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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라대왕 앞에선 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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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평생을 바쳐 도를 닦은 노스님이 마침내 저승의 심판대 위에 섰습니다. 모든 욕망을 끊어내고 완벽한 해탈에 이를 줄 알았던 스님. 하지만 염라대왕이 펼친 명부 위에는, 스님이 평생 가슴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었던 단 하나의 치명적인 집착이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완벽해 보였던 수행자의 삶 이면에 감춰진 가슴 시린 비밀은 무엇일까요? 해탈을 코앞에 둔 스님은 왜 다시 고통스러운 윤회의 길로 뛰어들려 하는 걸까요? 삶과 죽음, 인연의 경계에서 펼쳐지는 가슴 먹먹한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 1: 심판의 궁전, 염라대왕 앞에 선 노스님
깊고 검붉은 연기가 자욱하게 깔린 저승의 중심부. 산 자는 결코 다다를 수 없으며, 죽은 자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무겁고 서늘한 심판의 궁전이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궁전의 기둥들은 하늘을 뚫을 듯 높이 솟아 있었고, 바닥에는 이승에서 흘린 망자들의 눈물처럼 차갑고 매끄러운 흑요석이 끝없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승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영원과도 같은 정적이 흐르는 그곳의 한가운데에는 붉은 화염을 형상화한 거대한 옥좌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옥좌 위에는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의 모든 이치를 관장하는 자, 염라대왕이 좌정해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의 시선은 옥좌 앞에 놓인 차가운 대리석 탁자 위, 두꺼운 사자부(死者簿)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사자부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걸어온 모든 행적과 숨겨진 마음의 결조차 낱낱이 기록된, 저승의 절대적인 장부였습니다. 대왕의 굳게 다문 입술과 서늘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그 어떤 망자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염라대왕의 옥좌 아래 마련된 심판대 위에는 한 명의 스님이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이미 이승의 흙으로 돌아가 다 타버린 재가 되었으나, 영혼의 모습은 생전에 머물던 형상 그대로였습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바랜 듯 남루한 회색 가사를 걸치고, 정갈하게 삭발한 머리 위로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습니다. 깊은 주름이 겹겹이 패인 이마와 뺨은 그가 한평생 얼마나 치열하게 도를 닦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왔는지를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두 손에는 수십만 번을 굴려 반질반질해진 낡은 108염주가 가볍게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 누구라도 두려움에 몸을 떨며 바닥에 엎드리게 만드는 염라대왕 앞이었지만, 스님은 흔들림 없는 꼿꼿한 자세로 고요히 눈을 감고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궁전의 정적을 깨고 염라대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수백 개의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처럼 낮고 무거웠습니다.
"법명 도현(道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한평생 산사에 머물며 수행에 힘쓰고, 세상의 덧없는 무상함을 깨닫고자 한 자로구나."
염라대왕의 부름에 스님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티끌만 한 두려움도 없는 맑은 기운이 묻어났습니다.
"예, 대왕님. 비록 미천한 몸이나, 살아생전 오직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는 길만이 번뇌로 가득한 인간이 걸어야 할 참된 길이라 굳게 믿고 정진하였습니다. 제 삶에 후회는 없으며, 어떠한 심판이 내려지든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스님의 당당한 대답에 염라대왕은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그리고 거친 손가락으로 대리석 탁자 위의 사자부를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종이가 넘어갈 때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며 망자들의 옅은 탄식 소리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참된 길이라…. 참으로 오만하고도 어리석은 인간의 대답이로다. 인간이란 본디 참으로 모순된 존재가 아니더냐. 겉으로는 티 없이 맑은 물처럼 보여도, 그 바닥을 헤집어보면 썩은 진흙과 찌꺼기가 가라앉아 있는 법. 네가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자부한다면, 네가 살아온 모든 생을 이 장부가 철저히 증명해 줄 것이다. 너는 과연 겹겹이 쌓인 전생의 끈적한 업을 모두 씻어내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완벽한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인가?"
염라대왕의 날카로운 일갈에도 스님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어떠한 동요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공기 속에는 묘하게도 숨 막히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이 허공을 향해 크고 육중한 손을 한 번 휘젓자, 굳게 닫혀 있던 사자부 위에서 푸스름하고 희미한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그 빛은 허공으로 흩어지며, 스님의 생전 모습이 마치 거대한 환영처럼, 홀로그램처럼 허공에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환영 속의 배경은 맑은 풍경소리가 들려오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산사였습니다. 수십 명의 제자들이 마당에 무릎을 꿇고 앉아 스님의 법문을 경청하고 있었고, 단상에 앉은 도현 스님은 자비롭고 온화한 미소를 띠며 그들에게 진리를 설파하고 있었습니다.
"자비란, 남을 위해 나의 것을 베푸는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내면에 엉켜있는 탐욕과 헛된 업을 덜어내는 가장 치열한 수행의 과정이니라.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참된 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은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 일제히 합장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참으로 완벽한 수행자의 표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환영을 지켜보던 염라대왕이 턱을 괴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너에게 묻겠다. 저토록 인자한 얼굴로 네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진리들이, 너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진정으로 참된 것이었느냐?"
스님은 그 질문에 즉각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습니다. 호흡이 찰나의 순간 불규칙하게 흔들렸습니다.
"그것은…"
스님의 입술이 무언가 변명을 하려 떨어지기도 전에, 허공의 환영이 무섭게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낮의 환하고 평화롭던 모습이 아닌,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깊은 사찰의 한 구석이었습니다. 낡은 요사채 안, 스님은 홀로 희미하게 흔들리는 촛불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낮에 제자들에게 보여주던 온화하고 초연한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그의 얼굴에는 찢어질 듯한 깊은 고뇌와 번민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경전을 쥐어뜯듯 부여잡고 있었고,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외고 있었으나, 그의 눈빛은 세속의 거센 풍파에 휩쓸린 조각배처럼 처절하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은 그 비참한 환영을 가리키며 가만히 스님의 맑은 눈을 꿰뚫어 보듯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진실이다. 네가 평생을 바쳐 겹겹이 두른 가사 속에 감추고 싶었던, 단 한 조각의 더러운 진실이로구나."
스님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며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한평생 외면하려 발버둥 쳤던 자신의 부끄러운 이면이 저승의 심판대 위에서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대왕님… 육신을 입은 인간이 어찌 하늘처럼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도를 구하려 몸부림쳤으나 그저 한낱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욕망에 짐승처럼 괴로워하며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았을 뿐입니다."
스님의 자조 섞인 고백을 들은 염라대왕은 옥좌에 기대어 낮게, 아주 서늘하게 웃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의 그 알량한 변명이 참인지 확인해 보아야겠구나. 네가 겪었던 모든 흔들림과, 그 흔들림 속에서 네가 외면했던 잔혹한 선택들을 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과연 네가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아온 그 삶으로 윤회의 끔찍한 굴레를 훌쩍 벗어날 수 있을지, 아니면 또다시 육신에 갇혀 해탈에 이르지 못한 채 짐승처럼 구르게 될지 똑똑히 판단해 주겠다."
스님의 메마른 얼굴에 다시금 무거운 침묵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이제, 그가 죽는 순간까지도 온전히 버리지 못했던 삶의 파편들이, 남김없이 저승의 거울 앞에 밝혀질 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
※ 2: 사자부(死者簿)에 비친 젊은 수좌와 마을 처녀의 인연
염라대왕이 허공을 향해 다시 한번 거대한 손을 묵직하게 휘젓자, 대리석 탁자 위에 놓인 사자부에서 아까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빛은 사방으로 퍼지며 심판의 궁전 전체를 환하게 밝혔고, 이내 스님이 이승에서 걸어왔던 치열한 과거의 궤적이 마치 눈앞의 현실처럼 선명하게 하나하나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심판의 무대 위에 떠오른 장면은 도현 스님의 가장 찬란하고 혈기 왕성했던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깊은 산속 사찰의 장엄한 법당 안, 그는 아직 어린 티를 갓 벗은 수련 중인 수좌(首座)였습니다. 그의 젊고 앳된 얼굴에는 세속의 번뇌를 모두 끊어내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결기와 열정이 활화산처럼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도량의 마당을 쓸었고, 낮에는 큰스님의 법문을 한 글자라도 놓칠세라 가슴에 새겼으며, 밤이 이슥해지면 등잔불 밑에서 졸음을 쫓아가며 붓을 들어 낡은 경전을 수백 번씩 필사하며 고된 수행에 뼈를 깎는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노스님들마저 도현의 맹렬한 구도심에 혀를 내두르며 장차 불교계의 큰 거목이 될 것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뜨거운 종교적 열정 속에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썩어들어가는 한 가지 치명적인 감춰진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법당 한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목탁을 돌리던 수좌 도현의 시선은, 부처님의 황금빛 불상이 아니라 열려 있는 문틈 너머의 누군가를 은밀히 쫓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여인을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흘에 한 번씩 사찰에 공양미를 올리러 험한 산길을 걸어 올라오던, 인근 마을의 가난하지만 순박한 처녀였습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들꽃처럼 맑은 눈망울과, 불전에 정성스레 합장하는 곱고 가녀린 손짓. 해진 무명치마를 입었음에도 그녀의 곁에서는 늘 은은하고 기분 좋은 난초 향기가 나는 듯했습니다. 도현은 언제부턴가 매일같이 그녀가 산사에 오르는 시간만을 속으로 초조하게 헤아리며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쌀자루를 이고 일주문을 넘어설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그녀가 법당에 들어와 삼배를 올리고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 보일 때면, 불경을 외고 법문을 설하던 그의 입술이 쩍쩍 갈라지며 순간적으로 바싹 말라붙는 것을 느꼈습니다.
"스님, 불심이 깊으신 스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까막눈이라 이 경전에 적힌 깊은 뜻을 도무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디 어리석은 제게 그 뜻을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어느 맑은 봄날, 공양을 마친 그녀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뺨을 붉히며 수줍게 물었을 때, 도현은 애써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듯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물론이지요.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가르침은 귀천과 남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리 오시지요, 제가 찬찬히 일러드리겠습니다."
도현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녀에게 경전의 이치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맑은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도현의 가슴 한쪽에는 수행자로서 결코 품어서는 안 될 부질없고도 달콤한 감정이 파도처럼 미친 듯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짓는 옅은 미소 하나에, 수십 년간 쌓아 올린 불심의 탑이 밑동부터 흔들리는 듯한 끔찍한 공포와 아찔한 황홀함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그 생생한 환영을 지켜보던 염라대왕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어 도현을 꾸짖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도현의 심장을 파고들었습니다.
"사문(沙門)이란 모름지기 머리카락을 자르는 순간 모든 세속의 인연과 육신의 욕망을 무 베듯 단호히 끊어내야만 하는 자이다. 불도를 닦는다는 자가 어찌 한낱 여인의 미소에 그리 흔들린단 말이냐. 네 입으로는 해탈을 외쳤으나, 너는 과연 그 순간 모든 욕망으로부터 단 한 치라도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 있느냐?"
심판대 위의 스님은 고개를 떨군 채 과거의 붉어진 자신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습니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묻어났습니다.
"대왕님… 사람이 사람에게 온기를 느끼고 마음이 끌리는 그 자연스러운 감정이, 정녕 부처님의 법을 거스르는 추악한 잘못이라면, 미천한 저는 그 순간 어찌해야 했단 말입니까. 제 심장을 도려내어 산짐승에게 던져주기라도 했어야 옳았습니까."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스님의 항변에 염라대왕은 코웃음을 치며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잘못이 아니었다면, 그깟 사람의 정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면! 그때의 너는 어찌하여 그토록 숨을 헐떡이며 지옥 불에라도 떨어진 자처럼 괴로워하였느냐? 감정을 억누르느라 네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은 것은 바로 너 자신이다!"
염라대왕의 사자후와 함께 환영의 장면이 휙 하고 거칠게 바뀌었습니다. 이번엔 살을 에이는 듯 차가운 한겨울 밤, 사찰 뒤편의 외딴 폭포 아래였습니다. 수좌 도현은 살얼음이 어는 뼛속까지 시린 폭포수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맨몸으로 앉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입술은 새파랗게 질렸고 이빨은 부딪혀 탁탁 소리를 냈습니다.
'부처님, 제발 제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 마구니를 쫓아내 주시옵소서! 그 여인의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눈을 감아도, 불경을 외워도 오직 그 여인의 목소리만이 귓가에 맴돕니다. 저는 수행자입니다. 제발 이 추악한 집착과 정욕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폭포수를 맞으며 스스로를 처절하게 학대하고 채찍질하는 도현의 얼굴에는 육체의 고통보다 더 끔찍한 내면의 지옥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수도 없는, 종교적 신념과 세속의 감정 사이에서 갈가리 찢겨 나가는 한 젊은 구도자의 비참한 사투였습니다. 염라대왕의 차가운 눈빛이 덜덜 떨고 있는 현재의 스님을 다시금 매섭게 찔러왔습니다.
※ 3: 도(道)를 위해 외면한 마음, 후회로 남은 발걸음
얼음 폭포를 맞으며 스스로를 처절하게 학대하던 젊은 도현의 끔찍한 환영이 서서히 흩어지고, 심판의 궁전 허공에는 다시금 새로운 과거의 시간이 어스름하게 떠올랐습니다. 이번엔 만물이 고요히 숨을 죽인 사찰의 늦은 뒷마당이었습니다. 차가운 푸른빛의 보름달만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어두운 도량을 창백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도현은 툇마루에 덩그러니 앉아, 다 해진 경전을 무릎 위에 펼쳐 놓고도 글자 하나 읽지 못한 채 깊고도 지독한 번뇌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여전히 길 잃은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스님… 왜 요즘 들어 이토록 저를 매몰차게 피하십니까."
정적을 깨는 조심스럽고 물기 어린 목소리. 등 뒤에서 들려온 그 소리에 도현의 어깨가 벼락을 맞은 듯 흠칫 굳어버렸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밤낮없이 잊으려 몸부림쳤던 바로 그 마을 처녀가, 어둠을 뚫고 뒷마당까지 들어와 그의 좁은 등짝을 향해 애처롭게 서 있었습니다. 도현은 차마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만 꽉 쥐고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습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그의 등 뒤로, 그녀의 떨리는 발걸음이 한 발짝 더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처음 뵈었을 때부터 맑고 다정하신 스님을 진심으로 존경해 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이 존경을 넘어…"
그녀는 목이 메이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습니다. 밤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그녀의 얕은 숨결이 도현의 등줄기를 미친 듯이 태우는 것 같았습니다.
"혹시, 아주 만약에라도 스님께서도 저를 한 뼘이라도 마음에 두셨다면, 저는 부모님께 매를 맞고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 곁에 머물며 평생 스님의 공양을 짓고 옷을 깁고 싶습니다."
달빛 아래 모든 용기를 쥐어짜 낸 가난한 처녀의 애달프고 절박한 고백이었습니다. 그 떨리는 목소리는 도현이 그토록 바랐던 세속의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단 한 번만 뒤를 돌아 그녀의 손을 맞잡는다면, 평생을 갈구했던 차가운 깨달음 대신 피와 살이 도는 따뜻한 삶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현의 머릿속에는 평생을 바쳐 모셔온 웅장한 불상과 스승의 엄한 목소리가 거대한 바위처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긴 침묵 끝에, 도현은 마침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마주 보는 대신, 더 철저히 몸을 돌려 차가운 어둠을 향해 섰습니다.
"…그따위 경솔한 감정은 먹물 옷을 입은 저와 처녀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불경한 것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오직 깨달음을 위해 세속의 모든 인연을 쓰레기처럼 버리고 산에 들어온 수도자이며, 처녀는 흙먼지 날리는 세속에서 남편을 섬기며 살아가야 할 분입니다. 지금 처녀가 품고 있는 그 불온한 감정은 헛된 집착이자 마구니의 유혹일 뿐입니다.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 부처님의 도량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입술을 깨물며 토해낸 도현의 목소리는, 그가 들고 있던 차가운 단도처럼 날카롭고 무자비하게 그녀의 심장을 찢어놓았습니다. 등 뒤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의 맑은 눈망울이 절망으로 파들파들 흔들리는 것이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집착… 이라니요. 저는 그저 단 한 번이라도 사람으로서 스님의 곁에…"
그녀는 더 이상 비참한 변명을 잇지 못했습니다. 도현은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목석처럼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참았던 눈물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바스락거리는 낡은 치마 자락 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뒷마당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도현은 혀를 꽉 깨물며 솟구쳐 오르는 피눈물을 삼켰습니다.
환영 속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습니다. 그 잔인한 밤 이후, 그녀는 단 한 번도 사찰에 공양을 올리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가난에 쫓긴 그녀가 산 너머 아주 먼 고을의 나이 든 홀아비에게 후처로 팔리듯 시집을 갔다는 씁쓸한 소문만이 산사에 전해졌습니다. 소식을 들은 날, 도현은 홀로 산을 내려가 그녀가 쌀자루를 이고 걷던 한적한 산길을 멍하니 걸었습니다. 맑은 개울이 졸졸 흐르는 작은 돌다리 앞. 그곳은 땀을 식히던 그녀와 눈을 맞추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던, 도현에게는 너무도 가슴 시리게 익숙한 장소였습니다. 도현은 그 돌다리 한가운데에 서서, 이미 흔적조차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을 상상하며 하염없이 서쪽 하늘만 핏발 선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이 그의 낡은 가사 위로 무심히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생생하게 흘러가던 과거의 환영이 멈추고, 심판의 궁전에 다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습니다. 염라대왕은 턱을 괸 손을 내리며, 옥좌에서 몸을 기울여 스님을 향해 서늘하게 물었습니다.
"너는 그때, 세속의 연을 끊고 등을 돌린 네 발걸음이 불법(佛法)을 따르는 가장 정의롭고 옳은 선택이었다고 자만하며 믿었느냐?"
스님은 고개를 떨군 채,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저는 수행자입니다. 머리를 깎은 수행자는 모름지기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세속의 삿된 정을 베어내야만 합니다. 마음이 갈가리 찢어질지라도, 저는 단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그 지엄한 계율과 구도의 길을 철저히 따른 것뿐입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스님의 대답에, 염라대왕은 무겁고 두꺼운 사자부를 탁 소리가 나게 덮으며 혀를 끌쯧 찼습니다.
"허나, 육신은 산에 묶어두었을지언정 네 시선은 평생 그 돌다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느냐. 속은 온통 그 여인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곪아 터져가면서, 겉으로는 도통한 척 가사를 두르고 염주를 굴려왔다. 네 마음이 끝내 그 돌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남겨져 있었거늘, 그것을 어찌 진정으로 인연을 끊어내고 해탈을 향해 나아간 발걸음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 너의 그 알량한 결단은, 깨달음이 아니라 거대한 비겁함이었을 뿐이다!"
도현 스님의 꼿꼿했던 어깨가 순간 와르르 무너지듯 움츠러들었습니다. 한평생 대중들 앞에서 무욕(無慾)을 가르치고 집착을 끊으라 설파했지만, 정작 자신의 텅 빈 가슴 깊은 곳에는 그 밤 달빛 아래서 등 돌렸던 그녀에 대한 후회와 짙은 연정이 씻기지 않는 흉터처럼 늘 남아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은 스님의 처절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최후의 선고를 내리듯 무겁게 선언했습니다.
"너의 가식적인 삶이 어떤 끝을 맺었는지, 나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처참한 밑바닥을 들여다봐야겠다."
과연 심판대 위에 선 스님의 운명은 어디로 곤두박질치게 될 것인가. 염라대왕의 차가운 눈빛이 번뜩였습니다.
※ 4: 병든 노파의 마지막 부름과 다음 생을 향한 약속
염라대왕이 옥좌에서 몸을 바로 세우며 두꺼운 손을 한 번 더 육중하게 허공에 휘저었습니다. 닫혀 있던 사자부의 표지 위에서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새로운 붉은빛이 솟구치더니, 심판의 궁전 허공에는 이제 도현 스님의 가장 마지막, 죽음을 목전에 둔 쇠약한 말년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젊은 날의 맹렬하던 열정도, 날카롭던 번뇌도 모두 지나가 버린 백발의 노승. 그는 첩첩산중 인적이 뚝 끊긴 벼랑 끝 작은 암자에서 홀로 땔감을 패고 물을 기르며 고독한 묵언 수행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밖에는 살을 에이는 듯한 무서운 눈보라가 암자의 지붕을 뚫을 듯 몰아치는 매서운 겨울이었습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 속에서도, 피골이 상접하여 눈이 푹 꺼진 도현은 호롱불 하나에 의지한 채 얼어붙은 손으로 힘겹게 경전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육신은 비록 나무껍질처럼 메말라 바스러질 듯 위태로웠으나, 반쯤 감긴 그의 두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젊은 시절에는 찾아볼 수 없던 묘하고 초연한 평온함이 고요하게 감돌고 있었습니다. 길고 고통스러웠던 번뇌를 마침내 잠재우고 깨달음의 문턱에 다다른 듯한 위엄마저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숭고한 정적이 흐르던 순간, 쾅 하고 낡은 암자의 문이 거칠게 부서질 듯 열리며 눈보라를 뚫고 앳된 젊은 수행승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습니다. 청년의 어깨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고 숨은 턱 밑까지 차올라 헐떡거렸습니다.
"스님! 큰스님! 산 아래 마을에서 한 여인이 오늘내일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도현은 경전을 넘기던 앙상한 손을 멈추고 아주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문밖의 눈보라를 응시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눈 속에 파묻힌 마른 장작처럼 낮고 차분했습니다.
"생과 사는 아침에 맺힌 이슬과 같은 법.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고통스러운 죽음의 문턱으로 몰고 간 것이냐?"
수행승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어 답했습니다.
"그녀는 가슴속에 울화가 쌓이는 깊은 병을 얻어 오랜 세월 고통받아 왔다고 합니다. 허나 숨이 끊어지는 이 마지막 순간에, 의원도 자식도 물리치고 오직 산에 계신 큰스님만을 미친 듯이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큰스님께 남기고 싶은 한 맺힌 말이 있다며 피를 토하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초연하기만 했던 도현의 창백한 얼굴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졌습니다. 그가 수십 년간 정성 들여 쌓아 올렸던 마음속의 굳건한 돌탑이 순식간에 흔들리며 무너져 내리는 듯했습니다. 묻지도 않았건만 그의 직감은 그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채고 있었습니다. 도현은 낡은 가사를 황급히 챙겨 입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짚신만 겨우 꿰찬 채, 젊은 수행승의 부축을 받으며 허리까지 쌓인 미친 눈보라를 뚫고 험한 산길을 미끄러지듯 내달려 산 아래 마을로 향했습니다.
산길을 구르다시피 하여 도현이 간신히 도착한 곳은, 마을 구석에 허물어져 가는 외딴 초가집이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스며드는 그 비좁고 더러운 방 안에는 이미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당장이라도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의 늙고 비참한 여인이 다 떨어진 이불을 덮고 힘겹게 누워 있었습니다. 병색이 완연하여 뼈만 남은 얼굴, 흐릿해진 초점 없는 눈동자가 열리는 방문 소리에 천천히 문가에 선 도현을 향했습니다. 그녀는 바로, 젊은 시절 도현의 가슴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던 사찰의 그 맑고 순박했던 처녀였습니다. 이제는 세월의 풍파와 모진 삶의 고통에 짓눌려 주름이 깊게 패고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지만, 도현의 눈에는 달빛 아래서 수줍게 고백하던 그 밤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문지방을 넘지 못한 채 굳어버린 도현을 발견한 그녀는, 창백한 입술을 달싹이며 마지막 남은 모든 생명력을 다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아아… 큰스님을… 제 숨이 멎기 전에 이리 살아서 다시 얼굴을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녀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에 도현의 앙상한 손이 사시나무처럼 미세하게, 그러나 통제할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무릎이 꺾이듯 방바닥에 주저앉아 그녀의 머리맡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신 겝니까… 무슨 연유로 죽음의 문턱에서 그토록 이 늙고 초라한 중을 부르셨습니까?"
그녀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힘겨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젖은 눈으로 도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속삭였습니다.
"사실은… 이승을 살아가는 제 일생 동안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순간도… 저는 스님을 제 마음속에서 잊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도현의 흔들리던 두 눈에서 결국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수십 년간 불경을 외우며 억누르고 외면했던 거대한 감정의 댐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잔인했던 밤… 스님께서 차갑게 등을 돌리고 멀어지셨을 때… 저는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울며 제 자신에게 피맺힌 맹세를 했습니다. 제가 비록 이승에서는 지지리도 가난하고 미천하여 스님의 곁에 머물지 못하지만, 만약 다음 생이 참으로 존재한다면, 그때는 기필코 스님과 다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겠노라고 말입니다."
도현은 차마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꺽꺽거리며 오열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안간힘을 쥐어짜 내어, 뼈만 남은 차가운 손을 들어 도현의 투박한 손을 꽉 움켜쥐었습니다.
"스님… 제발 대답해 주십시오. 저승을 지나 저의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는, 제발 그때만큼은… 저를 외면하지 않고 받아주시겠습니까?"
피를 토하듯 묻는 그녀의 애절한 마지막 애원에, 도현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고통에 입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손을 더욱 절박하게 쥔 채 마지막 숨을 거두려 하자, 도현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에 자신의 이마를 파묻고 조용히, 그러나 그 어떤 불경의 기도보다 또렷하게 속삭였습니다.
"…다음 생이 정녕 있다면, 내 어떤 지옥 불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때는 내 너의 두 손을 굳게 잡고 결코 외면하지 않으리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며 잡았던 손에서 힘이 툭 빠져나갔습니다. 도현의 오열 소리만이 차가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심판의 궁전 전체를 흔드는 염라대왕의 커다란 손짓과 함께 허공의 처절한 환영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멈추어 섰습니다. 환영이 사라진 어두운 궁전 안, 심판대 위에 선 현재의 도현 스님은 여전히 뺨에 눈물 자국을 매단 채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똑똑히 보았느냐? 그때 너는 부처의 제자임을 망각한 채,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분명히 다음 생을 기약하는 끔찍한 약속을 내뱉었다!"
스님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그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은 옥좌에서 몸을 일으키며 궁전이 떠나가라 낮고 웅장하게 웃었습니다.
"그렇다면 네 스스로에게 다시 묻겠다. 평생을 수도자로 살아온 너는 이번 생에서 너에게 주어진 모든 세속의 업과 미련을 티끌 하나 없이 완전히 씻어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냐?"
스님은 뼈아픈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염라대왕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단상에서 내려와 스님의 턱 밑까지 다가와 천천히, 그리고 아주 날카롭게 말을 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윤회란 단순히 육신이 썩어 없어지고 생과 생을 잇는 기계적인 수레바퀴가 아니다. 네가 마지막 숨결 앞에 무너져 붙잡은 그 더러운 감정, 네가 다음 생을 기약하며 남긴 지독한 집착! 그것이 네 영혼에 달라붙어 남아 있는 한,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결코 고통스러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스님의 눈빛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습니다. 염라대왕은 심판대 위의 사자부를 가리키며 쐐기를 박듯 선고했습니다.
"네가 가사에 얼룩처럼 남긴 이 어리석은 약속… 이 미련이 저승의 문턱에서 네 운명을 어떻게 잔인하게 결정지을지, 이제 너 스스로 그 대가를 똑똑히 깨닫게 될 것이다."
스님은 조용히 두 눈을 꾹 감았습니다. 평생을 바친 해탈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져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지독한 다음 생을 선택해야 하는 잔혹한 갈림길에 위태롭게 서 있었습니다.
※ 5: 해탈과 윤회의 갈림길, 스님의 위대한 선택
스님은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한평생 목탁을 두드리며 필사적으로 부정하려 했던 금지된 감정, 피를 토하는 수행을 통해 억지로 끊어내고자 했던 세속의 미련. 하지만 결국 그 모든 몸부림은 허사였고,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 서늘한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참혹하게 무너져내려 그녀와 다음 생을 기약하는 참담한 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염라대왕의 거대한 그림자가 심판대 위에 선 스님을 집어삼킬 듯 짙게 드리워졌고, 대왕이 옥좌로 천천히 걸어가며 비수처럼 날카롭게 물었습니다.
"네가 눈보라 속에서 내뱉은 그 약속, 해탈을 목전에 두고 남긴 그 지독한 집착의 말이 저승의 법칙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 알고 있는가?"
스님은 낡은 염주를 쥔 손에 핏대가 서도록 꽉 쥔 채 여전히 묵묵히 침묵을 지켰습니다. 염라대왕은 옥좌에 앉으며 다시 한번 거대한 손을 허공에 둥글게 휘저었습니다. 그러자 붉게 타오르던 사자부에서 이번에는 푸르고 신비로운 빛이 피어오르더니, 스님의 기억에도 없는 아주 새로운 환영이 허공에 서서히 떠올랐습니다.
환영 속에는 어린 동자승 하나가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툇마루에서 자상한 미소를 머금은 늙은 노승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 노승의 모습은 놀랍게도 살아생전 온화했던 도현 스님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린 소년은 호기심과 총기가 가득한 반짝이는 눈빛으로 노승을 올려다보며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큰스님,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지, 왜 힘들게 다시 세상에 갓난아기로 태어나 윤회를 하는 건가요?"
환영 속의 노승은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자애롭게 쓰다듬으며 맑은 물결 같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답했습니다.
"그것은 죽는 순간 이승에 간절하게 남겨둔 것이 있기 때문이란다, 아가야."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였습니다.
"죽는데 짐을 가져갈 수도 없잖아요? 남겨둔 것이라니요?"
노승은 잠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가에 옅은 슬픔을 머금었습니다.
"비록 육신은 껍데기가 되어 흙으로 흩어지나, 누군가를 향한 씻기지 않는 깊은 미련, 지키지 못한 애달픈 약속, 혹은 전생에서 기어이 갚아야만 하는 무거운 업보… 가슴 깊숙한 곳에 그런 무형의 찌꺼기들이 남아 있으면, 인간의 영혼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자석처럼 이끌려 또다시 핏덩이로 태어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단다."
소년은 노승의 어려운 말에 작게 한숨을 폭 내쉬며 물었습니다.
"그럼 그토록 기도를 열심히 하시는 우리 큰스님도 죽으면 다시 태어나나요?"
그 당돌한 질문에 노승의 자애롭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조용하고 허탈하게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한평생 부처님의 법을 따랐으나 아직 가슴속에 거미줄처럼 엉킨 번뇌를 완벽히 털어내지 못해 완전한 해탈을 이루지 못했단다. 그러니 아마도 다시 육신을 입고 어리석게 태어나 고통받겠지."
소년은 노승의 솔직한 대답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주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습니다.
"그러면 큰스님,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어떤 멋진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으세요? 새라든가, 장군이라든가요."
노승은 그 순진한 질문에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마당의 흩날리는 나뭇잎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 아주 오랜 침묵을 깨고 그는 허공을 향해 나지막하고도 한 맺힌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다음 생에서는… 나만 살겠다고 부처님 뒤에 숨어,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잔인하게 외면하지 않는… 평범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구나."
푸른 환영이 아스라이 흩어지며 사라졌습니다. 염라대왕은 넋이 나간 듯 환영이 떠 있던 허공을 응시하는 스님을 굽어보며 차가운 쇳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스스로 보았느냐? 네가 죽기 전 마음속으로 절규하며 남긴 그 말이, 네 영혼에 올가미가 되어 또 다른 생을 억지로 불러왔다. 네가 다음 생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무거운 짐을 지고 태어날지 이미 너의 그 말 한마디로 철저하게 결정되어 버린 것이지!"
스님은 무릎이 부서질 듯 털썩 단상에 주저앉으며 바닥에 이마를 대고 깊이 엎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대왕님… 한평생 뼈가 으스러지도록 수행한 저의 노력은 모두 거품이 되어, 저는 영영 이 고통스러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비참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까?"
염라대왕은 엎드린 스님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려 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벗어나고 싶으냐?"
스님은 한참을 숨죽여 고민했습니다. 그가 평생 산속에서 젊음과 피땀을 바쳐 원했던 단 하나의 목적은 오직 번뇌가 없는 완벽한 해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그의 심장은 부처가 아닌 한 여인을 향해 뛰었고, 기어이 다음 생을 기약하며 그 인연을 잡고 늘어졌습니다. 스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염라대왕의 불타는 듯한 눈을 마주 보았습니다.
"이 죄 많은 영혼에게도… 아직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남아 있습니까?"
염라대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엄숙하게 옥좌를 두드리며 선언했습니다.
"그 선택은 오직 네 영혼의 몫이다. 만약 네가 여기서 알량한 집착을 완전히 베어내고 해탈을 선택한다면, 너는 이 순간 모든 윤회의 지독한 사슬에서 영원히 벗어나 티끌로 소멸하여 절대적인 평온을 얻을 것이다. 허나… 만약 네가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려 다시 태어남을 선택한다면, 너는 네가 뱉어낸 그 지독한 인연의 업보를 짊어지고 또다시 짐승처럼 울부짖고 상처받으며 새로운 고통스러운 삶을 백지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스님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길고도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일순간의 평안을 주는 해탈과, 고통이 불 보듯 뻔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지킬 수 있는 윤회. 삶과 죽음의 살얼음 같은 경계에서,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걸고 어떤 끔찍하고도 위대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 찰나의 결정이 곧 그가 마주할 영원한 다음 생의 운명을 무자비하게 결정짓게 될 터였습니다.
※ 6: 다시 돌아간 인연의 굴레, 마침내 마주 잡은 두 손
심판의 궁전에 짓누르는 듯한 무겁고 차가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무릎을 꿇은 스님은 눈을 꽉 감고 아주 깊고 어두운 내면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만약 그가 지금 당장 염라대왕 앞에서 모든 감정을 부정하고 해탈을 선택한다면, 그는 짐승처럼 반복되는 생사고락의 끔찍한 윤회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다시는 고통받는 이승에 태어나지 않는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한평생 그토록 굶주리고 헐벗으며 갈구했던 궁극의 목표가 바로 눈앞의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윤회를 택한다면…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죽어가는 그녀와 피눈물로 약속했던 그 질긴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다시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세상의 거센 풍파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어리석고 멍청한 선택일까? 그는 평생 남들 위에 서서 거드름을 피우며 수행자로서 고고하게 살아왔습니다. 남의 욕망을 비웃고 집착을 흉물로 여기며 억지로 끊어내야만 부처에 이를 수 있다고 맹신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 지독한 신념의 끝자락, 마지막 숨이 넘어가던 순간 튀어나온 그의 진심은 그 알량한 신념을 처참하게 배반하고 그녀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스님의 고뇌를 지켜보던 염라대왕이 옥좌에서 턱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며 물었습니다.
"아직도 부질없는 고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가? 해탈이냐, 윤회냐."
스님은 천천히 눈을 뜨고 자리에서 꼿꼿하게 일어섰습니다. 핏발이 선 두 눈에는 아까의 흔들림 대신 맑은 새벽 호수와 같은 단단한 결의가 차올라 있었습니다.
"대왕님, 미천한 저는 한평생 수행의 길을 걸으며 해탈을 인생의 유일한 구원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허울이 벗겨진 지금, 제 마음속 가장 밑바닥에는 대왕님께 감히 여쭙고 싶은 단 한 가지 거대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염라대왕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추켜올리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심판대 위의 망자가 대왕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은 전무후무했기 때문입니다.
"호오, 목숨이 끊어진 마당에 짐에게 질문이라니. 무엇이냐, 말해보아라."
스님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억눌렀던 감정을 터뜨리듯 절절하게 쏟아냈습니다.
"대왕님, 진정한 해탈이란 무엇입니까? 그저 산속에 처박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인연의 온기와 사람의 감정을 매정하게 칼로 도려내듯 끊어내고 나 홀로 평안을 얻는 것이 부처의 길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걸어온 수행의 길이란 결국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고 내 영혼만 살찌우기 위해 모든 것을 비겁하게 포기해 버리는 도망자의 길이 아닙니까!"
염라대왕은 옥좌에 기대어 스님의 피 끓는 항변을 흥미롭게 묵묵히 들었습니다. 스님은 떨리는 두 손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평생 단상에 올라 대중들에게 사랑하고, 남을 끝없이 용서하고, 불쌍한 이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자비가 중요하다고 입이 부르트도록 설파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 자신은! 남들에게 그리 가르쳐놓고도 정작 저를 향해 애타게 내밀어진 한 여인의 손길을 불법이라는 명분 뒤에 비겁하게 숨어 철저히 억누르고 잔인하게 짓밟으며 살아왔습니다. 결국 제 껍데기뿐인 마음속엔 평생 한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과 집착만이 진물처럼 남았고, 그것이 지금 저를 지옥 같은 윤회의 굴레로 사정없이 이끌고 있습니다!"
스님은 깊은 혼란과 후회 속에서 주름지고 거칠어진 자신의 두 손바닥을 허망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수만 장의 경전을 필사하느라 먹물이 배인 손. 부처님께 용서를 구하려 수백만 번 엎드려 절을 올리고 염주를 돌렸던 거룩한 손. 그러나 정작 그 손은, 그 길고 긴 세월 동안 사랑하는 여인의 차가운 손을 단 한 번도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하고 모질게 밀쳐낸 차가운 흉기였습니다.
염라대왕은 스님의 절규를 모두 듣고 난 후, 천둥처럼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어 궁전의 공기를 갈랐습니다.
"어리석은 중아. 진정한 해탈이란, 억지로 도망치듯 끊어내어 도달하는 빈 껍데기가 아니다."
스님의 흔들리는 눈빛이 염라대왕을 향했습니다. 염라대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옥좌의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오며 말을 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영혼이 다르고 그 영혼이 가야 할 해탈의 길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깨끗한 영혼은 처음부터 세속을 미련 없이 떠나 오직 도를 닦으며 순백의 깨달음을 얻어 해탈에 이르지만, 어떤 무거운 영혼은 오히려 세속의 진흙탕에 뛰어들어 자신이 저지른 죄와 타인을 향한 지독한 사랑을 뼈가 깎이도록 겪어내며 자신의 업을 씻어내야만 해탈에 도달한다. 네가 살아온 허상의 길이 실패했다면, 너는 지금부터 어느 가시밭길을 걸어야 너의 참된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벼락같은 깨달음의 말씀에 스님은 긴 침묵 끝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결연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대왕님… 저는 해탈을 포기하겠습니다. 저는… 기꺼이 그녀가 있는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겠습니다."
스님의 위대한 선언을 들은 염라대왕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의미심장하고 거대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하다니 참으로 미련하도다. 그렇다면 너는 다음 생에서 철저히 기억을 잃은 채, 또다시 그 가엾은 인연의 굴레를 고통스럽게 마주하게 될 것이다."
스님은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환하게 젖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다음 생에서 어떤 비참한 모습으로 태어나 그녀를 다시 만나더라도… 그때만큼은 절대로 그녀의 뻗은 손을 외면하지 않고 제 전부를 바쳐 사랑하겠습니다."
스님의 다짐이 궁전에 울려 퍼지는 순간, 염라대왕이 거대한 손을 허공으로 뻗어 휘젓자, 스님의 단단했던 영혼의 형상이 점차 모래알처럼 흩어지며 눈부신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치열했던 이번 생이 끝이 나고, 영겁의 다음 생이 마침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인연의 물줄기는 네가 마지막에 뿌린 씨앗의 선택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그 죗값을 치르는 길이 반드시 네가 상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하고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니라. 가서 너의 빚을 갚아라!"
스님의 형상은 빛무리로 변해 염라대왕의 마지막 호통과 함께 칠흑 같은 궁전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 사라졌습니다. 텅 빈 궁전에 홀로 남은 염라대왕은 대리석 탁자로 돌아가 조용히 빛을 잃은 사자부를 덮으며 묵직하게 중얼거렸습니다.
"결국 인간의 위대함이란, 스스로의 어리석은 선택에 책임을 지며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가는 데에 있구나. 이제 그의 거친 윤회는 어떤 소용돌이 속으로 흘러가게 될 것인가."
어느새 저승의 붉은 연기가 걷히고, 이승의 어느 맑은 봄날 한적하고 평화로운 들판의 풍경이 허공에 비쳤습니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개울가, 한 소년이 발끝을 시원한 물속에 담근 채 푸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앳된 소녀가 치맛자락을 팔랑이며 걸어왔습니다. 소녀는 마치 수백 년 동안 그곳에서 그 소년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소년의 앞에 거짓말처럼 우뚝 멈춰 섰습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왠지 너를 아주 오래전부터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아."
소녀의 조심스러운 첫마디에 소년은 놀란 듯 그녀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 소년의 머릿속 깊은 곳에 묻혀있던 전생의 희미한 기억 조각 하나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득하고 아득한 세월 너머, 어두운 사찰의 낡은 뒷마당. 자신을 향해 뻗어오던 한 여인의 애처로운 손길과, 눈보라가 치는 허름한 초가집에서 피를 토하며 남겼던 마지막 그 약속. "다음 생이 있다면…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소년의 심장이 고장 난 듯 쿵쾅거리며 미친 듯이 크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의 맑은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영원과도 같은 침묵 끝에, 조용히 그러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응, 나도 그래.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기다린 것 같아."
소년의 대답에 소녀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손을 뻗어 마침내 수백 년을 기다려온 두 손을 단단하게 마주 잡았습니다. 다시는, 영원히 서로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굳세게요.
운명의 거대한 굴레 속에서 죗값을 치르고 다시 만난 두 사람. 그들이 앞으로 험난한 이승에서 어떤 고된 삶을 살아가며 인연의 업보를 풀어낼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이번 생에서만큼은 어떠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서로를 결코 외면하지 않고 지켜내리라는 그 절박한 약속이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의 체온을 통해 핏속 깊이 단단하게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삶과 죽음, 해탈과 윤회의 기로에서 스님이 택한 가슴 시린 선택, 오늘 이야기 어떠셨나요? 우리는 살아가며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지만, 어쩌면 진정한 깨달음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뻗은 손을 외면하지 않는 작은 용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스님과 여인의 맞잡은 손이 다음 생에서는 험난한 고통 대신 아름다운 꽃길만 걷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네요. 우리 구독자님들도 오늘 하루 내 곁의 소중한 인연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보는 건 어떨까요? 이야기가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알림 설정 부탁드리며, 저는 다음 시간에 더 감동적인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평안한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