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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을 잊게 하는 망각의 물 한 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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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83자)
환생하기 직전, 저승 마지막 관문에서 반드시 마셔야 하는 물 한 그릇이 있다고 합니다. 이 물을 마시면 전생의 기억이 깨끗이 지워진다지요. 이름도, 얼굴도, 사랑한 것도 전부요. 그런데 마흔 해를 아우라지 나루에서 사람을 건네던 늙은 뱃사공 하나가, 그 표주박 앞에서 손을 뒤로 감췄답니다. "저는 그 물 못 마십니다." 삼십 년 전 강물이 데려간 아홉 살 아들, 세상에서 그 아이를 기억하는 사람이 자기 하나뿐이었거든요. 저승은 어째서 망자에게 망각을 마시게 하는 걸까요. 그리고 사흘 뒤, 우물가에서 벌어진 일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 1: 마흔 해 뱃사공, 망우정에 서다
강원도 정선 땅, 두 물줄기가 만나 하나로 흐른다는 아우라지 나루에 정갑세라는 늙은 뱃사공이 살았더랍니다.
예순셋이었지요. 손등은 강바람에 터져 쩍쩍 갈라졌고, 손바닥은 삿대에 닳고 닳아 나무껍질처럼 두꺼웠더랍니다.
마흔 해를 하루같이 그 강에서 사람을 건넸습니다. 장에 가는 아낙도, 가마 타고 시집가는 색시도, 꽃상여에 실려 가는 망자도 전부 그 배를 탔지요.
"아우라지에서 정 씨 배는 절대 안 뒤집힌다."
동네 사람들 입버릇이 그랬답니다. 물살이 사나운 날이면 다들 강가에 쭈그려 앉아 정 씨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건넜으니까요.
그런데 그 정 씨가, 유월 어느 새벽에 배 위에서 그대로 숨을 거두었더랍니다.
삿대를 짚고 선 채로요. 주인 잃은 배는 저 혼자 물살을 타고 흘러가 기슭 자갈밭에 코를 박았고, 사람들이 달려갔을 때 노인은 이미 굳어 있었지요.
"고생만 하시다 편히 가셨네."
"평생 강만 들여다보고 사시더니, 결국 강에서 가시는구먼."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요, 정작 정갑세 본인은 하나도 편하지가 않았답니다.
눈을 떠 보니 강가였습니다. 그런데 아우라지가 아니었지요.
물빛이 없었습니다. 물소리도 없었고요. 발목까지 차오른 안개가 젖지도 않은 채 다리를 휘감았고, 흰 자갈길이 끝도 없이 앞으로 뻗어 있었더랍니다.
그 길 위를 사람들이 줄을 지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같이 말이 없었지요. 앞사람 뒤통수만 보면서, 제 발끝만 보면서요.
'여기가 어디여.'
갑세가 두리번거리는데,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답니다.
"정갑세."
돌아보니 검은 도포에 검은 갓을 쓴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얼굴은 젊은데 눈매는 천 년 묵은 바위 같았지요.
"나는 여산이라 한다. 너를 데리러 왔다."
갑세가 제 손을 내려다봤습니다. 굳은살이 그대로 있더랍니다. 그런데 갈라졌던 자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요.
"내가 죽었구먼유."
"그렇다."
"그럴 줄 알았소. 새벽에 삿대를 짚는데 갑자기 강물이 참 곱더라고. 마흔 해를 봤는데 그날따라 유독 곱길래, 아 이거 오늘이구나 싶었지."
여산이 저를 데리러 온 망자를 한참 쳐다봤습니다. 우는 자, 발버둥 치는 자, 못 믿겠다며 주저앉는 자는 숱하게 봤지만, 이렇게 담담하게 제 죽음을 인정하는 자는 흔치 않았거든요.
"미련이 없는 모양이구나."
"미련이야 왜 없겠소."
갑세가 씩 웃었답니다.
"근데 뱃사공이 나룻배에서 죽은 건 잘 죽은 거요. 논에서 죽은 농사꾼, 가마 앞에서 죽은 대장장이, 다 잘 죽은 거지."
"따라오너라. 갈 길이 멀다."
그렇게 늙은 뱃사공과 저승차사가 나란히 걷기 시작했더랍니다.
안개 자욱한 자갈길을 얼마나 걸었을까요. 갑세가 물었습니다.
"저승이 멀우?"
"관문이 셋이다. 첫 관문에서 이름을 대고, 둘째 관문에서 죄와 공을 저울에 올린다."
"세 번째는?"
여산이 잠깐 말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물을 마시는 곳이다."
"물이유? 목이 마른 것도 아닌디."
"가 보면 안다."
길이 오르막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안개가 걷히자 눈앞에 널따란 마당이 나타났는데요, 그 한가운데에 낡은 우물이 하나 있었더랍니다.
우물가에는 기와를 인 작은 정자가 서 있었고, 정자 기둥에 나무판 하나가 매달려 있었지요. 거기 새겨진 글자가 두 자였습니다.
망우(忘憂).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지요.
그 우물 앞에 망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습니다. 아까 자갈길에서 보던 그 사람들이었지요. 노인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갓난쟁이를 안은 아낙도 있었더랍니다.
그리고 우물 옆 나무 등걸에 웬 할멈이 하나 앉아 있었습니다.
등이 활처럼 굽고, 머리는 눈서리처럼 희고, 얼굴 주름은 골이 하도 깊어서 그 안에 그늘이 고여 있는 것 같았지요. 그 할멈이 표주박으로 우물물을 떠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네고 있었답니다.
망자가 표주박을 받아 들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자, 와.
그 사람 얼굴이 스르르 풀리더랍니다.
잔뜩 찌푸리고 있던 미간이 펴지고, 악물고 있던 턱이 느슨해지고, 눈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것이 마르면서요.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백 리를 걸어온 사람이 드디어 지게를 내려놓는 것처럼 어깨가 툭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고는 아무 표정 없이, 아주 편안한 얼굴로 정자 뒤편 문을 향해 걸어갔지요.
그 문 위에도 글자가 있었습니다.
환생(還生).
"저게 뭐요?"
갑세가 물었습니다.
"망각의 물이다."
여산이 말했습니다.
"저 물 한 그릇을 마시면 전생의 기억이 깨끗이 지워진다. 이름도, 얼굴도, 사랑한 것도, 미워한 것도, 아팠던 것도 전부."
갑세의 걸음이 뚝 멈췄습니다.
"전부유?"
"전부다."
"아니, 왜 그런 짓을 헌대유."
"저 문을 넘어가려면 반드시 마셔야 한다. 저것이 규칙이다. 염라대왕께서 정하신 법도다."
줄은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그런데 이상한 것이, 아무도 싫다고 하지 않더랍니다. 오히려 표주박을 받아 드는 손이 다들 급했지요. 어떤 젊은 사내는 뺏듯이 받아서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하나도 안 무겁네! 하나도 안 무거워!"
그러고는 껑충껑충 뛰다시피 환생문으로 들어가더랍니다.
'다들 잊고 싶었던 게로구나.'
갑세는 그 광경을 오래 지켜봤습니다.
'하기야, 이승에서 살아 본 사람 치고 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줄이 자꾸 짧아졌습니다. 앞에 스무 명, 열 명, 다섯 명.
그리고 마침내 갑세 차례가 되었지요.
할멈이 고개를 들지도 않고 표주박을 내밀었습니다. 표주박 안에 담긴 물은 이상하게도 색이 없었습니다. 맑은 게 아니라, 아예 색이라는 것이 없었지요. 들여다보는데 제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답니다.
갑세는 표주박을 받지 않았습니다.
손을 뒤로 감췄지요.
"저는 그 물 못 마십니다."
우물가가 조용해졌습니다.
안개가 딱 멎었고, 뒤에 늘어선 망자들의 웅성거림도 뚝 끊겼지요. 옆에 섰던 여산의 갓 그림자가 흠칫 흔들렸습니다.
할멈이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갑세를 똑바로 쳐다봤지요.
움푹 팬 눈두덩 안에서, 늙은 눈동자 두 개가 조용히 빛나고 있었더랍니다.
"삼백 년 만이구나."
할멈의 목소리는 마른 갈대 부딪는 소리 같았습니다.
"이 우물 앞에서 손을 뒤로 감춘 놈이."
※ 2: 삼십 년 전 유월 스무날
할멈이 표주박을 무릎에 내려놓았습니다.
"이유를 대라."
"이유가 있어야 헙니까."
"있어야지. 삼천 년을 이 물을 떠 줬다. 이유 없이 안 마시겠다는 놈은 그냥 목구멍에 부어 버렸어."
갑세가 침을 삼켰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지요.
"제가 잊으면, 그 아이가 세상에서 아주 없어집니다."
"누구 말이냐."
"제 아들이유."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늙은 뱃사공의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앉았답니다. 마흔 해 동안 삿대를 짚어 온 어깨가요.
삼십 년 전 유월 스무날이었습니다.
그해 장마는 유난히 사나웠지요. 사흘 밤낮을 퍼붓더니 아우라지 물이 시뻘겋게 불어서, 강이 아니라 성난 짐승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 강 건너 마을에 혼사가 있었더랍니다.
"정 씨! 딱 한 번만 건네주게!"
"오늘은 안 되유. 물살이 사람 잡아유."
"신랑이 이쪽에 있고 신부가 저쪽에 있는데 어쩌란 말인가! 자네 아니면 이 강 건널 사람이 없네!"
그렇게 사정사정하는 통에, 갑세가 결국 삿대를 들었습니다.
배에 열둘이 탔습니다. 잔치에 갈 아낙들, 짐꾼들, 그리고 코흘리개들 서넛이요.
그중에 갑세의 아들 덕이도 있었지요. 그해 아홉 살이었습니다.
"아부지, 나도 갈래."
"안 돼. 오늘은 물이 험혀."
"아부지 배는 안 뒤집힌다며. 사람들이 다 그러던디."
그 말에 갑세가 그만 웃고 말았답니다. 그러고는 아들 등을 툭 밀어 배에 태웠지요.
'그때 태우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게 삼십 년 동안 갑세의 명치에 박혀 있던 못이었습니다.
강 한복판까지는 잘 갔습니다. 그런데 위쪽에서 떠내려온 통나무가 뱃전을 정통으로 들이받았지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옆으로 확 기울었습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에 쏟아졌지요.
갑세는 삿대를 던지고 물로 뛰어들었습니다.
"잡아! 손 내밀어!"
제일 먼저 손에 닿은 것은 여섯 살배기 계집아이였습니다. 또순이라고, 아랫마을 방물장수네 막내딸이었지요.
물살 바깥쪽으로 밀려 나온 아이라 손이 먼저 닿았던 겁니다. 딱 그 이유뿐이었어요.
갑세는 그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뒤집힌 배 위로 밀어 올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렸는데요.
저만치 물살 한복판에서, 덕이가 아버지를 보고 있더랍니다.
울지도 않고요.
그 조그만 게, 물을 켜면서도 아버지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었답니다.
"덕아!"
갑세가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흙탕물 한 덩이가 확 덮쳤고, 아이가 사라졌지요.
그날 갑세는 서른 번을 넘게 물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팔을 붙들고 말릴 때까지요. 나중에는 손톱이 다 뒤집혀서 열 손가락에서 피가 났더랍니다.
열두 사람 중에 열하나를 건졌습니다.
못 건진 하나가, 제 아들이었지요.
시신도 못 찾았습니다. 사흘을 하류로 훑고, 열흘을 훑고, 한 달을 훑었는데도요.
아내는 그해 가을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이듬해 봄에 갔습니다. 가면서 그러더랍니다.
"임자, 나는 덕이 찾으러 가는 거니께 너무 서러워 말어."
그 뒤로 갑세는 삼십 년을 혼자 살았습니다.
그런데요, 이 노인이 참 이상한 짓을 했더랍니다.
날마다 해가 지면 강가 자갈밭에 나가 앉았지요. 그러고는 강물을 보면서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답니다.
"덕아."
그러고는 한참 있다가, 또.
"덕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삼십 년을 그랬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처음에는 안쓰러워하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했지요.
"아 저 양반 또 아들 부르네."
"불러야지. 그거라도 안 하면 어떻게 사나."
그리고 또 하나, 동네 사람들이 모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유월 스무날이 되면 나루에 낯선 손님이 하나 왔더랍니다.
삿갓을 푹 눌러써서 얼굴이 안 보이는 사내였지요. 말 한마디 없이 배에 올라 강을 건너고, 내릴 때 뱃삯 대신 조약돌 하나를 뱃전에 딱 올려놓고 갔습니다.
"여보슈, 이게 뭐유?"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지요.
처음에는 미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그날에도 왔고, 그 이듬해에도 왔더랍니다.
갑세는 그 조약돌을 버리지 못하고 나무 상자에 하나씩 모아 두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저도 몰랐지요. 그냥 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답니다.
그 상자에 조약돌이 서른 개가 찼을 때, 갑세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갑세가 날마다 아들 이름을 부른 진짜 까닭은 따로 있었답니다.
"내가 안 부르면요."
갑세가 할멈을 보며 말했습니다.
"아무도 그 이름을 안 부르니께요."
우물가가 조용했습니다.
"덕이를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저 하나 남았거든유. 제 처도 갔고, 그 애 동무들도 다 크고 흩어졌고, 시신도 없으니 무덤도 없고, 위패도 없구요. 이름 석 자 적힌 종이 한 장이 없어유."
갑세가 제 가슴팍을 툭툭 쳤습니다.
"여기에만 있슈. 여기에만."
그러고는 표주박을 턱으로 가리켰지요.
"근디 그 물을 마시면 여기 것까지 지워진다면서유. 그럼 그 애가 어떻게 되겠슈. 세상 천지에 그 애가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는 거유. 있었던 적도 없는 게 되는 거유."
"내가 마지막 남은 기억이유."
늙은 뱃사공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니께 나는 못 마셔유."
뒤에 늘어선 망자들 사이에서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가 났습니다.
여산이 갓을 눌러쓰며 고개를 살짝 돌렸지요. 저승차사가 망자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면 안 되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정작 할멈은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 오래된, 지겹다는 표정으로 갑세를 올려다봤지요.
"삼백 년 전 그놈도 딱 그 소리를 했다."
"...예?"
"제가 마지막 기억이라고. 제가 마시면 그 사람이 아주 없어진다고."
할멈이 표주박을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놈이 어떻게 됐는지 아느냐."
갑세가 마른침을 삼켰습니다.
할멈이 굽은 손가락으로 정자 뒤쪽, 환생문과는 정반대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안개 속으로 좁은 내리막길 하나가 나 있었지요. 그 길 끝에서, 아주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답니다.
사람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같기도 한 것이요.
"저 아래로 내려가 보아라."
할멈이 말했습니다.
"거기가 불망곡(不忘谷)이다. 잊지 못한 것들이 가는 골짜기지."
※ 3: 불망곡, 돌이 되어 가는 사람들
갑세가 그 내리막길을 내려갔습니다. 여산이 말없이 뒤를 따랐지요.
길은 생각보다 짧았습니다. 그런데 그 끝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늙은 뱃사공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답니다.
골짜기였습니다.
넓고 우묵한 골짜기 가득, 사람들이 서 있었지요.
앉은 사람, 선 사람, 무릎을 꿇은 사람,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사람. 그런데 하나같이 꼼짝을 안 하더랍니다.
가까이 가 보니, 웅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그럴 애가 아닌디..."
"내가 그 말만 안 했으면, 내가 그 말만 안 했으면..."
"삼월아. 삼월아. 삼월아."
저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지요. 백 번, 천 번, 만 번을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 사람들 발목이 흙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아니, 파묻힌 게 아니었어요.
발목이 돌로 변해 있었던 겁니다.
갑세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돌이 된 부분이 위로 올라와 있더랍니다. 무릎까지 굳은 사람, 허리까지 굳은 사람, 가슴까지 굳은 사람.
그리고 골짜기 제일 안쪽에는요.
사람 모양을 한 바위들이 빼곡히 서 있었습니다.
얼굴 생김새까지 그대로 남은 바위들이었지요. 눈을 부릅뜬 바위, 입을 벌린 바위, 두 팔로 무언가를 안고 있는 바위.
그중 하나는 아기를 안은 여인의 모습이었는데, 팔 안쪽이 텅 비어 있었더랍니다. 안고 있던 것은 진작 사라지고, 안고 있던 자세만 돌로 남은 거지요.
갑세가 그중 아직 허리까지만 굳은 노인 앞에 쭈그려 앉아 봤습니다.
"어르신, 여기 계신 지 얼마나 되셨슈?"
노인이 눈을 껌뻑였습니다. 사람 말을 알아듣기는 하는 모양이었지요.
"...모르겄네. 겨울이 몇 번 왔는지도 모르겄어."
"뭘 그렇게 잊지 않으려고 버티신대유?"
노인의 입가가 아주 힘겹게 움직였습니다.
"우리 딸이 시집가는 걸 못 보고 왔어. 그 애 얼굴을 잊으면, 나중에 만나도 못 알아볼 거 아닌가."
그러고는 다시 웅얼거리기 시작했지요.
"순아. 순아. 순아."
갑세가 그 노인의 어깨를 만져 봤습니다. 어깨가 벌써 차갑고 딱딱했더랍니다.
갑세의 등줄기가 서늘해졌습니다.
"이 사람들은..."
"물을 마시지 않은 자들이다."
어느새 뒤에 와 있던 할멈이 말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내려온 모양이었지요.
"기억은 무겁다. 이승에서는 몸이 그 무게를 나눠 지는데, 여기서는 넋 혼자 그것을 다 진다. 그러면 넋이 견디질 못해."
할멈이 바위 하나를 툭 두드렸습니다. 텅, 하고 속이 빈 소리가 나더랍니다.
"처음엔 다들 저 사람처럼 서서 이름을 부르지. 그러다 발이 굳고, 다리가 굳고, 마지막에 입이 굳어. 그래도 안 잊으려고 버티는 거야. 그러다 저렇게 되는 거지."
"저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것도 아니게 되지."
할멈이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환생도 못 하고, 극락도 못 가고, 지옥도 못 가. 그냥 돌이야. 기억을 지키겠다고 버티다가, 기억할 머리통까지 돌이 돼 버린 거다."
갑세는 말을 잃었습니다.
'이게, 나 하려던 짓이구나.'
할멈이 지팡이로 골짜기 전체를 휘 가리켰습니다.
"내가 삼천 년을 물을 떠 줬다. 그동안 저 아래로 내려간 놈이 어림잡아 사만이야. 그중에 지금까지 사람 꼴을 하고 있는 놈이 몇이나 되는 줄 아느냐."
"...몇입니까."
"하나도 없다."
갑세의 무릎이 살짝 꺾였습니다.
"이제 알겠느냐. 왜 마시게 하는지."
할멈이 갑세를 돌아봤습니다. 아까 우물가에서 보던 그 지겹다는 표정이 아니었지요. 뭐랄까요, 아주 오래 참아 온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물을 두고 저승이 야박하다 하더구나. 잊게 만드는 게 무슨 벌이냐고. 그런데 이 물은 벌이 아니다."
"약이야."
할멈이 지팡이 끝으로 땅바닥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렸습니다.
"아주 옛날에는 이 물이 없었다. 다들 기억을 그대로 지고 다시 태어났지. 그랬더니 어떻게 됐는 줄 아느냐."
"어떻게 됐는데유."
"갓난쟁이가 태어나자마자 울었다. 웃지를 못했어. 전생에서 진 빚, 전생에서 당한 매, 전생에서 잃은 자식이 그대로 따라 들어왔으니까."
할멈의 목소리가 낮아졌습니다.
"그중에도 제일 지독한 게 원한이었다. 죽인 놈과 죽은 놈이 다시 태어나서 또 만나. 그러면 어린것들이 서로 얼굴을 알아보고 이를 갈지. 그래서 갚고, 또 갚고, 그 자식이 또 갚고. 그렇게 삼백 년 이어진 마을이 있었다. 나중엔 마을에 산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할멈이 동그라미를 발로 쓱 지웠습니다.
"그걸 보다 못한 염라대왕께서 우물을 파신 게다. 아무도 나쁜 마음을 물려받지 않게. 아무 죄 없이 태어난 아기가, 아무 죄 없이 시작할 수 있게."
갑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겨우 입을 열었지요.
"그 말씀은 다 알아듣겠슈."
"그런데?"
"그런데유, 저는 원한이 없슈. 미운 놈도 없고, 갚을 것도 없슈. 제가 지고 가려는 건 딱 하나뿐이유."
갑세가 손가락 하나를 폈습니다.
"아홉 살짜리 하나."
할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그게 그렇게 무거운 짐이유? 그것도 못 가지고 가유?"
골짜기에 바람이 한 줄기 불었습니다. 돌이 된 사람들 사이로 아주 낮은 웅웅 소리가 지나갔지요.
할멈이 한참을 아무 말도 안 하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 지팡이로 땅을 탁, 하고 찍었답니다.
"사흘."
"...예?"
"저승 사흘을 주마."
할멈이 우물 쪽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명부전에 가서 네 아들 넋을 찾아라. 찾아서 그 아이 얼굴을 보고, 그 아이 입으로 제 이름을 듣거든 오너라. 그러면 마시지 않고 환생문을 지나가도록 내가 대왕께 청을 넣어 주마."
갑세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진짭니까?"
"대신."
할멈이 뒤도 안 돌아보고 말했습니다.
"사흘 안에 못 찾으면, 두 그릇을 마셔라."
"두 그릇이면 뭐가 다릅니까."
"한 그릇은 기억이 지워지고, 두 그릇은 이름이 지워진다."
할멈이 그제야 고개만 살짝 돌렸습니다.
"네가 그 아이 이름을 붙들고 있었듯이, 다음 생에서는 아무도 네 이름을 붙들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하겠느냐?"
갑세는 일 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하겄슈."
그러고는 옆에 선 저승차사를 올려다봤지요.
"차사님, 명부전이 어느 쪽이유?"
여산이 갓을 고쳐 쓰며 짧게 대답했습니다.
"따라와라. 뛰어야 한다."
※ 4: 명부에 없는 이름
명부전은 우물가에서 한참을 더 들어간 곳에 있었더랍니다.
기와집이 아니라 산이었지요. 아니, 산처럼 쌓아 올린 책장이었습니다. 천장이 어디쯤인지 보이지도 않는 높이까지 장부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사다리 진 서리들이 개미처럼 오르내리고 있었더랍니다.
"정선 아우라지, 정덕. 삼십 년 전 유월 스무날 익사."
여산이 늙은 서리에게 그렇게 일렀습니다.
서리가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장부를 뒤졌지요. 한 권, 두 권, 열 권.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없는데요."
"다시 보아라."
"세 번 봤습니다. 그해 유월에 강물에 든 아이가 팔도에 스물아홉인데, 정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갑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그럼 다른 데 있는 거 아니유? 시신을 못 찾았으니께 딴 이름으로 적혔을 수도 있고..."
"무주고혼 명부도 봤습니다. 없습니다."
"그럼 벌써 환생을 했나 보구먼! 삼십 년이면 환생하고도 남았지! 환생부를 뒤져 보슈!"
"환생부에도 없습니다."
"어르신."
서리가 안경을 벗으며 말했습니다.
"저승 장부에 이름이 없다는 건 딱 한 가지 뜻입니다."
갑세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습니다.
"...뭔데유."
"아직 안 죽었다는 겁니다."
명부전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사다리 오르내리던 서리들도, 붓을 놀리던 관리들도 다 멈췄지요.
갑세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처럼 서 있었습니다.
"...뭐라구유?"
"살아 있다고요."
"우리 덕이가유?"
"정선 아우라지 정덕, 아홉 살에 익사할 뻔했다가 살아난 자, 현재 서른아홉. 여기 이승 명부에 멀쩡히 있습니다."
서리가 다른 장부를 펼쳐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습니다.
갑세가 그 장부를 들여다봤지요.
그러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아니여."
"어르신."
"아니여, 그럴 리가 없어. 내가 그날 서른 번을 물에 들어갔어. 한 달을 하류로 훑었어. 죽었어, 우리 덕이는 죽었어."
갑세의 목소리가 갈라졌습니다.
"삼십 년을 죽은 놈 이름을 불렀는디, 산 놈이었다구? 그게 말이 되남유?"
그때 여산이 말했습니다.
"업경을 보여 주시오."
서리가 잠깐 망설이다가 벽 쪽 휘장을 걷었습니다. 사람 키만 한 구리거울이 하나 서 있었지요. 표면이 물처럼 일렁이는 거울이었습니다.
"업경은 죽은 자의 지난 일만 비칩니다. 그러니 산 자를 직접 볼 수는 없고, 어르신께서 겪은 일만 비칠 겁니다."
"그거면 돼유."
갑세가 거울 앞에 섰습니다.
거울이 흐려지더니, 화악, 하고 강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날이었지요. 뒤집힌 배, 비명, 흙탕물.
갑세가 또순이를 배 위로 밀어 올리고, 고개를 돌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있고.
"덕아!"
갑세가 저도 모르게 거울에 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거울 속 장면이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흙탕물 한 덩이가 아이를 덮은 뒤에도 화면이 계속 흘러갔지요.
아이가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갑니다. 이 리, 십 리, 삼십 리.
그러다 하류 오십 리쯤, 강이 넓어지면서 물살이 느려지는 여울목에서, 아이가 통나무 하나에 걸립니다.
그 통나무를 소금 배 하나가 건져 올렸지요.
소금 싣고 강을 오르내리던 늙은 부부였습니다.
"아이고, 이게 뭐여! 애기가 걸렸네!"
"살았나 봐! 숨 쉬어! 숨 쉰다구!"
갑세의 두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살았네."
그 한마디가 목구멍에서 겨우 나왔지요.
"우리 덕이가 살았네."
그런데 옆에 섰던 여산의 표정이 굳어 있었습니다.
"정갑세."
"예."
"기뻐할 일이 아니다."
"아니 왜유! 우리 애가 살았다는디!"
"살아 있으면, 저승에는 없다."
갑세의 웃음이 얼굴에서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할멈이 뭐라 했느냐. 사흘 안에 아들의 넋을 찾아 그 아이 입으로 제 이름을 듣고 오라 하지 않았느냐."
"산 자의 넋은 저승에서 부를 수 없다. 네가 사흘이 아니라 삼백 년을 뒤져도 못 찾는다."
갑세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섰습니다.
'졌구나.'
찾으면 기억을 지킨다. 못 찾으면 두 그릇, 이름까지 지워진다.
그런데 못 찾는 이유가, 하필 아들이 살아 있어서라니요.
"허."
갑세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이런 내기도 다 있네."
그러고는 이상하게도, 그 헛웃음이 곧 진짜 웃음으로 바뀌더랍니다.
"근디 차사님. 나는 졌는디 왜 이렇게 좋을까유."
거울 속 장면이 흘러갔습니다.
소금장수 노부부가 아이를 업고 저희 집으로 갑니다. 아이는 열흘을 앓다 깨어나는데, 깨어나서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제 이름도, 제 마을 이름도요.
물을 하도 켜서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진 겁니다.
노부부가 아이에게 새 이름을 지어 줍니다.
"물에서 건졌으니께 건이라고 허자. 김건이."
그렇게 아이는 김건이로 자랍니다. 소금 지게를 지고, 강을 오르내리고, 열여덟에 장가를 들고요.
그런데 거울 속 화면이 자꾸 한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강가였지요.
청년이 된 김건이가 강물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는 사람처럼요.
그러다 어느 날, 강가에서 조약돌 하나를 주워 듭니다.
그 순간 청년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거울 속에, 아주 오래된 장면 하나가 겹쳐 떠올랐습니다.
아우라지 자갈밭이었습니다.
젊은 갑세가 조그만 사내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조약돌을 세고 있었지요.
"하나, 둘, 셋. 덕아, 이게 뭐여?"
"...셋!"
"옳지. 그럼 아부지가 하나 더 놓으면?"
"넷!"
"우리 덕이 똑똑하네. 아부지가 강 건너갔다 올 때마다 돌 하나씩 놔 줄 테니께, 그거 세면서 아부지 기다려."
갑세가 거울 앞에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그걸, 그걸 기억했구나.'
서른 개.
나무 상자에 모아 둔 조약돌 서른 개가, 갑자기 갑세의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해마다 유월 스무날, 삿갓을 눌러쓰고 와서 말 한마디 없이 배를 타던 사내.
뱃삯 대신 조약돌 하나를 뱃전에 딱 올려놓고 가던 사내.
"차사님."
갑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삿갓 쓴 손님이."
"그렇다."
여산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네 아들이다. 서른 해를 해마다 네 배를 탔다."
갑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근디 왜."
"왜 아무 말도 안 했대유? 왜 삿갓을 쓰고 왔대유? 아부지, 나 살았슈, 그 한마디를 왜 못 했대유!"
갑세가 거울을 붙들고 소리쳤습니다.
"내가 그 애를 삼십 년을 불렀는디! 바로 앞에 앉혀 놓고 강을 건네줬는디!"
그때, 거울 속 화면이 한 번 더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늙은 뱃사공은, 그다음 장면을 보고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더랍니다.
※ 5: 아버지 배를 타고도 말을 걸지 못한 아들
거울 속에 비친 것은 스무 해 전 아우라지 나루였습니다.
열여덟이나 되었을까 싶은 청년 하나가 강기슭 갈대밭에 엎드려 있었지요. 소금 지게를 옆에 팽개친 채로요.
그 청년이 나루를 훔쳐보고 있었습니다.
나루에는 삿대를 짚은 갑세가 있었지요. 그때만 해도 아직 등이 곧던 시절이었습니다.
청년의 입이 달싹거렸습니다.
"아부지."
소리는 안 나왔지요.
"아부지."
또 안 나왔습니다.
청년은 그날 하루 종일 갈대밭에 엎드려 있다가, 해가 지자 그냥 지게를 지고 돌아갔더랍니다.
"왜 그냥 가유."
갑세가 거울에 대고 중얼거렸습니다.
"바로 저기 있는디. 열 발짝만 걸어오면 되는디."
그런데 거울이 청년의 속을 보여 주었습니다.
스물아홉 해 전 그 물속 장면이었지요.
아홉 살 덕이가 물을 켜면서 아버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에 비친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요.
아버지가 다른 아이를 안고 배 위로 밀어 올리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딱 그 장면 하나였지요.
그 뒤에 아버지가 몸을 던진 것도, 서른 번을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손톱이 다 뒤집힌 것도, 아이는 못 봤습니다. 흙탕물에 휩쓸려 떠내려간 뒤였으니까요.
아이가 가지고 간 마지막 그림은, 저를 두고 남의 아이를 먼저 건지는 아버지의 등이었던 겁니다.
"아이고."
갑세가 무릎을 짚었습니다.
"아이고, 이 사람아."
거울 속에서 청년이 소금 지게를 지고 산길을 넘어갑니다. 넘어가면서 혼잣말을 하지요.
"왜 나를 안 잡았슈."
"내가 뭘 잘못했슈."
"아부지 아들은 나 하나였는디."
그러고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칩니다.
"근디 왜 이렇게 보고 싶대유."
그 말이 나오는 순간, 갑세가 거울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았습니다.
저승차사 여산은 갓을 깊이 눌러쓰고 벽을 보고 서 있었지요.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더랍니다.
그런데 청년이 아버지 앞에 나서지 못한 까닭이 원망 하나만은 아니었더랍니다.
거울이 소금장수 노부부의 오두막을 비췄지요.
늙은 내외가 방 안에서 소곤거리고 있었습니다.
"저 애가 요새 자꾸 강을 보네."
"기억이 돌아온 게지."
"...그럼 우리를 떠나겄지?"
할멈이 옷고름으로 눈을 찍었습니다.
"떠나야지. 제 부모한테 가야지. 그래도 나는... 나는 저 애 없으면 못 살어."
문밖에 서 있던 청년이 그 말을 다 들었더랍니다.
자식 없이 늙은 두 내외가, 물에서 건진 아이 하나로 삼십 년을 버틴 것이지요.
그날 밤 청년이 방에 들어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어머니, 저 아무 데도 안 가유. 소금이나 팔아유."
"근디 일 년에 딱 하루만, 강 건너 좀 다녀올게유."
거울 속 세월이 계속 흘러갔습니다.
청년은 해마다 유월 스무날이면 아우라지에 왔습니다.
처음에는 갈대밭에 엎드려 훔쳐만 봤지요. 그러다 스물다섯 되던 해에 처음으로 배를 탔습니다.
삿갓을 푹 눌러쓰고요.
그날 배 위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강을 건넜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자리에요.
갑세가 노를 저으며 물었지요.
"어디까지 가슈?"
"말씀을 안 하시네. 뭐 사정이 있으신가 보구먼."
청년은 삿갓 아래로 아버지의 손을 봤습니다.
손톱 열 개가 전부 뭉그러져 있었지요. 삼십 년 전 그날 뒤집혔던 손톱이 끝내 제대로 안 자란 손이었습니다.
청년이 그 손을 한참 봤습니다.
그런데도 말이 안 나왔지요.
'십오 년을 못 부른 이름이, 하루아침에 나오겄나.'
배가 건너편에 닿았습니다.
청년은 뱃삯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뱃삯을 내면 아버지가 얼굴을 볼 테니까요.
그래서 발밑에서 조약돌 하나를 주워 뱃전에 올려놓고 내렸더랍니다.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이듬해에도, 그 이듬해에도요.
서른 번째 조약돌을 놓고 내리던 날, 청년은 이미 마흔 줄 사내가 되어 있었지요.
그날은 웬일인지 걸음이 잘 안 떨어졌습니다. 뱃전에 돌을 놓고 몇 걸음 가다가,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답니다.
그런데 늙은 뱃사공이 그 조약돌을 집어서 품속 헝겊에 조심조심 싸고 있더랍니다.
마치 아주 귀한 물건인 것처럼요.
사내의 눈이 커졌습니다.
'저걸 왜 챙기지.'
'저 양반이 왜.'
그날 사내는 강 건너 언덕에 앉아 밤이 새도록 나루를 내려다봤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오면 꼭 말을 걸어야겠다고, 처음으로 마음을 먹었지요.
"아부지, 저 덕입니다."
딱 그 한마디만 하자고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렸답니다.
그런데요.
그 이듬해 유월 스무날이 되기 전에,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거울이 거기서 꺼졌습니다.
명부전 안이 아주 조용했지요.
갑세는 한참을 바닥만 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천천히 일어섰답니다.
"차사님."
"말하라."
"우리 애가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는 거유? 제 아비가 저를 버렸다고?"
"내가 그날 물에 서른 번 들어갔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거유?"
여산이 대답을 못 했습니다.
갑세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됐슈."
"무엇이 됐다는 말이냐."
"내가 뭘 해야 되는지 이제 알겄슈."
늙은 뱃사공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슬픈 것도 같고, 후련한 것도 같은 얼굴이었지요.
"차사님, 나 염라대왕님 좀 뵙게 해 주슈."
"망자가 대왕을 청해 뵙는 법은 없다."
"그럼 우물가로 갑시다."
갑세가 먼저 걸음을 옮겼습니다.
"할멈한테 할 말이 있슈."
가는 길에 여산이 물었습니다.
"너는 지금 네 이름이 지워질 판이다. 그런데 어찌 그리 걸음이 가볍냐."
갑세가 껄껄 웃었지요.
"차사님. 내가 마흔 해를 강에서 사람을 건넸슈."
"안다."
"건네주고 나면 다 남남이유.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근디 그 사람이 무사히 건너갔으면 그걸로 된 거유."
"내 아들도 건너갔으면 된 거지유. 내 이름을 기억 못 하면 어떻고, 내가 저를 기억 못 하면 어떻슈."
갑세가 하늘인지 천장인지 모를 곳을 올려다봤습니다.
"살아 있으면 된 거유. 그게 젤이유."
사흘째 되던 날 저물녘이었더랍니다.
망우정 우물가에는 여전히 망자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할멈은 여전히 나무 등걸에 앉아 표주박으로 물을 뜨고 있었지요.
갑세가 그 앞에 섰습니다.
할멈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찾았느냐."
"못 찾았슈."
"그럼 두 그릇이다."
"압니다."
갑세가 소매를 걷었습니다.
"근디 마시기 전에, 한 가지만 여쭙겠슈."
"말해 보아라."
"저 물을 마시면 다 잊는다면서유."
"그렇다."
"그럼 반대로."
늙은 뱃사공이 할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습니다.
"저 물로, 남의 기억을 하나 만들어 줄 수는 없슈?"
할멈의 손에서 표주박이 툭 떨어졌습니다.
※ 6: 마지막 한 방울
할멈이 떨어진 표주박을 주울 생각도 못 하고 갑세를 올려다봤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제 아들이 삼십 년째 잘못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슈."
갑세가 말했습니다.
"그날 제 아비가 저를 버린 게 아니라는 거유. 손이 먼저 닿은 아이를 건졌을 뿐이고, 그러고 바로 저를 찾으러 서른 번을 들어갔다는 거유. 그걸 그 애만 몰라유."
"그 애가 그걸 모르고 늙어 죽으면요. 죽어서 여기 와서도 아비 얼굴을 안 보려고 할 거유. 그럼 그 애가 저 골짜기로 갈 거 아니유."
갑세가 불망곡 쪽을 턱으로 가리켰습니다.
"내 기억은 지워도 돼유. 두 그릇 아니라 열 그릇도 마시겄슈. 근디 그 값으로."
늙은 뱃사공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우리 애 꿈에 딱 하룻밤만 들어가게 해 주슈."
우물가에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했습니다.
할멈이 아주 오랫동안 갑세를 쳐다봤지요.
그러다 갑자기, 삼천 년 만에 처음이라는 듯이, 우물가에서 일어섰답니다.
"따라오너라."
할멈이 지팡이를 짚고 앞장섰습니다. 줄 서 있던 망자들이 웅성거리며 길을 텄지요.
그 길 끝에, 붉은 곤룡포에 면류관을 쓴 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이었지요.
할멈이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대왕님. 소인이 삼천 년 동안 청을 올린 적이 한 번도 없사옵니다."
"그렇지."
"오늘 하나만 올리겠나이다."
염라대왕이 늙은 뱃사공을 내려다봤습니다.
"정갑세. 네가 마흔 해 동안 강에서 건진 사람이 몇인 줄 아느냐."
"세어 본 적 없슈."
"이만 삼천 사백열둘이다."
갑세가 눈을 껌뻑였습니다.
"그중에 뱃삯을 못 낸 자가 삼천이 넘고, 네가 외상으로 건네주고 끝내 못 받은 것이 그만큼이다. 공덕부가 두 권째다."
염라대왕이 붓을 들었습니다.
"하룻밤을 허하노라."
그날 밤이었습니다.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 아래 소금장수 마을, 마흔 줄 사내 김건이가 잠결에 눈을 떴더랍니다.
방문이 열려 있었지요.
그 문밖에, 아버지가 서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모습이 아니라, 등이 굽고 손톱이 뭉그러진 그 늙은 모습 그대로요.
"...아부지?"
"덕아."
사내의 눈에서 순식간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부지, 나 그때."
"안다."
"나 아부지가 나 버린 줄 알고."
"안다니께."
갑세가 방 안으로 들어와 아들 앞에 앉았습니다.
"덕아, 아부지 손 좀 봐라."
사내가 아버지 손을 봤습니다. 손톱 열 개가 전부 뭉그러져 있었지요.
"이거 그날 났어. 너 찾는다고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다가. 물속이 시커메서 아무것도 안 뵈는디, 손으로 바닥을 훑었거든. 서른 번을 들어갔는디 서른 번 다 못 찾았어."
사내가 그 손을 두 손으로 붙들었습니다.
"아부지."
"그러고 삼십 년을 저녁마다 강에 나가서 니 이름 불렀어. 니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께 강한테 물어본 거지."
"아부지, 나 살아 있었슈. 나 바로 저기 있었슈."
"안다. 니가 준 돌 서른 개, 아부지가 다 챙겨 놨어."
갑세가 웃었습니다.
"내가 돌을 왜 챙겼는지 아냐? 뭔지도 모르면서 챙겼어. 그냥 버리면 안 될 것 같더라고. 이거 봐라, 애비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미련해."
사내가 아버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습니다. 마흔 넘은 사내가 아홉 살처럼 울었지요.
갑세가 그 등을 오래 쓸어 주었습니다.
"덕아. 아부지가 곧 다 잊는다."
"...예?"
"저승 법이 그렇댜. 물 한 그릇 마시고 다시 태어나는 건디, 그거 마시면 니 얼굴도 잊어."
"아부지!"
"괜찮여."
갑세가 아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습니다.
"아부지는 다 잊어도, 니가 기억하면 되잖여. 니가 기억하고, 니 자식이 기억하고. 그럼 안 없어지는 겨."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더랍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아부지는 그거 하나면 다 됐어."
사내가 깨어 보니 새벽이었습니다.
그 길로 삼십 리를 뛰어 아우라지로 달려갔지요. 마침 상여가 나가는 참이었습니다.
사내가 상여 앞을 가로막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 아부집니다! 내가 아들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얼어붙었지요.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마흔쯤 된 아낙 하나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날 갑세가 제일 먼저 건져 올렸던 여섯 살배기, 또순이였습니다.
"제가 압니다."
또순이가 울면서 말했습니다.
"저 어른이 저 살리시고 아들을 잃으셨어요. 제가 삼십 년을 저 어른한테 국밥 말아 드렸어요."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정리하는데, 방구석 궤짝에서 낡은 나무 상자가 하나 나왔더랍니다.
열어 보니 조약돌이 서른 개 들어 있었지요.
하나하나 헝겊에 싸여 있었고, 헝겊마다 먹으로 연도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내는 그 상자를 안고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유월 스무날, 아버지 무덤에 서른한 번째 조약돌을 놓았지요.
그 뒤로 그 집안은 대대로 유월 스무날이면 무덤에 돌을 하나씩 놓았답니다.
자, 그런데요.
저승 우물가에서는 그때 마지막 이야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갑세가 표주박을 받아 들었지요.
"할멈, 신세 많이 졌슈."
"두 그릇이라 했다만."
할멈이 표주박을 하나만 채웠습니다.
"한 그릇만 마셔라."
"약속이 다르잖유."
"내가 이 우물지기다. 내 맘이야."
갑세가 껄껄 웃고는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다 마시고 표주박을 기울이니, 바닥에 물이 딱 한 방울 남아 있더랍니다.
"할멈, 이건 왜 남는대유?"
"한 방울은 안 지워진다."
할멈이 말했습니다.
"까닭 없이 눈물이 나는 날 있지. 처음 보는 강가에서 괜히 목이 메는 날. 그게 그 한 방울이야."
갑세의 눈에서 표정이 스르르 지워졌습니다. 아까 다른 망자들처럼요.
그러고는 아주 편안한 얼굴로 환생문을 향해 걸어갔지요.
문턱을 넘기 직전에, 저도 모르게 뒤를 한 번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아무 뜻도 모르는 채로 이렇게 중얼거렸답니다.
"...덕아."
할멈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러고는 삼천 년 만에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지요.
울면서,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이름 하나를 불렀답니다.
"삼동아."
그 순간 우물물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할멈이 표주박을 내려놓고 일어섰지요. 굽었던 등이 펴지고, 흰머리에 검은 기가 돌았습니다.
삼천 년 전, 잃은 자식을 잊지 않겠다고 이 물을 거부했던 여인이었더랍니다. 그때 염라대왕이 이렇게 일렀다지요.
"너처럼 끝까지 마시지 않으려던 자가, 남을 위해 제 기억을 스스로 내려놓는 날. 그날 너는 이 자리를 떠나도 좋다."
그날이 삼천 년 만에 온 겁니다.
할멈이 마지막으로 우물물을 한 그릇 떠서 마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벼운 걸음으로, 환생문을 넘어갔더랍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249자)
저승이 망각을 마시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벌이 아니라 약이기 때문이라지요. 원한도 슬픔도 물려주지 말고, 새로 태어난 아이는 새로 시작하라고요. 그런데 표주박 바닥에는 늘 한 방울이 남는다고 합니다. 처음 보는 강가에서 괜히 목이 메는 날, 이유 없이 누군가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 어쩌면 그게 전생의 누군가가 우리를 아직 부르고 있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끝까지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구독과 좋아요는 다음 이야기를 만드는 큰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