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대왕의 사면초가 - 저승 왕도 곤란했던 특별한 영혼들
태그 (20개)
#염라대왕, #저승, #조선시대, #전설, #야담, #옛날이야기, #설화, #권선징악, #인생무상, #효도, #해학, #지혜, #저승사자, #시니어, #꿀잼, #이야기, #오디오드라마, #역사, #한국신화, #인과응보
후킹멘트 (200자)
천하의 염라대왕도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한 영혼들이 있었다? 서슬 퍼런 저승의 군왕을 진땀 흘리게 만든 기상천외한 망자들의 이야기. 과연 염라대왕은 이들을 어떻게 심판했을까요?
디스크립션 (300자)
누구나 공평하게 심판받는 곳, 저승. 하지만 이곳에서도 상식을 뛰어넘는 특별한 영혼들 때문에 저승 전체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논리로 염라를 이기려 한 선비부터, 자식 걱정에 저승길을 거부한 어머니까지. 저승의 왕, 염라대왕마저 곤란하게 했던 우리네 인생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 고요를 깨는 불청객
까마득한 세월이 겹겹이 쌓여 빛조차 길을 잃는 곳, 바로 저승의 이야기입니다. 산 자들의 숨소리도, 바람의 노래도 들리지 않는 이 적막한 땅을 다스리는 이는 바로 시왕(十王) 중 가장 높은 어른, 염라대왕이었습니다. 검푸른 관복에 열두 줄기 면류관을 쓴 그의 얼굴은 무심한 듯, 엄격한 듯,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지요.
염라대왕이 자리한 명부전(冥府殿)은 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정연했습니다. 죄 지은 망자들이 끌려오면, 업경대(業鏡臺)라 불리는 거울에 그들의 일생이 남김없이 비치었고, 죄의 경중을 기록하는 판관들의 붓놀림은 멈추는 법이 없었으며, 형벌을 집행하는 옥졸들의 움직임은 서슬 퍼런 칼날 같았습니다. 수천, 수만 년 동안 반복된 풍경. 선한 자에게는 다음 생의 복을 약속하고, 악한 자에게는 지옥의 고통을 내리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저승의 법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영겁의 세월 속에서, 염라대왕은 아주 가끔, 인간 세상의 '정(情)'이라는 것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하고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어렴풋이 느끼고는 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습니다. 염라대왕은 턱을 괸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판관을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보며 끝없이 이어지는 망자들의 행렬을 심드렁하게 내려다보고 있었지요. '흠, 저자는 남의 밭에 물꼬를 몰래 돌린 죄로구나. 혓바닥을 길게 뽑는 발설지옥(拔舌地獄)으로 보내고. 저자는 제 부모를 박대한 죄가 크니, 펄펄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는 확탕지옥(鑊湯地獄)이 마땅하다.' 이렇게 기계처럼 판결을 내리던 염라대왕의 귀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날아와 꽂혔습니다.
“어허! 게 누구냐! 저승의 법도가 우스운 게냐! 어서 대왕님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할까!”
옥졸의 호통 소리에 염라대왕은 비로소 졸음기 가득한 눈을 번쩍 떴습니다. 명부전 입구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습니다. 보통 망자들은 저승사자의 위엄에 눌려, 또한 자신의 죄가 두려워, 대왕 앞에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법인데, 웬일인지 버티고 서서 고개를 꼿꼿이 세운 영혼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무릎은 꿇을 수 없소.”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 염라대왕은 흥미롭다는 듯 몸을 바로 앉혔습니다. 소란의 주인공은 갓 마흔을 넘겼을까 싶은 한 선비의 영혼이었습니다. 해진 두루마기에 군데군데 흙먼지가 묻어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맑고 단단해 보였습니다. 저승사자 둘이 양팔을 붙들고 끌고 왔지만, 그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며 염라대왕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고개를 드느냐! 네놈의 일생은 이미 저 업경대에 모두 비치었다. 생전에 지은 죄를 낱낱이 고하고 용서를 빌어도 모자랄 판에, 무슨 행패란 말이냐!”
판관 하나가 호통을 치며 책상을 내리쳤습니다. 하지만 선비는 그 호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을 열었습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는 제 죄를 부인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저승의 심판 방식에 대해 몇 가지 여쭐 것이 있어 왔을 뿐입니다.”
“뭐라고? 심판 방식에 대해 여쭈어?”
명부전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수만 년 저승 역사에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죄를 부정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살려달라 애원하는 망자는 부지기수였지만, 심판의 '방식' 자체를 논하겠다고 나선 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염라대왕은 길고 하얀 수염을 한 번 쓰윽 어루만지며 나직이 말했습니다.
“끌고 오너라. 저 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옥졸들이 선비를 염라대왕의 단상 아래까지 끌고 왔습니다. 선비는 그제야 순순히 끌려와 섰지만, 여전히 무릎은 꿇지 않았습니다. 그는 염라대왕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표한 뒤,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모습은 죄인이라기보다는, 학문을 논하기 위해 스승을 찾아온 제자의 모습에 가까웠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소생, 이승에서 김진호라 불렸던 사람입니다.”
“김진호라. 좋다. 네가 이 엄숙한 저승의 법정에서 소란을 피운 까닭이 무엇이냐. 네 죄는 이미 명백하거늘, 무엇이 궁금하여 이 저승의 왕을 대면하고자 하였느냐. 바른 대로 고하지 않으면, 죄에 죄를 더할 것이다.”
염라대왕의 목소리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듯 낮고 위엄이 넘쳤습니다. 웬만한 망자라면 그 목소리만 듣고도 혼절하여 쓰러질 터였지만, 김진호라는 선비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저승의 질서를 뒤흔들, 아주 길고 피곤한 논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은 곧 이 선비 하나 때문에 자신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그저 오랜만의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 논리로 저승에 맞선 선비
김진호 선비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킨 뒤, 명부전 전체에 울릴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대왕님, 소생이 이승에서 지은 죄를 먼저 아뢰겠습니다. 저는 가난한 살림에 늙은 노모를 봉양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해, 노모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옆집 부잣집 곳간에서 쌀 한 말을 훔친 적이 있습니다. 또한,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길에 주막에서 다른 선비와 학문적 논쟁을 벌이다 격분하여, 그만 그의 벼루를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업경대에 비친 제 죄일 것입니다. 맞습니까?”
염라대왕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업경대에 비친 내용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그래, 네 죄를 네가 잘 알고 있구나. 그렇다면 어서 판결을 받고 지옥으로 갈 채비를 할 것이지, 어찌하여 이리 시간을 끄는 것이냐?”
김진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습니다.
“대왕님, 저는 바로 그 지점을 여쭙고 싶은 것입니다. 소생이 쌀을 훔친 것은 사실이나, 그 쌀로 노모의 탕약을 지어 올렸고, 덕분에 노모께서는 삼 년을 더 사셨습니다. 불효보다는 도둑질이 가벼운 죄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가 벼루를 깨뜨린 선비는, 공맹의 도리를 왜곡하여 백성을 현혹하는 사악한 논리를 펼치고 있었기에, 제가 의로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리한 것입니다. 이는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의무감 때문이었습니다. 헌데, 저승의 법은 어찌하여 행위의 동기와 결과는 살피지 않고, 오직 '훔쳤다', '깨뜨렸다'라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 죄를 단정하십니까? 이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선비의 말에 판관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궤변이다!”, “시끄럽다, 저놈의 주둥이를 막아라!” 하는 고함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염라대왕은 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히 시켰습니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곤혹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네 말인즉슨, 너의 도둑질과 기물 파손은 정당했다, 이 말이냐?”
“아닙니다, 대왕님. 어떠한 이유에서든 남의 것을 훔치고 부순 것은 분명한 죄입니다. 저는 그 죄에 대한 벌을 피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죄의 무게를 정하는 기준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승의 법도 그러하거늘, 어찌 만물의 이치를 다스리는 저승의 법이 이리도 단순하고 평면적일 수 있단 말입니까? 가령, 한겨울 굶주린 자식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어미의 죄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나라의 녹을 훔친 탐관오리의 죄가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훔쳤다는 행위는 같으나, 그 안에 담긴 마음과 그로 인한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저승에서는 이를 어찌 구분하여 심판하십니까?”
김진호의 논리정연한 반박에 명부전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염라대왕 역시 순간 말문이 막혔습니다. 사실, 저승의 법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춰 심판을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그 편이 명쾌하고 질서를 유지하기에 수월했기 때문이지요. 인간의 마음속까지 일일이 헤아리기 시작하면, 심판의 기준은 모호해지고 저승의 질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선비는, 그 근본적인 전제를 정면으로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네놈의 말은 일견 그럴듯하나, 심판의 공정성을 해치는 위험한 주장이다. 모든 죄인들이 너처럼 자신의 동기를 내세우며 선처를 바란다면, 이 저승의 기강이 어찌 되겠느냐!”
판관장이 나서서 외쳤지만, 김진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판관님, 저는 선처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엄격하고 세밀한 심판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단순한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수많은 회색 지대가 존재하며, 그 안에서 인간은 고뇌하고 선택합니다. 그렇다면 저승의 심판 역시, 그 복잡한 삶의 결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업경대에 비치는 것은 행위의 결과일 뿐, 그 행위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밤과 낮, 수많은 눈물과 고뇌는 비치지 않습니다. 진정한 심판이란, 그 보이지 않는 시간까지 헤아리는 것이 아닐는지요.”
선비의 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학 경전과 법가의 논리를 넘나들며 저승법의 허점을 조목조목 짚어냈습니다. 그는 염라대왕에게 물었습니다. 저승의 형벌은 오직 고통을 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영혼의 교화를 위함인지. 만약 교화를 위함이라면, 죄의 동기를 이해시키지 않는 일방적인 형벌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의 질문은 점점 더 근본적인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은 슬슬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수만 년 동안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저승의 시스템이, 일개 미천한 인간의 영혼 앞에서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선비의 말은 궤변인 듯하면서도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고,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진지하여 장난이나 속임수로 치부할 수도 없었습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다른 망자들의 심판은 모두 중단된 채, 저승의 모든 관리가 이 기묘한 토론에 빠져들었습니다. 어떤 젊은 판관은 김진호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옆자리 늙은 판관에게 꿀밤을 맞기도 했습니다. 염라대왕은 이 끝없는 논쟁을 어찌 끝맺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힘으로 찍어 눌러 지옥으로 보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저승의 왕이 논리에서 밀려 폭력을 썼다는 오명을 남길 것만 같았습니다. 이는 그의 높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염라대왕은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사면초가'의 기분을, 바로 이 작은 선비의 영혼 앞에서 톡톡히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 저승을 울린 어머니의 사랑
김진호 선비의 당돌한 논변으로 명부전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았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저 멀리서 새로운 영혼 하나가 저승사자에게 이끌려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앞서 소란을 피웠던 선비와는 정반대로, 그 영혼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순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지요. 한눈에 보아도 앳된 모습의 젊은 아낙이었습니다. 채 서른을 넘겼을까 싶은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가녀린 어깨는 슬픔의 무게에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갓난아기를 위해 만들었을 법한 작은 배냇저고리가 꼭 쥐어져 있었는데, 이미 영혼이 되어버린 그녀의 손길에도 그 옷은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낙은 염라대왕의 앞에 이르자마자 말없이 무릎을 꿇고 깊이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 처연한 모습에, 방금 전까지 핏대를 세우며 선비와 논쟁하던 판관들조차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꼿꼿이 서서 저승의 법도를 논하던 김진호 선비마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슬픔은 소리 없이 흐느끼는 강물과도 같아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모든 것을 잠식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습니다.
“고개를 들라. 네 이름이 무엇이며, 이승에서 무슨 죄를 지었느냐.”
아낙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텅 빈 것 같던 그녀의 두 눈에서, 마침내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저승의 차가운 바닥을 적셨습니다.
“소녀의 이름은 박씨라 하옵고… 죄는… 죄는 제 자신을 돌보지 못한 죄입니다.”
아낙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고 가냘팠지만, 그 안에 담긴 슬픔의 무게는 천근만근 바위보다도 무거웠습니다. 판관 하나가 업경대의 기록을 살피고는 보고했습니다.
“대왕님, 이 영혼은 박씨 부인으로, 산후 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갓난 아들을 돌보다가 산욕열로 그만 목숨을 잃었나이다.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뜬 불효의 죄, 그리고 제 몸을 귀히 여기지 않은 죄가 기록되어 있나이다.”
염라대왕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승의 법도에 따르면, 스스로의 목숨을 소중히 하지 않은 것 역시 큰 죄로 여겨졌습니다.
“죄를 알았으니 판결을 내리겠다. 너는…”
“잠시만요, 대왕님!”
염라대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씨 부인이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애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왕님, 소인에게 내리실 벌은 무엇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끓는 물에 들어가라 하시면 들어갈 것이고, 칼산에 오르라 하시면 기꺼이 오르겠습니다. 하오나… 하오나 딱 한 가지, 소원이 있사옵니다. 제발… 제발 이 어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명부전의 모두가 숨을 죽였습니다. 그녀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텅 빈 전각을 가득 메웠습니다.
“말해보아라.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
“제가 눈을 감고 나니… 태어난 지 백일도 채 되지 않은 제 아기가 눈에 밟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젖도 제대로 물려보지 못했고, 따뜻하게 한 번 안아주지도 못했습니다. 대왕님… 제가 저승길에 오르기 전에, 제 아기가 앞으로 어찌 살아갈지, 밥은 굶지 않을지, 아프지는 않을지, 좋은 부모 밑에서 사랑받으며 자랄 수 있을지… 딱 한 번만이라도 보게 해주십시오. 그것만 보게 해주신다면, 그 어떤 끔찍한 지옥이라도 웃으며 가겠습니다. 제발… 제발 이 어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박씨 부인의 통곡은 단순한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바치는 끝없는 사랑의 기도였고, 죽음조차 끊어내지 못한 처절한 모성의 절규였습니다. 저승의 법도상, 죽은 자가 산 자의 미래를 엿보는 것은 절대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이는 세상의 인과율을 어지럽히고,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는 중죄에 해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소원은 너무나도 간절하고 순수하여, 차마 ‘법도’라는 차가운 칼날로 베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서슬 퍼렇던 옥졸들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깐깐하기만 하던 판관들은 차마 그녀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저승의 법체계를 논하며 이성의 칼을 휘두르던 김진호 선비조차, 입을 굳게 다문 채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그의 논리는 저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 한낱 공허한 말장난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슬픔과 사랑 앞에서, 저승의 모든 질서와 원칙이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 염라대왕의 인간적인 고뇌
명부전은 완전한 침묵에 휩싸였습니다. 한쪽에는 저승의 법리적 허점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이성의 목소리가 서슬 퍼렇게 살아있고, 다른 한쪽에는 천지 만물의 이치마저 무력하게 만드는 뜨거운 모성의 눈물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은 수만 년 만에 처음으로 ‘판결’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옥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이란 말인가.’
염라대왕의 입가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늘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소한 이익에 목숨을 걸고 다투다가도, 아무런 이득도 없는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다가도,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용서하고 뜨겁게 끌어안았습니다. 그 변덕과 모순투성이의 감정들을, 염라대왕은 그저 ‘어리석음’이라 치부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는 그 어리석음이라 여겼던 것들이 실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김진호 선비. 그의 주장은 분명 저승의 질서를 뒤흔드는 위험한 발상이었습니다. 만약 그의 논리를 받아들여 죄의 ‘동기’를 참작하기 시작한다면, 앞으로 저승의 심판은 끝없는 논쟁의 수렁에 빠질 것입니다. 모든 죄인이 저마다의 사연을 늘어놓을 테고, 심판의 기준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며 권위를 잃게 될 것입니다. 저승의 법은 명쾌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수많은 영혼들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며 이승과 저승의 순환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선비의 요구는, 이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 하나를 빼버리자는 것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은 원칙을 수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 박씨 부인은 또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의 눈물은 법과 원칙만으로는 도저히 닦아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부정하지도, 벌을 피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식을 향한 애끓는 마음 하나를 풀어달라 애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염라대왕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앞으로 저승에 오는 모든 부모 영혼들이 자신의 자식과 손주의 미래를 보여달라 아우성칠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자식은 부모를 그리워하며 저승길에 오르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저승은 망자들의 한과 그리움이 뒤엉킨 거대한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순환은 멈추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무너질 것입니다. 이 또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은 깊은 시름에 잠겼습니다. 그의 이성은 ‘불허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수만 년간 굳어 있던 그의 심장 한구석에서 ‘저들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경한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인간 세상을 떠나온 지 너무 오래되어 잊고 있었던,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였습니다. 그는 문득 자신이 다스리는 이 저승이라는 공간이, 그저 죄를 심판하고 벌을 주는 차가운 곳이 아니라, 인간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매듭짓는 공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마지막을 이토록 매정하게 잘라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명부전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판관들과 옥졸들은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대왕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김진호 선비는 어느새 자신의 논쟁도 잊은 채, 바닥에 엎드린 박씨 부인과 옥좌에 앉은 염라대왕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눈에도 복잡한 상념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박씨 부인은 그저 흐느낄 뿐이었습니다. 그녀의 세계에는 오직 아기의 모습만이 가득 차 있는 듯했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염라대왕이 마침내 무겁게 감았던 눈을 떴습니다.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깊고 그윽해져 있었습니다.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혹은 어려운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처럼. 그는 두 영혼을 차례로 굽어살핀 뒤, 나지막하지만 명부전 전체를 울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그의 판결에, 저승의 미래가 달려 있었습니다. 모두가 마른 침을 삼켰습니다.
※ 지혜로운 판결
마침내 기나긴 침묵을 깨고 눈을 뜬 염라대왕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꼿꼿이 서서 자신의 판결을 기다리는 김진호 선비였습니다. 염라대왕은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김진호라 하였느냐. 너는 너의 해박한 지식과 논리로 이 저승의 법도를 논하며, 죄를 심판함에 있어 그 동기와 과정을 살펴야 마땅하다 주장하였다. 네 말은 심히 위험하나, 일견 타당한 구석이 있음을 나 또한 인정하는 바이다.”
명부전이 순간 술렁였습니다. 염라대왕이 일개 망자의 주장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저승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김진호 선비의 얼굴에도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쳤습니다.
“하여, 네게 판결을 내리겠다. 너는 죄의 대가로 지옥의 형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대왕님!” 판관 하나가 놀라 소리쳤지만, 염라대왕은 손짓으로 그의 말을 막았습니다.
“대신, 너는 오늘부터 이 명부전의 새로운 직책을 맡게 될 것이다. 이름하여 ‘양형 기록관(量刑記錄官)’이다. 너는 앞으로 저승에 오는 모든 영혼들의 업경대를 살피고, 그들이 죄를 짓게 된 동기와 배경, 그로 인해 파생된 결과와 인간적인 고뇌를 낱낱이 기록하여 본왕에게 보고해야 한다.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소홀히 하거나, 너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기록을 왜곡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내리는 벌이다. 네가 원하던 대로, 모든 영혼의 삶의 결을 세세히 들여다보는 일을 영겁의 시간 동안 홀로 수행토록 하라.”
염라대왕의 판결에 김진호 선비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벌이되 벌이 아니었고, 상이되 상이 아니었습니다. 염라대왕은 그의 주장을 꺾는 대신, 그 주장에 담긴 책임을 통째로 그에게 지워버린 것입니다. 수억, 수조에 이를지 모를 영혼들의 삶의 무게를 일일이 기록하고 감당해야 하는 일. 그것은 어쩌면 발설지옥의 고통보다도 더 무겁고 외로운 형벌일지도 몰랐습니다. 김진호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이내 깊은 탄식과 함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대왕님의 지혜에 탄복하였나이다. 소생, 그 명을 기꺼이 받들겠나이다.”
그의 얼굴에는 패배감 대신, 자신의 논리가 마침내 가야 할 길을 찾았다는 기묘한 안도감이 서려 있었습니다.
이제 염라대왕의 시선은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는 박씨 부인에게로 향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습니다.
“박씨 부인, 고개를 들라. 네 아들을 향한 지극한 마음은 이 저승의 법도를 잠시 멈추게 할 만큼 깊고 무거웠다. 허나, 산 자의 미래를 죽은 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천지의 이치를 거스르는 법. 네 소원을 전부 들어줄 수는 없느니라.”
그 말에 박씨 부인의 어깨가 절망으로 다시 한번 떨려왔습니다. 하지만 염라대왕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허나, 자식을 그리는 네 마음을 외면할 수도 없구나. 옥졸은 들으라.”
“예, 대왕님!”
“지금 당장 이승으로 내려가, 저 여인의 아기가 마시고 있는 우물물을 딱 한 방울만 떠 오너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 된다. 단 한 방울이다.”
옥졸은 영문을 모른 채 명을 받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내 손바닥 위의 작은 연잎에 맺힌 영롱한 물 한 방울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염라대왕은 명했습니다.
“그 물방울을 업경대 위에 떨어뜨리거라.”
옥졸이 조심스럽게 물방울을 떨어뜨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늘 망자들의 과거만을 비추던 흐릿한 거울 표면에, 그 물방울이 파문을 일으키며 찰나의 순간, 맑고 선명한 영상 하나를 비춰낸 것입니다. 포대기에 싸여 토실토실 살이 오른 아기가, 인자한 미소를 띤 할머니의 품에 안겨 방긋 웃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기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 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지만, 박씨 부인이 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아… 아가…”
박씨 부인은 그 환영을 향해 손을 뻗으며 오열했습니다. 하지만 그 울음은 더 이상 슬픔과 한의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안도와 감사,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는 평화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녀는 한참을 소리 내어 울다, 이내 염라대왕을 향해 이마가 닳도록 절을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왕님… 이제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그녀의 영혼은 거짓말처럼 한결 가벼워지고 맑아져 있었습니다.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정을 헤아린 염라대왕의 지혜로운 판결 앞에, 명부전의 모든 이들이 경외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습니다.
※ 저승에 남은 여운
소란스러웠던 심판이 끝나고, 두 특별한 영혼은 각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김진호 선비는 산더미처럼 쌓인 두루마리 기록들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고, 그의 등 뒤로는 ‘양형 기록관’이라는 현판이 새로이 걸렸습니다. 박씨 부인은 더 이상 미련 없는 평온한 얼굴로,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기 위해 다음 전각으로 순순히 향했습니다. 그녀의 발걸음은 저승에 온 그 어떤 영혼보다도 가벼워 보였습니다.
명부전에는 다시 원래의 정적이 찾아왔습니다. 판관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고, 옥졸들은 다음 망자들을 대기시켰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지만, 그곳에 있던 모두는 알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분명히 달라졌다는 것을. 저승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전에는 없던 사람의 온기가 희미하게나마 감돌고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은 홀로 옥좌에 앉아 텅 빈 전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권태나 피로 대신, 깊은 사색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 수만 년 만에 처음으로 ‘인간’에 대해 배웠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때로 저승의 법도마저 흔들 만큼 날카롭고 집요하며, 인간의 사랑은 천지의 이치마저 거스를 만큼 뜨겁고 강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동안 그는 선과 악이라는 명확한 잣대만으로 세상을 재단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두 영혼을 통해, 선과 악 사이에는 인간의 수많은 고뇌와 눈물,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수한 회색지대가 존재함을 깨달았습니다. 쌀을 훔친 선비의 죄와, 그 쌀로 어머니를 살린 효심.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음에 이른 어미의 죄와, 죽어서도 자식을 놓지 못하는 모정. 무엇이 더 무겁고, 무엇이 더 가볍다 감히 단정할 수 있겠는가.
염라대왕은 문득 인간 세상이 궁금해졌습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희로애락이, 그들이 맺고 살아가는 인연의 깊이가 처음으로 궁금해졌습니다. 아마도 저승의 법은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질서는 유지되어야 하고, 죄는 심판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염라대왕의 마음속에는 오늘, 아주 작은 변화의 씨앗이 심어졌습니다. 차가운 법전의 글자 너머에 있는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 그것이 앞으로 염라대왕이 영겁의 시간 동안 풀어야 할 새로운 과제가 될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심판이란, 죄의 무게를 재는 것이 아니라, 한 생명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저승의 왕 염라대왕은, 두 평범하지만 특별했던 영혼들에게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저승의 하루는 저물어갔고, 인간 세상의 이야기는 또 다른 모습으로 저승의 문을 두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염라대왕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유튜브 엔딩 멘트
오늘 들려드린 염라대왕의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서슬 퍼런 저승의 왕도 결국 사람의 논리와 뜨거운 사랑 앞에서는 고뇌할 수밖에 없었네요. 어쩌면 가장 공정한 판결은 차가운 법전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려는 따뜻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야기가 흥미로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잊지 마시고,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다음 시간에는 ‘지옥에도 계급이 있다? 염라대왕의 지옥 구조도’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