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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를 사모하는 기생 귀신 (패관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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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보다 더 기가 막힌 사연이 왔습니다! 조선 팔도에서 제일가는 꽃미남이지만 간덩이는 벼룩만한 쫄보 선비 이도령. 과거 공부를 위해 귀신 나온다는 정자에 갇히게 되는데... 밤이 되자 나타난 귀신은 무섭기는커녕 선비의 미모에 반해 들이대는 직진 기생 귀신?! 쫓아내려는 자와 안기려는 자의 대환장 코믹 밀당 로맨스! 배꼽 잡고 웃을 준비 되셨습니까?"
※ 1: 얼굴은 천하일색, 간덩이는 좁쌀만 한 이도령의 시련
조선 명종 시절, 한양 도성에는 걸어 다니기만 해도 온 동네 여인네들의 치맛자락을 펄럭이게 만드는 전설적인 꽃미남이 한 명 살고 있었습니다. 백옥처럼 뽀얀 피부에, 붉은 앵두 같은 입술, 그리고 붓으로 정성스레 그려 넣은 듯한 짙은 눈썹을 가진 사내. 그의 이름은 이도령이었습니다. 이도령이 장터에 떴다 하면 주막의 주모부터 양반댁 규수들까지 가던 길을 멈추고 넋을 잃고 바라보느라 하루에도 수십 개의 항아리가 깨지고 장바구니가 엎어졌다는 전설이 돌 정도였습니다. 훤칠한 키에 옥골선풍의 자태를 지녔으니, 겉보기에는 당장이라도 나라를 구할 늠름한 장군감이자 천하를 호령할 대장부임이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참으로 공평하신 것인지 이 완벽해 보이는 이도령에게 아주 치명적이고도 앙증맞은 단점 하나를 남겨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간덩이가 좁쌀보다도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아악! 어, 어머니! 방금 저 시커먼 것이 무엇입니까! 제 발밑으로 호랑이만 한 쥐가 지나갔습니다요!"
"아이고, 이 화상아! 호랑이는 무슨 호랑이! 밤톨만 한 새끼 쥐구만. 사내대장부가 어찌 그리 겁이 많아 밤에 혼자 뒷간도 못 간다는 말이냐!"
이도령은 낮에 제 그림자만 보고도 기겁을 하며 쓰러지는 천하의 쫄보 중의 쫄보였습니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에도 자객이 들었다며 칼 대신 빗자루를 들고 벌벌 떨었고, 비 오는 날 번개라도 치는 날에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하루 종일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이도령을 바라보는 그의 아버지, 이대감의 속은 그야말로 시커멓게 타들어 가다 못해 재가 될 지경이었습니다. 얼굴값의 반의반만이라도 사내다웠으면 좋으련만, 툭하면 놀라 나자빠지니 과거 공부는커녕 글방 가는 길에 개구리라도 마주치면 그 길로 도망쳐 오기가 일쑤였습니다.
마침내 과거 시험이 석 달 앞으로 다가오자, 이대감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결심했습니다. 한양에서 백 리나 떨어진 깊은 산속, 인적이라고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심광정'이라는 낡은 정자에 아들을 가두어버리기로 한 것입니다. 심광정은 경치는 기가 막히게 좋았으나, 억울하게 죽은 기생 귀신이 나온다는 흉흉한 소문 때문에 낮에도 마을 사람들이 얼씬하지 않는 흉가 중의 흉가였습니다. 이대감은 떡 벌어진 아들의 어깨를 꽉 쥐며 엄하게 호통을 쳤습니다.
"네 이놈! 이번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자식이 아니다! 심광정에서 밥해줄 하인 딱 한 명만 붙여줄 터이니, 사서삼경을 다 떼기 전에는 산에서 내려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귀신이 나온다고? 허허, 귀신이 네놈의 그 한심한 꼴을 보면 어이가 없어서 제 발로 도망을 칠 것이다!"
"아버님! 어찌 이 하나뿐인 귀한 아들을 귀신 소굴로 사지(死地)로 내모신단 말입니까! 제가 귀신에게 홀려 뼈도 못 추리면 이 가문은 뉘가 잇는단 말씀이십니까!"
이도령이 바닥에 엎드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통곡을 했지만, 이대감의 결심은 단호했습니다. 결국 이도령은 울며 겨자 먹기로 보따리를 싸 들고 하인 칠성이의 손에 이끌려 산속 깊은 심광정으로 향해야만 했습니다. 산길을 오르는 내내 이도령의 다리는 사시나무 떨리듯 후들거렸고, 애먼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칠성이의 등 뒤로 숨느라 도포 자락이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칠성아… 저, 저기 방금 뭔가 허연 것이 휙 지나가지 않았느냐? 내 눈에 분명히 소복 입은 여인의 형상이 보인 것 같구나."
"아이고, 도련님! 저건 여인이 아니라 껍질 벗겨진 자작나무 아닙니까요. 제발 칠성이 옷자락 좀 그만 당기십시오. 도련님 힘이 장사라 제 저고리가 다 찢어질 판입니다요."
우여곡절 끝에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에야 당도한 심광정은 그야말로 음산함의 끝판왕이었습니다. 칠이 다 벗겨진 기둥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고, 마루 밑에서는 알 수 없는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려 퍼졌습니다. 칠성이는 재빨리 방에 불을 지피고 저녁상을 차려놓고는, 해가 지기 무섭게 산 아래 주막으로 도망치듯 내려가 버렸습니다.
"도련님! 저는 산 밑 주막에서 잘 터이니, 무슨 일 있으면 크게 소리치십시오! 제가 내일 아침 일찍 밥 지으러 다시 올라오겠습니다요! 귀신 나타나면 모른 척하고 눈 꼭 감고 계십시오!"
"야, 이 몹쓸 놈아! 날 혼자 두고 어딜 간다는 말이냐! 칠성아! 칠성아!"
이도령의 애타는 부름에도 칠성이의 뒤통수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산속의 어둠은 한양 도성의 밤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숲속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기괴하게 울어대고, 문풍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는 마치 누군가 문구멍을 긁어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습니다. 이도령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호롱불을 밝혔습니다.
'그래, 나는 사내대장부다! 사서삼경을 읽으며 성현들의 말씀을 새기면, 감히 요사스러운 귀신 따위가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맹자 가라사대…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는… 반, 반드시… 먼저 그 심지를 고달프게 하고… 뼈와 힘줄을 수고롭게 하며…'
입으로는 성현의 글을 외고 있었지만, 그의 치아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글 읽는 소리보다 더 크게 방 안을 울렸습니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끼이익-' 하고 낡은 마루가 눌리는 소리가 나더니, 방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박, 사박. 짐승의 발소리가 아닌, 아주 가볍고 사뿐한 사람의 발소리였습니다. 이도령의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글 읽던 소리를 멈추고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문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덜컹! 하고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스르륵 제 혼자 열리더니, 스산한 냉기가 방 안으로 훅 밀려 들어왔습니다.
※ 2: 오라는 귀신은 안 오고... 아니, 너무 예쁜 귀신이 왔네?
열린 방문 틈으로 뽀얀 안개가 밀려들어 오며, 호롱불이 파르르 떨리다 이내 푸른빛으로 변했습니다. 이도령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방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옴마니반메훔! 관세음보살! 천지신명님! 살려주십시오! 저는 아직 장가도 못 간 총각입니다요! 귀신님, 저 맛없습니다! 뼈밖에 안 남아서 씹어 드실 것도 없습니다요!'
방구석에 처박혀 엉덩이만 하늘로 치켜든 채 벌벌 떨고 있는 이도령의 귓가에, 스산하고 무서운 귀신의 울음소리가 아닌,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듯 너무나도 청아하고 간드러지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머나? 이번에 새로 오신 선비님이신가 보네. 헌데 어찌 그리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계신가요? 숨막히지 않으셔요?"
이도령은 귀를 의심했습니다. 전설의 고향에서나 듣던 '내 다리 내놔라' 하는 끔찍한 원귀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춘향이 뺨치고 황진이가 울고 갈 만큼 간드러지고 애교 넘치는 목소리였습니다. 이도령은 호기심과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이불 틈새로 한쪽 눈만 살짝 내밀어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헉!"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피눈물을 흘리거나 머리를 풀어 헤친 처녀 귀신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화려하고 고운 비단 한복을 차려입고, 머리에는 화사한 떨잠을 꽂은 절세미녀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발이 땅에 닿지 않고 허공에 둥둥 떠 있긴 했지만, 그녀의 미모는 도성 안의 그 어떤 기생이나 양반댁 규수보다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반투명한 몸에서 은은한 달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기생 귀신은, 구석에 처박힌 이도령의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머머! 어머나 세상에! 저승사자 오라버니가 이번에는 물이 아주 좋다고 넌지시 힌트는 주셨지만, 세상에나 만상에나! 어쩜 이리도 잘생기셨습니까? 도련님, 혹시 하늘에서 귀양 온 선관(仙官)이 아니시어요? 콧대 베일 것 같은 저 오뚝한 콧날 좀 봐! 피부는 어쩜 이리 백옥 같으실까!"
귀신은 이도령이 무서워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중을 사뿐사뿐 헤엄치듯 날아와 이도령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습니다. 이도령은 귀신의 찬가운 기운이 뺨에 닿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지만, 동시에 이 귀신이 자신을 잡아먹으려 하기보다는 마치 장터에서 마음에 드는 비단을 고르는 아낙네처럼 자신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습니다.
"저, 저기요… 귀, 귀신이십니까?"
"네~ 귀신 맞사옵니다. 이름은 홍단이라 하옵고, 생전에는 한양 명월관에서 날리던 에이스 기생이었지요. 억울한 사연이 있어 구천을 떠돌다 이곳 심광정에 터를 잡은 지 어언 십 년이 넘었사옵니다. 그동안 이 정자에 과거 공부한답시고 찾아온 선비가 여럿 있었지만, 하나같이 산도적같이 생기거나 배불뚝이 아저씨들뿐이라 제가 살짝 눈만 흘겨줘도 거품을 물고 도망가버렸지 뭡니까. 헌데 우리 도련님은 어쩜 이리 제 심장을 콩닥거리게 만드신단 말입니까! 아, 귀신이라 심장이 안 뛰긴 하지만 아무튼 너무 제 취향이시옵니다!"
홍단이 귀신은 부끄러운 척 소매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눈은 이미 이도령의 외모를 구석구석 핥아보듯 훑어보고 있었습니다. 이도령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눈만 끔벅거렸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귀신이 나타나면 내 간을 빼먹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얼굴을 보고 반해서 수다를 떨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속지 말자! 저것은 날 안심시킨 뒤에 홀려서 내 정기를 빨아먹으려는 요망한 둔갑술이 틀림없다!'
이도령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헛기침을 크게 내뱉고는, 양반의 체통을 지키려 덜덜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어흠! 어흐흠! 나는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 이도령이라 한다! 네가 비록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라 하나, 엄연히 음과 양의 법도가 다르고 사람과 귀신이 어울릴 수는 없는 법! 내가 사서삼경의 무서운 진리로 너를 꾸짖기 전에 어서 썩 물러가거라! 당장 사라지지 않으면 호통을 칠 것이다!"
이도령은 나름대로 가장 무서운 표정을 짓고 위엄 있게 소리쳤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목소리는 염소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꽉 쥔 두 주먹은 사시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홍단이는 그 모습이 무섭기는커녕 귀여워 죽겠다는 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호호호! 도련님, 호통치시는 모습도 어쩜 저리 앙증맞으실까? 목소리가 떨리시는 걸 보니 제가 무서우신 게로군요? 걱정 마시어요. 저는 사람 피를 빨아먹거나 해코지하는 저급한 원귀가 아니랍니다. 그저 외로운 정자에 홀로 지내다 보니 심심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여 말동무나 찾던 참이었지요. 게다가 도련님같이 눈부신 미남자를 어찌 감히 해칠 수 있겠사옵니까? 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터인데!"
말을 마친 홍단이가 갑자기 공중을 휙 날아 이도령의 등 뒤로 바짝 다가붙었습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서늘한 한기에 이도령은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으아아악! 떨어져라! 떨어져! 요망한 귀신아!"
"어머, 도련님 쑥스러워하시기는. 우리 밤도 긴데 오붓하게 앉아 시조나 한 수 읊으며 정을 나누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제가 생전에 가야금 하나는 끝내주게 탔거든요. 한 곡조 뽑아드릴까요?"
홍단이는 마치 이도령의 정실부인이라도 된 양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이도령 주변을 맴돌았고, 이도령은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며 귀신을 피해 도망 다니는 기상천외한 추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세상 어느 전설에 귀신이 선비가 좋다고 쫓아다니고, 선비는 정조를 지키겠다며 방문을 부여잡고 살려달라 외치는 코미디가 있단 말입니까. 그날 밤 심광정에서는 찢어지는 비명 대신, "한 번만 만져보자!"는 귀신의 앙증맞은 목소리와 "내 몸에 손대지 마라!"는 선비의 애달픈 절규만이 밤새도록 메아리쳤습니다.
※ 3: 부적 떡칠과 마늘 목걸이, 이도령의 눈물 나는 귀신 퇴치 작전
다음 날 아침, 찬란한 아침 햇살이 심광정 앞마당을 비출 때쯤에야 홍단이 귀신은 "아침이 밝았으니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오늘 밤에 또 뵈어요, 서방님~" 이라는 살 떨리는 작별 인사를 남기고 천장 너머로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이도령은 눈 밑에 시커먼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채 넋이 나가 벽에 기대어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귀신의 끈적한 구애를 피하느라 진을 뺀 탓에, 사서삼경은 펴보지도 못한 채 온몸의 기가 다 빨려버린 기분이었습니다.
마을에서 아침밥을 지어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올라온 칠성이는, 방문을 열자마자 귀신 꼴을 한 이도령을 보고 기겁을 하며 밥상을 엎을 뻔했습니다.
"아이고, 도련님! 이게 무슨 꼴이십니까요! 밤새 귀신에게 쥐어 뜯기기라도 하셨습니까? 얼굴이 반쪽이 되셨습니다요!"
"칠성아… 나 당장 짐 싼다. 산 내려갈 거다. 아버지가 호적을 파버린대도 난 내려갈 거다. 그 귀신이… 귀신이 내 입술을 훔치려 했다! 이건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짓이다!"
하지만 칠성이는 이도령의 바짓가랑이를 꽉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대감마님께서 도련님이 도망쳐 오면 칠성이 자신의 다몽둥이를 부러뜨리겠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도련님! 안 됩니다요! 대감마님 진노하시면 저희 둘 다 뼈도 못 추립니다요! 정 귀신이 무서우시면 제가 마을로 내려가서 귀신 쫓는 비방을 다 구해오겠습니다! 무당집에 가서 부적도 쓸어 오고, 귀신이 기겁을 한다는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올 테니 제발 하룻밤만 더 참으십시오!"
칠성이의 눈물 어린 설득과 아버지의 불호령이 두려웠던 이도령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칠성이를 산 아래로 보냈습니다. 반나절 뒤, 헐레벌떡 산을 올라온 칠성이의 커다란 봇짐 속에는 그야말로 귀신 퇴치용 무기들이 산더미처럼 들어 있었습니다. 시뻘건 주사로 그린 부적 백여 장, 알이 굵은 토종 마늘 수백 통, 그리고 귀신이 몸서리를 친다는 새빨간 팥이 말통으로 두 통이나 있었습니다. 게다가 어디서 구했는지 개 복숭아나무 가지까지 야무지게 꺾어온 칠성이는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였습니다.
"도련님! 이제 걱정 마십시오! 이 정도면 염라대왕이 와도 기겁을 하고 도망갈 겁니다요!"
이도령과 칠성이는 해가 지기 전부터 본격적인 방어선 구축에 들어갔습니다. 일단 방 안의 모든 벽과 천장, 문풍지, 심지어 요강 뚜껑에까지 빈틈없이 시뻘건 부적을 도배했습니다. 방 안이 온통 붉은색으로 변해 오히려 귀신 집보다 더 으스스해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도령은 알싸한 냄새가 진동하는 깐 마늘을 굵은 실에 꿰어 목걸이와 팔찌, 발찌로 만들어 온몸에 칭칭 감았습니다. 마늘 냄새가 어찌나 독한지 귀신이 오기 전에 이도령 자신이 먼저 질식해서 쓰러질 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방바닥에는 붉은 팥을 지뢰밭처럼 쫙 깔아놓고, 양손에는 복숭아나무 가지를 꽉 쥔 채 비장한 표정으로 밤을 맞이했습니다.
어둠이 내리고, 어김없이 낡은 방문이 덜컹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도령은 마늘 냄새에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복숭아 나뭇가지를 칼처럼 치켜들며 소리쳤습니다.
"오, 오너라! 이 요망한 귀신아! 오늘 밤엔 내 이 부적과 마늘로 너의 삿된 기운을 싹 뽑아버릴 테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어제보다 더 곱게 화장을 한 홍단이 귀신이 방글방글 웃으며 들어오려다 멈칫했습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독한 마늘 냄새와, 붉은 부적으로 도배된 벽, 그리고 온몸에 마늘을 치렁치렁 감고 있는 이도령의 기상천외한 몰골을 본 홍단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보통의 귀신이라면 팥과 부적의 기운에 눌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야 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홍단이는 문지방에 기대어 배를 잡고 숨넘어가게 웃기 시작했습니다.
"아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아하하하! 도련님, 대체 그게 무슨 꼴이시옵니까? 저랑 오늘 밤 소꿉장난이라도 하시려 준비하신 겁니까? 마늘 목걸이라니요, 어쩜 저리 기발하고 귀여운 생각을 다 하셨을까! 아하하하!"
홍단이는 무서워하기는커녕 이도령의 그 엉뚱하고 필사적인 모습에 완전히 취향을 저격당해버렸습니다. 웃음을 주체하지 못해 허공을 데굴데굴 구르던 홍단이가 눈물을 닦으며 방 안으로 쑥 들어왔습니다.
"멈춰라! 바, 발밑을 조심해라! 거긴 귀신이 밟으면 뼈가 녹는다는 붉은 팥이다!"
이도령이 기세등등하게 외쳤지만, 홍단이는 사뿐히 공중으로 떠올라 팥 지뢰밭을 훌쩍 넘어가 버렸습니다. 귀신은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을 이도령이 깜빡한 것입니다. 당황한 이도령이 벽에 붙은 부적을 가리키며 소리쳤습니다.
"이, 이 부적이 안 보이느냐! 조선 팔도에서 제일 용한 무당이 쓴 부적이다! 다가오면 혼비백산할 것이다!"
"어머, 도련님도 참. 저 부적은 처녀 귀신이나 짐승 귀신 쫓는 부적이지요. 저는 산전수전 다 겪은 한양 최고 기생 귀신 아닙니까. 게다가 저 부적, 글씨가 거꾸로 붙었사옵니다."
홍단이가 샐쭉 웃으며 이도령의 코앞까지 날아와 마늘 목걸이를 툭 건드렸습니다. 이도령은 기겁을 하며 쥐고 있던 복숭아 나뭇가지를 마구 휘둘렀지만, 나뭇가지는 귀신의 반투명한 몸을 허무하게 통과할 뿐이었습니다.
"아이고, 도련님. 다 좋은데 이 마늘 냄새는 정말 너무하옵니다. 냄새가 독해서 입맞춤이라도 하려면 제가 코를 막아야 할 판이옵니다. 어서 그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벗어던지시고, 저와 함께 달달한 연애담이나 나누시지요. 네? 우리 샌님~"
부적과 마늘, 팥까지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가자 이도령은 털썩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으허헝!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것이냐! 과거 시험이 코앞인데 너 때문에 글자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러다 낙방하면 우리 아버지가 날 호적에서 파버리실 것이다! 제발 날 좀 내버려 다오!"
우락부락한 사내가 온몸에 마늘을 감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에, 홍단이는 마음이 짠해지면서도 한편으론 모성애마저 강하게 자극받고 말았습니다.
'어머나, 우는 모습도 어쩜 저리 강아지처럼 짠하고 예쁠까. 안 되겠다, 이 언니가 우리 샌님 과거 급제할 때까지 확실하게 밀어줘야겠다!'
홍단이는 빙그레 웃으며 다짐했습니다. 귀신 쫓는 비방은커녕, 오히려 귀신의 마음에 불을 제대로 지펴버린 이도령의 눈물 나는 두 번째 밤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 4: 귀신도 반한 철벽남, "선비님, 우리 진도 좀 뺍시다!"
마늘 목걸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엉엉 우는 이도령의 모습에, 홍단이 귀신은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하면서도 동시에 묘한 정복욕이 불타올랐습니다. 생전에 한양 바닥에서 콧대 높기로 소문난 양반들부터 돈다발을 싸 들고 오던 대상인들까지 모두 제 치맛자락 아래 무릎 꿇게 만들었던 명월관 에이스 홍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 겁쟁이 샌님은 제 외모를 보고도 기절하기 바쁘니, 홍단이의 자존심이 살짝 상하면서도 동시에 오기가 발동한 것입니다.
'오호라, 감히 이 홍단이의 유혹을 마늘 따위로 쳐내려 하시다니? 샌님, 오늘부터 이 언니가 제대로 한 번 놀아드리지요!'
홍단이는 공중에서 훌쩍 뛰어내려 이도령의 바로 옆자리에 사뿐히 착지했습니다. 방바닥에 깔린 팥알들이 홍단이의 치맛자락에 스치며 사르륵 소리를 냈습니다. 이도령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등 뒤는 이미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낡은 벽이었습니다. 홍단이가 긴 소매로 입을 살짝 가리고는 눈꼬리를 요염하게 휘며 콧소리를 냈습니다.
"도련님~ 그리 울지만 마시고 제 얼굴 좀 똑바로 보시어요. 제가 비록 체온은 없지만, 얼굴 하나는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지 않사옵니까? 게다가 귀신이라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으니 이 얼마나 완벽한 평생의 짝이옵니까?"
"닥, 닥쳐라! 요망한 귀신아! 뉘 집 귀한 아들에게 평생의 짝 운운하는 것이냐! 나는 내년에 장원급제하여 정승 판서 댁 규수와 혼인할 몸이다! 당장 떨어지지 않으면… 내, 내가 내 혀를 깨물고 콱 죽어버릴 것이다!"
이도령은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그의 입술은 염소처럼 바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홍단이는 까르르 웃으며 이도령의 목에 걸린 마늘 목걸이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툭툭 튕겼습니다.
"어머, 혀를 깨무시겠다고요? 그럼 저희 둘 다 귀신이 되니 아주 찰떡궁합이 되겠사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허나 도련님, 우리 진도 좀 뺍시다. 언제까지 이렇게 마늘 냄새만 풍기며 담벼락에 붙어 계실 겝니까? 제가 평생 양반들 모시며 터득한 극락의 세계를 맛보게 해드릴 터이니, 눈 딱 감고 제 품에 안겨 보시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홍단이가 두 팔을 벌려 이도령을 덥석 안으려 들었습니다.
"으아아악! 어, 어머니! 살려주십시오! 귀신이 덮칩니다!"
이도령은 방구석을 차고 뛰어올라 방 안을 미친 듯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습니다. 홍단이는 공중을 날아다니며 나비처럼 우아하게 쫓아갔고, 이도령은 팥 지뢰밭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방 안은 그야말로 대환장 추격전이었습니다.
"도련님! 한 번만요! 딱 한 번만 입술 꾹 찍고 얌전히 갈게요!"
"싫다! 싫어! 내 입술은 아직 어머님 빼고는 닿은 적이 없는 청정구역이다!"
"아이고, 샌님! 요즘 시대에 그런 구닥다리 철벽이 어딨사옵니까? 이리 오시라니까요!"
한참을 쫓고 쫓기던 이도령은 결국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대자로 뻗어버렸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도령의 머리맡에 둥둥 떠 있던 홍단이가, 혀를 끌쯧 차며 치맛자락을 여몄습니다.
"쯧쯧, 얼굴은 천하일색인데 체력이 이리 저질이셔서야 원. 사내 구실이나 제대로 하시겠사옵니까? 알았사옵니다, 오늘은 제가 한 발 양보하지요. 대신, 조건이 있사옵니다."
홍단이의 말에 이도령은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으며 간절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조, 조건? 조건이 무엇이냐! 내 아버님 재산을 털어서라도 굿을 해줄 터이니 제발 나만 건드리지 마라!"
홍단이가 샐쭉 웃으며 이도령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톡 쳤습니다.
"굿 같은 소리 하시네. 저는 이승에 미련이 철철 넘쳐서 저승 갈 생각 없사옵니다. 조건은 다른 게 아니라, 내일 밤부터는 제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주고, 저와 술 한잔 나누며 이야기동무가 되어주셔야 하옵니다. 만약 또 팥이니 부적이니 헛짓거리를 하시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계신다면… 그날 밤은 제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해서 도련님의 혼을 쏙 빼놓을 것이옵니다. 아시겠지요?"
귀신의 어마무시한 협박(성추행 예고)에 이도령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아, 알았다… 알았으니 오늘은 그만 물러가 다오. 내일 칠성이를 시켜 안주라도 준비해 놓을 터이니…."
"어머머! 약속하신 겝니다? 호호호, 그럼 저는 이만 단장하고 내일 밤에 오겠사옵니다, 서방님!"
홍단이가 신이 나서 빙그르르 돌더니 허공으로 쏙 사라졌습니다. 이도령은 털썩 주저앉아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부처님, 공자님, 맹자님… 어찌하여 제게 이런 요사스럽고 집요한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하지만 이도령은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요망한 기생 귀신이, 그의 꽉 막힌 인생을 180도 뒤집어놓을 특급 과외 선생이 될 줄은 말입니다.
※ 5: 귀신과 선비의 기막힌 동거, 과거 시험 족집게 과외
다음 날 밤, 심광정 방 안에는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소반 위에는 칠성이가 읍내에서 부리나케 사 온 맑은 청주와 고기 안주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여전히 눈치를 살피며 잔뜩 웅크린 이도령과, 신이 나서 치맛자락을 펄럭이는 홍단이가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아니, 마주 앉았다기보다는 홍단이가 거의 이도령의 무릎 언저리에 떠서 턱을 괴고 뚫어지게 그를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도련님, 한 잔 받으시지요. 캬아~ 제가 살아생전에 이 명월관 청주를 기가 막히게 말아드렸는데."
비록 귀신이라 직접 술을 마실 수는 없었지만, 홍단이는 향기만 맡고도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억지로 술을 받아 마시던 이도령은, 어색한 침묵을 깨고자 마침내 낮에 읽다 만 『논어』를 꺼내 들었습니다. 귀신과 농지거리를 하느니, 차라리 어려운 학문 이야기로 귀신을 지루하게 만들어 쫓아낼 속셈이었습니다.
"어흠! 네가 이야기동무를 원했으니 내 특별히 성현들의 깊은 이치를 들려주마. 공자 가라사대,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이도령이 잔뜩 폼을 잡고 첫 구절을 읊조리려는데, 턱을 괴고 있던 홍단이가 갑자기 부채로 입을 가리며 끼어들었습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그다음은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락호아(不亦樂乎) 아니옵니까?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제가 지금 도련님 벗으로 멀리 구천에서 왔으니 딱 맞는 구절이옵니다."
이도령은 마시던 술을 뿜을 뻔했습니다. 글자라고는 기생들 이름밖에 모를 줄 알았던 귀신이, 논어의 구절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줄줄 꿰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 네가 어찌 논어를 아느냐? 기생이 어찌 사서삼경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
홍단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흘겼습니다.
"도련님, 샌님처럼 생겨서 진짜 꽉 막히셨군요? 제가 생전에 모시던 분들이 누구였겠사옵니까. 영의정, 좌의정, 예조판서 대감들이옵니다! 그 양반들이 명월관에 와서 술만 마시는 줄 아시옵니까? 술 취하면 꼭 잘난 척한답시고 사서삼경을 외워대고 시조를 읊어대는데, 제가 옆에서 장단 맞춰주다 보니 귀동냥으로 외운 것만 수백 권이옵니다! 심지어 제가 대리 시험 쳐도 장원급제할 수준이라니까요?"
이도령은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기생 귀신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학식은 웬만한 서당 훈장을 뺨치는 수준이었습니다.
"어디 보십시다. 아까 낮에 도련님 글 읽으시는 꼬락서니를 밖에서 몰래 들어보니, 시경(詩經) 해석을 아주 엉뚱하게 하고 계시더이다. 그 구절은 그렇게 밋밋하게 해석하면 채점관들이 졸아서 점수도 안 줍니다. 자, 제가 명월관 단골이셨던 이조판서 대감님의 족집게 해석법을 알려드릴 터이니 잘 들으시지요!"
그날 밤부터 심광정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귀신 쫓는 추격전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열혈 족집게 일타 강사로 변신한 홍단이와 그녀의 가르침에 푹 빠져버린 수험생 이도령의 심야 비밀 과외가 시작된 것입니다. 홍단이는 공중을 둥둥 떠다니며 이도령의 붓끝을 교정해주었고, 이도령은 더 이상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도련님! 거기서 붓을 그렇게 힘없이 꺾으면 사내의 기개가 안 보이지 않사옵니까! 좀 더 힘차게, 영의정 대감처럼 확 내리치시란 말입니다!"
"아, 알았다 홍단아! 이렇게? 이리 하면 되느냐!"
어느새 두 사람은 귀신과 인간의 경계를 넘어, 환상의 과외 짝꿍이 되어 있었습니다. 밤새 토론하고 글을 짓다 보면, 홍단이는 이도령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사심을 채웠고, 이도령은 홍단이의 명쾌한 해석에 무릎을 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습니다. 두 달이 번개처럼 흘러갔고, 쫄보에 책만 펴면 졸던 이도령의 눈빛은 어느새 늠름한 선비의 기개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 6: 마침내 다가온 과거 날, 직진 귀신의 유쾌한 작별 인사
마침내 한양에서 과거 시험이 열리는 달이 밝았습니다. 이도령은 심광정을 떠나 한양으로 돌아가야 할 채비를 마쳤습니다. 짐을 꾸려 마루에 나선 이도령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역력했습니다. 겁쟁이 쫄보 선비를 어엿한 대장부로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그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기생 귀신 홍단이었기 때문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어 홍단이가 나타날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이도령은 정자 기둥을 어루만지며 작별 인사를 건넸습니다.
"홍단아… 그동안 참으로 고마웠다. 네 요망한 잔소리 덕분에 내 평생 읽을 책을 두 달 만에 다 읽었구나. 이번 과거에 급제하면, 내 반드시 너의 원혼을 달래줄 큰 굿을 올려 극락왕생하게 해주마."
이도령이 눈시울을 붉히며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심광정 낡은 마루 밑에서 뽀얀 안개가 스르륵 피어올랐습니다. 그리고 눈부신 햇살을 피하려 커다란 연꽃잎을 양산처럼 쓰고 나타난 홍단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나타났습니다. 낮에는 기운이 약해져 모습이 희미했지만, 특유의 요염한 미소는 여전했습니다.
"어머어머, 도련님. 누구 맘대로 극락왕생을 시켜준답니까? 제가 저승 가기 싫다 하지 않았사옵니까."
"호, 홍단아! 대낮에 어찌 모습을 드러낸 것이냐! 기가 허해질 터인데!"
이도령이 깜짝 놀라 달려가려 하자 홍단이가 부채로 살짝 가로막았습니다.
"도련님 가시는 길, 섭섭해서 배웅은 해야 할 것 같아 무리 좀 했사옵니다. 굿 같은 거 돈 아깝게 하지 마시고, 장원급제하시면 저기 주막에 들러서 제일 비싼 명월관 청주나 열 병 사서 이 마루 밑에 뿌려주시지요. 저는 이 정자에서 다음번에 올 잘생긴 선비를 또 기다려 볼 참이옵니다."
홍단이의 농담에 이도령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허허, 넌 귀신이 되어도 그 요망한 바람기는 여전하구나. 그래, 알았다. 내 반드시 장원급제하여 네가 평생 취해 흐느적거릴 만큼의 술을 부어주러 오마."
"아, 그리고 도련님. 마지막으로 진짜 중요한 팁 하나 드릴게요."
홍단이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훅 다가왔습니다. 이도령은 귀를 쫑긋 세우며 긴장했습니다. 과거 시험의 시제라도 예측해 주려는 것인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팁? 무엇이냐? 설마 이번 과거의 시제(試題)를 안다는 것이냐?"
홍단이가 부채를 탁 접으며 이도령의 귓가에 속삭였습니다.
"도련님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실 때, 절대 고개 숙이고 바닥 보며 걷지 마시어요. 도련님은 콧대가 예술이니, 고개를 살짝 들고 45도 각도로 턱을 쳐드셔야 채점관들이 미모에 홀려 점수를 후하게 줄 것이옵니다! 아셨지요?"
"…이, 이 요망한 귀신이 끝까지!"
이도령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자, 홍단이는 까르르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연꽃잎과 함께 아지랑이처럼 흩어져 버렸습니다.
며칠 뒤 한양 도성. 과거 시험장인 궐문 앞에는 늠름하고 자신감 넘치는 자태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는 이도령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전의 쥐구멍만 찾던 쫄보가 아니었습니다. 홍단이의 족집게 과외 덕분인지 붓을 든 이도령은 거침없이 답안을 써 내려갔고,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당당히 장원급제였습니다. 금의환향한 이도령을 보며 이대감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이도령은 곧바로 질 좋은 청주 열 병을 사 들고 다시 심광정으로 향했습니다.
"홍단아, 네가 가르친 제자가 장원급제를 했다! 어서 나와서 술을 받아라!"
마루 밑에 청주를 콸콸 들이부으며 이도령이 외쳤지만, 밤이 새도록 홍단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요망한 귀신. 혹시 내 기운을 다 빨아먹고 저승으로 떠나버린 것은 아니겠지?'
아쉬움에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이도령의 귓가에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바람결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잘생긴 도련님, 축하하옵니다~ 이제 혼인도 하실 터이니 첩은 안 받으시겠지요? 저는 벌써 새로 들어온 근육질 무과 준비생을 꼬시러 바빠서 이만~ 호호호!"
이도령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으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기생 귀신의 유쾌한 변심에 안도하면서도, 평생 잊지 못할 기막힌 동거의 기억이 그의 가슴속에 유쾌한 무용담으로 남는 순간이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구독자 여러분, 배꼽 꽉 잡고 잘 들으셨나요? 귀신 쫓으려다 오히려 기생 귀신에게 과외를 받고 장원급제까지 한 이도령의 기막힌 사연이었습니다! 역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귀신이 아니라, 매력 넘치는 직진녀의 유혹인가 봅니다. 패관잡기에 실린 이 유쾌한 야담처럼, 때로는 무섭고 두려운 상황도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나를 성장시키는 유쾌한 기회가 될 수 있겠죠? 오늘 이야기가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리며, 다음 시간에도 속 시원하고 웃음 터지는 조선시대 야담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