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케이스는 처음이다" 염라대왕을 당황시킨 조선 여인의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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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00자)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 온 한 노파. 염라대왕 앞에서 "내 삶이 곧 지옥이었으니, 심판할 죄가 없나이다!"를 외치다. 천하의 염라대왕을 침묵시킨 그녀의 기막힌 변론이 지금 시작됩니다!
디스크립션 (300자)
평생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았던 조선의 한 여인. 억울한 죄목으로 저승에 끌려와 염라대왕과 마주한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자신의 삶이 그 어떤 지옥보다 혹독했노라 항변한다. 시니어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릴 지혜와 감동의 이야기.
※ 억울한 죄목으로 염라대왕 앞에 선 박씨 노파.
여기는 빛 한 줌 들지 않는 깊고 깊은 땅속, 망자들이 모여든다는 명부(冥府)의 세계. 사방에서는 정처 없이 떠도는 혼령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치고,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거대한 옥문(獄門)을 지나자, 수만 개의 촛불이 일렁이며 거대한 법정을 밝혔다. 법정의 가장 높은 단상 위에는 집채만 한 거구의 사내가 앉아 있으니, 검은 관복에 무시무시한 얼굴, 눈빛만으로도 능히 산 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저승의 군주, 염라대왕이었다.
"다음! 망자 박씨! 대령하시오!"
청백색의 관복을 입은 저승의 판관이 목청을 돋우자, 쇠사슬에 묶인 한 노파가 옥졸들에게 이끌려 염라대왕의 앞으로 나아갔다. 한평생 밭일로 다져진 거친 손마디, 허리는 굽을 대로 굽었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강물처럼 흘렀다. 노파는 그러나, 여느 망자들처럼 사시나무 떨듯 떨거나 울부짖지 않았다. 그저 초연한 눈빛으로, 소리 없이 자신을 짓누르는 저승의 위엄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염라대왕이 거대한 두루마리를 펼쳐 들며, 지축을 울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망자 박씨. 네가 이승에서 살아온 83년의 세월이 이 업경대(業鏡臺)에 낱낱이 비치었고, 너의 모든 언행이 이 명부록에 빠짐없이 기록되었느니라.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염라의 호통에 판관이 기다렸다는 듯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죄목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망자 박씨. 죄목 하나. 평생에 걸쳐 크고 작은 거짓을 일삼아 주변을 기만하였으니, 이는 망어(妄語)의 죄에 해당하느니라."
"죄목 둘. 이웃의 풍요를 시기하고, 사촌의 안녕을 질투하였으니, 이는 투기(妬忌)의 죄에 해당하느니라."
"죄목 셋.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남의 밭에서 무 하나를 서리하였으니, 이는 도둑질의 죄에 해당하느니라."
"죄목 넷. 자식들을 공평하게 사랑하지 아니하고, 유독 막내아들만을 편애하였으니, 이는 불공(不公)의 죄에 해당하느니라."
"죄목 다섯. 명을 다한 남편의 죽음 앞에서 곡을 하다 말고, ‘이제 내 팔자는 어이할꼬’ 한탄하며 제 몸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였으니, 이는 인정(人情)이 메마른 죄에 해당하느니라."
"죄목 여섯..."
판관의 입에서 죄목이 낭독될수록 법정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노파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마침내 모든 죄목 낭독이 끝나고, 다시 법정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염라대왕이 노파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망자 박씨. 너는 이 모든 죄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변명할 것이 있거든 말해보라. 허나, 저 업경대는 거짓을 비추지 않으니, 부질없는 변명은 너의 죄를 무겁게 할 뿐이니라."
그때였다. 평생 마른기침조차 크게 낸 적 없을 것 같은 노파의 입에서,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염라대왕님. 소인의 지난 삶을 이토록 세세히 살펴주시니,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노파는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염라대왕과 눈을 맞추었다. 그 눈에는 두려움도, 원망도 아닌 기묘한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하오나 대왕님. 지금껏 소인의 죄목을 빠짐없이 읊어주셨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셨습니다."
염라대왕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저승의 법정에서 감히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망자는 일찍이 없었다.
"네 말이 가소롭구나. 이 명부록이 하늘의 뜻을 받아 적은 것인데, 무엇이 빠졌다는 게냐!"
노파는 굽은 허리를 조금 더 꼿꼿이 펴고, 법정 전체가 울리도록 힘주어 말했다.
"소인이 이승에서 받은 벌(罰)에 대한 기록이 빠져있사옵니다. 소인은… 이미 평생에 걸쳐 모든 죗값을 치르고 이곳에 왔나이다. 그러니… 대왕께서 심판하실 죄가, 제게는 더는 남아있지 않사옵니다."
순간, 법정의 모든 소음이 멎었다. 망자들의 신음 소리도, 옥졸들의 숨소리도, 심지어 저 멀리 지옥에서 들려오는 비명조차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천하의 염라대왕은, 태어나 처음 듣는 기묘한 변론에 잠시 말을 잃고 노파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내 삶이 곧 지옥이었으니 심판할 죄가 없다는 주장.
정적을 깬 것은 노파의 마른기침 소리였다. 그녀는 한 호흡 가다듬고는, 기억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아득한 눈빛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더 이상 작지 않았다. 한(恨)과 세월의 무게가 실려, 듣는 이의 심장을 파고드는 힘이 있었다.
"대왕님께서는 제가 거짓을 일삼았다고 하셨지요. 예, 맞습니다. 소인은 거짓말쟁이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제가 처음 배운 거짓말은, 일곱 살 적 보릿고개 때였습니다. 사흘을 굶어 헛것이 보이는 동생의 손을 잡고, 저는 매일 밤 똑같은 거짓말을 속삭였습니다. ‘얘야, 저기 저 산만 넘으면 외할머니 댁이란다. 거기는 쌀밥에 고깃국이 넘쳐난대. 내일은 꼭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게야.’ 그 산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굶주림보다 더 무서운 절망을 이기기 위해 거짓을 말해야 했습니다. 제 인생의 첫 거짓말은, 굶어 죽어가는 동생에게 먹여준 마지막 양식이었습니다."
노파의 목소리가 법정 안에 잔잔히 퍼져나갔다. 염라대왕은 팔짱을 낀 채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아까와 달리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스무 해가 넘게 이어진 가뭄 끝에, 제 아들놈이 역병에 쓰러졌습니다. 의원은 가망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지요. 저는 뜨거운 불덩이 같은 아들의 이마를 짚으며 또다시 거짓을 말했습니다. ‘아들아, 어의가 그러는데 이 약만 먹으면 내일 아침엔 거뜬히 일어날 수 있다더라. 어서 약 먹고 기운 차려서 어미랑 밭 갈러 가야지.’ 제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목소리만은 짐짓 명랑하게 꾸며냈습니다. 아들은 그 거짓말을 믿고, 편안한 얼굴로 제 품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 거짓말은… 어미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자장가였습니다. 대왕님, 희망을 주기 위한 거짓말도 망어요, 벌 받아야 할 죄인지요?"
노파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웃의 풍요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하셨습니까? 예, 그리했습니다. 옆집에서 밥 짓는 냄새가 흘러나올 때면, 맹물로 갓난쟁이의 배를 채우던 제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습니다. 제 자식 입에 죽 한 그릇 넣어주지 못하는 어미의 심정이, 시기와 질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죄라면, 소인은 달게 받겠습니다. 허나 대왕님, 자식을 굶기는 어미의 심장이 타들어 가는 고통과, 남의 풍요를 보며 느끼는 시기심의 죄 중에, 과연 어느 쪽의 무게가 더 무겁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남의 밭 무 하나를 훔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입니다. 허나 그날은 제 손주의 첫돌이었습니다. 젖이 말라버린 며느리는 하염없이 울고만 있고, 손주 놈은 뼈만 앙상하게 남아 하루 종일 칭얼거렸지요. 그깟 무 하나 삶아 입에 넣어주면 잠시라도 울음을 그칠까 싶어, 저는 귀신에 홀린 듯 남의 밭에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그 무를 훔친 제 손은 지옥 불에 떨어져 마땅하오나, 굶주린 손주를 외면한 할미의 마음은 과연 천당에 갈 수 있는 것인지요?"
노파의 목소리는 점점 더 힘을 얻어갔다. 그것은 더 이상 변명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 전체를 내건, 하나의 거대한 항변이었다.
"대왕님. 소인이 듣자 하니 이 명부의 지옥에는, 죄인을 벌하는 칼로 된 산(刀山)이 있고, 기름이 끓는 가마솥(油鑊)이 있다 들었나이다. 소인의 평생이야말로 맨발로 걸어온 칼산이었고, 제 타들어 가는 속이야말로 기름이 끓는 가마솥이었나이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역병으로 자식을 잃고, 흉년으로 이웃을 잃었습니다. 굽은 허리로 평생 남의 밭을 갈아 자식을 키웠더니, 그 자식은 늙은 어미를 짐짝 취급하며 산 채로 내다 버리려 했습니다. 저는 이미 이승에서, 대왕님의 지옥이 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겪고 또 겪었습니다."
노파는 마침내 굽은 허리를 완전히 펴고, 염라대왕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 대신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러니 대왕님, 부디 명하여 주시옵소서. 이 박씨에게 그 어떤 벌을 내리시렵니까? 제 평생보다 더한 고통을 줄 수 있는 형벌이, 이 저승에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이옵니까?"
노파의 마지막 말이 법정 전체를 휘감았다. 망자들의 울음도, 판관의 기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서슬 퍼런 침묵만이 거대한 법정을 가득 채웠다. 염라대왕은 굳게 닫힌 입을 열지 못했다. 수천 년간 수억의 망자를 심판해 온 저승의 군주가, 평생 글 한 자 배워본 적 없는 늙은 여인의 처절한 항변 앞에, 처음으로 할 말을 잃고 만 것이었다.
※ 업경대에 비친 노파의 처절했던 삶의 순간들.
박씨 노파의 항변이 거대한 법정의 대들보를 한 바퀴 휘감고 스러졌다. 수천 년간 저승의 질서를 지켜온 염라대왕의 권위에 정면으로 맞선, 한낱 미물 같은 인간의 목소리였다. 법정을 가득 채운 수많은 혼령들과 저승의 권속들은 숨을 죽였다. 감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염라대왕은 굳게 닫았던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과 같은 위엄을 담고 있었으나, 그 깊은 곳에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미세한 동요가 서려 있었다.
"네 말이 참으로 기구하고, 그 기백 또한 놀랍구나. 허나, 이 저승의 법도는 네 한 맺힌 혓바닥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네 삶이 진정 네가 말한 바와 같았는지, 네 고통의 무게가 저 명부록에 적힌 죄의 무게를 덮고도 남음이 있는지, 이 저승의 거울, 업경대(業鏡臺)에게 직접 물어볼 것이다!"
염라대왕이 손을 들자, 법정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던 거대한 청동 거울이 낮게 울기 시작했다. ‘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 표면에서 수만 개의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며 노파의 모습을 비추었다. 업경대, 망자의 일생을 단 하나의 거짓도 없이 비추어 낸다는 심판의 거울이 마침내 그 증언을 시작한 것이다.
빛줄기는 이내 하나의 영상이 되어 허공에 떠올랐다. 거울이 비춘 첫 번째 풍경은,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낡은 흙집이었다. 아궁이의 불은 꺼진 지 오래고, 얇은 이불 밑에서 어린 남매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떨고 있었다. 일곱 살 남짓한 어린 노파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동생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거울은 그녀의 목소리까지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얘야, 저 산만 넘으면 외할머니 댁이란다. 거기는 쌀밥에 고깃국이 넘쳐난대...’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간절하여, 듣는 이의 심장을 저미게 했다. 그것은 결코 남을 속이기 위한 간사한 거짓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동생을 붙잡으려는 어린 소녀의 처절한 외침이었다.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찌는 듯한 여름날의 어느 밭두렁이었다. 갓난아기를 업은 젊은 시절의 노파가 땀을 뻘뻘 흘리며 김을 매고 있었다. 그때 옆집 마당에서 구수한 밥 짓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넘어왔다. 노파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냄새가 나는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시기나 질투가 아니었다. 젖이 말라 칭얼대는 등 위의 자식에 대한 미안함, 맹물조차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어미의 처절한 슬픔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흐른 눈물 한 방울이, 메마른 땅 위로 툭 떨어져 먼지를 일으켰다.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거울은 칠흑 같은 밤, 남의 밭 앞에서 망설이는 노파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녀의 손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안된다, 이건 죄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지만, 귓가에는 열에 들떠 끙끙 앓는 손주의 신음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결국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밭으로 들어가, 가장 실해 보이는 무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거울은 똑똑히 비추고 있었다. 그녀가 도망친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닌, 마을의 사당 앞이었다. 그녀는 그 무를 제단에 올리고는, 동이 틀 때까지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로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
판관이 읊었던 죄목들이 하나씩, 하나씩 거울 위로 펼쳐졌다. 유독 약하게 태어난 막내아들에게 자신의 밥그릇을 덜어주던 모습. 그것은 편애가 아니라, 약한 생명을 지키려는 어미의 본능이었다. 남편의 주검 앞에서 ‘내 팔자는 어이할꼬’ 탄식하던 모습. 그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한순간에 가장이 되어 남겨진 자식들과의 막막한 앞날을 걱정하는 어미의 절규였다.
업경대에 비친 노파의 83년 생애는, 죄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고통과 눈물로 점철된 한 인간의 위대한 투쟁기였다. 거울의 빛이 스러지고, 법정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의 침묵은 이전보다 훨씬 무겁고 깊었다. 냉정하기 짝이 없던 판관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고, 험상궂은 옥졸들조차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염라대왕은 아주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치 천근의 무게를 들어 올리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는, 수천 년 묵은 저승의 법도가 처음으로 겪는 깊은 고뇌의 소리였다.
※ 죄목 하나하나에 담긴 눈물의 사연.
긴 침묵을 깨고 염라대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망자를 심판하는 군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평생을 살아낸 고단한 인생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한 명의 나이 든 존재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업경대의 증언은 모두 보았다. 네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없었음을 확인하였느니라."
염라대왕은 잠시 말을 멈추고 노파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 네게 한 가지만 묻겠다, 망자 박씨. 너는… 너의 그 고단했던 삶을 후회하지 않느냐? 하늘이 원망스럽고, 네게 고통을 준 세상이 증오스럽지 않더냐? 네게 그 모든 짐을 지운 채 먼저 떠나버린 네 지아비와, 늙은 어미를 외면한 네 자식들이… 밉지 않더냐?"
그것은 죄를 묻는 심문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한 ‘한(恨)’의 정체를 묻는, 철학적인 질문이었다. 노파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피어난 그 미소는, 세상의 모든 슬픔을 겪어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어찌 후회가 없고, 어찌 원망이 없었겠습니까, 대왕님. 비가 새는 지붕 밑에서 굶주린 아이들을 끌어안고 누웠을 때, 저는 무정한 하늘을 원망했습니다. 제 손으로 자식의 눈을 감겨 땅에 묻었을 때, 저는 이 세상을 증오했습니다. 허나 대왕님, 제 삶이 고통과 원망으로만 가득 찼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노파의 목소리는 이제 법정을 가득 채운 하나의 따뜻한 이야기가 되어 울려 퍼졌다.
"제가 동생에게 건넨 거짓말은 저를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였으나, 그 거짓말을 듣고 희미하게 웃어주던 동생의 미소는 제 평생의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자식을 굶기는 고통은 뼈를 깎는 아픔이었으나, 제 손길 하나에 의지해 잠든 아이들의 얼굴은 저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었습니다. 밭에서 훔친 무 하나의 죄는 무거웠으나, 그 무즙을 받아먹고 까르르 웃던 손주의 웃음소리는 제 모든 시름을 잊게 하는 하늘의 소리였습니다."
"대왕님께서는 제가 남편의 죽음 앞에서 제 몸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 꾸짖으셨지요. 예, 소인은 두려웠습니다. 홀로 남겨진 세상이, 저 혼자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섭고 버거웠습니다. 허나, 저는 그 두려움 때문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먼저 간 지아비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남겨진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저는 다시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지아비가 남기고 간 사랑과, 자식들이 제게 준 정(情)이, 그 모든 두려움보다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노파는 굽은 허리를 숙여 법정 바닥에 깊이 엎드렸다. 그것은 죄인의 복종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경건한 예의였다.
"그러니 대왕님. 소인의 삶은 고통이었으나, 또한 사랑이었습니다. 한이었으나, 또한 정이었습니다. 원망이었으나, 또한 감사였습니다. 소인은 이승에서 웃고 울며, 사랑하고 미워하며, 인간으로서 겪어야 할 모든 감정을 남김없이 겪고 왔습니다. 그러니 더는 여한이 없습니다. 천당을 바라지도 않고, 지옥을 두려워하지도 않겠습니다."
노파는 고개를 들어 마지막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고 평온했다.
"부디, 소인의 삶을 죄와 벌로 재단하지 마시옵소서. 그저… 흙에 기대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한 세상 고단하게 살아낸 여인이 있었다, 그리 여겨주시면 족하옵니다."
노파의 말이 끝나자, 염라대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놓인 거대한 명부록, 수많은 망자들의 죄와 벌이 빼곡히 적힌 그 두루마리를 조용히 들어… 덮었다.
※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침묵에 빠진 염라대왕과 저승의 법정.
‘쿵’ 하고 명부록 덮이는 소리가 법정의 침묵을 갈랐다. 그 소리는 마치, 수만 년간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던 거대한 기계가 처음으로 삐걱거리며 멈춰 선 소리와도 같았다. 저승의 모든 권속들은 숨을 삼켰다. 감히 그 누구도, 저 높은 단상 위에 선 염라대왕의 얼굴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대왕의 얼굴에는 분노도, 슬픔도 아닌 깊은 고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거대한 법정 안을 말없이 거닐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육중한 관복 자락이 바닥에 스치며 버석이는 소리를 냈다. 그의 머릿속은 수만 갈래의 생각으로 들끓고 있었다.
'이 여인을 벌(罰)하자니, 의(義)가 바로 서지 않는다. 업경대가 비춘 저 삶의 무게는, 이 저승의 그 어떤 형벌보다 무거웠다. 이미 제 몸으로 지옥을 살아낸 이에게 또다시 지옥의 고통을 주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가혹한 형벌일 뿐이다. 허나, 이 여인을 상(賞)주자니, 법(法)이 무너진다. 명부록에 적힌 죄는 엄연한 사실. 이 여인을 아무런 심판 없이 극락으로 보낸다면, 앞으로 그 어떤 망자가 이 저승의 법도를 두려워하겠는가. 법과 질서가 무너진 저승은, 이승의 혼돈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염라대왕은 자신의 곁을 지키고 선 늙은 판관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이제껏 없었던 무력감이 실려 있었다.
"판관,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저 여인을 어찌해야 옳겠는가."
늙은 판관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대왕님… 소인의 짧은 소견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사옵니다. 명부록의 법(法)을 따르자면 그녀는 명백한 죄인이오나, 업경대가 비춘 도(道)를 따르자면 그녀는 제 한 몸을 희생하여 가족을 지켜낸 의인(義人)에 가깝습니다. 법으로는 죄인이나, 도로는 성인(聖人)과 같으니… 소인 역시 무엇이 옳은 판단인지 분간이 서질 않사옵니다."
판관의 대답은 염라의 고뇌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염라대왕의 시선이 법정 한구석, 하염없이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혼령들에게로 향했다. 그는 문득 떠올렸다. 이런 곤혹스러운 심판이 아주 처음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래… 그 옛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수만 명의 적군과 함께 제 목숨을 던진 늙은 장수도 이러했다. 그의 죄는 수많은 생명을 죽인 살생의 죄였으나, 그의 공은 나라를 구한 구국의 공이었다. 법으로는 지옥에 보냈어야 하나, 의로는 천상에 올렸어야 마땅했지.'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남의 집 재물을 훔쳤던 효자도 있었다. 법으로는 절도죄를 물어야 했으나, 그 마음은 인간 세상의 그 어떤 효심보다 지극했다. 그 또한… 판결을 내리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염라대왕의 뇌리를 스쳐 가는, 법과 도리 사이에서 고뇌하게 했던 수많은 특별한 영혼들. 그들은 모두 인간 세상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희생이라는, 저승의 법도로는 감히 재단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온 자들이었다. 박씨 노파 역시 그러했다. 그녀는 죄를 지었으나, 그 모든 죄는 사랑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염라대왕은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법정 가장 앞에 선 박씨 노파를 다시 한번 찬찬히 뜯어보았다. 평생을 흙먼지 속에서 살아온 작고 굽은 몸. 하지만 그 안에 깃든 영혼의 기개는, 이 저승의 그 어떤 장수나 영웅보다도 굳건하고 단단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염라대왕은 결심을 굳힌 듯 다시 옥좌로 돌아가 앉았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법과 의, 그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제3의 길을 찾아낸 자의 깊고 엄정한 빛이 흘렀다. 그는 법정 전체를 향해, 마지막 판결을 내리기 위해 장엄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짓 하나에, 저승 전체가 다시 한번 숨을 멈추었다.
※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염라대왕의 마지막 판결.
모두의 시선이 염라대왕의 입으로 쏠렸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단 한마디가 노파의 영겁의 운명을 결정지을 터였다. 염라대왕은 옥좌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분하고 장엄한 목소리로 판결을 시작했다.
"망자 박씨, 앞으로 나오라."
노파가 조용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너는 네 마지막 변론에서, 천당을 바라지도 않고 지옥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하였다. 그저, 한 세상 고단하게 살아낸 여인으로 기억해달라 청하였지. 네 청을… 이 염라가 똑똑히 들었노라."
염라대왕은 단상 아래 노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네 삶의 무게를 이 저승의 저울로는 감히 잴 수가 없고, 네 눈물의 깊이를 이 저승의 법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구나. 너의 죄는 명백하나, 네가 살아온 고통의 생이 이미 그 죄를 덮고도 남았다. 너의 거짓은 죄였으나, 그것은 사랑을 위한 방편이었고, 너의 질투는 죄였으나, 그것은 모성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이 저승의 법으로 심판하지 않겠다."
법정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심판하지 않겠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염라대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판결을 계속했다.
"나는 너를 죄인들이 가는 지옥으로 보내지 않겠다. 또한, 공덕을 쌓은 자들이 가는 극락으로도 보내지 않겠다."
모두가 의아해하는 순간, 염라대왕의 입에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판결이 떨어졌다.
"그 대신, 나는 너에게 이 저승에서의 새로운 소임(所任)을 맡기려 한다."
염라대왕은 옥좌에서 몸을 살짝 일으켰다.
"망자 박씨. 너는 평생을 아파하고, 평생을 슬퍼하고, 평생을 인내하며 살아왔다. 너만큼 인간의 한과 슬픔을 깊이 이해하는 자는 이 저승에 없을 것이다. 너의 그 고통은 이제 너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이의 고통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위대한 힘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는 저 망각의 강, 망천(忘川)의 강가에 머물며, 이승의 기억을 잊지 못해 슬퍼하는 모든 영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가 되어라. 특히, 너처럼 자식을 먼저 보내고, 지아비를 잃고, 세상의 모진 풍파에 시달리다 온 모든 어미들과 여인들의 손을 잡아주어라. 그들의 등을 쓸어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한 맺힌 이야기를 молча 들어주며, 그들이 편안히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가 너에게 내리는 마지막 판결이다."
염라대왕의 판결이 끝나는 순간, 노파의 몸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를 묶고 있던 쇠사슬이 스르르 녹아내려 한 줌의 재가 되었다. 평생 굽어 있던 허리가 꼿꼿하게 펴지고, 흙먼지와 땀으로 얼룩졌던 누더기 옷은 깨끗하고 온화한 빛을 내는 소복(素服)으로 변했다. 깊게 패었던 주름은 그대로였으나, 그 얼굴에서는 더 이상 고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인자하고 온화한 미소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염라대왕은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을 내렸다.
"이제 너의 이름은 죄인 박씨가 아니다.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자, 내가 너를 '위로보살(慰勞菩薩)'이라 칭하겠노라."
위로보살이 된 노파는 염라대왕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그것은 죄인의 복종이 아닌, 새로운 소명을 받은 자의 경건한 다짐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법정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걸어가는 길 위로, 은은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법정에 있던 모든 혼령들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길을 터주었다. 그녀는 이제, 망각의 강가에서 또 다른 슬픈 영혼들을 기다리는, 저승의 새로운 어머니가 된 것이다.
유튜브 엔딩멘트
한평생을 꿋꿋하게 살아낸 여인의 삶은, 저승의 법도마저 바꾸어 놓았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심판은 죄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것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만난 박씨 노파처럼, 때로는 천하의 염라대왕마저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쩔쩔매게 만들었던 특별한 영혼들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염라대왕의 사면초가: 저승 왕도 곤란했던 특별한 영혼들> 편이 이어집니다. 구독과 좋아요 누르시고, 염라대왕의 다음 재판을 기다려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