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왕의 운명을 바꾼 무녀, 대가로 첫날밤 신랑의 얼굴을 잊었다 《무속신화》
태그
#무속신화, #무녀, #판타지사극, #로맨스, #기억상실, #반란, #운명, #희생, #감동실화, #순애보, #국왕, #무속신앙, #전통설화, #애절한사랑, #오디오드라마
#무속신화 #무녀 #판타지사극 #로맨스 #기억상실 #반란 #운명 #희생 #감동실화 #순애보 #국왕 #무속신앙 #전통설화 #애절한사랑 #오디오드라마


후킹멘트
운명을 거스른 대가로, 평생을 사랑하기로 맹세한 정인의 얼굴을 영영 잊어버리게 된다면 어떨까요?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제물로 바친 한 무녀와, 그녀의 곁을 묵묵히 지킨 남편의 눈물겹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운명조차 갈라놓지 못한 가슴 먹먹한 이 설화 속으로 지금 바로 떠나보시죠.
※ 1: 왕의 죽음을 본 무녀의 비극적 선택과 희생
사방이 붉은 비단으로 장식된 신방 안, 은은하게 타오르는 촛불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면에 아른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평생 신령을 모시며 고독하게 살아갈 줄 알았던 삶에 찾아온 기적 같은 인연이었다. 화려한 활옷을 벗어내린 자리에는 수줍은 미소와 귓가를 간지럽히는 다정한 숨결만이 남아있었다. 창밖으로는 봄바람에 흩날리는 매화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굳은살이 박인 사내의 크고 따뜻한 손이 떨리는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이리도 고운 사람을 나의 처로 맞이하다니,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소. 내 평생 당신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일은 없게 하리다. 신령님께 맹세코, 당신만을 은애할 것이오."
'어찌 이리도 다정하신 분일까. 차가운 신당에서 평생을 얼어붙은 채 살아온 내 마음을 녹여주신 분. 당신의 이 따스한 눈동자와 다정한 목소리를 내 영혼에 새겨두고, 죽는 날까지 잊지 않으리라.'
그 다정한 맹세에 화답하듯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 타오르던 촛불이 미친 듯이 요동치더니 핏빛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귓가를 울리던 다정한 사내의 목소리는 아득하게 멀어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천둥이 치듯 끔찍한 비명과 말발굽 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눈앞이 번쩍이며 아득해지더니, 아름다운 신방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참혹한 환영이 덮쳐왔다.
불길에 휩싸인 궁궐, 검붉은 피로 물든 어전, 그리고 반란군의 서늘한 칼날 아래 처참하게 목이 떨어지는 젊은 임금의 모습. 임금의 잘린 목이 굴러떨어지며 흘린 피가 도성을 강물처럼 뒤덮고, 수많은 백성들이 창칼에 찔려 울부짖는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아아악!"
"부인! 부인, 왜 그러시오! 어디가 아픈 것이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몸을 사내가 다급하게 안아 올렸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덜덜 떠는 몸을 다독이는 사내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귓가에 맴도는 원혼들의 통곡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다. 하늘이 무녀에게 내려준 잔혹한 예지, 피할 수 없는 국운의 종말을 알리는 신령의 경고였다.
"서방님… 잠시, 잠시만 물을 떠다 주시겠습니까. 그저 갑자기 기가 허해져 현기증이 난 모양입니다."
사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방을 나서자마자, 비틀거리며 일어나 신방 한구석에 숨겨둔 짐보따리를 풀어헤쳤다. 무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피로 물든 백성들의 통곡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임금의 목숨이 끊어지면 나라가 무너지고 수많은 생명이 잿더미가 될 것이다. 운명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멈추기 위해서는, 하늘의 뜻을 비틀어버릴 거대한 금술(禁術)을 써야만 했다. 청동 방울을 꺼내 쥐고, 작은 단도로 자신의 손바닥을 깊게 그어 흘러내리는 붉은 피로 바닥에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늘이시여, 억조창생을 굽어살피는 신령이시여! 부디 굽어살피시어 다가오는 핏빛 재앙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나라의 주인이 흘릴 피를, 제 육신과 영혼을 갉아먹는 고통으로 대신하겠나이다!'
사방이 일그러지며 방 안 가득 매캐한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허공에서 기괴하고도 장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의 몸으로 천기를 거스르려 하느냐. 운명의 물길을 돌리려면 그에 상응하는 거대한 제물이 필요하다. 네 목숨 따위로는 부족하다. 네 영혼의 가장 깊은 곳,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기억을 내어놓아라. 그것을 제물로 바친다면, 임금의 명운을 가리고 반란의 기운을 잠재울 수 있도록 너에게 천기를 열어주마.
'가장 소중한 기억… 가장 소중한 기억이라니요….'
시선이 흔들렸다. 방문 밖에서 물그릇을 들고 서성이는 다정한 사내의 그림자가 보였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알려준 사람. 평생을 함께하자 맹세하며 마주 보았던, 조금 전까지 귓가에 맴돌던 다정한 숨결. 촛불 아래 빛나던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와 따뜻한 미소. 무녀로서 살아온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구원의 빛이었다. 그 얼굴을 잊는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도려내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눈앞에는 여전히 불타는 궁궐과 비명을 지르는 백성들의 환영이 아른거렸다. 나라가 무너지면 어차피 이 사랑도 지켜낼 수 없다. 피눈물을 흘리며 꽉 쥔 주먹에서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바치겠나이다…! 제 영혼을 밝혀준 유일한 빛, 제 지아비의 얼굴과 이 혼례의 밤에 대한 모든 기억을 제물로 바치겠나이다! 부디 그 대가로 임금의 목숨을 구하고 이 나라를 구할 길을 알려주시옵소서!"
방울을 미친 듯이 흔들며 피 섞인 절규를 토해내는 순간, 뇌리를 향해 거대한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며, 신방 안에서 다정하게 미소 짓던 사내의 얼굴이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매, 그의 입술, 그의 뺨의 온기마저 모두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역적들의 피 묻은 맹세가 숨겨진 곳을 네 영혼에 새겨주마.
머릿속으로 역적들의 소굴과 반란의 증거가 숨겨진 비밀 장소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하지만 동시에, 방금 전까지 자신을 향해 사랑을 속삭이던 정인의 얼굴은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까마득한 어둠이 시야를 덮쳤고,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만이 그녀가 무언가 소중한 것을 영원히 잃어버렸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무녀의 의식은 차가운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 2: 기억을 잃은 무녀
창살을 뚫고 들어온 눈부신 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진 듯한 극심한 통증과 함께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응시하다, 문득 자신의 곁에 누군가 기대어 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침상 곁에 엎드려 잠든 사내의 정수리가 보였다.
'이 사내는 누구지? 어찌하여 내 신방에 낯선 사내가 있는 것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서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깊은 수심이 가득한, 그러나 몹시 다정하고 애틋한 눈빛으로 무녀를 바라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짙은 눈썹과 반듯한 콧날, 다부진 입술을 가진 사내. 하지만 무녀의 기억 속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완벽한 타인의 얼굴이었다.
"부인! 이제야 눈을 뜨는구려. 밤새 열이 끓어 어찌나 걱정했는지 아시오. 몸은 좀 괜찮소?"
사내가 안도감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으려 했다. 그 자연스럽고도 다정한 손길에 무녀는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끌어당겨 구석으로 몸을 웅크렸다. 사색이 된 얼굴로 덜덜 떠는 무녀의 모습에 사내의 손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멈추었다.
"누, 누구십니까? 뉘신데 감히 여인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 이리 경망스럽게 구는 것입니까! 썩 나가지 못하시겠습니까!"
사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허망한 표정으로 웅크린 무녀를 바라보던 사내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부인… 농이 지나치시오. 내가 누군지 묻는 것이오? 어젯밤 백년가약을 맺고 평생을 함께하기로 맹세한 당신의 지아비, 당신의 서방이 아니오."
'지아비? 이 낯선 사내가 나의 서방님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내 정인은… 나의 서방님은….'
순간, 벼락을 맞은 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끔찍한 기억이 있었다. 핏빛으로 물든 방, 허공에서 울려 퍼지던 신령의 목소리, 그리고 제물로 바쳐진 자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 숨이 턱 막혀왔다. 눈앞이 어지러워지며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는 어젯밤 단도로 깊게 그어 생생하게 벌어진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천기를 엿본 대가로, 임금의 목숨을 구할 방도를 얻은 대가로, 자신은 정인의 얼굴을… 첫날밤의 그 아름다웠던 기억을 통째로 신령에게 빼앗겨버린 것이다.
"아아… 아아아악!"
짐승의 울음 같은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오열하는 무녀의 모습에 사내가 다급하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밀어내려 발버둥 쳤지만, 사내는 강하고도 따뜻한 품으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부인! 도대체 왜 이러시오! 어젯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기에 내 심장이 멎는 줄 알았소.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것이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사내의 품에 안긴 채, 무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핏기없는 입술을 달싹였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 끔찍한 진실을 고백해야만 했다.
"서, 서방님… 용서하십시오. 제가… 제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천기를 엿보고 나라의 핏빛 운명을 비틀기 위해… 신령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제 영혼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서방님의 얼굴과, 서방님과 함께한 어젯밤의 기억을 모두… 빼앗겨 버렸습니다. 제 눈앞에 계신 서방님이… 누구신지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차갑게 내쳐질 것이라 생각했다. 미친 여인이라며 손가락질하고, 짐을 싸서 떠나버려도 할 말이 없었다. 평생을 기약한 여인이 하루아침에 남편의 얼굴을 잊어버렸다는 끔찍한 사실을 어느 사내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두려움에 질려 눈을 질끈 감고 처분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정수리로 떨어지는 것은 매서운 호통이 아닌, 뜨거운 눈물 방울이었다. 사내는 무녀를 원망하기는커녕, 더욱 애처롭게 품에 끌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보 같은 사람… 어찌하여 그런 무모한 짓을 하였소. 나를 기억하지 못해 이리도 서럽게 우는 것이오? 괜찮소. 다 괜찮소. 당신이 내 얼굴을 잊었다 한들,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내 심장이 당신을 향해 뛰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이오."
'서방님….'
"얼굴 따위는 한낱 가죽에 불과하오. 당신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만큼 고결한 영혼을 가졌다는 것, 그것이 내가 은애하는 당신의 진짜 모습이오. 백 번을 잊어버린다면, 내가 천 번을 다시 당신에게 내 이름을 말해주겠소. 그러니 제발 자책하지 마시오."
그 한없는 다정함과 거대한 사랑 앞에 무녀는 소리 내어 목놓아 울었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을 안고 있는 이 굳건한 팔과 따뜻한 체온만큼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익숙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오열하던 무녀는, 이내 눈물을 닦아내고 사내의 품에서 벗어나 단호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슬픔에 잠겨있을 시간이 없었다.
"서방님. 서방님의 그 따뜻한 은혜는 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갚겠습니다. 허나 지금은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신령께서 제 기억을 앗아간 대가로 반란의 증거가 숨겨진 곳을 알려주셨습니다. 도성 북쪽, 병조판서의 은밀한 사저 깊은 곳에 역적들이 피로 맹세한 연판장과 거사 일일이 적힌 밀서가 숨겨져 있습니다. 임금의 목숨과 나라의 운명이 그 문서에 달려있습니다."
사내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 한구석에 세워져 있던 자신의 낡은 검을 집어 들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무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잃어버린 기억의 무게가 헛되지 않도록 하겠소. 당신의 그 짐, 이제는 내가 함께 짊어지리다. 내 당신의 눈과 손발이 되어 줄 터이니, 어서 그곳으로 갑시다."
기억을 잃은 무녀와, 그녀의 곁을 묵묵히 지키기로 맹세한 낯선 정인. 두 사람은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채 험난한 사지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 3: 반란의 증거를 찾기 위해 사지로 뛰어든 두 사람
달빛조차 먹구름에 가려진 칠흑 같은 밤. 도성 북쪽 외곽에 자리 잡은 병조판서의 사저는 거대한 요새처럼 삼엄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담장 주위로는 횃불을 든 사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순찰을 돌고 있었고, 낙엽 하나 밟는 소리조차 크게 울릴 만큼 고요하고 살벌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녀와 사내는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담장 너머의 거대한 고목 나무 위에서 숨죽인 채 저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녀는 눈을 감고 신령의 기운을 더듬었다. 영혼의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천기의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뚜렷한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기입니다. 본채 뒤편,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가시나무를 둘러놓은 별채. 저 아래에 땅을 파고 만든 비밀 지하 실이 있습니다. 반란의 명분과 가담자들의 이름이 적힌 연판장, 그리고 군사를 움직일 병부가 모두 저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사내는 무녀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찰조가 모퉁이를 도는 찰나의 순간, 사내는 짐승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담장을 뛰어넘어 바닥에 소리 없이 착지했다. 그리고는 무녀를 안전하게 받아내어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두 사람은 은밀하고도 민첩하게 별채를 향해 다가갔다.
별채 앞에는 두 명의 호위무사가 매서운 눈초리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무녀가 소맷자락에서 작은 호신용 단검을 쥐고 긴장하는 순간, 사내가 무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제지했다. '내게 맡기시오'라는 듯한 단단한 눈빛. 낯선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사내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반대편 담장 너머로 힘껏 던졌다.
"무슨 소리냐!"
호위무사들이 칼을 빼 들고 소리가 난 쪽으로 급히 다가간 사이, 사내는 무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순식간에 별채의 툇마루 위로 몸을 날렸다.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낡은 철사의 끄트머리를 집어넣어 달칵, 하고 자물쇠를 푸는 사내의 솜씨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날렵했다.
어두컴컴한 별채 안으로 들어서자 짙은 곰팡내와 묵은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녀는 기억 속 환영이 가리키는 곳,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병풍 뒤로 직진했다. 겉보기엔 평범한 나무 바닥이었지만, 무녀가 특정한 무늬가 있는 널빤지를 힘껏 누르자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의 일부가 열리며 아래로 향하는 좁은 돌계단이 나타났다.
지하실 안은 습하고 차가웠다. 희미한 촛불 하나만이 탁자 위를 밝히고 있었고, 그 위에는 붉은 천으로 덮인 묵직한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무녀가 떨리는 손으로 천을 걷어내고 상자를 열었다. 그곳에는 반란군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피 묻은 연판장과, 각 도의 군사들에게 밀명을 내리는 서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것만 임금에게 전달한다면, 역적들을 단숨에 소탕하고 핏빛 미래를 막을 수 있었다.
"찾았습니다. 서방님, 이것입니다!"
그때였다. 지하실 입구 쪽에서 거친 발소리와 함께 분노에 찬 고함이 들려왔다.
"쥐새끼들이 숨어들었다! 별채를 포위하고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돌멩이 소리에 속았던 호위무사들이 눈치를 채고 돌아온 것이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사병들이 별채를 에워싸고 횃불을 치켜드는 소리가 지하실 안까지 웅웅거리며 울려 퍼졌다. 공포에 질린 무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증거를 찾기도 전에 이곳에서 비참하게 목숨을 잃게 생겼다.
사내는 굳은 표정으로 연판장과 서찰들을 재빨리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검을 빼 들고 무녀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부인, 내 등 뒤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 이 증거만큼은 무사히 빠져나가게 할 것이오."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사병들을 향해 사내가 번개처럼 튀어 나갔다. 좁은 지하실 통로에서 피 튀기는 혈투가 벌어졌다. 사내의 검은 어둠 속에서 은빛 궤적을 그리며 춤을 추었고, 반란군 사병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내렸다. 하지만 적의 수는 너무 많았고, 사내의 어깨와 팔에도 크고 작은 자상들이 생겨나며 붉은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안 돼… 나 때문에 서방님마저 잃을 수는 없어…!'
무녀가 다급히 주문을 외우며 소매에서 부적을 꺼내 허공에 흩뿌렸다.
"신령이여, 어둠의 장막을 거두어 적들의 눈을 멀게 하소서!"
부적이 타오르며 짙고 매캐한 연기가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사병들이 콜록거리며 시야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사내는 무녀의 손을 낚아채고 연기 속을 뚫어 돌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랐다. 별채 밖으로 빠져나온 두 사람은 담장을 넘어 미친 듯이 밤의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횃불을 든 추격대들이 악착같이 따라붙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 산속 깊은 곳 좁은 동굴에 몸을 숨겼다. 거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서로를 부둥켜안고 어둠 속에 웅크렸다. 동굴 밖으로 추격대들이 발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가는 동안, 무녀는 자신을 감싸 안은 사내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있었다.
'쿵, 쿵, 쿵….'
사내의 땀 냄새와 피 냄새, 그리고 고막을 울리는 강렬하고도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 무녀는 이 심장 박동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얼굴은 낯설고 아무런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이 품에 안겨 듣는 심장의 울림만큼은 그녀의 영혼을 강하게 흔들고 있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를 지키고 있다. 잃어버린 기억의 빈자리를, 이 낯선 정인은 목숨을 건 헌신으로 채워가고 있었다.
추격대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사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녀를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친 사내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무녀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닦아내 주었다.
"서방님… 다치셨습니까. 저 때문에 이 험한 꼴을…."
"나는 괜찮소. 증거도 무사히 챙겼으니 이제 동이 트는 대로 궐로 달려가 전하께 이 사실을 알리면 되오."
사내의 맑고 단단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무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뜨거운 감정을 느꼈다.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절망감보다, 눈앞에 있는 이 사내를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멀리서 동이 터오며 붉게 물드는 도성의 궁궐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운명의 핏빛 밤이 끝나고, 거대한 폭풍을 잠재울 결단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 4: 목숨을 걸고 반란을 진압하다)
어둠이 짙게 깔렸던 하늘 저편에서부터 붉은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며, 도성의 아침이 열리고 있었다. 밤새 험난한 산길을 내달려온 두 사람의 몰골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무녀의 고운 비단옷은 나뭇가지와 바위에 찢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짚신이 벗겨진 발에서는 붉은 피가 배어 나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바닥에 핏자국을 남겼다. 그녀의 곁을 호위하며 밤새 살수를 막아낸 사내의 어깨와 등에는 깊은 검상이 새겨져 있었고, 찢어진 소매 틈으로는 여전히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의 눈빛만큼은 굶주린 호랑이처럼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가슴팍에 깊숙이 숨겨둔, 역적들의 피 묻은 맹세가 담긴 나무 상자를 꽉 움켜쥔 채 굳게 닫힌 궁궐의 광화문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멈추어라! 뉘신데 감히 이른 아침부터 궐문 앞을 함부로 얼쩡거리는 것이냐! 썩 물러가지 않으면 당장 하옥을 면치 못할 것이다!"
광화문을 지키던 수문장들이 날 선 창을 십자 모양으로 교차하며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피투성이가 된 낯선 남녀의 등장에 경계심을 잔뜩 곤두세운 채 호통을 쳤지만, 사내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선 사내는 품속에서 피에 젖은 자신의 호패와 함께, 과거 임금이 직접 하사했던 용 무늬가 새겨진 옥패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 옥패는 과거 임금의 최측근에서 그림자처럼 곁을 지키던 내금위장만이 지닐 수 있는 신물의 징표였다. 사랑하는 여인과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모든 관직과 부귀영화를 내려놓고 홀연히 궐을 떠났던 조선 최고의 무사가, 나라의 존망이 걸린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다시금 그 징표를 세상 밖으로 꺼내 든 것이다.
"당장 전하를 뵙게 해다오! 촌각을 다투는 일이다. 이 나라 억조창생의 목숨과, 전하의 안위가 걸린 밀서가 내 품에 있다! 당장 길을 비켜라!"
호랑이의 포효와도 같은 사내의 쩌렁쩌렁한 호통과,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옥패를 확인한 수문장들은 사색이 되어 황급히 창을 거두고 성문을 열어젖혔다. 궐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곧장 대전으로 향했다. 마침 아침 조회인 조참이 열리기 직전이었기에, 대전 앞 넓은 마당에는 조정의 대신들이 관복을 갖춰 입고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었다. 그 무리 중에는 간밤에 암살자들을 보내 별채의 증거를 인멸하려 했던 병조판서와 반란의 주동자들도 버젓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죽은 줄만 알았던 사내와 무녀가 피투성이가 된 채 궐 한복판에 나타나자, 마치 백주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역적들의 눈동자에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전하! 엎드려 아뢰옵나이다! 역적들의 추악한 음모를 밝히고 이 나라의 핏빛 미래를 막아낼 증거를 가져왔사옵니다!"
사내의 우렁찬 목소리가 고요하던 대전 앞마당을 천둥처럼 울렸다. 그 절박하고도 결연한 외침에, 굳게 닫혀 있던 대전의 육중한 문이 활짝 열리고 용포를 입은 젊은 임금이 다급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사내는 차가운 박석 위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품속에서 피에 젖은 붉은 천에 싸인 나무 상자를 꺼내어 두 손으로 높이 바쳐 들었다. 임금의 곁을 지키던 도승지가 계단을 내려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건네받았고, 임금의 눈앞에서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역적들이 역모를 다짐하며 붉은 피로 지장을 찍어 맹세한 연판장과, 도성 밖의 각 도 관찰사들과 군사들을 은밀히 움직이려 했던 반란의 거사 일일이 적힌 밀서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단 하루만 늦었어도 도성이 피바다로 변했을 끔찍한 내용들이었다.
밀서를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는 임금의 두 손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맑았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평소 가장 신임하며 국정을 논했던 충신들의 이름이 반란군의 명단 가장 높은 곳에 보란 듯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은 분노로 뼈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쥐며, 대전 앞을 호위하던 수십 명의 금군들을 향해 벼락같이 명을 내렸다.
"당장 저 역도들을 모두 추포하라!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모조리 의금부 하옥에 가두어 그 죄를 엄히 국문할 것이다! 감히 과인을 기만하고 사직을 뒤엎으려 한 저들의 구족을 멸할 것이니라!"
어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군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반란에 가담한 대신들을 철통같이 포위했다. 천하를 호령하던 병조판서를 비롯한 역적들은 감히 변명 한마디조차 올리지 못한 채 바닥에 엎드려 포박당했다. 불과 반나절 만에, 도성을 피바다로 만들고 수많은 백성을 잿더미로 내몰 뻔했던 거대한 반란의 음모가 그 실체를 드러내며 허무하게 진압되는 순간이었다. 무녀가 자신의 영혼을 깎아내려 천기를 엿보아 얻어낸 단 하나의 실마리가,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완벽하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반란군 무리가 짐승처럼 끌려가고 대전 앞이 다시금 고요해지자, 임금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피투성이가 된 채 엎드려 있는 사내와 창백하게 질려 숨을 헐떡이는 무녀에게 다가갔다.
"너희들이 진정 이 나라를 구했구나. 이토록 은밀하고도 치밀한 역적들의 모의를 일개 백성인 너희가 어찌 알고, 목숨을 걸어가며 이 끔찍한 사지에서 증거를 찾아낸 것이냐. 과인은 그대들의 헌신에 깊은 탄복을 금치 못하겠노라."
임금의 하문에 무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핏기없는 입술을 달싹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하, 신녀는 그저 하늘이 보여주신 위기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을 뿐이옵니다. 불타는 궁궐과 백성들의 피맺힌 절규가 귓가를 맴돌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신녀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신령께 제물로 바치고 그 대가로 역적들의 비밀을 얻어내었나이다."
"가장 소중한 제물이라니… 설마 천기를 누설한 대가로 네 목숨을 내어놓기로 맹세라도 한 것이냐?"
임금의 떨리는 목소리에, 곁에 엎드려 있던 사내가 참지 못하고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신 대답을 올렸다.
"전하, 이 가엾은 여인은 전하와 이 나라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평생을 약조한 지아비인 신의 얼굴과, 여인으로서 가장 행복해야 할 혼례 날의 기억을 신령께 통째로 빼앗겨 버렸사옵니다. 지금 이 사람의 텅 빈 두 눈에는, 밤새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낸 곁에 있는 신조차 그저 낯선 타인으로 보일 뿐이옵니다."
그 애끓는 사내의 고백에, 대전 앞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고 임금은 큰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백성을 굽어살펴야 할 군주로서, 일개 가녀린 여인의 그토록 처절하고 고결한 희생 위에 자신의 목숨과 사직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뼈저린 부끄러움과 깊은 경외심이 밀려왔다. 임금은 군주의 체면마저 잊은 채 친히 허리를 굽혀 흙투성이가 된 무녀의 떨리는 어깨를 두 손으로 굳게 감싸 쥐었다.
"네가 나를 살리고, 이 조선을 구하였구나. 내 평생을 바쳐서라도 네가 잃어버린 그 고귀한 기억을 반드시 되찾아 줄 것이다. 천지의 모든 신령과 백성들 앞에서, 이것은 군주로서 맹세하는 나의 절대적인 천명이다!"
피바람이 멎고 찬란한 아침 해가 궁궐의 오색빛깔 단청 위로 눈부시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라는 구원을 얻었고 백성들의 평화는 지켜졌으나, 무녀의 텅 빈 마음속에는 여전히 출구를 알 수 없는 짙은 어둠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 5: 닿지 않는 기억
반란이 평정되고 도성에 닥칠 뻔한 피바람이 걷히자,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평화롭고 활기찬 일상을 되찾았다. 임금은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두 사람의 거룩한 공로를 높이 치하하며, 대궐에서 멀지 않은 명당자리에 수십 칸짜리 크고 화려한 저택을 하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생을 쓰고도 남을 막대한 금은보화와 최고급 비단, 그리고 수많은 노비들을 내려 두 사람의 남은 여생에 티끌만 한 고생도 없게 하려 하였다. 무예와 충성심이 입증된 사내에게는 다시금 조정에 출사 하여 내금위를 이끌어달라며 높은 벼슬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사내는 그 모든 영광스러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소신에게는 지켜야 할 사직보다, 하루하루 말라가는 제 아내를 돌보는 일이 천 배, 만 배는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옵니다.'
사내는 오직 병든 아내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겠다며 스스로 벼슬길을 포기한 채 저택의 안채에만 머물렀다. 겉보기에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영광스럽고 평온한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화려하게 치장된 저택의 깊은 안채에는, 세상의 평화와는 대조적으로 무겁고 서글픈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어느덧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와 뜰 앞의 오래된 매화나무에 푸른 잎이 돋아나고 연분홍 꽃망울이 맺혔건만, 창백한 무녀의 얼굴에는 좀처럼 생기가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가 다르게 얼굴은 촛농처럼 핏기없이 하얗게 질려갔고, 가뜩이나 가녀렸던 몸은 겨울바람에 마른 나뭇가지처럼 위태롭게 야위어만 갔다.
'어찌 이리도 잔혹하고 고통스러운가. 차라리 칼에 찔려 팔다리가 끊어지는 육신의 고통이라면 명약이라도 바르며 견뎌낼 터인데… 내 영혼이 이토록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는 것은 도대체 어떤 약으로 치유할 수 있단 말인가.'
무녀는 창가에 힘없이 기대앉아 우두커니 마당을 응시했다. 마당 저편 햇살이 내리쬐는 곳에서, 사내가 숯불을 피워놓고 정성스럽게 무녀가 마실 탕약을 달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뜨거운 열기에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을 소매로 훔쳐내면서도, 혹여나 불 조절을 잘못하여 약효가 떨어질까 봐 부채질을 한시도 멈추지 않는 그 다정하고 우직한 뒷모습. 무녀도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저 사내가 얼마나 자신을 뼛속 깊이 은애하고 있는지, 밤낮으로 지극정성 자신을 보살피며 단 한 번도 짜증을 내거나 잃어버린 기억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탕약이 완성되어 사내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올 때마다, 무녀의 가슴은 날카로운 비수로 사정없이 후벼 파이는 듯한 끔찍한 이질감과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부인, 탕약이 아주 알맞게 달여졌소. 어서 식기 전에 한 모금 드셔 보시오. 오늘 탕약에는 기력을 보충해 줄 귀한 녹용을 아낌없이 넣었으니, 마시고 나면 한결 몸이 가벼워질 것이오."
사내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따뜻하고 익숙하여 귓가를 스칠 때마다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들었으나, 두 눈앞에 보이는 사내의 얼굴은 여전히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완벽한 타인의 얼굴이었다. 머릿속에는 그를 죽도록 사랑한다는 감정의 껍데기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 그 감정이 뻗어나가야 할 '얼굴'과 '추억'이라는 뿌리가 썩어 문드러진 상태였다. '내가 사랑하는 이는 분명 내 눈앞의 저 사람인데, 내 두 눈은 끊임없이 저 자는 네 서방이 아니라고 속삭인다.'
그 지독한 인지부조화와 영혼의 괴리감은 단순한 우울증이나 마음의 병을 넘어, 무녀의 생명력 자체를 천천히 갉아먹는 치명적인 독약과도 같았다.
"서방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또 서방님의 애를 이리도 태우는군요. 탕약을 마시려 해도 차가운 돌덩이를 삼키는 것처럼 목구멍으로 도무지 넘어가지가 않으니, 제 몸뚱어리가 이제 정말 한계에 달한 모양입니다. 그만 저를… 저를 놓아주십시오."
"어찌 그런 모진 소리를 하시오! 기력이 쇠하여 입맛이 없는 것은 그저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려 편히 쉬지 못해 그런 것일 뿐이오. 내가 십 년이 걸리든, 아니 평생이 걸리든, 백방으로 천하를 수소문하여 부인의 그 예쁜 미소와 기력을 되찾을 방도를 반드시 구해올 것이오. 그러니 제발 그런 약한 마음은 거두어 주시오."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먹여 주는 사내의 거친 손끝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무녀는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쓴 약을 삼키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그날 밤 깊은 새벽, 잠에서 깨어나 우연히 마주친 광경에 결국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이 오열하고 말았다.
차가운 푸른 달빛이 스며드는 마당 한가운데서, 사내가 얇은 홑적삼 차림으로 정화수를 떠놓고 꽁꽁 언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시여… 신령님이시여… 부디,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제 더러운 목숨을 당장 거두어 가셔도 좋고, 제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지옥불에 던지셔도 좋으니, 부디 제 가엾은 아내의 기억을, 그 곱던 미소를 돌려주시옵소서! 저 착한 여인이 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알량한 죄책감에 스스로 말라 죽어가는 것을, 지아비 된 자로서 더는 지켜볼 수가 없나이다. 차라리 제 두 눈을 멀게 하시고, 제 아내의 끔찍한 고통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바닥에 이마를 쾅쾅 찧으며 피울음을 토해내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무녀는 방문 문설주를 부여잡고 숨이 넘어갈 듯 오열했다. 천기를 비틀고 나라와 수백만의 백성을 구한 대가치고는 너무나도 가혹하고 처절한 형벌이었다. 자신을 향한 사내의 저 거대하고도 맹목적인 사랑이 오히려 서로의 숨통을 조이고 지옥불로 밀어 넣고 있었다. '내가 저 사람의 곁을 떠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만이, 이 비극적인 순애보의 저주받은 고리를 끊어낼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무녀의 텅 빈 영혼은 끝없는 어둠의 심연 속으로 속절없이 가라앉으며 서서히 생명의 마지막 빛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 6: 왕이 보낸 조선 최고의 의원과 악사
무녀가 원인 모를 극심한 마음의 병으로 곡기를 완전히 끊고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비보가 곧장 대궐의 임금에게까지 닿았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은 정사를 논하던 어전 회의마저 팽개친 채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옥좌에서 일어났다. 임금은 지체 없이 조선 최고의 명의라 불리는 내의원 수석 어의와, 왕실의 제례 음악을 총괄하는 장악원의 늙은 수석 악사를 무녀의 저택으로 급파했다.
어명을 받들고 화려한 가마를 타고 도착한 백발의 어의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촛농처럼 녹아내린 무녀의 참담한 몰골에 혀를 찼다. 어의가 조심스럽게 무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손가락을 얹고 맥을 짚어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깊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나리, 이것은 평범한 육신의 병이 아니옵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주술의 부작용으로, 신령께서 부인의 영혼 한가운데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놓은 형국이옵니다. 생명의 기운이 그 뚫린 틈 사이로 한 줌의 모래처럼 속절없이 빠져나가고 있사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제일 귀한 영약을 달여 쓴다 한들,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격이라 곧 육신의 한계가 찾아올 것이옵니다. 육신을 보강하는 탕약만으로는 부족하며,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을 영혼 저 깊은 무의식 속에서부터 강제로 끄집어낼 수 있는 강력한 '울림'이 필요하옵니다."
어의는 왕실 비밀 창고에서 특별히 가져온 천년 묵은 산삼과 희귀한 약재들을 진하게 달여, 의식을 잃어가는 무녀의 굳은 입술 사이로 조심스럽게 흘려 넣었다. 억지로 넘어간 약효가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며 식어가는 몸을 데우자, 파랗게 질려있던 무녀의 뺨에 기적처럼 미세한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육신의 그릇이 잠시나마 깨어날 준비를 마치자, 이번에는 곁에서 대기하던 장악원의 수석 악사가 방 한가운데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그는 신비로운 푸른 빛깔을 띤 낡은 거문고를 조심스럽게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부인, 억지로 눈을 뜨려 하지 마시고 이 선율에 오롯이 영혼의 끈을 맡기시옵소서. 이 거문고의 울림이 부인의 굳게 닫혀있는 기억의 문을 두드려, 잃어버린 길을 찾아 줄 것이옵니다."
늙은 악사의 굳은살 박인 투박한 손가락이 거문고의 팽팽한 명주실을 튕기는 순간, 묵직하고도 구슬픈 선율이 방 안의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둥- 당- 둥- 당-. 그것은 단순한 음악의 연주가 아니었다. 숲을 스치는 바람의 숨결, 대지를 울리는 땅의 진동, 그리고 허공을 떠도는 원혼들의 억울한 목소리마저 잠재우는 강력한 주술적인 파동이었다.
눈을 감고 죽은 듯 누워있던 무녀의 귓가로 그 웅장한 거문고 소리가 서서히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아득하게 멀리서,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려오던 소리가 점차 거대한 해일이 되어 그녀의 텅 빈 영혼의 공간을 사정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이 익숙한 선율은 대체 무엇인가….'
무녀의 굳게 닫힌 의식 속으로 기적 같은 환영의 파편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지난 몇 달간 그녀를 괴롭히던 핏빛 궁궐의 끔찍한 환영과 반란군의 비명 소리가 거문고 소리의 진동에 맞춰 짙은 안개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지독한 어둠이 걷힌 자리에, 붉은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따뜻하고 아늑한 방 안의 풍경이 서서히 선명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령에게 제물로 바쳐 영원히 잃어버렸던 그녀의 '첫날밤 신방'이었다. 은은하게 타오르며 춤추는 촛불, 열린 창틈으로 살랑거리며 들어와 흩날리는 매화 향기, 그리고… 고요한 방 안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지던 다정한 거문고 소리. 그렇다. 혼례를 갓 마치고 둘만 남겨진 수줍은 신방에서, 사내는 굳은살 박인 무사의 서툰 솜씨나마 긴장한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직접 이 거문고 산조를 정성스레 연주해 주었었다.
"이리도 고운 사람을 나의 처로 맞이하다니, 험한 칼춤만 추던 내게는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소. 내 평생 당신의 고운 눈에 슬픈 눈물이 고이는 일은 없게 하리다. 천지신명께 맹세코,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오직 당신만을 은애할 것이오."
머릿속을 안개처럼 떠돌기만 하던 그 다정하고 먹먹한 목소리에, 드디어 완벽한 이목구비가 덧입혀지기 시작했다. 숱이 많은 짙은 눈썹, 반듯하게 뻗은 콧날, 다부지지만 부드러운 입술,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바라보듯 한없이 다정하게 휘어지던 그 따뜻한 눈동자. 신령이 무참히 앗아갔던 그 찬란한 기억의 조각들이 거문고 선율을 타고 마치 산산조각 났던 거울이 다시 맞춰지듯 제자리를 찾아가며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너와 네 지아비의 고결한 희생과 굽힘 없는 마음이 마침내 하늘에 닿았다. 천기를 누설하여 운명을 비튼 죗값을 충분히 치렀으니, 이제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제자리로 돌려주마.
마치 꿈결처럼 신령의 장엄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무녀는 헉 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번쩍 눈을 떴다.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를 부여잡고 상체를 일으킨 그녀의 시선이, 곁에서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아 쥐고 눈물범벅이 되어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에 오롯이 멈추었다.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낯선 이방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뇌리를 가득 채운 기억 속 완벽한 정인, 자신을 향해 평생을 맹세하고, 지하실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을 등 뒤로 숨겼으며, 달빛 아래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하늘에 기도하던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지아비. 두 개의 엇갈렸던 잔혹한 세상이 비로소 하나로 완벽하게 겹쳐지며 완전한 빛을 발했다.
"부인… 부인! 나를 보시오! 내가 누군지 알겠소? 내 목소리가 들리시오?"
무녀의 커다란 두 눈에서 참았던 뜨거운 눈물이 둑이 무너진 듯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뻗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내의 거친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손끝에 생생하게 닿는 피부의 촉감과 따뜻한 체온, 그리고 눈앞에 선명하게 아로새겨진 다정한 눈동자.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왔다. 끊어졌던 영혼의 끈이 다시금 단단하게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서방님… 나의 서방님…."
며칠을 앓아누워 무녀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지고 쇳소리가 났으나, 사내에게는 세상 그 어떤 천상의 노래보다 아름답게 들렸다.
"이제야… 길고 긴 어둠을 지나 이제야 똑똑히 보입니다. 첫날밤 수줍은 저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시던 그 고운 얼굴이, 마치 어젯밤의 일처럼 제 눈앞에 생생하고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이 못난 아내를, 당신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해 모진 말로 가슴에 대못을 박던 미련한 저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주셔서… 이 무섭고 차가운 어둠 속에서 마침내 저를 꺼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의 은인, 나의 서방님…."
그 말을 들은 사내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무녀를 으스러질 듯 품 안으로 꽉 끌어안았다. 두 사람이 뿜어내는 환희와 기쁨의 눈물이 방바닥을 흥건하게 적셨고, 닫혀있던 방문 너머로는 어느새 활짝 핀 분홍빛 매화 꽃잎들이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춤을 추며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운명조차 갈라놓으려 했던 두 사람의 위대하고도 결연한 사랑이, 마침내 신의 혹독한 저주마저 이겨내고 그들의 인생에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봄을 피워낸 것이다.
유튜브 엔딩멘트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내던진 무녀와, 그 상실마저 묵묵히 끌어안으며 사랑으로 기적을 만들어낸 남편의 이야기. 두 사람의 아름다운 순애보가 여러분의 마음에도 따뜻한 감동으로 닿았기를 바랍니다. 운명조차 이겨낸 진정한 사랑의 힘, 여러분은 어떻게 들으셨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감상을 남겨주세요! 영상이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리며 다음에도 흥미로운 옛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왕의 운명을 바꾼 무녀, 대가로 첫날밤 신랑의 얼굴을 잊었다》 이미지 프롬프트
등장인물 공통 설정
- 무녀: 20대 중반의 아름다운 조선 여인, 단아한 한국인 얼굴, 검은 머리를 뒤로 빗어 쪽진머리로 묶고 전통 비녀 착용
- 남편: 20대 후반의 건장한 조선 무사, 짙은 눈썹과 다정한 눈동자, 검은 머리를 상투머리로 묶음
- 젊은 임금: 20대 후반의 한국인 남성, 위엄 있는 얼굴, 익선관과 붉은 곤룡포 착용
- 모든 이미지에 조선시대 한국 배경, 한국인만 등장, 전통 한복과 한옥 건축, 외국인·외국 풍경·서양식 건축·현대 물건·현대 의상 제외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