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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길을 밝히는 등불, 바리공주 『바리공주(바리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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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강물에 버려진 일곱째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자신을 버린 부모가 죽을병에 걸리자, 여섯 언니들도 마다한 그 무서운 저승길에 이 막내가 홀로 나섭니다. 원망 대신 효심을 택한 가여운 처녀. 저승 끝에서 약수를 구해 부모를 살리고, 끝내 모든 죽은 넋을 인도하는 신령이 되기까지. 오늘 염라야담이 들려드리는 가장 애틋한 이야기, 저승길을 밝히는 등불 바리공주입니다.
※ 1: 일곱째 딸, 강물에 버려지다
세상에는 죽은 이를 저승으로 곱게 인도하는 신령이 있다지요. 캄캄하고 아득한 저승길, 그 길을 등불처럼 환히 밝혀 준다는 고운 넋 말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신령이, 글쎄, 태어나자마자 강물에 버려진 가여운 막내딸이었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랍니다. 자, 마음 편히 앉으셔서 귀 기울여 보시지요.
옛날 옛적, 이 땅에 오구대왕이라는 임금이 계셨더랍니다. 나라는 태평하고 곳간은 그득한데, 임금의 마음에는 딱 한 가지 근심이 무겁게 얹혀 있었지요.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전마마 길대부인과 금슬은 더없이 좋았으나, 낳는 아이마다 어찌 된 셈인지 죄다 딸이었더랍니다.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만 해도, 임금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온 나라에 잔치를 베풀었지요. 둘째가 딸일 때도 "다음엔 아들이겠지" 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헌데 셋째도 딸, 넷째도 딸, 다섯째도 딸. 그렇게 여섯을 내리 딸로만 낳고 보니, 임금의 웃음은 온데간데없고 한숨만 대궐 기와지붕을 넘어갈 지경이 되었더랍니다. 참 딱한 노릇이지요.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왕자가 태어날 것이오. 암, 그렇고말고."
일곱 번째 아이를 밴 중전을 앞에 두고, 임금은 용하다는 점쟁이며 큰스님을 죄다 불러들였더랍니다. 명산대찰을 찾아 백일기도를 올리고, 이름난 무당을 불러 밤새 굿도 하고, 아들 낳는 데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지어 먹였지요. 아들 하나 보겠다고 안 해 본 것이 없었더랍니다. 그 정성이 어찌나 지극한지, 산천초목이 다 알 정도였지요.
그런데 여섯 공주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같이 곱고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었더랍니다. 큰 공주는 바느질이 빼어나고, 둘째는 글솜씨가 남달랐지요. 셋째는 노래를, 넷째는 춤을 잘 추고, 다섯째와 여섯째는 효성이 지극하여 아침저녁으로 부모님 문안을 거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부러울 것 하나 없는 대궐이었지요. 허나 임금의 눈에는, 그 고운 딸들이 다 눈에 차질 않았더랍니다. 오로지 아들, 아들 타령뿐이었으니까요.
드디어 아이가 태어나던 날. 온 대궐이 숨을 죽이고 산실 앞을 지켰더랍니다. 임금은 용상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꾸만 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요. 손에는 진땀이 다 배어 나왔더랍니다. 그런데 방문을 열고 나온 상궁의 얼굴이, 아이고, 사색이 되어 있질 않겠습니까.
"저, 전하. 또, 또 공주 아기씨시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임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더랍니다. 일곱이라니. 일곱 번째도 딸이라니.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서운함이 그만 노여움으로 왈칵 터져 버린 것이지요.
"일곱째까지 딸이라면, 이는 하늘이 이 나라를 아주 버린 것이다! 그런 아이는 필요 없다.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라!"
세상에, 갓 태어난 핏덩이를 두고 그리 모진 말을 쏟아 내다니요. 중전은 산고로 지친 몸을 이끌고 버선발로 뛰쳐나와, 임금의 곤룡포 자락을 부여잡았더랍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이 아이도 전하의 귀하디귀한 핏줄이옵니다. 딸이면 어떻습니까. 제발, 제발 한 번만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전하,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세상에 나온 지 반나절도 안 된 것을요. 굳이 버리셔야겠거든, 차라리 이 어미를 함께 버려 주시옵소서!"
중전의 애끊는 울음소리에 산실을 지키던 상궁들도, 뜰에 엎드린 신하들도 하나같이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더랍니다. 임금인들 어찌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곤룡포 속 그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지요. 허나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자니 임금의 체면이 서질 않는다, 그 알량한 고집이 문제였더랍니다.
허나 한번 돌아선 임금의 마음은 좀처럼 풀리질 않았지요. 신하들이 엎드려 만류하고, 중전이 목 놓아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더랍니다. 임금은 기어이, 갓난아이를 옥함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내라 명하고야 말았지요. 제 자식을 강물에 버리라니. 듣는 이의 가슴이 다 미어지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중전은 마지막으로 아이를 품에 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더랍니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저고리 옷섶에 이름 석 자와 사주를 곱게 적어 넣었지요.
'가여운 것. 버려진 아이라 하여 바리라 부르마. 부디, 부디 어디서든 목숨만은 붙어 있거라. 이 어미를 원망하되, 살아만 다오.'
버릴 바리. 그렇게 이 아이의 이름은 바리가 되었더랍니다. 이름부터가 이토록 서러운 아이가 또 어디 있을까요.
옥함은 늙은 신하의 손에 들려 강가로 옮겨졌지요. 신하도 차마 발이 떨어지질 않아 강가를 한참이나 서성였더랍니다. 그러다 눈을 딱 감고 옥함을 강물에 밀어 넣었는데, 바로 이때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더랍니다.
무겁게 가라앉아야 할 옥함이, 글쎄 물 위로 두둥실 떠오르질 않겠습니까. 그뿐이 아니었지요. 어디선가 등딱지가 함지박만 한 금거북 한 마리가 물살을 가르며 나타나더니, 그 널찍한 등으로 옥함을 척 떠받치는 것이었습니다.
"허어, 이런 일이. 하늘이, 하늘이 이 아기씨를 지키시는구나."
신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을 모으고 빌었더랍니다. 금거북은 옥함을 등에 진 채, 강물을 따라 유유히 흘러 내려갔지요. 캄캄한 밤이었는데도, 오직 그 옥함에서만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더랍니다. 마치 훗날 이 아이가 밝힐 저승길의 등불을, 하늘이 미리 켜 두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대궐에 홀로 남은 중전은 그날 밤, 텅 빈 산실을 부여안고 밤새 울었더랍니다. 임금 또한 겉으로는 노여움을 거두지 못했으나, 속으로는 밤마다 그 조그만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모질다가도 이리 여린 법이니까요.
그렇게 바리 아기씨를 실은 옥함은, 세상 물정 하나 모른 채 강을 따라, 강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더랍니다. 이 가여운 아기씨의 앞날에, 대체 어떤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그 사연이 참으로 기가 막히답니다.
※ 2: 병든 부모, 저승의 약수를 구하라
금거북이 이끄는 옥함은 강을 따라 흘러, 어느 깊은 산골 마을에 다다랐더랍니다. 그 마을에는 비리공덕 할아비와 할미라는 늙은 부부가 살고 있었지요. 자식 하나 없이 나물이나 캐고 약초나 뜯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하지만 마음씨는 비단결 같은 노부부였더랍니다.
그날도 할아비가 강가에서 물을 긷다가, 저만치 물가에 걸린 옥함을 발견했지요.
"할멈, 할멈! 이리 좀 와 보게. 강물에 웬 함짝이 하나 떠내려왔는데,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나질 않는가!"
부랴부랴 함을 열어 보니, 세상에,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가 오물오물 울고 있질 않겠습니까. 옷섶에는 '바리'라는 이름 석 자가 곱게 적혀 있었지요.
"아이고, 이 가여운 것. 누가 이 어린 것을 강물에 띄웠단 말인가. 여보게 할멈, 이건 필시 하늘이 우리에게 점지해 주신 자식일세!"
늙은 부부는 아기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렸더랍니다. 자식 없어 적적하던 두 노인에게, 바리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지요. 그날부터 노부부는 없는 살림을 쪼개고 또 쪼개어, 바리를 애지중지 길렀더랍니다.
젖동냥을 다니느라 할미의 무릎이 다 닳고, 나무를 해다 팔아 미음을 쑤느라 할아비의 등이 다 굽었지요. 허나 두 노인은 힘든 줄도 몰랐더랍니다. 바리가 방긋 웃어 주기만 하면,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흐뭇했으니까요.
바리는 자라면서 어찌나 착하고 영특한지, 온 마을의 귀염을 독차지했더랍니다. 예닐곱 살이 되자 벌써 할미를 도와 나물을 캐고, 할아비의 약초 바구니를 들고 산을 오르내렸지요.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바리는 그저 이 늙은 부부를 친부모로 알고 지극정성으로 섬겼더랍니다.
한번은 할미가 고뿔이 들어 자리에 눕자, 어린 바리가 밤새 이마의 물수건을 갈아 주며 뜬눈으로 곁을 지켰더랍니다. 또 한번은 할아비가 산에서 발을 헛디뎌 다치자, 그 조그만 몸으로 약초를 짓찧어 상처에 붙이고 며칠을 극진히 간호했지요. 마을 사람들이 다 혀를 내둘렀더랍니다.
"저 집 딸아이는 대체 어디서 저런 심성을 타고났을꼬.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게 아닌가 몰라."
바리는 남의 아픔을 제 아픔처럼 여길 줄 아는 아이였더랍니다. 길에서 다친 짐승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굶주린 나그네를 보면 제 밥을 덜어 주었지요. 그 고운 마음씨가, 훗날 온 세상의 죽은 넋을 어루만질 큰 그릇이 될 줄, 그때는 아무도 몰랐더랍니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 바리가 어느덧 열다섯 꽃다운 처녀가 되었을 무렵이었지요. 이때, 저 멀리 대궐에서는 큰 변고가 생기고 있었더랍니다.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이 그만 나란히 몹쓸 병에 몸져누운 것이었지요.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더랍니다. 두 분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똑같이 자리에 눕질 않았겠습니까. 처음엔 그저 기력이 쇠한가 보다 했는데, 날이 갈수록 병세가 깊어져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더랍니다.
온 나라의 이름난 의원이 다 다녀갔으나,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지요. 침을 놓아도, 뜸을 떠도, 좋다는 보약을 달여 올려도 아무 차도가 없었더랍니다. 임금의 낯빛은 하루가 다르게 잿빛으로 변해 갔고, 중전의 고운 얼굴도 반쪽이 되어 갔지요. 대궐 안은 온통 초상집처럼 무거운 기운에 짓눌렸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용하다는 노승 하나가 대궐을 찾아와 이런 말을 남겼더랍니다.
"두 분 마마의 병을 고칠 약이 딱 하나 있사옵니다. 저 서천서역국, 저승 깊은 곳에 흐르는 약수(藥水)를 구해다 드시면 씻은 듯이 나으실 것이옵니다. 허나..."
"허나, 무엇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그 약수는 살아 있는 사람이 발을 들여서는 아니 되는 저승길을 지나야만 얻을 수 있사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길이지요. 게다가 그 길은, 오직 두 분 마마께서 버리신 핏줄만이 열 수 있사옵니다."
이 말에 임금과 중전은 소스라치게 놀랐더랍니다. 버린 핏줄이라니. 그 옛날 강물에 띄워 보낸 일곱째 딸, 바리가 그제야 두 사람의 가슴을 짓눌러 온 것이지요.
임금은 우선 곱게 기른 여섯 공주부터 불러 모았더랍니다. 병든 몸을 겨우 일으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요.
"얘들아. 이 아비 어미를 살릴 약수가 저승에 있다는구나. 누가, 누가 이 험한 길을 다녀오겠느냐."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토록 곱게 기른 여섯 딸이, 하나같이 고개를 돌리며 핑계를 대는 것이었지요.
"아버님, 저는 시집갈 날을 받아 두어 몸을 함부로 할 수가 없사옵니다."
"저는 어린 자식이 셋이나 딸려 도저히 집을 비울 수가 없나이다."
"저승길이라니요. 그런 무서운 곳을 어찌 간단 말입니까. 소녀는 죽어도 못 가옵니다."
막내에서 큰딸까지, 여섯이 저마다 이런저런 핑계로 슬금슬금 발을 빼니, 임금과 중전의 가슴은 그만 새카맣게 타들어 갔더랍니다. 곱게 길러 무엇 하나, 비단옷 입혀 금이야 옥이야 키워 무엇 하나. 정작 부모 목숨이 오가는 판에는 아무 소용이 없질 않습니까.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지요. 여러분이라면 어떠셨겠습니까.
임금은 힘없이 돌아눕는 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만 눈을 질끈 감았더랍니다. 그 순간 임금의 머릿속에는, 열다섯 해 전 강물에 띄워 보낸 조그만 옥함이 떠올랐지요. 그토록 매몰차게 내쳤던 그 핏덩이가, 이제 와 유일한 희망이 되다니.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아아, 내가 벌을 받는 게로구나. 그 옛날 죄 없는 핏덩이를 강물에 버린 죄. 그 죄를 이제야 받는 게야."
임금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더랍니다. 중전 또한 마른 눈물을 짜내며 탄식했지요.
'살아만 있다면. 우리 바리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만 있어 준다면. 그 아이라도 한번 찾아나 볼 것을.'
바로 그 무렵, 대궐에서는 신하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려진 공주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더랍니다. 열다섯 해 전, 강물에 띄워 보낸 그 옥함이 대체 어디로 흘러갔는지. 과연 하늘은, 이 애타는 부모의 뉘우침을 굽어살펴 주실까요.
※ 3: 버림받은 딸, 저승길을 자청하다
사방으로 흩어진 신하들이 강줄기를 따라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깊은 산골에서 비리공덕 노부부와 함께 사는 바리 아기씨를 찾아냈더랍니다. 옷섶에 적힌 이름 석 자가 그 옛날 중전이 손수 적어 넣은 바로 그것과 딱 들어맞았지요.
신하들이 바리 앞에 엎드려 아뢰었더랍니다.
"아기씨, 아기씨께서는 이 나라의 일곱째 공주님이시옵니다. 지금 대궐에서는 두 분 마마께서 위독하시어, 아기씨를 애타게 찾고 계시옵니다."
바리는 그 말에 그만 멍하니 굳어 버렸더랍니다. 공주라니. 임금의 딸이라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입니까.
"저는... 저는 이 두 어른의 딸이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모르겠사옵니다."
바리는 비리공덕 할아비 할미를 돌아보았지요. 그러자 늙은 부부가 눈물을 글썽이며, 그동안 감춰 온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랍니다. 강물에 떠내려온 옥함이며, 옷섶의 이름이며, 열다섯 해 전 그날의 일을요.
"바리야, 미안하구나. 진작 말해 주지 못해서. 허나 이것만은 알아다오. 너는 우리에게 하늘이 내려 주신 보배였단다."
바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더랍니다. 나를 강물에 버린 부모. 딸이라는 이유로 핏덩이를 내다 버린 그 무정한 부모가, 이제 와 병들어 나를 찾는다니. 원망스러운 마음이 어찌 안 들었겠습니까. 가슴 한구석이 아리고 서러웠지요.
'나를 버린 분들인데. 이제 와 무슨 낯으로 나를 찾으신단 말인가.'
허나 바리는 이내 고개를 저었더랍니다. 마음씨 고운 이 아이는, 원망보다 먼저 부모의 목숨을 걱정했던 것이지요.
"낳아 주신 것도 부모요, 길러 주신 것도 부모라 하였습니다. 비록 저를 버리셨다 하나, 이 몸이 세상에 나온 것은 그분들 덕이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병들어 돌아가시게 생겼는데, 자식 된 도리로 어찌 모른 척하겠습니까."
바리는 곧장 채비를 꾸려 대궐로 향했더랍니다. 병상에 누운 임금과 중전은, 열다섯 해 만에 돌아온 막내딸을 보고 그만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지요.
"바리야.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 다오. 딸이라 하여 너를 버린 이 죄인을..."
"아니옵니다, 아버님. 지난 일은 다 잊으시옵소서. 소녀가 기어이 약수를 구해다 두 분을 살려 드리겠사옵니다."
바리의 이 말에, 대궐 안 모든 이가 눈시울을 붉혔더랍니다. 곱게 기른 여섯 딸은 다 마다한 그 험한 길을, 버림받은 막내딸이 자청하고 나섰으니, 이보다 더 가슴 저린 노릇이 어디 있겠습니까.
길을 나서기 전, 바리는 자신을 거두어 길러 준 비리공덕 노부부를 찾아가 큰절을 올렸더랍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강물에 떠내려온 이 하찮은 목숨을, 친자식보다 더 귀히 길러 주셨지요. 그 은혜, 이 몸이 저승 끝까지 다녀와서라도 반드시 갚겠사옵니다. 부디 몸 성히 계셔 주시옵소서."
늙은 부부는 바리의 손을 부여잡고 오열했더랍니다.
"바리야, 이 험한 길을 어찌 너 혼자 보낸단 말이냐. 가지 마라. 그냥 우리랑 예서 살자꾸나."
"할머니, 낳은 정도 정이요 기른 정도 정이라 하였습니다. 두 분은 소녀의 기른 부모요, 대궐의 두 분은 소녀의 낳은 부모이시니, 어느 한쪽인들 어찌 저버리겠습니까. 소녀, 꼭 살아 돌아오겠사옵니다."
그 말에 노부부는 차마 더는 붙잡지 못하고, 눈물로 바리의 등을 떠밀어 보냈더랍니다.
이윽고 바리는 무명옷 한 벌에 짚신을 신고, 작은 봇짐 하나를 진 채 길을 나섰더랍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결코 발 들일 수 없다는 저승길. 그 아득한 길로, 열다섯 어린 처녀가 홀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것이지요.
가도 가도 끝없는 들판이 이어졌더랍니다. 해가 지지도 뜨지도 않는, 어스름한 잿빛 벌판이었지요. 얼마를 걸었을까, 바리는 밭을 가는 한 노인을 만났더랍니다.
"길 가는 처자여, 이 밭을 다 갈아 주면 저승 가는 길을 일러 주겠네."
바리는 두말없이 쟁기를 잡았지요. 손바닥이 부르트고 온몸이 땀에 젖도록, 그 너른 밭을 다 갈고 나서야 길을 물을 수 있었더랍니다. 조금 더 가니 이번엔 냇가에서 빨래하는 노파가 있었지요.
"이 산더미 같은 빨래를 다 헹궈 주면, 다음 길을 알려 주지."
바리는 또 소매를 걷어붙였더랍니다. 검은 빨래는 희게, 흰 빨래는 더 희게 될 때까지 손이 얼도록 빨래를 헹궜지요. 그렇게 궂은일을 마다 않고 하나하나 거들다 보니, 저승길은 조금씩 조금씩 열렸더랍니다.
길을 가다 보니, 이번엔 험상궂은 저승사자 하나가 검은 도포에 갓을 눌러쓰고 길목을 지키고 서 있질 않겠습니까. 서슬 퍼런 그 모습에 여느 사람 같으면 오금이 저려 주저앉았을 텐데, 바리는 겁내지 않고 공손히 절을 올렸더랍니다.
"살아 있는 것이 감히 저승길을 넘보다니. 무엇하러 왔느냐."
"부모님을 살릴 약수를 구하러 가는 길이옵니다. 부디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효심 지극한 그 말에, 무섭기만 하던 저승사자도 그만 슬며시 길을 비켜 주었더랍니다.
가는 길목마다 저승의 풍경은 서럽고도 애처로웠지요. 생전에 지은 죄로 벌을 받는 넋들이 여기저기서 울부짖고, 갈 곳 몰라 헤매는 원혼들이 안개 속을 떠돌았더랍니다. 바리는 그 가엾은 넋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지요. 배고픈 넋을 만나면 제 밥을 나누어 주고, 목마른 넋을 만나면 제 물을 떠 주었더랍니다. 헐벗고 우는 어린 넋을 만나면, 제 저고리를 벗어 덮어 주기도 했지요. 저승길에서조차 남을 먼저 생각하는 그 마음이, 참으로 곱지 않습니까.
그 고운 마음이 저승에까지 소문이 났던 걸까요. 바리가 지나는 곳마다, 울부짖던 넋들이 잠시 울음을 그치고 두 손 모아 그 앞길을 빌어 주었더랍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요. 앞을 가로막는 시커먼 강이 나타났더랍니다. 검은 물결이 넘실대는 그 강 너머로, 어렴풋이 저승의 문이 보였지요. 바로 그 강가에, 키가 하늘에 닿을 듯한 무장승이라는 이가 약수를 지키며 서 있었더랍니다. 이제 바리는, 그 무서운 지킴이와 마주해야 할 참이었지요. 과연 어린 바리는, 저 험상궂은 지킴이에게서 약수를 얻어 낼 수 있을까요.
※ 4: 무장승과 아홉 해의 시련
바리는 검은 강가로 다가가, 하늘에 닿을 듯 우뚝 선 무장승 앞에 공손히 절을 올렸더랍니다. 무장승은 눈이 등잔만 하고 목소리가 천둥 같아, 마주 서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지킴이였지요.
"인간의 냄새가 나는구나. 살아 있는 것이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
"저는 오구대왕의 일곱째 딸 바리라 하옵니다. 병드신 부모님을 살릴 약수를 얻고자, 이 먼 저승까지 왔사옵니다. 부디 그 귀한 물을 조금만 나누어 주시옵소서."
무장승은 껄껄 웃었더랍니다. 그 웃음소리에 검은 강물이 다 출렁였지요.
"약수가 그리 쉬운 줄 아느냐. 이 물은 값을 치러야 얻을 수 있느니라. 자, 어디 견뎌 낼 자신이 있거든 말해 보아라. 나를 위해 삼 년간 나무를 해 오고, 또 삼 년간 불을 때고, 다시 삼 년간 물을 길어야 한다. 그리해야 약수를 주겠노라."
아홉 해라니요. 세상에, 아홉 해를 이 저승에서 종살이하라는 말이었지요. 여느 사람 같으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을 텐데, 바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더랍니다.
"그리하겠사옵니다. 부모님을 살릴 수만 있다면, 아홉 해가 아니라 백 년인들 못 하겠사옵니까."
그날부터 바리의 고된 종살이가 시작되었더랍니다. 첫 삼 년은 산에서 나무를 했지요. 험한 저승의 산을 오르내리며 지게 가득 나무를 지어 나르니, 여린 어깨가 다 헐고 손발이 나무껍질처럼 거칠어졌더랍니다. 손톱이 빠지고 발가락이 터져도, 바리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지요.
다음 삼 년은 아궁이에 불을 땠지요. 매운 연기에 두 눈이 짓무르고, 뜨거운 불길에 얼굴이 그을렸더랍니다. 한여름에도 활활 타는 아궁이 앞을 지키자니,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옷이 마를 새가 없었지요. 그래도 바리는 아궁이 불이 꺼질세라 밤낮으로 곁을 지켰더랍니다.
마지막 삼 년은 그 시커먼 강물을 길어 날랐지요. 무거운 물동이에 허리가 휘고, 자갈길에 발바닥이 다 부르텄더랍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강을 오가며 물을 길으니, 어깨의 살이 벗겨져 피가 배어 나올 지경이었지요.
허나 바리는 단 한 번도 원망하거나 게으름 피우지 않았더랍니다. 힘들 때마다 병상에 누운 부모님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또 악물었지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견디면 두 분을 살릴 수 있다.' 그 한마음으로 아홉 해를 버텨 낸 것이랍니다. 참으로 갸륵하지요. 그 모진 세월을, 열다섯 어린 처녀가 어찌 다 견뎌 냈을까요.
그렇게 아홉 해가 다 차자, 바리는 무장승 앞에 다시 섰더랍니다.
"약속하신 아홉 해를 다 채웠사옵니다. 이제 약수를 주시옵소서."
그런데 무장승이 또 이러는 것이었지요.
"허허, 아직 이르다. 나와 부부의 연을 맺어 아들 일곱을 낳아 주어야, 비로소 약수의 임자가 될 수 있느니라."
이 무슨 청천벽력입니까. 아홉 해 종살이도 모자라, 이제는 아들 일곱을 낳으라니요. 바리는 눈앞이 다 캄캄해졌더랍니다. 허나 여기서 물러서면 그동안의 고생이 다 물거품이 되고, 부모님은 영영 돌아가시고 말 터. 바리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더랍니다.
'내 한 몸 고생하여 부모님을 살릴 수 있다면, 이 또한 자식 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바리는 무장승과 부부가 되어, 다시 오랜 세월을 저승에서 보냈더랍니다.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는 그곳에서, 바리는 아들을 하나 낳고, 둘 낳고, 그렇게 일곱을 다 낳았지요. 아이들을 기르며 흘린 세월이 또 얼마였겠습니까. 젖 먹여 키우고, 병들면 밤새 간호하고, 그 어미 노릇을 저승에서 다 하자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곱던 처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굵은 주름이 지고, 검던 머리에는 흰 서리가 내려앉았더랍니다. 허나 바리는 그 세월조차 마다하지 않았지요. 오직 부모님을 살리겠다는 그 한 가지 마음뿐이었으니까요.
일곱째 아들까지 무사히 낳자, 그제야 무장승의 얼굴이 스르르 풀렸더랍니다. 그러고는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지요.
"바리야, 너의 그 지극한 효심과 참을성을 시험해 본 것이니라. 사실 나는, 하늘이 이 약수를 지키라 보낸 신령이니라. 너처럼 마음이 곧고 정성이 깊은 이가 아니고서는, 이 귀한 약수를 함부로 내어 줄 수가 없었던 게지. 그 옛날, 곱게 자란 여섯 언니는 무서워서 이 길을 오지도 못했으나, 버림받은 네가 도리어 예까지 와 이 모든 걸 견뎌 냈구나. 참으로 장하다."
그 말에 바리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더랍니다. 버림받은 설움도, 아홉 해 종살이의 고달픔도, 그 한마디에 눈 녹듯 풀리는 듯했지요.
무장승은 바리를 데리고 강 건너 깊은 골짜기로 갔더랍니다. 그곳에는 맑은 샘이 솟고, 그 곁에 신비로운 꽃들이 피어 있었지요.
"이 샘물이 바로 죽은 이도 살려 낸다는 약수니라. 그리고 이 꽃들을 잘 보아라. 이건 뼈를 살리는 뼈살이꽃, 이건 살을 오르게 하는 살살이꽃, 이건 끊어진 숨을 되돌리는 숨살이꽃이니라. 약수와 이 세 송이 꽃이면, 죽은 사람도 벌떡 일으켜 세울 수 있느니라."
바리는 떨리는 손으로 약수를 호리병에 가득 담고, 세 송이 꽃을 곱게 품에 안았더랍니다. 아홉 해 종살이에 일곱 아들을 낳은 세월까지, 그 길고 긴 고생이 마침내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지요. 어찌 눈물이 안 났겠습니까.
"이제 그만 이승으로 돌아가거라. 일곱 아들은 내가 마저 기를 것이니 염려 말고, 어서 가서 부모님을 살려 드리려무나."
바리는 무장승과 일곱 아들에게 절을 올리고, 약수와 꽃을 품은 채 서둘러 이승 길을 되짚어 올랐더랍니다. 한시가 급했지요. 부모님이 아직 숨이 붙어 계실지, 그것만이 걱정이었으니까요. 올 때는 그리 멀고 험하던 길이, 마음이 급하니 더더욱 아득하게만 느껴졌더랍니다. 바리는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도, 오직 한 생각으로 몸을 일으켜 그 먼 길을 달리고 또 달렸지요. 품속의 약수 병이 행여 깨질세라, 두 손으로 꼭 감싸 안은 채로 말입니다. 과연 바리는, 두 분이 살아 계실 때에 맞춰 당도할 수 있을까요.
※ 5: 상여 행렬을 가로막은 딸
바리가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넘어 가까스로 대궐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지요. 저 멀리 큰길에서, 구슬픈 곡소리와 함께 하얀 만장이 줄줄이 나부끼는 것이 보였더랍니다. 상여였지요. 그것도 임금과 중전, 두 분의 상여가 나란히 나가는 국상 행렬이었더랍니다.
바리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지요.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더랍니다.
'아아, 늦었단 말인가. 내가 한발 늦어, 두 분이 그예 돌아가시고 말았단 말인가. 그 모진 세월을 다 견뎌 냈는데, 결국 이렇게 늦고 말았단 말인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해졌더랍니다. 아홉 해 종살이에 일곱 아들을 낳으며 견뎌 낸 그 길고 긴 세월이, 한순간에 다 허물어지는 듯했지요. 눈물이 앞을 가려 상여가 뿌옇게 흐려 보였더랍니다.
허나 바리는 이내 정신을 번쩍 차렸더랍니다. 주저앉아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요. 품속에는 아직 약수가 있질 않습니까. 죽은 이도 살린다는 그 신령한 약수가요.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한 가닥 희망에 바리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냈더랍니다.
"멈추시오! 그 상여, 잠시 멈추어 주시오!"
바리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치며 행렬을 향해 내달렸더랍니다. 무명옷은 흙투성이에 머리는 산발이 되고, 얼굴은 오랜 저승살이로 삭을 대로 삭은 몰골이었지요. 상여를 메고 가던 상두꾼들은, 난데없이 뛰어드는 그 행색을 보고 기겁을 했더랍니다.
"웬 미친 여인이냐! 감히 국상 행렬을 막다니, 썩 물러가지 못할까!"
"저리 비켜라! 부정 탄다, 이 사람아!"
상두꾼들이 호통을 치며 밀어냈으나, 바리는 상여 채를 붙들고 결코 놓지 않았더랍니다. 밀치면 다시 매달리고, 떼어 내면 또 붙들고, 그예 온몸으로 상여 앞을 가로막았지요.
"나는 이 나라의 일곱째 공주 바리요! 두 분 마마를 살릴 약수를 구해 저승에서 돌아온 길이오! 제발, 제발 상여를 잠시만 멈추어 주시오! 이대로 땅에 묻으시면, 다시는 두 분을 살릴 길이 없소이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애절하고 간절한지, 듣는 이의 가슴을 다 후벼 팠더랍니다. 아무리 부정한 여인이라 한들, 저리 목숨을 걸고 매달리는 데에는 필시 곡절이 있으리라. 상두꾼들도 차마 더는 밀어내지 못하고 주춤주춤 걸음을 멈췄지요.
그 말에 행렬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지요. 뒤따르던 여섯 언니와 신하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앞으로 나왔더랍니다. 여섯 언니는 다 삭아 버린 바리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눈살부터 찌푸렸지요.
"저 거지꼴을 한 여인이 무슨 공주라는 게냐. 어허, 상서롭지 못하게 이게 무슨 소란이냐. 어서 저 여인을 끌어내지 못할까."
허나 그때, 상여 곁을 따르던 늙은 상궁 하나가 바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그만 털썩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더랍니다.
"아이고, 저 눈매. 저 눈매는 틀림없는 바리 아기씨십니다! 열다섯 해 전 강물에 띄워 보낸 우리 막내 아기씨가 틀림없사옵니다!"
늙은 상궁은 그 옛날 산실에서 갓난 바리를 받아 안았던 바로 그 사람이었지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눈매만은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랍니다. 그 말에 여섯 언니도, 신하들도 그제야 소스라치게 놀랐더랍니다.
여섯 언니는 그만 얼굴을 들지 못했지요. 저희는 그 험한 저승길이 무서워 다들 발을 뺐는데, 버림받은 막내가 도리어 목숨을 걸고 저승까지 다녀왔으니, 그 부끄러움을 어찌 감당했겠습니까. 곱디곱던 막내가 저리 삭을 대로 삭아 돌아온 걸 보니, 여섯 언니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더랍니다.
"바리야... 우리가, 우리가 죽을죄를 지었구나. 그 무서운 길을 너 혼자 보내다니."
허나 바리는 언니들을 원망할 겨를조차 없었지요.
바리는 더 지체할 겨를이 없었지요. 얼른 두 상여를 멈춰 세우고, 관 뚜껑을 열어 달라 청했더랍니다. 신하들이 반신반의하면서도 조심스레 관 뚜껑을 여니, 그 안에는 야윌 대로 야윈 임금과 중전이 나란히 눈을 감고 누워 있었지요. 그토록 위엄이 넘치던 임금도, 곱디곱던 중전도, 죽음 앞에서는 한낱 초라한 노인일 뿐이었더랍니다. 두 분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사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었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자 바리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요. 허나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더랍니다. 바리는 소맷자락으로 얼른 눈물을 훔쳤지요.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두 분을 살려야 할 때였으니까요.
바리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의 세 송이 꽃부터 꺼냈지요.
"이 꽃은 뼈를 살리는 뼈살이꽃, 이 꽃은 살을 오르게 하는 살살이꽃, 이 꽃은 끊어진 숨을 되돌리는 숨살이꽃이라 하였지."
바리는 부모님의 몸 위에 그 세 송이 꽃을 차례로 얹었더랍니다. 그러자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지요. 야위어 앙상하던 두 분의 몸에 조금씩 살이 오르고, 잿빛이던 얼굴에 발그레 핏기가 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굳어 있던 손발이 스르르 부드러워지고, 움푹 꺼졌던 두 뺨이 도톰하게 차오르는 것이었지요. 지켜보던 이들이 다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더랍니다. 여기저기서 "세상에", "이럴 수가" 하는 탄성이 새어 나왔지요.
이어서 바리는 호리병의 마개를 열고, 맑은 약수를 부모님의 입에 한 방울, 두 방울 정성껏 흘려 넣었더랍니다. 온 정성을 다해, 두 손 모아 빌면서요.
'하늘이시여, 부디 이 약수의 영험을 굽어살펴 주소서. 저를 버리신 부모라 하나, 그래도 저를 이 세상에 나게 하신 분들이옵니다. 지난 원망은 진작에 다 흘려보냈사오니, 제발, 제발 두 분을 다시 살려 주소서.'
온 대궐 사람들이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한데, 오직 바리의 나직한 기도 소리만이 그 자리에 맴돌았더랍니다. 그런데 미동도 없던 임금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곧이어, 중전의 감긴 눈꺼풀도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지요. 과연 죽은 두 분은, 바리의 약수로 다시 눈을 뜰 수 있을까요.
※ 6: 저승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다
이윽고 임금이 "어허" 하고 긴 숨을 몰아쉬더니, 스르르 두 눈을 뜨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뒤이어 중전도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지요. 두 분은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더랍니다.
"허, 내가 어찌 된 것이냐. 분명 숨이 넘어갔던 것 같은데, 이리 멀쩡히 살아 있으니. 이게 대체 꿈인가 생시인가."
"여보, 저기 좀 보세요. 웬 여인이 우리 곁에서 울고 있질 않습니까. 그런데 저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질 않습니까."
죽었던 두 분이 벌떡 살아나자, 지켜보던 온 대궐 사람들이 그만 땅에 엎드려 만세를 불렀더랍니다. 곡소리로 가득하던 국상 행렬이, 순식간에 기쁨의 눈물바다로 변한 것이지요. 만장을 들었던 이들은 만장을 내던지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상여를 메었던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했더랍니다. 세상에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꿈같은 일이지요.
임금과 중전은 그제야 앞에 엎드린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더랍니다. 늙은 상궁이 흐느끼며 아뢰었지요.
"마마, 이 아기씨가 바로 열다섯 해 전 강물에 버리신 일곱째 공주, 바리 아기씨시옵니다. 저승까지 가시어 약수를 구해 오시어, 돌아가신 두 분을 이리 살려 내신 것이옵니다."
그 말에 임금과 중전은 그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잇지 못했더랍니다. 버림받은 그 딸이, 저를 버린 부모를 살리겠다고 저승 끝까지 다녀왔다니. 두 분은 바리의 두 손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지요.
"바리야, 이 못난 아비를 어찌 용서하겠느냐. 딸이라 하여 너를 강물에 버린 이 죄인을, 네가 도리어 목숨 걸어 살려 내다니. 이 아비가 참으로 짐승만도 못한 짓을 했구나."
"아버님,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무슨 허물이 있겠사옵니까. 이렇게 두 분이 다시 눈을 뜨시니, 소녀는 그것으로 되었사옵니다. 소녀, 저승길을 걸으며 두 분 생각에 하루도 눈물 마를 날이 없었사옵니다. 이제 이렇게 손을 맞잡으니, 지난 세월의 고생이 봄눈 녹듯 사라지는 듯하옵니다."
중전은 삭을 대로 삭은 바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오열했더랍니다.
"이 고운 것이. 곱디곱던 내 딸이 저승살이에 이리 상하다니. 다 이 어미 탓이다. 이 어미 탓이야."
바리가 눈물을 닦으며 이리 말하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흐느껴 울었더랍니다. 여섯 언니도 앞다투어 달려 나와 바리의 손을 잡고 용서를 빌었지요.
"바리야, 우리를 용서해 다오. 그 무서운 길이 겁이 나, 우리는 부모님도 저버리고 너 하나에게 다 떠넘겼구나. 곱게 자란 우리보다, 버림받은 네가 백번 천번 나은 딸이었어."
바리는 그런 언니들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더랍니다. 그동안의 원망이며 서러움이, 그 눈물 속에 다 씻겨 내려가는 듯했지요. 미워하는 마음을 품기에는, 바리의 마음이 너무나도 넓고 고왔던 것이랍니다.
며칠 뒤, 몸을 완전히 회복한 임금은 큰 잔치를 열어 바리의 공을 치하했더랍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지요.
"바리야, 네 덕에 이 나라가 두 임금을 다시 얻었으니, 그 공이 하늘보다 높구나. 내 너에게 이 나라의 절반을 떼어 주마. 아니, 네가 원한다면 이 보위마저 물려주겠노라. 무엇이든 말해 보아라. 네 소원을 다 들어주마."
나라의 절반이라니, 임금의 자리라니. 세상 사람들이 다 탐낼 만한 부귀영화가 눈앞에 놓인 것이었지요. 곱게 자란 여섯 언니 같으면 서로 하겠다고 나섰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허나 바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더랍니다. 그 눈빛이 어찌나 맑고 깊은지, 임금도 잠시 말을 잃었지요.
"아버님, 소녀는 나라도 재물도 바라지 않사옵니다. 다만 소녀가 저승길을 오가며 본 것이 있사옵니다. 이 세상에는, 죽어서도 갈 곳을 몰라 헤매는 가엾은 넋들이 참으로 많더이다. 길을 잃고 울부짖는 그 넋들을, 소녀가 저승까지 곱게 인도하고 싶사옵니다."
임금은 깜짝 놀라 물었지요.
"아니, 그 험하고 무서운 저승길을 또 오가겠단 말이냐.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왔거늘, 어찌 그런 고생길을 자청한단 말이냐."
"예, 아버님. 소녀는 이미 저승길을 아옵니다. 그 어두운 길을, 소녀가 등불이 되어 밝혀 주겠나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갈 곳 몰라 헤매는 넋들에게, 소녀의 손을 잡고 편히 건너가라 이르겠사옵니다. 그것이 소녀가 이 세상에 태어난 까닭인가 하옵니다."
그 말에 임금과 중전은 숙연히 고개를 끄덕였더랍니다. 버림받은 설움을 겪은 아이였기에, 도리어 갈 곳 없는 넋들의 서러움을 누구보다 깊이 헤아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참으로 갸륵하고도 거룩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바리는 죽은 이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령이 되었더랍니다. 사람이 죽어 그 넋이 갈 길을 몰라 헤맬 때면, 바리가 손에 등불을 들고 나타나 그 어두운 길을 환히 밝혀 주었지요. 무섭고 외롭던 저승길이, 바리 덕분에 따뜻하고 환한 길이 된 것이랍니다.
바리는 넋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이리 일렀다지요. "무서워 마시오. 이 등불만 따라오면, 편안한 곳에 이를 것이오." 살아생전 아무리 외롭고 서럽던 이도, 바리의 그 고운 목소리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고이 눈을 감았더랍니다. 버림받은 설움을 아는 이였기에, 갈 곳 없는 넋의 서러움을 그토록 깊이 보듬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날까지도, 사람이 죽으면 그 넋을 곱게 저승으로 보내 주십사 비는 굿을 한다지요. 바로 그 굿에서 가장 먼저 정성껏 모시는 신령이, 저승길을 밝히는 등불, 우리 바리공주라 하옵니다. 딸이라는 이유로 버림받았으나, 그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온 세상의 넋을 어루만진 바리공주. 미움을 사랑으로, 설움을 자비로 갚은 그 마음이야말로, 진정 하늘이 낸 신령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 갸륵한 효심과 고운 마음씨는, 천 년 세월이 흘러도 이 땅에 두고두고 전해 내려온답니다. 오늘 이야기, 여기서 곱게 맺겠사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버림받은 막내딸이 저를 버린 부모를 살리겠다고 저승 끝까지 다녀오는 이야기, 어떠셨는지요. 미움을 사랑으로 갚은 바리공주의 마음이, 오늘 하루 여러분의 가슴에도 따뜻하게 스몄기를 바랍니다. 우리네 옛이야기에는 이렇듯 깊은 정과 지혜가 담겨 있지요. 이 이야기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로 함께해 주시고, 오늘도 평안하고 복된 하루 보내시길 빕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