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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진광대왕과 도산지옥(刀山地獄) 『불설예수시왕생칠경』
본 이야기는 『불설예수시왕생칠경』 의 내용을 극적 각색하여 제작된 드라마 입니다
죽은 지 7일째 받는 첫 심판. 살생을 저지른 자들이 칼날이 솟아오른 험한 산을 맨발로 피 흘리며 걸어가야 하는 도산지옥의 참혹한 풍경과 엄정한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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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71자)
평생 짐승을 잡아 온 사냥꾼과, 손에 피 한 방울 묻힌 적 없다는 부잣집 참봉이 같은 날 죽었습니다. 죽은 지 이레째, 두 사람은 나란히 제1전 진광대왕 앞에 섰지요. 눈앞에는 칼날이 죽순처럼 솟아오른 도산지옥이 서 있었습니다. 한 목숨에 한 걸음. 사냥꾼은 제 발로 그 칼산에 오르려 했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손을 들어 멈춰 세운 순간, 칼날들이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 시퍼런 칼끝이 향한 곳은 대체 누구였을까요.
※ 1: 산척 엄판돌, 눈보라 속으로
강원도 인제 땅, 설악 자락 깊숙이 들어앉은 너래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더랍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막혀 해는 늦게 뜨고 일찍 지는 곳이지요. 논이라고는 손바닥만 하고 밭은 죄다 비탈이라 씨를 뿌리다 굴러떨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데서도 사람은 살았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있는 법이지요.
그 마을에 엄판돌이라는 산척이 하나 살았습니다. 산척이라 하면 요즘 말로 사냥꾼이지요. 나이 쉰여덟, 등은 활처럼 굽었고 손등은 나무껍질처럼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화승총 한 자루 둘러메고 산에 들면 사흘 나흘은 예사로 버티는 사람이었더랍니다.
판돌이는 그 총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면서 아들 손목을 붙들고 딱 세 마디를 일렀지요.
"새끼 밴 짐승은 쏘지 마라. 어미 잃은 새끼도 쏘지 마라. 잡은 놈은 반드시 산에 절하고 거두어라."
판돌이는 그 세 마디를 오십 년을 지켰습니다. 배가 등가죽에 붙어도 배부른 암노루는 그냥 보냈고, 남의 덫에 걸려 다리가 끊어져 가는 놈은 제 손으로 풀어 주고 상처에 쑥을 짓이겨 발라 주었지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겨울 초입에 올무에 걸린 어린 노루를 발견했는데, 그 옆에 어미가 사흘째 떠나지 않고 서 있더랍니다. 판돌이는 총을 내려놓고 올무를 끊어 주었어요. 그러고는 어미 쪽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렸다지요.
"미안하다. 이건 내 올무가 아니라서 늦었다."
그날도 빈손으로 내려와 아내 앞에 총만 세워 놓았습니다.
"또 빈손이유?"
"오늘은 산이 안 준다더라."
아내 옥분이는 부지깽이로 아궁이만 쑤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뒤에서 혀를 찼지요. 저러니 평생 저 꼴을 못 면하지, 하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지지난해부터 흉년이 들었습니다. 봄에는 서리가 늦게까지 내리고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았어요. 가을에 거둔 것이라고는 쭉정이뿐이라, 겨울로 접어들자 너래골 굴뚝에서 연기가 하나둘 끊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산에 오른 사람이 판돌이였습니다. 눈이 무릎까지 차는 산을 열흘이고 보름이고 헤매서,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아 오면 지게에 지고 내려와 마을 한복판에 부려 놓았지요.
"어른 계신 집부터 갈라 가슈. 애 딸린 집도."
정작 제 몫으로 남긴 건 뼈다귀와 내장이었습니다. 옥분이가 눈을 흘겨도 판돌이는 껄껄 웃기만 했어요.
"산에서 얻은 걸 산 아래 나누는 게 뭐 대수라고. 나 혼자 먹자고 총을 든 건 아니잖유."
그리고 짐승을 잡은 날이면 판돌이는 꼭 산으로 되돌아 올라갔습니다. 잡은 자리에 막걸리 한 사발을 붓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세 번 했지요. 무슨 말을 그리 오래 하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더랍니다.
"용서를 비는 거유. 내 식구 살리자고 남의 목숨을 가져왔으니, 빌 사람이 나밖에 더 있겠수."
그해 겨울, 너래골에서 굶어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더랍니다. 대신 판돌이는 부쩍 늙었지요. 밤마다 기침을 했고, 새벽이면 무릎을 주무르며 앓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던 섣달 열이렛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함박눈이 퍼붓는데, 마을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김 첨지네 다섯 살배기 손자 돌복이가 없어졌다는 겁니다. 나무하러 간 형을 따라나섰다가 산모롱이에서 놓쳤다는 거예요.
"눈 속에서 어린것이 반나절이면…"
사람들이 웅성거리는데 판돌이는 벌써 짚신 끈을 조이고 있었습니다. 옥분이가 그 소매를 붙들었지요.
"영감, 오늘은 산이 험해요. 어제 능선에서 범 발자국 봤다면서."
"봤지."
"그런데 왜 가유!"
판돌이는 아내를 물끄러미 보다가 총을 어깨에 걸쳤습니다.
"애가 산에 있잖유."
그러고는 눈보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게 옥분이가 본 남편의 마지막 뒷모습이었지요.
판돌이는 짐승 발자국 읽듯 아이 발자국을 읽어 나갔습니다. 눈이 발자국을 자꾸 덮어 버리니, 눈에 눌린 풀 방향이며 나뭇가지 부러진 자리를 보고 짐작해 가는 수밖에 없었지요. 반나절을 그렇게 기어올랐습니다. 목이 마르면 눈을 한 줌 집어 먹었고, 다리에 힘이 풀리면 나무를 붙들고 숨을 골랐습니다.
해가 기울고 눈이 발자국을 마저 지워 갈 무렵, 바위굴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 안에 돌복이가 웅크리고 있었어요. 입술이 새파랗고 숨소리가 실낱같았습니다. 그런데 굴 앞 눈 위에는 커다란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지요. 앞발 자국만 어른 손바닥만 한 것이 말입니다.
'왔다 갔구나. 이 어린것 냄새를 맡고.'
판돌이는 저고리를 벗어 아이를 싸안고, 제 몸을 굴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등 뒤 어둠 속에서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판돌이는 돌아보지 않았어요. 총을 겨눌 수도 있었지요. 겨눴다면 맞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버지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답니다. 새끼 밴 짐승은 쏘지 마라. 그 그르렁 소리에는 젖 먹이는 짐승 특유의 잦은 숨이 섞여 있었거든요.
판돌이는 총구를 하늘로 들어 허공에 한 방을 쏘았습니다. 소리에 놀란 짐승이 물러나는 기척이 났지요. 그러고는 아이를 업고 눈 쌓인 비탈을 내달렸습니다.
사달은 마을이 코앞에 보이는 데서 났습니다. 얼어붙은 너덜겅을 밟는 순간 발이 미끄러진 거예요. 판돌이는 넘어지면서 아이를 제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습니다. 두 사람은 스무 길 비탈을 함께 굴렀지요. 아래에 이르렀을 때, 아이는 어른 품에 폭 싸여 상처 하나 없었습니다. 어른의 뒤통수 아래에는 모난 바위가 있었고요.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울음소리를 듣고 횃불을 든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왔지요. 김 첨지가 손자를 받아 안고 주저앉아 울었고, 옥분이는 남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습니다.
"영감, 영감! 눈 좀 떠 봐유!"
판돌이는 딱 한 번 눈을 떴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아이 쪽을 보고 입술을 달싹였다지요. 아무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데, 옆에 있던 사람 말로는 "다행이다" 였다고도 하고 "산이 봐줬네" 였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판돌이는, 제 울음이 아닌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으며 눈을 감았더랍니다.
※ 2: 이레째, 칼날의 산
정신을 차려 보니 판돌이는 눈밭에 서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그렇게 춥던 발끝이 하나도 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발밑을 내려다보다가 그만 숨이 턱 막혔어요. 저 아래, 멍석에 뉘어진 사내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자기였거든요. 옥분이가 그 위에 엎어져 울고 있었습니다.
"영감… 영감…"
"임자, 나 여깄유."
아무리 소리쳐도 아내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때 등 뒤에서 눈 밟는 소리가 났지요.
검은 도포에 검은 갓을 쓴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얼굴은 젊은데 눈빛은 백 년 묵은 우물 같았어요. 손에는 두루마리를 하나 들었고요.
"강원도 인제 너래골 엄판돌. 맞느냐."
"…맞습니다만."
"나는 차사 무산이다. 데리러 왔다."
판돌이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요.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었지요. 마당에는 벌써 굴건제복한 사람들이 오가고, 상청에는 밥그릇이 여러 번 갈린 자국이 있었습니다.
"차사 나리, 저는 조금 전에 굴러떨어졌는데…"
"오늘이 이레째다. 사람은 숨이 끊긴 자리에서 이레를 머문다. 이제 첫 관문에 들 때가 됐다."
"관문이라니, 무슨 관문 말입니까."
"저승에는 열 분의 대왕이 계신다. 망자는 죽은 날로부터 이레마다 한 분씩 앞에 서서 살아온 값을 셈한다. 오늘은 그 첫째 날, 첫째 대왕 앞에 서는 날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초칠일 재를 그리 정성껏 지냈던 것이지요. 산 사람이 밥을 짓고 절을 하는 그 이레가, 죽은 사람에게는 첫 재판을 받으러 가는 날이었으니까요.
그러면서 무산은 앞장을 섰습니다. 판돌이가 뒤를 따라 걷는데, 눈밭이 어느새 붉은 흙길로 바뀌어 있었어요. 하늘에는 해도 달도 없고, 잿빛 구름만 소용돌이처럼 돌고 있었습니다. 그 길 위로 사람들이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지요. 늙은이, 젊은이, 갓난쟁이를 업은 아낙까지 말입니다.
그중에 유난히 시끄러운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비단 두루마기에 옥관자를 붙인 갓을 쓰고,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는 늙은이였어요. 너래골에서 삼십 리 떨어진 큰 마을의 노득만 참봉이었습니다. 판돌이도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지요. 곳간이 아홉 채라는 소문난 부자였습니다.
"이보게 차사! 뭔가 잘못됐네. 나는 아직 갈 때가 아니야. 어젯밤에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라고!"
무산은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노 참봉은 씩씩거리다가 옆에 선 판돌이를 아래위로 훑어보았지요.
"자네는 뭔가. 꼴을 보니 산에서 짐승깨나 잡던 놈 같은데."
"…산척이올시다."
"허, 살생업이로군. 자네야 갈 데가 정해졌겠구먼. 나는 다르네. 나는 평생 손에 피 한 방울 묻힌 적이 없는 사람이야. 내 손으로 닭 한 마리 잡아 본 적이 없다고."
그러면서 노 참봉은 제 손바닥을 펴 보였습니다. 정말이지 티 하나 없이 희고 보드라운 손이었지요.
판돌이는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그저 제 손을 내려다보았을 뿐이에요. 굳은살과 화약 자국이 얼룩덜룩한 손이었습니다.
'그래. 저 어른 말이 맞다. 나는 죽인 목숨이 셀 수 없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길이 고갯마루를 넘어서는 순간, 앞서 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러고는 하나둘 주저앉아 곡을 하기 시작했어요.
판돌이도 고개를 들었다가 그 자리에 못 박혔습니다.
눈앞에 산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흙산도 돌산도 아니었어요. 시퍼런 칼날이 죽순처럼 빽빽하게 솟아오른, 온통 쇠붙이로만 된 산이었습니다. 칼끝마다 잿빛 빛이 서늘하게 어렸고, 산이 숨을 쉴 때마다 칼날들이 서로 스치며 쇳소리를 냈지요. 그 소리가 어찌나 사무치던지, 듣고만 있어도 뒷목이 오그라들었습니다.
그 산비탈로 사람들이 맨발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발바닥이 갈라지고, 흘린 피가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어요. 그런데 아무리 피를 흘려도 죽지를 않는 겁니다. 여기서는 이미 다들 죽은 몸이니까요. 산 위에서는 소 대가리를 한 옥졸과 말 대가리를 한 옥졸이 쇠몽둥이를 들고 서서, 주저앉는 자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검은 새들이 그 위를 빙빙 돌았고요.
"저기가… 어딥니까."
판돌이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무산이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지요.
"도산지옥이다. 제일전 진광대왕께서 살생의 죄를 다스리는 곳. 한 목숨에 한 걸음씩 오른다."
"한 목숨에… 한 걸음이라굽쇼."
"그렇다. 저 산에는 꼭대기가 없다. 죄가 다할 때까지 산이 자란다. 그러니 저기 오르는 자들은 언제 내려올지를 저 자신도 모른다."
그 말에 판돌이는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자세히 보니 칼날 사이사이에 반들반들 닳은 자리가 있었어요. 하도 여러 사람이 밟고 지나가서 쇠가 닳은 자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칼끝은 여전히 시퍼렜지요.
"한 목숨에 한 걸음…"
판돌이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꼽아 보려다 그만두었습니다. 셀 수가 없었으니까요. 노루, 멧돼지, 꿩, 토끼. 오십 년입니다. 오십 년.
'저 산 꼭대기까지도 모자라겠구나.'
그때 마침 한 사내가 옥졸에게 끌려 나왔습니다. 비단옷을 입은 젊은 양반이었어요. 살아생전 활 솜씨를 자랑하느라 사슴을 수백 마리 쏘아 죽이고는 뿔만 잘라 갔다는 자였습니다. 그자가 첫 칼날을 밟고 지르는 비명이 온 벌판을 갈랐지요.
노 참봉이 그 광경을 보더니 목을 움츠렸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옷깃을 여몄습니다.
"흠. 무섭기는 하다만, 나하고는 상관없는 곳이로세. 나야 뭐, 절에 시주도 하고 초파일이면 등도 달았는데."
그러더니 판돌이 어깨를 툭 치며 이러는 겁니다.
"자네는 마음 단단히 먹게. 내 보아하니 자네 몫으로 저 산이 한참 자라야 할 게야."
판돌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망칠 마음은 들지 않았답니다. '내가 가져온 목숨값이니 내가 치르는 게 옳다.'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바로 그때, 저 앞 검은 궁궐에서 종소리가 세 번 울렸습니다.
"제일전 진광대왕 입정이시오. 초칠일 망자들은 들라."
※ 3: 제1전 진광대왕, 업경대가 열리다
검은 궁궐의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니 기둥이 어찌나 높은지 꼭대기가 구름에 잠겨 보이지 않았어요. 좌우로는 푸른 도포를 입은 녹사들이 붓을 들고 늘어섰고, 정면 높다란 자리에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검푸른 곤룡포에 칠보로 장식한 관을 쓰고, 백발 수염이 가슴까지 흘러내린 어른이었습니다. 눈은 반쯤 감은 듯한데, 그 아래 서 있으면 뱃속까지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지요. 제일전 진광대왕이었습니다.
그 곁에는 홍운이라는 판관이 서서 두꺼운 장부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뜰 한가운데에는 사람 키의 세 곱은 되어 보이는 거울이 하나 세워져 있었어요. 업경대라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이 그 앞에 서면, 살아온 한평생이 낱낱이 비쳐 나오는 거울입니다.
"강원도 인제 너래골, 산척 엄판돌. 앞으로 나오라."
호명하는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뱃속이 다 울렸습니다. 판돌이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겨우 붙들고 걸어 나갔습니다. 그러자 업경대가 스르르 밝아지더니 그 안에 산이 떠올랐지요.
열여덟 살 판돌이가 처음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이었습니다. 꿩 한 마리가 눈밭에 떨어졌어요. 그다음은 노루였고, 그다음은 멧돼지였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면서, 짐승이 쓰러지고 또 쓰러졌습니다. 그 장면이 끝도 없이 이어졌지요.
녹사들의 붓이 사각사각 움직였습니다. 홍운 판관이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노루 사백서른둘. 멧돼지 백열아홉. 꿩 천이백일흔넷. 토끼 팔백스물여섯. 그 밖에 오소리, 담비, 산양 도합 이백열둘. 살생의 수, 모두 이천칠백예순셋."
그 숫자가 궁궐 안에 울리는 동안, 판돌이의 이름 옆으로 붉은 줄이 그어졌습니다. 한 줄, 두 줄, 열 줄. 장부 한 면이 온통 붉게 물들었지요.
대왕이 그제야 눈을 뜨셨습니다.
"엄판돌. 할 말이 있느냐."
판돌이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어요.
"…없습니다."
"없다?"
"제가 가져온 목숨이 맞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랬다, 식구를 살리려고 그랬다, 그런 말은 저 산에서 죽은 것들한테는 아무 소용이 없는 말이지요. 저는 이천칠백예순세 번, 남의 마지막 숨을 끊었습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랍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칼산 말입니다. 제 발로 가겠습니다."
궁궐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어요. 여기까지 끌려온 망자 치고 제 발로 지옥 문을 묻는 자는 없었으니까요. 노 참봉조차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습니다.
판돌이가 정말로 뜰을 가로질러 걸어갔습니다. 칼산 쪽으로요. 소 대가리 옥졸이 얼결에 길을 비켜 줄 정도였지요. 걸어가면서 판돌이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더랍니다.
'울지 말자. 저 산에 있는 것들은 나 때문에 저기 있는 게 아니라, 나 대신 내 식구가 살아서 저기 있는 거다. 그러면 값은 내가 치르는 게 맞다.'
그가 짚신을 벗어 나란히 놓고, 맨발로 첫 칼날에 발을 올리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멈추어라."
대왕의 목소리가 궁궐을 흔들었습니다. 판돌이가 발을 든 채로 돌아보았지요.
"판관은 다른 장부를 올려라."
홍운 판관이 이번에는 검은 표지의 장부를 펼쳤습니다. 아까 것보다 훨씬 두꺼운 것이었어요. 그러고는 읽기 시작했습니다.
"산에서 살려 보낸 목숨. 새끼 밴 짐승 이백열넷. 어미 잃은 새끼 백서른아홉. 남의 올무와 덫에서 풀어 준 것 삼백스물둘. 다친 짐승에게 약을 발라 보낸 것 아흔일곱. 도합 칠백일흔둘."
"…"
"또한 짐승을 잡은 자리마다 술을 붓고 절을 한 횟수, 이천칠백예순세 번. 한 번도 거르지 않았음."
판돌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그런 걸 누가 세고 있었는지도 몰랐으니까요. 그저 아버지가 그리하라 했으니 그리했을 뿐이었지요. 산에서 혼자 절을 하고 있으면 지나가던 나무꾼이 실없는 사람이라고 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실없는 절을 저승에서는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세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말은 그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술이 올라와 있습니다."
"누구의 진술이냐."
"저자에게 목숨을 잃은 짐승들의 넋입니다, 대왕마마."
궁궐 안이 술렁였습니다. 판관이 장부를 넘겼습니다.
"도산지옥의 칼날은 쇠를 벼려 만든 것이 아니지요. 죽은 것들의 원망이 뭉치고 뭉쳐 솟아오른 것이 그 칼입니다. 원망이 클수록 칼이 길고, 원망이 사무칠수록 날이 섭니다."
"그래서."
"엄판돌에게 목숨을 잃은 이천칠백예순세 넋 가운데, 원망을 남긴 넋은… 하나도 없습니다."
장내가 딱 얼어붙었습니다. 판관의 목소리가 이어졌지요.
"넋들이 이르기를, 저 사람은 우리를 잡을 때마다 울었고, 잡고 나서는 절을 했고, 살은 굶는 사람들에게 나누었으며, 우리의 어미와 새끼는 건드리지 않았다. 우리는 저 사람의 밥이 되었으나 저 사람의 원수는 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몫으로 칼을 세우지 말아 달라.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대왕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옥졸을 향해 손을 드셨어요.
"저자의 몫으로 솟은 칼날을 가져오라."
말 대가리 옥졸이 도산지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돌아와 두 손을 모아 아뢰었지요.
"한 자루도… 없습니다. 엄판돌의 이름으로 솟은 칼이 한 자루도 없습니다."
판돌이는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오십 년을 지고 다니던 짐이 어깨에서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지요.
대왕이 붓을 드셨습니다.
"살생은 죄다. 그러나 죄에도 결이 있다. 굶주림을 면하려 목숨을 취하고 그 목숨에 예를 갖춘 자와, 재미로 목숨을 취하고 뿔만 잘라 간 자를 어찌 같은 저울에 올리겠느냐. 판관은 다음을 부르라."
그러자 노 참봉이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썩 나섰습니다. 아까 광경을 다 보았으니 자신이 만만해진 게지요.
"허허, 대왕마마. 저 무지렁이도 저리 봐주시는데 소인이야 뭐,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힌 사람입니다. 얼른 좋은 데로 보내 주십시오."
"경기 여주 사람 노득만. 업경 앞에 서라."
노 참봉이 거드름을 피우며 거울 앞에 섰습니다. 거울이 환하게 밝아졌지요.
그런데 그 순간, 진광대왕의 낯빛이 싸늘하게 변하더랍니다.
※ 4: 칼날은 손이 아니라 마음을 벤다
업경대 안에 커다란 기와집이 떠올랐습니다. 마당이 어찌나 넓은지 끝이 보이지 않고, 담장을 따라 곳간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어요. 하나, 둘, 셋… 아홉 채였습니다.
"곳간 아홉 채. 안에 쌓인 곡식 삼천여 섬."
홍운 판관이 읽었습니다. 노 참봉이 어깨를 으쓱했지요.
"내 평생 부지런히 모은 것이올시다."
거울 속 장면이 바뀌었습니다. 흉년 든 해 겨울이었어요. 대문 앞에 사람들이 엎드려 있었습니다. 얼굴이 누렇게 뜬 아낙이 갓난쟁이를 안고 있고, 늙은이가 이마를 땅에 대고 있었지요.
"참봉 어른, 종자만이라도 한 되 꿔 주십시오. 봄에 두 배로 갚겠습니다."
거울 속 노 참봉이 대문 안에서 내다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배로 갚을 재간이 있으면 진작 갚았겠지. 문 닫아라. 시끄럽다."
그러고는 빗장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그 문 앞에서 밤새 울다가, 새벽에 하나둘 일어나 돌아갔지요.
장면이 또 바뀌었습니다. 이번에는 장부였어요. 봄에 곡식 한 섬을 꿔 주고 가을에 두 섬 반을 받아 내는 문서였습니다. 갚지 못한 집은 논을 빼앗겼고, 논을 다 빼앗긴 집은 딸을 남의집살이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얼어붙은 들판에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하나가 아니었어요.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나무껍질을 벗겨 먹다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노인, 어미 품에서 이미 식어 버린 아이.
"흉년 두 해 동안, 노득만의 문 앞에서 곡식을 청했다가 그대로 굶어 죽은 자. 서른일곱 명."
판관의 목소리가 궁궐에 낮게 깔렸습니다.
"그중 젖먹이가 아홉, 열 살 아래 아이가 열넷입니다."
노 참봉의 얼굴이 새하얘졌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두 팔을 휘저으며 소리를 질렀지요.
"아니, 이보시오! 내가 죽였소? 내가 저 사람들을 칼로 찔렀냐 이 말이오! 제 복이 없어 굶은 걸 왜 나한테…!"
"노득만."
대왕의 목소리가 뚝 떨어졌습니다.
"너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그 말은 옳다."
"그, 그렇지요! 그러니까…"
"허나 도산지옥의 칼은 손을 보고 솟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보고 솟는다."
대왕이 손을 드셨습니다.
"옥졸은 저자의 이름으로 솟은 칼을 가져오라."
소 대가리 옥졸이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어요. 궁궐 뜰 한복판의 땅이 스스로 갈라지더니, 시퍼런 칼날이 죽순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한 겁니다. 하나, 열, 백. 순식간에 뜰이 칼밭이 되었습니다. 칼날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었어요. 굶어 죽은 서른일곱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그중 제일 작은 칼 하나에는 이름 대신 이렇게만 적혀 있었지요. 이름 짓기 전에 죽은 아이.
노 참봉이 그 자리에 폭삭 주저앉았습니다.
"너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다만 살릴 수 있는 자리에서 문을 닫았을 뿐이다. 그런데 저승의 저울은 그 둘을 같은 무게로 단다. 곳간 아홉 채를 가지고도 한 되를 내주지 않은 손은, 칼을 쥔 손보다 가볍지 않다."
옥졸들이 노 참봉의 양팔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노 참봉이 짐승처럼 울부짖었지요.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곳간을 다 풀겠습니다, 다 풀겠다니까요!"
"이승의 곳간은 이제 네 것이 아니다."
그렇게 끌려 나가는데, 그때 누군가 앞으로 나서더랍니다. 엄판돌이었습니다.
"대왕마마. 무엄한 줄 아오나 한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말하라."
"저 어른을 칼산에 보내신다 해도, 굶어 죽은 서른일곱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 집 곳간에는 아직 곡식이 그대로 쌓여 있습지요. 올겨울도 흉년입니다. 저 곳간이 열리면 몇백 명이 삽니다."
궁궐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판돌이가 이마를 땅에 댔습니다.
"벌은 벌대로 내리시되, 저 집 아들 놈 꿈에 오늘 이 광경을 한 번만 보여 주십시오. 그 아이가 곳간 문을 열면, 아비의 죄가 조금이라도 씻기지 않겠습니까."
"네가 저자에게 무슨 정이 있어 그러느냐."
"정은 없습니다. 다만… 저도 목숨을 이천칠백 번이나 가져온 놈입니다. 제 죄를 봐주신 자리에서 남의 죄만 무겁다 하면, 제가 어떻게 낯을 들겠습니까."
진광대왕이 한참을 내려다보시더니, 수염을 쓸며 나직이 웃으셨습니다. 저승의 첫째 대왕이 웃는 일은 백 년에 한 번도 드물다지요.
그러고는 붓을 들어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노득만은 도산지옥에 백 년을 두어 서른일곱 걸음을 걷게 하라. 백 년 뒤에는 굶주린 집의 자식으로 나게 하여, 남의 문 앞에서 밥을 청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알게 하라. 다만 오늘 밤 그 아들의 꿈에 업경을 비추어, 곳간을 열게 하라. 곳간이 열려 사는 목숨만큼 저자의 칼날을 거두어 준다."
그리고 대왕은 판돌이를 향해 붓끝을 돌리셨습니다.
"엄판돌은 목숨을 취한 자이나, 취한 목숨보다 살린 목숨이 많다. 짐승이 원망하지 않고, 사람이 그를 살렸다 한다. 명부를 살피니 남은 햇수가 아홉 해다. 그 아홉 해를 마저 살고 오너라.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돌아가거든 총을 놓아라. 네 몫의 살생은 오늘로 셈이 끝났다."
판돌이가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이 나더랍니다.
눈을 떠 보니 상청이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 새벽이었지요. 관에 넣기 직전에 시신의 손가락이 움찔하는 걸 옥분이가 본 겁니다. 온 마을이 뒤집혔습니다.
판돌이는 그날로 화승총을 부엌 아궁이에 넣어 태워 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산에서 약초를 캐고 덫을 걷어 내며 아홉 해를 더 살았지요.
그 겨울, 삼십 리 밖 노 참봉네 곳간 아홉 채가 활짝 열렸습니다. 상주가 된 아들이 새벽에 벌떡 일어나 대문을 부수듯 열어젖히고는, 곡식을 있는 대로 퍼내 나눠 주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그 아들이 이렇게 대답했다지요.
"간밤 꿈에 아버님이 맨발로 칼산을 오르고 계셨소. 한 걸음 뗄 때마다 우리 집 문 앞에서 죽은 이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그 겨울, 그 고을에서도 굶어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더랍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247자)
『불설예수시왕생칠경』은 죽은 지 이레째, 제1전 진광대왕 앞에서 첫 심판이 열린다고 전합니다. 그 곁에 도산지옥의 칼날이 솟아 있지요. 그런데 오늘 이야기가 우리에게 일러 주는 것은 이렇습니다. 그 칼은 피 묻은 손을 보고 솟는 것이 아니라, 문을 닫은 마음을 보고 솟는다는 것. 오늘 여러분의 문 앞에 누가 서 있지는 않은지요. 이야기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다음 이레, 제2전 초강대왕 앞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남경호 - 진광대왕 / 철순 - 판관 / 남병철 - 노득만 / 정우 - 차사 / 순자 - 아내 / 류영길 - 판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