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대왕 법정의 대혼란 , 이승 복귀 성공한 저승 모험기 『해동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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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300자 내외)
"이보시오! 나는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란 말이오!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유분수지!"
평생 잔병치레 한 번 없이 건강하게 살아온 칠순의 박 첨지. 어느 날 낮잠을 자다 웬 검은 옷 입은 사내들에게 이끌려 저승길에 오릅니다.
그런데 염라대왕 앞에 서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뭐라? 이 박 첨지가 그 박 첨지가 아니라고?"
저승사자의 황당한 실수로 산 채로 저승에 간 박 첨지! 장례 치르기 전에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기 위한 박 첨지의 기막힌 탈출 대소동!
과연 그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먹을 수 있을까요?
디스크립션 (300자 내외)
성현의 『용재총화』에 기록된 기이한 이야기들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한 오디오 드라마입니다. 이름과 생년월일이 비슷해 엉뚱한 사람을 잡아간 저승사자들의 실수, 소위 '명부 착오' 에피소드를 다룹니다. 저승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유쾌한 소동극으로 풀어내어,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로 그려냅니다. 꼬장꼬장하지만 속정 깊은 박 첨지의 저승 모험을 통해, 오늘 하루 숨 쉬고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전하는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 건강을 자부하며 낮잠에 드는 박 첨지
뻐꾸기 울음소리가 나른하게 울려 퍼지는 늦봄의 어느 오후였습니다. 조선 팔도에서 물 좋고 산 좋기로 소문난 양주 고을, 그중에서도 장수 노인 많기로 유명한 아랫마을 기와집 마루에 박 첨지가 대자로 누워 부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올해 나이 일흔둘, 하지만 박 첨지는 아침마다 쌀가마니를 번쩍번쩍 들 만큼 힘이 장사였습니다.
"어허, 날씨 한번 좋구나. 바람도 솔솔 불고, 밥도 든든히 먹었겠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네. 여보, 임자! 거기 시원한 식혜 한 사발만 가져와 보소. 목이 좀 컬컬하네."
부엌에서는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와 함께 아내의 잔소리가 날아왔습니다.
"아이고, 영감도 참. 방금 점심 드시고 또 뭐가 들어가요? 그러다 배탈 나면 어쩌시려고. 늙으면 소화력도 떨어진다는데 좀 작작 드슈."
"허허, 이 사람이! 내가 늙긴 누가 늙었다고 그래? 내 이빨 좀 보소. 아직 생밤도 오드득 씹어 먹는 강철니야. 아랫마을 최 진사 그 양반은 벌써 지팡이 짚고 다닌다는데, 나는 아직 펄펄 날아다니잖소. 그러니 잔소리 말고 얼른 식혜나 주소."
박 첨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채로 배를 툭툭 쳤습니다. 따사로운 햇살이 눈꺼풀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으음... 그래, 잠깐 눈 좀 붙여볼까... 꿈에서라도 잉어 한 마리 낚으면 좋겠구먼..."
얼마나 지났을까요. 박 첨지의 코에서 드르렁드르렁 코기차 소리가 나기 시작할 무렵, 마당에 서늘한 바람이 일더니 검은 그림자 셋이 스르르 나타났습니다. 갓을 푹 눌러쓰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그들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했습니다. 그중 가장 덩치 큰 사내가 품에서 낡은 장부를 꺼내 들었습니다.
"어디 보자... 여기가 양주군 동면... 박가네 집이 맞는가?"
"예, 형님. 문패에 '박달구'라고 적혀 있습니다. 생년월일도 얼추 맞는 것 같습니다요."
"음, 그래? 시간 지체할 것 없다. 염라대왕님께서 요즘 명부가 밀려 성격이 급해지셨으니 냉큼 데려가자. 야, 너희 둘, 양쪽에서 잡아."
두 명의 저승사자가 마루로 올라와 자고 있는 박 첨지의 양팔을 덥석 잡았습니다. 꿀잠을 자던 박 첨지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번쩍 떴습니다.
"으악! 뭐야! 어떤 놈들이야! 남의 집 안방까지 쳐들어와서 다짜고짜 사람을 잡아?"
"이보시오, 박 첨지.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따라오시오. 나라에서 부르는 게 아니라 저승에서 부르는 거요."
"저승? 저승이라니? 이 놈들이 대낮부터 술을 처먹었나! 내가 왜 저승을 가! 나는 어제도 뒷산에 가서 장작 한 짐을 해온 사람이여! 이 팔 근육 안 보여?"
박 첨지가 팔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솜뭉치처럼 가벼웠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박 첨지의 몸은 그대로 마루에 누워 있고, 저승사자들에게 잡힌 것은 반투명한 박 첨지의 '혼'이었습니다.
"어? 어어? 저거... 저기 누워 있는 저 사람은 누구요? 왜 내가 둘이란 말이오?"
"쯧쯧,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시는구만. 당신 명줄이 다해서 혼만 쏙 빠져나온 거요. 저기 누워 있는 건 이제 빈 껍데기지. 자, 설명은 가면서 할 테니 어서 갑시다."
"이보시오! 말도 안 돼! 나는 아픈 데도 없었다고! 어제 곰국도 한 그릇 다 비웠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여보! 임자! 나 좀 살려줘! 이 도둑놈들이 나를 잡아가!"
박 첨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부엌에 있는 아내에게는 그저 마당을 스치는 바람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저승사자들은 익숙하다는 듯 박 첨지의 양팔을 끼고 순식간에 대문 밖으로 날아올랐습니다.
"임자... 내 식혜... 식혜도 못 마셨는데..."
멀어지는 집을 바라보며 박 첨지의 눈에서 억울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 자신이 죽은 줄 모르고 저승사자와 실랑이하는 박 첨지
눈 깜짝할 사이에 이승의 풍경은 사라지고, 자욱한 안개가 깔린 황천길이 나타났습니다. 길 양옆으로는 시들지 않는 붉은 꽃들이 피어 있었고, 하늘은 낮도 밤도 아닌 묘한 잿빛이었습니다. 박 첨지는 저승사자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쉴 새 없이 입을 놀렸습니다.
"이보시오, 사자 양반들. 이거 분명히 착오요. 실수라고! 내 사주팔자를 봐도 구십까지는 거뜬히 산다고 나왔단 말이오. 우리 할아버지도 백 살까지 사셨는데, 유전자가 어디 가겠소?"
"아이고, 그 영감님 참 말 많네. 사주팔자고 나발이고, 여기 명부(命簿)에 딱 적혀 있다니까요. 양주군 동면, 박달구. 1450년생. 오늘 오시(午時)에 사망.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딱 맞잖소."
앞장서던 저승사자가 귀찮다는 듯 장부를 박 첨지 코앞에 들이밀었습니다. 박 첨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장부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어디? 거 참 글씨도 개발새발 써놨구먼. 가만... 양주군 동면 박달구... 1450년생... 어라? 잠깐만!"
박 첨지가 갑자기 발에 힘을 딱 주고 버티는 바람에 뒤따르던 저승사자가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습니다.
"왜 또 이러시오! 빨리 가서 심판받아야 한다니까!"
"이거 보시오! 여기 주소가 틀렸잖아! 나는 '양주군 동면'이 아니라 '양주군 서면' 산다고! 동면과 서면은 고개 하나 차이지만 엄연히 다른 동네란 말이오!"
"예? 서면이요? 분명히 아까 문패 확인할 때 동면이라고..."
저승사자들끼리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막내 저승사자가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습니다.
"형님,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집 대문에 주소가 안 적혀 있었는데요? 그냥 감으로 들어간 거 아닙니까?"
"야! 인마! 네가 확인했다며! 기와집이 거기 하나밖에 없다고 네가 그랬잖아!"
"아니, 저는 형님이 저쪽이라고 손짓하시길래..."
박 첨지는 이때다 싶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럼 그렇지! 이 멍청한 양반들이 생사람을 잡았구만! 내가 양주군 서면 이장만 십 년을 한 사람이오. 내 이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동면에도 박달구라는 사람이 있긴 하지. 근데 그 양반은 나랑 이름만 같지, 맨날 술만 퍼마시고 골골대는 약골이라고! 죽으려면 그 양반이 죽어야지, 왜 멀쩡한 나를 데려와!"
대장 저승사자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장부를 꼼꼼히 훑어보았습니다.
"가만... 여기 자세히 보니 동면(東面)이라고 적혀 있네... 그리고... 사인(死因)이... '과도한 음주로 인한 복상사'?"
박 첨지가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거 보시오! 나는 술은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이오! 식혜나 좋아하지. 그리고 아까 낮잠 자다 잡혀왔는데 무슨 복상사야! 이거 완전 엉터리구먼!"
세 명의 저승사자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명부의 기록과 눈앞에 있는 노인의 상태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형님... 이거 좃됐... 아니, 큰일 났는데요? 염라대왕님이 저번에도 명부 착오 한 번만 더 내면 우리 셋 다 축생도(짐승으로 태어나는 길)로 보내버린다고 하셨잖습니까."
"조용히 해! 나도 알고 있어. 아... 이를 어쩐다. 벌써 황천강 입구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고, 데려가자니 대왕님 불벼락이 무섭고..."
저승사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박 첨지는 팔짱을 끼고 짐짓 여유로운 척 그들을 노려보았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콩닥거렸습니다.
'제발... 제발 돌려보내 준다고 해라. 우리 집 마누라가 나 깨우러 오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데...'
대장 저승사자가 결심한 듯 박 첨지에게 다가왔습니다. 비굴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려 있었습니다.
"저기... 박 첨지 어르신? 저희가 아주 사소한... 정말 티끌만 한 실수를 좀 한 것 같은데요. 이거 우리끼리 잘 해결해 봅시다. 예?"
"잘 해결하긴 뭘 해결해! 당장 나를 집으로 보내줘! 지금쯤 우리 마누라가 식혜 들고 와서 나 죽은 줄 알고 기절초풍했을 거 아니오!"
"아, 진정하시고...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절차상 염라대왕님께 보고는 드려야 합니다. 대신 저희가 대왕님께 잘 말씀드려서 '특별 휴가' 차원에서 잠깐 왔다 가신 걸로 처리해 드릴 테니, 가서 입 좀 잘 맞춰주십시오. 네?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저승사자가 박 첨지의 손을 잡고 사정했습니다. 천하의 저승사자가 굽신거리는 꼴이라니, 박 첨지는 기가 막히면서도 한편으론 고소했습니다.
"흥, 내가 가서 염라대왕한테 다 일러바칠 거야. 너희들이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한다고! 내 억울해서라도 살아서 돌아가야겠네. 앞장서시오! 염라대왕 면상이나 좀 봅시다!"
박 첨지는 호기롭게 앞장서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과연 염라대왕이 순순히 자신을 놓아줄지, 혹시라도 가는 길에 진짜 죽을 운명이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안개 낀 황천길 끝에 거대한 저승 문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사자들을 호통치는 염라대왕
지옥의 문을 통과하자마자 펼쳐진 염라대왕의 집무실은 으리으리하다 못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위압적이었습니다. 천장은 까마득히 높아서 보이지 않았고, 기둥마다 칭칭 감겨 있는 구렁이 조각들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했습니다. 그 정중앙, 산봉우리만 한 책상 뒤에 불타는 눈을 가진 염라대왕이 앉아 있었습니다. 저승사자 셋은 입구에서부터 납작 엎드려 기어갔고, 박 첨지만 멀뚱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죄... 죄인, 아니 망자 박달구 대령했습니다요, 대왕님."
대장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염소 똥구멍처럼 조그맣게 기어들어 갔습니다. 염라대왕은 서류 더미에 코를 박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의 콧김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집무실 안의 촛불들이 위태롭게 흔들렸습니다.
"오냐, 박달구라... 양주군 동면 사는 그 주정뱅이 놈 말이냐? 내 그놈 올 줄 알았다. 평생 술을 물처럼 마시더니 기어이 복상사로 왔구먼. 그래, 고개 좀 들어보아라."
박 첨지는 주눅 들기는커녕 씩씩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염라대왕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습니다.
"이보시오! 왕이면 다요? 부하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요! 나는 동면 사는 주정뱅이가 아니라, 서면 사는 박 첨지란 말이오! 내 몸은 돌덩이처럼 단단하고, 술은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이오!"
염라대왕의 눈썹이 꿈틀거렸습니다. 저승사자들은 화들짝 놀라 박 첨지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속삭였습니다.
"아이고, 어르신! 제발 목소리 좀 낮추세요! 여기가 어디라고 손가락질입니까!"
"놔라, 이놈들아! 억울해서 못 살겠다. 대왕 양반, 내 말 좀 들어보소. 나는 오늘 낮잠 자다가 봉변을 당했소. 내 명줄이 아직 짱짱하게 남았는데, 이 멍청한 저승사자 놈들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단 말이오!"
염라대왕은 박 첨지의 당당한 태도에 짐짓 놀란 눈치였습니다. 보통 저승에 오면 살려달라고 빌거나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리기 마련인데, 이 노인은 마치 고을 원님에게 민원 넣으러 온 사람처럼 굴었기 때문입니다.
"호오? 네놈 눈빛이 살아있구나. 죽은 자의 눈빛이 아니다. 여봐라 판관! 명부 책 다시 가져오너라. 양주군 박달구 페이지를 펴라!"
옆에 서 있던 판관이 헐레벌떡 뛰어와 두꺼운 책을 펼쳤습니다. 염라대왕은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고 장부와 박 첨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어디 보자... 1450년생 박달구... 사망 예정일 오늘 오시... 사인 복상사... 얼굴은... 얼굴은..."
염라대왕의 시선이 박 첨지의 얼굴에 꽂혔습니다. 그러더니 돋보기를 책상에 탁 내려놓으며 천둥 같은 호통을 쳤습니다.
"이런 멍청한 놈들을 보았나! 야 이놈들아! 장부에는 '코에 큰 점이 있고 앞니가 빠진 홀쭉한 노인'이라고 적혀 있잖아! 저 영감은 얼굴이 보름달 같고 이빨도 멀쩡하구먼! 눈을 폼으로 달고 다니느냐!"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대왕님! 저희가 그만 동명이인이라는 걸 깜빡하고... 기와집이 거기 하나뿐이라..."
저승사자 셋이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빌었습니다. 염라대왕은 혀를 차며 박 첨지를 보았습니다.
"쯧쯧... 내 명부 관리를 철저히 하라 일렀거늘... 이보시오 노인장, 미안하게 되었소. 우리 직원들이 요새 야근이 잦아 정신이 나갔나 보오. 이거 참 면목이 없소."
"사과받아서 뭣 하겠소. 빨리 돌려보내나 주시오! 지금쯤 우리 집 안방에서 곡소리 나고 난리 났을 거요!"
"그렇지, 그렇고말고. 시간이 없다. 판관아, 서면 박달구의 수명을 확인해 보아라."
판관이 책장을 넘기더니 깜짝 놀라 외쳤습니다.
"대왕님! 이분 수명은... 아이고, 무려 아흔둘까지입니다! 앞으로 20년은 더 사실 팔자입니다요!"
"뭐라? 20년이나 남은 사람을 데려왔어? 이런 미친놈들을 봤나! 야! 너희 셋, 당장 이 영감님 모시고 나가라! 지금 즉시 이승으로 돌려보내! 만약 장례 치르느라 관 뚜껑에 못이라도 박으면 너희 셋 다 지옥불 아궁이에 장작으로 넣어버릴 테다!"
염라대왕의 불호령에 저승사자들은 사색이 되었습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어르신, 어서 가시죠! 뛰세요! 아니, 날아갑시다!"
박 첨지는 얼떨결에 저승사자들의 등에 떠밀려 집무실 밖으로 내달렸습니다. 뒤에서 염라대왕이 소리쳤습니다.
"노인장! 가는 길에 저승 구경 잘했다 치고, 가서 오래오래 사시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고!"
박 첨지는 달리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습니다.
"오라고 해도 안 올 거요! 흥!"
※ 이승으로 돌아가는 빠른 길을 찾는 과정
저승사자들과 박 첨지는 꼬불꼬불한 저승의 골목길을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올 때 건넜던 황천강을 다시 건너려면 시간이 너무 걸렸기에, 저승사자들은 '비상 탈출구'라 불리는 지름길을 택했습니다. 그곳은 이승과 저승 사이를 연결하는 거대한 창고 같은 곳이었습니다. 수만 개의 호롱불이 둥둥 떠다니는 기묘한 공간이었습니다.
"어르신! 조금만 더 빨리요!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해야 합니다!"
"아이고, 숨차라. 이놈들아, 산 사람 잡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똥개 훈련까지 시키냐?"
박 첨지가 헐떡거리며 다리를 질질 끌자, 대장 저승사자가 안달이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습니다.
"지금 투정 부리실 때가 아닙니다. 이승 시간으로 벌써 반나절이 지났어요. 지금쯤 가족들이 염(殮)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꽁꽁 묶어서 관에 넣으면 다시 살아나도 못 나와요!"
"뭐? 염을 해? 안 돼! 내 옥양목수의는 아직 만들지도 않았는데!"
그때였습니다. 맞은편에서 또 다른 저승사자 일행이 누군가를 끌고 오고 있었습니다. 끌려오는 남자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비틀거렸고, 옷은 다 해져 있었습니다. 코에는 커다란 점이 박혀 있었고, 웃을 때 보니 앞니가 휑하니 비어 있었습니다.
"어? 저... 저놈은?"
박 첨지가 멈칫하며 그 남자를 가리켰습니다. 끌려오던 남자도 박 첨지를 보더니 게슴츠레한 눈을 떴습니다.
"어? 형님? 서면 사시는 박 첨지 형님 아니슈? 형님이 여기 웬일이슈?"
"자... 자네는 동면 사는 달구 아닌가?"
그 남자는 바로 저승사자들이 원래 데려왔어야 할 진짜 '박달구'였습니다. 동면 박달구는 헤벌쭉 웃으며 박 첨지의 손을 잡으려 했습니다.
"아이고 반갑구먼유. 나야 뭐 술 먹다 여자 끼고 노는데 갑자기 심장이 턱 막히더니 여기로 왔지 뭡니까. 형님도 가시는 길이유? 같이 가서 술이나 한잔합시다."
"이 썩을 놈아! 너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이다! 네놈이 이름을 똑바로 살았어야지, 맨날 술타령이나 하니까 나까지 도매급으로 끌려온 거 아니냐!"
박 첨지가 꿀밤을 먹이려 손을 들자, 옆에 있던 저승사자들이 말렸습니다.
"어르신, 참으세요! 저 사람은 이제 심판받으러 가는 길이고, 어르신은 살러 가는 길입니다. 엮이면 골치 아파요!"
동면 박달구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여전히 실실 웃고 있었습니다.
"형님, 먼저 가슈. 나는 가서 염라대왕이랑 술내기나 한판 해야겠네. 이승이나 저승이나 술맛은 똑같겠지 뭐. 잘 사슈, 형님! 내 몫까지 건강하게 사슈!"
멀어져 가는 동면 박달구의 뒷모습을 보며 박 첨지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아서 돌아가는 이 기막힌 운명.
"쯧쯧... 불쌍한 놈. 술 좀 적당히 처먹지... 그래, 네 몫까지 내가 악착같이 살아주마."
"어르신! 감상에 젖을 시간 없습니다! 저기 앞에 빛 보이시죠? 저게 이승으로 나가는 구멍입니다. 저기로 뛰어내리셔야 합니다!"
대장 저승사자가 가리킨 곳에는 바닥에 뚫린 구멍 사이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저... 저기로? 저 높이에서 떨어지면 살려다가 낙상해서 죽겠다!"
"걱정 마십쇼! 저희가 안전하게 밀어드리겠습니다."
"밀어? 야! 잠깐만! 마음의 준비는 좀 하고..."
"시간 없습니다! 관 뚜껑 닫힙니다! 하나, 둘, 셋!"
"으아악! 이 나쁜 놈들아!"
저승사자 셋이 동시에 박 첨지의 등을 힘껏 밀었습니다. 박 첨지는 비명을 지르며 빛 속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아내의 통곡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영감... 이렇게 가면 나는 어찌 살라고... 눈 좀 떠보소, 제발..."
'여보! 나 간다! 나 안 죽었어! 관 뚜껑 닫지 마!'
박 첨지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엄청난 속도로 마루에 누워 있는 육신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관 뚜껑을 든 사람들의 그림자가 서서히 박 첨지의 얼굴 위로 드리워지고 있었습니다.
※ 이미 시작된 장례 준비
박 첨지의 영혼이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동안, 이승의 박 첨지네 집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습니다.
안방 아랫목에는 싸늘하게 식은 박 첨지의 육신이 덩그러니 누워 있었고, 그 옆에서 아내는 남편의 가슴을 치며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영감! 이 무정한 사람아! 점심 잘 먹고 낮잠 자겠다고 누운 사람이 어찌 이리 허망하게 간단 말이오!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이렇게 가는 법이 어디 있어! 아이고오!"
아내의 통곡 소리에 문밖에 서 있던 이웃들도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마을 이장이 곰방대를 털며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허, 참...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라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나랑 밭 갈면서 농담 따먹기 하던 양반이 하루아침에 저세상 사람이 되다니. 믿기지가 않는구먼."
"그러게 말이여. 저렇게 건강하던 양반이 복상사라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나. 의원 말로는 심장이 멈춘 지 한참 되었다는데, 날이 더우니 시신이 상하기 전에 얼른 염(殮)부터 해야 하지 않겠나."
마을 어르신들의 재촉에 염습을 맡은 장의사가 삼베 끈과 수의를 챙겨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장의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박 첨지의 굳은 팔다리를 주무르며 중얼거렸습니다.
"어르신, 저승길 가시는 데 불편하지 않게 제가 잘 묶어드리리다. 이승의 미련일랑 다 털어버리고 좋은 곳으로 가시게나."
장의사가 박 첨지의 가슴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얼굴을 덮을 하얀 천을 집어 들었습니다. 아내는 그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더 크게 울부짖었습니다.
"안 돼요! 우리 영감 얼굴 가리지 마소!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식혜 달라고 소리칠 것만 같은데, 저 얼굴을 어떻게 덮는단 말이오!"
"아이고, 형수님. 마음 추스르십시오. 이미 숨이 끊어진 지 반나절입니다. 이제 그만 보내드려야지요."
장의사가 단호하게 말하며 하얀 천을 박 첨지의 얼굴 위로 스르르 내렸습니다. 세상과의 작별을 고하는 그 순간, 천장 위 허공에서 박 첨지의 영혼이 비명과 함께 자신의 몸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안 돼! 덮지 마! 나 숨 막혀! 이놈들아, 나 살아있다고! 아직 묶으면 안 돼!'
박 첨지의 영혼이 외치는 소리는 산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천이 얼굴을 덮고, 장의사가 꽁꽁 묶을 삼베 끈을 들어 올리는 절체절명의 순간, 박 첨지의 영혼이 육신의 콧구멍과 입으로 쑥 빨려 들어갔습니다.
쿵!
멈춰있던 피가 혈관을 타고 맹렬하게 돌기 시작하자,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짜릿한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 혼백이 육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사투
장의사가 막 박 첨지의 발목을 끈으로 묶으려던 찰나였습니다. 꼼짝도 않던 시체의 발이 파르르 떨리더니, 갑자기 장의사의 배를 뻥 하고 걷어찼습니다.
"억!"
장의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그 순간, 얼굴을 덮고 있던 하얀 천이 들썩거리더니, 천 밑에서 우렁찬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케헥! 켁! 퉤퉤! 아이고 숨 막혀! 누가 내 코 막았어!"
"으아악! 시... 시체가 움직인다!"
"귀, 귀신이다! 송장이 일어났다!"
방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장의사는 기절초풍하여 바닥을 기어 도망갔습니다.
오직 박 첨지의 아내만이 놀라움과 공포, 그리고 일말의 기대로 입을 틀어막은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박 첨지는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덮은 천을 거칠게 걷어내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습니다. 그의 얼굴은 저승에서 달려오느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에는 생기가 가득했습니다.
"아이고, 허리야. 저승에서 떨어질 때 잘못 떨어졌나 엉덩이가 쑤시네. 여보! 임자! 왜 멍하니 보고만 있어? 나 물 좀 주소! 목이 말라 죽겠네!"
"여... 영감? 진짜 영감이오? 내 눈에 헛것이 보이는 게 아니오?"
아내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남편의 볼을 만졌습니다. 차갑던 뺨이 뜨끈뜨끈했습니다.
"그럼 나지 누가 나야! 저승사자 놈들이 사람 잘못 잡아갔다가 염라대왕한테 혼쭐나고 다시 돌아왔단 말이오! 아이고, 내가 진짜 억울해서 원. 하마터면 산 채로 땅에 묻힐 뻔했네!"
박 첨지가 살아있는 사람처럼 펄펄 뛰며 소리치자, 도망갔던 사람들이 문구멍과 창틈으로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이게 무슨 조화래? 죽었던 박 첨지가 다시 살아났어?"
"어이, 이장! 내 말 들려? 나 안 죽었어! 염라대왕이 나보고 20년은 더 살다 오라더라! 그러니까 저 마당에 차려놓은 제사 음식들 다 가져오라고 해! 배고파서 현기증 난단 말이야!"
그제야 사람들은 박 첨지가 귀신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돌아왔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내는 "아이고 하느님, 부처님!"을 외치며 박 첨지를 끌어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번에는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었습니다.
"영감... 살아줘서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나는 당신 없으면 못 살아..."
"허허, 이 사람이. 울긴 왜 울어. 나 박달구요. 저승사자도 못 잡아가는 천하장사 박달구란 말이오. 내 이제부터는 당신 속 안 썩이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다 도와줄게. 저승 가서 보니까 당신만 한 사람 없습디다."
박 첨지는 아내의 등을 토닥이며 멋쩍게 웃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박 첨지의 기막힌 하루는 그렇게 왁자지껄한 소동으로 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 다시 살아난 박 첨지의 달라진 인생관
그로부터 며칠 후, 마을 어귀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정자에는 동네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막걸리 대신 시원한 식혜 한 사발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염라대왕한테 딱! 삿대질을 하면서 그랬지. '이보시오 대왕 양반! 행정을 이따위로 하면 쓰겠소? 내 명줄이 강철 밧줄인데 어디 감히 가위질을 하려고 해!' 그랬더니 염라대왕이 벌벌 떨면서 미안하다고 싹싹 빌지 뭔가!"
"에이, 뻥 좀 치지 마소. 천하의 염라대왕이 빌기는 개뿔. 그냥 운 좋게 살아난 거지."
친구가 핀잔을 주자 박 첨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아, 진짜라니까!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리고 오는 길에 동면 사는 박달구 그 양반도 봤단 말이야. 그 양반은... 참 안됐지. 나랑 이름만 같지, 맨날 술독에 빠져 살더니 결국 진짜로 갔어. 내가 그 양반 보면서 느낀 게 많아."
좌중이 조용해지자 박 첨지는 식혜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저승 가보니까 벼슬이고 돈이고 다 소용없더라. 갈 때 가져가는 건 딱 하나, 입고 있는 수의 한 벌뿐이야. 근데 더 중요한 건 뭔지 아나? '후회'를 안 가져가야 해. 동면 박달구 그 친구, 끌려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더라고. 아마 못다 한 일들이 생각나서 그랬겠지."
노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습니다. 박 첨지의 눈빛은 예전의 고집불통 노인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딛고 돌아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고 따뜻한 눈빛이었습니다.
"나한테 20년이 더 남았다고 합디다. 이게 그냥 남은 시간이 아니라, 덤으로 받은 선물 아니겠소?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매일매일 소풍 온 기분으로 살라네. 아침에 눈 뜨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맛있는 거 있으면 친구들이랑 나눠 먹고, 우리 마누라 손 한 번 더 잡아주고 그렇게 살 거야."
"암, 그래야지. 자네 말이 백번 맞아. 죽다 살아오더니 철들었구먼, 박 첨지!"
"허허, 철들면 죽는다는데 큰일 날 소리 하네! 자, 자! 날도 좋은데 우리 노래나 한 가락 뽑아봅시다! 인생은 즐거워~ 닐리리야~"
박 첨지의 선창에 맞춰 노인들의 흥겨운 노랫가락이 정자에 울려 퍼졌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오늘 박 첨지 할아버지의 '저승 찍고 턴' 사연, 어떠셨나요? 억울하게 끌려갔지만, 결국 자신의 운명을 당당하게 되찾아 온 박 첨지의 기백이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어쩌면 우리 인생도 박 첨지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매일매일이 덤으로 받은 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따뜻한 밥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이 평범한 하루가 사실은 기적 같은 축복이라는 걸, 저승사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오늘 하루, 혹시 속상한 일이 있으셨더라도 박 첨지 할아버지처럼 "이보시오! 나는 아직 펄펄하오!" 하고 툭 털어버리시길 바랍니다. 건강이 최고고, 즐겁게 사는 게 남는 장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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