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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에서 맺어진 천생연분
이번에 선보이는 드라마 대본은 조선시대 구전 설화와 야담에 자주 등장하는 '명부 착오 설화'와 '재생 인연담'을 바탕으로, 시청자들이 귀를 기울이며 유쾌하게 미소 지을 수 있도록 재구성한 창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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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옛날 옛적, 청풍 땅에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이 있었으니 바로 최 진사네 가문이었습니다. 만석꾼의 재산에 어진 인품까지 갖추었건만, 이 집안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기막힌 저주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안의 아들이 혼례를 올리려고 사주단자만 오가면, 첫날밤도 치르기 전에 시름시름 앓다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버리는 단명의 업보였습니다. 큰아들도, 둘째 아들도 그렇게 꽃다운 나이에 저승길로 떠나보낸 최 진사 부부에게 남은 것은 오직 막내아들 기찬 도령뿐이었습니다. 하나뿐인 막내마저 잃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일념에 기어이 혼사를 추진하는 부모님, 그리고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저승에 가서 따져보고 오겠다며 버선발로 드러누운 엉뚱하고 당돌한 도령의 이야기. 과연 기찬 도령은 저승의 높으신 판관님 앞에서 이 억울한 단명의 사슬을 끊어내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저승을 발칵 뒤집어 놓은 기찬 도령의 통쾌하고 유쾌한 명부 정정 소동극, 그리고 그곳에서 피어난 기적 같은 천생연분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1: 혼사 날아온 최 진사 댁의 웃픈 소동
따스한 봄바람이 매화 꽃잎을 흩날리던 어느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청풍 고을에서 제일가는 기와집인 최 진사 댁 담장 너머로 구수한 약차 냄새 대신 깊은 한숨 소리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채에 마주 앉은 최 진사와 그의 부인 김 씨는 화려한 비단 보자기에 싸인 사주단자를 앞에 두고 마치 사약 사발이라도 마주한 양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최 진사 댁에는 삼대째 내려오는 지독하고도 기괴한 단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윗대 할아버지 형제들도 그러했거니와, 최 진사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모두 스무 살이 되어 어여쁜 색시를 맞이하기로 날을 잡자마자, 사흘이 멀다 하고 가슴 통증을 호소하더니 허망하게 눈을 감아버렸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최 진사네 집안은 청실홍실만 걸리면 저승사자가 먼저 신방에 와서 진을 친다나 어쩐다나. 그런 흉흉한 소문 속에서도 가문의 대를 끊을 수는 없었기에, 최 진사 부부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남은 막내아들 기찬의 혼사를 추진하고야 말았습니다.
"여보,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큰애도, 둘째도 저 비단 보자기만 들어오면 거짓말처럼 시름시름 앓다가 떠나지 않았습니까. 나는 우리 막내 기찬이마저 그리될까 봐 가슴이 시퍼렇게 멍이 드는 것만 같습니다."
부인 김 씨가 치맛자락으로 눈가를 훔치며 애끓는 목소리로 말하자, 최 진사 역시 하얗게 센 수염을 부르르 떨며 마른침을 삼켰습니다.
"어허, 부인. 내 마음이라고 어찌 편하겠소. 밤마다 조상님들 제사상에 정화수를 떠 놓고 빌고 또 빌었소이다. 이번에는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물어 사주에 불기운이 넘쳐서 액운을 다 태워버린다는 오복 골짜기 박 초시네 고명딸로 골랐으니, 설마 하늘도 무심하시지, 삼 형제를 다 거두어 가시겠소?"
'하늘이 무심하냐고요? 무심하다마다요! 우리 집안 담당 저승사자는 분명히 남의 집 잔칫상 엎어버리는 게 취미인 게 틀림없다고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사랑채 문고리를 잡고 귀를 쫑긋 세운 채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열아홉 살 막내 도령 기찬이 속으로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며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습니다. 기찬은 이름처럼 기운이 차고 눈망울이 똘망똘망한 데다, 어릴 적부터 서당 훈장님도 혀를 내두를 만큼 말주변이 좋고 엉뚱한 구석이 있는 총각이었습니다. 두 형님이 혼사만 앞두면 얼굴도 못 본 색시 이름 석 자만 남긴 채 황천길로 떠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온 기찬에게, 저 사랑채 한가운데 놓인 붉은 사주단자는 경사스러운 예물이 아니라 저승에서 날아온 출두 명령서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소자, 절대 장가가지 않겠습니다! 아니, 못 갑니다! 저 보자기 당장 물리시지요! 소자는 평생 댕기 머리 총각으로 늙어 죽으면 죽었지, 사모관대 쓰고 관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죽어도 안 할 것입니다!"
기찬이 방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아예 대자로 드러누우며 배짱 좋게 소리쳤습니다. 깜짝 놀란 최 진사가 곰방대를 내려놓으며 호통을 쳤습니다.
"이 녀석아! 사내대장부가 되어가지고 어찌 이리 겁이 많아서야 쓰겠느냐!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다 하늘의 뜻이거늘, 네 형들의 몫까지 합쳐서 네가 보란 듯이 장가들어 아들딸 낳고 잘 살아야 가문이 일어서지 않겠느냐!"
"아버님 말씀이 백번 옳사옵니다만, 하늘의 뜻도 한두 번이어야 하늘의 뜻이지, 장가간다 소리만 나오면 득달같이 데려가는 건 하늘의 뜻이 아니라 저승 관아의 행정 착오이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큰형님은 약과 한 입 베어 물다가 숨이 턱 막혀 돌아가셨고, 작은형님은 신부 집에서 보낸 함진아비 맞이하다가 마루에서 미끄러져 돌아가셨습니다. 이게 어디 우연입니까? 소자가 이번에 사주단자를 받으면, 필시 내일 아침 세수하다가 세숫대야에 코를 박고 죽을 판이란 말입니다!"
기찬의 넉살 좋으면서도 조리 있는 항변에 부인 김 씨는 무섭다며 손사래를 쳤고, 최 진사는 기가 막혀 헛기침만 해댔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고집도 보통은 아니었습니다. 최 진사는 이미 박 초시 댁과 약조를 마쳤으니 양반 가문에서 일구이언할 수 없다며 기어이 혼례 날짜를 받아두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기찬은 팔베개를 하고 누워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았습니다. 창밖으로는 달빛이 처연하게 쏟아져 들어오고, 멀리서 소쩍새 우는 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아버님이 저리 고집을 부리시니 꼼짝없이 사모관대를 쓰게 생겼구나. 그런데 가만있자, 어차피 혼사 날이 잡혔으니 저승에서도 슬슬 내 이름을 부를 채비를 하고 있겠지? 기왕에 끌려갈 목숨이라면, 덜덜 떨면서 끌려갈 게 아니라 아예 내가 먼저 저승에 내려가서 판관님 멱살이라도 잡고 따져봐야겠다!'
그렇게 비장하고도 엉뚱한 결심을 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거짓말처럼 기찬의 몸에서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하더니, 멀쩡하던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앞이 가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 의원들이 줄지어 드나들고 탕약을 달이는 연기가 자욱했지만, 약사발을 입에 대기도 전에 기찬의 숨결은 점점 가빠졌습니다. 머리맡에서 눈물을 쏟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기찬은 창백한 입가에 오히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너무 슬퍼 마십시오. 소자가 지금 저승에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가서 우리 집안 장부에 누가 먹물을 쏟았는지, 아니면 글씨를 발로 썼는지 똑똑히 확인하고 고쳐서 돌아올 터이니, 부디 제 시신은 사흘만 땅에 묻지 마시고 아랫목에 따뜻하게 데워 두시옵소서..."
"기찬아! 이 녀석아, 죽어가는 마당에 무슨 실없는 소리냐! 기찬아!"
부모님의 통곡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면서, 기찬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습니다. 그러나 숨이 멎는 그 순간에도 기찬의 속마음은 두려움 대신 묘한 오기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좋았어! 저승 판관님인지 염라대왕님인지 딱 기다리시오. 청풍 최 진사 댁 막내아들 최기찬이가 담판을 지으러 갑니다!'
※ 2: 저승길 유람하는 황당한 망자
자욱한 안개가 발밑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시끌벅적하던 안채의 울음소리는 거짓말처럼 뚝 끊겼습니다. 기찬이 눈을 번쩍 떠보니, 자신은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이부자리 위가 아니라 시커먼 갓을 쓰고 검은 도포를 걸친 사내 둘의 한가운데에 멀뚱멀뚱 서 있었습니다. 한 사내는 눈매가 매섭고 수염이 덥수룩한 고참 저승차사 강림이었고, 다른 한 사내는 아직 볼에 솜털도 덜 빠진 듯 어리숙해 보이는 신참 차사 해원이었습니다. 보통의 망자라면 이 시커먼 저승차사들의 행색만 보아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살려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기 마련이건만, 우리의 기찬 도령은 뒷짐을 떡 하니 지고는 두 차사의 위아래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훑어보았습니다.
"최기찬, 향년 열아홉! 시왕전의 명을 받아 너를 데리러 왔으니 지체 말고 앞장서거라!"
고참 차사 강림이 저승의 서슬 퍼런 위엄을 보이려 우렁찬 목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기찬은 놀라기는커녕 손뼉을 탁 치며 반색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하! 두 분이 바로 그 소문으로만 듣던 저승차사 나리들이시군요!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 오시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우리 큰형님과 작은형님 데려가실 때도 두 분이 오셨습니까? 우리 집안 단골 차사님이신가 보네요!"
강림과 해원은 순간 말문이 막혀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습니다. 수백 년 동안 수만 명의 망자를 끌고 가 보았지만, 저승차사를 보자마자 단골 운운하며 반갑다고 인사하는 녀석은 처음 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참 차사 해원이 당황하여 손에 든 오랏줄을 만지작거리며 더듬거렸습니다.
"아, 아니 이 망자가 정신이 나갔나... 선배님, 이 녀석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오다가 어디 문지방에 머리라도 찧은 모양입니다. 왜 이리 해맑습니까?"
"글쎄 말이다. 어허, 이놈 최기찬! 여기가 어디라고 실실 웃으며 농을 지껄이느냐! 저승길이 네 집 안방 마실 가는 길인 줄 아느냐!"
강림이 눈을 부라리며 오랏줄로 기찬의 손목을 묶으려 하자, 기찬은 재빨리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능청스럽게 말했습니다.
"아이구, 나리. 묶으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도망갈 거였으면 아예 죽지도 않았지요. 저는 저승 시왕전에 계신 판관님께 아주 긴히 따질 말씀이 있어서 자진해서 따라나선 길이옵니다. 그러니 오랏줄로 묶어서 힘 빼지 마시고, 길 안내나 좀 잘 부탁드립니다. 저승길 풍경이 꽤나 볼만하다고 들었는데, 어디 구경이나 좀 하면서 천천히 가시지요."
'세상에나, 자진해서 저승에 따지러 왔다고? 저 녀석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괜히 엮였다가는 시왕전에 가기도 전에 내 진기가 다 빠지겠어.'
강림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기찬의 등짝을 떠밀었습니다. 그렇게 기묘한 삼 인방의 저승길 동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험준한 가시덤불 산을 넘고 피눈물이 흐른다는 강을 지나는 동안, 다른 망자들은 죄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며 통곡을 하는데, 기찬은 마치 금강산 유람이라도 나온 선비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나리, 저기 피어나 있는 저 붉은 꽃이 바로 그 유명한 만주사화, 피안화 맞습니까? 이야, 이승에서는 그림으로만 보았는데 실제로 보니 빛깔이 참으로 곱습니다그려. 그리고 저기 저 나룻배 사공 영감님은 하루에 노를 몇 번이나 저으신답니까? 노임은 염라대왕님이 쌀로 주십니까, 아니면 엽전으로 주십니까?"
"입 안 다물렷다! 망자가 말이 왜 그리 많으냐! 조용히 걸음이나 재촉해라!"
"에이, 강림 나리도 참 매정하시긴. 어차피 판관님 뵙고 이야기 끝내면 저는 다시 이승으로 돌아갈 몸인데, 언제 또 저승 구경을 와보겠습니까? 백 살 다 채우고 다시 오려면 아직도 팔십 년은 더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해원 나리, 나리는 저승차사 과거 시험 보실 때 경쟁률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기찬이 옆에 선 신참 차사 해원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살갑게 묻자, 순진한 해원은 또 그 질문에 솔깃해서 자기도 모르게 대답을 술술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게 말입니다. 제가 지원할 때만 해도 삼천 대 일이나 되어서, 사흘 밤낮으로 명부 외우느라 코피를 두 동이나 쏟았지 뭡니까. 게다가 강림 선배님이 어찌나 호랑이 같으신지..."
"이 녀석 해원아! 망자하고 시시덕거리지 말라고 했느냐, 안 했느냐!"
강림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해원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고, 기찬은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었습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기찬은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사실 기찬이 이토록 태평하게 구는 데에는 다 나름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무릇 관아에 들어가 송사를 벌일 때는 기세에서 눌리면 지는 법이지. 저승이라고 다를까 보냐. 죄지은 것 없이 억울하게 끌려온 사람이 당당해야 판관님도 함부로 호통을 못 치실 것이다. 게다가 차사 나리들과 미리 안면을 터놓아야 나중에 이승으로 돌아갈 때 길 안내도 편하게 받을 것 아니겠는가!'
어느덧 안개가 걷히고, 하늘을 찌를 듯 높다란 기와지붕을 인 시왕전의 거대한 대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문 앞에는 험상궂게 생긴 수문장들이 창을 들고 서 있었고, 안쪽에서는 장부를 넘기는 소리와 판관의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강림과 해원은 기찬을 데리고 오는 내내 시달린 탓에 이승에서 출발할 때보다 얼굴이 반쪽이 되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휴우, 드디어 다 왔다. 판관님, 여기 청풍 땅 최기찬 데려왔사옵니다! 어서 재판을 받으시고 이 녀석 좀 빨리 지옥이든 극락이든 보내주십시오. 수다스러워서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옵니다!"
강림이 학을 떼며 기찬을 법정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기찬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쳐 입고,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시왕전의 붉은 기둥 사이를 걸어 들어갔습니다.
※ 3: 판관 앞에서의 당돌한 호소와 명부 검증
시왕전 법정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천둥처럼 들릴 만큼 서늘하고 엄숙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높다란 단상 위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생사부(生死簿) 장부들에 둘러싸여, 호랑이 수염을 기르고 사모를 쓴 최 판관이 붓을 든 채 앉아 있었습니다. 최 판관은 눈 밑이 거무스름하게 내려앉은 것이, 밀려드는 망자들의 심판을 처리하느라 며칠 밤을 꼬박 새운 듯 피곤이 역력한 기색이었습니다. 그는 앞에 선 기찬을 흘긋 내려다보며 장부를 뒤적거리더니, 판에 박힌 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청풍 고을 최 진사의 삼남 최기찬이라... 나이는 열아홉이요, 죄목은 없으나 명부에 적힌 수명이 다하여 오늘 축시에 거두어들였도다. 이승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착하게 살았으니 지옥은 면하게 해 줄 터, 저기 대기자 줄에 서서 다음 생의 환생 순번을 기다리도록 하여라. 다음 망자 들라 해라!"
도장을 쾅 찍으려는 최 판관의 손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기찬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잠깐만 멈추시옵소서, 판관 나리! 그 도장 찍으시면 큰일 납니다! 소인은 환생 순번 줄에 설 생각이 추호도 없사옵니다!"
시왕전 안의 모든 서기들과 차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기찬에게로 쏠렸습니다. 감히 판관의 판결이 내려지는데 멈추라니, 저승 개국 이래 이토록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스무 살배기 망자는 없었습니다. 최 판관은 들고 있던 도장을 멈추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기찬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어허, 저런 고약한 놈을 보았나.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고성을 지르느냐! 수명이 다해 왔으면 순순히 명을 따를 것이지, 무슨 억지가 그리 많으냐!"
"판관 나리, 억지라니요! 억지는 소인이 부리는 것이 아니라 이 시왕전의 생사부가 부리고 있는 것이옵니다! 나리께서도 최 씨 성을 가지셨으니 같은 종친으로서 제 말씀 좀 들어보십시오. 소인의 집안은 청풍 최 진사 댁으로, 조상 대대로 남에게 쌀 한 톨 빌린 적 없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쑤어 나눠주며 적선을 쌓아온 집안이옵니다. 헌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 할아버지 형제분들도, 우리 아버지의 형제분들도, 그리고 소인의 두 형님까지! 집안의 사내들이 장가를 가려고 혼사 말만 나오면 첫날밤도 못 치르고 죄다 열아홉, 스무 살에 요절을 하였사옵니다!"
기찬이 또박또박 막힘없는 어조로 집안의 내력을 읊어나가자, 최 판관의 눈썹이 꿈틀거렸습니다. 기찬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단상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이승의 고을 원님도 억울한 백성이 있으면 신문고를 울려 원통함을 풀어주거늘, 하물며 삼계를 다스리는 저승의 시왕전에서 아무런 죄도 없는 한 집안의 장정들을 대대로 혼사 날마다 골라서 데려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큰형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어쩌다 명이 짧으셨나 보다 했습니다. 작은형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귀신이 시샘했나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소인까지 사주단자 받자마자 끌려온 것을 보니, 이건 분명히 저 명부에 큰 착오가 있는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어서 저 오래된 원장(原帳)을 꺼내어 소인의 눈앞에서 확인해 주시옵소서!"
'허어, 이 녀석 말하는 조리 좀 보게나. 사서삼경을 통째로 씹어 먹었나, 어찌 저리 논리가 정연하단 말인가. 그런데 듣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군. 적선을 많이 한 집안의 자손들이 왜 대대로 혼사만 앞두면 죽어나갔담?'
최 판관은 속으로 뜨끔하여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옆에 서 있던 고참 서기에게 눈짓을 보냈습니다.
"어흠, 어흠! 저 망자의 말이 심히 당돌하나, 시왕전의 공정함을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원장을 대조해 보겠다. 여봐라, 청풍 최 씨 가문의 백 년 전 적선록과 수명 원장을 모두 가져오너라!"
잠시 후, 서기들이 먼지가 풀풀 날리는 두꺼운 고서들을 낑낑대며 들고 와 단상 위에 펼쳤습니다. 최 판관은 돋보기를 코끝에 걸치고 장부를 한 장씩 넘기며 꼼꼼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조용한 법정 안에는 종이 넘기는 바스락 소리만 긴장감 있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장부를 들여다보던 최 판관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더니, 얼굴이 홍당무처럼 시뻘게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이고, 맙소사!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있나! 백 년 전 최 기찬의 고조할아버지가 흉년에 마을 사람 백 명을 살린 공덕이 있어, 당시 판관이었던 내 선임자가 그 자손들에게 복을 내린다고 적어놓은 구절이... 아이고,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최 판관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소매로 훔치며 장부에 코를 박았습니다. 원장에는 분명히 이렇게 적혀 있어야 맞았습니다. '청풍 최 씨 가문은 대대로 자손들이 혼사를 치르면 백년해로(百年偕老)하게 하라.' 그런데 백 년 전, 졸음을 참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면서 장부를 베껴 쓰던 말단 서기 녀석이 먹물을 흘리는 바람에, 글자가 번지고 획이 비뚤어져서 '혼사를 치르면 백년해로(百年偕老)'가 아니라 '혼사를 치르면 단명즉사(短命卽死)'라는 얼토당토않은 글자로 둔갑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 뒤를 이은 서기들은 원장의 맥락도 살피지 않고 그저 글자 그대로 기계처럼 집행하여, 최 씨 집안 총각들이 혼사만 잡히면 어김없이 저승차사를 출동시켰던 것이었습니다.
"파, 판관님... 이, 이거 큰일 났사옵니다. 백년해로를 단명즉사로 잘못 적어놓다니요! 이 사실이 염라대왕님 귀에 들어가면 판관님은 물론이고 저희 서기들까지 전부 발설지옥에 끌려가 혀가 뽑히고 파직당할 것이옵니다!"
옆에서 함께 장부를 들여다보던 고참 서기가 사색이 되어 최 판관의 귀에 대고 다급하게 속삭였습니다. 단상 아래에서 최 판관과 서기들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기찬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거봐라, 내 말이 맞지! 관아의 서류라는 게 사람이 쓰는 거라 어딜 가나 오자(誤字) 탈자(脫字)가 있기 마련이라니까!'
기찬은 일부러 더 큰 소리로 법정이 떠나가라 외쳤습니다.
"판관 나리!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설마 백 년 동안 선량한 집안의 자손들을 잘못된 장부 하나로 줄줄이 잡아들이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소인은 이 길로 염라대왕님이 계신 본전으로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하겠사옵니다!"
"어허! 쉬잇! 조, 조용히 하지 못할까! 이 녀석아, 목소리가 왜 그리 크느냐!"
최 판관은 체면이고 위엄이고 다 내던진 채 단상 위에서 손사래를 치며 진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근엄하던 시왕전의 판관이 열아홉 살 총각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진풍경이 펼쳐진 것입니다.
※ 4: 억울하게 끌려온 처녀와 기찬의 청원
최 판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행여나 밖에서 염라대왕의 순찰대가 들을까 봐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기찬을 달래기 시작했습니다.
"어흠, 최기찬아. 내가 가만히 장부를 살펴보니, 네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구나. 백 년 전 서기가 붓끝이 좀 뭉툭한 것을 썼던 모양인데, 글자 획이 살짝 삐쳐서 사소한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 네 형들은 이미 환생을 하여 다른 곳에서 잘 살고 있으니 무를 수가 없으나, 너 하나만큼은 내가 즉시 장부를 고쳐서 이승으로 돌려보내 주마. 그러니 염라대왕님께 간다는 소리는 절대 입 밖에 내지 말거라, 알겠느냐?"
기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판관 나리. 사람 목숨이 오가는 중대한 일을 두고 사소한 착오라니요! 소인이 이승에서 사흘 동안 앓아누우며 겪은 고통과, 지금쯤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계실 우리 부모님의 피눈물은 어찌 보상하실 겁니까!"
기찬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따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시왕전 대문이 다시 한번 덜컹 열리더니, 다른 저승차사 둘이 웬 처녀 하나를 끌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처녀의 행색과 태도가 방금 전 기찬이 들어올 때와 어찌나 똑같은지, 울기는커녕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차사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따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보시오 차사 나리들! 내가 분명히 말씀드렸지요? 우리 오복 골짜기 박 초시네 집안은 고모님도, 언니들도 시집갈 날만 잡으면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단 말입니다! 나는 청풍 최 진사 댁 도령과 사주단자 오간 죄밖에 없는데 왜 나를 잡아오는 것입니까! 판관님 앞에 가서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는 한 발짝도 못 움직입니다!"
처녀의 낭랑하고 당찬 목소리가 법정 안을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기찬은 고개를 휙 돌려 그 처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앵두 같은 입술에 반달처럼 고운 눈매를 가진 아리따운 처녀였는데, 그 기개가 어찌나 당당하고 총명해 보이는지 첫눈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방금 그녀가 외친 말을 되새겨보니, 오복 골짜기 박 초시네 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오복 골짜기 박 초시네 딸이라면, 우리 아버님이 내 색시감으로 정하셨다는 바로 그 규수가 아닌가! 아니, 우리 집안만 혼사 치르면 죽는 줄 알았더니, 저 처녀네 집안도 똑같은 꼴을 당하고 있었단 말인가!'
단상 위의 최 판관과 서기들은 처녀의 외침을 듣자마자 또다시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을 토해냈습니다. 고참 서기가 박 초시 가문의 장부를 황급히 찾아 펼치더니 울상이 되어 판관에게 보고했습니다.
"판관님... 여기도 똑같사옵니다! 백 년 전 그 졸던 서기 녀석이 최 씨 가문 장부 옆에 있던 박 씨 가문 장부에도 똑같이 먹물을 튀겨서, 딸들이 혼사만 잡히면 단명즉사한다고 적어놓았사옵니다!"
"아이고, 내 머리가 깨지는구나! 그 못된 서기 녀석은 지금 어디 있느냐! 당장 잡아 와라... 아, 백 년 전이니 벌써 퇴직하고 없지! 어쩌다 내 임기에 이런 폭탄이 터졌단 말이냐!"
최 판관이 사모를 벗어 던질 기세로 한탄하는 사이, 법정 한가운데에 나란히 서게 된 기찬과 처녀 박연화는 서로를 마주 보며 눈을 깜빡였습니다. 연화가 기찬의 단정한 도포 차림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저기... 혹시 방금 청풍 최 진사 댁 도령이라고 하셨사옵니까? 소녀는 오복 골짜기 박 초시의 여식 연화라고 하옵니다."
"아! 소생이 바로 그 최 진사의 막내아들 최기찬이옵니다! 낭자께서 바로 저와 혼담이 오갔던 박 낭자이시군요! 이승에서는 얼굴 한 번 못 뵙고 사주단자만 오갔는데, 세상에, 신방이 아니라 저승 시왕전 법정에서 첫인사를 나누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기찬이 반가움에 활짝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연화 역시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찬의 훤칠한 용모와 유쾌한 태도에 볼을 붉히며 살포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도령님. 소녀도 어차피 억울하게 죽을 바에는 저승에 와서 판관님께 따져보리라 마음먹고 눈을 감았는데, 도령님께서 먼저 와 계실 줄이야. 두 집안이 똑같이 이런 기막힌 일을 겪고 있었다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보통 인연이 아니옵니다."
두 청춘 남녀가 저승 법정 한가운데에서 봄날 꽃구경이라도 나온 듯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자, 차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졌고 최 판관은 식은땀을 닦으며 어서 이 사태를 수습하려 애썼습니다. 그때 기찬이 연화의 곁에 나란히 서서 최 판관을 향해 정중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청원을 올렸습니다.
"판관 나리! 보시다시피 저 혼자만 억울하게 끌려온 것이 아니라, 소인의 배필이 될 박 낭자 역시 시왕전의 똑같은 장부 오류로 인해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고 이곳까지 끌려왔사옵니다! 소인 혼자만 이승으로 돌아간들, 제 색시 될 사람이 저승에 남아 있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당장 박 낭자의 명부도 올바르게 고치시어, 소인과 함께 이승으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
연화 역시 기찬의 말에 힘을 보태듯 고개를 끄덕이며 총명한 눈빛으로 판관을 바라보았습니다.
"도령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판관 나리. 저희 두 가문이 백 년 동안 겪은 눈물과 한을 생각하신다면, 지금 즉시 두 집안의 원장에 적힌 글자를 '백년해로'로 바르게 고쳐 쓰시고, 저희 두 사람을 나란히 환생시켜 주시는 것이 저승의 법도에 맞는 처사일 것이옵니다!"
최 판관은 두 사람의 야무진 합공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허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파직당할까 봐 두려웠던 마음도, 이 당돌하고 어여쁜 선남선녀의 기개 앞에서는 눈 녹듯 사라지고 오히려 대견한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하하! 그래, 내가 졌다, 졌어! 너희 둘이 이승에서 혼담이 오갔다더니, 말하는 본새며 배짱이 아주 천생연분이 따로 없구나! 좋다, 내 오늘 너희 두 집안의 명부를 붉은 붓으로 똑똑히 고쳐 적어, 대대로 혼사를 치르면 백 살까지 해로하도록 바로잡아 주겠다!"
※ 5: 반쪽짜리 옥가락지와 이승으로의 귀환
최 판관은 즉시 가장 좋은 주먹(朱墨)을 갈게 하여, 최 씨 가문과 박 씨 가문의 수명 원장에 적힌 '단명즉사'라는 글자 위에 굵직한 붓으로 줄을 긋고, 정성스러운 해서체로 '백년해로 자손만대'라는 여덟 글자를 큼지막하게 써 내려갔습니다. 붓끝이 장부에 닿는 순간, 시왕전 안에 은은한 금빛 기운이 감돌며 두 집안을 짓누르고 있던 백 년 묵은 단명의 업보가 봄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최 판관은 붓을 내려놓고 기찬과 연화를 흐뭇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습니다.
"자, 이제 명부는 완벽하게 고쳐졌다. 허나, 너희가 이승으로 돌아가면 저승에서의 기억이 꿈결처럼 흐릿해질 수도 있는 법이다. 모처럼 저승까지 나란히 손잡고 내려와 내 앞에서 담판을 지었으니, 내가 판관으로서 주례 아닌 주례를 서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최 판관이 품속에서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푸른 옥가락지 하나와 붉은 명주실 한 타래를 꺼내 들었습니다. 판관이 옥가락지를 단상 모서리에 가볍게 탁 치자, 신기하게도 가락지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반쪽으로 쪼개졌습니다.
"이것은 저승의 인연옥으로 만든 가락지이니라. 반쪽은 최기찬 네가 가지고, 나머지 반쪽은 박연화 네가 가져라. 그리고 이 붉은 명주실로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을 묶어둘 터이니, 이승에 돌아가 눈을 뜨거든 이 옥가락지의 반쪽을 맞추어 보고 서로가 저승에서 맺어진 배필임을 알아보도록 하여라."
서기가 내려와 기찬과 연화의 손에 반쪽짜리 옥가락지를 하나씩 쥐여주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한 붉은 명주실로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을 단단히 묶었습니다. 손가락 끝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자, 기찬과 연화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승에서 얼굴도 모른 채 혼인했다면 몰랐을 귀한 마음을, 오히려 저승에 와서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며 확인하게 되었구나. 이 어여쁘고 당찬 낭자라면 평생을 함께해도 날마다 웃음이 끊이지 않겠어.'
'죽음 앞에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판관님 앞에서 내 목숨까지 함께 구해준 이 든든하고 재치 있는 도령님이라면, 내 평생을 믿고 의지할 수 있겠구나.'
두 사람의 마음이 애틋하게 오가는 것을 본 기찬이 문득 장난기가 발동하여 최 판관을 향해 능청스럽게 한마디를 더 던졌습니다.
"판관 나리, 베풀어 주신 은혜는 백골난망이오나, 기왕에 선처를 베푸시는 김에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이승에서도 관아에서 무고한 백성을 잘못 잡아들였다가 풀어줄 때는 위로금 명목으로 쌀이라도 한 가마니 쥐여 보내는 법인데, 저희는 이 멀고도 험한 저승길까지 왕복으로 다녀오느라 다리도 아프고 진기가 다 빠졌사옵니다. 혹시 저승에는 출장비나 위로금 같은 제도가 없사옵니까?"
"아니, 이 녀석이! 목숨을 살려주었더니 이제는 판관 주머니까지 털려고 드는구나!"
최 판관이 어이가 없어 껄껄 웃자, 옆에 있던 고참 서기가 황급히 판관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판관님, 저 총각 입이 보통 입이 아니오니, 이승에 가서 저승 흉이라도 보면 큰일 납니다. 저기 남은 수명 창고에서 조금만 떼어 얹어주시지요!"
"어흠, 하긴 그렇구나. 좋다! 너희 두 사람의 원래 수명이 일흔 살까지로 되어 있는데, 이번 행정 착오에 대한 위로금으로 각각 스무 살씩 더 얹어서 아흔 살까지 무병장수하도록 장부에 적어주마! 이제 정말 불만 없렷다?"
"아이고, 판관 나리!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흔 살에 다시 뵐 때는 제가 이승에서 가장 맛있는 약과와 청주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오겠사옵니다! 박 낭자, 우리 어서 인사드리고 가시지요!"
"예, 도령님! 판관 나리, 차사 나리들, 부디 안녕히 계시옵소서!"
기찬과 연화가 나란히 큰절을 올리자, 최 판관은 강림과 해원을 비롯한 차사들에게 어서 염라대왕의 순찰대가 돌기 전에 두 사람을 이승으로 급히 호송하라고 명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열 배는 더 빨랐습니다. 차사들이 두 사람의 등을 가볍게 떠밀자, 마치 구름을 탄 듯 몸이 붕 떠오르며 오색찬란한 빛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와중에도 기찬은 손안에 든 반쪽짜리 옥가락지를 꽉 쥐고 연화를 바라보며 외쳤습니다.
"박 낭자! 이승에 돌아가 눈을 뜨자마자 제가 낭자 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절대 다른 데 시집가시면 안 됩니다!"
"호호호! 도령님이나 깨어나셔서 다른 규수에게 한눈팔지 마시옵소서! 옥가락지 반쪽을 들고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두 사람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넘어 봄바람처럼 흩어졌습니다.
※ 6: 증표로 다시 만난 천생연분과 백년해로
한편, 이승의 청풍 고을 최 진사 댁은 그야말로 눈물바다였습니다. 기찬이 숨을 거둔 지 오늘로 꼭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차마 아들의 시신을 차가운 땅에 묻을 수 없었던 최 진사 부부는 기찬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아닌 유언을 떠올리며, 아랫목에 불을 지펴 시신을 따뜻하게 보전한 채 밤낮으로 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내 새끼 기찬아! 저승에 가서 따지고 돌아온다더니, 사흘이 다 지나도록 어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단 말이냐! 이 어미 가슴이 다 타들어 간다, 아이고!"
부인 김 씨가 기찬의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통곡을 하고, 최 진사가 입관을 준비하라는 하인들의 말에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훔치던 바로 그 찰나였습니다. 조용히 누워 있던 기찬의 가슴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방 안이 떠나가라 우렁찬 재채기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에취! 아이고, 저승 안개가 워낙 자욱해서 코가 다 간지럽네! 어라, 어머니? 아버지? 왜 이리 방 안에 연기가 자욱합니까, 아랫목이 너무 뜨거워서 등짝이 다 익겠습니다!"
기찬이 눈을 번쩍 뜨며 벌떡 일어나 앉아 등을 긁적거리자, 울고 있던 최 진사와 부인 김 씨, 그리고 마당에 있던 하인들까지 모두 귀신이라도 본 듯 입을 쩍 벌린 채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기, 기찬아! 네가 진짜로 살아난 것이냐, 아니면 귀신이 되어 어미를 놀리는 것이냐!"
"어머님, 귀신이라니요! 소자가 사흘 만에 저승 판관님 뵙고 담판을 지어 집안 명부를 다 고치고 돌아오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자, 제 손 좀 만져보십시오. 이렇게 따뜻하지 않습니까!"
기찬이 부모님의 손을 덥석 잡자, 분명히 싸늘하게 식어 있던 아들의 손에서 펄떡이는 맥박과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습니다. 최 진사 부부는 기절초풍할 듯 놀라다가 이내 아들을 부둥켜안고 기쁨의 통곡을 터뜨렸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눈물 세례를 받던 기찬이 자신의 오른손 주먹을 펴보더니 깜짝 놀라며 소리쳤습니다. 손바닥 안에는 저승에서 최 판관이 주었던 그 영롱한 반쪽짜리 푸른 옥가락지가 실제로 선명하게 쥐여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지금 제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마구간에서 제일 빠른 말을 내어주십시오! 오복 골짜기 박 초시 어른 댁에 당장 가보아야 합니다!"
기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발을 거꾸로 신다시피 하며 마당으로 뛰어나오자, 마침 대문 밖에서 박 초시 댁 하인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며 외쳤습니다.
"최 진사 어른 계십니까! 저희 박 초시 댁 작은아씨께서 사흘 전에 갑자기 숨을 거두셨다가, 방금 전에 거짓말처럼 기침을 하시더니 다시 살아나셨사옵니다! 그런데 깨어나시자마자 최 진사 댁 막내 도령님이 살아 계실 터이니 어서 모셔 오라고 성화이십니다!"
그 말을 들은 최 진사 부부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기찬은 손뼉을 치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하하하!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지! 판관 나리가 일 처리는 참으로 깔끔하게 잘하셨구먼! 아버님, 어머님, 소자 지금 당장 색시 만나러 다녀오겠습니다!"
기찬은 말을 몰아 단숨에 오복 골짜기 박 초시 댁으로 달려갔습니다. 박 초시 댁 역시 초상집에서 순식간에 잔칫집으로 바뀌어 온 집안이 들썩이고 있었습니다. 기찬이 대문을 들어서자, 마루 위에서 단아한 한복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던 연화가 버선발로 내려와 그를 맞이했습니다. 이승의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저승의 잿빛 안개 속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눈부시고 아름다웠습니다. 기찬이 다가가 품속에서 반쪽짜리 옥가락지를 꺼내 보이자, 연화 역시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에 쥐여 있던 나머지 반쪽 옥가락지를 내밀었습니다. 두 사람이 가락지의 단면을 맞대는 순간, 찰칵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푸른 빛이 번쩍이더니, 갈라졌던 옥가락지가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감쪽같이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박 낭자, 저승에서 나눈 약조를 잊지 않고 기다려 주셨군요."
"도령님께서 제 목숨까지 구해주셨는데 어찌 잊겠사옵니까. 판관님께서 묶어주신 이 붉은 명주실이 저희를 다시 이곳으로 이끌었나 보옵니다."
두 사람의 손끝에서 보이지 않는 붉은 인연의 실이 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듯했습니다. 양가 부모님들은 두 아이가 겪은 기이하고도 놀라운 저승 왕복담을 듣고는, 무릎을 치며 조상님과 하늘에 감사의 절을 올렸습니다.
그로부터 보름 뒤, 청풍 고을과 오복 골짜기가 떠나가라 성대한 혼례식이 열렸습니다. 사모관대를 멋지게 차려입은 기찬과 연지곤지를 찍고 족두리를 쓴 연화가 마주 서서 교배례를 올릴 때, 마을 사람들은 이제나저제나 누가 쓰러지지 않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기찬은 쓰러지기는커녕 신방을 차리고 첫날밤을 보낸 이튿날 아침에도 상쾌한 얼굴로 방문을 활짝 열며 기지개를 켜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최 진사 댁과 박 초시 댁의 끔찍했던 단명의 저주는 거짓말처럼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기찬과 연화는 저승 판관님이 얹어준 수명대로 아흔 살이 넘도록 잔병치레 한 번 없이 금슬 좋게 백년해로하였으며, 슬하에 아들딸을 오 남매나 두어 그 자손들 또한 모두 혼사를 치를 때마다 만복을 누리며 번창하였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억울하고 두려운 운명 앞에서도 주저앉아 울기보다는, 당당하게 지혜와 유머로 맞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낸 기찬 도령과 연화 낭자야말로, 하늘과 저승이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진정한 천생연분이 아니었을까요?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들려드린 '저승에서 맺어진 천생연분'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대대로 내려오던 무서운 단명의 저주도 기찬 도령의 기발한 배짱과 연화 낭자의 총명함 앞에서는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네요. 아무리 꼬여버린 운명의 실타래라도 웃음과 지혜로 당당하게 맞선다면 전화위복의 복으로 바뀔 수 있다는 옛 선조들의 유쾌한 해학이 담긴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여러분의 하루에 작은 미소와 따뜻한 위로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재미있게 들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알림 설정까지 잊지 말고 꼭 눌러주세요! 여러분의 따뜻한 댓글은 다음 이야기를 만드는 데 아주 큰 힘이 됩니다. 그럼 저희는 다음에도 더 재미있고 신비로운 옛날이야기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