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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 초강대왕과 화탕지옥(火湯地獄) 『시왕경』

    부제: 죽은 지 14일째 받는 심판. 도둑질하거나 남의 재산을 탐한 자들이 펄펄 끓어오르는 거대한 무쇠 가마솥에 던져지는 화탕지옥. 죄의 무게에 따라 불의 온도가 달라지는 뜨거운 형벌.

    본 이야기는 『시왕경』의 내용을 극적 각색하여 만든 드라마 입니다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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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277자)

    평생 됫박과 저울을 속여 큰 부자가 된 싸전 주인이 있었습니다. "돈이면 저승 문지기도 통한다"며 관 속에 엽전을 가득 채워 넣고 죽었지요. 그런데 죽은 지 열나흘째, 눈앞에 펄펄 끓는 무쇠 가마솥이 즐비하게 늘어선 화탕지옥이 나타났습니다. 남의 것을 탐한 자들이 삶기고 또 삶기는 곳. 죄의 무게에 따라 불의 온도가 달라진다는데, 이 됫박 도둑의 솥은 대체 몇 도까지 끓어오를까요. 그리고 저승에 올라온 뜻밖의 편지 한 장이 저울을 흔듭니다.

    ※ 1: 됫박 둘을 가진 사내

    경상도 상주 땅, 낙동강 물줄기가 넉넉하게 감아 도는 곳에 매내미라는 큰 장터가 있었더랍니다. 닷새마다 장이 서면 인근 고을에서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지요. 곡식전, 어물전, 무명전, 옹기전이 줄을 지어 늘어섰고, 엿장수 가위 소리에 씨름판 함성까지 어우러져 그야말로 사람 사는 소리가 넘쳐 났습니다. 장이 파할 무렵이면 국밥집에서 피어오르는 김에 술 냄새가 섞여, 지나가던 나그네도 절로 배가 고파졌지요.

    그 장터 한복판에 큰 싸전을 차린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이름은 배중석이라 하였습니다. 나이 마흔여섯, 얼굴은 번들번들 기름지고 손가락에는 금가락지가 두 개나 번쩍였지요. 매내미 장바닥에서 배 부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곡식 되질을 어찌나 잘하는지, 그 집 됫박은 남의 집 됫박과 크기가 다르다는 소문이 파다했거든요.

    그 소문이 참말이었습니다. 배중석의 됫박에는 비밀이 있었어요. 팔 때 쓰는 됫박은 바닥에 두꺼운 나무를 덧대어 속을 얕게 만들었고, 살 때 쓰는 됫박은 바닥을 파내어 속을 깊게 만들었지요. 그러니 한 되를 팔 때마다 슬금슬금 남고, 한 되를 살 때마다 슬금슬금 더 들어왔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그렇게 이십 년을 하니 곳간이 그득해진 겁니다.

    게다가 배중석은 됫박질에도 손재간이 있었습니다. 곡식을 팔 때는 됫박에 곡식을 수북이 담았다가, 손님이 보는 앞에서 됫박 전을 슥 훑어 깎아 내는데, 그 손끝이 어찌나 야무진지 한 됫박에서 한 줌씩은 꼭 도로 제 자루에 떨어졌지요. 반대로 곡식을 살 때는 됫박을 탁탁 쳐서 곡식을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같은 한 되라도 눌러 담으면 훨씬 많이 들어가니까요. 파는 됫박은 살살, 사는 됫박은 꾹꾹. 그 두 손이 매내미 장바닥에서 이십 년을 그렇게 놀았던 겁니다.

    "에구, 배 부자님 됫박은 볼 때마다 야박해서."

    아낙들이 뒤에서 이렇게 수군거려도 배중석은 눈 하나 깜짝 안 했습니다. 오히려 됫박을 탁탁 치며 이렇게 대꾸했지요.

    "장사가 다 그런 거유. 되질이 야무진 걸 야박하다 하면 나더러 어찌 먹고살라고."

    그런데 이 배중석이 되질만 속인 게 아니었습니다. 저울추도 손을 봤어요. 어물전에서 생선을 달 때 쓰는 저울추 속에 납을 녹여 부어 넣은 겁니다. 그러니 한 근을 달아도 여덟 냥밖에 안 나가는데, 손님한테는 한 근이라고 우기는 거지요. 노인이나 아녀자가 오면 유독 더 심했습니다. 저울눈을 못 읽는 사람일수록 만만했으니까요. 거기다 흉년만 들면 곡식을 곳간에 꽁꽁 숨겼다가,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때 슬그머니 풀어 폭리를 취했습니다. 남들이 굶어 죽어 갈 때가 배중석에게는 도리어 대목이었던 셈이지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강 건너 옹기점에 사는 옹기장이 노인이 큰딸 시집 밑천 하려고 평생 모은 엽전 꾸러미를 배중석한테 맡겼어요. 이자를 얹어 준다는 말에 혹한 거지요. 그런데 배중석은 차용증을 슬쩍 고쳐 원금을 절반으로 줄여 놓고는, 노인이 글을 모르는 걸 이용해 도장을 찍게 했습니다. 나중에 노인이 돈을 찾으러 왔을 때는 이미 늦었지요.

    "영감, 여기 도장 찍은 문서가 이리 멀쩡한데 무슨 소리유. 노망이 났수?"

    "아니, 내가 분명 스무 냥을 맡겼는데 어째 열 냥이라 되어 있소!"

    "영감 손으로 도장 찍은 거 아니유. 글 모르면 남한테 읽어 달라 하고 찍었어야지, 이제 와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유."

    옹기장이 노인은 관가에 가서 하소연도 했지만, 문서가 멀쩡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남의 멀쩡한 문서를 트집 잡는다고 곤장만 몇 대 맞고 쫓겨났지요. 그 노인은 화병으로 몸져눕더니 그해를 못 넘기고 세상을 떴습니다. 눈을 감으면서도 "내 딸, 내 딸 밑천" 하고 되뇌었다지요. 큰딸은 시집도 못 가고 남의집살이로 들어갔고요.

    그래도 배중석은 태평했습니다. 밤마다 곳간에 들어가 엽전 꿰미를 세는 게 낙이었어요. 짤그랑짤그랑, 그 소리를 들어야 잠이 온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아내가 죽고 나서는 그 버릇이 더 심해졌지요. 자식들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습니다. 어떤 날은 새벽닭이 울도록 곳간에 앉아 엽전만 세다가, 그대로 돈 자루를 베고 잠들기도 했어요.

    "아버님, 그 돈 다 세지도 못할 만큼 많은데 뭘 밤낮 세십니까."

    "이눔아, 돈은 세는 맛에 모으는 거여. 한 푼 두 푼 늘어나는 걸 봐야 사는 재미가 있지."

    "돈이 최고여. 이승에서 돈만 있으면 저승 갈 때도 든든하지. 저승 문지기한테 노잣돈 두둑이 쥐여 주면 안 될 일이 뭐가 있겄어."

    배중석은 늘 그렇게 큰소리를 쳤습니다. 실제로 죽으면 관에 엽전을 잔뜩 넣어 달라고 아들한테 신신당부까지 해 두었지요.

    그러던 어느 해 여름이었습니다. 유난히 무덥던 삼복 더위에, 배중석이 곳간에서 엽전을 세다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꼬꾸라졌습니다. 짤그랑, 손에서 엽전 꿰미가 미끄러져 바닥에 흩어졌지요. 배중석은 마지막 힘을 다해 그 엽전을 그러모으려 손을 뻗었습니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그 손은 돈을 향하고 있었어요. 그게 배중석이 이승에서 들은 마지막 돈 소리였습니다.

    아들은 아비 유언대로 관에 엽전을 잔뜩 넣었습니다. 어찌나 많이 넣었는지 상여꾼 여덟이 낑낑댈 정도였다지요. 사람들은 그 장례를 보고 혀를 찼습니다.

    "돈은 이승에 두고 가는 거지, 저승까지 지고 가는 게 어딨어."

    "글쎄 말이유. 저 돈이 저승 가서 무슨 소용이람."

    "그러게 살아생전 그 돈으로 적선이나 좀 하지. 배 부자 문 앞에서 쫓겨난 사람이 어디 한둘이라야지."

    그런데 말입니다. 배중석은 정말로 그 돈이 저승에서 통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더랍니다. 살아생전 이승에서 안 되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아전한테도 돈, 원님한테도 돈, 돈이면 안 열리는 문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승이라고 다를 게 뭐냐, 이런 배짱이었지요. 죽어서 눈을 떴을 때도, 제일 먼저 더듬은 것이 바로 그 엽전 꿰미였습니다. 그 손끝에 짤그랑 소리가 만져지자, 배중석은 저도 모르게 씩 웃었다고 합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웃음이었는지는, 조금 뒤에야 알게 되지요.

    ※ 2: 열나흘째, 끓는 솥의 벌판

    배중석이 눈을 떠 보니 온통 잿빛인 벌판이었습니다. 발밑을 더듬어 보니 다행히 엽전 꿰미가 그대로 손에 잡혔어요. 배중석은 그것을 품에 꼭 안고 히죽 웃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돈은 어디 가나 돈이여.'

    그때 저만치서 검은 도포에 검은 갓을 쓴 사내 둘이 걸어왔습니다. 하나는 늙수그레하고 하나는 젊었는데, 손에 쇠사슬을 철그렁철그렁 끌고 있었지요. 저승차사였습니다.

    "경상도 상주 매내미 배중석. 데리러 왔다."

    배중석은 얼른 일어나 굽실거렸습니다. 그러고는 엽전 꿰미를 하나 쑥 뽑아 내밀었지요.

    "차사 나리, 아이고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거 약소하지만 노자에 보태 쓰시고, 저 좀 좋은 데로 잘 봐주십시오. 네?"

    늙은 차사가 그 엽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피식 웃더랍니다.

    "이게 여기서 쓸 수 있는 돈인 줄 아느냐."

    "어, 어째서요. 돈이 돈이지."

    "이승 돈은 이승 문턱을 넘는 순간 그냥 쇳조각이다. 여기서 통하는 건 딱 하나뿐이지. 살아생전 쌓은 덕.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통해."

    배중석은 그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엽전을 내밀며 매달렸지요.

    "에이, 차사 나리. 세상에 안 통하는 돈이 어딨습니까. 두 꿰미 드리리다. 아니, 세 꿰미."

    "허, 이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네."

    "그럼 다섯 꿰미! 관 속에 넣어 온 게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저 좀 편한 데로만 넣어 주십쇼."

    늙은 차사가 혀를 끌끌 찼습니다. 젊은 차사가 보다 못해 쇠사슬을 배중석의 목에 척 걸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걸어라. 오늘이 열나흘째다. 제이전에 들 시각이 됐다."

    "열나흘째라니요?"

    "죽은 지 이레마다 대왕 한 분씩 뵙는 거다. 이레 전에 제일전 진광대왕을 뵈었을 것 아니냐."

    배중석은 그제야 어렴풋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레 전, 무슨 칼날이 솟은 산 앞에서 한 어른이 살생의 죄를 묻던 게 떠올랐어요. 그때 배중석은 짐승을 잡은 일도, 사람을 해친 일도 없어 무사히 통과했었지요. 그래서 내심 저승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뭐, 이번에도 대충 넘어가겠지. 나야 사람 하나 안 죽인 사람인데. 그저 장사만 좀 했을 뿐인데 무슨 죄가 되겠어.'

    그렇게 끌려가는데, 길 양옆으로 다른 망자들도 줄줄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배중석처럼 품에 뭔가를 잔뜩 안고 낑낑대는 자들이 유난히 많았어요. 어떤 이는 비단 필을, 어떤 이는 놋그릇을, 어떤 이는 문서 뭉치를 끌어안고 있었지요. 하나같이 이승에서 재물깨나 모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중 한 늙은이가 배중석 옆으로 바짝 붙더니 소곤거렸습니다.

    "이보게, 자네도 저승 문지기한테 쥐여 줄 거 가져왔나? 나는 금붙이를 좀 챙겨 왔네. 이게 통해야 할 텐데 말이야."

    "통하겠지요. 돈이 안 통하는 데가 어딨습니까."

    두 사람은 서로 그렇게 위안을 삼았지요. 그런데 그 위안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 곧 알게 됩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앞쪽에서 후끈한 열기가 확 밀려왔습니다. 처음엔 여름 더위인가 싶었는데, 갈수록 숨이 턱턱 막히고 살갗이 익는 것 같았어요. 이윽고 길이 언덕을 넘어서는 순간, 배중석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습니다.

    눈앞에 어마어마하게 큰 무쇠 가마솥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던 겁니다. 하나하나가 집채만 했어요. 그 밑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타올랐고, 솥 안에서는 검붉은 물이 부글부글 끓어 넘쳤습니다. 김이 어찌나 뜨겁게 솟구치는지 하늘이 흐릿하게 일렁일 정도였지요. 유황 냄새 같은 매캐한 내가 코를 찔러 숨쉬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끓는 솥 안에 사람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살려 달라 비명을 지르며 손을 허우적거리는데, 옥졸들이 기다란 쇠스랑으로 도로 눌러 넣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끓는 물에 삶기면서도 사람이 죽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살이 익어 문드러졌다가도 이내 도로 멀쩡해지고, 또 삶기고 또 멀쩡해지기를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었어요. 여기서는 이미 다들 죽은 몸이니, 다시 죽을 수도 없었던 거지요.

    어떤 솥은 물이 새빨갛게 끓어 넘쳤고, 어떤 솥은 그보다 덜 뜨거운지 부글부글 소리만 났습니다. 또 어떤 솥은 김이 약하게 오르며 미지근하게 데워지는 정도였고요. 자세히 보니 솥마다 불길의 크기가 다 달랐지요. 큰 불이 이글거리는 솥 앞에서는 옥졸이 쉴 새 없이 장작을 밀어 넣었고, 작은 불이 사그라드는 솥 앞에서는 옥졸이 팔짱을 낀 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배중석은 다리가 후들거려 그만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저, 저기가 어딥니까."

    목소리가 덜덜 떨렸어요. 늙은 차사가 대답했습니다.

    "화탕지옥이다. 제이전 초강대왕께서 남의 것을 탐한 죄를 다스리는 곳이지. 도둑질한 자, 남을 속여 재물을 빼앗은 자, 되질과 저울을 속인 자, 그런 자들이 저 솥에 들어간다."

    그 말에 배중석은 등줄기가 서늘해졌습니다. 되질과 저울을 속인 자. 딱 자기 이야기였으니까요.

    "저기 솥이 왜 저리 불길이 다 다릅니까."

    "죄의 무게에 따라 불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 남의 밭에서 무 한 개 뽑아 먹은 자의 솥은 미지근하고, 곳간 그득한데도 남의 것을 빼앗아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의 솥은…… 쇳물처럼 끓는다."

    배중석은 자기도 모르게 품에 안은 엽전 꿰미를 꽉 움켜쥐었습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지요.

    '아니야. 나는 도둑질을 한 건 아니잖아. 그저 장사를 좀 야무지게 했을 뿐이지. 그게 뭐 죄가 된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젊은 차사가 배중석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뭘 그리 꼭 안고 있느냐. 그거 여기선 아무 쓸모 없다니까."

    "아, 아닙니다. 이건 제 돈입니다. 제가 평생 모은……."

    배중석은 엽전 꿰미를 더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 돈만 있으면 여기서도 어떻게든 될 것 같았거든요. 이십 년을 그 믿음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니까요.

    바로 그때, 저 앞 붉은 궁궐에서 북소리가 세 번 크게 울렸습니다.

    "제이전 초강대왕 입정이시오. 십사일 망자들은 들라."

    ※ 3: 제2전 초강대왕, 저울이 기울다

    붉은 궁궐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니 온통 불빛으로 붉었어요. 기둥마다 화롯불 같은 것이 걸려 이글거렸고, 바닥에서는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습니다. 좌우로 갑옷 입은 옥졸들이 창을 들고 늘어섰고, 정면 높은 자리에 한 분이 앉아 계셨지요. 궁궐 안 공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비 오듯 흘렀습니다.

    붉은 곤룡포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수놓인 관을 쓰고, 눈썹이 숯검정처럼 짙은 어른이었습니다. 눈에서는 불티가 튀는 듯했어요. 제이전 초강대왕이었습니다. 이 대왕은 남의 것을 탐한 죄, 곧 도둑질과 사기와 강탈의 죄를 다스리는 분이지요. 그 곁에는 각민이라는 판관이 서서 붉은 표지의 장부를 넘기고 있었고, 뜰 한쪽에는 커다란 저울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접시가 두 개 달린 큼직한 천칭이었지요. 그 저울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배중석은 곧 알게 됩니다.

    "경상도 상주 매내미, 싸전 배중석. 앞으로 나오라."

    배중석은 엽전 꿰미를 품에 안은 채 쭈뼛쭈뼛 걸어 나갔습니다. 그러고는 넙죽 엎드려 이마를 조아렸어요. 여기서도 통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굳게 믿었으니까요.

    "대왕마마, 소인이 살아생전 재물이 좀 있었습니다. 여기 노잣돈으로 가져온 게 넉넉하니, 부디 굽어살펴 주십시오. 원하시는 만큼 바치겠습니다. 아, 부족하면 이승의 아들놈한테 기별을 넣어 더 올리게 하겠습니다."

    초강대왕이 그 말을 듣더니 껄껄 웃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어찌나 서늘한지 등골이 오싹했지요.

    "여기가 어디라고 뇌물을 바치겠다는 게냐. 이승에서 아전과 원님을 돈으로 주무르던 버릇을 여기서도 부리려 드는구나. 판관은 저자의 장부를 펴라."

    각민 판관이 붉은 장부를 펼쳤습니다. 그러자 뜰 가운데 저울 위로 두 가지가 저절로 올라앉았어요. 한쪽 접시에는 배중석이 살아생전 남을 속여 모은 재물이, 다른 쪽 접시에는 배중석이 남에게 베푼 덕이 올라간 겁니다. 이 저울이 바로 초강대왕이 죄를 재는 저울이었지요. 재물과 덕, 두 접시가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따라 솥의 온도가 정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재물 쪽 접시가 쿵, 하고 바닥까지 내려앉았습니다. 어찌나 무거운지 저울대가 삐거덕 소리를 냈어요. 그런데 덕을 올린 쪽 접시는…… 하늘로 붕 떠올랐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으니까요. 얼마나 가벼운지 바람에 흔들릴 지경이었지요.

    "허어."

    초강대왕이 저울을 보며 혀를 찼습니다.

    "이토록 한쪽으로만 기운 저울은 참으로 오랜만이로구나. 판관은 저자가 지은 죄를 읽어라."

    각민 판관이 장부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됫박을 둘로 나누어 이십 년간 속인 죄. 파는 됫박은 얕게, 사는 됫박은 깊게 하여 오고 가는 곡식마다 훔친 양이 도합 이천 섬. 저울추에 납을 부어 근수를 속인 죄. 그리하여 어물전에서 빼돌린 것이 도합 팔백 관. 흉년에 곡식을 감추었다가 폭리를 취한 죄 여러 차례."

    읽는 소리가 이어질수록 배중석의 얼굴이 하얘졌습니다. 저 장부에 뭐가 그리 소상히 적혀 있는지, 자기가 언제 무엇을 속였는지까지 낱낱이 나와 있었으니까요.

    "또한 옹기장이 정 노인의 차용증을 고쳐 스무 냥을 열 냥으로 줄인 죄. 이로 인해 정 노인은 화병으로 죽고, 그 딸은 혼기를 놓쳐 남의집살이로 갔으며, 정 노인의 넋은 지금도 이승을 떠돌며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음."

    그 대목에서 배중석의 무릎이 툭 꺾였습니다. 정 노인이라는 말에 등골이 오싹했거든요. 죽어 가면서 "내 딸, 내 딸 밑천" 하고 되뇌던 그 얼굴이 눈앞에 선했습니다.

    "대, 대왕마마. 그건…… 그건 장사가 다 그런 거라……."

    "장사가 다 그렇다?"

    초강대왕의 목소리가 뚝 떨어졌습니다. 그 소리에 궁궐 기둥의 불길이 화르륵 치솟았어요.

    "정직하게 장사하는 자도 세상에 수두룩하다. 같은 매내미 장바닥에도 되질 바르게 하고 저울 바르게 다는 상인이 어찌 없었겠느냐. 너는 남들도 다 그런다는 핑계로 네 도둑질을 덮었을 뿐이다. 됫박을 속이는 것은 남의 곡식을 훔치는 것이요, 저울을 속이는 것은 남의 살점을 떼어 가는 것이다. 칼 들고 담을 넘어야만 도둑이 아니야."

    배중석은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그저 품에 안은 엽전 꿰미만 자꾸 만지작거렸지요. 그걸 본 초강대왕이 눈살을 찌푸리셨습니다.

    "그 손에 든 것은 무엇이냐. 아직도 그 쇳조각이 여기서 통할 줄 아느냐. 이리 내놓아라."

    옥졸이 다가와 엽전 꿰미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배중석이 그걸 안 놓으려고 어찌나 버둥거리는지, 옥졸 셋이 달라붙어서야 겨우 떼어 냈어요. 그렇게 빼앗은 엽전을 저울의 덕 쪽 접시에 올려 보았습니다. 혹시나 하고요.

    그런데 엽전은 접시에 닿는 순간 스르르 녹아 검은 재가 되어 흩어졌습니다. 저승에서는 정말로 아무 값어치가 없었던 거지요. 배중석은 그 광경을 보고 넋이 나갔습니다. 평생 그 돈을 위해 살았는데, 그 돈이 접시에 닿자마자 재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 그럴 리가…… 내 평생을 바친 돈인데……."

    "평생을 바쳐 모은 것이 결국 한 줌 재로구나. 너는 그 재를 모으느라 사람을 몇이나 울렸느냐. 옹기장이 노인 하나만이 아니다. 됫박에 속아 억울해한 아녀자가 몇이며, 저울에 속아 손해 본 늙은이가 몇이더냐. 그 눈물이 다 여기 장부에 적혀 있느니라."

    배중석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저 끓는 솥으로 끌려가는구나 싶어 온몸이 벌벌 떨렸지요.

    초강대왕이 붓을 들어 판결문에 무언가를 적으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궁궐 밖에서 옥졸 하나가 급히 뛰어 들어와 아뢰었지요.

    "대왕마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승에서 원정(原情)이 올라왔사옵니다."

    "원정? 누구의 원정이냐."

    "매내미 장터 사람들의 원정이옵니다."

    초강대왕의 눈썹이 꿈틀했습니다. 배중석도 고개를 번쩍 들었지요.

    ※ 4: 저울을 흔든 편지 한 장

    옥졸이 두루마리 하나를 받쳐 들고 들어왔습니다. 초강대왕이 그것을 펼쳐 읽으셨어요. 그런데 읽어 내려갈수록 대왕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더랍니다.

    그 원정은 배중석의 죄를 고발하는 글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배중석을 살려 달라는 탄원서였어요. 그것도 매내미 장터 사람들이 손도장을 꾹꾹 눌러 찍은 것이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냐."

    초강대왕이 배중석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배중석 자신도 어리둥절했지요. 자기를 그렇게 원망했을 사람들이 왜 살려 달라 빌었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알고 보니 이런 사연이 있었더랍니다. 배중석이 죽기 삼 년 전, 매내미 장터에 큰 불이 난 적이 있었어요. 한밤중에 어물전에서 불이 나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장터 절반이 잿더미가 됐지요. 곡식전도 무명전도 옹기전도 다 타 버렸습니다. 상인들은 하루아침에 밑천을 다 잃고 길바닥에 나앉게 됐어요. 겨울이 코앞인데 곳간은 텅 비었으니, 그해 겨울을 어찌 날지 다들 눈앞이 캄캄했지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장터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그때 배중석이 곳간을 열었던 겁니다. 배중석네 싸전은 장터 끄트머리에 있어 용케 불을 면했거든요.

    물론 배중석이 착해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이자를 두둑이 받고 빌려주려는 속셈이었지요. 불난 사람들한테 곡식을 비싸게 넘기면 큰 이문이 남을 테니까요. 그런데 막상 잿더미 앞에서 우는 사람들을 보니, 웬일인지 옹기장이 정 노인 생각이 났더랍니다. 화병으로 죽어 가면서 "내 딸, 내 딸 밑천" 하고 되뇌던 그 얼굴이요. 배중석은 그날 밤 곳간에서 엽전을 세다가 처음으로 잠을 못 이뤘습니다. 짤그랑거리는 돈 소리가 그날따라 사람 울음소리처럼 들렸던 겁니다.

    이튿날 배중석은 불탄 상인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이자도 없이, 차용증도 없이 곡식과 밑천을 나눠 줬어요.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지요. 사람들이 하도 놀라 어리둥절해하니, 배중석은 퉁명스럽게 이렇게 말했다지요.

    "됫박 야무진 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 아니여. 그냥…… 그냥 오늘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딴소리 말고 가져가."

    그렇게 나눠 준 것이 곳간 곡식의 태반이었습니다. 덕분에 매내미 장터는 이듬해 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지요. 상인들은 배중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은혜를 잊지 못해 다 같이 손도장을 찍어 저승에 탄원을 올린 겁니다.

    "저 사람이 됫박을 속인 건 압니다. 우리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불난 그해 겨울, 저 사람이 곳간을 안 열었으면 우리 백 식구가 다 굶어 죽었습니다. 죄는 죄대로 물으시되, 그 한 번의 정만은 부디 저울에 함께 달아 주십시오."

    탄원서의 마지막은 그렇게 맺어져 있었습니다.

    초강대왕이 다 읽고는 각민 판관을 보았습니다.

    "이 일이 장부에 있느냐."

    "있사옵니다. 다만 워낙 죄가 무거워 덕 쪽으로는 미처 셈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덕을 저울에 올려라."

    판관이 그 선행을 저울의 덕 쪽 접시에 올렸습니다. 그러자 텅 비어 하늘로 떠 있던 접시가 스르르 내려오기 시작했어요. 재물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던 저울대가 조금씩, 조금씩 수평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완전히 같아지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아까처럼 한쪽으로만 처박히지도 않았습니다.

    초강대왕이 한참 그 저울을 바라보시더니 입을 여셨습니다.

    "배중석. 너는 평생 됫박과 저울로 남을 속인 자다. 그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마땅히 화탕지옥에 들어가 끓는 물에 삶겨야 할 것이야."

    배중석은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이제 끝이구나 싶었지요.

    "허나."

    대왕이 말을 이었습니다.

    "너는 죽기 전 삼 년, 곳간을 열어 백 식구를 살렸다. 그것도 이자 없이, 문서 없이. 그날 네가 정 노인을 떠올리며 잠 못 이룬 것을 저승은 다 안다. 도둑의 마음에도 사람의 마음이 한 조각 남아 있었던 게지. 그 한 조각이 오늘 너를 살렸다."

    초강대왕이 붓을 들어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배중석을 화탕지옥에 넣되, 쇳물처럼 끓는 큰 솥이 아니라 가장 온도가 낮은 솥에 넣어 백 일을 삶으라. 네가 됫박으로 훔친 곡식의 양만큼 뜨거움을 견디게 하라. 백 일이 지나거든 다시 사람으로 나게 하되, 이번에는 가난한 됫박 장수의 자식으로 나게 하라. 남에게 한 되를 속이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속는 편에 서서 평생 배우게 하라."

    그 판결에 배중석은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끓는 솥에 백 일이라니 무섭기는 했지만, 쇳물 끓는 큰 솥에 던져지지 않은 것만도 천행이라 여겼지요.

    그러고는 대왕이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리셨어요.

    "그리고 매내미 사람들의 탄원은 갸륵하다. 백 일 뒤 저자가 다시 태어나거든, 그 새 삶에서는 정직한 됫박으로 복을 받게 하라. 이승 사람들이 저를 위해 손도장을 찍어 준 그 마음이, 저자가 새로 살아갈 밑천이 될 것이다."

    배중석은 그제야 엎드려 엉엉 울었습니다. 살아생전 그렇게 많은 돈을 세면서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었지요.

    "대왕마마, 소인이 어리석었습니다. 됫박 한 줌 아끼자고 사람을 잃고, 저울 한 냥 속이자고 하늘을 속이려 했습니다. 백 일이 아니라 천 일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제야 사람 소리를 하는구나. 데려가라."

    옥졸들이 배중석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끌려 나가면서 배중석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어요. 저울의 덕 쪽 접시가 아직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작은 한 조각의 정이, 지옥의 온도를 낮춰 준 겁니다.

    훗날 매내미 장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배중석이 죽고 이십 년쯤 지나, 가난한 됫박 장수 집에 사내아이가 하나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자라 매내미에서 제일 됫박 바른 상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곡식을 팔 때는 됫박에 수북이 담아 손으로 꾹 눌러 주었고, 흉년이면 제일 먼저 곳간을 열었지요. 사람들이 어찌 그리 후하냐 물으면, 그 상인은 늘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됫박은 남을 속이는 게 아니라, 사람을 재는 저울이니까요."

    그 됫박 바른 상인이 누구였는지는, 여러분도 이제 짐작하시겠지요.

    유튜브 엔딩멘트

    『시왕경』은 죽은 지 열나흘째, 제이전 초강대왕 앞에서 남의 것을 탐한 죄를 심판한다 전합니다. 그 곁엔 죄의 무게만큼 온도가 달라지는 화탕지옥의 무쇠 솥이 끓고 있지요. 그런데 오늘 이야기가 일러 주는 것은 이렇습니다. 저승의 저울은 재물이 아니라 덕을 단다는 것. 그리고 도둑의 마음에 남은 정 한 조각이, 끓는 솥의 불길마저 낮출 수 있다는 것. 오늘 내 됫박은 남을 속이고 있지 않은지요. 마음에 닿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다음 이레, 제삼전 송제대왕 앞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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