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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착한 사람은 일찍 죽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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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깊어가는 밤, 지친 하루의 끝에 잔잔한 위로와 지혜를 건네는 옛이야기 시간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세상을 오래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가슴을 치며 하늘에 묻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평생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베풀며 착하게만 살던 사람은 어찌하여 젊은 나이에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남의 눈에 피눈물을 내며 욕심만 부리는 악인은 어찌하여 아흔이 넘도록 떵떵거리며 잘만 사는가 하는 물음 말입니다.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바로 그 오랜 원망과 슬픔에 대해 저승의 염라대왕이 직접 들려주는 깊고도 신비로운 해답입니다. 스물여덟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눈을 감아 온 마을을 울음바다로 만든 효부 며느리가, 저승 법정에서 마주하게 된 놀라운 전생의 비밀! 과연 하늘의 저울은 왜 그토록 불공평해 보였을까요? 지금 바로 그 가슴 뭉클하고도 깨달음 가득한 이야기 속으로 함께 떠나보시겠습니다.
※ 1: 연화 며느리의 봄날
산 높고 물 맑은 경상도 청송골 어귀에는, 비록 초가지붕은 낮고 토담은 허물어져 가도 온 고을에서 웃음소리와 온기가 가장 끊이지 않는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그 집의 중심에는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가난한 나무꾼 김 서방에게 시집와, 십 년 세월 동안 집안의 기둥이자 마을의 등불 노릇을 해온 며느리 '연화'가 있었습니다. 연화는 얼굴 생김새가 보름달처럼 환하고 고왔을 뿐만 아니라, 그 마음 씀씀이가 어찌나 넓고 깊은지 마을 어른들은 그녀를 두고 "하늘에서 관세음보살이 잠시 베옷을 입고 내려온 것이 틀림없다"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곤 했습니다.
그해 봄은 유독 가뭄이 길어져 고을마다 보릿고개의 한숨이 깊어만 갔습니다. 연화의 집 역시 형편이 어렵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남편 김 서방이 새벽부터 지게를 지고 깊은 산에 들어가 땔감을 해 오고, 연화가 밤새도록 호롱불 아래에서 삼베를 짜서 내다 팔아도, 노환으로 자리에 누운 시아버지와 다리가 불편한 시어머니까지 네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가 빠듯한 살림이었습니다.
그날 저녁도 연화는 부엌 가마솥 앞에서 얼마 남지 않은 보리쌀과 쑥을 넣고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시부모님과 남편의 그릇에는 그나마 보리알이 넉넉히 가라앉은 아랫부분을 정성껏 퍼 담고, 정작 자신의 사발에는 멀건 쑥국물만 한 국자 떠 넣은 채 부뚜막에 쭈그리고 앉아 막 숟가락을 들려던 참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서 어제부터 기침이 심해지셨는데, 내일은 뒷산 양지바른 곳에 가서 도라지라도 좀 캐어 달여 드려야겠다. 서방님도 지게질하느라 어깨가 다 헐었을 텐데, 내 밥그릇에 건더기를 조금만 더 덜어 넣어 드릴걸 그랬나.'
자신의 주린 배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가족 걱정만 하며 쑥국물을 한 모금 삼키려던 그때였습니다. 싸리문 밖에서 힘없는 기침 소리와 함께 지팡이 짚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연화가 사발을 내려놓고 버선발로 뛰어나가 보니, 아랫마을에 홀로 사는 팔순의 최 노파가 굶주림에 지쳐 허리를 굽힌 채 싸리문 기둥을 붙잡고 서 있었습니다.
"아이고, 아랫말 할머니! 이 어두운 밤에 어쩐 일이셔요! 안색이 왜 이리 창백하십니까!"
연화가 놀라 노파의 앙상한 손을 잡자, 노파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새댁... 염치없는 줄은 알지만, 사흘째 물 한 모금밖에 못 삼켰더니 눈앞이 캄캄해서 발걸음이 저절로 이리로 왔구먼. 혹시 찬밥 찌꺼기나 숭늉이라도 한 사발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그 말을 들은 연화의 눈에 금세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녀는 최 노파를 따뜻한 아랫목으로 모셔 앉히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엌으로 달려가 자신이 먹으려고 남겨두었던 쑥죽 사발에 시부모님 상에 올리려던 구운 감자 두 알까지 보태어 정성껏 상을 차려 왔습니다.
"할머니, 변변치 않은 쑥죽이지만 어서 따뜻할 때 드세요. 감자도 속이 포슬포슬하게 잘 익었답니다."
"아이고, 새댁! 새댁네도 식구가 많아 먹을 것이 부족할 텐데, 이 귀한 것을 다 내어주면 새댁은 무엇을 먹는단 말인가!"
"할머니도 참, 저는 방금 부엌에서 가마솥 누룽지를 배불리 긁어 먹어서 배가 터질 것 같은걸요. 할머니께서 맛있게 잡수셔야 제 마음이 편하지요."
연화의 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물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으나, 그녀는 행여 노파가 그 소리를 들을까 봐 일부러 밝게 웃으며 노파의 등을 쓸어주었습니다. 방 안에서 창호지 문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시어머니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영감, 보셨수? 저 애가 오늘 아침에도 점심에도 물만 마시고 일하더니, 저녁 죽마저 남을 주고 자기는 굶는구먼요. 내가 저런 부처 같은 며느리를 얻은 것이 전생에 나라를 구한 복이오, 아니면 죄가 많아 저 애를 고생시키는 벌이오..."
시아버지 또한 마른기침을 쿨럭거리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하늘이 눈이 있다면, 우리 연화처럼 착한 아이에게는 반드시 만복을 내려주실 것이구려.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이처럼 연화는 자신의 살을 깎아 남을 살리는 보살의 삶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갔습니다. 길 가다 개미 떼가 지나가면 행여 밟힐까 봐 먼 길을 돌아갔고, 추위에 떠는 새가 있으면 처마 밑에 짚으로 둥지를 틀어주었으며, 마을에 초상이 나면 가장 먼저 달려가 궂은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청송골 사람들은 누구나 연화가 백 살까지 무병장수하며 아들딸 낳고 큰 부자가 될 것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 2: 악독한 장 부자 댁 마님은 팔순 잔치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어찌 그리도 사람의 바람과 반대로만 흘러가는 것인지, 그해 가을 청송골에는 하늘을 원망케 하는 기막힌 대조가 펼쳐졌습니다. 마을 한가운데에 아흔아홉 칸 기와집을 짓고 사는 고을 최고의 갑부, 장 부자 댁에서는 안주인인 오 씨 마님의 팔순 잔치가 사흘 밤낮으로 성대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오 씨 마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고을에서 '살아있는 독사'라 불릴 만큼 성정이 포악하고 인색하기로 악명이 자자한 여인이었습니다.
하인들이 밥을 짓다가 쌀 한 톨만 흘려도 인두로 손등을 지졌고, 시어머니를 구박하여 골방에서 굶어 죽게 만들었으며, 동냥 온 스님의 바리에 개똥을 퍼 넣어 쫓아내는 등 평생 지은 죄악을 종이에 적자면 남산의 소나무를 다 베어 종이를 만들어도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오 씨 마님은 여든이 넘도록 잔병치레 한 번 없이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흘렀고, 슬하의 아들들은 모두 벼슬길에 올라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내 오늘 여든 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보니, 기력이 아직 스무 살 처녀 때 못지않구나! 점쟁이 말로는 내가 백 살까지 산다 하였으니, 이십 년 뒤에 또 잔치를 벌일 것이다! 여봐라, 대문 밖에 거지 떼들이 기웃거린다는데 냄새나니 몽둥이로 다 패서 쫓아내어라!"
장 부자 댁 마당에서 풍악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고기 굽는 냄새가 온 마을에 진동하던 바로 그 시각, 고개 너머 연화네 초가집에는 먹구름보다 더 어두운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보름 전부터 갑자기 몸져누운 연화가, 오늘 아침부터는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채 검은 피를 토해내며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화야! 내 색시야, 정신 좀 차려보아라! 의원님, 제발 제 아내 좀 살려주십시오! 제 목숨을 가져가시고 제 아내를 살려주십시오!"
남편 김 서방이 의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피눈물을 흘렸으나, 연화의 맥을 짚어본 노의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김 서방... 마음 단단히 먹게나. 병명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오장육부가 마치 처음부터 기름이 조금만 담긴 등잔불처럼 스스로 다 타버려 꺼져가고 있으니, 편작이 살아 돌아온다 한들 인력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구먼."
"아이고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평생 남의 눈에 눈물 한 방울 안 나게 하고 제 입에 들어갈 밥까지 털어 남을 살리던 우리 며느리가, 이제 겨우 스물여덟 살인데 왜 죽는단 말입니까! 저 아랫마을 장 부자 댁 마님은 남의 피를 빨아먹고도 여든 살 잔치를 벌이는데, 하나님도 부처님도 다 눈이 멀었단 말입니까!"
다리가 불편한 시어머니가 방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통곡하자, 소문을 듣고 달려온 마을 사람들도 마당을 가득 메운 채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습니다. 백살 먹은 최 노파도 지팡이를 짚고 달려와 방 문턱을 잡고 울부짖었습니다.
"안 된다, 안 돼! 데려가려거든 살 만큼 산 이 늙은이 목숨을 데려가시지, 어찌 저 꽃 같은 새댁을 데려가신단 말인가! 염라대왕도 정신이 나갔지, 착한 사람 일찍 죽이면 세상에 누가 착하게 살겠는가!"
온 마을 사람들의 원망과 울음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으나, 이불 위에 누운 연화의 얼굴은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보름달처럼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파리한 손을 들어 올려, 오열하는 남편과 시부모님의 손을 차례로 쓸어 만졌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불효한 며느리가 먼저 길을 떠나게 되어 죄송하옵니다. 서방님... 너무 슬퍼 마세요. 저는 서방님과 부모님 곁에서 지낸 십 년이 참으로 따뜻하고 행복했답니다. 제가 가더라도... 부디 하늘을 원망하지 마시고, 늘 착한 마음 잃지 말고 사셔야 해요..."
그 인자한 당부의 말을 끝으로, 연화의 손이 스르르 이불 위로 떨어졌습니다. 스물여덟의 짧고도 고왔던 삶이, 가을바람에 지는 하얀 들국화처럼 허망하게 막을 내린 순간이었습니다. 초가집 마당에서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고, 마을 사람들은 저 멀리 장 부자 댁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장구 소리를 번갈아 들으며 "세상에 천리도 없고 인과응보도 다 거짓말이다!" 하고 가슴을 치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 3: 염라대왕 앞에서 하늘의 법도를 묻다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난 연화의 영혼은, 방 안을 가득 채운 가족들의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두 명의 저승사자를 따라 안개 자욱한 황천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보통 망자들이 저승길에 오르면 두려움에 떨며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기 마련이건만, 연화의 앞길을 인도하는 사자들은 그녀의 손목에 오랏줄을 묶기는커녕 오히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 비단 가마까지 태워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걸어가는 어두운 황천길 바닥에는 향기로운 연꽃이 한 걸음마다 피어나 발걸음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마에 앉은 연화의 마음은 조금도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귓가에는 여전히 자신의 시신을 붙잡고 가슴을 치던 시부모님과 남편의 울음소리가 생생하게 맴돌았고,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보며 "착하게 살아봤자 아무 소용 없다"라며 선한 마음에 상처를 입는 모습이 못내 가슴 아팠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이야 하늘의 뜻이라지만, 어찌하여 나로 인해 남겨진 이들이 하늘을 원망하고 선을 의심하게 되었을까. 염라대왕님을 뵙거든 꼭 이 이치를 여쭈어보아야겠다.'
얼마나 갔을까, 마침내 안개가 걷히고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염라대왕의 수정궁 시왕전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다른 망자들은 죄목이 적힌 팻말을 목에 걸고 판관들의 호통 속에 무릎을 꿇고 있었으나, 연화가 가마에서 내리자 수정궁의 높은 옥좌에 앉아 있던 염라대왕이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자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오, 청송골의 효부 김 씨 가문 연화가 당도하였구나. 이승의 험한 길 건너오느라 참으로 수고가 많았다. 여봐라, 이 귀한 손님에게 극락으로 가는 황금 의자를 내어드리고 천상의 감로차를 올리도록 하라!"
시왕전의 모든 판관들과 귀졸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했습니다. 저승에서조차 생불 대접을 받는 놀라운 광경이었으나, 연화는 황금 의자에 앉지 않고 옥좌 앞 차가운 돌바닥에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염라대왕을 우러러보았습니다.
"대왕마마, 미천한 아녀자에게 이토록 과분한 은총을 베풀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하오나 소녀는 극락으로 가기 전에, 대왕마마께 목숨을 걸고 꼭 여쭙고 싶은 말씀이 하나 있사옵니다."
염라대왕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궁금하길래 그토록 비장한 표정을 짓는 것이냐? 네가 이승에서 쌓은 공덕이 태산 같으니, 무엇이든 물어보아라."
연화의 고운 눈가에 맑은 눈물이 한 방울 맺혔습니다.
"대왕마마, 소녀가 일찍 죽은 것 자체는 조금도 억울하거나 원통하지 않사옵니다. 하오나 소녀가 눈을 감을 때, 제 시부모님과 남편은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졌고, 온 마을 사람들은 저 아랫마을의 악독한 장 부자 댁 마님은 여든이 넘도록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어찌하여 착하게 살려 애쓴 소녀는 스물여덟에 피를 토하며 죽느냐고 하늘을 원망하며 울부짖었사옵니다."
연화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더욱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대왕마마, 만약 이승에서 선을 행한 자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고, 악을 행한 자가 백 살까지 호의호식하며 웃는다면, 세상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무엇을 보고 착하게 살려 하겠나이까? 하늘의 저울이 공평하다 하오나, 이승의 사람들의 눈에는 그 저울이 한없이 기울어져 보일 뿐이옵니다. 부디 소녀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어, 어찌하여 착한 사람이 일찍 죽어야만 하는지 그 천리를 밝혀주시옵소서!"
수정궁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감히 염라대왕의 면전에서 하늘의 불공평함을 지적한 것이었으나, 그 질문 속에 사사로운 욕심이 아닌 세상 사람들을 향한 깊은 자비심이 담겨 있음을 안 염라대왕은 노하기는커녕 깊고도 묵직한 탄성을 내뱉었습니다.
"허어... 과연 네가 범상한 여인이 아니구나. 제 죽음 앞에서도 중생들의 깨달음을 먼저 걱정하다니, 참으로 기특하고도 가상하다. 좋다! 이승의 사람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한 생애'라는 짧은 마디만 보고 하늘을 원망하곤 하지. 내 오늘 너를 위해 저승의 가장 깊은 비밀이 담긴 '삼생의 업경대'를 열어 보여줄 터이니, 네 두 눈으로 직접 하늘의 계산법을 확인해 보아라!"
염라대왕이 옥좌에서 내려와 연화의 손을 이끌고, 시왕전 한구석에 자리한 거대한 청동 거울, 업경대 앞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 4: 업경대에 비친 전생의 비밀
사람의 키보다 열 배는 더 높고 넓어 보이는 거대한 청동 거울, 삼생의 업경대 앞에는 신비로운 오색 구름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시왕전의 수많은 판관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염라대왕이 금빛 자수가 놓인 넓은 소매를 허공에 대고 한 번 크게 휘둘렀습니다. 그러자 거울 표면을 덮고 있던 자욱한 안개가 바람에 밀리듯 스르르 걷히더니, 마치 눈앞에서 실제 벌어지는 광경처럼 생생한 화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거울 속에 나타난 곳은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처참한 옛 전쟁터였습니다.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무쇠 갑옷을 입고 백마에 올라탄 한 장수가 피 묻은 장검을 휘두르며 적진을 향해 무섭게 돌격하고 있었습니다.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매에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그 장수는 단숨에 적장의 목을 베어 들고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습니다. 연화는 거울 속의 살벌한 풍경에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며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연화야, 두려워하지 말고 가까이 다가와 저 거울 속에 보이는 사내를 똑똑히 보아라. 저 위풍당당한 장수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염라대왕의 물음에 연화는 거울 속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으나,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아 조심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대왕마마, 소녀는 평생 산골 마을 밖을 나가본 적이 없는 아녀자라, 저리도 무섭고 살기가 등등한 무관은 생전 처음 보옵니다. 저 장수가 소녀와 무슨 연관이 있나이까?"
염라대왕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놀라지 말고 듣거라. 저 피 묻은 갑옷을 입은 사내가 바로 오백 년 전, 고려 시대에 북방의 오랑캐를 물리치던 너의 전생 모습이다."
"네? 저... 저 우락부락하고 무서운 장수가 소녀의 전생이라 말씀이옵니까? 세상에, 소녀는 이승에서 닭 한 마리 잡는 것도 무서워 손을 떨던 몸이온데, 어찌 전생에 저토록 많은 피를 흘린 무장이었단 말씀이옵니까!"
연화가 기절초풍할 듯이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리자, 염라대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울 속의 다음 화면을 보여주었습니다. 화면 속의 장수는 나라와 백성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평생 수십 번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전쟁이란 본디 선악이 뒤엉키는 생지옥인지라, 그가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불을 지른 성안에는 죄 없는 국경 마을의 아녀자와 노인들 수백 명이 갇혀 있었고, 결국 그 불길 속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비명을 지르며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왕으로부터 높은 벼슬과 막대한 재산을 하사받은 장수는 밤마다 꿈속에 찾아와 피눈물을 흘리는 성안 백성들의 원혼 때문에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그는 말년에 모든 벼슬을 내려놓고 전 재산을 털어 깊은 산속에 절을 지은 뒤, 전쟁 고아들과 굶주린 유민들을 거두어 먹이며 매일 밤 피가 나도록 참회의 절을 올리다가 일흔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보았느냐, 연화야. 저것이 네가 전생에 남긴 발자취다. 너는 전생에 외적을 막아 나라의 사직을 구한 거대한 공덕과, 말년에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며 백성을 구휼한 참회의 공덕으로 인해, 원래대로라면 이번 생에 정승 판서 가문의 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자격을 얻었느니라."
"하오나 대왕마마, 그러한데 어찌하여 소녀는 이번 생에 그리도 가난한 나무꾼의 아내로 태어나 스물여덟의 짧은 생을 살다 오게 된 것이옵니까?"
연화의 물음에 염라대왕은 거울 한구석에 남아있던 작은 검은 점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하늘의 법도와 인과의 계산은 추호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네가 비록 나라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른 불이었다 하나, 네 명령으로 인해 불타 죽은 수백 명의 무고한 백성들의 목숨 값과 그들이 흘린 피눈물의 빚은 고스란히 네 명부에 '남은 업보'로 기록되어 있었다. 저승의 법칙상, 단 한 푼의 빚이라도 남아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온전한 천상의 복록을 누릴 수가 없느니라. 만약 그 빚을 갚지 않고 귀한 집안에 태어났다면, 너는 평생 원인 모를 악질에 시달리거나 자식을 잃는 참척의 고통을 겪으며 그 빚을 갚아야만 했을 것이다."
연화는 숨을 죽인 채 대왕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가슴에 새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온전한 대복의 자리로 보내주기 전에, 그 남은 살생의 빚을 가장 깨끗하고 확실하게 털어낼 수 있도록 '징검다리 생애'를 한 번 거치게 한 것이다. 전생에 네가 불길 속에 굶주려 죽게 만든 인연들을 이번 생에 네 시부모와 마을의 가난한 노인들로 다시 만나게 하여, 네가 직접 주린 배를 움켜쥐고 그들에게 밥을 떠먹이며 생명의 빚을 갚게 한 것이지. 원래 명부에 적힌 계산대로라면, 너는 예순 살까지 삼십 년을 더 그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등골이 휘도록 일하며 빚을 갚아야만 했다."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수정궁의 기둥을 울릴 만큼 우렁차고 자비롭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런데 연화야, 네가 이번 생에 어찌 살았느냐! 남들은 억지로 빚을 갚느라 원망하고 불평하며 백 년이 걸려도 못 갚을 그 무거운 업보를, 너는 단 한 번의 원망도 없이 오직 맑고 지극한 사랑으로 남의 아픔을 보듬으며 살았기에, 예순 살까지 갚아야 할 빚을 단 스물여덟 해 만에 이자까지 쳐서 완벽하게 다 갚아버린 것이다!"
염라대왕이 연화의 어깨에 따뜻한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자, 이제 이승의 어리석은 눈을 버리고 저승의 눈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라. 이승의 가난한 삶이 전생의 빚을 갚기 위해 들어간 '고행의 감옥'이었다면, 모범수로 인정받아 형기를 삼십 년이나 단축하고 스물여덟 살에 일찍 출소하여 극락과 대복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상이더냐, 아니면 벌이더냐? 만약 하늘이 너를 미워하여 그 가난하고 병든 육신에 가두어 둔 채 아흔 살까지 굶주리며 고생만 더 하다가 오게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혹한 형벌이 아니겠느냐!"
그 순간, 연화의 머릿속을 짓누르고 있던 모든 의문과 슬픔의 안개가 아침 햇살을 만난 것처럼 일시에 걷혀 나갔습니다.
'아아... 그랬었구나! 내가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일찍 눈을 감은 것은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었구나! 고단하고 아픈 빚잔치를 누구보다 성실히 끝냈기에, 하루라도 빨리 그 무거운 짐을 벗겨주고 더 좋은 세상으로 데려가시려던 하늘의 지극한 배려요, 조기 졸업의 축복이었구나!'
연화는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내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염라대왕의 발치에 깊이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짧은 한 생애의 단면만을 보고 하늘의 무심함을 원망했던 이승의 시선이 얼마나 좁고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 5: 이승으로 보내는 작별 선물
연화가 자신의 단명에 숨겨진 하늘의 자비를 깨닫고 눈물을 훔치자, 염라대왕은 "아직 네가 보아야 할 것이 하나 더 남아있다"라며 다시 한번 넓은 소매를 들어 업경대를 쓸었습니다. 그러자 거울 속의 풍경이 일렁이더니, 방금 전까지 청송골 아흔아홉 칸 기와집에서 팔순 잔치를 벌이며 기고만장하게 웃어대던 장 부자 댁 오 씨 마님의 모습이 대문짝만 하게 떠올랐습니다.
거울 속의 오 씨 마님은 비단 방석 위에 앉아 기름진 고기를 씹으며, 대문 밖에 몰려든 굶주린 거지들에게 구정물을 끼얹으라고 하인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습니다. 연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자, 염라대왕이 거울 위로 오 씨 마님의 전생 기록을 겹쳐서 띄워 올렸습니다.
놀랍게도 오 씨 마님의 전생은 백 년 전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평생 혼자 약초를 캐며 살아가던 늙은 약초꾼이었습니다. 그 약초꾼은 성미가 괴팍하고 욕심이 많아 평생 남에게 쌀 한 톨 베푼 적이 없었으나, 죽기 바로 이틀 전에 우연히 어마어마한 공덕을 하나 쌓게 되었습니다. 당파 싸움에 휘말려 자객들에게 쫓기다가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어가던 어린 왕손(王孫)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평생 아껴두었던 백 년 묵은 산삼 한 뿌리를 달여 먹여 그 목숨을 구해준 것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이 거울 속의 약초꾼과 오 씨 마님을 번갈아 가리키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저 오 씨 여인의 전생을 똑똑히 보아라. 저자가 전생에 살린 그 어린 왕손이 훗날 보위에 올라 성군이 되었으니, 왕손의 목숨을 구한 것은 곧 나라의 만백성을 살린 것과 같은 거대한 공덕으로 계산되었다. 그 단 한 번의 큰 선업에 대한 보상으로, 저자는 이번 생에 만석꾼 가문의 안주인으로 태어나 여든다섯 살까지 무병장수하며 평생 비단옷에 산해진미를 먹고살 수 있는 '복록의 통장'을 받아 이승으로 내려간 것이다."
연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왕마마, 저 오 씨 마님이 지금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와 장수는 이번 생에 악행을 저질러도 하늘이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라, 전생에 저축해 둔 복을 꺼내어 쓰고 있는 것뿐이란 말씀이옵니까?"
"정확히 보았다! 저 거울 속 오 씨 여인의 머리 위를 자세히 들여다보아라!"
염라대왕의 말에 연화가 눈을 크게 뜨고 거울을 응시하자,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인 기운들이 거울 속에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오 씨 마님의 머리 위에는 원래 집채만 한 크기의 황금빛 복주머니가 떠 있었는데, 그녀가 하인의 손등을 인두로 지지고 소작농들의 피눈물을 뽑아낼 때마다 그 황금 주머니가 찢어지며 금모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와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모래가 빠져나간 빈자리에는, 지옥 아귀들이 내뿜는 시커먼 독기와 원한의 불길이 산더미처럼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이승의 백성들은 저 악독한 여인이 여든이 넘도록 병 한 번 안 앓고 호의호식하는 것을 보며 '천벌도 없다'라고 분통을 터뜨리지. 허나 저승의 판관들 눈에 저 여인보다 더 불쌍하고 끔찍한 형벌을 받고 있는 자는 없느니라. 만약 저 여인이 악행을 시작했을 때 삼십 대나 사십 대에 병을 얻어 일찍 죽었더라면 어찌 되었겠느냐? 전생의 복도 조금 남아있고 지은 죄도 아직 적으니, 저승에 와서 매 몇 대만 맞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염라대왕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매섭게 빛났습니다.
"하지만 전생에 받아간 수명이 여든다섯으로 정해져 있다 보니, 하늘조차도 그 정해진 기한이 다할 때까지는 저 여인을 억지로 데려오지 못하고 그저 장부에 죄목만 적어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저 여인은 하늘이 준 긴 수명을 복으로 쓰기는커녕, 매일같이 자신의 영혼을 태워버릴 지옥의 장작을 쌓는 데에 허비하고 있다! 이제 앞으로 딱 오 년 뒤, 여든다섯의 수명이 끝나는 날 저 여인의 복주머니는 먼지 한 톨 남김없이 텅 비게 될 것이고, 반대로 지은 죄악은 태산보다 높아져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 저 여인은 재판도 거칠 것 없이 곧장 무간지옥의 끓는 가마솥으로 떨어져, 일만 년 동안 살이 타들어 가고 뼈가 녹아내리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며, 그 형벌이 끝난 뒤에도 수만 번을 구더기와 독사로 태어나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염라대왕이 거울을 덮으며 연화에게 준엄하게 물었습니다.
"자, 이제 다시 내게 대답해 보아라, 연화야! 이승에서 백 년 동안 죄악의 꿀물을 마시고 저승에서 만 년 동안 지옥불을 마시는 저 악인의 장수가 부러운 복이더냐, 아니면 이승에서 삼십 년 동안 소금물을 마시며 빚을 다 갚고 영원한 천상의 감로수를 마시게 된 너의 단명이 복이더냐?"
연화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경외감을 느끼며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습니다.
"대왕마마! 소녀의 어리석고 짧은 눈으로 감히 크고도 오묘한 하늘의 그물을 의심하였사오니,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승의 눈으로는 복처럼 보이던 악인의 무병장수가 실은 지옥으로 가는 가장 무서운 저주였고, 불행처럼 보이던 선인의 요절이 실은 고통의 사슬을 끊어주는 가장 자비로운 구원이었음을 이제야 뼛속 깊이 깨달았사옵니다!"
"그래, 네가 이제야 삼생의 이치를 온전히 통달하였구나. 하늘의 저울은 단 한 치도 기울어진 적이 없다. 다만 그 저울질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세 번의 생애에 걸쳐 이루어지기에, 오늘 하루만 바라보는 인간들의 눈에 잠시 불공평해 보일 뿐이니라."
깨달음의 환희로 연화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해졌으나, 이내 그녀의 눈가에 다시 잔잔한 근심이 스쳤습니다. 이승의 초가집에서 자신의 시신을 붙잡고 식음을 전폐한 채 하늘을 원망하고 있을 불쌍한 시부모님과 남편,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연화는 다시 한번 간절히 두 손을 모았습니다.
"대왕마마, 소녀는 이리 큰 가르침을 얻어 한 점의 미련도 없이 다음 생으로 나아갈 수 있사오나, 이승에 남겨진 제 늙은 시부모님과 남편은 이 깊은 천리를 알지 못하여 평생 가슴에 피멍을 안고 살아갈 것이옵니다. 또한 제 죽음을 보고 하늘을 원망하던 마을 사람들이 행여 선한 마음을 버리고 악한 길로 빠질까 두렵사옵니다. 소녀에게 마지막으로 하룻밤의 말미를 허락해 주시어, 꿈속에서나마 그들에게 이 저승의 진리를 전하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게 해 주실 수는 없겠나이까?"
자신의 안위보다 끝까지 남겨진 이들을 염려하는 연화의 깊은 효심과 자비심에, 시왕전의 판관들조차 감동하여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염라대왕은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마음이 정히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구나! 좋다, 네가 한양의 귀한 가문으로 환생하기 전에 오늘 밤 이승으로 내려가 가족들의 꿈에 현몽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하마. 그리고 네가 지난 십 년 동안 병든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신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켰으니, 내가 너희 가족들이 남은 여생을 굶주리지 않고 베풀며 살 수 있도록 이승의 선물 하나를 보태어 주겠다. 내 말을 잘 듣고 내려가 전하도록 하여라."
염라대왕이 연화를 가까이 불러 은밀한 천기를 일러주었고, 연화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하얀 연꽃잎이 흩날리는 빛줄기를 타고 그리운 이승의 밤하늘을 향해 날아 내려갔습니다.
※ 6: 아내의 빈소에서 피어난 하얀 목련
연화가 숨을 거둔 지 사흘째가 되는 늦가을 밤이었습니다. 청송골 어귀의 작은 초가집에는 찬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고, 문풍지를 스치는 밤바람 소리마저 구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살림에 변변한 널빤지 관 하나 마련하지 못해 거적때기로 아랫목에 모셔둔 연화의 주검 앞에는, 사흘 내내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통곡하던 남편 김 서방과 늙은 시부모가 기력이 다해 쓰러지듯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자면서도 "내 며느리 불쌍해서 어찌 보내노..." 하며 잠꼬대 섞인 신음을 흘렸고, 남편 김 서방의 거친 손은 여전히 아내의 차가운 손을 놓지 못한 채 눈물에 젖어 있었습니다. 가물거리던 호롱불이 바람에 흔들리며 꺼질 듯 말 듯 하던 바로 그 자시(子時)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싸늘했던 방 안의 공기가 봄날처럼 훈훈하게 데워지더니, 어디선가 코끝을 간질이는 은은하고도 성스러운 연꽃 향기가 방 안 가득 자욱하게 피어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향기 속에서, 지쳐 잠이 든 시부모와 김 서방의 꿈결에 동시에 눈부신 오색 구름이 흘러들어왔습니다. 구름 위에서 사뿐히 걸어 내려온 여인은, 생전에 입던 해진 무명 적삼 대신 달빛으로 짠 듯한 고운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피를 토하며 창백하게 말라가던 얼굴은 복숭아꽃처럼 발그레하고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그토록 애타게 부르던 연화였습니다!
"연화야! 우리 며느리 연화가 맞느냐! 아이고, 네가 어미를 보러 왔구나!"
"여보! 당신 진짜로 살아있었구려! 나를 두고 어디를 그리 매정하게 가버렸단 말이오!"
꿈속에서 시부모와 김 서방은 버선발로 달려 나가 연화를 부둥켜안고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다리가 불편해 걷지도 못하던 시어머니가 꿈속에서는 펄펄 뛰어와 며느리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김 서방은 아내의 옷자락을 놓칠세라 꽉 움켜쥐었습니다. 연화는 생전과 다름없는 그 따뜻하고 고운 미소로 시부모님께 큰절을 올리고, 남편의 수척해진 뺨에 흐르는 눈물을 부드러운 비단 소매로 정성껏 닦아주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서방님. 제발 이제 그만 눈물을 거두시고 제 말씀을 들어보세요. 보시다시피 저는 조금도 아프거나 괴롭지 않고, 이리도 평안하고 아름다운 곳에 와 있답니다. 세 분께서 식음을 전폐하고 몸을 상하게 하시니, 제 발걸음이 무거워 차마 길을 떠날 수가 없었사옵니다."
남편 김 서방이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치며 피 맺힌 목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내가 어찌 울지 않을 수가 있겠소! 당신처럼 개미 한 마리 못 죽이고 남에게 퍼주기만 하던 착한 사람이, 내게 시집와 십 년 동안 쌀밥 한 번 배불리 못 먹어보고 스물여덟에 피를 토하며 죽었는데! 저 아랫마을의 독사 같은 장 부자 댁 마님은 여든이 넘도록 고기만 씹으며 호통을 치고 사는데, 왜 하늘은 착한 당신만 이리 일찍 데려가신단 말이오! 내가 가난하고 무능해서 당신을 죽인 것 같아 살 수가 없소!"
김 서방의 절규에 시부모님도 함께 땅을 치며 하늘을 원망했습니다. 연화는 세 사람의 손을 한데 모아 따뜻하게 감싸 쥐고는, 맑고도 또렷한 목소리로 저승의 업경대에서 보았던 삼생의 비밀을 차근차근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서방님, 부모님. 부디 하늘을 원망하지 마시옵소서. 저도 처음에는 그것이 궁금하여 염라대왕님께 눈물로 여쭈었답니다. 그런데 대왕님께서 보여주신 전생의 거울을 보니, 제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은 하늘이 내린 벌이 아니라 가장 큰 축복이요 상이었사옵니다. 저는 오백 년 전 전생에 장수로 살면서 전쟁터에서 본의 아니게 많은 생명을 해친 빚이 남아있었답니다. 그 무거운 살생의 빚을 다 갚아야만 천상의 큰 복을 받으러 갈 수 있었기에, 이번 생에 가난한 몸으로 태어나 남을 살리고 봉양하며 그 빚을 갚도록 정해져 있었던 것이지요."
시부모와 김 서방이 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인 채 연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예순 살까지 삼십 년을 더 가난과 병마 속에서 고생하며 빚을 갚아야 했으나, 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이웃을 도우며 지극한 마음으로 살았다 하여, 염라대왕님께서 제 형기를 삼십 년이나 줄여주시고 스물여덟에 일찍 고생의 짐을 벗겨주신 것이었답니다! 서방님, 감옥에 간 사람이 모범수가 되어 일찍 풀려나는 것이 기뻐할 일이지 어찌 슬퍼할 일이겠습니까? 당신과 부모님께서 저를 사랑해 주신 덕분에 제가 전생의 무거운 숙제를 가장 빨리 마치고 조기 졸업을 한 것이니, 제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축하해 주셔야 할 일이옵니다!"
시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아, 아가... 그런 깊은 뜻이 있었단 말이냐! 그렇다면 저 아랫마을 장 부자 댁 마님이 악행을 저지르고도 오래 사는 것은 또 어찌 된 영문이라더냐?"
"아버님, 그 마님은 전생에 왕손의 목숨을 구한 단 한 가지 큰 복록을 받아 이번 생에 여든다섯까지의 수명과 재물을 얻은 것뿐이라 하옵니다. 허나 이번 생에 그 복을 좋은 데 쓰지 않고 날마다 남의 눈에 피눈물을 내는 데에 다 써버렸으니, 수명이 다하는 오 년 뒤에는 복은 한 푼도 남지 않고 산더미 같은 죄악만 남아 곧장 일만 년 동안 불타는 무간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이라 하셨습니다. 백 년 호사를 누리고 만 년 지옥에 가는 그 가엾은 영혼을 어찌 부러워하겠습니까. 이승의 길고 짧은 수명은 한낱 눈 깜짝할 사이의 연극과 같고, 오직 우리가 마음속에 쌓은 착한 덕행만이 영원히 남는 진짜 보물이옵니다."
연화의 자애롭고도 확신에 찬 설명에, 세 사람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시커먼 한과 원망의 바위가 봄눈 녹듯 스르르 허물어져 내렸습니다. 하늘이 무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눈이 짧아 그 거대한 사랑의 계산법을 보지 못했을 뿐이라는 진리가 그들의 영혼을 맑게 씻어주었던 것입니다. 연화는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된 듯 몸이 서서히 투명한 빛으로 변해가자, 마지막으로 남편의 귓가에 다가와 다정하게 속삭였습니다.
"서방님, 염라대왕님께서 제가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지 못하고 온 것을 기특하게 여기시어, 우리 가족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하나 내려주셨답니다. 내일 아침 날이 밝거든 제 장례를 치르러 뒷산 서낭당 너머 소나무 숲으로 가시지요? 그 숲에서 가장 크고 굽은 소나무 뒤편에 거북이 모양을 한 바위가 하나 있을 것입니다. 그 바위 아래를 석 자만 파보시면 백 년 묵은 산삼 세 뿌리가 나올 것이니, 한 뿌리는 어머님과 아버님께 달여 드려 병환을 고치시고, 나머지 두 뿌리는 한양의 약재상에게 파셔서 좋은 논밭을 사시옵소서. 부디 그 재물로 평생 굶주리지 마시고, 제 몫까지 어려운 이웃들을 도우며 착하게 살아주시옵소서."
"여보... 그러면 우리는 이제 영영 다시 못 보는 것이오?"
김 서방이 눈물을 삼키며 묻자, 연화가 봄꽃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인연의 끈이 이토록 깊은데 어찌 영영 남이 되겠습니까. 저는 이제 전생의 모든 빚을 털어내고, 내일 아침 한양의 어질고 덕망 높은 이조판서 대감 댁의 외동딸로 다시 태어나러 갑니다. 십오 년 뒤 봄날, 제가 자라서 이 고을 앞을 지나가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니,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게 계시다가 저를 한 번 보고 웃어주세요. 그동안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내 서방님... 아버님, 어머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연화가 고운 절을 올리고 오색 구름 위로 훨훨 날아올라 사라지자마자, 안방에 누워 있던 시부모와 김 서방은 동시에 "연화야!" 하고 외치며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놀랍게도 세 사람이 꾼 꿈의 내용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으며, 차갑게 식어있던 연화의 시신 주변에는 방금 꿈속에서 맡았던 그 향기로운 연꽃 냄새가 코가 마비될 정도로 진하게 배어 있었습니다. 김 서방이 홀린 듯이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보니, 더욱 기이한 기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마당 구석에 십 년째 말라죽어 장작으로나 쓰려던 늙은 목련나무 가지 위에,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주먹만 한 새하얀 목련꽃 세 송이가 밤새 탐스럽게 피어나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감... 아범아... 꿈이 아니었구먼! 우리 연화가 진짜로 빚을 다 갚고 극락 대복을 받으러 간 것이었어! 내가 그 천리도 모르고 하늘을 욕했으니 이 어리석은 년을 어찌할꼬!"
"어머님, 아버님... 이제 울지 맙시다. 우리 연화가 기쁜 길로 졸업하여 귀한 집 따님으로 태어난다는데, 우리가 울면 연화 가는 길이 무거워지지 않겠습니까!"
세 사람은 마당에 피어난 하얀 목련꽃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더 이상 절망의 통곡이 아닌 감사와 축복의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오랫동안 합장을 올렸습니다.
※ 7: 슬픔을 넘어 희망으로
그날 오전, 연화의 소박한 상여가 청송골을 떠날 때 마을 풍경은 전날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김 서방과 시부모가 간밤에 똑같이 꾼 신비로운 현몽 이야기와 마당에 핀 기적의 목련꽃 소식을 전해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경건하고도 숙연한 표정으로 상여 뒤를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하늘도 무심하다, 착하게 살아봤자 손해다"라며 가슴을 치고 분통을 터뜨리던 고을 사람들은, 저승의 업경대가 밝혀준 삼생의 이치를 전해 듣고는 모두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허어, 우리가 눈앞의 한 치만 보고 하늘의 만 리 계산법을 몰라봤구먼! 고생스러운 삶에서 빚을 빨리 다 갚고 일찍 떠나는 것이 하늘의 상이라니, 우리 연화 새댁은 진짜로 생불이었네그려!"
"그러게나 말이야. 남의 눈에 피눈물 내고 호의호식하는 저 장 부자 댁 마님은 지옥 갈 장작을 쌓느라 오래 사는 것이라니, 이제 남 잘되는 것 배 아파할 것도 없고 내 가난을 한탄할 것도 없구먼! 우리도 오늘부터라도 남을 도우며 착하게 살아서 전생 빚 깨끗이 갚아보세나!"
연화 한 사람의 죽음과 그녀가 전하고 간 저승의 진리는, 흔들리던 청송골 사람들의 도덕심과 선한 마음을 이전보다 열 배는 더 단단하고 따뜻하게 묶어주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양지바른 뒷산에 연화를 곱게 묻고 난 뒤, 김 서방은 마을 어른 몇 분과 함께 꿈속에서 아내가 일러준 서낭당 너머 소나무 숲으로 찾아가 보았습니다.
과연 숲 가장 깊은 곳에 수백 년은 된 듯한 굽은 소나무가 서 있었고, 그 뒤편에는 정말로 거북이 등딱지처럼 생긴 바위가 이끼에 덮인 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김 서방이 떨리는 손으로 호미를 들어 바위 아래를 석 자쯤 파내려 가자, 흙 속에서 갑자기 황금빛 서기가 확 뿜어져 나오더니 어린아이 몸통만 한 백 년 묵은 천종산삼 세 뿌리가 실뿌리 하나 상하지 않은 채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진짜로 산삼이 나왔어! 염라대왕님이 효부 연화에게 내리신 하늘의 선물이 틀림없다!"
함께 갔던 마을 어른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김 서방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실한 산삼 한 뿌리를 정성껏 달여 시부모님께 올렸습니다. 그 영험한 약기운이 몸에 들어가자마자, 십 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시아버지의 노환과 시어머니의 다리 병이 사흘 만에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아, 두 노인이 청년처럼 정정하게 마당을 걸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김 서방은 나머지 산삼 두 뿌리를 한양의 가장 큰 약재상에게 가져가 팔았고, 무려 삼천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청송골 제일의 부자가 된 김 서방과 노부모는, 그러나 그 돈을 자신들의 호사를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연화의 마지막 당부대로 마을의 빚진 소작농들에게 땅을 사서 나누어주었고, 마을 입구에 넓은 정자와 구휼소를 지어 보릿고개마다 주린 백성들과 지나가는 과객들에게 무료로 따뜻한 밥과 옷가지를 나누어주며 평생 연화의 이름을 기리는 선업을 쌓았습니다.
한편, 염라대왕이 예고했던 악인의 말로 또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찾아왔습니다. 그로부터 딱 오 년이 흐른 어느 해 겨울, 여든다섯 살이 된 장 부자 댁 오 씨 마님이 어느 날 갑자기 온몸에 시커먼 악성 종기가 돋아나더니, 사흘 밤낮을 "뜨겁다! 저승사자들이 나를 끓는 가마솥에 넣으려 한다!"라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끔찍한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장례를 치르던 바로 그날 밤, 마른하늘에서 시뻘건 벼락이 아흔아홉 칸 기와집 곳간에 내리꽂혀 평생 모은 재산이 한 줌의 재로 타버렸고, 한양에서 벼슬을 하던 아들들은 부정축재와 역모죄로 발각되어 삼족이 유배를 당하는 멸문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전생의 복을 다 까먹고 지옥으로 떨어진 악인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한 백성들은, 다시 한번 하늘의 인과응보가 얼마나 엄중하고 두려운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십 년의 세월이 흘러, 연화가 떠난 지 꼭 십오 년째가 되는 따스한 봄날이었습니다. 마당의 목련꽃이 구름처럼 하얗게 만개한 날, 이제는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오십 줄의 김 서방은 여느 때처럼 마을 입구 정자에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보리차와 쑥떡을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정정하게 아흔을 넘긴 시부모님도 정자 한구석에서 따뜻한 봄 햇살을 쬐며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고갯마루 너머에서 화려한 비단 휘장을 두른 사인교와 수십 명의 호위 무사들이 줄을 지어 내려오더니, 마침내 김 서방이 있는 정자 앞에서 가마를 멈추었습니다. 한양의 어질고 청렴하기로 이름난 현직 이조판서 대감이 외동딸을 데리고 경상도 감영으로 시찰을 내려오던 길이었습니다. 잠시 다리를 쉬기 위해 가마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연분홍 비단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열다섯 살의 아리따운 명문가 규수가 사뿐히 내려섰습니다.
그런데 가마에서 내린 그 규수가 정자 주변을 둘러보더니, 보리차를 나누어주던 김 서방과 정자에 앉은 노부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우뚝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백옥처럼 맑고 고운 소녀의 두 눈에 까닭 모를 그렁그렁한 눈물이 차오르더니, 소녀가 시녀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김 서방과 노부부 앞으로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비단 치마가 흙에 닿는 줄도 모르고 공손히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르신들... 소녀는 한양에 사는 이 판서의 여식이옵니다. 오늘 생전 처음 이 고을을 지나가오나, 어르신들의 인자하신 얼굴을 뵈오니 어찌 이리도 제 가슴이 뭉클하고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부모님을 뵌 것처럼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약소하나마 제 마음의 표시이오니 받아주시고, 부디 백세토록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소녀가 품속에서 하얀 목련꽃 자수가 놓인 비단 복주머니를 꺼내어 김 서방의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소녀의 손끝이 닿는 순간 전해지는 그 따뜻하고 익숙한 온기, 그리고 소녀의 옷자락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연꽃 향기와 보름달처럼 환한 눈웃음을 마주한 순간, 김 서방과 노부부는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십오 년 전 꿈속에서 "모든 빚을 다 갚고 귀한 대감 댁 딸로 태어나 십오 년 뒤 봄날 다시 지나가겠노라"라고 약조했던 바로 그 연화가, 약속을 잊지 않고 눈부신 모습으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전생과 현생의 모든 고통을 씻어내고,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복된 신분으로 태어나 티끌 같은 아픔도 없이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그녀의 눈부신 모습을 마주한 순간, 김 서방의 주름진 두 볼 위로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정자에 앉아 있던 노부모 또한 소녀의 고운 자태에서 옛 며느리의 그림자를 느끼고는 가슴이 벅차올라 두 손을 모았습니다.
김 서방은 혹여나 소녀가 놀랄까 봐 복받치는 울음을 꾹 삼키고, 세상에서 가장 인자하고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소녀가 건넨 목련꽃 복주머니를 소중히 받아 품에 안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귀하신 작은아씨. 소인이 평생 살아오며 오늘처럼 기쁘고 복된 날이 또 없었나이다. 아씨의 그 맑고 고운 심성이 하늘의 별처럼 빛나오니, 이번 생에는 부디 찬 바람 한 점 맞지 마시고 아픔도 눈물도 없이 백세토록 만복을 누리시며 천하의 불쌍한 백성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큰 어른이 되어 주시옵소서."
'연화야, 내 고운 사람아... 약속을 잊지 않고 이리도 어여쁘고 귀한 모습으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나 주었구나. 이제 네가 가난도 병마도 없는 곳에서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나는 오늘 당장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
김 서방의 속마음이 봄바람을 타고 전해지기라도 한 듯, 소녀는 눈물 자국이 남은 볼 위로 복사꽃 같은 환한 미소를 피워 올리며 다시 한번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어르신의 따뜻한 축복의 말씀을 평생 가슴에 새기겠나이다. 어르신께서 내어주신 이 구수한 보리차 맛과 이 마을의 따뜻한 봄바람을 소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부디 내내 평안하시옵소서."
소녀는 못내 아쉬운 듯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사인교에 다시 올라탔고, 화려한 행렬은 흩날리는 봄꽃 잎사귀 사이로 천천히 멀어져 갔습니다. 김 서방과 노부모는 소녀가 탄 가마가 고갯마루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정자 앞에 서서 오랫동안 손을 흔들며 배웅했습니다.
그 후로도 이조판서 댁의 그 어진 규수는 자라나 당대 최고의 현숙한 정경부인이 되어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평생을 바쳤고, 청송골의 김 서방과 노부모 또한 아흔과 백 살이 넘도록 무병장수하며 평온한 여생을 보내다가 잠들 듯이 고요하게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왜 착한 사람이 일찍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가 하는 인간 세상의 오랜 슬픔과 원망의 물음은, 그렇게 삼생을 이어온 한 여인의 아름다운 삶과 재회를 통해 깊은 깨달음으로 피어났습니다. 눈에 보이는 한 생애의 길고 짧음은 영원한 윤회의 강물 위에서는 한낱 물거품에 불과하며, 오직 남을 위해 흘린 따뜻한 눈물과 선한 마음씨만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삶을 가장 눈부시게 밝혀주는 불멸의 등불이라는 사실은 청송골의 봄바람을 타고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가슴속에 잔잔한 위안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들려드린 '왜 착한 사람은 일찍 죽는가' 이야기,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울림을 남겼나요? 살면서 우리 곁을 너무 일찍 떠나보낸 착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하셨던 적이 있다면, 오늘 이야기가 따뜻한 위안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일찍 떠난 것은 하늘이 무심해서가 아니라, 이승의 고단한 숙제를 누구보다 성실하고 빠르게 마치고 더 따뜻하고 복된 세상으로 조기 졸업한 것이라는 옛 어른들의 지혜로운 시선이 참으로 가슴 뭉클합니다. 오늘 이야기가 좋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꼭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댓글 한 줄은 늘 큰 힘이 됩니다. 그럼 오늘 밤도 평안하고 아름다운 꿈 꾸시길 바라며, 다음 시간에 더 깊은 감동과 재미가 있는 옛이야기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