겠사옵니다!"

    금지옥엽 외동딸의 서릿발 같은 결단과, 눈앞의 청년 바우가 보여준 하늘이 내린 천재적인 학식 앞에서 평생 양반의 법도와 성리학의 규범만을 지키며 살아왔던 노학자 박 훈장은 깊은 고뇌에 잠겼습니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침묵하던 박 훈장은, 마침내 큰 결심을 굳힌 듯 눈을 번쩍 뜨더니 마당으로 내려와 바우와 연화의 두 어깨를 직접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일어나거라, 이 녀석들아! 내 비록 시골 구석에서 아이들이나 가르치는 늙은 훈장이나, 진흙 구덩이 속에 묻힌 천하의 야광주를 알아보는 눈마저 멀지는 않았다! 하늘이 이 병든 조선 땅을 구하라고 이토록 걸출한 대인재를 내셨는데, 어찌 인간이 만든 얄팍하고 부질없는 신분의 굴레로 그 대붕의 날개를 꺾을 수 있단 말이냐! 바우야, 네가 정말로 내 딸 연화를 목숨처럼 아끼고, 너와 네 아비를 짓누르는 그 지긋지긋한 백정의 굴레를 네 힘으로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으냐?"

    "어르신! 소인 제 목숨이 백 번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씨를 행복하게 해 드리고, 평생 짐승 취급을 받으신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싶사옵니다!"

    바우의 우렁차고 진심 어린 대답에 박 훈장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비책을 내놓았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오늘 밤 당장 이 홍주 고을을 떠나거라. 이 고을에서는 삼척동자도 네 얼굴과 백정 신분을 알고 있으니 절대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가 없다. 마침 경상도 안동 땅에 일찍이 몰락하여 대가 끊긴 내 먼 친척 황씨 양반 가문이 있고, 한양 예조에 내 목숨을 나눈 죽마고우가 판서 밑의 낭청으로 재직하고 있느니라. 내가 오늘 밤으로 편지와 족보 사본을 써 줄 터이니, 너는 한양으로 올라가 내 친구를 찾아가거라! 그 친구를 통해 너를 안동 황씨 가문의 양반 자제인 황현(黃鉉)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리고 정식 호패와 과거 응시 보증 문서를 만들어 줄 것이다! 너는 그 호패를 차고 팔도를 유람하는 떠돌이 선비 행색으로 공부하다가, 내년 봄 한양에서 열리는 식년시 대과에서 반드시 장원 급제를 하여 돌아오너라! 네가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돌아오는 그날, 내 천하의 그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게 너를 내 사위로 맞아들일 것이다!"

    예상치도 못했던 박 훈장의 하늘 같은 도량과 결단에, 바우와 연화는 그 자리에 엎드려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박 훈장은 그 길로 안방으로 들어가 밤새도록 한양 친구에게 보낼 간곡한 서찰을 쓰고, 그동안 자신이 모아 두었던 노자 은자 오십 냥과 자신의 젊은 시절 입던 고운 명주 도포, 그리고 양반의 상징인 검은 갓을 내어 주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아직 동이 트기 전 바우는 자신의 움막으로 돌아가 곤히 주무시는 아버지 황 서방의 방문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습니다. 지금 사실을 말하면 겁 많은 아버지가 기절초풍하며 말릴 것이 뻔했기에, 바우는 잠시 강원도 큰 상단으로 돈벌이를 하러 다녀오겠다는 짧은 전갈만을 이웃에 남겨 두었습니다. 서당 뒷길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화는 밤새 손가락을 바늘에 찔려가며 매화꽃 수를 놓아 만든 비단 필낭을 바우의 허리띠에 직접 매어 주며 눈물로 당부했습니다.

    "도령님... 아니, 이제는 황현 선비님이시군요. 한양 길이 멀고 험하오니 부디 옥체 보존하시고, 보름달이 뜰 때마다 저 서당 담장 밑에서 도령님을 기다리고 있을 소녀를 생각하며 꼭 뜻을 이루고 돌아오시옵소서."

    "연화 아씨, 내 반드시 장원 급제하여 아씨를 맞이하러 돌아오리다!"

    갓을 쓰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한양으로 올라간 바우는, 박 훈장의 친구인 예조 관리를 만나 무사히 안동 황씨 양반 유생 황현이라는 정식 호패를 발급받았습니다. 그 후 남산 아래 조용한 객주집에 방을 얻은 바우는 문밖출입을 끊고 다가올 봄 과거 시험을 향해 마지막 피나는 담금질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듬해 봄, 한양 춘당대에서 임금님이 친히 거둥하신 가운데 조선 최고의 인재를 뽑는 대과 전시(殿試)의 날이 밝았습니다. 수천 명의 유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시험장 한구석에는, 공교롭게도 홍주 고을에서 애비 돈으로 족집게 과외를 받고 올라온 토호 조 진사의 아들 조 도령도 비단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며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 도령은 저 앞줄에 갓을 깊숙이 눌러쓰고 태산처럼 의젓하게 앉아 있는 풍채 좋은 선비 황현이, 옛날 자기가 가죽신으로 손등을 짓밟으며 침을 뱉었던 백정 아들 바우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엄숙한 북소리와 함께 거대한 비단 현판에 임금님이 내리신 시제(試題)가 내걸렸습니다. 시제는 바로 주역의 이치를 빌려 오늘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하고 탐관오리의 발호를 막을 근본 대책을 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고도 심오한 문제에 조 도령을 비롯한 수많은 양반 자제들은 먹만 갈아대며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지난 육 년 동안 찬 서리 내리는 서당 담장 밑에서 언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파며 주역을 통달하고, 천민으로서 탐관오리와 토호들의 악행을 뼈저리게 겪어낸 바우에게 그 시제는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문제나 다름없었습니다. 바우는 허리에 찬 연화의 매화 필낭에서 붓을 뽑아 들고, 거침없이 먹을 묻혀 일필휘지로 시권 위에 글자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기를 때 귀한 난초와 흔한 들풀을 차별하지 않듯, 임금이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문벌과 신분의 껍데기를 깨뜨리고 오직 인품과 실력으로 인재를 등용해야 하며, 지방의 수령과 토호가 결탁하여 힘없는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것은 나라의 뿌리를 갉아먹는 큰 도적이니 암행 감찰을 엄히 하여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바우의 글은, 한 글자 한 글자가 살아 숨 쉬는 비수 같았고 문장마다 우국충정의 기개가 용솟음쳤습니다.

    사흘 뒤, 광화문 앞 거리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이 붙던 날이었습니다. 북소리가 울리고 거대한 백지 위에 붉은 글씨로 적힌 장원 급제자의 이름이 내걸리자, 구경하던 수만 인파가 술렁거렸습니다. 방의 가장 높은 곳, 갑과 제1인 장원의 자리에 또렷하게 적힌 다섯 글자를 확인한 바우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벅차오르는 가슴을 부여잡았습니다.

    "갑과 제1인 장원 급제, 충청도 유생 황현!"

    소 잡는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손등을 짓밟히던 천민 소년이, 조선 팔도의 내로라하는 명문가 양반 자제들을 모두 발아래 무릎 꿇리고 마침내 문과 장원 급제의 영예를 거머쥔 통쾌하고도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 4: 눈물의 초례청과 금빛 마패

    장원 급제한 바우가 임금님이 친히 내려주신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붉은 합격증인 홍패를 품에 안은 채 홍주 고을 외곽의 박 훈장 집으로 비밀리에 돌아오던 날 밤, 서당 안채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은밀하면서도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혼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아직 고향 사람들에게 바우가 백정 황 서방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호적 위조 문제로 큰 풍파가 일 수 있었기에, 박 훈장은 한양에서 장원 급제한 먼 친척 조카 황 어사를 사위로 맞이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외부 손님 없이 조촐하게 초례청을 차렸습니다.

    청사초롱 불빛이 은은하게 마당을 밝히는 가운데, 사모관대를 늠름하게 차려입은 신랑 바우와 화려한 활옷에 연지곤지를 찍고 족두리를 쓴 신부 연화가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습니다. 지난 육 년 세월 동안 차가운 서당 황토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달빛 아래에서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눈물짓던 두 청춘이, 마침내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하늘과 땅 앞에서 어엿한 부부가 되어 맞절을 올리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대청마루에서 두 사람의 혼례를 지켜보는 박 훈장의 눈가에도 대견함과 기쁨의 눈물이 촉촉이 맺혔습니다.

    혼례식이 끝나고 깊어가는 첫날밤, 아늑한 신방의 촛불 아래에서 마주 앉은 바우는 연화의 족두리를 조심스럽게 벗겨 주고는, 자신을 위해 밤마다 책을 나르느라 거칠어진 아내의 고운 두 손을 자신의 가슴에 꼭 끌어안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인... 이 천하고 보잘것없는 백정의 자식을 어엿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 과분하게도 부인과 같은 천하제일의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꿈같은 오늘을 선물해 주셨으니, 내 평생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연화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남편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비단 소매로 살며시 닦아주었습니다.

    "서방님, 이제 다시는 스스로를 천하다 낮추어 말씀하지 마시옵소서. 서방님께서는 누구의 도움도 아닌, 언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파며 흘리신 스스로의 피땀과 노력으로 하늘의 별을 따내신 이 나라의 당당한 장원 급제 어사이시옵니다. 다만 오늘 이 기쁜 날에 소첩의 가슴 한구석이 아려 오는 것은, 바로 저 아랫마을 지척에 계신 시아버님 황 어르신께 오늘 이 경사스러운 혼례 소식을 알리지 못하고 큰 불효를 저지른 것이옵니다. 서방님, 부디 한양 조정으로 올라가시어 어진 정치를 펼치시고 높은 자리에 오르셔서, 하루빨리 시아버님을 양지로 당당히 모셔 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겠사옵니다."

    남편의 마음속 가장 아픈 곳까지 헤아려 주는 아내의 깊고 고운 마음씨에, 바우는 연화를 가슴 깊이 품어 안으며 반드시 아버지의 서러운 한을 만천하에 풀어드리겠노라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신혼의 달콤한 며칠을 보낸 뒤, 바우는 아내 연화를 장인 박 훈장께 맡겨 두고 단신으로 한양 조정으로 올라갔습니다. 문과 장원 급제자로서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바우는 규장각과 홍문관, 그리고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사헌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불과 이 년 만에 조정에서 가장 강직하고 일 잘하는 소장파 관리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가난하고 천한 밑바닥 삶을 직접 겪어본 바우가 올리는 상소문마다 백성들의 아픈 곳을 정확히 짚어내니, 임금 역시 황현이라는 젊은 관리를 남다르게 신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밤이었습니다. 임금은 숙직을 서고 있던 사헌부 지평 바우를 은밀히 편전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임금은 주변의 승지와 내관들을 모두 밖으로 물리친 뒤, 바우의 앞에 검은 비단 주머니에 담긴 놋쇠 마패 하나와 봉서(封書), 그리고 죄인의 형량을 재는 자인 유척(鍮尺)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습니다.

    "황현은 듣거라. 최근 충청도 서해안 일대, 특히 홍주 고을을 중심으로 탐관오리 수령과 그곳의 악질 토호들이 한통속이 되어 힘없는 백성들과 천민들의 고혈을 무자비하게 쥐어짜고 있다는 비밀 장계가 여러 차례 올라왔느니라. 심지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을 관아에 가두고 매질을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소문까지 들리니, 과인이 밤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임금의 말씀에 바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임금은 바우의 눈을 깊이 바라보며 어명을 내렸습니다.

    "내가 알기로 그대가 충청도 땅에서 올라온 인재라 들었으니 그곳의 물정과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알 터, 과인이 오늘 밤 그대를 충청도 암행어사로 임명하노라! 지금 당장 이 마패를 품고 남루한 선비 차림으로 잠행하여 홍주 고을로 내려가거라. 그리하여 백성들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불의한 수령과 토호 무리들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색출하여 과인의 이름으로 엄벌에 처하고 오너라!"

    어명을 받든 바우의 온몸에 뜨거운 전율이 일었습니다. 홍주 고을이라니요! 그곳은 사랑하는 아내 연화와 장인어른이 계신 곳이자, 무엇보다 자신의 늙은 아버지 황 서방이 아들이 장원 급제한 줄도 모른 채 여전히 피비린내 나는 도살장에서 양반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피 맺힌 고향 땅이었습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 황현, 이 한 목숨 바쳐 전하의 어명을 받들고 도탄에 빠진 충청도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돌아오겠사옵니다!"

    임금의 어명을 받은 바우는 그날 새벽, 화려한 비단 관복을 벗어던지고 구멍이 숭숭 뚫린 낡은 패랭이 모자에 깁고 또 기운 거지 선비 도포를 걸쳤습니다. 그리고는 무예가 출중한 심복 역졸 스무 명을 장사꾼과 나무꾼으로 변장시켜 거느린 채, 삼 년 전 신분을 숨기며 눈물로 떠났던 고향 홍주 땅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 5: 피눈물 흘리는 고향과 늙은 아비의 수모

    삼 년 만에 다시 밟은 고향 홍주 고을의 풍경은 바우가 떠나기 전보다 훨씬 더 흉흉하고 참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일 년 전 새로 부임한 홍주 목사 변 사또는 돈이라면 부모도 팔아먹을 지독한 탐관오리였고, 그 사또와 의형제를 맺은 고을 최고의 토호 조 진사, 즉 옛날 바우의 손등을 짓밟았던 조 도령의 아비는 관아의 권력을 등에 업고 고을의 모든 장터 세금과 소작료를 두 배로 올리며 무소불위의 왕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행을 시작하며 주막과 장터에서 민심을 살피던 바우는, 그중에서도 가장 가혹하고 끔찍한 수탈을 당하고 있는 곳이 바로 자신이 태어난 아랫마을 고리백정 촌이라는 소식을 듣고 주먹을 피가 나도록 쥐었습니다. 변 사또와 조 진사는 한양의 권문세가의 뇌물로 바칠 쇠가죽과 육포를 만든다는 구실로, 백정 마을 사람들에게 매달 황소 스무 마리 분량의 가죽과 최상급 살코기를 돈 한 푼 주지 않고 공짜로 상납하게 했던 것입니다. 만약 기한 내에 수량을 채우지 못하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관아로 끌고 가 반죽음이 되도록 곤장을 치고 움막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거지 선비 차림으로 패랭이를 눈썹까지 깊숙이 눌러쓴 바우가 해 질 무렵, 가슴을 졸이며 자신의 옛집인 백정 마을 어귀의 낡은 움막 앞으로 다가갔을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계셔야 할 움막 문은 부서진 채 활짝 열려 있었고, 마당에는 밥그릇과 도살용 식칼, 도마가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으며 흙바닥에는 누군가 거칠게 끌려간 자국과 선명한 핏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온몸이 얼어붙은 바우가 마침 옆집 움막에서 절뚝거리며 나오던 이웃의 늙은 백정 김 노인을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어르신! 이 집에 사시는 황 서방님은 어디 가셨기에 집안이 이리 쑥대밭이 되어 있단 말입니까?!"

    김 노인은 낡은 패랭이를 쓴 바우를 못 알아보고는, 지나가는 객인 줄 알고 눈물을 훔치며 가슴을 쳤습니다.

    "아이고, 지나가는 선비님도 참... 말도 마시오. 이 집에 살던 황 서방은 오늘 아침에 관아 포졸들과 조 진사네 하인들에게 개처럼 묶여 끌려갔소이다! 오늘이 마침 조 진사 영감 회갑 잔치에다가 변 사또 생일잔치가 겹친 날이라 관아 동헌에서 큰 술판이 벌어졌는데, 글쎄 어제저녁에 갑자기 우리 백정 마을에 황소 다섯 마리 분량의 특등심 고기와 생가죽을 오늘 아침까지 공짜로 바치라고 불호령이 떨어졌지 뭐요!"

    "그,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가난한 백정들에게 갑자기 소 다섯 마리가 어디서 나겠소? 마을 대표인 황 서방이 밤새도록 뛰어다녀 겨우 소 두 마리 분량의 고기를 마련해 지게에 지고 관아로 올라갔더니만, 과거 시험에 떨어지고 내려와 술주정만 일삼던 조 진사 아들 조 도령이란 놈이 건방진 백정 놈이 고기를 빼돌려 아버님 회갑 잔치를 망쳤다며 불같이 화를 냈소이다! 그러고는 불쌍한 황 서방을 포승줄로 꽁꽁 묶어 관아 동헌 마당 한가운데로 끌고 갔는데... 아들이 돈 벌러 간다고 집 나간 뒤로 삼 년 내내 아들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굶주리던 그 늙은이가, 지금쯤 사또 앞에서 곤장을 맞아 뼈가 다 으스러졌을지도 모르오... 흑흑..."

    김 노인의 통곡 섞인 말을 듣는 순간, 바우의 머리끝이 쭈뼛 서고 두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나 하나 키우시느라 양반들 발밑에서 기며 고생만 하신 내 늙으신 아버지가, 내가 암행어사가 되어 바로 이 고을에 와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악귀 같은 놈들에게 끌려가 매질을 당하고 계신단 말인가!'

    바우는 품속에 든 암행어사 마패를 손바닥에 뼈가 으스러져라 꽉 움켜쥐었습니다. 그리고는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심복 역졸들에게 휘파람으로 비상 신호를 보낸 뒤, 성난 호랑이처럼 관아를 향해 바람을 가르며 내달렸습니다.

    바로 그 시각, 홍주 관아의 동헌 대청마루 위는 그야말로 흥청망청 술판이 한창이었습니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산해진미와 기름진 쇠고기 안주 위로 기생들의 간드러진 가야금 소리와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고, 대청마루 중앙에는 홍주 목사 변 사또와 토호 조 진사, 그리고 그 아들 조 도령이 비단 방석 위에 나란히 앉아 은잔에 담긴 술을 들이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화려한 대청마루 바로 아래, 차갑고 딱딱한 마당 흙바닥 한가운데에는 백발이 성성하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늙은 백정 황 서방이 오랏줄에 묶인 채 형틀 위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이미 스무 대가 넘는 모진 곤장을 맞은 황 서방의 해진 잠방이는 터져 나온 검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고, 노인은 부러진 다리를 떨며 가쁜 숨만 할딱이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사또 나리, 오늘 잔치에 음악이 있고 미인이 있는데 구경거리가 빠지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저기 묶여 있는 저 고약한 백정 놈을 좀 보십시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조 도령이 대청 난간으로 걸어 나와 황 서방을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습니다.

    "야, 이 늙은 백정 놈아! 네놈이 감히 우리 아버님 회갑 잔치에 올릴 고기 수량을 절반이나 빼먹고 가져와? 내가 가만히 보니 그 피가 어디 안 가는구나! 육 년 전인가, 네놈의 아들이란 바우 놈이 우리 서당 담장 밑에서 건방지게 양반 글자를 훔쳐보다가 내 가죽신 발굽에 손등이 짓밟히고 피를 흘리며 도망치더니만, 어디서 객사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이제는 아비란 놈이 내 앞에서 기어 다니는구나! 여봐라, 집행관은 듣거라! 저 늙은 백정 놈이 제 죄를 알고 빌 때까지 볼기 스무 대를 더 힘껏 내리쳐라!"

    조 도령의 잔인한 호통에 변 사또 역시 술잔을 든 채 너털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힘센 관아 집행관이 침을 뱉어 굵직한 참나무 곤장을 고쳐 쥐더니, 기력이 다해 눈을 감고 있는 황 서방의 피투성이 허리를 향해 곤장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아버지... 바우야... 내 아들 바우야, 어디 있느냐..."

    황 서방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던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관아의 거대한 삼문이 우당탕탕 쾅 소리를 내며 돌쩌귀가 부서져라 활짝 열리더니,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벽력같은 고함 소리가 동헌 마당을 쩌렁쩌렁하게 갈랐습니다.

    "네 이놈들! 그 더러운 곤장 당장 멈추어라! 암행어사 출두요!"

    ※ 6: 암행어사 출두와 대청마루에 오른 백정

    관아 지붕 위와 담장 사방에 매복해 있던 스무 명의 건장한 역졸들이 일제히 뛰어 내려오며, 손에 붉은 육모방망이와 번쩍이는 놋쇠 마패를 높이 치켜들고 목청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암행어사 출두요! 산천초목도 벌벌 떨고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암행어사 출두다! 역적 같은 탐관오리들은 꼼짝 말고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려라!"

    청천벽력처럼 떨어진 암행어사 출두 소리에 동헌 마당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가야금을 타던 기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악기를 내던지고 달아났고, 아전들과 포졸들은 혼비백산하여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습니다. 대청마루 위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술잔을 들고 있던 홍주 목사 변 사또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잔칫상을 발로 차 뒤엎으며 계단 아래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져, 관모가 벗겨지고 상투가 풀어진 채 오줌을 지리며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기세등등하던 토호 조 진사와 조 도령 부자 역시 기둥 뒤로 숨으려다 달려든 역졸들의 육모방망이에 등짝을 맞고 마당 한가운데로 개처럼 질질 끌려 내려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동헌 마당 한가운데로, 낡은 패랭이를 벗어 던지고 해진 도포 자락을 걷어 올린 청년 암행어사 바우가 그 속에 입었던 푸른 비단 관복을 드러내며 태산처럼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바우는 마루 아래 엎드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변 사또와 조 도령의 코앞으로 다가가, 임금님이 하사하신 다섯 마리 말이 새겨진 금빛 마패를 눈앞에 번쩍 들이밀며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꾸짖었습니다.

    "홍주 목사 변가 놈은 고개를 들어 이 마패를 보아라! 주상 전하께서 너에게 고을의 수령 자리를 맡기신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어버이처럼 보살피라 함이었거늘, 네 이놈이 오히려 악질 토호와 결탁하여 백성들의 피와 땀을 약탈하고, 그것도 모자라 아무 죄 없는 칠순 노인을 잔치 마당에 끌어다 안주 삼듯 매질을 하여 죽이려 해? 네놈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도다!"

    "아, 어사 나리!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변 사또가 땅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빌자, 바우는 시선을 돌려 그 옆에서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려 덜덜 떨고 있는 조 도령의 턱을 부채 끝으로 거칠게 들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거기 조 도령이라 하는 고약한 놈! 눈을 똑바로 뜨고 내 얼굴을 보아라! 네가 나를 알아보겠느냐?"

    바짝 얼어붙어 있던 조 도령이 고개를 들어, 자신보다 한 뼘은 더 높은 곳에서 서슬 퍼런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청년 암행어사의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조 도령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흔들리더니, 입이 떡 벌어지며 기절할 듯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헛! 히이익! 너, 너는... 저 눈매는... 옛날 서당 담장 밑에서 나뭇가지로 땅을 파던 백정 아들 바우...?! 아, 아니! 소 잡는 백정 놈의 새끼가 어찌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나타났단 말이냐! 이게 꿈이냐 생시냐!"

    "그래, 똑똑히 보았구나! 내가 바로 육 년 전 네놈이 비단 가죽신으로 손등을 짓밟으며, 백정 놈의 손가락은 붓 대신 소 잡는 식칼이나 잡으라고 침을 뱉었던 아랫마을 백정 황 서방의 아들 바우이자, 성상 전하의 어명을 받고 이 땅의 더러운 탐관오리와 해충 같은 토호들을 박멸하러 내려온 충청도 암행어사 황현이니라!"

    바우의 우렁찬 호통 소리가 동헌 기둥을 때리자, 관아 문밖에서 구경하던 수많은 홍주 백성들과 소식을 듣고 달려온 백정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세상이 떠나갈 듯한 놀라움의 탄성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바우는 조 진사와 조 도령 부자를 내려다보며 준엄하게 선포했습니다.

    "하늘이 내린 사람의 목숨과 인품에는 본래 귀하고 천함이 없거늘, 조상의 권세와 양반이라는 껍데기 뒤에 숨어 불쌍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인륜을 짓밟는 너희들이야말로 사람의 탈을 쓴 금수(禽獸)요 백정보다 못한 자들이 아니더냐! 여봐라, 역졸들은 듣거라! 본관 변 사또를 즉시 파직하여 봉고파직(封庫罷職)하고, 관아 창고와 조 진사 집안의 곳간을 모두 열어 백성들에게 수탈한 재물과 토지를 주인에게 남김없이 돌려주어라! 그리고 저 악귀 같은 변 사또와 조 진사 부자에게 가장 무거운 나무칼을 씌워 당장 하옥하고 한양 의금부로 압송하라!"

    "예이!"

    역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는 사또와 조 진사 부자의 목에 무거운 칼을 씌워 감옥으로 끌고 가자, 관아 안팎을 가득 메운 백성들은 모두 두 손을 높이 들고 어사 만세를 외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탐관오리들을 단숨에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린 암행어사 바우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숨을 고른 뒤 천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마당 한가운데 차가운 형틀 위에는, 방금 전까지 매를 맞던 늙은 아버지 황 서방이 눈앞에서 벌어진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하여 떨리는 눈으로 아들 바우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앙상하게 마른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천하를 호령하던 냉철한 암행어사의 위엄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바우의 두 눈에서 굵은 피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바우는 푸른 비단 관복 자락이 마당의 흙먼지와 피에 더럽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가, 직접 칼을 뽑아 아버지를 묶고 있던 오랏줄을 끊어내고 차가운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이마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올렸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불효자 바우가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이 못난 아들이 장원 급제를 하고도 아버지를 호강시켜 드리지는 못할망정, 아버지께서 저 금수 같은 놈들에게 이런 모진 매질을 당하실 때까지 찾아뵙지도 못했으니 이 불효자를 죽여 주십시오, 아버지!"

    황 서방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는 이 늠름하고 귀티 나는 어사 나리가 정말로 내 아들 바우가 맞는지 믿기지 않아, 피와 흙이 묻은 거친 손으로 아들의 얼굴과 어사화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습니다.

    "바, 바우야... 네가 정말 내 새끼 바우란 말이냐? 소 잡는 백정의 자식이... 서당 담장 밑에서 손등 밟히며 울던 내 아들이 정말로 장원 급제를 하여 암행어사 나리가 되어 이 늙은 아비를 구하러 왔단 말이냐! 아이고, 어사 나리! 이 천하고 더러운 백정 아비가 어사 나리 귀한 옷에 피를 묻히면 안 된다! 남들이 손가락질한다, 어서 일어나거라!"

    평생 천민으로 살아온 설움이 뼈에 박힌 황 서방이 아들의 앞길에 누가 될까 봐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며 땅바닥에 엎드리려 하자, 바우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벌떡 일어나 아버지의 거칠고 피 묻은 두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꽉 부여잡았습니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상에 자식이 어버이를 모시는데 귀하고 천한 것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자, 제 손을 잡으십시오!"

    바우는 마당에 모인 수백 명의 백성들과 아전, 그리고 양반 유생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피 묻은 잠방이를 입은 늙은 백정 아버지를 정중하게 부축하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는 백정들은 평생 그림자조차 밟을 수 없었던 곳, 오직 고귀한 양반 수령들만이 오를 수 있었던 저 높고 화려한 관아 동헌 대청마루를 향해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당당하게 걸어 올라갔습니다!

    대청마루 한가운데에 오른 바우는, 방금 전까지 사또가 앉아 있던 가장 높고 화려한 호랑이 가죽 상석 의자에 백정 아버지 황 서방을 고이 앉혀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옆에 서서 온 고을 사람들이 다 듣도록 우렁차고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홍주 고을의 모든 백성과 관속들은 똑똑히 보시오! 지금 이 동헌 상석에 앉아 계신 이분은, 평생 정직한 땀방울로 소를 잡고 가죽을 다듬어 이 암행어사 황현을 낳아 길러주신 내 자랑스런 아버지 황 서방이시오! 비록 어리석은 세상이 이분을 백정이라 손가락질하며 마루 밑으로 내몰았으나, 내게는 세상 그 어떤 삼정승 육판서보다 높고 귀하며 하늘 같은 어버이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이 홍주 땅에서 신분이 낮다 하여 사람을 짐승 취급하고 눈물 흘리게 하는 자가 있다면, 내 다시 마패를 들고 내려와 결단코 용서치 않을 것이오!"

    평생 양반들의 마루 밑에서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천대받던 늙은 백정이, 암행어사가 된 아들의 손을 잡고 관아 대청마루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그 장엄한 광경에, 마당을 가득 메운 백성들도 신분을 잊고 모두 함께 눈시울을 붉히며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쏟아냈습니다.

    잠시 후,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장인 박 훈장과 어엿한 어사 부인이 된 아름다운 아내 연화가 동헌 마당으로 들어와 대청마루 위의 시아버지 황 서방에게 공손히 큰절을 올리니, 황 서방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습니다. 서당 담장 밑의 차가운 흙바닥에서 피어난 배움의 씨앗 하나가, 담장을 넘어 건네진 고운 손길과 만나 마침내 세상의 부조리한 신분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효도와 사랑을 꽃피워 낸 참으로 통쾌하고도 눈물겨운 대역전의 야담이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오늘 들려드린 백정의 아들 바우와 훈장 딸 연화의 통쾌한 인생 역전 이야기,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도록 재미있게 들으셨습니까? 서당 담장 밑에서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글을 쓰며 양반 도령의 가죽신에 손등을 짓밟히던 천민 소년이, 사람의 진가를 알아본 지혜로운 처녀와 훈장님의 도움으로 마침내 암행어사가 되어 피 묻은 백정 아버지의 손을 잡고 관아 대청마루 상석에 당당히 오르는 장면은 언제 들어도 코끝이 찡하고 짜릿한 감동을 줍니다. 오늘 이야기가 유쾌하고 통쾌하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알림 설정까지 꼭 부탁드립니다! 다음 시간에도 더욱 흥미진진한 야담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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