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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과 염라대왕의 저승토론, 죽음의 문턱에서 웃으며 돌아온 사연 (청구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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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이보게, 염라! 자네가 법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나를 이래라저래라 하는가!" 죽어서 끌려간 저승 법정에서 대뜸 염라대왕에게 반말을 던진 땡중이 있습니다! 죄를 묻는 염라대왕과 "내 죄가 죄가 아니다"며 호통을 치는 배짱 두둑한 기암 스님. 저승사자마저 뒷목 잡게 만든 전무후무한 저승 대토론의 결말은?
※ 1: 평화로운 암자에 들이닥친 불청객과 곡차 한 사발
전라남도 깊고 깊은 지리산 자락, 아침 안개가 발목까지 찰랑거리는 아늑한 암자가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산새들이 지저귀고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며 맑은소리를 내는 평화로운 오후. 이 암자에는 '기암'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 살고 있었다. 불경을 읽을 때는 호랑이처럼 엄숙하다가도, 산을 내려가 마을 사람들을 만날 때면 배꼽이 빠지게 농담을 잘 던져 인근 열두 고을에서 '웃음 도사'로 통하는 기인 중의 기인이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날씨가 화창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따사로운 가을 햇볕을 온몸으로 받고 있으니, 스님의 고개는 어느새 앞뒤로 크게 흔들리며 꾸벅꾸벅 졸음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따, 오늘따라 햇살이 눅눅한 솜이불처럼 참으로 달콤하구나. 만사가 다 귀찮으니 이대로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저녁 공양이나 해야겠다.' 스님은 기둥에 등을 깊숙이 기대며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하늘을 덮고 있던 쨍쨍하던 해가 순식간에 시커먼 먹구름에 잡아먹히더니, 사방에서 얼음장같이 싸늘한 한기가 훅 끼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당의 낙엽들이 회오리바람을 타며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산짐승들의 울음소리마저 뚝 끊긴 기괴한 적막이 암자를 감쌌다.
"아이고, 삭신이야. 갑자기 웬 찬바람이 이리 분대. 소나기라도 쏟아지려나."
눈을 비비며 일어난 스님의 시선 끝에 무언가 기이한 형상이 맺혔다. 툇마루 앞마당에 시커먼 그림자 둘이 미동도 없이 떡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이 밀가루를 뒤집어쓴 듯 허옇고, 눈가는 핏발이 툭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머리에는 삐딱하게 눌러쓴 검은 갓을 쓰고, 손에는 어른 팔뚝만 한 시퍼런 쇠사슬을 짤랑거리며 들고 있는 꼴. 세상 천지에 저승사자 말고는 그런 흉측한 몰골을 하고 다닐 자가 없었다. 그중 덩치가 조금 더 큰 사자 하나가 품속에서 누렇게 바랜 꼬질꼬질한 종이뭉치, 즉 저승 명부를 꺼내 촥 펼쳐 들었다.
"기암! 네 이놈! 네 수명이 오늘 오시(午時)로 끝이 났으니, 잔말 말고 어서 밧줄을 받으라! 당장 저승으로 가자!"
쇳소리가 섞인 음산한 목소리가 마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평범한 사람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겠지만, 기암 스님은 달랐다. 황당하다는 듯 눈을 끔벅이던 스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사장삼을 툭툭 털어냈다. 어제저녁 아랫마을 과부 댁이 정성스레 보시한 찰떡을 세 개나 구워 먹고 속이 든든한데, 죽을 때가 되었다니 영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보시오, 사자 양반들. 내가 지금 저기 창고에 가을걷이해 둔 무도 썰어 말려야 하고, 내일모레는 옆 동네 박 서방네 집들이 가서 축원해주기로 굳게 약속을 해놓았소. 이렇게 앞뒤 다 자르고 무작정 데려가면 내 신용이 어찌 되겠소? 그리고 그 명부 좀 이리 줘보시오. 거기 적힌 글자가 '기암'이 아니라 혹시 '기함' 아니오? 내가 보기엔 사자 양반들이 노안이 와서 글씨를 잘못 본 게 틀림없소!"
능청스럽게 손을 내미는 스님의 태도에 사자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어허, 이 중놈이 죽을 때가 되더니 눈앞에 헛것이 보이나 보구나! 여기 네놈 이름 석 자가 대못 박히듯 붉은 먹으로 선명하게 적혀 있거늘, 감히 저승의 명부를 의심해? 어서 오랏줄이나 받아라!"
사자가 성질을 부리며 쇠사슬을 휙 던지려 하자, 스님은 날도래기처럼 재빠르게 몸을 굴려 방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잠깐, 잠깐만! 이보시오, 나도 체면이 있는 이승의 사람인데, 황천길 가는 마당에 짐 정리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오! 옷이라도 갈아입고 갈 테니 잠깐만 서 계시오!"
방으로 들어간 스님은 벽에 걸린 낡은 족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모신 족자였다. 스님은 바닥에 엎드려 정성스럽게 절을 세 번 올렸다. '어머니, 못난 아들놈이 저승 구경을 좀 가게 되었습니다. 이승에서 못다 한 효도는 염라 영감탱이랑 수다 좀 떨고 와서 다시 하겠습니다. 아들 입담 아시지요? 가서 염라 영감 수염이나 몇 가닥 뽑아오겠습니다.'
다시 문지방을 넘고 나온 스님은 암자 앞마당에 핀 노란 들꽃을 아쉬운 듯 쓰다듬고는 사자들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피듯 목소리를 바짝 낮추었다.
"이보게들, 황천길이 여기서 몇만 리나 된다던데 가다 보면 목도 꽤 마르지 않겠소? 사실 저기 부엌 뒤 장독대에 내가 겨울을 나려고 몰래 숨겨둔 곡차(穀茶)가 한 항아리 있네. 냄새가 기가 막히지. 어차피 저승 가면 그런 귀한 술 구경도 못 할 텐데, 딱 한 사발씩만 하고 출발합시다. 내 마지막 정성이니 거절하면 섭섭하오."
'곡차'라는 말에 사자들의 핏발 선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천년만년 망자들의 곡소리만 듣고 다니느라 입안에 단내가 나던 참이었다. 둘이서 짧게 눈빛을 교환하더니 큰 사자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네놈의 마지막 가는 길이 하도 가상하여 특별히 한 잔만 허락하겠다. 행여라도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마라!"
스님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부엌에서 퍼 온 달콤한 곡차를 사발에 듬뿍 담아 건네자, 사자들은 체면도 잊고 단숨에 들이켰다. 알싸한 기운이 돌며 사자들의 굳은 표정이 살짝 풀어진 틈을 타, 스님은 뒷짐을 턱 지고 흥얼거리며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쇠사슬에 묶이기는커녕 마치 동네 마실 나가는 영감님처럼 발걸음이 참으로 사뿐사뿐 가벼웠다.
※ 2: 저승사자 등짝을 택시 삼아 삼도천을 건너다
이승의 경계를 넘어 본격적인 황천길로 접어들었다. 으레 황천길이라 하면, 빛 한 줌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발밑으로는 피눈물이 흐르고, 사방에서 귀신들의 끔찍한 통곡 소리가 메아리치는 지옥도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기암 스님이 걷는 이 길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아이고, 여기는 길가에 핀 꽃들이 색깔은 시뻘겋게 예쁜데 향기가 요만큼도 없구먼. 보아하니 염라대왕이 꽃밭 가꾸는 데는 영 소질이 없는 모양이야. 흙에 거름을 안 줘서 그런 거 아니오?"
스님은 길섶에 피어난 저승 꽃, 상사화를 툭툭 건드리며 연신 투덜거렸다. 술기운이 조금 오른 사자들이 등 뒤에서 쇠사슬을 거칠게 짤랑거리며 재촉했다.
"이놈아, 쓸데없는 잡소리 집어치우고 발걸음이나 빨리해라! 저기 앞에 굽이치는 시커먼 물살이 보이느냐? 저곳이 바로 망자들이 건너야 할 삼도천(三途川)이다. 저 강을 건너야 비로소 심판의 문에 다다를 수 있느니라!"
사자가 뻗은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거대한 강줄기가 나타났다. 핏빛이 감도는 시커먼 물살이 무서운 속도로 소용돌이치며 흐르는데, 그 소리가 꼭 수만 마리의 뱀이 동시에 쉭쉭거리는 것처럼 소름 끼쳤다. 강가에는 전생에 악업을 쌓아 배 한 척 얻어 타지 못한 가련한 영혼들이 발을 담그지도 못한 채 "아이고 무서워라, 살려주시오!" 하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한 번 빠지면 살이 녹아내리고 뼈가 부서진다는 삼도천의 악명 높은 냉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삼도천 강둑에 다다른 기암 스님, 돌연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가사장삼이 흙먼지에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를 뻗으며 곡소리를 냈다.
"아이구, 내 무릎이야! 내 허리야! 이보시오, 사자 양반들. 내가 이승에서 평생토록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부처님 불전을 모시느라 연골이란 연골은 죄다 닳아 없어졌단 말이오. 이렇게 뼛속까지 시린 강물에 맨발을 담갔다가는 내 남은 뼈마디가 다 삭아버릴 텐데, 나는 죽어도 저 강은 못 건너겠소!"
사자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숨을 들이켰다.
"뭐라? 이미 죽은 망자 놈이 뼛골 삭을 걱정을 해? 어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지 못할까! 내 채찍을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하지만 스님은 아예 대자로 발을 뻗고 누워버렸다.
"때리려면 때리시오! 차라리 여기서 내 몸뚱이를 가루로 빻아서 강바람에 날려 보내든가, 아니면 당신네들이 나를 좀 업어서 건네주든가 하시오! 나는 절대 내 발로는 못 가오!"
저승사자가 망자의 수발을 들어 업어준다니, 이 무슨 해가 서쪽에서 뜨고 강물이 거꾸로 솟구칠 노릇인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사자가 쇠몽둥이를 높이 쳐들고 내리치려던 찰나, 스님이 슬쩍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흔들었다. '짤랑, 짤랑.' 놋쇠가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이승에서 옷을 입을 때 혹시나 몰라 주머니에 쑤셔 넣어두었던 엽전 닢이었다.
"어허, 성질 좀 죽이시오. 이거 보이오? 내가 이승에서 챙겨온 알토란같은 노잣돈이네. 저승에도 매점이 있고 주막이 있을 터인데, 나를 무사히 업어 건네주면 이 돈을 몽땅 자네들 술값으로 내놓겠네. 어떠신가?"
돈 앞에서는 저승사자도 장사 없다고 했던가. 사자 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엽전을 보더니, 서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결국 덩치가 산만 한 큰 사자가 한숨을 푹 쉬며 넓적한 등을 내밀었다.
"에잇,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승 땡중을 다 업어본담! 이번 한 번뿐이다. 어디 가서 내 등에 탔다고 입방정 떨면 그 혓바닥을 당장 뽑아버릴 테다!"
스님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신이 나서 사자 등에 덥석 올라탔다.
"아이고, 사자 양반 등짝이 우리 절집 안방 윗목보다 더 뜨끈하고 승차감이 기가 막히는구먼! 자, 출발합시다! 저기 왼쪽으로, 아니 오른쪽으로 좀 틀어보게! 물결이 센 곳은 엉덩이 젖으니까 피해서 가야지!"
스님은 아예 사자의 상투 튼 머리칼을 고삐처럼 부여잡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훈수까지 두기 시작했다. 강을 건너는 내내 스님은 사자의 귀에 대고 귀찮게 속닥거렸다. "이보게, 염라대왕 성질머리가 그렇게 더럽다며? 밥 먹을 때 반찬 투정은 안 하는가?" 사자가 성질을 꾹 참으며 대꾸도 하지 않자, 스님은 도리어 목청을 높여 노래를 뽑기 시작했다.
"삼도천 물결은 출렁출렁~ 사자 등짝은 폭신폭신~ 저승 가는 길이 아주 봄소풍 길일세~ 얼쑤!"
강을 무사히 건너니 이번에는 앙상한 뼈만 남고 배만 불룩한 배고픈 귀신들이 득시글거리는 아귀도(餓鬼道)가 나타났다. 퀭한 눈을 한 귀신들이 살아있는 살 냄새를 맡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스님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사자 등에서 벌떡 상체를 세우며 호통을 쳤다.
"네 이놈들! 눈깔을 어디다 뜨고 다니는 게야!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저기 명부전 염라대왕 영감탱이랑 겸상해서 술 한잔 진하게 걸치기로 예약하고 온 기암 스님이시다! 당장 길을 비키지 못할까!"
어찌나 기세가 등등하고 목소리가 우렁찬지, 달려들던 아귀들이 도리어 혼비백산하며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터주었다. 마침내 저 멀리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웅장한 검은 성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문 앞을 지키는 험악한 뿔 달린 도깨비 병졸들을 보며 스님은 사자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가사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친 스님은 성문을 향해 쩌렁쩌렁 소리쳤다.
"이보시오! 이 집 주인장 어디 계시오! 이승에서 제일가는 입담꾼, 기암이가 친히 행차하셨으니 어서 문을 여시오!"
그 당돌한 외침이 저승 천지에 메아리치자, 사자들은 이제 완전히 해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스님의 뒤를 따라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 3: 염라국 명부전, 무릎을 꿇지 않는 당돌한 죄인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이승의 왕실 대궐 따위는 한낱 아이들 장난감처럼 보일 만큼 엄청난 광경이 펼쳐졌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게 높은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수천 개의 굵은 기둥들. 놀라운 것은 그 기둥을 휘감고 있는 시커먼 용들이 나무 조각이 아니라 두 눈을 부라리며 스멀스멀 꿈틀거리는 진짜 용들이었다는 것이다. 발밑을 굽어보니 차가운 얼음판 같은 시퍼런 청석이 끝없이 깔려 있었고, 바닥 틈새마다 하얀 서늘한 김이 뱀처럼 피어올라 보기만 해도 뼛속까지 오금이 저려왔다. 광활한 전각 안에는 전생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수만 명의 영혼들이 밧줄에 묶인 채 끝도 없이 줄을 서 있었다. "아이고, 대왕님! 살려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찢어질 듯 울부짖는 통곡 소리가 마치 겨울철 칼바람 소리처럼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기암 스님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남들은 지옥의 공포에 질려 고개를 처박고 오줌을 지리기 바쁜데, 스님은 오히려 뒷짐을 진 채 가사장삼을 가볍게 펄럭이며 주변을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허허, 이 집구석은 천장이 쓸데없이 높아서 겨울에 땔감 값 좀 꽤나 들겠구먼. 염라 양반이 남의 죄나 캘 줄 알았지, 살림살이에는 영 소질이 없는 맹탕인 모양이야."
그 당돌한 농담이 공기를 가르기가 무섭게, 저 멀리 산더미처럼 솟아오른 거대한 단상 위에서 벼락같은 호통 소리가 명부전을 뒤흔들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함부로 혓바닥을 놀리느냐! 어떤 놈이 신성한 명부전에서 이토록 망발을 일삼는단 말이냐! 당장 저 미친놈을 끌어내어 형틀에 무릎을 꿇려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저승의 절대 군주, 염라대왕이었다. 단상 위에서 내려다보는 염라대왕의 모습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잘 익은 대추를 넘어 핏빛이 도는 검보라색 얼굴, 가마솥 뚜껑만 한 커다란 두 눈동자 안에서는 번개가 '파직' 거리며 번쩍이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가슴팍을 지나 무릎 언저리까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온 풍성한 수염이었는데, 대왕이 화를 낼 때마다 그 굵은 수염 가닥들이 살아있는 촉수처럼 파르르 떨리며 기이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대왕의 좌우에 서 있던 험악한 인상의 판관들과 도끼창을 든 붉은 도깨비 병졸들이 일제히 스님을 에워쌌다.
"꿇어라! 죄인은 당장 그 무엄한 고개를 숙이고 꿇어라!"
병졸들이 창끝을 스님의 목덜미에 겨누며 위협했다. 하지만 스님은 도리어 굽혔던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단상 위의 염라대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빛 하나 흔들림이 없었다.
"이보시오, 대왕님. 거 말 한마디 참 섭섭하게 하시네. 내가 이승에서 수십 년을 부처님 제자로 살며 밥을 먹고 도를 닦았소. 불상 앞에서도 법도를 따지며 함부로 꿇지 않던 내 무릎을, 왜 초면에 다짜고짜 자네 앞에서 꿇어야 한단 말이오? 자네가 우리 부처님보다 높은 직급이라도 되오? 아니면 나보다 불법의 도가 깊어서 내 스승이라도 된단 말이오?"
세상에나! 그 시끄럽던 저승 법정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섬뜩한 정적에 휩싸였다. 수백 년간 지옥을 다스려온 판관들은 너무 놀라 턱이 가슴까지 쩍 벌어졌고, 몽둥이를 쥐고 있던 병졸들은 사색이 되어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천하의 염라대왕에게 '자네'라니! 염라대왕 본인도 이 터무니없는 상황에 말문이 막혔는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실소를 터뜨렸다.
"허허... 허허허! 이 미친 중놈이 죽어서 황천을 건너더니 아예 겁 대가리를 상실했구나! 네놈이 이승에서 지은 끔찍한 악행들이 내 명부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거늘, 그토록 당당하게 주둥이를 나불댄단 말이냐! 들어라! 네놈은 출가한 승려의 신분으로 살생을 금하는 계율을 어기고 짐승의 고기를 탐하였으며, 맑은정신을 흐리는 곡차를 물 마시듯 퍼마셨다! 게다가 신성한 부처님의 말씀은 뒷전이고, 쓸데없는 입방정으로 무지한 아낙네들을 홀려 먹었느니라! 이것이 지옥불에 떨어질 대죄가 아니면 무엇이냐!"
염라대왕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옥으로 된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자, 단상 위의 찻잔이 튀어 오르고 명부전 기둥들이 기우뚱 흔들렸다. 그러나 스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사 소매를 걷어붙이며 맞불을 놓았다.
"대왕님, 말씀 한번 참 잘하셨소! 내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신 건 사실이오. 하지만 그것이 어찌 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었겠소! 내가 마신 술은 이 고단하고 썩어빠진 세상을 버텨내기 위해 불가피하게 삼킨 '성스러운 약'이었고, 고기를 씹은 것은 낡아빠진 내 몸뚱이라는 사찰을 허물어지지 않게 유지하기 위한 처절한 보시였소! 그리고 입방정으로 사람들을 홀린 게 아니라, 팍팍한 삶에 시름겨워 죽지 못해 사는 가엾은 백성들에게 한바탕 웃음을 안겨준 보시 중의 보시, 바로 무시보시(無施布施)였단 말이오! 자네가 그 잘난 저승 법전을 이 잡듯 뒤져보시오! 남 구제해주고 웃겨준 게 지옥 갈 죄가 되는지! 만약 그게 죄라면, 맨날 옥좌에 앉아 죄인들 족치며 인상이나 팍팍 쓰고 있는 대왕님 죄는 대체 얼마나 무거운 거요?"
스님의 청산유수 같은 궤변에, 염라대왕의 시뻘건 얼굴은 이제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달아올랐고, 무릎까지 내려온 긴 수염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4: 업경대 앞의 불꽃 튀는 궤변, "웃긴 것도 죄요?"
염라대왕이 기어이 옥좌를 박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 핏발이 선 채로 호통을 쳤다.
"이 혓바닥만 살아서 나풀거리는 요망하고 괘씸한 땡중 놈 같으니! 네가 끝까지 억지를 부리겠다 이것이냐! 여봐라, 당장 업경대(業鏡臺)를 대령하여라! 저 미치광이의 추악한 진실을 이 자리에서 만천하에 낱낱이 까발려, 그 세 치 혀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말리라!"
업경대. 망자가 거울 앞에 서기만 하면, 전생에 지은 크고 작은 죄업들이 한 치의 거짓 없이 활동사진처럼 비친다는 저승 최고의 절대 신물이었다. 대왕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덩치 큰 귀신 병졸 넷이 낑낑거리며 어마어마하게 큰 구리 거울을 제단 한가운데로 밀고 들어왔다. 거울 테두리에는 시퍼런 도깨비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섬뜩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염라대왕이 부채를 쫙 펼쳐 거울을 가리키자, 짙은 안개가 걷히며 기암 스님의 과거 행적이 서서히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장면. 어느 시골 마을의 잔칫집 뒷마당이었다. 스님이 양 볼이 터져라 커다란 고기만두를 쑤셔 넣고 우적우적 씹어먹는 모습이 비쳤다. 턱 밑으로 고기 기름이 번질번질하게 흐르고, 입맛을 쩝쩝 다지는 꼴이 영락없이 탐욕에 찌든 파계승의 모습이었다.
"자, 똑똑히 보아라! 출가한 승려라는 놈이 살생의 대가인 짐승의 살코기를 탐하며 침을 질질 흘리는 저 추악한 꼴을! 이것이 악업이 아니면 무엇이냐!"
염라대왕이 기세등등하게 삿대질을 하자, 스님은 주눅 들기는커녕 거울 코앞까지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고는 입맛을 다셨다.
"아이고, 저 날 저 고기만두 참말로 꿀맛이었지. 속이 아주 꽉 찬 게... 근데 대왕님, 눈이 그리 크면서 왜 앞뒤 문맥은 못 읽으시오? 저 만두에 들어간 돼지고기는 내가 칼 쥐고 잡은 게 아니란 말이오. 전염병에 걸려 길바닥에 혼자 픽 쓰러져 죽은 돼지를, 마을 사람들이 묻어주기 아깝다고 다져서 만두소로 쓴 거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불쌍하게 죽은 생명을, 내가 내 따뜻한 뱃속에 고이 장사 지내준 건데 그게 어찌 살생이오? 나는 밥을 먹은 게 아니라, 저 돼지의 영혼을 위해 극락왕생을 염불하며 내 몸뚱이를 무덤으로 흔쾌히 내어준 거란 말이오!"
듣고 보니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궤변에 판관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염라대왕이 헛기침을 하며 신경질적으로 다음 장면을 넘겼다. 이번에는 스님이 제 몸통만 한 커다란 막걸리 항아리를 통째로 치켜들고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남의 집 담벼락에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는 꼴사나운 장면이었다.
"이건 또 어찌 변명할 테냐! 맑은 기운으로 도를 닦아야 할 자가 탁한 술에 찌들어 노상방뇨까지 저지르다니! 지옥의 똥물에서 천 년을 굴러도 모자랄 죄로다!"
스님은 허허 웃으며 손뼉을 짝 쳤다.
"대왕님도 참 꽉 막히셨소. 저건 술이 아니라 '곡차'라는 훌륭한 보약이오! 내가 저 날 뙤약볕에서 밭 매는 노인네들을 돕다가 기력이 다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소. 저 곡차를 안 마셨으면 목청이 말라붙어서 저녁에 백성들에게 천수경을 읽어주지 못했을 거요. 불법을 전하기 위해 약으로 쓴 것인데, 그럼 부처님이 잘했다 칭찬하시겠소, 벌을 주시겠소? 그리고 저 오줌 싸는 담장! 저 집 주인이 고리대금으로 가난한 소작농들 피눈물 빼먹고 세운 몹쓸 담장이오! 내가 부정한 기운이 묻은 저 담장을 내 신성한 양기로 깨끗하게 소독하고 정화해 준 것이거늘, 참으로 섭섭한 소리를 하시는구먼!"
염라대왕의 얼굴이 자줏빛을 넘어 터질 듯 팽창했다. 거울 속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스님이 우물가에서 동네 아낙네들과 과부들에게 둘러싸여,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음담패설에 가까운 농담을 던지고 있었다. 아낙네들은 배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까르르 웃어대고 있었다.
"부처님의 진리를 전해야 할 입으로 여인들을 희롱하고 농지거리를 일삼다니! 이 죄야말로 발설지옥(拔舌地獄)으로 보내 혀를 뽑아버려야 할 최악의 음란죄다!"
대왕의 불벼락 같은 호통에도 스님은 정색하며 거울 속 여인들을 가리켰다.
"대왕님, 눈 좀 크게 뜨고 저 여인들의 표정을 보시오! 남편 잃고 빚에 시달려 밤마다 목을 매달까 말까 고민하던 늙은 과부들이오. 슬픔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점잖은 불경 백날 읊어봤자 귀에 들어오지도 않소. 내 우스갯소리 한마디, 짓궂은 농담 한 번에 저 여인들이 시름을 잊고 다시 살아갈 희망을 품었단 말이오! 죽어가는 사람을 '웃음' 하나로 살려낸 게 어찌 죄란 말이오? 여기 저승은 억울하게 끌려온 영혼들에게 '울음'과 '고통'만 강요하고 있지 않소! 웃음은 부처님의 미소요, 곡차는 부처님의 눈물이라 했거늘! 사람 살리는 진짜 법도 모르면서 책상머리에 앉아 남의 죄나 캐는 대왕님이야말로 이승에 내려가서 공부 좀 다시 하셔야겠소!"
도둑이 매를 드는 것을 넘어, 죄인이 판사를 가르치려 드는 전대미문의 광경이었다. 논리와 궤변의 절묘한 경계에서 쏟아지는 기암 스님의 당당한 언변에 염라대왕의 두뇌가 하얗게 정지해버렸다.
※ 5: 부처의 참뜻과 저승 법전의 정면충돌
염라대왕이 옥좌에서 몸을 일으키며 책상을 다시 한번 '쾅!' 하고 내리쳤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매서운지 명부전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청동 종이 스스로 '우우웅' 하고 길게 울음을 토해냈고, 단상 아래 엎드려 있던 판관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바닥에 코를 박았다. 귀신 병졸들이 들고 있던 창끝이 '덜덜덜' 소리를 내며 부딪힐 정도로 저승 전체가 얼음장보다 더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놈 기암아! 네놈이 자꾸 요망한 혓바닥을 놀려대며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 드는데, 저승의 법은 하늘이 정한 절대적인 규칙이라 추호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다! 불교의 엄중한 오계를 어긴 자는 예외 없이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지거나, 발설지옥으로 끌려가 그 더러운 혓바닥을 논밭 갈듯 쇠스랑으로 갈아버리는 것이 이곳 명부전의 무서운 철칙이란 말이다! 네가 아무리 궤변을 늘어놓으며 죄를 포장하려 한들, 여기 명부에 선명하게 기록된 네놈의 죗값인 먹물 자국이 스스로 사라지기라도 하겠느냐!"
눈에서 시퍼런 불을 뿜으며 호통을 치는 염라대왕의 기세는 실로 천하를 짓누를 듯했다. 하지만 기암 스님은 오히려 가사장삼의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단상을 향해 성큼성큼 두어 발짝 더 다가갔다. 목숨줄이 끊긴 마당에 지옥 불이 두려울 리 없다는 그 당돌한 배짱에 판관들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아이고, 대왕님! 거 참 목청 한번 징하게 크시구먼! 대왕님은 저 두꺼운 법전의 해묵은 먼지만 털어낼 줄 알았지, 정작 그 글귀 안에 담긴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은 전혀 모르는 까막눈이시구먼! 자, 내 말을 두 귀 똑바로 열고 한번 들어보시오. 부처님께서 살생을 하지 말라 하신 것은, 길가에 피어난 들꽃 한 송이부터 산속의 미물까지 세상 모든 생명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숭고한 '자비'의 가르침이지, 이미 죽어 나자빠진 짐승 고기 한 점 주워 먹었다고 당장 지옥불로 끌고 가 혓바닥을 뽑아버리라는 잔혹한 '형벌'의 뜻이 결단코 아니란 말이오! 대왕님은 지금 법전의 딱딱한 껍데기 글자만 핥고 계신 거지, 부처님의 그 뜨거운 참뜻은 발톱의 때만큼도 모르고 계신 거란 말이오!"
스님은 이제 아예 옥좌 위의 판결문을 삿대질하듯 가리키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논리정연하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대왕님, 가슴에 손을 얹고 상식적으로 생각을 좀 해보시오. 저기 아랫마을에 사는 김 서방이라는 양반은 평생 개미 새끼 한 마리 밟아 죽이지 않은 점잖은 선비라 자부하며 살았소. 하지만 그 인간은 평생 남에게 따뜻한 밥 한 술 내어준 적 없고,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며 오로지 제 뱃속만 챙기며 인색하게 살았단 말이오. 반면에 나는 비록 낡은 계율을 조금 어기고 고기도 씹고 술도 훌쩍였지만, 자식 잃고 길바닥에서 통곡하는 여인을 보면 곁에 주저앉아 같이 엉엉 울어주었고, 며칠을 굶은 배고픈 거지를 보면 내 밥그릇을 통째로 엎어주었으며, 인생살이가 너무 팍팍해서 차라리 목을 매겠다는 사람을 보면 내 체면 다 버리고 우스갯소리를 던져가며 억지로라도 웃겨 살려냈단 말이오! 자, 대왕님이 보시기에 누가 더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에 가깝다고 생각하시오? 겉껍데기만 번지르르하게 씻고 다니는 냉혈한이오, 아니면 계율은 좀 어겼어도 속알맹이는 사람 냄새가 풀풀 나게 뜨거운 이 기암이오?"
스님의 서슬 퍼런 일갈에 명부전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염라대왕마저 말문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제 길다란 수염만 '만지작만지작' 쓰다듬으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스님은 여세를 몰아 쐐기를 박듯 목청을 더 높였다.
"그리고 대왕님, 저승의 법이 그리도 공명정대하고 엄격하다면 어찌하여 이승에는 억울하게 피눈물 흘리는 착한 백성들이 저리도 지천으로 깔려 있단 말이오? 법이라는 것은 본디 사람을 살리고 보듬어주려고 만든 것이지, 구멍 난 그물처럼 약한 자들만 잡아다 가두고 벌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지 않소! 자네가 만약 이대로 나를 지옥으로 보낸다면, 이승의 백성들은 '아이고, 저 스님처럼 평생 남 도와주고 웃겨주며 살아봤자 결국 저승 가면 혓바닥 뽑히고 지옥 가는구나' 싶어서 다들 입을 꾹 닫고 서로 돕지도 않으며 평생 인상만 팍팍 쓰고 살 게 뻔하오! 그럼 이승은 말할 것도 없고, 저승 역시 앞으로 삭막한 통곡 소리만 가득한 끔찍한 울음바다가 될 텐데, 대왕님은 매일같이 그 지긋지긋한 곡소리를 들으며 천 년 만 년 옥좌에 앉아 계실 자신 있소? 나 같으면 귀가 따가워서 단 하루도 못 버티겠구먼!"
이건 명백한 하극상이자 판결을 뒤집어엎는 전무후무한 궤변이었다. 옆에서 기회를 엿보던 수석 판관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대왕님! 저 요망한 땡중의 혓바닥이 감히 저승의 법전을 능멸하다 못해 대왕님의 지엄한 권위까지 발밑에 짓밟고 있사옵니다! 당장 무쇠 작두를 가져와 저놈의 목을 치라 명하시옵소서!" 하고 악을 썼다. 하지만 염라대왕은 작두를 부르기는커녕, 의외로 턱을 괴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기암 스님을 가만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 험악하던 붉은 얼굴에 묘한 경외심이 스치는 것 같기도 하고, '허허, 이놈 참으로 요물이로다' 하는 깊은 호기심이 서리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염라대왕도 수천 년 동안 수억 명의 망자들을 심판해왔지만, 매번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굴하게 비는 영혼들만 보아왔지, 이렇게 사후 세계의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법과 자비의 본질'을 설파하는 인간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염라대왕의 굳게 다문 입술 끝이 미세하게 풀리는 것을 눈치챈 스님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옳거니! 드디어 이 고집불통 영감탱이가 미끼를 덥석 물었구나!'
※ 6: 염라대왕의 수염을 들었다 놨다 하는 필살기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턱을 쓰다듬던 염라대왕이 헛기침을 크게 두어 번 하더니, 짐짓 아까보다 더 엄하고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흠흠! 기암아, 네놈의 그 요란한 세 치 혀에서 나오는 말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네가 이승에서 베푼 그 '무시보시'라는 것도 어찌 보면 공덕이라 쳐줄 수는 있겠지. 허나, 이미 명부에 네놈의 이름과 죽을 날짜가 적혀 저승의 문턱을 넘은 이상, 내 맘대로 그냥 훌쩍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승에도 엄연한 체통이 있고 함부로 깰 수 없는 질서가 있는 법! 하지만 네놈의 그 거침없는 화술과 배짱이 하도 기가 막혀서 내 특별히 마지막으로 기회를 한 번 주마. 만약 네가 이 엄숙하고 삭막한 명부전 한복판에서 나를 진심으로 한바탕 크게 웃길 수 있다면, 내 친히 법전을 수정하여 네 수명을 연장해주고 이승으로 돌려보내 주마. 허나, 만약 나를 웃기지 못하고 실없는 소리만 지껄인다면, 그땐 정말 얄짤없이 네 그 요망한 혓바닥을 작두로 썰어버릴 것이다! 어떠냐, 이 목숨을 건 내기를 받아들이겠느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저승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전무후무한 '명부전 스탠딩 코미디 쇼'가 벌어지게 생겼다. 스님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기다렸다는 듯 옥좌를 향해 삿대질하듯 덥석 손가락을 뻗으며 염라대왕의 그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고 긴 수염을 정조준했다.
"아이고, 대왕님! 내가 이 명부전에 들어올 때부터 저 대왕님의 가슴팍을 덮고 있는 그 탐스러운 수염이 하도 신기해서 속으로 계속 궁금했던 게 하나 있소. 내가 진지하게 하나만 물어봅시다. 대왕님은 밤에 잠자리에 드실 때, 그 거추장스럽게 긴 수염을 두툼한 이불 안에 고이 넣고 주무시오, 아니면 이불 밖으로 척 꺼내놓고 주무시오?"
뜬금없는 질문에 염라대왕은 멍하니 눈을 끔벅거렸다. 천하를 호령하는 저승의 지배자가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멍청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어... 그,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글쎄... 내가 평소에는 그런 걸 단 한 번도 신경 써본 적이 없어서... 아마도 이불 밖에 꺼내놓고 잤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덮고 잤던가..."
스님이 바닥을 구르며 무릎을 탁! 하고 치더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이고, 배야! 천하의 염라대왕처럼 위대하고 꼼꼼하신 분이 제 턱밑에 달린 수염 간수 하나 제대로 못 해서 쩔쩔매신단 말이오? 자, 상상을 한 번 해보시오! 그 긴 수염을 이불 안에 푹 집어넣고 자자니 빳빳한 털끝이 가슴팍이랑 목덜미를 찌르고 간질여서 밤새 뒤척이며 잠이 안 올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이불 밖으로 훌렁 꺼내놓고 자자니 이 저승의 싸늘한 찬바람에 수염 끝이 꽁꽁 얼어붙어 시려서 또 잠을 설치지 않겠소! 내 보아하니 대왕님은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서 그 수염을 이불 안에 넣을까, 밖으로 뺄까 고민하다가 뼛골이 빠지게 잠을 설치는 게 분명하오! 그러니 매일같이 수면 부족에 시달려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재판할 때마다 툭하면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죄 없는 불쌍한 망자들한테 앞뒤 안 가리고 인상부터 팍팍 쓰는 거 아니오! 그 더러운 성질머리가 다 그 망할 놈의 수염과 수면 부족 때문이란 말이오!"
스님은 아예 염라대왕의 잠버릇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바닥에 벌러덩 누워 이불을 덮는 시늉을 하더니, 수염을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가 "아이고, 간지러워!" 하며 몸을 오징어처럼 비틀고, 다시 밖으로 휙 꺼내더니 "아이고, 턱밑이 시려 죽겠네!" 하며 덜덜 떠는 일인극을 능청스럽게 펼쳤다. 그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기막힌 입담에 그토록 엄숙하던 저승 법정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큭큭', '킥킥' 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끼를 들고 있던 붉은 병졸들은 웃음을 참느라 창대로 자기 입을 틀어막았고, 근엄하던 판관들은 갓끈이 끊어질 정도로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스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대왕의 어깨를 주무르는 시늉을 했다.
"아이고, 대왕님. 그 쇳덩이같이 딱딱하고 차가운 나무 의자에 수천 년을 꼬박 앉아 계시느라 궁둥이에 땀띠도 나고 굳은살도 꽤나 박였겠소. 내가 이승으로 무사히 돌아가면 우리 암자 목화밭에서 딴 최고급 솜을 세 근이나 꽉꽉 채워 넣은 엄청 폭신한 비단 방석을 하나 만들어서 태워 보내드릴 테니, 제발 그 험악한 똥 씹은 인상 좀 쫙 펴시오! 옛말에 웃으면 복이 온다 헀거늘, 명색이 저승을 다스리는 대왕님이 복이 지지리도 없어서야 쓰겠소?"
스님은 마지막으로 염라대왕의 남산만 하게 불룩 튀어나온 배를 슬쩍 가리키며 쐐기를 박았다.
"그나저나 대왕님 배가 저렇게 빵빵한 걸 보니 저승 식당 밥이 참으로 기름지고 맛난 모양이오? 혹시 밥 먹다 남은 돼지 뒷다리나 잔반이 있으면 내가 갈 때 봉다리에 좀 넉넉히 싸주시오. 우리 암자 쥐구멍에 사는 쥐들이 요새 하도 굶어서 눈이 퀭한 게, 솔직히 대왕님 화났을 때 얼굴보다 더 험악하게 생겼단 말이오!"
그 순간, 옥좌에서 입술을 꽉 깨물고 어떻게든 체통을 지키려 부들부들 떨던 염라대왕이 결국 참지 못하고 배를 부여잡으며 폭발하고 말았다.
"푸하하하하! 으하하하!"
마치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한 엄청난 웃음소리가 명부전을 뒤흔들었다. 어찌나 호탕하고 크게 웃는지 천장을 받치는 기둥들이 덜덜 흔들리고, 대왕의 커다란 눈에서는 참았던 눈물까지 찔끔 튀어나왔다.
"하하하! 이 발칙하고 미친놈을 보았나! 네놈 같은 혓바닥을 가진 중놈은 지옥에 와도 골칫거리다! 네가 만약 지옥의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면, 죄인들이 죗값을 치르며 반성하기는커녕 네놈의 농담 따먹기나 듣느라 지옥 전체가 시장통 잔칫집처럼 시끌벅적해질 게 뻔하지 않으냐! 우리 신성한 저승의 정숙함과 평화를 위해 너 같은 놈은 당장 이승으로 영구 추방하노라!"
염라대왕은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호쾌하게 판결봉을 내리쳤다.
"여봐라! 기암의 저승 명부를 당장 불태워버리고, 남은 수명에 특별 보너스로 삼십 년을 더 얹어주어라! 그리고 저놈이 다시 이승으로 가는 길에 제발 그 나불대는 입 좀 바늘로 꿰매서 쫓아내라. 내 귀가 다 따가워서 하루도 못 살겠다! 어서 끌어내!"
대왕의 호통 속에 담긴 유쾌한 배려에, 스님은 저승사자들에게 질질 끌려 나가면서도 끝까지 목청을 높였다.
"아이고, 대왕님! 고맙소! 내가 이승 가면 진짜로 폭신한 솜방석 두툼하게 만들어서 불태워 보낼 테니 잊지 마시오! 그리고 오늘 밤부터는 수염 꼭 이불 안에 넣고 따뜻하게 주무시오!"
※ 7: 관 뚜껑 박차고 나온 스님의 이승 귀환기
무대는 다시 이승의 지리산 자락, 기암 스님의 평화롭던 암자로 돌아왔다. 화창했던 아침과 달리, 암자 마당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구슬픈 곡소리가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스님이 툇마루에서 졸다가 돌연 숨을 거두었으니, 암자는 그야말로 초상집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얀 소복을 입은 상제들과 제자들은 땅바닥을 치며 통곡을 했다.
"아이고, 우리 스님! 어제까지만 해도 찰떡을 세 개나 드시며 펄펄 날아다니시던 분이, 어찌 마지막 불법 한마디 못 남기시고 이리도 허망하게 급사하셨나이까!"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산아래 마을 사람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아이고, 그 스님 참말로 훌륭하신 분이었제. 그 양반 농담 한마디에 우리 시어머니 화병도 다 낫고, 가뭄에 타들어 가던 내 속도 시원하게 뚫렸는데... 이제 무슨 낙으로 산담..."
마당 한가운데에는 큼지막한 천막이 쳐졌고, 기암 스님은 이미 삼베 수의를 정갈하게 차려입고 관 속에 누워 입관(入棺) 절차까지 모두 마친 상태였다. 이제 상여가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관 뚜껑에 긴 대못을 박아 영영 이승과의 연을 끊어내야 하는 일촉즉발의 슬픈 순간이 다가왔다. 큰스님의 지시로 목수가 커다란 망치를 들고 관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에취! 에취!!'
갑자기 산천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거대한 재채기 소리가 연달아 두 번이나 터져 나왔다. 마당에서 목 놓아 곡을 하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일순간에 숨을 들이켜며 얼음기둥처럼 굳어버렸다. 까마귀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기괴한 적막.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 어이, 방금 관 속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바... 바람 소리겠지. 설마 죽은 사람이 재채기를..."
서로 눈치만 보며 덜덜 떨고 있는데, 이번에는 관 안에서 '쾅! 쾅! 쾅!' 하고 나무판자를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암자를 울렸다. 이어서 익숙하고도 쩌렁쩌렁한 기암 스님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놈들아! 좁아 터져 죽겠다! 어서 뚜껑 좀 열어라! 염라 영감탱이가 숨구멍도 안 뚫어주고 급하게 밀어 넣어서 답답해 죽겠단 말이다! 나 아직 안 죽었다!"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귀... 귀신이다! 스님이 원귀가 되어 돌아오셨다!" 하며 짚신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뒷걸음질을 쳤다. 마을 사람들도 비명을 지르며 담장을 넘으려 난리통을 벌였다. 그중에서 평소 스님을 제일 잘 따르던 가장 체격이 큰 수제자가 벌벌 떨면서도 억지로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관 뚜껑을 확 밀어젖히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수의를 곱게 차려입은 기암 스님이 벌떡 일어나 앉더니,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늘어지게 하품을 쩍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삭신이야. 사자 놈들 등에 업혀 오느라 허리가 다 쑤시네. 근데 이놈들아, 나 아직 저승 명부에서 이름 다 지워내고 살아서 왔는데 왜 벌써 산 사람을 관짝에 쑤셔 넣고 난리들이냐? 그리고 저기 상에 차려진 장례식 음식 냄새가 왜 이리 고소하고 좋으냐? 나 삼도천 건너느라 배고파 뒤지겠다, 어서 밥상이나 내 앞으로 가져와라!"
처음에는 시체가 일어났다며 까무러치던 사람들도, 스님이 관에서 훌쩍 뛰어내려 제자가 들고 있던 제사상 찰떡을 덥석 뺏어 크게 한입 베어 무는 꼴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부처님 맙소사! 우리 스님이 진짜로 살아 돌아오셨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스님의 옷자락을 만져보며 눈물 콧물을 흘렸다. 스님은 상여 앞에 떡하니 차려진 돼지고기 수육과 막걸리를 거리낌 없이 들이켜며, 사람들에게 저승에서 겪은 기상천외한 이야기보따리를 신나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저승? 에이, 뭐 별거 없어! 시퍼런 불꽃 튀고 귀신들 곡소리 나는 건 맞는데, 거기 제일 꼭대기에 앉아있는 염라대왕이라는 영감님도 결국 우리랑 똑같더라니까! 잠잘 때 수염 어떻게 할지 몰라서 뒤척이고, 소화 안 돼서 배불뚝이로 끙끙대는 그냥 동네 심술쟁이 할아버지 같더라 이 말이야! 내가 그 영감탱이 턱밑에 가서 수염 관리하는 비법 좀 슬쩍 알려주고 배꼽 빠지게 웃겨줬더니, 글쎄 고맙다고 내 수명에 삼십 년이나 보너스로 더 얹어서 등 떠밀어 보내더구나!"
마을 사람들은 염라대왕을 농락하고 돌아온 스님의 허풍 섞인 모험담에 배를 잡고 구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전까지 초상집이었던 암자는 순식간에 잔칫집으로 변해버렸다.
그날 이후, 기암 스님은 염라대왕이 덤으로 얹어준 그 삼십 년을 정말로 '하늘이 준 꽁돈'처럼 여기며 하루하루를 신나게 살아갔다. 예전보다 낡은 계율에는 더 얽매이지 않았고, 가난하고 슬픈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배꼽이 빠질 정도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끔은 염라대왕이 솜방석은 잘 쓰고 있는지 흉도 슬쩍 보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스님을 '염라대왕도 웃겨서 굴복시킨 저승 도사'라며 칭송했지만, 스님은 그저 막걸리 한 사발을 시원하게 들이켜며 이렇게 말했다.
"인생살이 뭐 대단한 거 있나? 죽어서 저승 법정에 섰을 때 염라대왕 얼굴 보고도 호탕하게 웃어젖힐 수 있는 배짱 하나만 있으면, 그게 바로 극락이고 천국인 거지! 우리 어르신들도 쓸데없는 근심 걱정 다 내려놓고, 그저 인상 활짝 펴고 오늘 하루 껄껄 웃으며 사시게나!"
그 허허로운 웃음소리는 지리산 깊은 계곡을 넘어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따뜻한 메아리로 남았더란다.
유튜브 엔딩멘트
자, 어르신들! 오늘 기암 스님과 염라대왕의 한판 승부, 통쾌하게 들으셨습니까? 죽음 앞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스님의 배짱이 우리네 삶에 큰 위로가 되네요. 팍팍한 세상, 억지로라도 한바탕 크게 웃으시면 염라대왕 명부에서 어르신들 수명도 쑥쑥 늘어날 겁니다! 오늘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꾹 눌러주시고, "나도 삼십 년 더 살란다!" 하고 댓글 남겨주세요. 항상 웃으며 건강하십시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