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대왕 앞에서 자신의 죄를 당당히 인정한 조선 도둑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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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 멘트 (200자)
훔치는 것이 죄라면, 썩어빠진 세상을 훔친 자는 어떤 벌을 받아야 할까? 서슬 퍼런 염라대왕의 법정, 그 앞에서 자신의 모든 죄를 웃으며 인정한 사상 초유의 도둑! 지옥의 법정마저 뒤흔든 그의 마지막 변론이 지금 시작됩니다.
디스크립션 (300자)
조선 팔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희대의 도둑, 배천동. 그는 가난한 자의 것은 탐하지 않고, 오직 부패한 권력자들의 재물만을 노렸다. 죽음 이후, 마침내 염라대왕의 심판대 위에 선 그는 변명 대신 당당한 자백을 선택한다. 과연 그의 운명은 지옥일까, 혹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제3의 길일까? 통쾌한 반전이 기다리는 야담.
※ 부패한 탐관오리와 위선적인 양반들만을 골라 터는 신출귀몰한 도둑, 배천동.
조선 땅에 밤이 내리고 인적이 끊기면, 술 취한 양반들의 호기로운 목소리도, 고단한 아낙의 다듬이질 소리도 모두 달빛 아래 잠겨들면, 그때부터는 법이 아닌 다른 존재의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그 존재를 감히 입에 담기를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은근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속삭이곤 했다. 바로 ‘그림자 도둑’ 배천동(裵千童)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떤 이는 그가 축지법을 쓰는 신선이라 했고, 또 어떤 이는 원한을 품고 죽은 귀신이라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존재하되 보이지 않았고, 훔치되 가난한 자의 것은 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발길이 머무는 곳은 오직 단 한 부류, 썩을 대로 썩어 악취를 풍기는 탐관오리와 위선자들의 곳간뿐이었다.
그의 명성을 천하에 떨친 것은, 당대 최고의 권력가였던 이조판서 김 대감 댁을 털었을 때의 일이다. 김 대감의 저택은 삼엄하기가 궁궐과도 같아, 담벼락 위로는 삐죽삐죽 놋쇠 조각을 박아두었고, 밤낮으로 사나운 개들과 무장한 가솔들이 눈을 번뜩이며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 배천동은 마치 한 줌의 연기처럼 그 모든 경비를 비웃으며 저택의 가장 깊숙한 곳, 김 대감의 비밀 서재로 스며들었다. 그곳은 김 대감의 진짜 심장이었다. 서재의 벽을 밀자 나타난 비밀 공간, 그 안에는 눈이 멀어버릴 듯한 황금과 보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백성들이 삼 년 흉년에 굶주려 제 자식을 내다 파는 동안, 그들의 피눈물이 모여 만들어진 부의 산이었다.
하지만 배천동은 그 보물들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는 곧장 방 한가운데 놓인 자개농으로 다가가, 그가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숨겨진 장치를 눌러 비밀 칸을 열었다.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낡은 책 한 권. 바로 김 대감이 수십 년간 조정의 관직을 사고팔며 받아 챙긴 뇌물의 내역과, 그와 손잡은 역적들의 이름이 낱낱이 기록된 비밀 장부였다. 배천동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김 대감이 가장 아끼는 벼루에 먹을 갈아, 가장 비싼 종이 위에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의 필체는 막힘이 없고 힘이 넘쳤다. 다음날 아침, 광화문 네거리에는 김 대감의 비밀 장부 내용이 조목조목 필사된 거대한 방이 나붙었고, 그가 훔쳐 간 장부는 보란 듯이 의금부 대문 앞에 놓여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텅 비어버린 김 대감의 비밀 금고 안에는, 그 모든 황금을 대신해 딱 한 닢, 가장 값싼 상평통보 한 닢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네놈의 평생 명예와 부의 가치는 딱 이 한 닢이다’ 라는 소리 없는 조롱이었다.
이 일로 조선의 조야는 발칵 뒤집혔고, 김 대감과 그 일파는 역적으로 몰려 삼대가 멸하는 화를 당했다. 백성들은 통쾌함에 만세를 불렀다. 이렇듯, 배천동의 도둑질은 단순한 절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하게 짜인 한 편의 연극이었고, 썩어빠진 권력을 향한 통렬한 심판이었다. 그는 훔침으로써 빼앗는 것이 아니라, 훔침으로써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도둑이라 부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 유일한 희망이라 여기며, 밤이 되면 그의 새로운 전설이 탄생하기를 간절히 염원했던 것이다.
※ 천하를 호령하던 그 역시 세월은 피하지 못한다.
천하를 제 발아래 둔 듯 호령하던 배천동이었지만, 무심한 세월의 무게는 그 역시 감당할 수 없었다. 예순을 훌쩍 넘긴 그의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밤을 새워 담을 넘고 나면 다음 날은 온몸의 뼈마디가 쑤셔왔고, 한때는 바람 같았던 걸음도 이제는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는 여전히 자신이 ‘청소’해야 할 쓰레기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지막 도둑질은, 백성들의 구휼미를 빼돌려 자기 창고에 쌓아둔 악독한 군수의 집에서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일을 마쳤다. 군수가 빼돌린 쌀은 다시 관아의 창고로 돌려놓았고, 그의 죄를 입증할 장부는 현감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문제는 그 후에 일어났다. 일을 마치고 은신처로 돌아오던 길, 어두운 밤길에 그만 발을 헛디뎌 얕은 개울에 빠지고 만 것이다. 젊었을 적이라면 웃어넘겼을 사소한 사고였지만, 젖은 몸으로 밤새 차가운 가을바람을 맞은 것이 탈이었다. 그날 밤부터 그는 지독한 오한과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평생을 외로이 살아온 그에게 약 시중을 들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양 변두리의 눅눅하고 어두운 토굴 속, 그는 홀로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그의 파란만장했던 일생이 희미한 환등기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굶주림에 지쳐 처음 빵 한 조각을 훔쳤을 때의 그 서러움, 처음으로 탐관오리의 집에 들어가 그의 위선을 보았을 때의 그 분노, 그리고 수많은 위험 속에서도 자신의 정의를 실현했을 때의 그 짜릿한 통쾌함.
그는 생각했다. ‘나는 도둑으로 살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훔친 적은 없었다. 나의 도둑질은 썩은 상처를 도려내는 외과의의 칼과도 같았지. 물론, 칼은 칼이다. 사람들은 나를 도둑이라 손가락질할 테지. 괜찮다. 나는 그들의 심판을 받기 위해 산 것이 아니니까.’ 그의 의식이 점차 가물가물해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목전까지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미소를 지었다. “평생을 남의 집 담을 넘었더니, 결국엔 저승의 문턱을 넘게 되는구나. 염라대왕이라… 과연 그자는 내 도둑질의 가치를 제대로 저울질할 수 있을는지. 이 또한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아니겠는가.” 그의 마지막 숨이 잦아들고, 토굴 안에 완벽한 정적이 흘렀다.
바로 그 순간, 토굴의 입구에 말없이 서 있는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검은 도포에 갓을 쓴, 얼굴에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저승차사들이었다. 배천동의 영혼은 자신의 차가운 육신을 조용히 내려다본 후, 몸을 돌려 그들에게 예를 갖췄다. “두 분 나리, 이 먼지 나는 소굴까지 찾아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십니다. 저승길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소?” 그의 의연하고 담담한 태도에, 수만 명의 망자를 다뤄온 저승차사들조차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들의 명부에는 분명 ‘조선을 뒤흔든 대도(大盜)’라 적혀 있었는데, 눈앞의 영혼에게서는 죄인의 비굴함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배천동. 명을 받고 왔다. 길을 서둘러야 한다.” 배천동은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지막 여정이자, 가장 거대한 심판의 무대가, 그렇게 조용히 막을 올리고 있었다.
※ 수많은 영혼이 고통 속에 헤매는 저승길.
저승으로 가는 길은 길고도 험했다. 길이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길의 형태조차 없는 혼돈 그 자체였다. 배천동의 발밑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혓바닥처럼 낼름거리며 올라왔고, 등 뒤에서는 얼음 같은 바람이 칼날처럼 날아와 살을 에는 듯했다. 길 양옆으로는 수많은 영혼들이 자신의 죄의 무게에 짓눌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고 있었다. 어떤 자는 온몸이 칼에 찔린 채 피를 흘렸고, 어떤 자는 거대한 맷돌에 갈려 형체도 없이 으스러지고 있었다. 이승에서 부와 권세를 누렸을 법한 자들의 교만한 영혼도, 이곳에서는 예외 없이 겁에 질려 울부짖으며 자비를 구걸하고 있었다.
배천동은 그 모든 참상을 묵묵히 지켜보며 걸었다. 그의 눈에는 공포가 아닌, 기묘한 분석의 빛이 감돌았다. ‘저 자는 필시 백성의 재물을 탐한 탐관오리로구나. 죽어서도 황금을 놓지 못하고, 저리 펄펄 끓는 쇳물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쯧쯧, 어리석은지고.’ ‘저쪽의 계집은 필시 입으로 지은 죄가 많았던 모양이다. 혀가 길게 뽑혀 그 위를 소가 밭을 갈 듯 거니는구나. 이승이나 저승이나, 함부로 놀린 혀가 가장 큰 화근인 법이지.’ 그는 마치 저승의 형벌 체계를 연구하는 학자처럼, 각각의 죄와 그에 합당한 벌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기이한 행보에, 그를 인도하던 차사들조차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자는 대체 무엇인가.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기나긴 길의 끝에, 마침내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한 성문이 나타났다. ‘풍도성(酆都城)’. 모든 망자가 거쳐 가야 하는 심판의 도시였다. 성문을 지나자, 그 안은 이승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거대하고 복잡했다. 수많은 전각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그 사이를 수많은 옥졸들과 판관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그 모든 전각의 중심,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지옥 전체를 울리는 듯한 위엄을 뿜어내는 건물이 있었다. 바로 저승의 군주, 염라대왕이 거하는 염라전이었다. 염라전의 문은 그 높이가 수십 장에 달했고, 문을 지키는 것은 머리는 소요, 몸은 사람인 우두(牛頭)와, 얼굴은 말이요, 손은 사람의 것인 마면(馬面) 옥졸이었다. 그들의 눈에서는 지옥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배천동은 그들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 마침내 거대한 법정 안으로 들어섰다. 법정 안은 상상 이상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에는 수만 명은 족히 될 법한 판관과 옥졸들이 도열해 있었고,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새로운 죄인인 배천동에게로 향했다. 그 모든 시선의 정점, 까마득히 높은 옥좌 위에는 산과도 같은 거구의 염라대왕이 앉아 있었다. 그는 얼굴에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았으나, 그 존재만으로도 공간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옥좌 옆, 망자의 일생을 비추는 업경대는 스스로 서늘한 빛을 내뿜으며 다음 죄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천동은 성큼성큼 걸어 나가, 법정의 한가운데, 바로 염라대왕의 시선이 가장 정확하게 꽂히는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히는 대신, 꼿꼿이 편 채로, 옥좌 위의 절대자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수천 년 염라대왕의 역사상, 이토록 무례하고 당당한 죄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법정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고, 절대적인 정적이 흘렀다. 염라대왕의 굳게 닫힌 입술이, 마침내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그의 일생의 죄가 낱낱이 기록된 죄목이 낭독되고, 빼도 박도 못할 증거들이 업경대에 비친다.
염라대왕의 굳게 닫혔던 입술이 열리고, 지옥의 가장 깊은 곳부터 울려오는 듯한 목소리가 염라전 전체를 뒤흔들었다. “죄인 배천동은 고개를 들고, 너의 죄를 들으라.” 그 목소리에는 천지를 창조하고도 남을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배천동은 이미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었기에, 그저 옥좌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염라대왕의 옆에 서 있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얀 판관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집채만 한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그것은 배천동이 평생에 걸쳐 저지른 도둑질의 목록, 그의 죄업이 낱낱이 기록된 죄목록(罪目錄)이었다. 판관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그 죄목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죄인 배천동. 갑신년 삼월 보름, 전라감영의 창고를 열고 나라에 바칠 군량미 오백 석을 훔친 죄. 병술년 오월 초사흘, 파주 목사 이 아무개의 집에서 그의 딸 혼수품으로 마련한 비단 삼백 필을 훔친 죄. 경자년 시월 그믐, 개성 유수 박 아무개의 비밀 금고에서 황금 천 냥을 훔친 죄…” 판관의 목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가 죄목 하나를 낭독할 때마다, 법정 중앙에 놓인 거대한 업경대는 서늘한 빛을 발하며 그날의 범행 장면을 생생하게 비춰냈다. 비호처럼 담을 넘는 배천동의 모습, 어둠 속에서 자물쇠를 따는 그의 정교한 손놀림, 그리고 유유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까지.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빼도 박도 못할 완벽한 증거였다. 법정에 도열한 저승의 관리들은 혀를 찼다. 저토록 많은 죄를 짓고도, 저리 뻔뻔한 낯으로 서 있다니. 당장이라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도 시원찮을 대역죄인이라 수군거렸다.
판관이 읽어 내려간 죄목은 무려 수백 가지에 달했다. 두루마리의 끝이 보일 무렵, 판관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마지막 죄목을 읽었다. “…계묘년 구월 스무나흘, 담을 넘다 발을 헛디뎌,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객사한 죄!” 그 마지막 죄목에, 배천동은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죽음마저 죄목에 포함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의 웃음소리에 법정은 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감히, 염라대왕의 법정에서 웃음소리를 내다니. 옥졸들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판관은 두루마리를 거칠게 말아 쥐고, 배천동을 향해 추상같이 외쳤다. “죄인 배천동! 업경대에 비친 증좌가 이토록 명백하고, 너의 죄가 하늘에 닿을 만큼 크거늘, 네놈은 아직도 웃음이 나오느냐! 이 모든 죄를 순순히 인정하고, 대왕님의 자비를 구하겠느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배천동에게로 향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단 한 번의 자비라도 구걸하는 것. 그것이 수천 년간 이 법정에서 반복되어 온 죄인들의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지만 배천동의 대답은 모두의 예상을 완벽하게 빗나갔다. 그는 비웃음마저 거두고, 아주 진지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법정 전체에 울려 퍼지도록 외쳤다. “인정하고말고. 판관 나리께서 읊으신 모든 죄는, 단 하나도 틀림없이 이 배천동이 행한 바가 맞소이다.”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옥좌의 염라대왕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내 폭탄과도 같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허나, 나는 나의 도둑질을 인정할지언정, 그것을 죄라 인정할 수는 없소이다.”
※ 배천동은 모든 죄를 순순히 인정한다.
배천동의 그 한마디는,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거대한 바위와도 같았다. 저승의 법정 전체가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죄를 인정하되, 죄가 아니라니. 이것은 염라대왕의 권위와 저승의 법도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신성모독적인 발언이었다. 판관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네 이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느냐! 도둑질이 죄가 아니면 무엇이 죄란 말이냐!” 그 말에 배천동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자신의 마지막 변론을, 마치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차분하고 논리 정연하게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판관 나리, 나리는 방금 나의 죄를 물으셨소. 그렇다면 나 역시 나리께 하나 물어봅시다. 도둑질이란 무엇입니까? 남의 것을 탐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옵니까?” 그는 판관을 지나, 옥좌의 염라대왕을 향해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평생을 남의 것을 훔쳐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땀 흘려 일하는 농부의 쌀가마를 훔친 적이 없으며, 자식을 위해 밤낮으로 길쌈하는 어미의 옷감을 훔친 적도 없습니다. 제가 훔친 것은, 이미 훔쳐진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제가 훔친 전라감영의 군량미 오백 석, 그것은 본디 굶주린 백성들의 입으로 들어갔어야 할 나라의 재산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전라감사는 그것을 빼돌려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있었으니, 진짜 도둑은 제가 아니라 바로 그놈이 아니었겠습니까? 저는 그저, 도둑맞은 물건을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겨, 진짜 주인을 찾아주려 했을 뿐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업경대가 스스로 빛을 발하며 당시 전라감사의 추악한 행적을 비추기 시작했다. 창고에 쌀을 쌓아두고 굶어 죽는 백성을 외면하는 모습, 그 쌀을 상인과 결탁하여 비싼 값에 팔아넘기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법정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배천동은 멈추지 않았다. “제가 훔친 파주 목사의 비단 삼백 필, 그것은 어떻습니까? 그 비단은 늙은 파주 목사가 자신의 딸을 판서 댁 첩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마련한 뇌물이었습니다. 그는 그 대가로 자신의 죄를 덮고 더 큰 권력을 탐하려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나라의 기강과 사람의 도리를 훔친 대역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업경대는 또다시 파주 목사의 은밀한 거래 장면을 비춰냈다.
그는 판관이 읊었던 자신의 죄목 하나하나를 이런 식으로 반박했다. 아니, 반박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도둑질에 대한 명쾌한 해설이자, 이승의 위선자들을 향한 통렬한 고발장이었다. 그는 이승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마지막 심판을, 바로 이 저승의 법정 한가운데서 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변론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염라대왕을 향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염라대왕이시여!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고 들었소. 그렇다면 대답해 주시오. 백성의 고혈을 빨아 자신의 배를 채운 자가 도둑입니까, 아니면 그놈의 것을 잠시 빼앗아 조롱한 제가 도둑입니까? 썩은 고름을 짜내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는 법. 저의 도둑질이 진정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만큼 큰 죄악이라 생각하십니까?” 그의 질문은 더 이상 죄인의 변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승의 법이 외면했던 정의의 본질에 대한, 저승의 신을 향한 준엄한 물음이었다. 염라대왕은 평생 처음 받아보는 그 질문에, 굳게 닫혔던 입술 사이로 깊은 신음을 흘렸다.
※ 그의 당당함과 논리에 염라대왕은 깊은 고뇌에 빠진다.
배천동의 마지막 질문이 염라전의 거대한 공간을 가득 메운 채 오랫동안 떠다녔다. 수천 년간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저승 법도의 절대적인 권위가, 한낱 도둑의 영혼 앞에서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시왕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고, 판관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 누구도 감히 배천동의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했다. 염라대왕은 옥좌에 앉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앞 업경대에는 배천동의 죄와 함께, 그가 훔쳤던 자들의 더 크고 추악한 죄악들이 번갈아 비치고 있었다. 법도에 따르면 배천동은 명백한 죄인이었다. 도둑질은 그 이유를 막론하고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중죄였다. 하지만 그의 죄를 벌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 썩은 것을 도려낸 칼을, 썩었다는 이유만으로 벌할 수 있는가. 염라대왕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걸고 가장 어려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기나긴 침묵을 깬 것은 염라대왕 자신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법정 전체가 그의 그림자 아래에 놓이는 듯했다. 그는 배천동을 향해, 이전과는 다른, 아주 미묘한 감정이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배천동. 너의 말은 실로 이치에 닿아 있으며, 너의 배포는 하늘을 찌를 만하구나. 허나, 법은 법이다. 네가 평생 남의 것을 훔친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그 죄를 묻지 않는다면 이 저승의 질서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의 말에 배천동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판결이 내려지든,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염라대왕의 판결은 계속되었다. “하여, 나는 너에게 지옥의 형벌을 내린다. 너는 영원히 도둑질의 업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법정은 술렁였다. 결국엔 지옥행이란 말인가. 하지만 염라대왕의 다음 한마디에, 그 술렁임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허나, 너는 죄인으로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새로운 직책을 내린다. 너를 지금 이 순간부터, 저승의 죄업을 감찰하는 ‘특별 차사’로 임명하노라!” 특별 차사. 저승의 역사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직책이었다. 염라대왕은 설명을 덧붙였다. “너의 새로운 임무는 도둑질이다. 하지만 네가 훔쳐야 할 것은 이승의 재물이 아니다. 바로 이 저승의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려는 위선자들의 영혼, 자신의 죄를 숨기고 뻔뻔하게 극락왕생을 꿈꾸는 자들의 마지막 희망을 훔쳐내는 것이다. 너는 너의 그 신출귀몰한 능력으로, 저승의 그림자가 되어, 숨겨진 죄악을 샅샅이 찾아내 나의 심판대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내리는 형벌이자, 새로운 기회다. 너는 영원히 도둑으로 살아가되, 이제부터는 저승의 정의를 위한 도둑이 되는 것이다. 이 판결에, 따르겠느냐?”
이것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실로 전대미문의 판결이었다. 죄인에게 벌을 내리되, 그의 재능과 철학을 가장 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지옥에 보내되, 그곳의 간수가 되게 한 것이다. 배천동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이내, 평생 처음으로 허리를 깊이 숙여 염라대왕에게 큰절을 올렸다. “대왕님의 깊으신 뜻, 이 배천동, 목숨 아니, 영혼을 바쳐 따르겠나이다.” 그날 이후, 저승에는 새로운 전설이 생겨났다고 한다. 자신의 죄를 숨기고 재판에 선 위선적인 영혼들 앞에, 홀연히 그림자처럼 나타나 그들의 마지막 변명마저 훔쳐 가 버리는 ‘척결차사(剔抉差使)’, 즉 도려내어 없애는 차사. 사람들은 그가 바로, 염라대왕 앞에서 자신의 죄를 당당히 인정했던 희대의 도둑, 배천동의 새로운 모습이라고들 이야기했다.
유튜브 엔딩멘트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죄가 썩은 세상을 향한 심판의 칼날이었다면, 그 무게는 누가, 어떻게 재어야 할까요? 어쩌면 진정한 정의란, 법전이 아닌 각자의 마음속 저울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명쾌한 판결을 내렸던 염라대왕조차, 도무지 그 진실을 밝혀내지 못해 판결 자체를 포기해버린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다음 시간에는, <염라대왕도 해결 못한 조선의 미스터리 사건>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