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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원한이 깨어나는 밤, 이승에 열린 지옥문 - 염라대왕의 비밀 심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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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칠흑 같은 한양의 깊은 밤,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떠돌 때 하늘이 열리고 땅이 갈라지며 염라대왕의 비밀 재판소가 세워집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무너진 그곳에서 살아생전 지은 악행의 대가를 치르는 무시무시한 심판이 시작됩니다. 오늘 밤, 언젠가 우리도 서게 될지 모를 그 서늘하고도 정의로운 저승의 재판정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1: 안개 속에서 깨어나는 원혼들
조선 한양의 밤, 칠흑 같은 어둠이 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하늘을 유유히 거닐던 달빛마저 먹구름 뒤로 꽁꽁 숨어버렸고, 세상은 오직 깊고 서늘한 그림자들만이 지배하는 왕국으로 변해 있었다. 평소라면 멀리서 들려올 개 짖는 소리조차 뚝 끊긴 채, 바람조차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이따금 낡은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적막을 가르며 음산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마을 어귀에는 스멀스멀 기분 나쁜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보통의 안개와는 확연히 달랐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차갑고 음습한 기운을 가득 품고 있었으며, 안개 저편에서 들려오는 희미하고 구슬픈 울음소리가 잠자리에 든 마을 사람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들리지 않소? 저... 저 울음소리 말이오."
잠에서 번쩍 깬 백발의 노인이 이불깃을 꽉 움켜쥔 채,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목소리로 옆에 누운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방 안의 공기는 한겨울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유, 영감. 또 헛것을 들으신 게지요. 바람 소리일 터이니 어서 눈이나 붙이시구려."
노파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돌아누웠지만, 그녀의 목소리 끝에도 숨길 수 없는 불안함이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노파 역시 문밖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기척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마을 어귀를 짙게 뒤덮은 안개 속에서 하얀 형체 하나가 스르륵 배어 나오듯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소복 차림의 여인이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 위로, 두 눈에서는 붉은 핏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공을 맴도는 듯한 여인의 발걸음 뒤로, 또 다른 형체들이 하나둘씩 안개를 뚫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듯 목에 끔찍한 흉터가 남은 사내, 온몸이 시퍼런 멍과 상처투성이인 백발의 노인, 그리고 마치 방금 물에서 건져낸 듯 뚝뚝 물을 흘리며 걸어오는 어린아이까지. 그들은 모두 이승에 깊은 한을 남기고 떠나지 못한 원혼들이었다.
"오늘이... 기어코 그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마을 외곽에 외로이 살고 있던 나이 든 무당이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방문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문풍지 위에 붉은 부적을 겹겹이 덧붙였다.
"십 년에 딱 한 번,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이승의 문턱을 넘어 모여드는 원한의 밤... 오늘 밤엔 절대 문밖을 나서선 안 돼."
무당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마을 전체가 숨죽인 그 순간 저 멀리서 육중한 징소리가 밤하늘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뎅, 뎅. 그것은 한양 도성의 통금을 알리는 삼경의 종소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진동을 타고 올라오는 듯, 더 깊고 더 무거우며 뼛속을 울리는 소리였다. 마치 저승의 한복판에서 이승을 향해 내리치는 듯한 그 소리에, 안개 속을 헤매던 백여 명의 원혼들이 일제히 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소리다... 드디어 우리의 억울함을 들어줄 그분이 오시는구나.'
원혼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들의 움직임은 더 이상 목적 없이 방황하는 듯 보이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이끌리듯, 백여 명의 원혼들이 줄을 지어 한 방향을 향해 조용히 미끄러지듯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한양 외곽, 수년 전 원인 모를 큰 화재가 나 모두가 떠나버린 흉흉한 폐관아였다. 불에 검게 그을린 굵은 기둥과 절반쯤 무너져 내린 담벼락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는 그 흉가에, 희고 검은 형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아가... 거긴 가면 안 돼. 이 에미한테 돌아오렴..."
생전의 기억을 잃지 못한 어느 어머니의 원혼이, 앞서 걸어가는 작은 소복 차림의 아이를 향해 애타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창백한 손은 헛되이 밤공기만을 갈랐을 뿐,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폐관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살아생전 탐관오리의 수탈에 굶어 죽은 자들, 권력자의 탐욕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자들, 누군가의 끔찍한 악행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세상을 떠난 이들. 저마다 가슴에 서슬 퍼런 원한의 칼날을 품은 그들은, 오직 오늘 이 밤만을 기다려왔다.
적막에 휩싸인 관아 마당에 모인 원혼들의 얼굴에는 슬픔과 원망, 그리고 기묘한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십 년이라는 긴 세월, 구천을 떠돌며 견뎌야 했던 고통의 시간들이 오늘 밤 비로소 끝날지도 모른다는 간절함이었다.
※ 2: 저승문의 개방과 염라대왕의 강림
폐관아 안마당에 원혼들이 가득 들어찬 그때, 숯덩이처럼 타버려 흉물스럽던 대청마루 한가운데서 갑자기 기이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딧불이처럼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더니, 이내 그 빛이 맹렬히 타오르며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광채를 뿜어냈다. 서늘한 바람이 휘몰아치며 썩은 나뭇가지들이 허공으로 흩날렸고, 눈부신 푸른빛 속에서 믿을 수 없는 형상들이 하나둘 위용을 드러냈다.
검게 그을린 마루 위로 거대한 흑단나무 재판대가 솟아올랐고, 그 뒤로는 붉은 비단이 드리워진 높다란 의자가 허공에서 뚝 떨어진 듯 자리 잡았다. 의자 옆으로는 수천, 수만 명의 이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을 법한 거대한 장부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탁자가 놓였다. 타버린 폐관아가 순식간에 웅장하고도 섬뜩한 저승의 비밀 재판소로 탈바꿈한 것이다.
바로 그 시각, 과거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고 울적한 마음에 밤술을 마신 뒤 집으로 향하던 한 젊은 선비가 폐관아 앞을 지나고 있었다.
'이 한밤중에 저 버려진 관아에서 어찌 저리 환한 빛이 나는고? 도적 떼라도 든 것인가?'
술기운에 호기심이 동한 선비는 발소리를 죽인 채 무너진 담장 너머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선비는 숨이 턱 막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환하게 빛나는 마루 아래,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달빛조차 투과할 듯 반투명하고 창백한 백여 개의 얼굴들. 피를 흘리고, 사지가 꺾이고, 텅 빈 눈동자로 마루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끔찍한 원혼들이었다.
"헉... 귀... 귀신들이..."
선비가 뒷걸음질을 치다 마른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그 순간, 가장 뒤에 서 있던 목이 잘린 사내의 원혼이 휙 고개를 돌려 선비를 노려보았다.
"이곳에 살아있는 자의 숨결이 닿다니..."
잘린 목 단면에서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원혼이 스르륵 다가왔다. 선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머릿속이 하얘지며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던 찰나였다.
"살아있는 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좋은 때에 발걸음을 하였구나."
폐관아 전체를 뒤흔드는 깊고 무거운 목소리. 바닥의 흙먼지가 파동을 일으킬 정도로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원혼들이 일제히 땅에 엎드려 조아렸다. 선비 역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벌벌 떨며 눈알만 굴려 위를 쳐다보았다.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붉은 비단 의자 위에, 산처럼 거대한 체구를 가진 자가 앉아 있었다. 칠흑 같은 검은 갑옷을 두르고, 붉은 구릿빛 얼굴에 턱수염을 길게 기른 사내. 그의 두 눈에서는 진짜 푸른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며, 거대한 손에는 '생사부(生死簿)'라 적힌 두꺼운 명부가 쥐어져 있었다. 이승의 인간 세상에 저승의 왕, 염라대왕이 강림한 것이다.
"오늘 밤 벌어질 저승의 정의로운 심판을, 살아있는 네가 똑똑히 지켜보고 이승에 전하는 증인이 되거라."
염라대왕의 호통에 선비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염라대왕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엎드린 원혼들을 굽어보았다.
"십 년에 단 한 번, 망자와 산 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오늘 밤. 억울하게 이승을 떠돌던 자들이여, 그대들의 피맺힌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본왕이 직접 이곳에 강림하였노라!"
염라대왕이 쥐고 있던 생사부를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자,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관아 마당 한가운데가 쩍 하고 갈라졌다. 쩍 벌어진 땅의 틈새로 핏빛처럼 붉은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고, 유황 냄새와 함께 지옥 깊은 곳에서 고통받는 망자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옥문이 열린 것이다.
"저승사자들은 듣거라! 첫 번째 심판의 대상을 지옥문 너머에서 끌어올려라!"
염라대왕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굴 전체를 검은 삿갓과 천으로 가린 네 명의 저승사자가 지옥문의 붉은 빛 속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그들의 손에는 죄인의 영혼을 옭아매는 시뻘건 쇠사슬이 들려 있었다. 저승사자들이 지옥문 안으로 쇠사슬을 내던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무거운 것이 끌려 올라오는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포박을 해! 나는 한양 포도청의 포도대장 조학도다!"
오만한 고함 소리와 함께, 화려한 관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씩씩거리며 고개를 들다, 주위를 둘러싼 수백 명의 원혼들과 거대한 염라대왕의 모습을 보고는 순식간에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려버렸다.
"조학도."
염라대왕이 불꽃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굽어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끝없는 탐욕과 잔혹한 손아귀에 스물셋이라는 무고한 목숨이 쓰러졌다. 오늘 밤, 그 피눈물을 흘린 자들 앞에서 네놈의 끔찍한 죄를 낱낱이 심판하리라."
'이건 꿈이다. 암, 끔찍한 악몽일 뿐이야.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게야.'
조학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내리쳤지만, 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만이 생생할 뿐 눈앞의 광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염라대왕이 비웃듯 말했다.
"꿈이라 생각하느냐? 네놈은 지금 잠들어 있으나, 네 영혼만을 육신에서 강제로 뽑아내어 이 자리에 무릎 꿇린 것이다. 자, 이제 변명할 틈도 없는 심판을 시작하겠다."
※ 3: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탐관오리
염라대왕이 펼친 생사부의 한 페이지에서 붉은 글씨들이 공중으로 떠올라 허공을 맴돌았다. 조학도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이내 눈동자를 굴리며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평생을 권모술수와 거짓말로 살아온 자답게, 저승의 왕 앞에서도 뻔뻔함을 잃지 않으려 발악을 했다.
"대왕마마! 억울하옵니다! 소인은 그저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 국법을 엄격히 집행했을 뿐이옵니다. 저기 저 귀신들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일지 모르나, 다들 죄를 짓고 마땅한 벌을 받은 자들이옵니다!"
조학도의 뻔뻔한 외침에, 엎드려 있던 원혼들 사이에서 분노에 찬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그중, 목에 깊고 붉은 상처가 선명하게 남은 여인의 원혼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이 악독한 자여... 어찌 저승의 왕 앞에서도 거짓을 혓바닥에 올리는가!"
여인이 핏물이 흐르는 눈으로 조학도를 노려보며 염라대왕을 향해 엎드렸다.
"대왕마마,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이 자는 제 지아비가 평생을 모아 이룬 재산을 탐내어, 있지도 않은 역모의 증거를 날조해 저희 가문을 멸문지화에 이르게 하였나이다. 제 남편은 잔혹한 고문 끝에 목이 잘렸고, 저는 이 자의 능욕을 피하려다 스스로 목을 찔러 생을 마감하였나이다."
여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노인의 원혼이 뼈만 남은 손으로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옵니다! 소인은 시장 바닥에서 작은 포목점을 하였사온데, 이 자가 요구한 터무니없는 뇌물을 바치지 못하자 저를 도적으로 몰아 포도청 지하 감옥에서 때려죽였나이다. 제 아내는 충격에 피를 토하고 죽었고, 어린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 거렁뱅이가 되었나이다!"
원혼들의 증언이 하나둘 이어질 때마다, 조학도의 턱은 덜덜 떨렸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자신이 아무리 하찮게 여겨 짓밟았던 벌레 같은 목숨들이라 여겼건만, 그들이 저승에 와서 이토록 생생하게 자신을 정조준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모함이옵니다! 이승에서 죄를 짓고 죽은 자들이 저승에 와서 소인에게 앙심을 품고..."
"그 입 다물라!"
염라대왕이 벼락같은 호통을 치자, 조학도의 입이 쩍 벌어진 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염라대왕이 손을 가볍게 휘젓자, 관아 마당 한가운데에 짙은 안개가 소용돌이치더니 생생한 환영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환영 속에는 조학도가 은밀한 방에서 거상의 뇌물을 받으며 간사하게 웃는 모습, 뇌물을 주지 않은 무고한 양민들을 형틀에 묶어놓고 불에 달군 인두로 직접 살을 지지는 끔찍한 모습, 그리고 방금 증언한 여인의 집에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가 거짓 서찰을 숨겨놓고는 역모라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고스란히 재생되고 있었다.
"이곳 저승에서는 모든 진실이 형태를 갖추어 나타나는 법. 네놈이 어둠 속에서 저지른 악행조차 명부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다!"
환영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조학도는 마침내 저항할 의지를 잃고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살... 살려주시옵소서! 제가 재물에 눈이 멀어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제발 목숨만은..."
염라대왕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네가 목숨을 구걸하느냐? 네 놈의 손에 죽어간 저 원혼들도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너에게 목숨을 구걸했으리라. 죄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옵니다... 모두 소인의 죗값이옵니다..."
조학도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절규했다. 염라대왕이 붓을 들어 생사부에 붉은 먹물로 무언가를 힘주어 써 내려갔다.
"조학도, 너의 죄는 수백 번 지옥불에 떨어져도 씻을 수 없을 만큼 무겁도다. 허나, 너는 아직 육신이 이승에 살아있는 자. 저승의 법도에 따라 네놈에게 마지막 열흘의 시간을 주겠노라."
조학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지옥행을 면했다는 얄팍한 안도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염라대왕의 불꽃 같은 눈동자가 더욱 무섭게 타올랐다.
"착각하지 말라. 십 일 안에 네가 억울하게 빼앗은 모든 재산을 원래의 주인이나 그 유족들에게 돌려주고, 네놈이 날조한 거짓 죄들을 스스로 이승의 법정에 낱낱이 고하여 멸문당한 가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라. 만약 그 열흘 동안 진심으로 속죄하여 이 모든 것을 되돌려 놓지 못한다면..."
염라대왕이 손가락을 튕기자, 조학도의 어깨 위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쇠사슬 십자가가 낙인처럼 새겨지며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으아아악!"
"열흘째 되는 밤 자정, 저승사자들이 이승으로 넘어가 네 영혼의 가죽을 벗겨 지옥 가장 밑바닥, 무간지옥의 끓는 가마솥에 영원히 던져버릴 것이다. 명심하라, 열흘이다!"
염라대왕이 소리치자 네 명의 저승사자가 달려들어 발버둥 치는 조학도의 사지를 꿰고 지옥문 안으로 무자비하게 끌고 들어갔다. 조학도의 비명 소리가 붉은 빛 속으로 까마득히 멀어져 갔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선비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마른침을 삼켰다. 살아생전 벌인 악행의 대가가 이토록 서늘하고도 철저하게 심판받는다는 사실에,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경외감이 차올랐다.
"다음 죄인을 불러들여라."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관아 마당을 무겁게 울렸다.
※ 4: 탐욕에 눈이 멀어 가족을 멸한 여인
염라대왕이 쥐고 있던 거대한 생사부의 두 번째 페이지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그 순간, 폐관아 마당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을 듯 차가워졌고, 살을 에는 듯한 날카로운 삭풍이 한바탕 회오리치며 휘몰아쳤다. 지옥문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빛마저 차가운 푸른색으로 물드는 듯했다. 마당에 엎드려 있던 원혼들이 일제히 몸을 부르르 떨며 기이한 신음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숨을 죽이고 마루 밑에 웅크려 있던 선비 역시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두 번째 죄인을 심판하겠노라. 박씨 문중의 안주인, 박소진. 자신의 지아비에게 독을 타서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시아비마저 독살하여 가문을 피로 물들인 극악무도한 죄인이다!"
염라대왕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지옥문 안으로 뛰어들었던 저승사자들이 다시 쇠사슬을 끌어당기며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쇠사슬에 묶여 끌려 나온 자는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몹시도 단아하고 기품 있는 차림의 여인이었다. 최고급 비단 치마를 두르고 머리에는 화려한 비녀를 꽂은 그녀는, 앞서 끌려 나와 발악하던 포도대장 조학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수백 명의 원혼이 뿜어내는 섬뜩한 기운 앞에서도, 심지어 저승의 왕 앞에서도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저승이옵니까. 대왕마마께 삼가 인사 올리옵니다."
여인은 쇠사슬에 묶인 채로도 아주 우아하고 정중하게 무릎을 굽혀 절을 올렸다. 그녀의 그토록 태연하고 뻔뻔한 태도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원혼들 사이에서 거센 술렁임이 일었다.
'어찌 저리도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진정 죄를 짓지 않아 떳떳한 것인가, 아니면 지독한 악귀라 두려움을 모르는 것인가.'
숨어서 지켜보던 선비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훔치며 혼란스러움에 빠졌다.
"박소진. 그대는 자신이 지은 끔찍한 죄악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태연하게 고개를 들 수 있단 말이냐?"
염라대왕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왕마마, 억울하옵니다. 소녀는 그저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평생을 헌신하며 살았을 뿐,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사옵니다. 제 지아비는 평소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뜬 것이고, 시아버님 역시 연로하신 탓에 노환으로 자연스레 눈을 감으신 것뿐이옵니다. 어찌 며느리인 제가 그분들을 해치겠사옵니까?"
여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맑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염라대왕의 두 눈에서 마침내 시퍼런 불꽃이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승의 심판정에서는 그 어떤 간악한 거짓도 통하지 않는다고 일렀거늘, 네년이 끝까지 세 치 혀로 하늘을 가리려 드는구나!"
염라대왕이 탁자를 강하게 내리치자, 생사부에서 짙은 붉은 연기가 피어올라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내 그 연기들이 마당 한가운데로 모여들더니 하나의 커다란 환영을 만들어냈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은밀한 부엌방. 환영 속의 박소진은 지금의 우아한 모습과는 달리 독기가 서린 서늘한 눈빛으로 탕약에 정체불명의 흰 가루를 털어 넣고 있었다. 그리고는 병석에 누워 헐떡이는 남편의 입에 억지로 그 탕약을 들이붓고, 남편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어서 시아버지의 밥상에 오를 국에 똑같은 가루를 타는 장면까지 선명하게 펼쳐졌다.
환영이 눈앞에 생생하게 재생되자 여인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를 허물지 않았다.
"저것은 환상이옵니다! 악귀들이 저를 모함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기루일 뿐이옵니다. 소녀는 결단코 그런 패륜을 저지른 적이 없사옵니다!"
"아직도 뉘우침이 없구나. 그렇다면 네가 남에게 먹인 그 고통을 네 몸으로 직접 느껴보아라!"
염라대왕이 손을 들어 허공을 향해 거세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여인의 낯빛이 잿빛으로 변하더니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틀어막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으윽...! 커헉...!"
그녀의 입과 코에서 시커먼 독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여인은 화려한 비단 치마가 흙투성이가 되는 것도 잊은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것이 바로 네년이 남편과 시아비에게 먹인 그 독의 고통이다. 어떠하냐, 이승에서 남의 목숨을 앗아갈 때는 몰랐던 그 타는 듯한 쓴맛이!"
여인은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흙바닥을 긁어대며 몸부림쳤다. 원혼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오히려 차가운 눈빛으로 그 끔찍한 광경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염라대왕이 손을 거두자 검은 연기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여인은 산발이 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술은 검게 타들어가 있었고, 두 눈에는 마침내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고... 고백하겠사옵니다... 제가... 제가 탕약에 독을 탔사옵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여인이 마침내 자신의 죄를 토해냈다.
"도대체 무슨 원한이 그리 깊어 인륜을 저버린 끔찍한 짓을 저질렀느냐!"
"그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사옵니다..." 여인이 독기 어린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제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가문의 재산을, 남편이라는 작자는 젊은 첩년을 들여 모두 넘겨주려 하였사옵니다. 시아버지라는 작자는 아들의 외도를 꾸짖기는커녕 늙고 병든 저를 내쫓으려 하였지요! 제 자리를, 제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둘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그녀의 악에 받친 항변이 끝나기 무섭게, 원혼들 사이에서 두 명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한 명은 단정한 선비 차림의 중년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입가에 검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독부... 이 끔찍한 독부야..." 중년 사내가 원망에 찬 목소리로 여인을 불렀다. "네년의 끝없는 탐욕이 나를 질리게 하여 첩실을 들인 것을... 어찌 나를 독살하고, 아버님마저 그리 끔찍하게 돌아가시게 한단 말이냐. 내 혼은 십 년째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구천을 떠돌았다!"
노인의 원혼 역시 지팡이를 부들부들 떨며 여인을 가리켰다.
"내 아들을 죽인 것도 모자라, 내 목숨까지 앗아간 천하의 몹쓸 것! 네년이 우리 가문의 씨를 말렸구나!"
남편과 시아버지의 원혼을 마주한 박소진은 그제야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용서해주시옵소서... 제가 재물에 눈이 멀어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시옵소서!"
"용서란 피해자만이 입에 올릴 수 있는 것. 네년의 죄는 결단코 가벼워질 수 없다!" 염라대왕이 준엄하게 선고를 내렸다.
"박소진, 너 역시 아직 이승에 육신을 두고 있는 자. 앞서 처벌받은 조학도와 마찬가지로 십 일의 유예를 주겠노라. 십 일 안에 네가 저지른 모든 끔찍한 살인과 죄악을 세상에 스스로 고하고, 빼앗은 가문의 재산을 쫓아낸 첩실의 자식과 정당한 상속자들에게 모두 돌려주어라!"
여인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그... 그리하면 저는 이승의 국법에 따라 참수를 당할 것이옵니다! 감옥에서 목이 잘려 죽게 될 것이옵니다!"
"그것이 이승의 법이라면 기꺼이 네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염라대왕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만약 십 일 안에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스스로 죗값을 치르지 않는다면, 열흘째 되는 날 저승사자가 네 영혼을 갈가리 찢어 영원토록 독사가 우글거리는 지옥 연못에 처넣을 것이다. 평생을 살과 뼈가 독에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서 뒹굴게 될 것이니라!"
더 이상 항변할 기력조차 잃은 여인은 절망에 빠진 채 바닥에 쓰러졌다. 저승사자들이 그녀의 목에 다시 쇠사슬을 걸고 무자비하게 지옥문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끌려가는 내내 그녀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관아 마당에는 다시금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숨죽여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선비의 가슴 속에는 이제 두려움을 넘어선, 저승의 준엄한 정의에 대한 깊은 경외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 5: 거짓된 주술로 어린 영혼을 탐한 무녀
여인이 끌려간 직후, 관아 마당을 무겁게 짓누르던 적막을 깨고 어디선가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훌쩍훌쩍. 흑흑. 그것은 처음에 바람 소리처럼 미약하게 시작되더니, 이내 여러 겹으로 겹쳐지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한 구슬픈 울음소리로 변해갔다. 선비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다 큰 어른의 울음이 아니었다. 세상의 때를 타지 않은, 어미 품을 파고들어야 할 어린아이들의 서럽고도 고통스러운 울음소리였다.
"이제 오늘 밤의 마지막 심판 대상을 불러들이겠노라."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낮고 육중하게 깔렸다. 그의 두 눈에서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이번에는 검붉은 색으로 변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극도의 분노가 서려 있는 모습이었다.
"거짓된 주술로 신령을 모독하고, 재물을 탐내어 무고한 어린 영혼 일곱을 제물이라는 명목하에 잔혹하게 살해한 악귀 같은 자, 무녀 금월을 끌어내라!"
지옥문 속으로 몸을 던졌던 저승사자들이 이번에는 아주 거칠게 쇠사슬을 당기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쇠사슬 끝에는 화려하고 기괴한 색동 무복을 입은 오십 대 중반의 여인이 짐짝처럼 매달려 있었다. 치켜올라간 날카로운 눈매와 붉게 칠한 입술이 범상치 않은 사기를 뿜어내는 자였다. 무녀 금월은 바닥에 나동그라지면서도 표독스러운 표정을 풀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들이냐! 나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귀신들을 호령하는 대무녀 금월이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고도 너희가 무사할 줄 아느냐!"
그녀의 어리석고 거만한 외침에, 엎드려 있던 원혼들마저 기가 막힌 듯 고개를 들었다.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번쩍 몸을 일으켰다. 그의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관아의 남은 기둥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네년이 귀신을 호령한다고 하였느냐? 감히 삿된 욕심으로 저승의 이름을 도용하여 이승을 어지럽힌 것도 모자라, 죄 없는 어린 목숨들을 제단에 바치고도 저승왕 앞에서 세 치 혀를 나불대는구나!"
염라대왕의 분노 어린 호통에 금월의 낯빛이 순간 흔들렸으나,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치켜들며 발악했다.
"억울하옵니다! 저는 그저 병들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데려다 보살폈을 뿐이옵니다. 아이들은 모두 역병으로 죽은 것이지, 제가 손을 댄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녀의 거짓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혼들의 무리 속에서 작은 형체들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일곱 명이었다. 기껏해야 예닐곱 살, 많아 봐야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원혼이었다. 아이들의 창백한 목에는 하나같이 날카로운 칼에 베인 깊고 붉은 상처가 끔찍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얀 소복은 검붉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 여자가... 우리를 죽였어요."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깡마른 소년이 피눈물을 흘리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밤마다 무서운 방으로 우리를 데려갔어요...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높은 대감님들이 찾아오면, 이 여자는 우리 목을 잘라 그 피를 그릇에 담았어요... 우리가 저승의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되어야 대감님들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요..."
소년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양갈래 머리의 작은 소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열했다.
"아팠어요... 너무너무 아팠어요... 엄마가 보고 싶은데, 이 여자가 칼로 제 목을..."
숨어서 지켜보던 선비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입술을 짓깨물어 피가 나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엄청난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저리도 어리고 불쌍한 아이들을 제물로 삼아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을 한단 말인가.
아이들의 증언이 이어지자 금월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쳤다.
"거짓말! 썅년놈들이 뒤져서까지 나를 모함하는구나! 나는 잘못한 게 없어! 돈을 준 건 그 양반놈들이고, 나는 그저 비방을 써준 것뿐이야!"
"닥쳐라, 이 악귀만도 못한 년아!"
염라대왕의 분노가 마침내 정점에 달해 폭발했다. 하늘에 번개가 치고 천둥이 굉음을 내며 폐관아를 뒤흔들었다.
"네년의 추악한 죄악은 이미 생사부에 붉은 피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네가 첫 번째 아이의 목에 칼을 댄 순간, 네년의 이름은 이미 인간이 아닌 지옥의 악귀 명부에 올랐느니라!"
염라대왕이 굵은 손가락을 뻗어 금월을 삿대질하자, 금월의 입과 코, 그리고 두 귀에서 새까만 묵즙 같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검은 연기는 이내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거대한 뱀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금월의 목을 친친 휘감기 시작했다.
"크으윽...! 헉... 살려... 살려주...!"
"네가 목을 벤 일곱 명의 아이들이 느꼈던 그 고통과 공포를, 이제 네년이 고스란히 씹어 삼켜라!"
염라대왕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자비도 남아있지 않았다. 검은 연기 뱀은 금월의 목을 일곱 번이나 겹겹이 휘감고는 뼈가 부서질 듯 강력하게 조여갔다. 금월은 허공에 뜬 채 두 발을 버둥거렸고, 툭 튀어나온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쏟아졌다. 질식의 고통에 온몸이 비틀리고 검게 변해갔다.
"잘... 잘못... 내가... 내가 죽였어... 돈을...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숨통이 완전히 끊어지기 직전, 뱀의 조임이 아주 살짝 헐거워진 틈을 타 금월이 짐승 같은 울음을 토해내며 자백했다. 그 끔찍한 모습을 지켜보던 일곱 명의 어린 원혼들은 서로의 작은 어깨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무녀 금월."
염라대왕이 생사부에 무언가를 거칠게 휘갈겨 썼다.
"네년의 죄는 감히 이승의 법으로 씻을 수조차 없이 무겁고 추악하다. 하여, 네년에게는 속죄할 유예의 시간조차 주지 않겠노라. 당장 지옥의 가장 깊은 곳, 빙탄지옥으로 끌고 가 일곱 번 얼리고 일곱 번 불에 태우는 형벌을 영원토록 반복할 것이다!"
금월의 눈동자가 극도의 공포로 뒤집혔다.
"안 돼! 나는... 나는 아직 육신이 살아 숨 쉬고 있단 말이다! 제발 이승으로 돌려보내 줘!"
"네년의 육신? 하하하!"
염라대왕이 섬뜩한 냉소를 터뜨렸다.
"네 영혼이 이곳에서 심판받는 지금 이 순간, 이승에 있는 네년의 으리으리한 집에는 이미 하늘의 천벌인 벼락이 떨어져 거센 불길에 휩싸여 있다. 네 육신은 지금 그 불길 속에서 재로 변해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넌 돌아갈 곳이 없다!"
"안 돼애애애액!"
저승사자들이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어 금월을 사정없이 짓밟고는 쇠사슬로 짐짝 묶듯 칭칭 동여맸다. 금월의 단발마 같은 비명과 발악이 이어졌지만, 관아 마당의 그 누구도 그녀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저승사자들은 금월을 끌고 지옥문 안으로 훌쩍 뛰어내렸고, 곧이어 끔찍한 열기와 신음을 토해내던 붉은 갈라짐이 쿵 하는 굉음과 함께 굳게 닫혀버렸다.
※ 6: 승천하는 원혼들
지옥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자, 무시무시한 열기와 핏빛 불명으로 가득 차 있던 폐관아 마당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깊고 평온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염라대왕의 분노로 요동치던 공기도 잔잔해졌고, 어둡고 음산했던 원혼들의 얼굴에도 기묘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피눈물을 흘리고 상처투성이였던 그들의 모습이, 마치 따뜻한 봄볕을 받은 눈송이처럼 서서히 부드럽고 온화하게 변해가는 것이었다. 십 년 동안 뼈에 사무치도록 품어왔던 억울함과 원한이 마침내 공명정대한 심판을 통해 씻겨 내려간 덕분이었다.
염라대왕이 옥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마당을 가득 메운 백여 명의 원혼들을 따스한 눈빛으로 굽어보았다.
"오늘 밤, 이곳 비밀 재판소에서 열린 심판은 모두 끝이 났다. 비록 너희가 이승에서 겪은 끔찍한 고통과 잃어버린 목숨을 되돌려 줄 수는 없으나, 너희를 그토록 억울하게 만든 악인들은 이제 저승의 추상같은 법도 아래 영원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제 그만 가슴에 맺힌 한을 풀거라."
염라대왕의 자비로운 음성이 떨어지자, 일곱 명의 어린 원혼들이 쭈뼛쭈뼛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이들의 목에 선명하게 남아있던 무서운 칼자국은 어느새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저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캄캄하고 무서운 곳으로 가야 하나요?"
가장 어린 소녀가 엄지손가락을 입에 문 채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염라대왕의 위엄 넘치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거대한 몸을 굽혀 거친 손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하나하나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아가들아. 이제 너희는 이 차갑고 슬픈 이승을 떠나 편안한 저승의 꽃밭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는 너희를 아프게 할 자도, 굶주리게 할 자도 없느니라. 가서 실컷 뛰놀며 평화를 누리거라."
염라대왕의 따뜻한 위로에 아이들의 얼굴에 마침내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아이들의 형체가 서서히 투명해지더니, 반딧불이처럼 영롱하고 따스한 금빛 무리 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내 그 금빛 점들은 중력을 거스르듯 하늘을 향해 사뿐히 떠올라 밤하늘의 별빛 속으로 녹아들며 승천했다. 아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원혼들 역시, 저마다 염라대왕을 향해 깊은 절을 올린 뒤 하나둘씩 밝은 빛으로 변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졌던 폐관아의 마당은, 수백 개의 영혼이 만들어내는 눈부신 승천의 빛으로 경이롭게 반짝였다.
원혼들이 모두 떠나고 텅 빈 마당. 염라대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담장 너머에서 넋을 잃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선비를 정확히 응시했다.
"마루 밑에 숨어있는 살아있는 자여. 이제 그만 나오거라."
선비는 깜짝 놀라 헛기침을 하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담장 밖으로 나왔다. 그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부들부들 떨었다.
"살... 살려주시옵소서! 소인은 그저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두려워 말라. 네가 이 거룩하고도 무서운 심판을 목격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선비의 정수리로 쏟아져 내렸다.
"본왕이 오늘 밤 너에게 이 모든 광경을 보여준 까닭은, 네가 장차 글을 통해 세상에 많은 이야기를 남길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은 탐욕에 눈이 멀어 툭하면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고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지른다. 허나, 명심하라. 인간의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갈 수는 있어도, 저승의 서늘한 정의와 심판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벌한다는 것을. 오늘 밤 네가 본 이 정의의 심판을 낱낱이 기록하여, 이승의 어리석은 자들에게 준엄한 경고로 남기도록 하라."
선비는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이마를 찧고 깊이 숙배를 올렸다.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오늘 밤 뼈에 새긴 저승의 정의를 평생토록 붓끝으로 남겨 널리 알리겠사옵니다!"
"기특하구나. 이제 그만 이승의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다."
염라대왕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한 번 크게 휘두르자, 선비의 눈앞에 강렬한 빛이 폭발하듯 쏟아지며 의식이 아득해졌다.
"헉...!"
선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번쩍 눈을 떴을 때, 염라대왕도, 거대한 재판소도, 웅장했던 빛도 모두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가 서 있는 곳은 그저 새까맣게 불타 무너져 내린, 평소와 다름없는 초라한 폐관아 앞 흙길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저 멀리 동쪽 산등성이 너머로 여명이 밝아오며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길고도 비현실적이었던 원한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온 것이다. 선비는 홀린 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 한양 도성 전체가 발칵 뒤집히는 놀라운 소문들이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피도 눈물도 없기로 소문난 포도대장 조학도가 돌연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끔찍한 악행들을 낱낱이 자백하고는, 전 재산을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유족에게 나누어주고 감옥에 스스로 갇혔다는 소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뼈대 깊은 박씨 문중의 안주인이 남편과 시아버지를 독살했다며 스스로 관아에 출두하여 옥살이를 자처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도 들려왔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을 외곽에서 부자들을 상대로 점을 치던 무녀 금월의 집에 원인 모를 벼락이 떨어져, 무녀가 그 자리에서 새까만 숯덩이가 되어 타죽었다는 기괴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벼락이 치던 날 밤, 무녀의 집 위로 일곱 명의 어린아이 형상이 손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며 수군거렸다.
선비는 도성 거리를 휩쓰는 그 모든 소문을 들으며 서재에 조용히 홀로 앉았다. 벼루에 정성껏 먹을 간 그는 떨리지만 단호한 손길로 붓을 들어 하얀 한지 위에 첫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염라대왕의 비밀 재판소, 지옥문이 열리다.'
그날 밤, 원한 맺힌 영혼들의 눈물과 탐욕스러운 악인들의 처절한 비명, 그리고 단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세상을 꿰뚫어 보던 염라대왕의 서늘한 심판. 선비의 붓끝에서 저승의 정의가 인간 세상에 살아 숨 쉬는 이야기로 영원히 기록되기 시작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전해드린 '염라대왕의 비밀 재판소, 지옥문이 열린다'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아무도 모르게 숨긴 죄악조차 저승의 장부에는 낱낱이 기록된다는 서늘하고도 통쾌한 이야기, 어떠셨나요? 다음 편에서는 분위기를 조금 바꿔서요, 한 가난하고 어리숙한 선비가 우연한 실수로 염라대왕의 딸과 혼인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소동! '염라대왕의 사위' 편을 준비했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눌러주시면 인간과 저승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다음 이야기도 가장 먼저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