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대왕이 꺼내 든 '복 장부' , 이대로 죽기 억울하지 않느냐 『용재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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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300자 내외)
"아이고, 내 팔자야! 이놈의 세상, 차라리 눈 딱 감으면 그만인 것을!" 평생 글공부만 하다 벼슬 한 번 못 해보고 늙어버린 김 선비.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가난과 무시를 견디다 못해 술김에 저승행을 자초하는데...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저승 문턱에서 만난 저승사자들은 어딘가 엉성하고, 염라대왕은 호통 대신 뜻밖의 장부를 들이밉니다. "네놈이 죽기엔 너무 억울하지도 않느냐?" 죽으려다 살길을 찾게 된 김 선비의 기막힌 저승 여행기! 웃음과 감동이 있는 그날 밤의 재판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디스크립션 (300자 내외)
이 드라마는 조선 성종 때 성현이 지은 잡록집 『용재총화』의 기이한 이야기들에서 모티프를 얻어 재구성한 창작 야담입니다. 평생을 실패한 인생이라 여기며 자괴감에 빠져있던 늙은 선비 '김만석'이 우연한 사고로 저승에 가게 되며 벌어지는 소동을 그립니다. 무섭기만 한 줄 알았던 염라대왕과의 황당하고도 통쾌한 재판 과정을 통해, 우리 삶에 숨겨진 진정한 행복과 '아직 늦지 않았음'을 깨닫게 해주는 따뜻한 힐링 드라마입니다. 삶의 무게에 지친 시니어 분들에게 유쾌한 위로를 전합니다.
※ 신세 한탄을 하며 독한 술을 마시고 눈길에 쓰러지는 김만석
매서운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섣달그믐 밤이었습니다. 온 세상을 하얗게 집어삼킬 듯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가운데, 산기슭 외딴 주막에서는 희미한 호롱불 빛만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칠순을 바라보는 늙은 선비 김만석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빈 술병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았습니다.
"에헤이, 주모! 술! 술 더 가져오라니까! 내 돈이 없어서 안 주는 게야? 어? 내가 왕년에, 한양 가서 과거 볼 때는, 내 이름 석 자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으흐흑..."
"아이고, 김 진사 어른. 그만 좀 드셔요. 벌써 빈 병만 서너 개요. 밖에는 눈이 무릎까지 쌓였는데, 이 캄캄한 밤중에 고개 넘어 댁까지 어찌 가시려고 이러시오?"
"가긴 어딜 가! 내 집구석 들어가 봤자, 늙은 마누라 앓는 소리에, 며느리 눈치에, 에잉! 세상천지 이 넓은 땅덩어리에 내 몸 하나 편히 뉘일 곳이 없구나."
만석은 남은 술방울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칠십 평생 읽은 책이 수레로 다섯 개는 될 터인데, 남은 건 빚더미요, 시린 무릎뿐이라는 사실이 뼈에 사무쳤습니다.
"공자 왈, 맹자 왈이 다 무슨 소용이야. 책 속엔 길이 있다더니, 쌀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글 읽다 늙어버린 이놈의 인생, 헛되고 헛되도다."
"쯧쯧, 어르신. 외상값은 나중에 주셔도 되니, 오늘은 그만 일어나셔요. 이러다 정말 큰일 나십니다. 날이 너무 차요."
"큰일? 흐흐, 차라리 그게 낫지. 암, 낫고 말고. 염라대왕이나 만나서 따져나 봐야겠다. 내 인생 왜 이렇게 꼬아놨냐고! 당신이 한번 살아보라고!"
만석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몸을 가누지 못해 의자가 넘어지고, 문을 박차고 나가자마자 차가운 눈바람이 그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주막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그를 감쌌습니다.
"아이고, 저 노인네 또 고집 피우네. 조심해서 가슈! 내일 아침에 해장국 끓여 놓을 테니 꼭 살아서 오슈!"
주모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묻혀 멀어졌습니다. 만석은 눈이 수북이 쌓인 산길을 비틀비틀 걸어갔습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눈 밟는 소리가 처량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으추워, 뼈가 시리네, 뼈가 시려. 야 이놈의 하늘아! 듣고 있느냐! 나 김만석이다! 평생 남 속인 적 없고, 도둑질 한 번 안 했다! 헌데 어찌하여 말년이 이리도 초라하단 말이냐!"
대답 없는 하늘에 대고 소리치던 만석의 다리가 풀렸습니다. 미끄러운 눈길에 중심을 잃은 그는 엉덩방아를 찧더니, 그대로 차가운 눈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습니다.
"아구구구, 허리야. 아이고 내 팔자야."
차가운 눈이 등 뒤로 스며들지만, 만석은 일어날 힘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쌩쌩 부는 바람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오고, 차가운 눈밭이 따뜻한 이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 그래. 차가운 눈바닥이 오히려 방구석보다 편하구나. 아무도 잔소리 안 하고, 빚쟁이도 안 오고. 그래, 이대로 잠들면, 내일 아침 쌀독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던 개 짖는 소리도 아득해지고,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마저 느려지는 것을 느끼며 만석은 서서히 눈을 감았습니다.
"마누라, 미안하네. 먼저 가네."
※ 정신을 차려보니 저승사자 둘에게 이끌려 가고 있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뼛속까지 파고들던 추위는 온데간데없고, 몸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기묘한 느낌에 만석은 번쩍 눈을 떴습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익숙한 산길도, 하얀 눈밭도 아니었습니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자욱한 안개와, 끝을 알 수 없는 잿빛 길만이 길게 뻗어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조화라냐. 내 분명 눈밭에 누웠는데, 여긴 어디야?'
"어르신, 정신이 드시오? 이제야 눈을 뜨셨구만."
만석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갓을 삐딱하게 쓰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내 둘이 양옆에서 그의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고 입술은 새파란 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습니다.
"누, 누구시오? 당신들 누군데 남의 팔을 잡고 가는 거야! 이거 놓지 못해?"
"아이고, 성질하고는. 이보쇼 김 선비님. 칠십 평생 글 읽은 양반이 눈치가 그리 없소? 우리 복장을 보고도 모르겠소?"
"우린 저승사자요. 당신 명줄이 다해서 모시러 왔단 말이오."
"저승사자? 그럼 내가, 내가 정말 죽었단 말인가?"
"그렇다니까요. 아까 눈밭에서 얼어 죽겠다고 드러누웠잖소. 소원대로 데려가는 중이니 얌전히 따라오시오."
만석은 그제야 자신이 객기를 부리다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덜컥 겁이 날 법도 했지만, 오히려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도, 사람들의 무시도 이제 끝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허허, 거참. 꿈인 줄 알았더니 진짜였구만. 그래, 잘 됐네.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살 만큼 살았고 볼 꼴 못 볼 꼴 다 봤으니 미련도 없네. 어서 가세, 어서 가!"
만석이 호기롭게 앞장서려 하자, 키가 큰 저승사자가 낄낄거리며 그를 말렸습니다.
"이 양반 보게? 저승길 재촉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네. 보통은 살려달라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난리를 치는데 말이오."
"그러게 말이오 형님. 이 김 선비는 염라대왕님 앞에서도 이렇게 큰소리칠 수 있을지 두고 봐야겠구만."
"염라대왕? 암, 만나야지. 내 그 양반한테 따질 게 아주 산더미처럼 많네. 내 인생이 왜 이 모양 이 꼴이었는지 낱낱이 물어볼 참이야."
"그거 아주 기대되는구만. 근데 어르신, 저승 가는 길이 그리 만만치 않소. 저기 앞에 흐르는 강 보이죠? 저게 바로 삼도천이오."
안개 너머로 검은 강물이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강물 위로는 낡은 나룻배 한 척이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만석은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저 물을 건너면 다시는 못 돌아가는 게지?"
"당연하죠. 건너가면 이승의 기억도 흐릿해지고, 가족들 얼굴도 가물가물해질 겁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뭐 두고 온 거 없소? 숨겨둔 꿀단지라거나, 마누라한테 못한 말이라거나."
만석의 발걸음이 순간 멈칫했습니다. 평생 고생만 시킨 아내의 주름진 얼굴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미안하네... 그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것이... 참...'
가슴 한구석을 콕 찌르는 듯한 통증에 만석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두고 온 거... 없네. 없어. 다 부질없는 짓이지. 그냥 가세."
만석은 애써 고개를 저으며 나룻배에 올랐습니다. 뱃사공은 말없이 노를 저었고, 배는 검은 물살을 가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승과 멀어져 갔습니다. 강 한가운데 이르자, 어디선가 구슬픈 노랫가락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왔다 갈 때 빈손인 것을. 무엇을 탐하고 무엇을 원망하리오..."
만석은 그 소리에 홀린 듯 강물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물결 위에 자신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과거 급제에 실패하고 술타령하던 젊은 날,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 그리고 늙고 병들어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까지.
'내가... 참 바보처럼 살았구나.'
후회 섞인 한숨이 안개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저승사자들은 그런 만석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김 선비님. 염라대왕님의 재판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을 겁니다. 아주 스펙터클할 테니 각오 단단히 하시오."
배가 건너편 기슭에 닿자, 거대한 성문이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문 위에는 '명부(冥府)'라는 두 글자가 시뻘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 이승에 대한 미련과 두려움
삼도천을 건너 명부의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끓는 가마솥 소리, 채찍질 소리, 그리고 수만 가지 죄인들의 비명 소리가 뒤섞여 고막을 찢을 듯했습니다. 만석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잔뜩 움츠렸습니다.
"아이고, 저승사자 양반들.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오? 난 평생 사람 한번 때린 적 없는데?"
"겁먹지 마시오. 여긴 죄지은 놈들이 대기하는 곳이고, 선비님은 아직 판결 전이니 저쪽 대기실로 가시면 됩니다."
저승사자가 가리킨 곳은 비교적 조용해 보였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죄인들의 긴 줄 사이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고! 나 좀 살려주게! 내 돈 다 줄 테니 제발 한 번만 봐주게!"
'어라? 저 목소리는...'
만석이 고개를 돌려 자세히 보니,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인 채 옥졸들에게 끌려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비단 옷은 다 찢어지고 갓은 부서졌지만, 그 기름진 얼굴은 분명 만석의 고향 친구이자 고리대금업으로 큰돈을 번 '최 부자'였습니다.
"최 서방! 자네 아닌가?"
"어? 만석이? 아이고, 김 진사! 나 좀 도와주게! 이 놈들이 내 재산을 다 뺏고 나를 불구덩이로 끌고 가려 하네! 우리 사이에 모른 척할 텐가?"
"아니, 자네는 작년에 복상사로 편안히 갔다고 들었는데, 어찌 꼴이 이 모양인가?"
최 부자는 대답 대신 옥졸의 채찍을 맞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옆에 있던 저승사자가 혀를 끌끌 차며 거들었습니다.
"저 양반, 이승에서는 떵떵거렸을지 몰라도 여기 장부에는 죄가 아주 빼곡합니다. 흉년에 쌀 매점매석했지, 소작농들 등쳐먹었지, 첩을 셋이나 두고 본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했지. 가져온 돈보따리가 너무 무거워서 지옥으로 직행하는 중이오."
"돈이... 무거워서 지옥을 간다?"
"그렇죠. 저승 올 때 가장 무거운 짐이 바로 '탐욕'이거든요. 그에 비하면 우리 김 선비님은 아주 가볍지. 빈털터리로 왔으니 말입니다."
저승사자의 농담 반 진담 반인 말에 만석은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승에서는 부러워 마지않았던 최 부자의 재산이 이곳에서는 족쇄가 되어 그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반면, 가난해서 서러웠던 자신의 처지가 이곳에서는 오히려 홀가분한 깃털처럼 느껴졌습니다.
'허...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죽어서야 그 말이 실감 나는구나. 내 평생 땡전 한 푼 없이 살았지만, 적어도 남의 눈에 피눈물은 안 내고 살았으니... 그걸로 된 건가.'
"자, 구경 그만하고 어서 갑시다. 염라대왕님이 목 빠지게 기다리십니다."
만석은 비명을 지르며 멀어지는 최 부자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저승사자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처음 저승에 발을 디뎠을 때의 두려움은 조금 사라지고, 대신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올랐습니다.
'그래, 죄지은 게 없는데 꿀릴 게 뭐 있어? 가서 당당하게 말하자. 나 김만석, 가난했지만 비겁하게 살진 않았노라고.'
※ 위압적인 분위기 속 시작된 재판
마침내 도착한 염라대왕의 법정은 웅장하다 못해 압도적이었습니다. 천장은 까마득히 높아서 보이지 않았고, 양옆으로는 도깨비 형상을 한 호위무사들이 시뻘건 눈을 부라리며 서 있었습니다. 그 정중앙, 거대한 책상 뒤에 산처럼 거대한 덩치의 염라대왕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눈빛은 형형했고, 수염은 마치 검은 폭포수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죄인 김만석, 대령했습니다!"
저승사자의 외침이 법정 안에 쩌렁쩌렁 울리자, 염라대왕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만석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 눈빛이 어찌나 매섭던지, 만석은 방금 전까지 다졌던 자신감이 쑥 들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네놈이... 김만석이냐?"
"예... 예! 그렇사옵니다. 조선 땅 단양 고을에 살던 선비 김만석이옵니다."
염라대왕은 코웃음을 치며 앞에 놓인 두꺼운 장부를 펼쳤습니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어디 보자... 평생 벼슬 한 번 못 하고, 글공부만 하다가, 재산 다 까먹고, 마누라 고생만 시키고... 쯧쯧. 아주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았구나."
"그, 그건... 운때가 맞지 않아 그리된 것이지, 제가 게을러서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저도 밤낮으로 책을 읽고 노력했으나..."
"시끄럽다! 핑계는 지옥 가서 대거라."
염라대왕의 호통에 법정이 흔들렸습니다. 만석은 바짝 엎드려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대왕님! 제가 무능했던 건 인정합니다만, 그게 죽을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남을 해친 적도 없고, 도둑질도 안 했습니다! 아까 들어오다 보니, 나쁜 짓 많이 한 최 부자는 지옥으로 가던데, 저는 왜 죄인 취급을 하십니까?"
"허어, 이 놈 보게? 말대꾸는 청산유수로구나. 네놈이 살인이나 도둑질은 안 했을지 몰라도, 그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
"더... 더 큰 죄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만석을 완전히 뒤덮었습니다.
"네놈은 하늘이 내려준 가장 귀한 것을 스스로 내다버리려 했다. 눈 내리는 밤, 술에 취해 길바닥에 드러누우며 뭐라 했느냐?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이대로 눈 감으면 그만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 그건... 너무 사는 게 힘들고 고달파서 홧김에..."
"홧김에? 이 놈아! 네 명줄은 아직 십 년이나 남았어! 헌데 네놈이 제멋대로 포기하고 기어들어 온 것이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 네 희망을 제 손으로 꺾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인보다 더 무거운 '자포자기'의 죄니라!"
만석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습니다. 가난이나 무능함이 죄가 될 줄 알았는데,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 했던 마음가짐을 꾸짖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어디, 네놈이 정말 죽어도 싼 놈인지, 아니면 살려둘 가치가 있는 놈인지, 이 장부를 통해 낱낱이 파헤쳐 보자꾸나. 저승차사야, '복(福) 장부'를 가져오너라!"
"복 장부요? 죄를 적은 장부가 아니고요?"
"잔말 말고 가져오라!"
염라대왕의 지시에 저승사자들이 낑낑거리며 황금색으로 빛나는 또 다른 책을 들고 나왔습니다. 죄를 적은 검은 장부와 달리, 이 책에서는 따뜻하고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만석은 홀린 듯 그 빛나는 책을 바라보았습니다. 염라대왕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쳤습니다.
"김만석, 네놈은 네 인생이 실패작이라고 생각했지? 쥐뿔도 없는 놈이라고 여겼지? 과연 그럴까? 이 거울을 보아라!"
※ 염라대왕이 꺼내 든 '복(福) 장부'
염라대왕이 손을 휘저으며 펼친 황금색 장부에서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만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빛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만석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그림처럼 그려져 있었습니다.
"보아라. 30년 전, 엄동설한에 길가에 쓰러진 거지에게 네가 입고 있던 솜옷을 벗어주지 않았느냐? 그 거지는 그 옷 덕분에 얼어 죽지 않고 목숨을 건졌다."
"그, 그건... 그냥 너무 추워 보이길래... 헌 옷이라 버리려던 참이었습니다."
"허허, 겸손은 미덕이다만, 저승에서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어디 그뿐이냐? 과거 낙방하고 돌아오던 길에, 물에 빠진 강아지를 구해주고, 돈이 없어 서당에 못 가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천자문을 가르쳐주지 않았느냐. 네가 가르친 그 아이들 중 하나가 훗날 고을 원님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 있다."
만석은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평생을 벼슬 한 자리 못한 못난 놈이라 자책하며 살았는데, 염라대왕은 그 사소한 일들을 마치 대단한 업적이라도 되는 양 읊어대고 있었습니다.
"대왕님, 그런 건... 누구나 하는 일 아닙니까? 그게 무슨 복이 된다고..."
"이 멍청한 놈아! 남들은 내 앞가림하기도 바빠서 못 하는 일이다. 너는 네 인생이 빈 껍데기 같다고 했지? 하지만 이 장부를 보아라. 너는 이미 마음의 부자였다. 네가 베푼 작은 친절들이 모여 이렇게 큰 덕(德)을 쌓았거늘, 어찌 스스로를 하찮게 여긴단 말이냐!"
염라대왕의 호통에 만석은 가슴 뭉클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실패한 선비가 아니라, 따뜻한 이웃으로 살았던 자신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인정받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장부를 뚫어지게 보던 염라대왕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가만, 근데 이거 숫자가 좀 이상하구나. 저승차사야, 돋보기 좀 가져오너라."
"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요?"
"이런 젠장! 명부 담당 판관 놈이 졸았나 보구나. 여기 수명 적힌 칸에 파리 똥이 묻어 있었어!"
"파, 파리 똥이요?"
법정 안이 술렁거렸습니다. 염라대왕이 손가락으로 장부를 벅벅 문지르자, 가려져 있던 진짜 숫자가 드러났습니다.
"이런 망할... 네 수명은 칠십이 아니라 팔십오 세까지구나! 아직 15년이나 더 남았어! 파리 똥 때문에 '칠'자가 지워져서 칠십으로 보였던 게야."
"예?! 십... 십오 년이요? 그럼 저는 죽을 때가 안 된 겁니까?"
"그래! 억세게 운 좋은 놈이로구나. 하마터면 생사람 잡을 뻔했어. 네놈이 스스로 죽겠다고 난리만 안 쳤어도, 그냥 집에서 따뜻하게 자다 깰 팔자였는데 제 발로 여기까지 기어오다니!"
만석은 기가 막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15년이라니. 덤으로 얻은 것도 아니고, 원래 내 것이었다니.
"자, 오해가 풀렸으니 이제 판결을 내리겠다. 김만석, 너는 아직 이승에서 할 일이 남았다. 하지만 그냥 보내줄 수는 없지. 네가 죽으려고 했을 때, 네가 진짜로 잃어버릴 뻔한 게 무엇인지 똑똑히 보고 가거라."
염라대왕이 손짓하자 법정 한가운데 놓여 있던 거대한 거울, 업경대가 스르르 움직이며 만석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 만석이 죽지 않고 살았을 때 맞이할 내일의 행복을 보여줌.
거울 표면에 낀 자욱한 안개가 걷히더니, 칠흑 같은 저승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그곳은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리쬐고, 담장 너머로 매화꽃 향기가 진동할 것만 같은 만석의 집 앞마당이었습니다.
'아니, 저건 우리 집 마당 아닌가? 저리 꽃이 만발한 걸 보니 내년 봄인가 보구나.'
화면 속 마루에는 포동포동한 볼살이 귀여운 갓난아기가 방긋방긋 웃으며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쫓아다니며 입이 귀에 걸리도록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백발의 노인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만석 자신지이었습니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할애비한테 오너라! 옳지, 옳지! 넘어진다, 조심조심!"
"김만석, 저 아이가 누구인지 아느냐? 바로 내년 봄, 살구꽃이 필 무렵 태어날 네 친손주다. 네 며느리 뱃속에 이미 새 생명이 자라고 있거늘, 네가 오늘 죽었다면 저 아이는 할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제사상에 절이나 올릴 뻔했지. 저 아이를 안아보는 기쁨을 네 스스로 걷어차려 했단 말이냐?"
"소... 손주라니요? 우리 며느리가 아이를 가졌단 말입니까? 대가 끊길까 그리 노심초사했는데..."
만석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늙고 초라해서 밥버러지 같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저 미래 속에서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로 손주를 안고 있었습니다. 찡그린 미간도, 한숨 쉬던 입매도 온데간데없고 온화한 할아버지의 모습뿐이었습니다.
이어 화면이 바뀌었습니다. 만석의 아내가 정성스럽게 달인 약사발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늘 가난 타령, 신세 타령만 하던 아내의 얼굴에 주름진 미소가 곱게 번져 있었습니다.
"영감, 이거 드시고 기운 차리소. 산에서 캐온 귀한 약초를 다린 거요. 당신이 건강해야 우리 식구들이 든든하지요. 평생 고생만 시켰다고 미안해하지 마소. 당신만큼 점잖고, 남 해코지 안 하고, 심지 곧은 남편이 어디 있다고.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이랑 살 거요."
아내의 그 따뜻한 말 한마디가 거울 밖 만석의 심장을 후벼 팠습니다.
'마누라... 당신이 나를 저리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내가 당신 인생의 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당신은 나를 기둥으로 여기고 있었어...'
"보았느냐? 이것이 네가 '죽음'으로 도망치려 했던 '내일'의 행복이다. 돈이 많고 벼슬이 높아야만 행복한 것이냐? 가족과 함께 웃고, 맛있는 밥 한 끼 먹고, 따뜻한 봄볕 쬐며 손주 재롱 보는 것. 그게 진짜 신선놀음이고 사람 사는 맛 아니더냐?"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엄숙하면서도 부드럽게 잦아들었습니다. 만석은 차가운 법정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오열했습니다. 살고 싶어졌습니다. 미치도록 살아서, 거칠어진 아내의 손을 잡아주고 싶고, 태어날 손주의 보드라운 뺨을 비벼보고 싶어졌습니다.
"대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제발 저 좀 돌려보내 주십시오! 벼슬 같은 거 안 해도 좋습니다. 돈 없어도 좋습니다. 그저 가서 마누라한테 미안하다 말하고, 우리 손주 놈 고추도 한번 만져봐야겠습니다! 제발요!"
"허허, 이제야 눈빛에 생기가 도는구나. 죽고 싶어 안달 났던 눈빛은 사라졌어. 좋다! 내 특별히 파리 똥 실수를 인정하여 너를 즉시 돌려보내 주마. 대신 명심해라. 남은 15년은 하늘이 준 덤이라 생각하고, 매일매일 춤추듯 즐겁게 살아야 한다. 알겠느냐?"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뼈에 새기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봐라! 이 놈을 늦기 전에 당장 이승으로 걷어차 버려라!"
염라대왕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도깨비들이 만석의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발아래로 아득한 낭떠러지가 보였지만, 만석은 두려움 대신 가슴 벅찬 희망을 품고 소리쳤습니다.
"나 돌아간다! 여보! 조금만 기다려! 나 다시 간다!"
※ 꿈인 듯 생시인 듯 깨어난 만석
"여보! 영감! 제발 눈 좀 떠보소! 영감! 이러다 진짜 가는 거 아니요?"
다급하고 애타는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습니다. 웅웅거리는 이명 소리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자, 꽁꽁 얼어붙었던 몸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만석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릿했던 시야가 밝아지며 익숙한 천장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내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훈훈한 온기가 감돌고, 구수한 숭늉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습니다.
"어... 으음... 여보?"
"아이고, 세상에! 눈 떴네! 눈 떴어! 의원님! 우리 영감 깨어났습니다! 영감, 나 알아보겠소?"
아내가 와락 만석을 끌어안았습니다. 차가운 저승의 공기가 아닌, 펄펄 끓는 사람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자 만석은 비로소 자신이 살아 돌아왔음을 실감했습니다. 아내의 거친 옷감 냄새가 이토록 향기로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내가... 내가 살아있는 거요? 염라대왕은? 파리 똥은 어찌 되고?"
"이 양반이 노망이 났나, 무슨 파리 똥 타령이요! 어제 주막 주모가 눈밭에 쓰러진 당신을 업고 오지 않았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잖소! 꼬박 하루를 열병으로 앓아눕더니, 이제야 정신이 드오? 아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내의 타박조차 천상의 노래처럼 달콤하게 들렸습니다. 만석은 떨리는 손을 들어 아내의 젖은 뺨을 닦아주며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임자... 고맙네. 그리고 정말 미안하네. 내 다시는 당신 혼자 두고 먼저 간다는 소리 입 밖에도 안 낼게. 내 목숨이 붙어있는 날까지 당신 호강은 못 시켜줘도, 마음고생은 안 시키리다."
"뭐, 뭘 잘못 먹었나? 왜 평생 안 하던 소리를 하고 그래요... 사람 싱겁게..."
아내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지만, 입가에는 안도감 섞인 엷은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때,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며느리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아버님! 깨어나셨어요? 정말 다행입니다. 마침 아랫마을 냇가에서 귀한 잉어를 구해와서 푹 고았습니다."
"오냐, 아가야. 내 걱정 많이 했느냐."
"예... 그리고 아버님, 저기,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며느리가 수줍게 배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습니다. 얼굴이 발그레한 것이 복사꽃 같았습니다.
"저... 몸이 좀 이상해서 의원님께 여쭤보니, 아이가 들어선 것 같아요. 태기가 있습니다, 아버님."
만석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업경대에서 보았던 그 장면, 염라대왕의 호통이 꿈이 아니라 진실이었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 정말이구나. 내 삶이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 핏줄이 이어지고, 축복이 남아 있었어! 염라대왕님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어!'
"허허허! 경사로다, 경사야! 우리 집안에 새 식구가 생기는구나! 그래, 어서 잉어국 가져오너라! 내 그거 남김없이 먹고 기운 차려서 우리 손주 놈 그네도 만들어주고, 천자문도 내가 직접 가르쳐야겠다! 암, 그렇고 말고!"
"아이고, 우리 시아버님 기운이 펄펄 넘치시네. 병석 털고 일어나자마자 손주 타령이세요?"
방 안 가득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창호지 문 밖으로 눈이 그치고 환한 아침 햇살이 방 안 깊숙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만석은 그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15년이나 남은 자신의 '진짜 인생'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습니다. 죽으려던 춥고 어두운 밤이 지나고,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살맛 나는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오늘 김 선비의 기막힌 저승 여행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15년이라는 귀한 시간을 다시 얻은 김만석 할아버지.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만석 할아버지의 장부처럼,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복'과 '행복'으로 채워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 힘들고 외롭다고 느껴지시나요? 거울을 한번 보세요. 여러분의 미소 속에, 자식들의 안부 전화 속에, 따뜻한 밥 한 끼 속에 아직 뜯지 않은 선물 같은 행복이 숨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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