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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다녀온 구두쇠 영감

@염라야담 2026. 10. 30. 22:15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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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승 다녀온 구두쇠 영감

    죽었다가 사흘 만에 관 뚜껑 박차고 일어난 구두쇠 영감이 평생 부리던 늙은 종의 발밑에 무릎 꿇고 통곡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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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트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깊어가는 밤, 옛 선조들의 지혜와 삶의 이치가 담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보는 시간입니다. 예로부터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갈 때는 이승에서 입던 비단옷도, 곳간에 가득 쌓아둔 천금 같은 재물도 한 푼 가져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조선 후기 대표 야담집인 『청구야담』에 전해 내려오는 어느 구두쇠 양반의 기묘한 저승 체험담, 일명 회생담입니다. 평생을 자기 배만 불리며 남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부자가 하루아침에 숨이 멎어 황천길에 올랐다가, 저승의 텅 빈 곳간과 염라대왕의 서슬 퍼런 심판대 앞에서 겪게 되는 충격적인 사흘간의 기록인데요. 과연 그는 어떻게 다시 이승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지금 바로 그 신비로운 이야기 속으로 함께 떠나보시겠습니다.

    씬표

    씬 1. 천석꾼 박 영감의 모진 박대와 짚신 한 짝의 인연
    씬 2. 한밤중에 찾아온 검은 그림자와 황천길 동행
    씬 3. 황금 대궐과 썩은 지푸라기, 뒤바뀐 저승의 곳간
    씬 4. 업경대 앞에 드러난 죄목과 관음보살의 자비
    씬 5. 염라대왕의 사흘 말미와 관 뚜껑을 열고 깨어난 망자
    씬 6. 텅 빈 곳간을 채운 나눔과 평온한 마지막 안식

    ※ 1: 천석꾼 박 영감의 모진 박대와 짚신 한 짝의 인연

    충청도 공주 땅, 금강 줄기가 굽이쳐 흐르는 기름진 들녘 한가운데에는 기와지붕이 구름처럼 이어진 거대한 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일대에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천석꾼 박 진사 영감의 집이었습니다. 박 영감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에 더해, 흉년이 들 때마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높은 이자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이면 땅문서를 빼앗는 수법으로 재산을 눈덩이처럼 불린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곳간에는 삼 년 전에 거두어들인 묵은쌀이 썩어나가고 있었고, 뒤란의 장독대에는 간장과 된장이 수백 독이나 가득 차 있었으나, 정작 그 집 문턱을 넘어 따뜻한 밥 한 술 얻어먹은 과객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시월 상달이 지나고 찬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어느 늦가을 오후였습니다. 박 영감은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두꺼운 비단 방석을 깔고, 돋보기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소작농들에게 받아낼 장리쌀 문서인 추수기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문간에서 힘없는 기침 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주인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보시오, 행랑아범 계시오? 지나가는 늙은 중이온데, 날은 저물고 찬 바람이 뼈를 에니 자비로운 마음으로 시주 한 줌만 베풀어 주시구려."

    목탁을 두드리는 맑은 소리가 마당 안으로 퍼져 나가자, 장부를 넘기던 박 영감의 미간이 대번에 험악하게 일그러졌습니다. 그는 옆에서 화롯불을 뒤적이던 머슴 돌쇠의 등을 장죽으로 세차게 찌르며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에잉, 재수가 없으려니 대낮부터 웬 땡중이 남의 집 대문간에서 목탁을 두드려쌓는 게야! 돌쇠 너는 귀가 먹었느냐? 당장 나가서 소금을 한 바가지 뿌려 내쫓지 않고 무엇 하는 게야!"

    돌쇠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대문 쪽을 흘끔거렸습니다. 대문 틈새로 보이는 노승은 해진 잿빛 승복에 맨발에 가까운 헤진 짚신을 신고 있었는데, 백발이 성성한 얼굴에는 범상치 않은 기품과 인자한 미소가 서려 있었습니다.

    "나리, 저 스님은 아까 아랫마을 김 첨지 댁에서도 냉수를 한 사발 얻어 마시고 덕담을 남기셨다던데, 눈발까지 날리는 찬 날에 보리쌀 한 줌이라도 내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요. 마침 부엌에 행랑어미가 끓여놓은 시래기죽도 남았다고 하던데요."

    "이놈이 주인 재물을 제 것처럼 선심을 쓰려 드네! 내 집 곡식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아느냐? 쌀 한 톨이 다 내 피와 땀인데, 일도 안 하고 염불이나 외우는 중놈한테 줄 곡식이 어디 있단 말이냐! 게다가 늙은이 방에 불이나 지피라 일렀더니 부엌의 행랑어미란 년은 또 쓸데없이 죽을 쒀서 남 좋은 일을 시키려 들어? 당장 가서 쫓아내지 못할까!"

    박 영감의 고함 소리에 부엌에서 일하던 육십 줄의 늙은 종, 행랑어미가 치마에 물기를 닦으며 허겁지겁 달려 나왔습니다. 행랑어미는 어려서부터 이 집에서 종살이를 하며 손가락 마디가 다 굵어지도록 평생을 바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몫으로 나오는 거친 보리밥마저 반으로 줄여, 동구 밖 다리 밑에 사는 거지 아이들이나 길 잃은 나그네에게 몰래 쥐여주곤 하던 마음씨 고운 노파였습니다.

    '아이고, 저 인자하신 노승께서 찬 바람에 입술이 다 파랗게 얼어붙으셨네. 우리 영감님 성정에 곡식 한 톨 내어주실 리는 만무하고, 내 저승길 노잣돈 삼아 아껴둔 누룽지라도 몰래 싸 드려야겠다.'

    행랑어미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앞치마 속에 따뜻한 주먹밥 두 덩이를 감추고 대문간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박 영감이 보는 앞에서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스님을 타박하는 척하며 대문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스님, 우리 댁 나리께서는 워낙 불법을 멀리하시니 어서 다른 집으로 가보시지요. 자, 어서 걸음을 옮기시지요."

    행랑어미는 스님의 소매 속에 재빨리 따뜻한 주먹밥 꾸러미를 찔러 넣으며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습니다.

    "스님, 변변치 않은 거친 밥이오나 산길 가실 때 요기라도 하시옵소서. 부디 노여워 마시고 평안히 가시옵소서."

    노승은 행랑어미의 거칠고 갈라진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깊은 연못처럼 맑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합장하였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보살님의 그 따뜻한 밥 두 덩이가 이미 극락세계의 황금 기둥 두 개를 세웠소이다. 이승에서의 고단함이 머지않아 큰 복락으로 돌아올 것이니 부디 몸 건강히 지내시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사랑채 툇마루에서 이 광경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박 영감이 짚신을 거꾸로 끌고 마당으로 뛰어 내려왔습니다. 노승이 맨발이나 다름없는 찢어진 짚신을 신고 대문 문지방을 넘으려다 발을 헛디뎌 주춤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아니, 저 늙은 중이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쓰러져 송장이라도 될 작정인가! 재수 옴 붙게시리!"

    박 영감은 마당 구석 거름더미 옆에 팽개쳐 두었던, 개가 물어뜯어 앞코가 다 터지고 진흙이 말라붙은 낡은 헌 짚신 한 짝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노승의 등 뒤를 향해 거칠게 집어 던졌습니다.

    "이보시오, 객사하려면 저기 산 너머 남의 고을에 가서나 죽으시오! 내 집 앞에서 맨발로 얼어 죽어 원귀가 되면 내 재산에 해가 될 터이니, 이 헌 짚신이라도 꿰어 신고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란 말이오!"

    헌 짚신 한 짝이 툭 소리를 내며 노승의 발치에 떨어졌습니다. 노승은 화를 내기는커녕, 천천히 허리를 굽혀 진흙 묻은 짚신 한 짝을 정성스럽게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씩씩거리는 박 영감을 향해 돌아서며 기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시주님, 비록 꾸짖는 말씀과 함께 던져주신 헌 짚신 한 짝이오나, 이 늙은 중의 시린 발을 가려주셨으니 이 또한 시주는 시주입니다. 관음의 눈에는 버려진 짚신 한 올도 헛되이 보이지 않는 법이지요. 훗날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으실 때, 오늘 던져주신 이 짚신 한 짝이 시주님의 발밑을 지탱해 줄 것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노승은 그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는 한 발에는 자기가 신던 해진 신을, 다른 한 발에는 박 영감이 던져준 짝짝이 헌 짚신을 꿰어 신고 유유히 안개 낀 황톳길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박 영감은 대문을 거칠게 닫아걸며 침을 탁 뱉었습니다.

    "퉤! 미친 중놈 같으니라고. 헌 짚신 한 짝 주웠다고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돌쇠야, 대문 빗장 단단히 걸어 잠가라! 오늘 밤부터는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 못 하게 해!"

    하지만 박 영감은 꿈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역정을 내며 던져버린 그 볼품없는 짚신 한 짝이, 불과 며칠 뒤 자신이 마주하게 될 끔찍한 사후세계에서 유일한 생명줄이 될 줄은 말입니다.

    ※ 2: 한밤중에 찾아온 검은 그림자와 황천길 동행

    노승이 다녀간 지 사흘째 되던 날 밤이었습니다. 그날따라 하늘에는 별빛 하나 보이지 않고, 금강 쪽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창호지를 세차게 흔들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박 영감은 저녁상으로 올라온 기름진 꿩고기 전골과 약주를 배불리 먹고, 훈훈하게 불을 지핀 아랫목에 누워 산더미처럼 쌓인 전답 문서를 베개 삼아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암, 내 나이가 이제 예순을 훌쩍 넘겼지만 아직 기력이 장정 못지않으니 앞으로 이십 년은 더 살면서 천석꾼이 아니라 만석꾼이 되어야지. 내일 아침에는 건너마을 최 서방네 집을 차압하러 가야겠구나. 그놈이 이자를 사흘이나 연체했으니 본보기로 가마솥까지 다 떼어와야 정신을 차릴 것이야.'

    박 영감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막 잠이 들락 말락 하던 축시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안방의 촛불이 바람도 없는데 파르르 떨리더니 푸른 불꽃을 내며 스르르 꺼져버렸습니다. 방안의 온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살을 에듯 차가운 냉기가 문틈으로 밀려들었습니다.

    '으음, 아랫목이 왜 이리 얼음장 같으냐. 돌쇠 이놈이 장작을 아끼느라 군불을 덜 지폈나 보구나. 여봐라, 밖에 아무도 없느냐!'

    박 영감은 소리치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목구멍이 컥 막힌 듯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몸을 일으키려 힘을 주자 깃털처럼 가볍게 상체가 쑥 일어났는데, 무심코 아랫목을 내려다본 박 영감은 그 자리에서 기절초풍할 뻔하였습니다. 비단 이불 위에는 자기 자신이 눈을 감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억!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노릇이냐! 내가 여기 서 있는데, 저기 이불 속에 누워 있는 늙은이는 누구란 말이냐! 여봐라! 마님! 돌쇠야! 사람 살려라!'

    박 영감이 혼비백산하여 방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굳게 잠겨 있던 대문이 소리도 없이 스르르 열리더니 검은 도포 자락을 길게 끌며 키가 장대 같은 사내 둘이 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창이 넓은 검은 패랭이가 씌워져 있었고,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두 눈만은 시퍼런 인광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한 사내의 손에는 붉은 줄로 묶인 두꺼운 명부가 들려 있었고, 다른 사내의 손에는 차가운 쇠사슬과 붉은 오랏줄이 들려 있었습니다.

    "공주 땅에 사는 경주 박가 박달수, 올해 나이 예순셋. 금일 축시 삼각에 명줄이 다하였기로 염라대왕의 명을 받들어 데리러 왔노라."

    낮고도 서늘한 목소리가 마당 전체에 동굴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박 영감은 다리가 후들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손을 싹싹 빌었습니다.

    "나, 나리들! 어느 관아에서 나오신 포졸 나리들이신지 모르오나, 사람을 잘못 보셨소이다! 나는 이 고을 원님과도 호형호제하는 박 진사란 말이오! 내 곳간에 은자와 비단이 가득하니 원하는 대로 다 내어드릴 터이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그러자 쇠사슬을 든 사자가 코웃음을 치며 박 영감의 목덜미에 붉은 오랏줄을 휙 던져 감았습니다.

    "어리석은 망자여, 아직도 자기가 산 사람인 줄 아는가. 네 육신은 이미 숨이 끊어져 차가운 주검이 되었거늘, 어찌 이승의 썩어빠진 은자로 저승의 법도를 매수하려 드느냐! 잔말 말고 어서 앞장서라!"

    오랏줄이 당겨지자 박 영감의 영혼은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대문 밖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때 안채에서 부인의 자지러지는 통곡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 들렸습니다.

    "아이고, 영감! 영감, 이게 웬일이오! 저녁때까지만 해도 정정하던 양반이 왜 이리 몸이 싸늘하게 식었단 말이오! 돌쇠야, 행랑어미야! 영감님이 돌아가셨다!"

    박 영감은 피눈물을 흘리며 자기 집을 돌아보았으나, 이미 저승사자들의 발걸음은 구름을 타듯 빨라져 순식간에 공주 고을을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승의 풍경은 안개처럼 흐릿해지고, 발밑에는 날카로운 가시덤불과 시퍼런 독사가 우글거리는 황량한 황천길이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험하고 어두운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요. 날카로운 자갈과 가시에 맨발이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 고통에 박 영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습니다.

    "아이고, 발바닥이 다 찢어져 한 발짝도 더는 못 가겠소! 차라리 여기서 나를 죽여주시오!"

    사자가 채찍을 들어 내리치려던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디선가 맑은 연꽃 향기가 바람을 타고 스쳐 지나가더니, 하늘에서 진흙이 말라붙은 낡은 헌 짚신 한 짝이 툭 떨어져 박 영감의 왼발에 저절로 꿰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사흘 전, 박 영감이 노승의 등 뒤에 집어 던졌던 그 헌 짚신이었습니다.

    "허어, 이 지독한 구두쇠 영감이 이승에서 짚신 한 짝 시주한 공덕이 있어 한쪽 발이나마 가시밭길을 면하게 되었구나. 오른쪽 발은 네 죄업대로 피를 흘려야 할 것이나, 왼쪽 발에 신은 그 짚신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따라오너라!"

    박 영감은 한쪽 발에는 낡은 짚신을 신고, 다른 한쪽 맨발로는 피를 흘리며 절뚝거리는 기괴한 모습으로 칠흑 같은 저승의 관문인 귀문관을 향해 끌려갔습니다.

    ※ 3: 황금 대궐과 썩은 지푸라기, 뒤바뀐 저승의 곳간

    귀문관의 거대한 철문을 지나자, 안개가 자욱한 벌판 너머로 수만 채의 집과 곳간이 끝없이 늘어선 기묘한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집은 황금 기둥에 청기와를 얹어 대궐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옆의 곳간들에는 쌀가마니와 비단,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문밖으로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반면 어떤 집들은 기둥이 다 썩어 내려앉고 지붕에는 짚 한 오라기 없어 비바람이 그대로 들이치는 판잣집보다도 못한 흉가였습니다.

    박 영감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기와집과 곳간을 보자마자 눈이 번쩍 뜨여 저승사자의 소매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사자 나리, 저기 저 구름 위에 솟은 듯한 황금 기와집과 곡식이 가득 찬 곳간은 대체 누구의 것이오? 필시 나처럼 이승에서 천석, 만석을 누리던 대부호들의 저승 집이 아니겠소? 어서 나를 내 집으로 안내해 주시오!"

    명부를 든 저승사자가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여기는 이승의 사람들이 살아생전 지은 선업과 공덕으로 지어지는 '명부 곳간'이다. 이승에서 배고픈 이에게 밥 한 술을 덜어주면 이곳에 쌀 한 가마니가 쌓이고, 헐벗은 이에게 옷 한 벌을 입혀주면 이곳에 비단 백 필이 쌓이는 법이지. 네가 그리도 궁금해하니 저 황금 대궐의 문패를 직접 읽어보아라."

    박 영감은 절뚝거리며 황금 기와집 대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대문 위에는 옥으로 만든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 적힌 이름을 본 박 영감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 경악하였습니다.

    '공주 박 진사 댁 행랑어미 김씨의 집.'

    "아, 아니! 이럴 수가! 행랑어미 김씨라니, 우리 집 부엌에서 평생 불이나 지피고 남의 밑이나 닦아주던 그 천한 종년 말입니까? 사자 나리, 명부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소! 평생 땡전 한 푼 없이 누더기만 걸치고 살던 종년의 집이 어찌 이리 대궐 같을 수가 있단 말이오!"

    사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꾸짖었습니다.

    "네 이놈, 어리석은 소리를 그치라! 그 노파는 비록 신분은 천하고 가진 것은 없었으나, 자기 입에 들어갈 거친 보리밥을 쪼개어 굶주린 과객과 고아들을 먹였고, 추운 겨울이면 자기 솜저고리를 벗어 얼어 죽어가는 거지를 덮어주었다. 그 피눈물 나는 선행이 하늘에 닿아 저승에 이토록 거대한 황금 대궐과 만석의 곳간을 이룬 것이다. 특히 사흘 전, 노승에게 건넨 따뜻한 주먹밥 두 덩이가 저 대문 앞의 가장 큰 황금 기둥 두 개가 되었느니라!"

    박 영감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사흘 전 대문간에서 행랑어미가 노승의 소매에 무언가를 찔러 넣던 장면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그렇다면 천석꾼인 내 집과 곳간은 어디에 있소? 내 이승의 곳간에는 쌀이 수천 가마니요, 은자가 수만 냥이었으니 저 행랑어미의 집보다 열 배는 더 클 것이 아니오!"

    "흥,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려무나. 저기 시궁창 옆에 있는 곳이 바로 네가 영원히 머물 집과 곳간이다."

    사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악취가 진동하는 구정물 도랑 옆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썩은 나뭇가지 서너 개가 얼기설기 엮여 쓰러져가는 개집만 한 움막이 있었고, 그 옆에 서 있는 곳간이라는 것은 벽이 다 무너져 내린 채 썩은 지푸라기 몇 줌과 쥐똥만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헉! 이, 이게 내 집이란 말이오? 이 썩은 지푸라기만 있는 곳이 천석꾼 박 진사의 곳간이란 말이오? 말도 안 되오! 내 재산이 얼마나 많은데!"

    박 영감이 땅을 치며 통곡하자 사자가 명부를 펼쳐 보이며 일갈했습니다.

    "네가 이승에서 모은 재산은 가난한 소작농들의 피눈물을 쥐어짜 만든 원한의 덩어리일 뿐, 남에게 단 한 톨의 쌀도 베푼 적이 없으니 저승으로 넘어온 공덕이 있을 리가 있느냐! 그나마 저 움막 기둥 밑을 보아라. 진흙 묻은 헌 짚신 한 짝이 고여 있지 않느냐? 네가 사흘 전 노승에게 역정을 내며 던진 그 짚신 한 짝이 아니었더라면, 저 움막마저 이미 무너져 내려 너는 구정물 속에 처박혔을 것이다!"

    박 영감은 무너져 내리는 움막 기둥 밑을 간신히 받치고 있는 짝짝이 헌 짚신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이승에서 자신이 누렸던 부귀영화가 저승에서는 한 줌의 먼지보다도 못하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오며, 평생 처음으로 뼈를 깎는 듯한 후회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 4: 업경대 앞에 드러난 죄목과 관음보살의 자비

    저승사자들에게 끌려 당도한 곳은 구름보다 높은 흑석 기둥들이 줄지어 선 염라대왕의 심판정, 명부전이었습니다. 전각 안에는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화로를 사이에 두고 우두와 마두를 한 옥졸들이 무시무시한 창을 들고 서 있었으며, 단상 가장 높은 곳에는 면류관을 쓰고 붉은 곤룡포를 입은 염라대왕이 우레 같은 위엄을 뿜어내며 앉아 있었습니다.

    "죄인 박달수는 고개를 들어라!"

    염라대왕의 호령 한마디에 명부전 기둥들이 우르르 떨렸습니다. 박 영감은 이마가 바닥에 깨지도록 조아리며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습니다.

    "네 이놈 박달수야! 하늘이 너에게 천석의 재물을 내려준 것은, 너 혼자 배를 두드리며 호의호식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주변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라고 잠시 맡겨둔 것이거늘! 너는 어찌하여 그 재물로 고리대를 놓아 남의 가정을 파탄 내고, 대문 밖에서 얼어 죽어가는 과객에게 찬물 한 대접조차 아꼈단 말이냐!"

    "대, 대왕마마! 소인이 어리석어 재물에 눈이 멀었사옵니다. 하지만 소인은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사람을 죽인 적은 결코 없사옵니다! 제발 참작하여 주시옵소서!"

    박 영감이 비명을 지르듯 변명하자, 염라대왕이 옆에 서 있던 판관에게 눈짓을 보냈습니다.

    "저 어리석은 죄인을 업경대 앞에 세워라! 이승에서 지은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제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하라!"

    옥졸들이 박 영감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커다란 수정 거울, 업경대 앞에 무릎을 꿇렸습니다. 거울 속에는 박 영감의 지난 일생이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오 년 전 흉년이 들었을 때, 이자 쌀 한 가마니를 못 갚았다고 한겨울에 소작농 장 서방의 일가족을 길거리로 내몰아 그 어린 아들이 얼어 죽게 만든 일, 곡식 되박의 밑바닥을 깎아내어 빌려줄 때는 적게 주고 받을 때는 큰 되박으로 받아낸 일 등, 그가 잊고 있었던 추악한 악행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비춰졌습니다.

    거울 속에서 얼어 죽은 아이의 어미가 피눈물을 흘리며 박 영감을 저주하는 모습이 나오자, 박 영감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아악! 그만! 제발 그만 보여주십시오! 제가 죽일 놈입니다! 제가 사람 탈을 쓴 짐승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이 책상을 탁 치며 추상같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보았느냐! 칼로 사람을 찌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다. 구제할 힘이 있으면서도 욕심에 눈이 멀어 남을 굶어 죽게 방치한 것 또한 무거운 살생의 죄니라! 여봐라, 저 죄인 박달수를 당장 아귀지옥과 한빙지옥으로 끌고 가 만 년 동안 굶주림과 추위의 고통을 겪게 하라!"

    옥졸들이 시퍼런 삼지창을 들고 박 영감의 팔다리를 낚아채려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명부전 천장에서 오색찬란한 서기가 비치더니, 은은한 연꽃 향기와 함께 황금빛 구름을 타고 백의를 입은 관음보살이 사뿐히 내려오셨습니다. 염라대왕조차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예를 갖추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 어인 일로 이 어두운 심판정까지 왕림하셨나이까?"

    관음보살의 얼굴을 우러러본 박 영감은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그 자비롭고 고요한 눈매는 다름 아닌 사흘 전 자기 집 대문간에서 시주를 청하던 그 백발의 노승과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관음보살이 부드럽고 맑은 음성으로 염라대왕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여, 이 어리석은 중생의 죄업이 태산처럼 무거운 것은 사실이나, 아직 그에게 작은 불씨 하나가 남아 있소이다. 사흘 전 내가 늙은 승려의 몸으로 이 자의 집을 찾았을 때, 비록 입으로는 모진 말을 뱉었으나 내 시린 발을 보고 헌 짚신 한 짝을 던져준 인연이 있소. 또한 이 자의 본래 수명은 일흔 살로 아직 칠 년이 남아 있거늘, 쌓인 원한이 명줄을 앞당겨 끊어놓은 것이오."

    염라대왕이 고개를 갸웃하며 여쭈었습니다.

    "하오나 보살님,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없이 던진 헌 짚신 한 짝으로 어찌 저 태산 같은 죄업을 씻을 수 있겠나이까?"

    "비록 던진 마음은 거칠었으나, 그 짚신이 이 중생의 왼발을 가시밭길에서 구하였고 저승 움막의 기둥을 받쳤으니 인과의 씨앗은 분명히 싹튼 것이오. 이 자가 업경대 앞에서 진심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뉘우치고 있으니, 다시 한번 이승으로 돌려보내 스스로 빈 곳간을 채울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떻겠소?"

    관음보살의 중재에 염라대왕은 한참 동안 수염을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 5: 염라대왕의 사흘 말미와 관 뚜껑을 열고 깨어난 망자

    잠시 후, 염라대왕이 판관에게 명부를 가져오게 하더니 붉은 붓을 들어 박 영감의 이름 옆에 무언가를 굵게 적어 내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서슬 퍼런 눈으로 박 영감을 내려다보며 엄중히 선언했습니다.

    "죄인 박달수는 똑똑히 들으라! 관세음보살님의 넓으신 자비와 네가 던진 헌 짚신 한 짝의 인연을 보아, 내 특별히 너의 환생을 허락하노라. 허나 너의 죄가 완전히 사해진 것이 결코 아니다! 너에게 이승으로 돌아가 머물 수 있는 말미를 주되, 만약 네가 이승으로 돌아가서도 또다시 재물에 집착하고 저승의 텅 빈 곳간을 채우지 못한다면, 그때는 칠 년 뒤가 아니라 사흘 뒤에 당장 네 혼백을 찢어 무간지옥에 처넣을 것이다!"

    박 영감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왕마마! 관세음보살님,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소인이 이승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제 손가락을 잘라서라도 맹세코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누어 주겠사옵니다! 결코 식언하지 않겠사옵니다!"

    "그 맹세를 잊지 말라! 판관은 들어라. 이 자가 저승에서 본 것을 잊지 않도록 망각의 물인 맹파탕을 먹이지 말고 그대로 돌려보내되, 네 집 행랑어미 김씨의 곳간에서 쌀 서 말만 잠시 꾸어다 이 자의 저승 노잣돈으로 삼게 하라. 이승에 돌아가거든 그 쌀값부터 행랑어미에게 백 배로 갚아야 할 것이다!"

    판관이 명부를 덮고 소매 속에서 황금빛 부적을 꺼내 박 영감의 이마에 탁 붙였습니다.

    "사자들은 죄인 박달수를 데리고 즉시 이승으로 귀환하라! 이미 주검이 식은 지 사흘이 지나 오늘 정오면 출상을 하여 땅에 묻힐 시각이니, 한시바삐 서둘러라!"

    저승사자들이 박 영감의 양팔을 잡아채어 허공으로 뛰어올랐습니다. 바람 소리가 귓전을 찢을 듯이 울리고, 눈앞이 캄캄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찔한 감각이 이어졌습니다.

    그 시각, 이승의 공주 박 진사 댁 마당은 출상 준비로 온 집안이 곡소리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삼일장을 치르고 이제 막 상여에 관을 실어 선산으로 떠나려는 참이었습니다. 대청마루 밑에는 붉은 칠을 한 두꺼운 소나무 관이 놓여 있었고, 목수가 마지막으로 관 뚜껑에 긴 쇠못을 박으려고 망치를 치켜들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영감! 평생 돈 모으느라 고운 옷 한 번 제대로 못 입고 가시더니, 이리 허망하게 황천길로 가시면 어찌합니까! 아이고, 아이고!"

    부인과 자식들이 상복을 입고 통곡하는 가운데, 마당 구석에서는 행랑어미 김씨가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염불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우리 영감님, 이승에서 인색하셨던 죄업 다 씻으시고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옵소서.'

    목수가 관 뚜껑 모서리에 쇠못을 대고 망치를 힘껏 내리치려던 바로 그 찰나였습니다.

    "크아악! 여봐라, 숨 막힌다! 관 뚜껑을 열지 못할까!"

    칠성판 위에서 죽어 있던 박 영감의 가슴이 불룩 솟구치더니, 관 안에서 우당탕탕 벽을 치는 소리와 함께 쉰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망치를 들었던 목수는 기겁을 하여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자빠졌고, 곡을 하던 상주들과 조문객들은 혼비백산하여 마당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허억! 귀, 귀신이다! 죽은 박 영감이 시신이 되어 일어났다!"

    온 마당이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오직 행랑어미와 머슴 돌쇠만이 덜덜 떨면서도 부지런히 달려가 아직 못이 다 박히지 않은 관 뚜껑을 힘껏 밀어젖혔습니다. 관 뚜껑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수의를 입고 얼굴에 삼베 보자기를 뒤집어쓴 박 영감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습니다.

    박 영감은 스스로 얼굴의 삼베를 벗어던지고 눈부신 햇살 아래 마당을 둘러보았습니다. 파란 가을 하늘, 정겨운 기와지붕, 그리고 겁에 질려 자기를 바라보는 가족들과 하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자기 왼발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수의 버선 끝에는 저승의 가시밭길을 걸었던 흔적인 듯 진흙 가루가 희미하게 묻어 있었습니다.

    "내가… 내가 정말로 살아 돌아왔구나! 염라대왕님, 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

    박 영감은 관 밖으로 기어 나와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늙은 행랑어미 김씨의 앞으로 비틀거리며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가족과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평생 종으로 부리던 행랑어미의 발밑에 털썩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이고, 영감님! 이, 이게 무슨 변고이십니까! 어찌 소인 같은 천한 종년에게 절을 하십니까요! 노망이 나셨습니까, 귀신이 들리셨습니까!"

    행랑어미가 기겁하여 몸을 피하려 하자, 박 영감은 행랑어미의 거친 두 손을 덥석 붙잡고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외쳤습니다.

    "할멈! 이제부터 자네는 내 집의 종이 아니라 내 생명의 은인이자 큰 누님이시네! 내가 저승에 가서 자네의 황금 대궐을 보았고, 자네 곳간의 쌀 서 말을 꾸어서 노잣돈을 쓰고 돌아왔네! 여봐라, 아들놈은 어디 있느냐! 당장 곳간 열쇠와 전답 문서를 모두 이리로 가져오너라!"

    ※ 6: 텅 빈 곳간을 채운 나눔과 평온한 마지막 안식

    관 속에서 사흘 만에 살아 돌아온 박 영감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안의 모든 곳간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르는 장남과 부인을 불러 앉히고, 자신이 사흘 동안 저승에 끌려가 겪었던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소상히 들려주었습니다. 행랑어미의 황금 기와집과 자기 몫으로 놓여 있던 썩은 지푸라기 움막, 그리고 업경대에 비친 참혹한 죄상과 관음보살의 헌 짚신 이야기를 들은 가족들은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들은 바대로다. 내 평생 너희에게 물려주려고 피눈물 나게 모은 이 천석의 재산이, 저승에서는 나를 아귀지옥의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 무거운 바윗덩어리에 불과하더구나. 너희도 내 자식이라면 아비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을 터, 오늘부로 우리 집 재산의 구 할을 세상에 내어놓을 것이다!"

    박 영감은 그 길로 대청마루에 화로를 가져오게 한 뒤, 그동안 가난한 농민들의 피를 빨아먹던 수백 장의 고리대 차용증서와 장리쌀 문서를 주저 없이 불길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종이가 타오르며 검은 재가 되어 하늘로 흩어지자, 박 영감의 가슴을 짓누르던 천근만근의 돌덩이가 씻은 듯이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박 진사 댁 대문 앞에는 큰 방이 붙었습니다.

    "그동안 박 진사 댁에 빚을 진 모든 소작농과 백성들은 오늘부터 한 푼도 갚지 않아도 좋다! 또한 집에 양식이 떨어진 이들과 홀로 사는 노인, 부모 없는 아이들은 누구나 그릇을 들고 와 원하는 만큼 쌀과 베를 가져가라!"

    처음에는 죽었다 살아난 구두쇠 영감이 미쳐서 헛소리를 한다고 반신반의하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박 영감은 수의 대신 단정한 무명옷을 차려입고 직접 곳간 앞에 서서, 몰려든 가난한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쌀을 퍼주었습니다. 특히 오 년 전 자신이 내쫓아 어린 아들을 잃게 만들었던 장 서방 내외를 찾아가 땅에 이마를 대고 사죄하며, 비옥한 논 스무 마지기와 기와집 한 채를 아무 조건 없이 내어주었습니다.

    또한 평생 자기 집에서 헌신한 행랑어미 김씨와 머슴 돌쇠를をはじめ, 모든 노비들의 종문서를 불태워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특히 행랑어미에게는 저승에서 꾸어 쓴 쌀 서 말의 값을 백 배로 갚는다며 백미 삼백 가마니와 노후를 편안히 보낼 아담한 집을 마련해 주었고, 죽을 때까지 집안의 큰어른으로 극진히 모셨습니다.

    박 영감의 변화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집 사랑채를 헐어 길 가는 나그네와 스님들이 언제든 무료로 묵어가며 따뜻한 국밥을 먹을 수 있는 '보현객사'라는 쉼터를 만들었고, 앞마당에는 늘 튼튼하게 삼은 새 짚신 수백 켤레를 걸어두어 신발이 해진 과객이라면 누구나 마음껏 신고 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소문은 충청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박 영감의 집에는 날마다 고마움을 전하는 사람들과 덕담을 남기는 스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재산은 예전의 십 분의 일로 줄어들어 박 영감의 밥상에는 고기반찬 대신 소박한 나물과 된장국만 올랐으나, 그의 얼굴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온화한 미소와 평안한 빛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그렇게 칠 년의 세월이 물 흐르듯 흘러갔습니다. 박 영감의 나이 일흔이 되던 해 봄날, 마당에 매화꽃이 만발한 어느 따스한 오후였습니다. 박 영감은 꿈결 속에서 사흘 전처럼 은은한 연꽃 향기를 맡았습니다. 눈을 떠보니 마당 한가운데, 칠 년 전 자신을 끌고 갔던 그 저승사자 두 명이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쇠사슬이나 오랏줄을 들고 있지 않았으며, 얼굴에는 무서운 기색 대신 정중한 미소가 서려 있었습니다.

    "박 처사님, 염라대왕께서 약속하신 칠 년의 세월이 다하여 모시러 왔습니다. 지난 칠 년 동안 처사님께서 이승에서 베푸신 공덕으로, 저승의 그 허름하던 움막이 이제는 백옥으로 지은 구층 누각이 되었고, 텅 비었던 곳간에는 황금과 곡식이 차고 넘쳐 문을 닫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박 영감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여보, 그리고 얘들아. 이제 내가 진짜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구나. 지난 칠 년 동안 남을 도우며 살아보니, 내 손에 쥐고 있을 때보다 남의 손에 건네줄 때 마음이 백 배는 더 부유하고 행복하더구나. 너희도 부디 내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거울삼아, 평생 이웃과 나누며 저승의 곳간을 채우는 삶을 살거라."

    박 영감은 가족들의 손을 한 번씩 따뜻하게 잡아준 뒤, 방 한구석에 고이 모셔두었던 새 짚신 한 켤레를 가슴에 안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마지막 숨을 내쉬자, 방안 가득 그윽한 연꽃 향기가 피어올랐으며, 그의 잠든 얼굴은 마치 봄날의 햇살을 머금은 듯 평온하고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이후 박 영감의 후손들은 그의 유언을 받들어 대대로 적선을 베풀었으며, 공주 땅에서 가장 존경받는 명문가로 오래도록 번창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들려드린 『청구야담』 속 구두쇠 영감의 저승 체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예로부터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즉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은 통장의 숫자나 넓은 집이 아니라, 살아생전 누군가에게 건넸던 따뜻한 말 한마디와 작은 나눔의 기억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밤, 내 마음의 곳간에는 어떤 것들이 채워지고 있는지 한 번쯤 돌아보는 평안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야기가 마음에 드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리며, 저는 다음 시간에 더욱 깊고 재미있는 옛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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