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천의 연인, 옷을 벗어 나무에 걸다
옷을 벗어 나무에 걸어야 배를 탈 수 있다는 의령수 설화, 돈이 없는 망자가 강을 건너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난과 유족들이 노잣돈을 넣어주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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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모든 것을 벗어야 합니다. 삼도천, 그 검은 강을 건너려면 살아생전 입었던 옷까지 벗어 나무에 걸어야 합니다. 노잣돈 한 푼 없이 죽은 기생 홍련은 찢어진 소복 한 벌이 전부입니다. 그것마저 벗으면 사랑했던 사내의 기억도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이승에서 한 사내가 제 목숨을 걸고 저승 문턱을 넘어옵니다. 살아있는 자의 옷에는 죽은 자보다 더 질긴 생명이 붙어 있다며, 자기 옷을 대신 걸겠다고. 사랑은 죽음의 강도 건너게 할 수 있을까요?
※ 1단계 첫 장면 (오프닝 이미지)
자욱한 안개가 세상의 모든 경계를 지워버린 곳이 있습니다. 산 자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강, 삼도천입니다. 검은 물결이 소리 없이 흘러가는 강가에는 잎사귀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만을 하늘 높이 뻗어 올린 기괴한 고목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그 나무를 자세히 보십시오. 가지마다 매달린 것이 열매가 아닙니다. 붉은 치마, 푸른 저고리, 땀에 절은 낡은 무명 바지저고리, 아이의 배냇저고리까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살갗을 감싸고 있던 옷가지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에서 제 혼자 기묘하게 춤을 추고 있습니다. 저것이 바로 죽은 이들의 옷을 받아낸다는 나무, 의령수입니다.
끼익, 끼익. 낡은 나룻배 한 척이 검은 물을 가르며 천천히 다가옵니다. 뱃머리에는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늙은 노인이 긴 삿대를 짚고 서서 강가에 모인 망자들을 향해 손짓합니다. 앙상한 손가락이 뼈마디째 구부러진 그 모습이 갈고리 같습니다. 강가에 줄지어 선 영혼들은 저마다 자신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승에서 입고 온 그 옷이 당신들이 짊어지고 온 삶의 무게이자, 저승으로 건너가는 유일한 배삯이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강바람이 귓전을 스치며 속삭이듯 읊조립니다. 벗어라, 모든 것을 벗어 던져라, 그래야만 건널 수 있다. 이승에 대한 미련도, 부끄러움도, 아끼고 아꼈던 그 옷가지마저도 저 나무에 걸어두고 오직 벌거벗은 영혼만이 배에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의령수의 가지 끝에서 누군가의 치마가 흔들립니다. 비단에 수놓아진 모란꽃이 바래 빛을 잃었습니다. 살아생전 얼마나 곱게 차려입었을까요. 하지만 여기서는 왕비의 예복이든 거지의 누더기든 값이 같습니다. 모두 한 벌의 옷, 한 생애의 무게일 뿐입니다.
강 건너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안개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곡소리인지 노랫소리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뱃사공이 삿대를 물에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찰싹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소리에 맞추어 의령수의 옷가지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렸다가 돌아옵니다. 마치 저승이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강가에서 벌어질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옷 한 벌에 담긴 사랑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마저 뒤흔든 이야기입니다.
※ 2단계 주제 제시
갓을 쓰고 도포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선비 하나가 뱃사공 앞을 떡 하니 막아서며 호통을 칩니다. 이보시오, 내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며 예의와 염치를 목숨보다 중히 여겼거늘, 어찌 이승에서 지킨 마지막 예의마저 벗어 던지란 말이오. 양반이 어찌 아랫도리를 드러내고 배에 오른단 말이오. 꼬장꼬장한 외침이 검은 강물 위에 메아리칩니다. 선비의 목소리가 아무리 당당해도, 그 떨리는 손끝이 옷고름을 놓지 못하는 모양새가 처량합니다.
삿대질을 멈추고 선비를 올려다보던 늙은 뱃사공, 사람들이 탈의파라 부르는 그 노인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킬킬 웃습니다. 청렴? 체면? 그 이름 좋은 것들이 여기 와서 무슨 소용이야. 이보게 선비 양반, 그깟 이승의 껍데기는 저승 가는 배삯이 되지 못해. 네가 가진 진짜 값어치는 오직 딱 두 가지뿐이야. 너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주는 이가 관 속에 넣어준 노잣돈, 아니면 네 땀과 살냄새와 체온이 배어 있는 바로 그 옷가지뿐이지. 노잣돈이 없으면 옷을 벗어야 하고, 옷마저 없으면 건너지 못해. 간단한 이치야.
노인은 앙상한 손가락으로 의령수를 가리킵니다. 보아라, 저 나무에 걸린 옷들을 잘 보아라. 왕후장상의 비단 관복도, 천한 거지가 입고 죽은 누더기도 나란히 걸려 있지 않느냐. 여기선 다 똑같아. 사랑도, 욕망도, 자존심도, 평생 쌓아 올린 체면도 다 저 나무에 걸어두고 가벼워져야 건너는 것이 삼도천이야. 무겁게 짊어지고 온 그 껍데기를 벗지 못하면, 자네는 영영 이 강가를 떠도는 떠돌이 귀신이 될 걸세. 저승에도 가지 못하고 이승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그런 신세 말이야.
선비의 얼굴이 사색이 됩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강가 곳곳에 옷을 벗지 못하고 서성이는 영혼들이 보입니다. 백 년은 족히 떠돌았을 듯한 흐릿한 형체들이 옷자락을 움켜쥔 채 울고 있습니다. 미련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겁습니다. 이승에서 입었던 옷 한 벌, 그 속에 담긴 기억과 자존과 집착을 놓지 못해 영원히 떠도는 영혼들. 탈의파 노인이 다시 삿대를 짚으며 마지막 한마디를 건넵니다. 여기서 진짜 부끄러운 것은 벌거벗는 것이 아니야. 껍데기를 벗지 못하는 것, 그것이 진짜 부끄러운 거지. 이 한마디에 삼도천의 이치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 3단계 설정 (준비)
이야기는 잠시 시간을 거슬러, 화려한 등불이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한양의 기방으로 갑니다. 가야금 소리와 장구 소리, 사내들의 호탕한 웃음과 기생들의 흥겨운 노래가 뒤엉킨 그 술자리 한복판에,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인다는 절세미인 홍련이 앉아 있습니다.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웃음은 봄날 핀 꽃처럼 화사하고, 하얀 손끝이 잔을 들어 올리면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그 손끝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홍련의 눈동자는 깊은 우물처럼 서늘하게 식어 있습니다. 그녀에게 웃음이란 파는 것이지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릴 적 동네에서 함께 자란 첫사랑이 있었습니다. 맑은 웃음을 가진 소년이었지만, 역병이 돌던 해에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아비의 빚에 팔려 기생이 된 홍련에게, 사내들의 품은 허무한 온기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뜨거운 사내도 새벽이 오면 돌아가고, 이불 위에 남는 것은 차갑게 식은 술잔뿐이니까요.
그런 홍련의 방문 앞, 어둠 속에 웅크린 한 사내가 있습니다. 투박한 손에 도끼를 쥐고 장작을 패는 이 사내의 이름은 강우입니다. 한때 양반 가문의 자제였으나 부친이 억울한 옥사로 세상을 등지면서 가세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기방에 머슴으로 들어온 지 세 해째, 강우는 밤마다 장작을 패며 홍련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노랫소리를, 때로는 교태 섞인 웃음소리를 듣습니다.
쿵, 쿵, 쿵. 도끼가 장작을 내려치는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울립니다. 강우는 홍련에게서 어린 시절 잃어버린 옛 정인의 모습을 봅니다. 같은 마을 같은 우물가에서 웃던 그 소녀의 눈빛이 홍련의 서늘한 눈동자 속에 겹쳐 보이는 것입니다. 홍련 또한 강우의 투박하고 서툰 손길에서, 역병에 앗아간 첫사랑의 그림자를 느낍니다. 하지만 그녀는 차갑게 돌아서며 말합니다. 내 몸은 이미 수많은 사내의 손을 거친 더러운 것입니다. 도련님 같은 분이 마음에 담을 곳이 못 됩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빗물처럼 깊어지지만, 신분과 현실의 벽 앞에 두 사람은 닿을 듯 말 듯, 애처로운 시선만 주고받을 뿐입니다.
※ 4단계 사건 발생 (촉발)
평온하던 일상이 하루아침에 산산이 조각납니다. 한양에서 손꼽히는 탐관오리 조 대감이 홍련을 탐합니다. 쉰이 넘은 나이에 셋째 첩을 들이겠다며 기방에 돈을 던졌으나, 홍련이 단칼에 거절합니다. 기생의 몸이라 해도 제 마음까지 파는 것은 아닙니다, 한마디가 조 대감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수치심이 분노로 타오른 조 대감은 권세를 휘둘러 홍련을 역모 죄인의 내통자로 몰아 의금부 옥에 가둡니다. 조작된 증거, 매수된 증인. 천한 기생 하나를 짓밟는 데 높은 권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모진 매질이 이어집니다. 등가죽이 터지고 피가 흘러도 홍련은 없는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뜨거운 인두가 살을 지지고, 물을 먹여가며 장을 칩니다. 사흘 밤낮으로 이어진 고문 끝에, 홍련은 피투성이가 된 채 차디찬 옥바닥 위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강우, 라는 두 글자를 남기고.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전해주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달려온 강우가 마주한 것은 거적때기에 덮인 싸늘한 시신뿐입니다. 홍련아, 이럴 수는 없다. 제발 눈을 뜨거라. 강우의 절규가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힙니다. 차가운 빗물이 거적 위로 흘러내려 핏물과 뒤섞이고, 강우는 무릎을 꿇고 거적을 감싸 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강우는 벌떡 일어납니다. 홍련의 마지막 길만은 편히 보내주겠다고. 자신의 피를 팔고, 하나뿐인 겉옷까지 팔아 간신히 얇은 관 하나를 마련합니다.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히며, 자신이 가진 가장 깨끗한 천으로 홍련의 얼굴을 덮습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습니다. 저승길 편히 가라고 손에 쥐여주어야 할 노잣돈이 없습니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나오는 것은 먼지뿐입니다. 강우는 홍련의 차가운 손을 잡고 오열합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가는 길에 배삯 하나 쥐여주지 못하는 이 못난 놈을 용서해다오. 가난은 죽음 앞에서조차 사랑하는 이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 5단계 고민 (망설임)
다시 삼도천 강가입니다. 혼이 된 홍련이 멍하니 서 있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습니다. 고문 중에 찢기고 피에 젖어 누렇게 변색된 얇은 소복 한 벌이 그녀가 이승에서 가져온 전부입니다. 다른 망자들은 유족들이 넉넉히 관 속에 넣어준 노잣돈 꾸러미를 뱃사공에게 건네거나, 생전에 고이 갈무리해 입었던 비단 옷을 벗어 의령수에 걸고 배에 오릅니다. 여유 있는 영혼은 겉옷만 걸어도 배삯이 충분하여, 남은 속적삼이라도 걸치고 체면을 지킵니다.
하지만 홍련의 빈손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노잣돈은 물론, 여벌의 옷가지도 없습니다. 배를 타려면 지금 입고 있는 이 찢어진 소복 한 벌마저 벗어 나무에 걸어야 합니다.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말입니다. 홍련은 옷깃을 꼭 움켜쥐며 뒷걸음질 칩니다. 수치심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옷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이 소복은 강우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시신을 수습하며, 자기 옷을 팔아 마련한 바로 그 수의입니다. 거칠지만 정성스러운 바늘땀이 남아 있고, 강우의 손때가 배어 있습니다. 이것마저 벗어버리면, 이승에서의 기억도, 강우를 향한 사랑도 모두 빗물에 씻기듯 잊히게 될 것만 같습니다.
이대로 건너가면 그이를 영영 잊게 되는 걸까요. 아니면 옷을 벗지 못해 영원히 이 차가운 강가를 떠도는 귀신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뱃사공의 재촉 소리가 들려옵니다. 빨리 벗어 걸지 않으면 배가 떠나버리겠다고 으릅니다. 하지만 홍련은 의령수 그늘 아래 주저앉아 하염없이 강우의 이름만 부릅니다. 도련님, 강우 도련님. 강물 위에 그 이름이 퍼지지만 이승에는 닿지 않습니다.
검은 물결이 찰싹찰싹 강가를 핥으며 홍련의 발끝을 적십니다. 차갑습니다. 뼈가 시리도록 차갑습니다. 물속에서 손이 올라옵니다. 노잣돈도 없이, 옷도 벗지 못해 건너지 못한 망자들이 물귀신이 되어 새 동무를 끌어당기려 하는 것입니다. 홍련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나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앞은 건너지 못하는 강이요, 뒤는 돌아갈 수 없는 이승입니다.
※ 6단계 2막 진입 (새 세계로 들어감)
이승의 강우는 밤거리를 헤맵니다. 장례를 치른 뒤에도 잠을 이룰 수 없어 술에 취해 한양 뒷골목을 비틀거리며 걷습니다. 노잣돈을 넣어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짐승처럼 가슴팍을 짓누르고, 눈을 감으면 홍련의 차가운 손이 잡힙니다. 그때 누군가가 강우의 소매를 잡습니다. 허름한 행색의 맹인 무당입니다. 백목 같은 눈으로 강우를 올려다보며 말합니다. 당신에게서 망자의 울음이 들려요.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영혼이 당신을 부르고 있어요.
강우의 눈이 번쩍 뜨입니다. 맹인 무당은 강우를 으슥한 움막으로 데려가 기이한 소문을 들려줍니다. 삼도천을 건너지 못한 불쌍한 영혼을 위해 산 사람이 직접 저승의 문턱을 넘어 노잣돈을 전해줄 수 있는 금기된 방법이 있다고. 다만 그 대가는 자신의 남은 수명을 태우는 것이니, 돌아오더라도 원래의 목숨 절반은 잃게 될 것이라고. 강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절반이 아니라 전부를 걸어도 좋소. 그 아이를 빈손으로 보내느니 내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소.
촛불이 일렁이는 좁은 방 안에 강우가 앉습니다. 맹인 무당이 건네준 쓴 약물을 들이키고, 피로 그린 부적을 이마에 붙입니다. 주문이 시작되자 촛불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며 방 안에 몽롱한 연기가 차오릅니다. 강우의 몸이 뒤로 쓰러지고, 영혼이 육신 밖으로 실처럼 빠져나옵니다. 가슴팍에 품속에 꼭 챙겨 넣은 엽전 꾸러미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빌려온 것, 구걸한 것, 자신의 피까지 팔아 마련한 노잣돈입니다.
숨이 막힐 듯한 어지러움 끝에 눈을 떴을 때, 강우의 발밑에는 축축하고 차가운 흙이 밟힙니다. 살아있는 자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곳, 희뿌연 안개 너머로 찰싹거리는 검은 강물 소리가 들려옵니다. 강우는 두려움에 온몸이 떨리지만 품속의 엽전 꾸러미를 꽉 쥐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기다려라 홍련아, 내가 간다, 이번에는 절대 너를 빈손으로 보내지 않겠다. 산 자가 죽은 자의 땅으로, 그 금지된 영역으로 발을 디딘 순간입니다.
※ 7단계 B 이야기 (감정 줄거리)
저승 입구, 의령수 뒤편 바위 그늘에서 두 사람은 기적처럼 재회합니다. 홍련은 강우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주저앉습니다. 도련님, 어찌하여 이곳에 계십니까, 설마 도련님도 돌아가신 것입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립니다. 강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성큼 다가가 홍련의 차가운 뺨을 두 손으로 감쌉니다. 따뜻합니다. 산 사람의 체온이 죽은 자의 피부에 전해지자, 홍련의 눈에서 맺히지 못하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아니야, 나는 죽지 않았어. 너를 혼자 보낼 수 없어서, 잠시 다녀가러 온 것이다.
홍련은 강우가 산 채로 제 목숨을 걸고 이 위험한 곳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하염없이 울음을 쏟아냅니다. 왜,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셨어요. 저 같은 천한 것 때문에 도련님의 귀한 목숨을 걸다니요. 강우가 홍련의 어깨를 잡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천한 건 네가 아니야. 너를 그렇게 만든 세상이 천한 거야.
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시입니다. 이 강가에는 저승의 질서를 지키는 귀왕들과 저승차사들이 떠돌고 있고, 그들이 산 사람의 냄새를 맡기 시작합니다. 피가 도는 자의 체취는 저승의 냉기 속에서 횃불처럼 눈에 띕니다. 저기다, 산 놈의 냄새가 난다. 쇳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그림자들이 꿈틀대며 다가옵니다.
쫓기는 와중에 둘은 인적 드문 강가 절벽 아래 동굴 깊은 곳으로 숨어듭니다. 물소리가 울리는 동굴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숨소리를 듣습니다. 강우의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홍련의 귀에 닿습니다. 살아있는 심장 소리입니다. 죽음 이후로 처음 듣는 따뜻한 박동입니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이 순간, 이승에서 신분의 벽 때문에, 체면 때문에, 기생과 머슴이라는 이름 때문에 차마 나누지 못했던 뜨거운 감정이 마침내 폭발합니다. 여기선 양반도 천민도 없다 하셨지요. 그저 당신과 나, 두 사람뿐입니다. 강우의 말에 홍련은 처음으로 사랑을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저는 도련님만을 사랑했습니다.
※ 8단계 재미 구간 (볼거리·핵심 장면)
동굴 안에 저승의 푸르스름한 인광이 벽을 타고 흐릅니다. 밖에서는 삼도천의 물결이 성난 짐승처럼 거칠어지고, 의령수의 나뭇가지들이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대며 강가에 늘어선 망자들의 옷을 낚아채는 아수라장이 펼쳐집니다. 비명과 울음과 뱃사공의 호통이 뒤엉킨 혼돈의 소리가 동굴 입구까지 밀려들어옵니다. 하지만 그 혼란과 단절된 동굴 깊은 안쪽에서, 두 사람은 세상에 오직 둘만 남은 것처럼 서로를 바라봅니다.
강우의 떨리는 손끝이 홍련의 찢어진 소복 사이로 드러난 상처에 닿습니다. 고문으로 갈라진 피부, 인두로 지진 자국, 매를 맞아 짓물러 터진 등의 흔적들. 강우는 그 참혹한 상처 하나하나에 입술을 대며 말합니다.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상처가 난 살결 위로 뜨거운 눈물이 떨어지고, 그 눈물이 닿는 자리마다 홍련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합니다. 산 사람의 진심 어린 눈물이 저승에서 약이 되는 것입니다.
홍련은 강우의 넓은 등 뒤에 매달려 이마를 기댑니다. 죽은 자가 가질 수 없는 삶의 온기를, 따뜻한 체온을 온몸으로 갈구합니다. 이승에서는 기방의 문턱이, 양반과 천민의 벽이, 돈을 주고 사는 관계라는 굴레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하지만 여기 저승의 동굴 안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선 이 자리에서, 그 모든 껍데기는 의미를 잃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사가 아닙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려는 생명의 몸부림이자, 이승에서 끝내 나누지 못한 사랑의 처절한 확인입니다.
거친 숨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메아리치고, 두 영혼이 하나로 얽힙니다. 동굴 밖에서는 돈이 없어 강을 건너지 못하는 망자들이 물귀신에게 발목을 잡혀 비명을 지르며 검은 물속으로 끌려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귓전을 찢지만, 강우는 홍련의 귀를 양손으로 막고 그녀의 눈동자만을 바라봅니다. 두려워 마라, 아무 소리도 듣지 마라, 내가 곁에 있다. 이승에서 나누지 못한 말들이 저승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이승보다 더 강렬하고 이승보다 더 애절한 사랑의 춤이 저승의 한복판에서 피어납니다.
※ 9단계 중간 전환점 (미드포인트)
추격자들을 피해 다시 강가로 나온 두 사람 앞에 뱃사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배는 곧 떠납니다. 강우는 품속에서 정성껏 준비해 온 엽전 꾸러미를 꺼내어 뱃사공 앞에 내밉니다. 여기 노잣돈이오, 제 정인을 위한 배삯이오, 내 피를 팔아 마련한 돈이니 한 푼이라도 부족하다면 내 목숨까지 얹어주겠소. 강우의 간절한 외침이 강물 위에 퍼집니다. 하지만 뱃사공 탈의파는 엽전 꾸러미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싸늘하게 비웃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산 자의 돈은 저승의 통행료가 될 수 없어. 이 엽전에는 살아있는 자의 기운이 붙어 있거든. 여기서 통하는 것은 오직 두 가지야. 죽은 자를 위해 진심으로 우는 이가 관 속에 넣어준 노잣돈, 아니면 죽은 자가 입고 온 옷의 무게, 그 생의 무게만이 이 강을 건너는 값을 치를 수 있단 말이야.
강우가 이를 악뭅니다. 엽전 꾸러미가 무력하게 땅 위에 떨어집니다. 사공은 다시 홍련을 향해 돌아서며 입고 있는 것을 벗어 의령수에 걸라고 재촉합니다. 그것밖에 없으면 그것이라도 걸어야 배에 탈 수 있다고. 홍련이 수치심에 고개를 숙이고 주저앉습니다. 이 찢어진 소복 한 벌마저 벗으면,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때 강우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섭니다. 그렇다면 내 옷을 걸겠소. 산 사람의 옷에는 피가 도는 생명이 붙어 있고, 땀과 살냄새와 심장 소리가 배어 있으니 그 값이 더 나가지 않겠소. 그 말과 동시에 강우는 망설임 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의령수를 향해 힘껏 던집니다. 산 사람의 옷이 나뭇가지에 걸리는 순간, 그 천에서 붉은 생기의 빛이 뿜어져 나옵니다. 의령수가 걸어 본 수만 벌의 옷 중에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살아있는 자의 옷, 그 강렬한 생명력에 기괴한 나무가 우우웅 울며 뿌리까지 진동합니다. 나뭇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더니 강물 위에 배 한 척을 새로이 내어줍니다. 죽은 자의 법을 산 자의 희생으로 깨뜨리는 순간입니다.
※ 10단계 위기 압박 (악재가 몰려옴)
배에 올랐으나 삼도천은 쉽사리 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검은 물결이 성난 짐승처럼 부풀어 오르며 작은 배를 집어삼킬 듯 덮쳐 옵니다. 배가 출렁일 때마다 차가운 물이 뱃전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고, 물 아래에서는 건너지 못한 물귀신들의 손이 뱃바닥을 긁어댑니다. 삐걱거리는 나무판 사이사이로 검은 물이 스며들며, 배는 강 한가운데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강우 자신에게 닥칩니다. 이승으로 돌아갈 연결고리였던 자신의 옷을 벗어 의령수에 걸어버린 탓에, 이승에 남겨둔 그의 육신과 영혼을 잇는 줄이 급격히 끊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승의 방에서 타고 있던 촛불이 흔들리다 꺼져가기 시작합니다. 그 영향이 즉각 나타납니다. 강우의 영혼이 점점 희미해지며, 손끝부터 투명하게 변해갑니다. 도련님, 도련님의 몸이 사라지고 있어요. 홍련이 비명을 지르며 강우의 팔을 잡지만, 손이 스르르 빠져나갑니다. 잡히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하늘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립니다. 저승의 질서를 관장하는 염라대왕의 명을 받은 저승차사들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산 놈이 감히 저승의 법을 어지럽히고 제 수명을 깎아 망자를 구하려 하다니,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죄, 용서할 수 없다. 검은 갑옷을 입은 차사들의 창칼이 어둠을 가르며 배를 향해 날아듭니다. 창날이 뱃전에 박히고, 배는 뒤집힐 위기에 처합니다. 강우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홍련을 감싸 안으며 버팁니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이미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습니다. 손가락 끝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다리가 투명해지고, 심장 소리마저 점점 멀어집니다.
※ 11단계 최악의 순간 (모든 게 끝난 듯)
콰아앙.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파도가 배를 정면으로 강타합니다. 배가 하늘 높이 들렸다가 내리꽂히고, 그 충격에 강우는 중심을 잃고 삼도천의 깊은 물속으로 곤두박질칩니다. 강우 님. 홍련이 손을 뻗어보지만 손가락 끝이 스치기만 할 뿐, 강우는 검은 물살에 휩쓸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잠겨가는 강우의 눈에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물 위에서 필사적으로 손을 뻗고 있는 홍련의 얼굴입니다.
차디찬 저승의 물이 강우의 입과 코를 통해 폐부 깊이 밀려듭니다. 그것은 물이 아니라 망각이고 소멸입니다. 삼도천의 물에 빠진 산 자는 기억을 잃고, 기억을 잃으면 이승으로 돌아갈 길을 영영 찾지 못합니다. 강우는 물속에서 점점 의식을 잃어가고, 이승에 남겨진 그의 육신에서도 심장 박동이 느려지다가 멈추려 합니다. 맹인 무당이 촛불 앞에서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립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이대로면 이 사람은 죽어.
배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홍련은 가슴을 쥐어뜯습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신이 강우와 함께 강을 건너가려 했던 그 욕심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었다는 것을요. 자신에 대한 미련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집착이, 산 자를 저승까지 끌고 와 물에 빠뜨린 것입니다. 안 돼, 나 때문에 당신까지 죽을 수는 없어. 홍련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검은 강물에 닿자 그 자리에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전부를 내놓는 가장 고통스러운 선택을 마주합니다.
※ 12단계 영혼의 밤 (깊은 절망)
홍련은 뱃머리에 홀로 서서 의령수를 바라봅니다. 강우의 옷이 걸린 가지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옷에 깃든 생명의 빛마저 꺼져가고 있습니다. 홍련은 결심합니다. 자신의 미련과 집착, 강우를 향한 매달림, 이승에서 못다 한 한, 그리고 마지막 남은 수치심까지 모두 벗어 던지기로.
홍련은 떨리는 손으로 입고 있던 찢어진 소복의 고름을 풉니다. 하나, 둘. 옷고름이 풀릴 때마다 이승의 기억이 실타래처럼 풀려나갑니다. 기방에서의 나날들, 사내들의 손길, 수치와 치욕의 밤들, 그리고 강우와 눈이 마주쳤던 떨림의 순간들까지. 마침내 소복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강물 위에 떨어집니다. 의령수의 가지가 길게 뻗어와 그 옷을 낚아챕니다. 알몸이 된 홍련의 영혼이 어둠 속에 드러납니다. 고문의 흉터가, 생의 아픔이 고스란히 새겨진 몸입니다.
하지만 부끄러움 대신 기이한 일이 일어납니다. 벌거벗은 그녀의 영혼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껍데기를 벗어 던진 영혼,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마저 태우기로 한 그 결심이 불꽃이 되어 타오릅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연료 삼아 피워 올린,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뜨거운 사랑의 불빛입니다.
돌아가세요, 제발 살아서 돌아가세요. 그리고 나를 기억해 주세요. 가끔 바람이 불 때, 꽃잎이 질 때, 강물이 흐를 때 한 번쯤만 떠올려 주세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홍련은 스스로 등불이 되어 칠흑 같은 강물의 어둠을 비춥니다. 그 빛이 검은 물을 뚫고 들어가, 가라앉아 가던 강우에게 닿습니다. 차디차던 물이 빛을 받아 따뜻해지고, 죽어가던 강우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쿵, 쿵, 쿵. 절망의 끝에서 피어난 순수한 희생은 저승의 어떤 법도, 어떤 질서도 막을 수 없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 13단계 3막 진입 (다시 일어섬)
홍련의 영혼이 뿜어내는 강렬한 빛을 받은 강우가 번쩍 눈을 뜹니다. 칠흑 같던 물속이 환하게 밝아져 있고, 그 빛의 근원이 수면 위에서 타오르는 홍련이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안 돼, 홍련아. 강우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팔을 저으며 물 위로 솟구칩니다. 물살이 그를 끌어내리려 하지만, 홍련의 빛이 물귀신들을 밀어내고 강우에게 길을 만들어 줍니다.
물 위로 올라온 강우를 향해 홍련은 남은 기력을 모두 쏟아부어 그를 이승 쪽 강가로 밀어냅니다. 가세요, 제발 가세요. 살아서 오래오래 사세요. 강한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와 강우의 젖은 몸을 들어 올려 삶의 세계 쪽으로 떠밀어 보냅니다. 강우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가는 순간, 뒤를 돌아봅니다. 홍련이 보입니다. 알몸인 채로 의령수 아래 당당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그녀는 더 이상 수치스럽지 않습니다. 움츠리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살려냈다는 자부심이, 모든 것을 벗어 던진 자유로움이 그녀를 빛나게 합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천 년 된 의령수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잎 하나 없던 앙상한 가지들이 춤을 추듯 사방으로 움직이며, 벌거벗은 홍련의 몸을 나뭇잎처럼 감싸 안습니다. 가지 끝에서 꽃망울이 불쑥불쑥 터져 나옵니다. 붉은 꽃, 흰 꽃, 금빛 꽃. 천 년 동안 망자들의 옷만 받아 들였던 나무가, 처음으로 자기 것을 내어줍니다. 꽃잎이 홍련의 어깨와 허리를 감싸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이 됩니다.
강물 위로 화려한 꽃가마 같은 배가 미끄러져 옵니다. 저승차사들이 멈추어 서서 길을 엽니다. 저승조차 그녀의 사랑에 감복하여 가장 귀한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 14단계 결말 (클라이맥스 해결)
허억. 이승의 방, 꺼져가던 촛불이 활활 다시 타오르며 강우가 벌떡 몸을 일으킵니다. 거친 숨을 미친 듯이 몰아쉬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살아 있습니다. 돌아온 것입니다. 꿈이 아닙니다. 꽉 쥔 손을 펼쳐보니 손바닥에 축축한 흙이 묻어 있고, 삼도천 강물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맹인 무당이 탈진한 채 벽에 기대앉아 힘없이 웃습니다. 살아 돌아왔군요, 당신의 여인이 밀어낸 겁니다.
강우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밤길을 달립니다. 홍련의 무덤을 향해.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넘어지면서도 달립니다. 손에는 전날 밤 새도록 삯바느질을 해서 마련한 돈으로 산 가장 고운 비단옷 한 벌이 들려 있습니다. 이승에서 해주지 못했던 것을 이제라도 보내겠다는 일념 하나입니다.
무덤 앞에 도착한 강우는 무릎을 꿇고 비단옷과 노잣돈을 펴 놓습니다. 불을 붙이자 고운 비단이 연기가 되어 하늘로 피어오릅니다. 강우가 통곡하며 외칩니다. 홍련아, 받아라. 이제 춥지 않게, 부끄럽지 않게 가거라. 이 세상 누구보다 고운 옷을 입고, 당당하게 건너가거라.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 사라집니다. 그 연기는 삼도천에 닿습니다.
꽃가마 배 위에 앉은 홍련의 어깨 위로 하늘에서 무언가가 사뿐히 내려앉습니다. 강우가 보내준 고운 비단옷입니다. 이승의 정성이 저승에 닿은 것입니다. 홍련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미소 짓습니다. 환하게, 이승에서 단 한 번도 짓지 못했던 진심 어린 미소를. 그녀는 비단옷의 옷고름을 맵시 있게 여미고, 소매를 바로잡습니다. 이제 그녀는 춥지 않습니다.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홍련은 강우가 있는 이승 쪽을 향해 깊이 절을 올립니다. 이 한 번의 절에 사랑과 감사와 작별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삼도천 너머 안개 속을 바라봅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당하게, 나아갑니다.
※ 15단계 마지막 장면 (파이널 이미지)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강우는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벼슬에 오르지도, 큰 부자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장례를 돕는 일을 해왔습니다. 가난하여 노잣돈을 마련하지 못한 상주에게 엽전을 쥐여주고, 수의를 지을 형편이 안 되는 집에 고운 천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누군가 물으면 대답합니다. 빈손으로 가는 이가 없어야 한다고, 저승길이 외롭지 않아야 한다고.
노인이 된 강우는 오늘도 이름 모를 강가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봅니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들이 강물 위에 떨어져 둥둥 떠내려갑니다. 분홍빛, 흰빛, 연붉은 빛 꽃잎들이 물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삼도천 의령수에 걸려 있던 형형색색의 옷자락들과 어찌 이리 닮았는지 모릅니다.
노인의 눈가에 주름진 미소가 번집니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보입니다. 의령수의 꽃에 감싸여 환하게 웃던, 비단옷을 곱게 여미던, 붉은 치마를 입고 고개를 돌려 마지막 미소를 보내던 젊은 날의 홍련이 선명하게 아른거립니다. 잘 건너갔겠지, 거기선 아프지 않겠지. 바람이 불어와 노인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 바람 속에 아주 먼 곳에서 실려 온 듯 희미한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기방의 향도 아니고, 이승의 꽃도 아닌, 저승 의령수에 피었다는 천 년 만의 꽃향기 같은 것이.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그 위로 뜬 빈 나룻배 하나가 고요히 흔들립니다. 사공도 없고 노도 없는 배가 물결에 밀려 천천히 흘러갑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사랑은 죽음 앞에서도 옷을 벗을 수 있었고, 옷을 벗어 걸어둔 자리마다 꽃이 되어 피어났습니다.
엔딩 (300자 이내)
삼도천을 건너려면 모든 것을 벗어야 합니다. 체면도, 미련도, 사랑마저도. 하지만 홍련은 알았습니다. 진짜 사랑은 벗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벗어주는 것이라는 걸. 강우는 제 옷을 벗어 걸었고, 홍련은 제 영혼을 태워 그를 살렸습니다. 천 년간 망자의 옷만 받던 의령수에 꽃이 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벗은 자리에 꽃이 피고, 놓아준 자리에 사랑이 남습니다. 그것이 삼도천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한 가지 진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