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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라대왕을 무릎꿇린 선비

@염라야담 2026. 9. 28.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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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라대왕을 무릎꿇린 선비

    저승 문턱에서 되돌려 보내진 선비, 명부에 적힌 한 줄의 비밀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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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221자)

    곤장 스무 대를 맞고 죽은 가난한 선비. 저승사자가 잡으러 오자 누운 채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잡아가려거든 문서부터 보이시오." 저승 심판정에서는 판관의 판결에 "이의 있소!"를 외치더니, 끝내 염라대왕까지 불러냈지요. 그런데 선비의 명부 마지막 장을 펼친 순간, 판관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한 줄은 바로 염라대왕의 친필이었거든요. 사십 년 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1: 쓰지 않는 붓

    충청도 괴산 땅, 연풍골이라는 산골 마을에 방두학이라는 선비가 살았더랍니다.

    나이는 예순셋. 과거 한 번 붙어 본 적 없고, 벼슬 한 자리 해 본 적 없는 가난한 선비였지요.

    그런데 이 선비한테는 별명이 하나 있었답니다.

    방고집.

    옳다 싶으면 소가 끌어도 안 움직이고, 아니다 싶으면 임금님 앞에서도 아니라고 할 사람이라, 마을 사람들이 붙여 준 이름이었지요.

    "훈장님, 오늘은 무슨 글 배워유?"

    "오늘은 바를 정(正) 자다. 한 일(一) 자 밑에 그칠 지(止) 자. 한 번 멈춰 서서 생각해 보는 것이 바른 것이니라."

    서당이라 해 봐야 방두학네 초가 사랑방 한 칸이었어요. 수업료는 받는 둥 마는 둥. 감자 몇 알, 보리 한 됫박이면 그걸로 끝이었지요. 그러니 살림이 필 리가 있나요.

    "영감! 또 쌀독 바닥이 보여요! 글 가르쳐서 밥이 나와요, 떡이 나와요?"

    부인 설씨가 부엌에서 바가지를 탁탁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방두학은 태연했더랍니다.

    "글이 밥은 안 되어도 사람은 되지 않소."

    "아이구, 사람 되다가 우리가 먼저 굶어 죽게 생겼구먼!"

    그렇게 가난해도 웃음 끊일 날 없던 이 집에, 어느 가을날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어요. 괴산 관아의 이방이었습니다.

    "방 선비, 경사가 났소이다. 우리 현감 나리께서 선비님께 큰일을 맡기시겠답니다."

    "큰일이라니요?"

    "송덕비 말이오. 현감 나리의 은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는데, 이 고을에서 문장 제일 좋은 분이 선비님 아니오. 비문을 좀 지어 주시오. 사례는 쌀 스무 섬!"

    쌀 스무 섬. 와, 이게 얼마냐 하면요, 방두학네 식구가 삼 년을 배 두드리며 먹고도 남을 양이었지요. 부엌 문틈으로 엿듣던 설씨 부인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그런데 방두학은 수염을 한 번 쓸더니, 딱 잘라 말했더랍니다.

    "못 쓰겠소."

    "예? 쌀 스무 섬이라니까요!"

    "쌀이 백 섬이라도 못 쓰겠소. 윤 현감이 이 고을에 와서 삼 년 동안 무슨 은덕을 베풀었소? 환곡에 모래 섞어 내주고, 가을엔 알곡으로 두 배를 받아 가고, 죽은 사람한테까지 군포를 매겨 과부들을 울렸소. 그런 분을 기리는 글을 쓰라니. 내 붓이 부끄러워서 못 쓰오."

    이방 얼굴이 흙빛이 되었지요.

    "선비님, 말씀 조심하시오. 이 말이 현감 나리 귀에 들어가면…"

    "들어가라고 하는 말이오. 가서 그대로 전하시오. 연풍골 방두학이는 거짓 글은 한 글자도 못 쓴다고."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래요. 설씨 부인이 부엌에서 튀어나와 이방 소매를 붙잡았어요.

    "이방 나리, 저 양반이 요즘 고뿔 기운이 있어서 헛소리를 하는 거유! 제가 잘 타일러 볼 테니…"

    "부인. 헛소리가 아니오."

    그 한마디에 설씨 부인은 입을 꾹 다물었지요. 삼십 년을 같이 산 사람이에요. 저 목소리가 나오면 끝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요.

    사흘 뒤, 관아 사령들이 들이닥쳤더랍니다. 죄목은 관장 모독. 고을 원님을 욕보였다는 거지요.

    동헌 마당에 끌려간 방두학 앞에, 배가 불룩한 윤치삼 현감이 비단 방석 위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어요.

    "네가 그 방고집이냐? 지금이라도 비문을 쓰겠다고 하면 없던 일로 해 주마."

    "못 쓰겠소."

    "매를 맞고도?"

    "매는 살을 때리지만, 글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오. 살은 아물면 그만이지만, 거짓 글은 비석에 새겨져 천 년을 가오. 천 년 동안 후손들한테 거짓을 읽힐 수는 없소."

    "저놈을 쳐라!"

    곤장 스무 대. 예순셋 노인의 몸으로 견디기엔 너무 가혹한 매였지요. 마을 사람들이 문짝에 실어 데려왔을 때, 방두학의 바지는 피로 흥건했답니다.

    서당 아이들이 사랑방 앞에 쪼르르 모여 앉아 훌쩍였어요.

    "훈장님, 그냥 써 주시지 그랬어유…"

    방두학은 끙끙 앓으면서도 아이들을 보고 씩 웃었더랍니다.

    "얘들아, 오늘 배운 글자가 뭐였지?"

    "…바를 정 자유."

    "그래. 한 번 멈춰 서서 생각해 보는 것. 나는 멈춰서 생각해 봤다. 그리고 안 쓰기로 했지. 그러면 된 거다."

    그러나 매 맞은 자리에 독이 오르고, 열이 펄펄 끓기 시작했어요.

    설씨 부인은 시집올 때 친정어머니가 꽂아 준 은비녀를 뽑아 장에 내다 팔았더랍니다. 그 돈으로 약을 지어 와서는 밤새 약탕관을 지키며 투덜거렸지요.

    "이 고집불통 영감아. 쌀 스무 섬 마다하고 곤장 스무 대 받아 오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수. 내가 이 꼴 보려고 삼십 년을 살았나, 원."

    말은 그렇게 해도, 약사발을 받쳐 든 손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더랍니다. 방두학은 그 거친 손을 가만히 잡았어요.

    "부인, 머리에 비녀는 어쨌소?"

    "…알 거 없수. 약이나 드슈. 식기 전에."

    방두학은 더 묻지 않았어요. 묻지 않아도 알았으니까요. 그저 쓴 약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꿀꺽꿀꺽 다 마셨지요.

    그렇게 보름을 앓던 어느 새벽, 방두학은 문득 방 안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더랍니다.

    문지방에 검은 도포에 검은 갓을 쓴 사내 둘이 서 있었어요. 하나는 허연 수염이 난 늙은이, 하나는 아직 솜털이 보송한 풋내기였지요.

    "방두학이, 가자."

    늙은 차사가 쇠사슬을 철렁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방두학은 어떻게 했을까요? 겁먹고 벌벌 떨었을까요? 아니에요. 이 양반, 누운 채로 손을 척 내밀었더랍니다.

    "잡아가려거든 문서부터 보이시오."

    "…뭐, 뭐라고?"

    "사람을 잡아가는데 문서도 없이 잡아가는 법이 어디 있소? 이승 포졸도 그렇게는 안 하오."

    풋내기 차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늙은 차사를 쳐다봤지요.

    "선배님, 이런 사람 처음 봐요."

    "…나도 사백 년 만에 처음이다."

    씬 2. 저승길의 말다툼 (2,788자)

    늙은 차사는 한숨을 푹 쉬더니, 품에서 누런 종이 한 장을 꺼냈어요. 저승 관아에서 발급한 체포 문서, 적패지였지요.

    방두학은 그걸 받아 들고 한 자 한 자 꼼꼼히 읽었더랍니다.

    "충청도 괴산 연풍골 방두학, 나이 예순셋, 시월 초이렛날 인시에 명이 다함… 음. 이름 맞고, 나이 맞고, 날짜도 맞구려. 글씨는 좀 삐뚤빼뚤하오만."

    "이제 됐소?"

    "됐소. 가십시다."

    방두학이 순순히 일어나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어요. 뒤를 돌아보니 이불 위엔 제 몸이 눈을 감고 누워 있고, 그 곁에서 설씨 부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지요. 밤새 물수건을 갈아 주다 그만 잠이 든 거예요.

    방두학은 부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주려다, 손이 허공을 스르르 통과하자 멈칫했더랍니다.

    "부인. 삼십 년 동안 쌀독 한 번 가득 채워 주지 못해 미안하오. 그래도 부끄럽게 살진 않았소. 그거 하나로 용서해 주구려."

    문밖을 나서자 이승의 마을은 온데간데없고, 끝도 없는 잿빛 들판이 펼쳐졌어요. 안개가 발목까지 차오르고, 바람 소리가 꼭 누가 우는 소리 같았지요.

    앞서 걷던 풋내기 차사 먹쇠가 자꾸만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더랍니다.

    "저, 선비님. 안 무서우세요? 다들 여기 오면 울고불고 난리던데요."

    "무서울 게 뭐 있나. 죽는 건 한 번이지만 부끄러운 건 두고두고인데. 나는 부끄러운 짓은 안 했으니 무서울 것도 없지."

    "…참 이상한 양반이네."

    늙은 차사 해월이 슬쩍 방두학을 곁눈질했어요. 사백 년 동안 수만의 넋을 데려왔지만, 이렇게 뒷짐 지고 산책하듯 저승길을 걷는 사람은 처음이었거든요.

    '저 양반, 심판정에 가면 무슨 사달을 낼지 모르겠구나.'

    해월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괜히 쇠사슬을 한 번 더 고쳐 쥐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이 선비는 걸으면서도 입을 쉬지 않았더랍니다.

    "여보시오, 차사 양반. 저승길은 왜 이리 험하오? 길 닦는 부역은 누가 하오?"

    "…그런 건 없소."

    "없으니 험하지. 돌부리가 이리 많아서야 노인네 넋들이 어찌 다니겠소. 내 윗분 만나면 한마디 해야겠소."

    "한마디는 무슨. 선비는 이제 못 돌아가오."

    "허허, 그거야 두고 봐야 알지."

    먹쇠는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렸고, 해월은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지요.

    얼마나 걸었을까요. 시커먼 강물이 소리도 없이 흐르는 강가에 닿았어요. 저승의 강, 황천이었지요.

    그런데 강가 자갈밭에 조그만 그림자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더랍니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사내아이였어요. 옷은 흠뻑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요.

    "아저씨들도 저 잡아가려고 왔어유?"

    방두학이 아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습니다.

    "아니다. 나도 너처럼 잡혀가는 중이란다. 너는 이름이 뭐냐?"

    "…칠복이유. 괴산 달래강 아랫마을 사는 칠복이."

    "허어, 한 고을 사람이구나. 어쩌다 이 어린 나이에 여기까지 왔누?"

    사흘 전, 어머니를 따라 달래강 빨래터에 갔다가, 다섯 살 먹은 누이 분이가 물가에서 까불다 그만 물살에 휩쓸렸대요. 칠복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뛰어들었지요. 허우적대는 분이를 겨우 붙잡아 바위 위로 밀어 올렸는데, 정작 자기는 힘이 빠져 그대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거예요.

    "물이 막 코로 들어오는디유, 분이가 바위 위에서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유. 그 소리 듣고 나니께 이상하게 하나도 안 무서웠어유."

    방두학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더랍니다.

    '열 살짜리가… 어른도 못 할 일을 했구나.'

    "분이는… 분이는 살았어유?"

    늙은 차사 해월이 잠시 눈을 감더니 나직하게 대답했어요.

    "살았다. 명부에 그 아이 이름은 아직 까맣게 남아 있다."

    "다행이다…"

    칠복이는 배시시 웃더니, 금세 또 울상이 되었지요.

    "근디유, 아까 지나가던 어른 넋들이 그랬어유.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은 불효라서 지옥에 간대유. 저 이제 지옥 가는 거쥬?"

    방두학의 눈썹이 꿈틀했더랍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 누이를 살리고 온 아이가 불효라니. 업혀라. 맨발로 자갈밭 걷기 힘들다."

    "선비, 그 아이는 우리 소관이 아니오."

    해월이 말렸지만, 방두학은 칠복이를 번쩍 업으며 태연히 대꾸했어요.

    "데려가는 건 그쪽 소관이지만, 업고 가는 건 내 소관이오."

    먹쇠 차사가 결국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더랍니다.

    강을 건너자 우뚝 솟은 검은 기와집이 나타났어요. 망자가 처음 서는 심판정이었지요.

    마당엔 넋들이 길게 줄을 서 있고, 대청 위엔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판관 하나가 커다란 붓을 휘두르고 있었어요. 저승 판관 중에서도 깐깐하기로 소문난 최판관이었지요.

    "다음!"

    붓이 한 번 휙 지나가면 판결 하나가 끝났어요. 억울하다고 말할 틈도 없었지요.

    "청주 사는 머슴 억만이. 주인집 소를 잃어 손해를 끼쳤으니 곤장 지옥 삼십 년!"

    "나, 나리, 그 소는 산불 난 날 외양간 문을 열어 줬다가…"

    "다음!"

    방두학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섰어요.

    '이건 판결이 아니라 떡 썰기로구나.'

    방두학 바로 앞에 선 이는 흰 머리가 희끗한 아낙이었더랍니다.

    "충주 사는 순례. 흉년에 남의 볏단 두 단을 훔쳤으렷다. 절도죄로 한빙지옥 오십 년!"

    "나리, 우리 애들이 사흘을 굶어서…"

    "다음!"

    아낙은 그대로 끌려 나갔고, 이윽고 칠복이 차례가 되었어요. 최판관이 명부를 척 펼치더니 혀를 끌끌 찼습니다.

    "괴산 칠복이, 열 살. 부모보다 먼저 목숨을 잃었구나. 명부 법 제칠조, 부모에 앞서 죽은 자식은 불효 중의 불효다. 흑암지옥 삼백 년!"

    칠복이가 방두학의 도포 자락을 붙잡고 파랗게 질렸어요.

    "선비님… 무서워유…"

    그 순간이었더랍니다. 방두학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손을 번쩍 들었어요.

    "이의 있소!"

    시끌벅적하던 심판정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어요. 최판관의 붓이 허공에서 딱 멈췄지요.

    저승 심판정이 생긴 이래, 그 말이 나온 건 처음이었거든요.

    ※ 3: 이의 있소

    "…방금 뭐라 했느냐?"

    최판관이 붓을 내려놓고 눈을 가늘게 떴더랍니다.

    "이의 있다 했소. 그 판결, 틀렸소."

    심판정 양옆에 늘어선 옥졸들이 저마다 수군거렸어요. 줄 서 있던 넋들도 눈이 휘둥그레졌지요. 먹쇠 차사는 제 입을 틀어막았고, 늙은 차사 해월은 이마를 짚었더랍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허허, 죽은 놈이 말이 많구나. 여기는 이승 동헌이 아니다. 죽은 자는 판결을 들을 뿐, 따질 자격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판관 나리께선 어찌하여 아까부터 죽은 자들에게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물으셨소? 말 못 할 자에게는 물을 까닭도 없지 않소. 물었으면 대답을 들어야 하고, 대답을 들었으면 그 말이 옳은지 따져 봐야 하는 것이 판관의 도리 아니오?"

    최판관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어요. 말문이 턱 막힌 거지요.

    "…좋다. 무엇이 틀렸는지 말해 보거라. 헛소리면 네놈부터 혀를 뽑는 발설지옥이다."

    "좋소."

    방두학이 칠복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어요.

    "나리께선 이 아이를 불효라 하셨소. 효가 무엇이오? 부모의 몸을 받들고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오. 이 아이는 물에 빠진 누이를 건지고 대신 죽었소. 이 아이가 가만히 있었다면 어찌 되었겠소? 누이는 죽고, 부모는 딸을 잃은 데다, 평생 저 집 아들은 동생 떠내려가는 걸 보고만 있었다는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이오. 이 아이는 부모가 두 자식을 다 잃지 않게 했고, 부모 이름에 먹칠하지 않게 했소. 이것이 불효요? 이게 불효라면 이 세상에 효자는 하나도 없소!"

    심판정 여기저기서 옳소, 옳소, 하는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더랍니다. 줄 서 있던 넋들이었지요.

    "조, 조용히들 하라!"

    최판관이 탁자를 쾅 내리쳤지만, 얼굴은 벌써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어요.

    "그, 그래도 법은 법이다! 칠조에 분명히…"

    "그럼 하나 더 묻겠소. 아까 끌려간 충주 순례 아낙 말이오. 그 볏단 주인이 누구요? 장부를 좀 펴 보시오."

    "그게 무슨 상관…"

    "펴 보시오!"

    방두학의 호통에 최판관이 저도 모르게 장부를 넘기고 말았어요. 한참을 들여다보던 판관 얼굴이 점점 굳어 갔지요.

    "볏단 주인은… 충주 땅 조 부자. 그해 봄 순례에게 환곡 쌀 한 말을 꾸어 주고, 가을에 석 말을 받아 갔구나…"

    "그러니까 한 말 꾸어 주고 석 말을 뜯어 간 자에게서 볏단 두 단을 가져온 것이오. 제 것을 도로 찾아간 사람을 도둑이라 하오? 그렇다면 석 말을 뜯어 간 조 부자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오? 저승 장부에는 그자가 도둑이라 적혔소, 부자라 적혔소?"

    최판관은 대답을 못 했더랍니다. 붓을 쥔 손에서 먹물이 뚝, 뚝 떨어졌지요.

    와, 이거 보세요. 수천 년 저승 심판정에서, 판관이 죽은 선비 하나한테 말로 쩔쩔매고 있는 거예요. 줄 서 있던 넋들은 숨소리도 못 내고 구경만 했지요.

    궁지에 몰린 최판관이 결국 소리를 버럭 질렀어요.

    "그, 그만! 이 법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염라대왕 마마께서 친히 정하신 명부의 법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그 법을 쓰신 분을 모셔 오시오."

    "…뭐, 뭐라?"

    "법이 틀렸으면 법을 쓴 분께 따져야지, 법을 읽기만 하는 분께 따져 봐야 무슨 소용이오. 염라대왕을 불러 주시오. 내 직접 여쭤 보겠소."

    해월이 방두학의 도포 자락을 슬그머니 잡아당겼어요.

    "선비, 제발 그만하시오. 그러다 넋이 흔적도 없이 흩어지는 수가 있소."

    "흩어져도 할 말은 해야겠소. 이 아이가 흑암지옥 삼백 년인데, 내 넋 하나 아까워서야 쓰겠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였더랍니다.

    콰르릉!

    하늘도 없는 저승에 천둥이 울리고, 대청 뒤의 커다란 병풍이 좌르르 양쪽으로 갈라졌어요. 붉은 빛이 쏟아져 나오고, 옥졸이며 차사며 판관이며 할 것 없이 모두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지요.

    진홍빛 곤룡포에 구슬 줄이 치렁치렁 늘어진 면류관. 저승의 주인, 염라대왕이었어요.

    "누가 감히 짐을 부르느냐."

    목소리 하나에 심판정 기둥이 우르르 떨렸더랍니다. 칠복이는 방두학의 다리 뒤로 쏙 숨었지요.

    그런데 방두학은 어땠을까요? 엎드렸을까요? 아니에요.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읍을 하되, 허리는 꼿꼿이 편 채로 서 있었어요.

    "충청도 괴산 선비 방두학이 불렀소이다."

    염라대왕의 눈이 방두학을 내려다봤어요. 수천 년 동안 그 눈길을 마주 본 넋은 하나도 없었는데, 이 늙은 선비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지요.

    "감히 죽은 선비 따위가 짐의 법을 따지겠다? 좋다. 따지기 전에, 네놈이 무슨 자격으로 남의 죄를 논하는지 먼저 보자. 판관, 저자의 명부를 펼쳐라!"

    최판관이 허둥지둥 방두학의 명부를 펼쳤더랍니다.

    "과, 관장을 모독한 죄 하나… 처자를 굶긴 죄 하나… 과거 시험장에 끝내 나타나지 않아 부모 기대를 저버린 죄 하나…"

    붉은 글씨가 줄줄이 읽혔어요. 염라대왕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걸렸지요.

    "거봐라. 남의 흠을 따지던 네놈도 흠투성이 아니냐."

    방두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더랍니다.

    "흠 있소. 관장을 모독한 죄, 맞소. 거짓 비문을 쓰라기에 거절했으니 모독이라면 모독이지요. 처자를 굶긴 죄, 그것도 맞소. 우리 부인한테는 평생 갚아도 못 갚을 빚이오. 허나 대왕마마, 내 죄가 많다고 해서 이 아이의 판결이 옳아지는 건 아니지 않소? 내 죄는 내 죄대로 벌하시고, 이 아이 일은 이 아이 일대로 바로잡아 주시오."

    "허, 입만 살았구나. 계속 읽어라!"

    그런데 마지막 장을 넘기던 최판관의 손이 갑자기 딱 멈췄어요.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지요.

    "마, 마마… 마지막 장에… 한 줄이 더 있사옵니다."

    "읽어라."

    "소, 소신은 감히 읽을 수가 없사옵니다. 이 글씨는… 이 글씨는 마마의 친필이옵니다…"

    ※ 4: 염라대왕과의 문답

    "짐의 친필이라?"

    염라대왕의 눈썹이 꿈틀했더랍니다.

    "가져오너라."

    최판관이 두 손으로 명부를 받쳐 올리자, 대왕이 직접 마지막 장을 펼쳐 보았어요. 그런데 그 한 줄 위에는 붉은 금박 봉인이 덮여 있었지요. 쓴 사람만이 열 수 있는 봉인이었어요.

    "…이상하구나."

    염라대왕이 봉인을 한참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더랍니다.

    "짐이 수천 년 동안 명부에 쓴 글이 억만 줄이다. 허나 봉인까지 해 둔 글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지. 그런데 이 봉인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심판정이 술렁였어요. 저승의 주인이 기억을 못 한다니, 이런 일은 처음이었거든요.

    '대체 이 늙은 선비가 누구길래…'

    늙은 차사 해월은 엎드린 채 곁눈질로 방두학을 올려다봤어요. 그런데 정작 방두학은 그 한 줄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얼굴이었지요.

    "대왕마마. 그 한 줄이 무엇이든, 지금은 이 아이 일이 먼저요."

    "허! 네 명부에 무엇이 적혔는지 궁금하지도 않으냐?"

    "내 일은 내가 죽고 나서 이미 끝났소. 허나 이 아이 일은 지금 막 시작되려는 참이오. 끝난 일보다 시작되는 일이 급하지 않겠소?"

    염라대왕은 명부를 탁 덮었어요. 그러고는 옥좌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지요.

    "좋다. 네가 짐의 법을 따지겠다 했으니, 짐이 먼저 너를 따져 보마. 세 가지를 묻겠다. 하나라도 막히면 너는 그 입 때문에 발설지옥 천 년이다. 셋을 다 넘기면, 이 봉인도 열고 아이 일도 다시 보마."

    "여쭈시오."

    칠복이가 방두학의 도포 자락을 꼭 쥐고 속삭였어요.

    "선비님, 지면 어떡해유? 혀 뽑힌대유…"

    "걱정 마라. 혀는 옳은 말 하라고 달린 거다. 옳은 말 하다 뽑히면 그것도 혀의 복이지."

    참 대단한 배짱이지요. 저승의 주인 앞에서 여쭈시오, 라니요.

    "첫째. 법이란 무엇이냐?"

    방두학은 수염을 한 번 쓸고 대답했더랍니다.

    "법은 울타리요. 울타리는 양을 가두려고 치는 게 아니라, 늑대로부터 양을 지키려고 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울타리에 가시가 안쪽으로 나 있어서 양을 찔러 죽인다면, 그건 울타리가 아니라 덫이오. 덫은 걷어 내야지요."

    염라대왕의 손가락이 옥좌 팔걸이를 톡, 하고 두드렸어요. 대답이 마음에 걸렸다는 뜻이었지요.

    "말은 그럴듯하구나. 허면 울타리를 걷어 내고 나서 늑대가 들어오면 어쩔 테냐? 법을 허물면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법이다."

    "누가 울타리를 걷으라 했소? 가시 방향을 바로 하라는 것이오. 아까 끌려간 청주 머슴 억만이를 보시오. 산불 난 날 외양간에 갇힌 소가 타 죽을까 봐 문을 열어 준 사람이오. 소는 살아서 산으로 도망갔고, 주인은 소를 잃었다며 억만이를 쫓아냈소. 그런 사람을 곤장 지옥에 보내는 법이라면, 그 법은 늑대를 막는 게 아니라 양을 찌르고 있는 것이오."

    염라대왕이 최판관을 흘깃 내려다봤어요. 최판관은 얼른 장부를 뒤지더니, 이마에 식은땀을 줄줄 흘렸지요.

    "그, 그러하옵니다. 산불 난 날… 외양간 문을… 소는 살았사옵니다…"

    '아이고, 내가 어쩌자고 그걸 제대로 안 읽었을꼬.'

    최판관은 속으로 제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더랍니다. 줄 서 있던 넋들 사이에서는 또다시 소리 없는 한숨이 퍼져 나갔고요.

    "둘째. 벌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고치려고 있는 것이오. 아픈 사람에게 쓴 약을 먹이는 건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낫게 하려는 것 아니겠소? 사람을 고치지 못하는 벌은 벌이 아니오. 그건 그냥 앙갚음이지요. 흑암지옥 삼백 년이 이 아이의 무엇을 고치겠소? 누이를 구한 그 마음을 고치겠소? 그 마음은 고칠 게 아니라 상을 줄 것이오."

    그 순간이었더랍니다.

    염라대왕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어요. 옥좌 팔걸이를 쥔 손이 부르르 떨렸지요.

    "…그 말."

    "예?"

    "사람을 고치지 못하는 벌은 앙갚음일 뿐이라는 그 말. 어디서 들었느냐?"

    "들은 말이 아니라 내가 한 말이오. 젊을 적부터 입에 달고 살던 말이지요. 사십 년 전쯤인가, 문경새재 눈밭에서 웬 까다로운 거지 노인하고 사흘 밤낮 말씨름을 할 때도 이 말을 했었소."

    쿵.

    염라대왕이 옥좌에서 벌떡 일어섰어요. 면류관의 구슬 줄이 좌르르 흔들렸지요.

    판관이며 차사며 옥졸이며, 심판정에 있던 모두가 숨을 멈췄더랍니다. 대왕이 옥좌에서 일어서는 걸 본 적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거든요.

    "셋째 물음은… 거두겠다."

    대왕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어요.

    "문경새재. 눈밭. 사흘 밤낮. 거기서… 네가 그 노인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 말해 보거라."

    방두학은 고개를 갸웃했지요.

    "그게 이 아이 일과 무슨 상관이오?"

    "말하라!"

    천둥 같은 호령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엔 노여움이 아니라 다급함이 묻어 있었어요.

    방두학은 잠시 먼 곳을 보는 눈이 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더랍니다.

    "별일 아니었소. 과거 보러 한양 가던 길에, 눈 속에 쓰러진 노인을 업고 사흘 지키다 과거를 놓쳤을 뿐이오. 허허, 그 노인 양반 까다롭기가 이를 데 없었지요. 죽을 쑤어 드리면 싱겁다, 불을 피우면 연기 난다, 말끝마다 트집이었소. 그런데도 이상하게 밉지가 않더이다. 떠나던 날 아침엔 인사도 없이 사라져서 한참 서운했지요."

    염라대왕은 아무 말 없이 명부를 다시 펼쳤어요. 그리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붉은 금박 봉인을 쓸어내렸지요.

    스르르.

    봉인이 벗겨지며, 사십 년 동안 잠들어 있던 한 줄이 모습을 드러냈더랍니다.

    그 글을 읽는 대왕의 눈이 붉게 젖어 들었어요.

    사십 년 전, 문경새재.

    삼월인데도 난데없는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이었지요.

    ※ 5: 사십 년 전 문경새재

    스물세 살의 방두학은 봇짐 하나 달랑 메고 문경새재를 넘고 있었더랍니다.

    봇짐 속엔 아버지가 논 한 마지기를 팔아 마련해 준 노잣돈과, 밤새 닳도록 읽은 책 몇 권이 들어 있었지요.

    '이번엔 꼭 붙어야 한다. 아버지 논 판 값은 해야지.'

    그런데 고갯마루를 넘어설 즈음, 눈보라 속에 시커먼 무언가가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어요. 가까이 가 보니, 누더기를 걸친 늙은 거지였지요. 눈이 벌써 어깨까지 소복이 쌓여 있었어요.

    그 곁으로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줄줄이 지나갔더랍니다. 흘끔 보고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 혀를 차는 사람, 아예 고개를 돌리는 사람.

    "에이, 재수 없게. 과거 길에 송장을 보다니."

    그런데 딱 한 사람. 방두학만이 걸음을 멈췄지요.

    "노인장! 정신 차리시오!"

    뺨을 두드리자 노인이 가늘게 눈을 떴어요. 그러고는 쉰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내뱉었지요.

    "…날 두고 가게. 자네 과거 늦겠네."

    "과거는 삼 년 뒤에도 있소. 허나 노인장 목숨은 지금 한 번뿐이오."

    방두학은 노인을 들쳐 업었더랍니다. 눈길에 몇 번이나 미끄러지고 무릎이 깨졌지만, 기어이 고개 아래 버려진 숯막까지 업어 날랐지요. 그러고는 노잣돈을 털어 산 아래 주막에서 쌀을 사다 죽을 쑤고, 제 솜옷을 벗어 노인을 덮어 주었어요.

    둘째 날 밤엔 노인의 열이 불덩이처럼 끓어올랐지요. 방두학은 밤새 눈을 녹여 물수건을 갈고, 제 등으로 문틈 바람을 막으며 꼬박 앉아 있었더랍니다. 새벽녘, 노인이 헛소리처럼 물었어요.

    "자네는… 왜 멈췄나? 다들 지나가던데."

    "모르겠소. 그냥 발이 멈춰졌소. 멈추고 나니 차마 그냥 갈 수가 없었고."

    그런데 이 노인, 열이 내리자마자 트집이 시작됐더랍니다.

    "죽이 싱겁구먼."

    "소금이 귀해서 그렇소. 참고 드시오."

    "불에서 연기가 나서 눈이 맵네."

    "생나무라 그렇소. 눈 감고 드시오."

    그렇게 투닥거리며 사흘 밤을 보냈지요. 그리고 셋째 날 밤, 화톳불 앞에서 노인이 불쑥 물었어요.

    "자네, 세상 이치 하나 물어보세. 죄를 지은 놈은 법대로 벌을 받아야 마땅하겠지?"

    "마땅하지요."

    "그럼 굶주려서 떡 하나 훔친 놈도 벌을 받아야겠구먼. 법에 도둑은 도둑이라 했으니."

    방두학은 장작을 하나 던져 넣으며 고개를 저었더랍니다.

    "노인장. 벌은 사람을 고치려고 있는 거요. 굶어서 떡을 훔친 놈한테 곤장을 치면 배가 부르겠소? 도로 굶을 테니 또 훔치겠지요. 그놈을 고치는 건 곤장이 아니라 밥이오. 사람을 고치지 못하는 벌은 앙갚음일 뿐이오."

    "허, 법은 법이야. 사정 봐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

    "그러니까 법을 쓰는 사람이 무거운 거지요. 법은 읽기만 하면 누구나 판관이 되오. 허나 사람을 읽을 줄 알아야 진짜 판관이오. 한 번 멈춰 서서, 이 사람이 왜 그랬는지 생각해 보는 것. 그게 바를 정 자의 뜻 아니겠소?"

    노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더랍니다. 화톳불만 탁탁 튀었지요.

    한참 뒤, 노인이 픽 웃었어요.

    "자네한테 졌네. 내가 오늘 젊은 선비한테 졌어."

    "하하, 이기고 지고가 어디 있소."

    "그럼 하나만 더 묻세. 자네 소원이 뭔가? 벼슬인가, 재물인가?"

    방두학은 잠시 불을 들여다보다 대답했더랍니다.

    "억울한 사람이 억울하다고 말할 데가 있는 세상이오. 그거면 되오."

    "그 소원, 내 잊지 않겠네. 그리고 약조 하나 하세. 훗날 자네가 옳다 하는 날이 오거든, 내가 자네 앞에 무릎을 꿇겠네."

    "아이고, 노인장이 무릎 꿇으시면 내가 곤란하오. 그냥 오래 사시오."

    다음 날 아침, 방두학이 눈을 떴을 때 노인은 온데간데없었지요. 숯막 밖 눈밭에는 발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고, 개어 놓은 솜옷 위에 마른 매화 한 가지만 놓여 있었더랍니다.

    과거 날짜는 이미 지나 있었어요. 빈손으로 돌아온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한숨만 쉬셨고, 이듬해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방두학은 다시는 과거 길에 오르지 못했지요. 논 판 빚을 갚고 동생들 거두느라 평생 가난한 훈장으로 늙어 간 거예요.

    그 사흘 일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더랍니다. 훗날 설씨 부인이 왜 그때 과거를 못 봤느냐 물으면, 방두학은 그저 멋쩍게 웃으며 이렇게만 대답했지요.

    "늦잠을 잤소."

    "아이구, 그 늦잠 한 번에 우리 팔자가 이리 됐구먼!"

    부인의 타박에도 방두학은 끝내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어요. 자랑하려고 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 까다로운 거지 노인이 대체 누구였을까요?

    다시, 저승 심판정.

    염라대왕이 명부를 든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더랍니다.

    "사십 년 전, 짐은 인간 세상에 선한 마음이 아직 남아 있는지 보려고 거지 행색으로 내려갔었다. 눈 속에 쓰러져 사흘을 기다렸지. 그 사흘 동안 나를 보고 지나간 선비가 삼백 하고도 스물이었다."

    심판정이 쥐 죽은 듯 조용했어요.

    "딱 한 사람이 멈췄다. 그 한 사람이 짐에게 법을 가르쳤다. 짐은 저승으로 돌아와 그 약조를 이 명부에 적고 봉인했지. 그런데 삼천 년 억만 줄의 판결 속에… 그만 그 한 줄을 잊고 말았구나."

    대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 한 줄을 읽어 내려갔어요.

    "괴산 방두학. 이 사람이 옳다 하는 날, 짐이 그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문경새재 숯막에서, 염라."

    방두학의 눈이 휘둥그레졌지요.

    "그, 그럼 그 트집쟁이 노인이…"

    그 순간이었더랍니다.

    염라대왕이 옥좌에서 한 계단, 또 한 계단 내려오더니, 방두학 앞에 섰어요. 그리고 진홍빛 곤룡포 자락을 펼치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릎을 꿇었지요.

    "짐이 삼천 년 동안 법을 읽기만 했지, 사람을 읽지 못했다. 선비여, 오늘 그대가 옳다."

    와. 여러분, 이게 상상이 되세요?

    저승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염라대왕의 무릎이 심판정 바닥에 닿은 거예요. 판관도, 차사도, 옥졸도, 줄 선 넋들도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었지요. 늙은 차사 해월의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더랍니다.

    풋내기 차사 먹쇠는 넋이 나간 얼굴로 해월의 소매를 붙잡았어요.

    "선배님… 우리가 저 양반을 쇠사슬로 끌고 온 거 맞죠? 우리 괜찮은 거 맞죠?"

    "…쉿. 조용히 해라, 이놈아."

    ※ 6: 되돌려 보내진 선비

    "아이고, 마마! 일어나시오, 어서!"

    정작 제일 당황한 건 방두학이었더랍니다. 허둥지둥 대왕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며 쩔쩔맸지요.

    "내 그때 뭐라 했소. 노인장이 무릎 꿇으시면 내가 곤란하다 하지 않았소!"

    그 말에 무릎을 털고 일어선 염라대왕이,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껄껄 소리 내어 웃었더랍니다. 심판정 기둥이 흔들릴 만큼 시원한 웃음이었지요.

    옥좌로 돌아간 대왕은 붉은 붓을 들어 명부 법 제칠조를 한 획 한 획 고쳐 썼어요.

    "오늘부터 명부의 모든 판관은 죄목을 읽기 전에 사연부터 읽으라. 부모보다 먼저 온 자식이라도, 그 까닭이 남을 살리기 위함이었다면 불효가 아니라 효로 적으라!"

    그러고는 차례로 판결을 다시 내렸더랍니다.

    충주 순례 아낙은 한빙지옥 대신 극락 연화대로. 그 대신 한 말 꾸어 주고 석 말 뜯어 간 조 부자의 명부에는 붉은 줄이 굵게 그어졌지요. 청주 머슴 억만이는 소를 살린 공덕으로 다음 생에 너른 목장 주인으로 태어나게 되었고요.

    그리고 칠복이.

    "괴산 칠복이. 누이를 살린 공덕으로 끊어진 명을 다시 잇는다. 돌아가 부모 곁에서 오래 살아라."

    칠복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지, 지옥 안 가유? 집에 가유?"

    "그래, 이놈아. 집에 가서 엄니 아부지한테 효도나 실컷 하거라."

    방두학이 칠복이 머리를 꾹 누르며 웃었지요.

    염라대왕이 이번엔 방두학을 내려다봤어요.

    "선비. 그대는 이곳에 남아 짐의 판관이 되어 주지 않겠는가? 그대 같은 판관이 있다면 저승에 억울한 넋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심판정이 술렁였어요. 저승 판관이라니, 이보다 큰 벼슬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방두학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더랍니다.

    "황공하오나 사양하겠소. 우리 서당 아이들 천자문을 아직 다 못 뗐고, 무엇보다 우리 부인한테 은비녀 하나는 도로 사 드려야 하오. 그 빚을 두고 여기 앉아 있으면, 판관 자리가 가시방석일 것이오."

    "허허, 끝까지 고집이로구나."

    "그래서 방고집 아니오."

    대왕은 붓을 들어 방두학의 명부에 열두 해를 더 적어 넣었더랍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지요.

    "아, 그리고 저승길 돌부리는 짐이 내일 당장 치우라 이르겠다. 그대가 한마디 하겠다 벼르던 참 아니었느냐."

    해월과 먹쇠가 킥킥 웃음을 참으며 두 사람을 이승으로 데려다주었어요.

    이승 문턱에서 먹쇠가 쭈뼛쭈뼛 물었지요.

    "선비님, 나중에 또 모시러 갈 때는… 문서 꼭 챙겨 갈게요."

    "그래라. 이번엔 글씨도 반듯하게 써 오너라."

    해월은 방두학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더랍니다.

    "사백 년 차사 노릇에, 오늘처럼 부끄럽고 기쁜 날은 처음이오."

    한편 연풍골 방두학네 초가.

    장례 사흘째, 출상하는 날이었지요. 마당엔 마을 사람들이 빼곡히 모였고, 설씨 부인은 관 앞에서 목이 쉬도록 울고 있었더랍니다. 담 너머에선 윤 현감이 보낸 이방이 비실비실 웃으며 구경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그때였어요.

    관 속에서 쿵, 쿵, 소리가 나더니 뚜껑이 들썩, 하고 열리는 거예요!

    "으아아악!"

    상여꾼들이 사방으로 나자빠지고, 이방은 담장에서 굴러떨어졌지요. 관 속에서 일어난 방두학이 부스스한 얼굴로 한마디 했더랍니다.

    "부인, 곡소리가 왜 이리 작소? 저승까지 하나도 안 들리던데."

    설씨 부인은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가, 정신이 들자마자 방두학의 등짝을 퍽퍽 두드렸어요.

    "이 영감탱이야! 죽으려면 곱게 죽든가, 살려면 진작 살든가! 사람 간 떨어지게!"

    두드리는 손은 매웠는데, 우는 얼굴은 세상에서 제일 환하게 웃고 있었지요.

    같은 날 해 질 녘, 달래강 아랫마을에서도 곡소리가 환호성으로 바뀌었어요. 차마 묻지 못하고 사흘을 끌어안고 있던 칠복이가 콜록, 물을 토하며 눈을 떴다지 뭐예요. 다섯 살 분이가 오라버니 손을 붙잡고 온 동네가 떠나가라 엉엉 울었다지요.

    그날 밤, 윤치삼 현감은 이상한 꿈을 꾸었더랍니다. 검은 도포의 늙은 차사가 커다란 거울을 들이밀었는데, 거울 속엔 그가 모래 섞어 내준 환곡과 억지로 받아 간 군포, 그 때문에 울던 과부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비치는 거예요.

    "네 송덕비가 설 자리는 연풍골이 아니라 저승 칼산이다. 이레 안에 뜯어 간 것을 모두 돌려놓지 않으면 데리러 오겠다."

    윤 현감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고, 이레 동안 곳간을 열어 빼앗은 곡식과 군포를 모두 돌려주었지요. 그러고도 겁에 질려 스스로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도망치듯 떠났더랍니다.

    송덕비를 세우려던 자리엔 커다란 빈 돌만 덩그러니 남았어요. 마을 사람들이 방두학을 찾아왔지요.

    "훈장님, 이제는 써 주셔야겠어유. 훈장님 공덕비로다가."

    "허허, 내 이름은 안 되오."

    방두학은 붓을 들어 그 돌에 딱 한 글자를 크게 썼더랍니다.

    바를 정(正).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이렇게 새겼지요. 한 번 멈춰 서서, 사람을 읽으라.

    며칠 뒤, 칠복이 부모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찾아왔어요. 풀어 보니 설씨 부인이 장에 내다 판 바로 그 은비녀였지요. 수소문 끝에 도로 사 온 거였어요.

    방두학은 그 비녀를 부인 머리에 손수 꽂아 주었더랍니다.

    "부인. 빚 하나는 갚았소."

    "…이 고집불통 영감."

    그 뒤로 방두학은 열두 해를 더 살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일흔다섯이 되던 해, 다시 문지방에 검은 도포의 늙은 차사가 나타났지요.

    방두학은 누운 채 손을 척 내밀었더랍니다.

    "문서부터 보이시오."

    해월 차사가 껄껄 웃으며 적패지를 내밀었어요. 이번엔 그 끝에 한 줄이 더 적혀 있었지요.

    염라국 제일 판관으로 모셔 오라.

    그렇게 방고집 선비는 저승에서도 억울한 넋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판관이 되었답니다. 이의 있소, 그 한마디가 오늘도 어느 심판정에선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을지 모르지요.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나요? 쌀 스무 섬보다 붓 한 자루의 떳떳함을 택한 방고집 선비. 눈보라 속에서 모두가 지나칠 때 홀로 멈춰 선 그 한 걸음이, 사십 년 뒤 염라대왕의 무릎을 꿇렸습니다. 한 번 멈춰 서서 사람을 읽으라는 말, 오늘 하루 우리 곁의 누군가에게도 건네 보면 어떨까요. 이야기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리고,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도 나눠 주세요. 다음 이야기에서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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