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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됐는데 기억이 사라졌다 [어우야담]
밤중 암자에 선인이 내려와 노승이 넋을 잃고 감탄하지만, 정작 이야기는 “몸 버리고 신선이 되어도 인간 시절을 잊는다면 무슨 뜻이 있느냐”는 냉소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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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300자 미만)
깊은 산중 암자, 평생 도를 닦은 늙은 승려 앞에 마침내 하늘 문이 열리고 눈부신 신선이 강림했다! 황홀한 천상의 음악, 짙은 매화 향기. 노승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신선에게 묻는다. "인간 세상의 번뇌를 어찌 다스리셨나이까?"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노승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데... "번뇌라니? 난 인간 시절의 일은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느니라." 영생을 얻는 대신 나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일까? 아름다운 신선담에서 서늘한 철학담으로 뒤집히는 기묘한 밤의 이야기!
※ 1: 구름 속 암자, 세월을 견딘 늙은 승려의 기원
하늘과 맞닿을 듯 깎아지른 절벽 위, 구름마저 숨을 고르고 쉬어간다는 기기묘묘한 바위산의 정상 부근. 그 험준한 산세 한가운데에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낡은 암자가 하나 있었다. 인적이라곤 산짐승의 발자국조차 끊긴 지 수십 년이 지난 깊고 깊은 첩첩산중이었다. 하늘을 가린 먹구름 사이로 매서운 겨울 산바람이 미친 듯이 몰아치며 문풍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 울어대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하지만 그 포효하는 바람 소리조차 뚫고 나오는 아주 규칙적이고 둔탁한 소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고스란히 맞은 늙은 승려의 처절한 목탁 소리였다.
탁, 탁, 탁, 탁.
일흔을 훌쩍 넘긴, 어쩌면 여든이 다 되었을지도 모를 노승은 가죽만 남은 앙상한 두 손으로 쉼 없이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와 다 해진 장삼 너머로 드러난 그의 굽은 어깨는, 인간 세상에서 겪었을 무수한 번뇌와 그것을 씻어내기 위해 바친 사십 년이라는 형벌 같은 세월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속세의 부귀영화와 뜨거운 애욕, 심지어 혈육의 정마저도 모두 한낱 아침 이슬처럼 덧없는 것임을 깨닫고 이 생지옥 같은 산중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
'인간의 삶이란 대체 무엇인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 썩어 없어지는 그 끔찍한 윤회의 굴레.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 하고, 미워하는 이와 마주쳐야 하며, 얻지 못해 괴로워하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 기필코 이 썩어 없어질 육신의 한계를 벗어던지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얻어 저 하늘의 신선들처럼 도의 경지에 오르리라.'
노승의 가슴속에는 오직 단 하나의 열망만이 숯불처럼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인간의 비루한 굴레를 완벽하게 벗어던지는 것. 그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뼛속까지 파고드는 혹한의 추위와 위장을 갉아먹는 듯한 굶주림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았다. 소나무 껍질과 솔잎을 씹으며 연명하고, 한겨울 얼음물로 몸을 찢을 듯 씻어내며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 발버둥 쳤다.
'하늘의 신선이시여, 우주의 진리시여. 소승이 이 산중에 들어와 차가운 벽을 마주하고 도를 닦은 지 어언 사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사옵니다. 제 육신은 이제 늙고 병들어 고목처럼 말라버렸고, 머지않아 한 줌 흙으로 돌아갈 터인데, 어찌하여 제 눈앞에 낀 무지의 안개는 이토록 걷히지 않는 것입니까. 부디 굽어살피시어, 미천한 짐승과도 같은 이 몸에 한 줄기 깨달음의 빛을 내려주시옵소서.'
목탁 소리가 점차 빨라지며 그의 간절한 기원이 암자의 좁은 방 안을 꽉 채웠다. 추위로 곱은 손가락 끝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낡은 목탁을 검붉게 물들였지만, 노승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두드림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 밤따라 산바람은 유난히 거세게 불어닥치고, 낡은 암자의 기둥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지붕이 날아가고 기둥이 무너져 내려 그를 덮칠 것만 같았다. 속세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듯 떨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을 밤이지만, 노승의 눈빛만큼은 불당 앞의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가운데에서도 기이한 광채를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불과 며칠, 아니 어쩌면 몇 시간 남지 않았음을 짐승 같은 본능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 깊은 곳에서 가래가 끓고 피비린내가 올라왔으며, 시력이 탁해져 바로 앞의 불상조차 일그러진 그림자로 보일 때가 많았다.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턱밑까지 다가온 지금, 만약 이대로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한 채 허무하게 눈을 감는다면 그동안의 사십 년 세월은 그저 스스로를 미친 듯이 학대하며 허송세월한 쓰레기에 불과하게 된다. 그 끔찍한 허무함과 존재의 부정에 대한 두려움이 노승을 더욱 필사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안 된다… 결코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속세에 남겨둔 가엾은 아내와 핏덩이 같은 어린 자식의 통곡마저 매몰차게 등지고 돌아선 참혹한 길이다. 인간의 모든 정을 억지로 끊어내며 밤마다 가슴을 쥐어뜯고 흘렸던 그 피눈물을 이대로 땅바닥에 버릴 수는 없다. 우주의 이치를, 영원불멸의 완벽한 진리를 단 한 번만이라도 내 두 눈으로 직접 엿볼 수 있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내어도 여한이 없을 터인데…!'
탁, 탁, 탁, 탁!
절박함이 극에 달한 노승의 비명 같은 기도가 요란한 밤하늘을 향해 메아리쳤다. 제발 누군가 단 한 번만이라도 대답해 달라는 듯, 피를 토하는 처절한 두드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암자를 통째로 찢어발길 듯 미친 듯이 몰아치던 산바람이 뚝 멎었다.
방금 전까지 귀가 찢어질 듯 울어대던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일순간 완벽하게 증발해 버렸다. 심장 박동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기괴하고도 압도적인 정적이 산봉우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 2: 천상의 향기와 함께 강림한 하늘의 객
바람 소리가 거짓말처럼 멎어버린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하고 기묘한 향기였다. 한겨울의 냉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척박한 깊은 산중이건만, 마치 수만 송이의 매화와 난초가 일제히 만개한 듯한 맑고 깊은 향기가 낡은 문풍지의 갈라진 틈을 타고 암자 안으로 스멀스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속세의 그 어떤 귀한 향신료나 꽃으로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향기였다. 단 한 번 숨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흐려졌던 정신이 단숨에 맑아지고, 사십 년간 뼛속 깊이 쌓여있던 온몸의 찌든 피로와 고통이 눈 녹듯 씻겨 내려가는 듯한 영묘하고 성스러운 향취였다.
목탁을 미친 듯이 두드리던 노승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 이 향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은 꽃이 필 철이 아닐뿐더러, 이 짐승도 살지 않는 척박한 바위산에는 매화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않거늘….'
노승이 떨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피려는 찰나, 굳게 닫힌 낡은 창호지 너머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름밤의 반딧불이처럼 작고 은은하던 빛줄기가, 순식간에 암자 앞마당 전체를 한낮의 태양보다 환하게 밝히며 방 안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그 빛은 속세의 차갑고 눈이 시린 태양 빛과는 완전히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을 만큼 찬란하게 밝으면서도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하여, 마치 빛 자체가 생명을 가지고 살아 숨 쉬며 노승의 얼어붙은 온몸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그리고 찬란한 빛과 함께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왔다.
은쟁반에 맑은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신비로운 피리 소리와, 허공의 바람을 부드럽게 튕겨내는 듯한 거문고 소리가 어우러진 천상의 음악이었다. 인간의 투박한 손으로는 도저히 빚어낼 수 없는, 듣는 이의 영혼 밑바닥까지 뒤흔들며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는 완벽한 선율이 허공에서부터 깃털처럼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아아… 부처님… 천지신명이시여…."
노승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저도 모르게 짐승의 앓는 소리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두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비틀비틀 걸어가 암자의 낡은 문을 양옆으로 활짝 열어젖혔다.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광경에 노승은 숨을 쉬는 것조차 완전히 잊고 말았다.
먹물처럼 짙게 깔려 있던 밤하늘의 구름이 거대한 양 갈래로 부드럽게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구름 한 점이 암자 앞마당을 향해 사뿐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영롱한 구름 위에는 눈보다 희고 윤기 나는 깃털을 가진 거대한 학 한 마리가 우아한 날갯짓을 멈추고 내려앉았고, 그 학의 널찍한 등 위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압도적인 존재가 서 있었다.
그의 머리에는 투명한 옥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아름다운 관이 씌워져 있었고, 몸에는 구름과 안개를 엮어 짠 듯 속이 투명하게 비치면서도 찬란한 빛을 내는 깃옷이 걸쳐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갓 스무 살을 넘긴 청년처럼 티 없이 맑고 옥처럼 매끄러워 주름 하나 찾아볼 수 없었으나, 그 깊은 눈동자만큼은 수천, 수만 년의 까마득한 세월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 아득하고 서늘한 빛이 서려 있었다. 속세의 더러운 때라고는 단 한 점도 묻지 않은, 티끌 하나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 그것은 필시 아주 먼 옛날 전설 속에서나 구전되던, 우주의 섭리를 깨우치고 불로장생의 경지에 오른 '신선'의 자태가 분명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어! 드디어 이 못난 놈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단 말인가!'
신선이 빛나는 깃옷을 가볍게 펄럭이며 우아하게 학의 등에서 내려와 마당의 거친 흙을 밟았다. 경이롭게도 신선의 발이 땅에 닿는 바로 그 순간, 사시사철 얼어붙어 있던 마당의 척박한 흙바닥에서 푸른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눈부신 기화요초들이 일제히 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암자 주변을 지독하게 감싸고 있던 차가운 겨울의 냉기는 온데간데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춘삼월의 아지랑이처럼 따스하고 생명력 넘치는 기운이 온 산을 포근하게 뒤덮었다.
신선은 뒷짐을 진 채 물 위를 걷듯 여유롭고도 부드러운 걸음으로 노승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은 흙을 밟는 소리 하나 없이 가벼웠고, 투명한 옷자락이 스칠 때마다 맑은 풍경 소리 같은 청명한 음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노승은 그 거룩하고도 압도적인 완벽한 존재감 앞에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전율을 느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사십 년의 피 튀기는 고행 끝에 마침내 마주한 궁극의 진리, 자신이 평생토록 닿고자 갈구했던 영원불멸의 존재가 바로 두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노승의 앙상한 두 무릎이 절로 꺾였다. 그는 차가운 흙바닥에 이마를 세게 찧으며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렸다. 늙고 메마른 승려의 두 눈에서 둑이 터진 듯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와 깊게 주름진 뺨을 타고 흘러 흙먼지 속으로 짙게 스며들었다. 감격과 환희, 그리고 평생의 억울한 한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듯한 폭발적인 감정이 그의 초라한 온몸을 미친 듯이 휘감고 있었다.
※ 3: 감격의 눈물로 올린 절, 그리고 엇갈리는 문답
"소승, 어리석고 미천한 육신으로 꼬박 사십 년을 이 척박한 바위와 마주하며 오직 하늘만을 우러러보았나이다! 마침내 이 비루하고 냄새나는 암자에 상선 영감께서 친히 강림하시어 이 늙은이의 탁한 눈을 씻어주시니, 당장 오늘 밤 이 자리에서 숨을 거두어 재가 된다 하여도 뼈에 사무친 한이 없을 것이옵니다!"
노승은 바닥에 엎드린 채 짐승처럼 오열하며 끊임없이, 쉼 없이 절을 올렸다. 쿵, 쿵, 쿵. 이마의 살갗이 찢어져 붉은 피가 맺히도록 단단한 흙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노승의 모습은 끔찍하게 애처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름 돋게 숭고해 보였다. 평생을 오직 '진리'라는 보이지 않는 환상 하나에 걸고 가족도, 욕망도, 제 육신의 안위마저도 모두 시궁창에 버려야 했던 한 나약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 그 광기 어린 엎드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신선은 바닥에 엎드려 피눈물을 흘리는 노승을 아주 조용히, 그리고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의 표정에는 중생을 향한 따뜻한 자비로움도 없었고, 미천한 인간을 내려다보는 거만함조차 없었다. 그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맑고 고요한 호수처럼, 지독하리만치 투명하고 비어 있을 뿐이었다.
"일어나라. 노구의 썩어가는 몸으로 더러운 땅바닥에 그리 엎드려 있는 것은 보기에 썩 좋지 않구나."
신선의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으나, 노승의 뼛속을 관통하며 맑게 울렸고 마치 머릿속 한가운데에서 직접 말소리가 퍼지는 듯한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노승은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는 차마 신선의 그 눈부신 자태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섰다.
"상선 영감께서 어찌하여 이토록 누추하고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까지 친히 거룩한 걸음을 하셨사옵니까. 소승의 얕고 보잘것없는 도력으로는 감히 상선 영감의 깊은 뜻을 헤아릴 길이 없사옵니다."
신선은 암자 주변의 낡고 썩어가는 기둥과 스러져가는 불당의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구름을 타고 유유자적 허공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던 중, 이 깊고 후미진 산골짜기에서 지독할 정도로 끈질긴 탁기와 붉은 염원이 엉켜 밤하늘로 맹렬하게 치솟는 것을 보았다. 그 냄새가 하도 기이하고 처절하여 구름을 멈추고 잠시 내려와 본 것뿐이다. 내 보아하니, 너는 필시 인간 세상의 그 무엇보다 큰 뜻을 품고 이 감옥 같은 곳에 스스로 들어온 모양이구나."
"그러하옵니다, 상선 영감! 소승은 생로병사의 끔찍한 고통과 속세의 부질없는 애욕을 모두 끊어내고, 영감처럼 늙지도 죽지도 않는 영원한 평안, 바로 그 불로장생의 진리를 얻기 위해 제 평생을 바쳤사옵니다. 밤낮으로 경전을 외고 참선하며 제 육신을 학대하고 또 학대하였으나, 여전히 제 마음속 깊은 곳에는 끊어내지 못한 번뇌가 들끓고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남아 저를 괴롭히고 있나이다."
노승은 마치 지옥 불에서 구세주의 밧줄을 잡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고통과 처절한 한계를 폭포수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상선 영감께서는 어찌 그토록 완벽하고도 눈부신 자태를 영원히 유지할 수 있으시옵니까? 영감께서도 까마득한 옛날에는 한때 저잣거리를 거닐며 상처받고 눈물 흘리던 연약한 인간이었을 터. 인간 시절의 그 끔찍한 기억들, 가족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 창자를 끊어내는 배고픔과 분노, 가슴을 치는 후회와 같은 인간 세상의 지독한 번뇌를 대체 어떤 도술과 깨달음으로 완벽하게 다스리셨나이까? 부디, 부디 미천하고 어리석은 소승에게 그 위대한 비법을 한 수만 가르쳐 주시옵소서!"
노승의 두 눈빛이 탐욕과 갈망으로 광적으로 번뜩였다. 저 완벽한 존재의 입에서 흘러나올 단 한 마디의 진리.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자신의 이 고통스럽고 비참했던 삶이 마침내 눈부시게 보상받고, 자신 역시 허물을 벗고 저 하늘 위 신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리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노승의 그 처절하고 간절한 외침을 듣고 있는 신선의 완벽한 얼굴에는 묘한 이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치 벌레가 우는 소리를 듣는 듯, 혹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외계의 언어를 듣는 듯한 표정이었다. 신선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수정처럼 맑지만 겨울밤의 얼음장처럼 차갑고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간 시절의 기억이라 하였느냐? 번뇌? 가족? 네가 말하는 그것들이 도대체 무엇이냐?"
"예…? 영감, 그게 무슨 농이시옵니까. 도를 깨우치고 하늘로 오르시기 전, 속세의 진흙탕에서 겪으셨던 인간으로서의 삶 말입니다.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안아보던 정,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던 투쟁, 억울하고 원통하여 밤새워 흘린 눈물 같은 것들 말이지요. 그것들을 어찌 다스리셨냐 여쭙는 것입니다."
노승은 신선이 자신을 마지막으로 시험하는 것이라 굳게 믿고 다급히 손짓까지 섞어가며 덧붙여 설명했다. 하지만 신선의 이어지는 대답은 노승의 심장을 그대로 얼어붙게 만들고, 온몸의 피를 싸늘하게 식혀버리기에 충분했다.
"글쎄다. 네가 말하는 그 '인간 시절'이라는 더러운 것이 내게 있었는지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내게는 가족이라는 자들의 희미한 얼굴도, 그들이 나를 부르던 내 이름 석 자도, 속세에서 피를 토하며 흘렸다던 그 뜨거운 눈물의 감각도 내 안에는 단 한 줌도 남아있지 않느니라. 내 머릿속은 그저 저 하늘의 구름처럼 희고, 불어오는 바람처럼 텅 비어 있을 뿐. 과거의 어떤 기억도, 그 어떤 하찮은 감정도 내게는 남아있지 않다."
"…상선 영감, 정녕 단 하나의 기억조차, 당신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단 말씀이십니까? 영감을 영감으로 있게 한 그 수많은 세월과 인간으로서의 처절했던 고뇌를 모조리 다 잊으셨단 말입니까?"
"잊은 것이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백지장으로 지워진 것이다. 신선이 된다는 것은 육신을 영원히 보존하는 대가로, 과거라는 이름으로 들러붙은 썩어 없어질 인간의 파편들을 모조리 도려내고 덜어내는 과정이다. 그 무겁고 끔찍한 기억의 덩어리들을 안고 어찌 이 가벼운 구름 위에 올라 허공을 날 수 있겠느냐.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기에, 그 어떤 번뇌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신선의 한없이 평온하고도 잔혹한 대답이 낡은 암자의 앞마당 허공에 툭 떨어졌다. 황홀하게 귓가를 울리던 천상의 음악은 어느새 기괴할 정도로 뚝 멈춰 있었고, 코끝을 어지럽히던 매화 향기도 서서히 흩어지며 본래의 비릿한 흙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노승의 파르르 떨리는 동공 속에, 완벽하고 눈부시게만 보이던 신선의 모습이 서서히 소름 끼치도록 이질적이고 기괴한 껍데기의 형태로 일그러져 보이기 시작했다.
※ 4: 기억이 거세된 완벽하고도 공허한 존재
신선의 아름다운 입술을 타고 기계처럼 흘러나온 그 고요하고도 잔혹한 대답은, 노승이 지난 사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피땀으로 깎고 다듬어 온 굳건한 믿음의 제단을 단숨에 산산조각 내버렸다. 노승의 앙상하게 굽은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고 축축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영원불멸의 지고지순한 존재, 세속의 더러운 욕망과 고통을 완벽하게 초월한 깨달음의 결정체라고 맹신해 마지않았던 신선의 실체가, 그저 자신의 과거마저 거세당한 채 허공을 떠도는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단 말인가.
노승은 바닥에 바싹 엎드렸던 몸을 반쯤 비틀거리며 일으킨 채, 경악과 혼란으로 심하게 요동치는 두 눈을 들어 신선의 완벽하게 아름다운 얼굴을 뚫어지게 올려다보았다. 백옥처럼 주름 하나 없이 매끄러운 피부, 오뚝한 콧날, 그리고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 그러나 그 깊은 눈동자 안에는 기쁨이나 슬픔, 분노나 연민 같은 인간적인 희로애락의 감정이나 온기라고는 단 한 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당대 최고의 장인이 혼을 바쳐 깎아낸 차가운 돌부처나, 한겨울 생명력을 모두 잃고 차갑게 얼어붙은 거대한 빙판과도 같았다. 아름답지만, 결코 살아 숨 쉰다고는 말할 수 없는 기괴한 정적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영감… 상선 영감. 어찌하여, 어찌하여 영감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신단 말입니까. 영감께서도 까마득한 옛날에는 분명 이마에 굵은 주름이 패고, 등에 악창이 나 고름을 짜내며, 배가 고파 산비탈의 흙을 파먹던 그 눈물겹고 끔찍한 시절이 있었을 터인데. 그 모든 짐승 같은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위대한 도를 깨우쳐 저 높은 하늘로 오르신 것이 아니옵니까? 그 치열했던 승리의 기억, 스스로를 극복해 냈다는 그 찬란한 증명마저 남아있지 않단 말씀이십니까?"
노승의 피맺힌 절규에도 신선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형체 없는 바람결처럼 한없이 가볍고, 맑은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내가 흙을 파먹는 미천한 인간이었는지, 혹은 천 년 묵은 바위가 일월성신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것인지 나조차 알 길이 없느니라. 그저 지금 이 순간, 하늘의 구름을 타고 바람을 마시며 영원토록 존재할 뿐. 네가 말하는 고통을 이겨낸 승리라느니, 처절한 극복이라느니 하는 것들도, 결국은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미물들이 스스로의 비참함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곧 과거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는 뜻. 세속의 인연과 집착, 회한 따위를 한 움큼이라도 가슴에 품고 있다면, 어찌 이토록 가벼운 깃옷을 입고 허공을 자유로이 날아오를 수 있겠느냐. 과거를 완벽히 비워냈기에 비로소 나는 완벽해진 것이다."
노승의 가슴 밑바닥,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둔탁하고도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을 비워냈기에 완벽해진 것이라…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곧 신선이 되는 길이라….'
노승의 멍해진 머릿속으로 사십 년 전, 이 짐승조차 살기 힘든 험한 첩첩산중으로 숨어들어오던 그 날 새벽의 기억이 너무도 선명하게,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출가를 결심하고 도망치듯 사립문을 나서던 새벽, 등 뒤에서 들려오던 찢어질 듯한 통곡 소리. 제발 가지 말라며 자신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매달리던 아내의 거칠어진 손등과 눈물범벅이 된 얼굴. 그리고 아비가 영영 떠나는 줄도 모르고 방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핏덩이 같던 어린 아들의 따뜻하고 작디작은 숨결.
그 모든 것을 등지고 매몰차게 돌아서며, 자신의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어 흘렸던 그 뜨거운 핏방울의 비릿한 맛. 깊은 산속에서 홀로 첫 겨울을 날 때,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외로움 속에서도 자신을 미치지 않게 버티게 해주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속세에 버리고 온 그 지독한 슬픔과 그리움이었다. 자신이 왜 그토록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이 고행을 자처했는지, 무엇을 벗어나고자 했는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되새겼기에 그 모진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 눈부신 신선은 지금 그 모든 것이 썩어문드러질 쓰레기에 불과하다 말하고 있었다.
"상선 영감. 만약 영감의 말씀대로 속세의 모든 인연과 과거를 잊고 기억마저 완전히 지워진다면, 지금 영감의 그 아름다운 몸을 빌려 숨을 쉬고 있는 존재는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과거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현재의 내가 어찌 '나'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완벽한 물건일지는 모르나, 결코 살아 숨 쉬는 생명이라 부를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노승의 목소리가 점차 드높아지며 암자 마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것은 눈앞의 신선을 향한 맹렬한 항변인 동시에, 사십 년간 자신을 지탱해 온 유일한 신념이 부정당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가장 처절한 방어기제였다.
"내 핏줄의 얼굴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내가 젊은 날 눈물지었던 이유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그저 생각 없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불로장생을 누리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나의 슬픔, 나의 뼈저린 후회, 내가 사랑하고 미워했던 그 끈적한 감정들을 모두 도려내고 남은 그 텅 빈 고요함 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안식이 아니라 끔찍한 죽음보다 더한 지옥이 아닙니까!"
노승의 피를 토하는 절규가 낡은 암자의 마당을 날카롭게 베어 넘겼으나, 신선의 표정은 여전히 파문 하나 일지 않는 고요한 우물처럼 잔잔할 뿐이었다. 신선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심한 벌레를 보듯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참으로 어리석고 가엾은 미물이로구나. 생로병사의 고통이 두려워 영원한 평안을 갈구하며 이 깊은 산중까지 도망쳐왔으면서도, 여전히 그 끔찍한 오욕칠정의 늪에 목을 매고 허우적거리고 있단 말이냐. 기억이 없기에 괴로움이 없고, 과거가 없기에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네가 평생을 바쳐 닿고자 발버둥 쳤던 신선의 경지, 영원불멸의 낙원이거늘. 헌데 너는 이제 와서 그 더러운 기억의 찌꺼기들을 끌어안고 결코 놓지 않으려 하는구나. 네 늙은 몸뚱이를 지독하게 감싸고 있는 그 탁하고 역겨운 기운의 정체가 바로 네가 버리지 못한 끈적한 기억들이었다니, 참으로 안타깝고도 우스운 일이다."
신선은 마치 더러운 오물이나 썩은 시체라도 피하듯 노승으로부터 슬쩍 뒷걸음질을 치며 소맷자락을 가렸다. 신선이 움직일 때마다 천상의 매화 향기가 다시금 훅 끼쳐왔으나, 노승에게 그 향기는 더 이상 영묘하고 성스러운 구원의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자의 시신을 염할 때 피워올리는 싸늘하고 건조한 향내처럼, 생명력이 완벽하게 거세된 자에게서 나는 시체 썩는 냄새보다도 더 역겹고 차갑게 느껴졌다.
'완벽하다는 것은 곧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구나. 인간의 번뇌를 씻어내어 맑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를 통째로 부숴서 지워버리는 것이 신선이 되는 길이었다니. 나는 무엇을 위해 내 아내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아내고 이 산중에 들어왔단 말인가.'
노승은 지독한 허탈함에 온몸의 기운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뼈만 남은 두 손으로 바닥의 얼어붙은 흙을 미친 듯이 꽉 움켜쥐었다. 손톱 밑으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차가운 흙의 감각, 거친 모래알이 연약한 살갗을 파고들며 긁어대는 미세하고도 찌릿한 통증. 역설적이게도 그 자그마한 고통이야말로, 자신이 지금 심장을 뛰며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선명하고도 눈물겨운 증거였다.
※ 5: 신선의 승천과 산산조각 난 평생의 환상
굳게 다물려 있던 노승의 턱관절이 사시나무처럼 잘게 떨리더니, 이내 텅 빈 산중의 마당에 기괴하고도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흐… 흐흐흐… 으흐흐흐… 으하하하하핫! 하하하하!"
그것은 슬픔에 겨운 통곡도, 구원을 얻은 자의 환희도 아니었다. 평생을 바쳐 목숨을 걸고 좇았던 거대하고 눈부신 환상이 제 눈앞에서 쓰레기처럼 산산조각 나는 순간, 한낱 나약한 인간이 내지를 수 있는 가장 허무하고도 서늘한 조소였다. 노승은 무릎을 꿇은 채 까마득한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미친 듯이, 숨이 넘어갈 듯 꺽꺽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입안에 몇 개 남지 않은 성긴 치아가 훤히 드러나고, 쪼글쪼글 주름진 눈가에서는 쉴 새 없이 뜨거운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눈물은 아까처럼 상선 영감의 강림에 감격하여 흘렸던 맑고 성스러운 눈물이 아니었다. 사십 년이라는 황금 같은 세월,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었던 그 모든 따뜻한 순간들을 스스로 짓밟고 탕진해 버린 자신의 지독한 아둔함에 대한 참담하고도 뼈저린 회한의 눈물이었다.
"어찌 그리 미친 자처럼 웃는 것이냐. 궁극의 진리를 마주하고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여 필경 실성이라도 한 것이냐."
신선이 차갑고 오만한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불쾌하다는 듯 물었으나, 노승의 귓가에는 더 이상 신선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노승은 발작에 가까운 웃음을 간신히 멈추고 거친 가래 끓는 숨을 몰아쉬며 신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처음 신선이 오색구름을 타고 강림했을 때 보여주었던, 그 비굴하리만치 경건하고 맹목적이었던 태도는 단 한 줌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탁한 눈빛에는, 완벽한 껍데기만 남은 눈앞의 신선을 향한 지독한 경멸과 한없는 연민마저 서늘하게 얽혀 있었다.
"실성한 것이 아닙니다, 상선 영감. 소승은 지금, 사십 년 만에 비로소 처음으로 온전한 제정신을 되찾은 것이옵니다. 참으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만약 제가 오늘 당신의 그 눈부신 껍데기에 홀려 덜컥 영감을 따라 구름에 오르는 기적을 맞이했더라면, 저 역시 내일이면 제가 누구인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채 저 춥고 빈 하늘 위를 영원히 떠도는 외롭고 끔찍한 혼령이 되었을 터이니 말입니다."
노승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십 년을 앉아 참선하느라 기형적으로 굽어버린 다리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덜덜 떨렸지만, 그는 기어이 두 발로 단단한 땅을 딛고 꼿꼿하게 섰다.
"이제 그만 구름을 타고 돌아가시지요, 영감. 소승이 평생토록 뼈를 깎는 고통으로 목탁을 두드리며 찾았던 것은, 당신처럼 속이 텅 비어버린 아름다운 시체가 아니었습니다. 내 자식의 다정한 이름을 영영 잊고, 내가 흘린 피눈물의 뜨거운 온기를 잃어버리는 대가로 얻는 것이 불로장생이라면, 소승은 차라리 길가의 병든 똥개로 태어나 몽둥이에 맞아 뼈가 부서져 죽는 끔찍한 윤회의 굴레를 택하겠사옵니다."
노승의 단호하고도 서늘한 축객령에 신선의 완벽한 얼굴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일며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허공을 떠돌며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이 내미는 구원의 동아줄을 이토록 거만하게 거절한 적이 없었다. 제왕도, 영웅도 모두가 자신 앞에 벌레처럼 엎드려 영생을 구걸하고 매달렸거늘,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 다 썩어가는 육신을 가진 비루한 늙은 승려가 불로장생의 비법을 제 발로 걷어차며 자신을 능멸하고 있는 것이다.
"미련하고 답답한 짐승이로다. 스스로 냄새나는 진흙탕 속에 뒹굴며 살가죽이 찢어지는 고통을 음미하겠다니. 인간 세상의 그 알량하고 변덕스러운 기억과 감정이 대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이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거부한단 말이냐. 네놈은 결국 네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 끔찍한 생로병사의 늪에 빠져 피를 토하며 한 줌의 재로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다."
"예. 기꺼이, 아주 기꺼이 그리할 것입니다. 내 뼈마디가 바스러지고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그 비참한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내가 사랑했던 이들의 따뜻한 얼굴과 내가 걸어온 눈물겨운 고통의 발자취를 온전히 기억하며 내 생의 마지막 숨을 기쁘게 거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는 아둔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가장 찬란하고 유일한 증명이니까요. 당신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의 영생은, 죽음보다 못한 끔찍한 지옥의 형벌일 뿐입니다."
신선은 더 이상 이 구제 불능의 노승과 말을 섞는 것조차 불쾌하고 역겹다는 듯, 투명한 소맷자락을 크게 펄럭이며 싸늘하게 돌아섰다. 그가 고개를 한 번 까딱하자, 마당 한구석에 우아하게 앉아있던 거대한 학이 푸드덕 날개를 거칠게 치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신선이 사뿐히 학의 넓은 등 위로 올라타자, 바닥에서부터 다시금 오색의 찬란한 구름이 피어오르며 그들의 형체를 신비롭게 감싸기 시작했다.
"끝끝내 진흙탕 속의 구더기로 남기를 자처하다니. 다시는 이 깊은 산중에 천상의 빛이 닿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너의 그 하찮고 더러운 기억들과 함께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고통스럽게 썩어가거라."
신선의 얼음장 같은 최후의 선언과 함께, 학이 날개를 거대하게 펄럭이며 먹물 같은 밤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신선과 학을 감싸고 있던 눈부신 빛의 기둥이 순식간에 까마득한 하늘 위로 멀어지더니, 이내 짙은 먹구름 속으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 압도적인 존재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순간, 암자 앞마당에 기적처럼 피어났던 푸른 새싹과 기화요초들은 거짓말처럼 새카맣게 말라비틀어지며 바스라져 한 줌 재로 변해 바람에 날아갔다. 세상을 황홀하게 가득 채웠던 천상의 음악 소리도, 머리를 맑게 하던 짙은 매화 향기도 물에 씻긴 듯 흔적 없이 사라졌다. 뚝 멎었던 매서운 겨울 산바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시퍼런 칼날처럼 날을 세우며 암자의 문풍지를 거칠게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노승은 살을 에는 듯한 지독한 현실의 추위가 다시 제 온몸의 뼛속까지 덮쳐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며, 홀로 칠흑 같은 캄캄한 어둠 속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하지만 그의 등은 더 이상 굽어 있지 않았다.
※ 6: 껍데기만 남은 영생, 인간으로서의 길을 묻다
신선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암자 안은 다시 칠흑 같은 어둠과 뼈를 깎아내는 듯한 끔찍한 냉기로 가득 찼다. 불당 앞에 켜져 있던 위태로운 촛불은 거센 산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진작에 꺼져버린 지 오래였고, 얇은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외풍에 방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평소 같았다면 이 지독한 고독과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에 온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밤이 새도록 관세음보살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을 노승이지만, 지금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노승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더듬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가 불상 앞에 다가가 섰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들지 않는 컴컴한 방 안, 어렴풋이 형체만 보이는 낡고 벌레 먹은 나무 불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노승의 메마른 입가에 아주 깊고 평온한 미소가 번졌다.
"부처님, 아니 부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거대한 허상이시여. 소승은 사십 년 만에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나라는 존재를 지우고 저 차가운 허공으로 증발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이 끔찍하고도 눈물겨운 짐승 같은 인간의 굴레를 뼈저리게 껴안고 온몸으로 살아내는 것이었음을요."
노승은 뻣뻣한 허리를 굽혀 불상 앞에 나뒹굴던 낡은 목탁과 채를 집어 들었다. 사십 년간 그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지다 못해 피땀으로 얼룩진, 한때는 진리에 닿기 위해 자신을 구원해 줄 유일한 생명줄이라 굳게 믿었던 물건이었다. 노승은 그 가벼운 나무토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툭, 하고 차가운 방바닥에 무심하게 떨어뜨렸다. 데구루루, 탁. 나무가 굴러가다 벽에 부딪혀 멈추는 둔탁한 소리가 공허하게 암자 안을 울렸다. 그것은 더 이상 무언가를 애타게 두드리며 보이지 않는 허상을 좇지 않겠다는 철저하고도 완전한 체념이자, 동시에 자신의 남은 생을 인간으로서 온전히 마주하겠다는 찬란하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는 지체 없이 방 한구석에 놓인 작고 낡은 걸망을 끌어당겼다. 그 속에는 닳고 닳아 실밥이 다 터진 여벌의 장삼 한 벌과, 이가 빠져 날카로운 나무 발우 하나가 전부였다. 그 보잘것없는 짐들을 걸망에 쑤셔 넣고 거칠게 등에 짊어지는 노승의 동작에는 그 어느 때보다 한 치의 망설임이나 흔들림도 없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첫 햇살이 이 척박한 산등성이를 비추는 대로 나는 이 산을 내려가리라. 사십 년을 외면하고 저주했던 저잣거리의 진흙탕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 내 이웃들의 탁한 땀 냄새와 뜨거운 피눈물 냄새를 폐부 깊숙이 맡으며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을 가장 인간답게 거둘 것이다.'
노승은 암자의 낡은 문을 양옆으로 활짝 열어둔 채, 거친 나무 문지방에 털썩 걸터앉았다. 미친 듯이 몰아치는 매서운 산바람이 그의 앙상하고 약한 몸뚱이를 사정없이 때리고 할퀴었지만,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그 서늘하고도 잔혹한 통증을 기꺼이, 온몸으로 껴안으며 받아들였다. 살이 에이는 듯한 이 통증은 곧 자신이 지금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바람결에 실려 온 비릿하고 옅은 겨울의 흙냄새와 날카로운 솔잎 냄새가 그의 얼어붙은 코끝을 스쳤다. 방금 전 신선이 몰고 왔던 그 작위적이고도 소름 끼치게 차가웠던 천상의 매화 향기보다, 이 비릿하고 축축한 현실의 흙냄새가 노승에게는 수천, 수만 배는 더 아름답고 향기롭게 느껴졌다.
노승은 천천히 눈을 감고, 사십 년 동안 기억의 가장 깊고 어두운 감옥 속에 꽁꽁 묻어두고 외면하려 애썼던 파편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끄집어내어 쓰다듬기 시작했다. 출가하던 날 아침, 닫힌 사립문 등 뒤에서 들려오던 아내의 짐승 같은 서러운 통곡 소리. 자신의 굳은 손가락을 꽉 쥐어오며 방긋 웃던 어린 아들의 보드랍고 따뜻한 뺨의 감촉. 그리고 지독한 가뭄이 들었을 때 동네 사람들과 함께 흙투성이가 되어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면서도, 서로의 입에 칡뿌리를 넣어주며 나눴던 그 슬프고도 따뜻했던 미소들.
절대 잊어서는 안 되었을 그 모든 찬란하고 아픈 기억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되살아나자, 늙고 메말라버린 노승의 가슴속에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온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천상의 맑고 깨끗한 기운 따위로는 절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오직 더러운 진흙탕을 구르며 피눈물을 흘려본 인간만이 피워낼 수 있는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생명력의 불꽃이었다.
이윽고 칠흑같이 어둡던 밤하늘의 동쪽 끝자락에서부터, 거짓말처럼 붉고 짙은 여명이 서서히 번져오기 시작했다. 차갑고 시퍼렇던 새벽 공기가 떠오르는 거대한 태양의 붉은빛을 가득 머금으며 노승의 얼어붙은 몸을 조금씩 따스하게 데워주었다. 이름 모를 산새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나 짹짹거리며 아침을 알리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눈부신 천상의 빛이 아니라, 온 세상을 공평하게 품어주는 붉고 뜨거운 진짜 태양빛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노승은 다 떨어진 짚신을 단단히 고쳐 신고 암자의 마당으로 나섰다. 지난밤 신선이 강림하여 화려한 기적을 보였던 그 자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저 평범하고 거칠게 얼어붙은 척박한 흙바닥으로 돌아와 있었다. 노승은 짚고 있던 굽은 지팡이를 내려놓고, 그 텅 빈 바닥을 향해 무릎을 꿇고 한 번 아주 깊게, 그리고 경건하게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그것은 지난밤 강림했던 하늘의 신선을 향한 미련 섞인 경배가 결코 아니었다. 헛된 환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아온 자신의 과거 사십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향한, 그리고 그 세월 속에서 죽어간 과거의 아둔한 자신을 향한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내 비록 이 육신은 병들어 썩어가고 남은 생은 촛불처럼 짧으나, 내 가족의 다정한 얼굴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내 슬픔을 온전히 안은 채 인간으로서 죽을 수 있으니… 참으로, 참으로 충만하고 복된 삶이로다."
붉게 타오르며 솟구치는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늙은 승려는 천천히 험준한 산 아래를 향해 굽은 등을 돌렸다. 한 걸음, 한 걸음. 가파른 바위를 딛고 내려가는 그의 앙상한 발걸음은 몹시도 위태롭고 느릿하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였지만,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하고 단단하게 겨울 산자락을 물들이고 있었다. 과거를 잃어버린 영원한 허무의 세계를 기꺼이 뒤로한 채, 피 흘리고 상처받는 필멸의 고통 속으로 다시금 뛰어드는 한 인간의 가장 찬란하고도 서늘한 귀환이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들려드린 어우야담 속 노승과 신선의 이야기, 어떠셨나요? 영원한 삶을 얻는 대신 모든 기억과 감정을 잃어버리는 신선의 길, 그리고 죽음의 고통이 있더라도 사랑하는 이들과의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의 길. 여러분이라면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서늘한 반전과 함께 깊은 여운을 남긴 오늘의 야담이 흥미로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립니다! 다음에도 잠 못 드는 밤을 책임질 기묘하고 재미있는 양반야담으로 찾아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