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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 죽을 운명이던 외아들, 바둑 두는 두 노인에게 술 한 잔 올리고 백 살까지 살다
귀한 외아들이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에 애가 탄 부모가, 지나가던 도인의 일러 줌대로 산속에서 바둑 두는 두 노인께 정성껏 술과 안주를 올립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사람의 명을 적고 지우는 남두성·북두성이었고, 감동한 두 신선이 아들의 수명을 크게 늘려 주었다는 장수 설화.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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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귀한 외아들. 하지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부모의 기쁨도 잠시, 청천벽력 같은 예언이 떨어집니다. "이 아이는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단명할 운명이오." 절망에 빠진 부모에게 찾아온 한 줄기 희망. 깊은 산속, 바둑을 두는 두 노인에게 정성껏 술을 대접하라는데… 과연 소년은 정해진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요?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하늘의 신선들, 그리고 저승의 명부를 바꾼 기적 같은 이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 1: 귀하게 얻은 아들과 청천벽력 같은 예언
조선 팔도에서 제일가는 명당자리, 수백 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자리한 최 진사 댁은 으리으리한 기와집 아흔아홉 칸을 자랑하는 대궐 같은 집이었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의 벼가 모두 최 진사의 곳간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재물이 넘쳐났고, 인심 또한 후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이는 최 진사 부부에게도 남모를 깊은 한숨이 있었습니다. 봄이 오면 마당에 영춘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여름이면 매미 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졌지만, 그 넓은 집안 어디에서도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나 뜀박질하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부부의 나이가 어느덧 마흔을 훌쩍 넘겼건만, 슬하에 혈육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밤이 깊어 달빛이 창호지에 스며들 때면, 부인은 홀로 삼신상을 차려놓고 소리 죽여 흐느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제 평생에 비단옷을 입지 않아도 좋고, 남은 생을 거친 보리밥만 먹어도 좋사오니, 부디 제 품에 안아볼 수 있는 핏줄 하나만 점지해 주시옵소서. 이 넓은 집이 텅 빈 무덤처럼 차갑고 외롭사옵니다.'
부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름난 명산대천을 샅샅이 찾아다니며 백일기도를 올렸습니다. 한겨울 살을 에이는 듯한 섣달그믐의 삭풍 속에서도 얼음을 깨고 맑은 물을 길어와 목욕재계를 했고, 지나가는 과객이나 헐벗은 걸인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따뜻한 국밥과 솜옷을 내어주며 적선을 쌓았습니다. 하늘도 그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것일까요. 부인의 나이 마흔다섯, 이미 여인으로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모두가 체념했던 그해 봄에 기적처럼 태기가 찾아왔습니다. 열 달을 뜬눈으로 밤을 새우듯 조심스레 품어온 끝에, 드디어 온 집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고, 하늘이시여! 천지신명께서 드디어 우리 가문이 대를 이을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셨구나! 내 목숨을 거두어가신다 해도 이제는 여한이 없다!"
최 진사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기쁨에 겨운 최 진사는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불러 모아 무려 한 달 동안이나 크게 잔치를 열었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마치 옥을 깎아놓은 듯 이목구비가 수려했고, 부모의 맹목적이고도 지극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잔병치레 한 번 없이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아이는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영특함이 남달랐습니다. 다섯 살에 천자문을 떼었고, 일곱 살에는 사서삼경의 깊은 뜻을 헤아려 스승마저 혀를 내두르게 했습니다. 열 살이 되자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자애로이 대하는 군자의 풍모까지 갖추었으니, 최 진사 부부에게 이 아이는 삶의 전부이자 세상 그 자체였습니다. 부부는 아이가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어도 배가 불렀고, 아이의 환한 미소 한 번이면 세상의 모든 시름이 봄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습니다. 아이가 열다섯 살이 되어 상투를 틀 무렵, 낡고 빛바랜 장삼을 걸치고 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노스님 한 분이 최 진사 댁 대문 앞을 지나며 목탁을 두드렸습니다. 청아한 목탁 소리가 춘곤증이 묻어나는 나른한 오후의 공기를 갈랐습니다. 마침 대청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소년은 그 소리를 듣고는 책을 덮고 잰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나갔습니다. 소년은 곳간에서 가장 질 좋은 백미를 한가득 퍼 와서는 두 손으로 공손히 스님의 바루에 부어드렸습니다.
"스님, 바람이 제법 찬데 먼 길을 걸어오시느라 얼마나 고단하십니까. 툇마루에 앉아 시원한 우물물이라도 한 사발 드시고 다리쉼을 하고 가시지요."
소년의 다정하고 예의 바른 말씨에 노스님은 빙그레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습니다. 삿갓 아래로 드러난 스님의 깊은 눈매가 소년의 얼굴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소년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스님의 눈빛이 돌연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의 맑은 눈망울과 이마, 그리고 인중을 찬찬히 훑어 내려가던 스님의 미간이 깊게 패었고, 곧이어 안타까움이 가득 배어나는 짧고도 묵직한 탄식이 스님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습니다.
"쯧쯧쯧... 하늘도 참으로 무심하시지. 이렇게도 맑고 기운찬 상을 타고났거늘, 어찌하여 명줄이 이리도 턱없이 짧단 말인가. 아깝고 또 아깝도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질 꽃불이로구나..."
스님의 혼잣말은 몹시 작았지만, 마침 아들을 주려고 다과를 내어오며 마당으로 내려서던 최 진사의 귀에는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울렸습니다. 최 진사는 들고 있던 다과상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것도 모른 채 사색이 되어 대문간으로 달려갔습니다.
"스, 스님! 방금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명줄이 짧다니요? 꽃불이 지다니요! 우리 아이에게 무슨 불길한 문제라도 있단 말씀이십니까!"
스님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하는 듯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삿갓을 깊게 눌러쓰고 발길을 돌려 도망치듯 자리를 뜨려 했습니다. 하지만 최 진사는 신발도 신지 않은 버선발로 흙바닥에 뛰어들어 스님의 거친 장삼 자락을 꽉 부여잡았습니다.
"이대로는 절대 못 가십니다! 제가 가진 전 재산을 부처님께 시주하겠습니다. 아니, 제 목숨을 거두어 가셔도 좋습니다! 제발, 제발 방금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속 시원히 말씀해 주십시오!"
눈물까지 글썽이며 바닥에 엎드려 매달리는 아버지의 끓어오르는 간절함에, 스님은 마지못해 무거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스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슬픈 눈으로 최 진사와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타고난 운명이란 한낱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강물과도 같은 법이오. 소승이 보니, 이 아이의 사주와 관상에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소이다. 삼도천을 지키는 저승사자의 눈이 이미 이 아이를 향해 있고, 염라대왕의 서늘한 명부에 이 아이의 이름이 적분으로 뚜렷하게 올라 있으니... 아무리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애를 쓴다 한들, 스무 살 고개를 넘기지는 못할 단명할 운명이오."
"스, 스무 살... 스무 살이라니요! 그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입니까!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어 얻은 내 목숨보다 귀한 내 외아들이 단명한다니요!"
그 끔찍한 소리를 듣고 안채에서 허겁지겁 달려 나온 부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마당 한가운데 혼절하여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최 진사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감에 주저앉아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스님, 제발 우리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무슨 방도가 있을 것 아닙니까! 저승사자를 매수하든, 염라대왕과 담판을 짓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우리 아이의 명줄만은 늘려주십시오!"
하지만 스님은 무겁고도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습니다.
"저승사자의 명부와 염라대왕의 뜻은 하늘의 이치요. 인간의 재물이나 눈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괜한 미련으로 아이를 괴롭히지 마시고, 그저 남은 시간 동안 아이에게 원 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며 편안하게 보내줄 준비를 하는 것만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도리일 것이오."
스님은 그 말을 끝으로 옷자락을 빼내어 홀연히 발길을 돌렸습니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리쬐는 최 진사 댁 마당에는, 세상을 다 잃은 듯한 부모의 처절하고도 구슬픈 곡소리만이 찢어질 듯 슬프게 메아리치고 있었습니다.
※ 2: 다가오는 스무 살, 죽음의 그림자와 도인의 등장
스님이 다녀간 그 잔인한 봄날 이후, 최 진사 댁의 시간은 지옥의 불구덩이를 걷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훤칠한 아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부모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타들어 갔습니다. 뜰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을 보아도 내년에는 아들과 함께 이 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눈물이 솟았고, 밤에 들리는 스산한 바람 소리는 마치 저승사자가 아들의 목숨을 데리러 온 발소리 같아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부부는 아들의 정해진 운명을 어떻게든 바꿔보기 위해 조선 팔도의 용하다는 의원들을 모조리 불러들였습니다. 산삼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천종산삼부터 바다 건너 들여온 귀한 약재까지, 몸에 좋다는 것은 모조리 달여 먹였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름난 무당들을 쉴 새 없이 불러들여 억울한 귀신을 달래는 굿판을 밤낮으로 벌였고, 심청산 깊은 곳의 영험한 기운이 담겼다는 붉은 부적을 사들여 아이의 방 안은 물론 온 집안의 기둥마다 빼곡하게 붙여두었습니다. 하지만 억만금을 쏟아부어도 부모의 타들어 가는 속은 그 무엇으로도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시간은 부모의 애타는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야속하게도 덧없이 흘러, 어느덧 아들의 나이가 열아홉 살이 되었습니다. 해가 바뀌어 섣달이 지나면 기어코 스무 살이 된다는 끔찍한 사실에 부부는 곡기마저 끊은 채 뼈만 남은 듯 수척해졌습니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아니면 정말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 다가온 탓인지 아들의 안색도 예전 같지가 않았습니다. 늘 달덩이처럼 맑고 붉은 기운이 돌던 얼굴에는 언제부턴가 잿빛 같은 옅은 그늘이 드리워졌고, 총기 넘치던 눈빛은 허공을 떠도는 듯 흐려졌습니다. 아들은 밤마다 끔찍한 가위눌림에 시달리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곤 했습니다.
'어머니... 어제도 꿈속에서 그들이 찾아왔습니다. 칠흑같이 검은 도포를 입고 챙이 넓은 갓을 깊게 눌러쓴 창백한 사내 셋이 제 방 문턱을 넘어왔어요. 그들은 자욱한 안개가 낀 차갑고 검은 강가로 저를 끌고 갔습니다. 강물 위에는 낡은 나룻배 한 척이 떠 있었는데, 뱃사공이 이제 때가 되었으니 그만 배에 오르라며 제 손목을 차갑게 옭아맸습니다. 손목이 너무 시려서, 살이 얼어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아들이 아침마다 식은땀을 닦아내며 털어놓는 꿈 이야기는 영락없는 저승사자와 망자가 건넌다는 삼도천의 이야기였습니다. 부인은 아들의 차갑게 식어가는 두 손을 부여잡고 오열했습니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내 너를 어떻게 얻었는데, 내 평생을 바쳐 얻은 내 전부인데! 염라대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앞을 가로막는다 해도, 내 목숨을 내어주고서라도 내가 널 지킬 것이다! 내 새끼를 절대 혼자 어두운 길로 보내지 않을 것이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하루하루 피를 말리던 어느 섣달그믐날 밤이었습니다. 하늘이 구멍이라도 난 듯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문풍지를 찢을 듯 때리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고요한 밤, 밖에서 누군가 무겁고 둔탁한 소리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인이 덜덜 떨며 문을 열어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을 소복하게 맞은 백발의 도인이 꼿꼿하게 서 있었습니다. 얇은 무명옷 한 벌만 걸친 노인이었으나, 그의 주변에는 눈보라조차 비껴가는 듯한 기이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도인은 하인을 밀치고 거침없이 마당으로 들어서더니, 안방을 향해 호랑이가 포효하듯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집에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구나! 저승의 문턱에 반쯤 발을 걸치고, 스무 살의 고개를 넘지 못해 슬피 우는 불쌍한 영혼이 이 안에 있느냐!"
그 소리에 놀라 뛰어나온 최 진사 부부는 짚신도 신지 않은 버선발로 차가운 눈밭에 엎드려 도인의 바짓가랑이를 생명줄인 양 꽉 붙잡았습니다.
"도인 어른! 신선님! 제발, 제발 우리 아들 좀 살려주십시오. 죽음을 막을 방도가 정녕 없는 것입니까! 무엇이든, 그 어떤 끔찍한 일이라도 다 하겠습니다!"
도인은 굳게 닫힌 방문이 열리며, 달빛보다 더 창백한 얼굴로 걸어 나오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소년의 맑고 결연한 눈동자와 죽음의 공포가 뒤섞인 표정을 살피던 도인은, 눈 덮인 긴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인간의 정해진 운명을 바꾸는 것은 하늘의 엄중한 이치를 거스르는 대역죄에 해당하는 법. 허나, 지극한 정성과 목숨을 건 용기는 때로 굳게 닫힌 하늘의 문도 열어젖히는 법이지. 아들아, 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정녕 그토록 강하더냐?"
"예. 저는 살아야겠습니다. 저를 위해 평생 피눈물을 흘리신 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불효를 저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제가 살아남아 두 분의 은혜를 온전히 갚고, 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십시오."
소년의 한 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본 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에서 낡고 해진 서책 하나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누구도 엿듣지 못하게 은밀하고도 묵직한 목소리로 비책을 일러주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스무 살이 되기 하루 전날, 즉 내년 너의 생일 전날 밤에 일어날 일이다. 저 멀리 남쪽으로 삼백 리를 걸어가면 가장 깊고 험한 남산이 있다. 그 남산 꼭대기, 구름이 발아래로 흐르는 가장 높은 암반 위에 올라가면, 흰 도포를 입은 노인과 검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마주 앉아 신선들의 놀음인 바둑을 두고 있을 것이다."
도인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횃불처럼 날카롭게 빛났습니다.
"잘 들으거라. 흰 도포를 입고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분은 사람의 수명을 넉넉하게 늘려주시는 '남두성'이시고, 검은 도포를 입고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분은 죽음과 저승의 명부를 관장하시는 '북두성'이시다. 너는 지금부터 정확히 백 일 동안 세상에서 가장 맑고 향기로운 술을 빚어야 한다. 그리고 정갈하고 맛깔스러운 안주를 준비하여 그들이 있는 꼭대기로 올라가거라. 노인들이 바둑의 승부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그림자처럼 묵묵히 다가가 그들의 곁에 꿇어앉아 빈 잔에 술을 채워 올려야 한다."
도인은 최 진사 부부와 아들의 눈을 번갈아 마주치며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금기를 신신당부했습니다.
"명심, 또 명심하거라! 아무리 두렵고 놀라운 것을 보아도, 산짐승이 너의 살점을 뜯어먹으려 환영을 만들어내도 절대 먼저 입을 떼어서는 안 된다. 그분들이 네게 먼저 묻기 전까지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말고, 그저 술잔이 비면 채우고 또 채우기만 해야 한다. 만약 북두성과 남두성이 네가 올린 그 정성스러운 술을 기분 좋게 마셔만 준다면, 단단히 자물쇠가 채워진 저승의 명부도 기적처럼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도인은 부부와 소년이 다시 엎드려 절을 올리는 사이,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발자국조차 남지 않았고, 순식간에 눈에 덮여 모든 흔적이 지워졌습니다. 그것은 칠흑 같은 절망의 끝에서 하늘이 내려준 썩지 않을 동아줄이자, 아들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빛이었습니다.
※ 3: 도인의 비책, 정성을 다해 빚은 백일주
도인이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며 남기고 간 비책은 최 진사 댁 사람들의 가슴에 거대한 불씨를 지폈습니다. 그날부터 최 진사 댁은 오로지 아들의 운명을 건 술 빚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아들의 스무 번째 생일 전날까지는 정확히 백 일의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날부터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행여나 부정한 기운이 섞여 들어갈까 염려하여, 매일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가장 차가운 우물물로 목욕을 하며 몸과 마음의 때를 씻어냈습니다. 술의 주재료가 될 쌀을 고르는 일은 수행과도 같았습니다. 수백 가마니의 쌀 중에서 알이 가장 굵고 흠집 하나 없이 투명한 쌀알만을 골라내기 위해 며칠 밤낮을 새웠습니다. 쌀을 씻고 밥을 짓는 데 쓸 물은 일반 우물물이 아닌, 뒷산 깊은 골짜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맑은 옥수만을 길어다 썼습니다. 어머니는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산을 내려오면서 물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봐 숨소리조차 조심했습니다.
'부디 이 정성으로 빚은 술이 하늘에 닿기를... 우리 아들의 끊어질 듯 위태로운 명줄을 튼튼하게 이어주기를 천지신명께 엎드려 비나이다.'
어머니의 짓무른 손끝에는 붉은 피와 뜨거운 눈물, 그리고 세상을 향한 가장 간절한 기도가 고스란히 섞여 들어갔습니다. 고두밥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도 연기가 많이 나는 잡목은 일절 쓰지 않고, 깊은 산에서 베어와 바싹 말린 은은한 향이 나는 소나무 장작만을 사용했습니다. 정성껏 치댄 누룩을 띄우는 방은 온도를 일정하게 맞추기 위해 숯불을 피워놓고 밤낮없이 불씨를 지키며 혼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애타는 백 일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와 굳게 밀봉해 두었던 술독을 여는 날이 되었습니다.
항아리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자, 방 안은 물론이고 넓은 기와집 마당 전체에 코끝을 찌르는 맑고 깊은 향기가 폭발하듯 퍼져나갔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과일 향보다 달콤했고, 어떤 꽃향기보다 그윽한, 이승의 것이 아닌 듯한 신비로운 냄새였습니다.
"아아...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향기롭고 맑은 빛을 띠는 영롱한 술은 내 평생 처음 맡아보고 처음 본다. 이것이라면 신선들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을 게야."
최 진사는 옥처럼 맑은 황금빛으로 빚어진 백일주를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벅찬 감격과 희망에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는 밤을 하얗게 새워 아들이 신선들에게 올릴 최고급 안주를 장만했습니다. 산의 정기를 듬뿍 머금은 각종 산나물을 정갈하게 무치고, 고소한 잣을 다져 넣었으며, 가장 질 좋은 소고기와 생선을 말려 다듬은 육포와 어포를 보기 좋게 오려 정성스러운 찬합에 차곡차곡 담았습니다.
드디어 결전의 날, 아들이 스무 살이 되기 하루 전날의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야속하게도 하늘에는 잔뜩 잿빛 구름이 끼어 있었고, 뼈를 시리게 하는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습니다. 소년은 깨끗하게 빨아 풀을 빳빳하게 먹인 새하얀 무명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하얀 옷은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각오이자, 불순함이 없는 순백의 정성을 의미했습니다. 소년은 묵직한 술병이 담긴 망태기와 찬합을 단단히 짊어지고 대청마루로 나왔습니다. 부모님은 애써 터져 나오는 오열을 참으며 핏기없는 아들의 두 손을 으스러지게 꽉 쥐어주었습니다.
"아들아, 도인 어르신께서 남기신 말씀을 혈서처럼 뼛속에 새겨야 한다. 산길이 아무리 험하고 무서워도, 신선들의 기세가 아무리 두려워도 절대, 절대 먼저 소리를 내어선 안 돼. 명심하거라."
"걱정 마십시오, 어머니 아버지. 부모님께서 제게 부어주신 이 크나큰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저는 오늘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 내일 아침 두 분께 큰절을 올릴 것입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소년은 입술을 꽉 깨물며 굳은 다짐을 남기고 대문을 나섰습니다. 마을을 지나 남산으로 향하는 초입은 평탄했지만, 목적지인 신선봉으로 향하는 산길은 평소의 익숙하던 뒷산과는 차원이 다르게 험준하고 두려웠습니다. 산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햇빛이 차단되어 어둠이 깔렸고,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가 소년의 허리춤까지 차올랐습니다. 이름 모를 산짐승들의 스산한 울음소리와 부엉이의 날갯짓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게 맴돌며 공포심을 자극했습니다. 가파른 비탈길을 기어오르다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고 칡넝쿨에 발이 걸려 수십 번을 엎어졌지만, 소년은 등짐을 맨 채 짐승처럼 네 발로 바위를 기어올랐습니다.
'이 길의 끝에... 내 생사와 저승의 명부가, 그리고 우리 부모님의 남은 인생이 모두 달려 있다. 두려워하지 말자. 나는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서 내려가야 한다.'
소년은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속으로 수없이 살겠다는 주문을 외우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해가 완전히 서산으로 넘어가고 산속에 칠흑 같은 짙은 어둠이 깔릴 무렵, 소년은 마침내 구름이 발밑으로 바다처럼 흐르는 남산의 가장 높은 꼭대기, 신선봉의 거대한 암반에 도착했습니다.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가쁜 숨을 고르며 바위 너머를 조심스레 살펴보던 소년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벌어졌습니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 한가운데, 둥근 달빛이 쏟아지는 평평한 바위 위에서 도인의 말대로 두 명의 노인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노인은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도포를 입고 있었고, 다른 한 노인은 밤하늘보다 더 칠흑같이 검은 도포를 입고 있었습니다. 두 노인 주변으로는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서늘하고도 거룩하고, 신비로운 기운이 소용돌이치듯 감돌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두려움에 덜덜 떨리는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쳐 진정시키며, 망태기의 끈을 고쳐 메고 그들의 등 뒤를 향해 소리 없는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 4: 첩첩산중 신선봉, 바둑 두는 두 노인과의 만남
신선봉 꼭대기는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놓인 듯, 세상의 모든 소음이 단절된 채 거룩하고도 서늘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발밑으로는 짙은 구름이 파도처럼 굽이치며 흐르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거대하고 둥근 보름달이 푸른빛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그 신비로운 달빛 아래, 평평하고 넓은 암반을 바둑판 삼아 마주 앉은 두 노인은 세상이 뒤집히고 천지가 개벽한다 해도 모를 만큼 오로지 흑백의 바둑돌에만 온 정신을 빼앗겨 있었습니다.
"허허, 이번엔 내 차례군. 어디, 자네가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던진 이 수는 어떻게 막아낼 텐가? 방어만 하다가는 대마를 몽땅 잃게 될 터인데."
"쯧쯧, 그런 얕은 훈수와 섣부른 수로 나를 이기려 들다니. 자네의 바둑은 아직도 헛점이 많네 그려. 두고 보게나, 이 한 수로 판세가 어떻게 뒤집히는지."
매끄러운 바둑돌이 암반에 부딪힐 때마다 '딱, 딱' 하는 맑고 청아한 소리가 마치 천상의 음악처럼 첩첩산중의 밤공기를 타고 아득하게 퍼져나갔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도포를 입은 남두성은 인자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며 여유롭게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칠흑같이 검은 도포를 입은 북두성은 날카로운 눈매를 번뜩이며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게 할 듯한 차갑고 매서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그 압도적인 광경을 지켜보던 소년은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후들거렸고,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요동쳤습니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저분들이 바로 내 생명줄을 쥐고 계신 남두성님과 북두성님이시다. 부모님의 피눈물을 기억하자. 나는 살아야 한다. 절대로 입을 열어서도, 작은 소리를 내서도 안 돼.'
소년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꽉 깨물며 짐승처럼 발소리를 죽인 채, 조금씩 조금씩 두 신선의 등 뒤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신선들은 바둑판 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승부에 완전히 몰입한 나머지, 곁으로 인간의 아이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소년은 두 노인의 곁에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등허리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소년의 손끝은 부모님의 간절함을 담은 듯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소년은 어깨에 메고 있던 망태기를 내려놓고, 찬합을 조심스럽게 열어 어머니가 백일 동안 정성껏 준비한 산나물과 고소한 잣, 그리고 빛깔 좋은 육포와 어포 안주를 소리 없이 바위 위에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옥처럼 맑은 백일주가 담긴 무거운 병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신선들의 곁에 놓인 빈 옥잔에 천천히 술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쪼르륵, 맑고 영롱한 황금빛 술이 잔에 채워지는 소리마저 달빛에 스며들 듯 조심스럽고 부드러웠습니다.
바둑판의 흑백 돌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다음 수를 고민하던 남두성이 무심결에 손을 더듬거리다 소년이 채워놓은 술잔을 집어 들었습니다.
"음? 여기에 원래 술이 있었던가? 향이 아주 기가 막히는군."
남두성은 시선은 여전히 바둑판에 고정한 채, 반사적으로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습니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그 순간, 온화했던 남두성의 두 눈이 번쩍 뜨이며 감탄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니, 이 맛은! 세상에, 이렇게 향기롭고 맑으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술이 다 있다니! 입안 가득 맴도는 향취가 예사롭지가 않네 그려! 온몸의 기맥이 뻥 뚫리는 기분이야!"
남두성의 과장된 감탄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북두성도 호기심이 동한 듯,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길고 마른 손을 뻗어 자신의 곁에 놓인 다른 술잔을 집어 들었습니다. 단숨에 술을 들이켠 북두성 역시, 늘 차갑게 굳어 있던 얼굴에 순간적으로 옅은 놀라움과 만족감이 스쳤습니다.
"호오... 과연 자네 말대로 훌륭한 술이로군. 탁한 이승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맑고 정갈한 기운이 담겨 있어. 이 맛깔스러운 안주도 썩 훌륭하네."
노인들은 감탄을 연발하며 술을 마시고 곁들인 안주를 연신 집어 먹으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오직 바둑판에만 고정된 채 승부에 열중했습니다. 그들은 으레 산신령이나 선녀들이 자신들의 놀음을 위해 음식을 내어온 것이라 착각한 듯했습니다. 잔이 비워질 때마다 소년은 재빨리, 그러나 깃털처럼 가볍고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다시 잔을 가득 채웠습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산봉우리에 걸려 있던 둥근 달이 서쪽 하늘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산정상의 바람은 살을 엘 듯이 차가워졌고, 꿇어앉은 소년의 무릎과 허리는 감각이 없을 정도로 굳어갔지만, 소년은 바위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술잔이 비면 채우고, 안주가 떨어지면 찬합에서 새로운 안주를 꺼내어 놓는 일전의 동작만을 그림자처럼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부디 더 드십시오. 제 어머니의 피와 눈물이 담긴 이 백일주를 남김없이 비워주십시오. 그래서 제발 굳게 닫힌 제 운명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소년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던 것일까요. 부모님의 지극한 정성과 목숨을 건 소년의 결기가 빚어낸 백일주는, 어느새 두 신선의 차갑고 엄격한 마음을 서서히 봄눈 녹이듯 달래주며 그들을 기분 좋은 취기 속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술병이 절반을 넘어 바닥을 드러낼 즈음, 팽팽했던 바둑의 승부도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 5: 술잔을 비운 신선들, 저승의 명부를 고치다
침묵 속에서 흑백의 돌이 어지럽게 오가던 길고 길었던 바둑의 승부가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눈부신 하얀 도포를 입은 남두성이 암반이 울리도록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바둑판 위에 마지막 돌을 경쾌하게 내려놓았습니다.
"하하하! 꼼짝없이 당했지? 이번 승부는 완벽한 나의 승리일세! 그나저나, 오늘따라 누군가 내어준 이 술과 안주가 참으로 훌륭하여 밤새 바둑 두는 맛이 제대로 났네 그려. 아주 기분이 좋아!"
뻐근한 어깨를 풀며 기지개를 켜고 고개를 돌리던 남두성은 그제야 자신들 곁에 웅크리고 엎드려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남두성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북두성 역시 소년의 존재를 알아채고는, 순식간에 얼굴을 무섭게 굳히며 차가운 눈초리로 소년을 쏘아보았습니다. 이승의 인간이 감히 신선들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에 북두성은 격노하며 벼락같은 호통을 쳤습니다.
"네 이놈! 넌 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뉘기어늘 감히 신선들이 머무는 신성한 곳에 함부로 발을 들인 것이냐! 겁대가리 없이 요사스러운 짓거리로 우리를 능멸하려 들다니!"
북두성의 호통 소리는 마치 거대한 천둥소리가 되어 첩첩산중의 산봉우리를 뒤흔들었고, 소년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당장이라도 벼락이 떨어져 목숨을 잃을 것 같은 엄청난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도인이 신신당부했던 경고를 떠올리며, 입술을 꽉 깨물어 끝까지 입을 굳게 다문 채 그저 애처롭고 간절한 눈빛으로 두 신선을 우러러볼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묻고 다그쳐도 절대 먼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지키기 위해 소년은 숨소리조차 삼켰습니다.
남두성은 바닥을 드러낸 빈 술병과, 자신들이 남김없이 먹어 치운 맛깔스러운 안주 그릇, 그리고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면서도 묘하게 결연한 빛을 잃지 않는 소년을 번갈아 보았습니다. 남두성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흠칫 헛기침을 했습니다.
"에헴... 이보게 북두성, 너무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지 말게나. 저 어린아이가 벌벌 떠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가만 보자 하니... 우리가 방금까지 기분 좋게 들이켠 저 기막힌 백일주와 산해진미 안주가 다 저 아이가 밤새 무릎 꿇고 올린 것 아니겠나. 저 어린것이 험한 산길을 올라와 밤새 숨죽여 시중을 들었으니, 그 지극한 정성이 갸륵하지 않은가."
"그건 그거고, 하늘의 엄중한 이치를 어긴 것은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네! 인간이 수명을 늘려보려 얕은 수를 쓰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인가! 어디, 명부를 살펴보면 저 발칙한 놈의 정체와 남은 명줄을 단박에 알 수 있겠지."
북두성은 화를 삭이지 못한 채 품 안에서 칠흑같이 검은색 표지로 덮인 두꺼운 책 하나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승의 모든 인간의 생로병사와 수명이 적혀 있다는 저승의 '명부(冥府)'였습니다. 북두성의 손길에 따라 책장이 스르륵 넘어가더니,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습니다. 명부에 적힌 글귀를 확인한 북두성의 날카로운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습니다.
"이런 고연 놈을 보았나! 네놈의 이름이 최OO이렸다? 염라대왕의 명부에 적힌 네놈의 정해진 명줄은 정확히 십구(十九) 년! 바로 내일 아침이 네놈이 저승사자의 사슬에 묶여 삼도천을 건너야 할 날이거늘, 살고자 하는 얄팍한 수작으로 감히 하늘의 신선들을 술과 고기로 매수하려 들어? 내 당장 네놈의 숨통을 끊어 염라대왕 앞으로 끌고 가렷다!"
북두성은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소년의 혼을 거두어갈 듯 노발대발했습니다. 소년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습니다. 그때, 곁에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던 남두성이 슬며시 북두성의 넓은 소매를 끌어당겼습니다.
"어허, 이보게 북두성. 진정하게나. 저 아이가 비록 타고난 운명을 거스르려 맹랑한 짓을 벌였다 하나, 죽음을 앞두고 부모를 생각하는 저 지극한 효심과 살고자 하는 간절한 정성이 갸륵하지 않은가. 게다가...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우리는 이미 저 아이가 백일 동안 정성 들여 빚은 훌륭한 술과 정갈한 음식을 너무도 배불리 얻어먹었네. 그것도 기분 좋게 웃고 떠들면서 말이야."
남두성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북두성의 옆구리를 쿡 찔렀습니다.
"하늘을 모시는 신선의 도리로서 공짜 술과 밥을 배불리 얻어먹고, 어찌 뻔뻔하게 입을 싹 닦으며 저 아이의 목을 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신선의 체면을 구기는 아주 염치없는 짓이지. 하늘의 율법에도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적혀 있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염라대왕의 엄명이오! 어찌 사사로운 정과 술 한 잔에 얽매여 굳게 정해진 명부를 고친단 말인가! 염라대왕께서 아시면 대노하실 것이오!"
"에이, 참으로 융통성 없고 꽉 막힌 양반 같으니라고. 꼬장꼬장한 염라대왕께는 내가 나중에 바둑 한 판 져주면서 잘 말해둘 테니 걱정 말게나. 우리, 아이의 정성을 봐서 딱 한 글자만 슬쩍 고쳐주세나."
남두성은 굳어 있는 북두성의 손에 들린 명부를 휙 낚아채더니, 품에서 작은 붓을 꺼내어 들었습니다. 명부에는 소년의 수명이 '십구(十九)'라고 또렷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남두성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붓에 먹을 묻혀 '열 십(十)' 자 위에 가로로 획을 하나 죽 그었습니다. 그러자 '열 십(十)' 자가 순식간에 '아홉 구(九)' 자로 변해버렸습니다.
"자, 보게. 십구(十九)가 획 하나를 더하니 구십구(九十九)가 되었네. 스무 살도 못 넘길 운명이 졸지에 아흔아홉 백수를 누리게 되었으니, 이만하면 우리가 기분 좋게 마신 술값과 안줏값으로는 충분하고도 남겠지? 하하하!"
북두성은 기가 막힌 듯 크게 헛기침을 하면서도, 굳이 남두성이 고친 글자를 다시 빼앗아 지우지는 않았습니다. 불같이 화를 내긴 했으나, 그 역시 밤새 소년이 보여준 흐트러짐 없는 지극한 정성과 기막힌 술맛에 내심 크게 감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북두성은 아직도 엎드려 떨고 있는 소년을 향해 엄중한 목소리로 마지막 호통을 쳤습니다.
"쯧쯧... 네놈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켰으니 이번 한 번뿐이네. 네 이놈, 하늘이 기적처럼 내려준 이 귀한 두 번째 목숨을 절대 헛되이 쓰지 말고, 평생토록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고 덕을 베풀며 살거라! 만약 악행을 저지른다면 내 언제든 다시 명부를 고쳐 네놈을 당장 끌고 갈 것이야!"
그 추상같은 호통 소리와 함께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며 산봉우리에 짙은 안개가 소용돌이치듯 몰려왔습니다. 소년이 거센 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그 자리에는 신선봉의 차가운 바위와 텅 빈 바둑판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두 신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 6: 죽음의 운명을 벗어나 백수를 누리다
거짓말처럼 안개가 걷히고, 산 너머로 붉은 아침 해가 밝아오며 세상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신선들이 머물렀던 빈 바둑판을 향해 엎드려 아홉 번의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가벼워진 망태기보다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험한 산길을 단숨에 뛰어 내려왔습니다. 최 진사 댁 대문 앞에는, 뼈가 시리도록 차가운 새벽이슬과 서리를 온몸으로 맞으며 밤을 하얗게 지새운 부모가 뜬눈으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여나 아들이 저승사자에게 끌려갔을까 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부모의 눈앞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늠름하게 걸어오는 아들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제 명줄을 이어 받아왔습니다!"
산길을 달려와 품에 안기는 아들의 온기를 확인한 부부는, 믿기지 않는 기적에 땅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오열했습니다.
"아이고, 내 아들! 내 새끼! 하늘이, 천지신명께서 드디어 너를 살려주셨구나! 신선님들께서 우리 부부의 피맺힌 기도를 들어주셨어!"
소년은 안방으로 들어가 지난밤 산꼭대기에서 겪은 두 신선과의 기이한 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놓았습니다. 흰 옷과 검은 옷을 입은 남두성과 북두성이 바둑을 두던 광경, 그들이 백일주를 마시며 감탄하던 일, 죽음의 명부를 꺼내어 호통치던 북두성의 무서운 모습, 그리고 남두성이 붓을 들어 저승의 명부를 고쳐 십구(十九)를 구십구(九十九)로 만들어준 기적 같은 이야기까지. 소년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최 진사 댁 사람들과 온 마을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해 감사의 절을 올렸습니다.
그날 이후, 최 진사 댁을 짓누르던 끔찍한 죽음의 공포는 아침 햇살에 안개가 걷히듯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스무 살 고개를 절대 넘기지 못할 거라던 노스님의 불길한 예언과 달리, 청년은 무사히 스무 번째 생일을 넘겼습니다. 매일 밤 그를 괴롭히던 저승사자의 악몽도 씻은 듯이 사라졌고, 얼굴에 드리워졌던 잿빛 그림자도 말끔히 걷혀 건강하고 혈색 좋은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청년은 죽음의 문턱에서 신선들이 남겼던 엄중한 당부를 단 하루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흉년이 들면 주저 없이 가장 먼저 곳간을 열어 가난하고 굶주린 이웃들에게 쌀과 곡식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이가 있으면 나서서 돕고, 병든 이들에게는 약값을 대어주며 평생을 헌신과 구휼로 덕을 베풀며 살았습니다.
시간은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갔습니다. 청년은 장성하여 심성 고운 어여쁜 아내를 맞아 가정을 꾸렸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평생을 바친 부모님을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극진히 모시며 지극한 효도를 다했습니다. 그의 집안에는 늘 생기 넘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학문에 정진한 그는 훌륭한 학자가 되어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바른길로 인도했습니다.
마흔, 쉰, 예순을 넘어 허리가 굽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될 때까지 그는 잔병 한 번 치르지 않고 건강과 평안을 유지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웃 고을의 사람들까지도 그를 가리켜 '하늘이 살려준 사람', '살아있는 부처'라 부르며 깊이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마침내 그의 나이 아흔아홉, 즉 명부에 적힌 구십구(九十九) 세가 되던 섣달그믐날 밤이었습니다. 온 가족과 수많은 자손이 빙 둘러 모여 앉은 따뜻한 안방에서, 그는 지난날의 아름답고도 치열했던 삶을 반추하며 조용히 눈을 감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참으로 길고도 복된 삶이었다. 부모님의 은혜와 신선님들의 자비 덕분에 후회 없이 베풀고 사랑하며 살았으니, 이제 미련 없이 떠날 때가 되었구나.'
그의 눈앞에 조용히 나타난 저승사자들은, 예전 그가 열아홉 살 무렵 악몽 속에서 보았던 사납고 무서운 모습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사슬 대신, 하늘의 고위 관료를 모시듯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가마를 대령하여 그를 정중하게 맞이했습니다.
"어르신, 그동안 척박한 이승에서 참으로 훌륭하게 많은 덕을 쌓으셨소이다. 염라대왕께서도 어르신의 선행을 높이 사시어 기쁜 마음으로 잔치를 열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 이제 이승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고 편히 가마에 오르시지요."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앓는 기색 하나 없이 잠자듯 평온하고 거룩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스무 살에 죽을 운명이었던 외아들. 부모의 지극한 정성과 두 신선에게 올린 맑은 술 한 잔으로 죽음의 운명을 바꾸고, 백 살 가까운 천수를 누리며 세상을 이롭게 한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아름다운 전설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운명조차 바꾸어 놓은 지극한 정성, 어떻게 들으셨나요? 인간의 생사를 주관한다는 무서운 저승의 신들도,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부모의 눈물 어린 정성과 예의 앞에서는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도 결국 우리의 간절함과 선한 마음 앞에서는 기적처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따뜻한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밤은 여러분의 삶에도 기분 좋은 기적이 찾아오길 바라며, 편안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좋아요 잊지 마시고요, 다음에도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