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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불 잠재운 아들의 사십구재 [어우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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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이 독한 노인네야, 피눈물 흘려 모은 내 자식 목숨값을 앗아가고 무사할 줄 아느냐!" 피도 눈물도 없던 마을의 고리대금업자 최 부자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습니다. 눈을 떠보니 그곳은 펄펄 끓는 무쇠솥이 입을 벌리고 있는 끔찍한 화탕지옥! 뼈가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서 절규하던 그에게, 이승에서 들려온 아들의 목탁 소리는 한 줄기 기적을 몰고 오는데… 지옥불마저 잠재운 아들의 지극한 사십구재, 그 감동적인 이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 1: 피눈물로 쌓아 올린 금자탑, 최 부자의 비참한 최후
조선 시대 어느 평화롭던 고을, 산세는 수려하고 땅은 비옥하여 본래 인심 좋기로 소문난 마을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얼굴에는 짙은 수심과 원망의 그림자가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그 모든 원흉은 고을의 절반을 제 땅으로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내, 최 부자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솟을대문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았고, 마당에는 머슴들이 바쁘게 오가며 쌀가마니를 산더미처럼 쌓아 올렸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가난한 이웃들의 처절한 통곡뿐이었습니다. 최 부자는 장리쌀을 빌려주며 봄에 한 가마니를 주면 가을에 세 가마니로 갚으라는 악독한 고리대금을 업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백성들에게도 자비란 추호도 없었습니다.
"아이고, 대감마님! 제발 며칠만 기한을 늦춰주십시오. 우리 늙은 어미가 병석에 누워 약재를 구하느라 장리쌀을 제때 갚지 못했습니다. 올가을 추수가 끝나는 대로, 제 뼈를 갈아서라도 갚겠습니다요!"
"이놈아! 내 돈이 네놈 쌈짓돈인 줄 아느냐! 기한을 넘겼으면 당연히 집문서라도 내놓아야지. 여봐라! 당장 저놈의 초가삼간을 헐어버리고, 외양간에 있는 누렁이 한 마리라도 끌고 오너라!"
최 부자의 호통에 건장한 머슴들이 달려들어 늙은 농부의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쳤습니다. 평생 피땀 흘려 마련한 소 한 마리를 뺏기지 않으려 바닥을 기며 매달리는 농부를 발길질로 쳐내는 최 부자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어린 자식을 키우는 과부의 유일한 텃밭을 빚을 핑계로 빼앗아버리고, 굶주림에 지쳐 담장 너머로 떨어진 감 한 알을 주워 먹은 어린아이의 손목을 몽둥이로 내리치는 잔혹한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하늘을 우러러 저주했습니다. 하늘이 있다면, 명도(冥途)가 있다면 저 악독한 인간을 어찌 그냥 두시느냐며, 밤마다 서낭당에 정화수를 떠놓고 최 부자의 천벌을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을 남의 눈에 피눈물을 내며 산처럼 재물을 쌓아 올리던 최 부자에게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 찾아왔습니다. 환갑을 갓 넘긴 어느 늦가을 밤, 여느 때처럼 곳간에 들어가 엽전 꾸러미를 쓰다듬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그는 갑작스럽게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뒹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쇠스랑이 심장을 푹푹 찌르고 들어오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었습니다.
"아악! 가, 가슴이... 누가 내 가슴을 찢어놓는구나! 여보게, 밖에 누구 없느냐! 의원... 당장 의원을 불러오너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기어 다니던 최 부자는 결국 피를 토하며 혼절하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머슴들과 외아들 최 도령이 달려와 그를 안방으로 옮기고 고을에서 제일가는 명의란 명의는 다 불러모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의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으며 진맥을 포기했습니다.
"병의 뿌리가 너무 깊고, 심화(心火)가 뼛속까지 타들어가 백약이 무효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방 안, 식은땀을 비 오듯 쏟으며 헐떡이는 최 부자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섰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허공을 향해 앙상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듯 허우적거리며 섬뜩한 신음을 내뱉었습니다.
"내 돈... 내 곳간 열쇠... 누가 훔쳐 가선 안 돼. 내가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한 푼도 내어줄 수 없다..."
아버지의 참혹한 임종을 지켜보던 아들 최 도령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어 고개를 떨구고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최 도령은 아버지와 달리 본래 심성이 비단결처럼 곱고 학문을 즐겨 하며 사람의 도리를 중히 여기는 선비였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아버지의 가혹한 처사에 가슴 아파하며 몰래 쌀을 퍼다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곤 했었으나, 불도저 같은 아버지의 탐욕을 완전히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숨을 거두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자신의 업보를 참회하기는커녕 재물만을 탐하는 아버지를 보며, 아들의 가슴은 숯덩이처럼 타들어 갔습니다. 결국 최 부자는 덜컥거리는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두 눈을 부릅뜬 채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한평생 마을 사람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며 군림했던 부자의 최후는 그 어떤 빈자의 죽음보다도 초라하고 기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 2: 업경대에 비친 참혹한 죗값, 화탕지옥의 끓는 가마솥
숨이 끊어지는 찰나, 최 부자는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몽롱한 의식 속에서 번쩍 눈을 떴습니다. 분명 화려한 비단 이불을 덮고 있던 따뜻한 안방이어야 할 터인데,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잿빛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기괴하고 음산한 황야였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어디선가 쇠사슬이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키가 장승만 하고 얼굴에 시퍼런 종이를 바른 듯 끔찍한 형상을 한 두 명의 저승사자가 불쑥 나타났습니다.
"죄인 최 만석은 명을 다하였으니,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사자 중 한 명이 던진 검은 쇠사슬이 뱀처럼 허공을 날아와 최 부자의 목을 칭칭 감았습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고을에서 제일가는 최 부자다! 당장 내 목에서 이 더러운 사슬을 풀지 못할까! 엽전이 필요하면 수만 냥이라도 줄 터이니 당장 나를 내 집으로 돌려보내 다오!"
최 부자는 목에 감긴 사슬을 뜯어내려 발버둥 치며 고함을 질렀지만, 사자들은 콧방귀를 뀌며 쇠사슬을 거칠게 낚아챘습니다. 목이 졸려 숨이 막히는 고통 속에 바닥을 질질 끌려가며, 최 부자는 비로소 자신이 죽어 저승의 문턱을 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살아생전 쌓아둔 황금도, 수천 마지기의 땅도, 호통 한 번에 벌벌 떨던 머슴들도 이 차가운 황천길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끌려간 곳은 하늘도 땅도 붉은 핏빛으로 물든 끔찍한 성곽, 명부전(冥府殿)이었습니다. 삼엄한 옥졸들이 창을 겨누고 있는 거대한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천지를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염라대왕이 좌정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심판정에 다달았습니다. 대왕의 형형한 눈빛은 단박에 최 부자의 오장육부를 꿰뚫어 보는 듯했습니다.
"죄인 최 만석은 고개를 들라! 네놈은 이승에서 수십 년을 살며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고 재물에만 눈이 멀어 수많은 백성의 피눈물을 쥐어짜 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대, 대왕마마! 억울합니다요! 저는 그저 빌려준 돈을 정당하게 받았을 뿐입니다. 그들이 무능하여 빚을 지고 갚지 못한 것을 어찌 제 탓이라 하십니까! 저는 억울합니다!"
최 부자가 끝까지 변명을 늘어놓자, 염라대왕은 무서운 진노의 표정을 지으며 옆에 놓인 거대한 거울, 업경대(業鏡臺)를 가리켰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터인데, 끝까지 간악한 세치혀를 놀리는구나. 저 업경대를 보아라! 네놈이 지은 끔찍한 죄악이 낱낱이 비칠 것이다!"
업경대에는 곧바로 이승에서의 일들이 환등기처럼 비쳐지기 시작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해 목을 맨 노인의 축 늘어진 발, 젖이 나오지 않아 울부짖는 아기를 품에 안고 뺏긴 소를 보며 피눈물을 흘리던 과부, 몽둥이에 맞아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통곡하던 아이의 모습까지. 그들이 흘린 눈물이 모여 거대한 강을 이루고, 그들이 내뱉은 한숨이 모여 지옥의 거센 비바람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생생하고도 끔찍한 광경 앞에 최 부자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네놈이 빼앗은 것은 쌀가마니가 아니라 저들의 생명이었고, 네놈이 부순 것은 초가집이 아니라 저들의 희망이었다. 저 억울한 영혼들의 피울음이 명부전의 담장을 넘어 내 귀를 찌른 지 오래다. 여봐라! 저 악독한 놈을 당장 화탕지옥(火湯地獄)으로 끌고 가 펄펄 끓는 무쇠솥에 던져 넣어라! 저놈의 살이 녹고 뼈가 타들어 가는 고통을 영겁의 시간 동안 맛보게 하라!"
염라대왕의 엄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옥의 야차들이 달려들어 최 부자를 질질 끌고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탕지옥으로 향했습니다. 지옥의 풍경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집채만 한 무쇠솥 수십 개가 시뻘건 용암 위에서 펄펄 끓고 있었고, 솥 안에서는 형벌을 받는 죄인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누런 쇳물 위로 사람의 뼈와 살덩이가 뒤엉켜 떠오르는 끔찍한 광경에 최 부자는 기절할 듯 발버둥 쳤습니다.
"아이고, 대왕마마!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저 솥에만은 넣지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옥졸들은 자비 없이 최 부자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펄펄 끓는 무쇠솥 한가운데로 던져버렸습니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끓는 쇳물이 온몸을 덮치는 순간, 최 부자는 혀가 말려 들어가고 성대가 찢어질 듯한 극도의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끄아아아악! 뜨거워! 내 살이, 내 뼈가 녹는다! 사람 살려! 아들아, 성진아! 애비 좀 살려다오!"
살갗이 짓무르고 뼈가 드러나는 고통 속에서 위로 솟구치려 할 때마다 지옥의 옥졸들이 창으로 찔러 다시 쇳물 속으로 처넣었습니다. 백 번을 기절하고 천 번을 깨어나며 영원히 반복되는 끔찍한 팽형(烹刑) 속에서, 최 부자는 그제야 이승에서 자신이 남의 가슴에 박았던 대못이 얼마나 아픈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너무도 뼈저리게 깨달으며 절규하고 있었습니다.
※ 3: 곳간을 열고 차용증을 태운 아들, 절에 들어 앉다
이승에서는 최 부자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습니다. 고을에서 제일가는 갑부의 상가였지만, 문상을 오는 조문객의 발길은 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억지로 불려 온 몇몇 친척들과 빚을 져서 눈치를 보느라 찾아온 소작농들이 전부였고, 마당에는 슬픔을 가장한 어색한 침묵만이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상주인 아들 최 도령의 슬픔만큼은 그 누구보다 깊고 참담했습니다. 그는 굵은 삼베옷을 입고 빈소에 엎드려 밤낮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눈물은 아버지를 여읜 자식으로서의 순수한 애통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평생 죄업만을 쌓다 떠난 아버지의 영혼이 저승에서 받게 될 끔찍한 심판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두려움과 회한의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어찌하여 그리도 재물에만 집착하며 모질게 사셨습니까. 저승에는 금전도 명예도 가져가지 못하는 법이거늘, 이승에서 쌓은 그 높고 무거운 원업(怨業)을 저승 가시는 길에 홀로 어찌 다 짊어지시렵니까. 불효자는 아버지를 말리지 못한 죄책감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장례를 모두 마치고 무덤에 흙을 덮은 날 밤, 최 도령은 집안의 늙은 집사를 은밀히 불렀습니다. 그의 눈빛에는 이전과는 다른 단호하고도 비장한 결의가 서려 있었습니다.
"집사 어르신, 내일 동이 트는 대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우리 집 앞마당으로 불러 모아주십시오. 그리고 집안 곳곳에 있는 곡식 창고의 자물쇠를 전부 부수어 열어두십시오."
다음 날 아침, 영문도 모른 채 최 부자 댁 앞마당에 웅성거리며 모여든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은 곧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소복을 벗고 단정한 선비복으로 갈아입은 최 도령이 툇마루에 서 있었고, 그의 발치에는 사람들의 피눈물이 고스란히 담긴 수십 권의 빚 장부와 차용증 더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최 도령은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며 큰절을 올렸습니다.
"고을 어르신들과 이웃 여러분. 저희 아버님께서 생전에 여러분께 지은 크나큰 죄악을 자식인 제가 어찌 백 번 사죄한들 씻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탐욕에 눈이 멀어 여러분의 피와 땀을 쥐어짜 낸 그 죄업을, 제가 대신하여 머리 숙여 깊이 참회합니다."
최 도령은 떨리는 손으로 횃불을 들어 장부 더미에 불을 붙였습니다. 확! 하는 소리와 함께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마을 사람들의 가슴을 짓눌렀던 끔찍한 빚더미가 검은 재가 되어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부로 이 최씨 집안에 여러분이 진 빚은 단 한 푼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모조리 탕감하겠습니다. 또한, 아버님이 강제로 빼앗았던 땅문서와 집문서 역시 본래의 주인들에게 모두 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 곳간을 열어두었으니, 집에 쌀이 없어 굶주리는 분들은 춘궁기를 날 수 있을 만큼 얼마든지 쌀과 보리를 가져가십시오. 이것은 적선이 아니라, 저희 가문이 여러분께 빼앗았던 것을 마땅히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빚더미가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빼앗겼던 전답을 돌려받게 되자 여기저기서 참았던 통곡과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이고, 도령님! 아니, 은인 어른!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으리까!"
사람들은 땅에 엎드려 최 도령을 향해 절을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의 악행으로 굳게 닫혀있던 사람들의 원망 어린 마음이, 아들의 진심 어린 참회와 희생 앞에서 봄눈 녹듯 스르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전 재산의 절반 이상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빚을 탕감해 준 최 도령은, 가벼워진 마음과 빈손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그가 향한 곳은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사찰, 백련암이었습니다.
대웅전에 들어선 최 도령은 주지 스님을 찾아가 삼배를 올리고 간곡하게 청했습니다.
"스님, 제 아비의 무거운 죄업을 씻고 지옥에서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도록, 49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처님 전에 사십구재(四十九齋)를 올리고자 합니다. 제 모든 정성을 바칠 테니, 부디 제가 재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주지 스님은 최 도령의 맑고 결연한 눈동자와 그가 이승에서 행한 크나큰 공덕을 이미 전해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부터 최 도령의 처절하고도 거룩한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따뜻한 방을 마다하고 차가운 법당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하루에 삼천 배를 올리며 이마에서 피가 나고 무릎이 헐어 진물이 흐를 때까지 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향을 피우고 부모은중경을 소리 내어 읽으며 부처님의 자비가 저 깊고 어두운 지옥 밑바닥까지 닿기를, 아버지의 고통받는 영혼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기를 간절히, 너무도 간절히 눈물로 애원했습니다. 아들의 그 피 맺힌 목탁 소리와 독경 소리는 산사를 넘어, 이승의 경계를 뚫고 저승의 굳게 닫힌 문을 향해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 4: 지옥으로 쏟아지는 감로수, 기적이 시작된 49일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잦아든 깊고 험한 산속, 첩첩산중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사찰 백련암의 적막한 밤공기를 가르는 것은 오직 한 사내의 처절하고도 구슬픈 목탁 소리와 쉰 목소리로 읊조리는 독경 소리뿐이었습니다. 초재부터 시작된 아들 최 도령의 참회 기도는 이재, 삼재를 거치며 단 하루, 아니 단 한 시간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바위처럼 꼿꼿하고 단정했던 젊은 선비의 몸은 불과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야위어 피골이 상접해갔고, 하루에 삼천 번씩 부처님을 향해 몸을 굽혔다 펴는 가혹한 고행으로 인해 무릎의 여린 살이 모두 짓물러 터져 그가 입고 있던 거친 삼베바지는 매일같이 검붉은 피로 얼룩졌습니다. 이마를 차가운 법당 바닥에 너무 세게 찧어 피딱지가 앉았다가 떨어지기를 수십 번, 며칠째 물 한 모금 제대로 넘기지 못해 입술은 바싹 타들어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터졌습니다. 하지만 법당의 흔들리는 촛불 아래 비친 최 도령의 두 눈빛만큼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의 북극성처럼 형형하고도 결연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불보살을 우러러보는 그의 맑은 눈동자에는 오직 지옥불에 떨어져 고통받고 있을 아버지를 향한 애끓는 효심과, 아버지가 평생토록 지은 그 지독하고 무거운 죄업을 자신이 온전히 대신 짊어지겠다는 거룩한 희생정신만이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자비로우신 관세음보살님. 제 아비가 생전에 지은 그 끔찍하고 무거운 죄악은 모두 이 못난 자식이 아비를 올바른 길로 이끌지 못하고 방관한 탓이옵니다. 아비의 죄는 곧 자식의 죄이니, 차라리 제 남은 수명을 모두 거두어 가시고 그 혹독한 죗값을 온전히 제게 물으시옵소서. 부디 제 아비가 갇힌 저 끔찍한 지옥의 불길을 거두어 주시고, 길 잃은 영혼에게 한 줄기 자비의 빛을 내려주시옵소서. 제가 지옥의 문지기가 되어 영원토록 죗값을 치를 터이니, 부디 아버님만은 구원해 주시옵소서.'
최 도령의 피 맺힌 기도가 하얀 향 연기를 타고 이승의 맑은 하늘을 넘어, 겹겹이 닫혀있는 저승의 굳은 빗장을 두드리며 스며들고 있던 바로 그 시각. 오직 참혹한 비명과 피비린내만이 진동하던 명부의 끔찍한 화탕지옥(火湯地獄)에서는 지옥이 생긴 이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경이롭고도 신비로운 기적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시뻘건 용암이 들끓는 거대한 가마솥 한가운데서, 살이 녹아내리고 뼈가 타들어 가는 영겁의 고통 속에서 절규하던 최 부자는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어느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막을 찢어놓을 듯 사방에서 울려 퍼지던 다른 죄인들의 처절한 비명소리와, 살점을 뜯어내는 옥졸들의 무자비한 쇠채찍 소리 사이로, 아주 멀고도 아득한 곳에서부터 맑고 청아한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똑, 또르르, 똑. 그것은 이승의 절간에서나 들을 법한 청명한 목탁 소리였고, 그 뒤를 이어 귀에 익은 다정하고도 구슬픈 목소리가 부모의 은혜를 기리는 불경을 외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땅 끝에 내리는 시원한 단비처럼 지옥의 탁하고 뜨거운 공기를 가르고 최 부자의 귓가에 부드럽게 내려앉았습니다.
"이, 이게 무슨 소리냐... 아들아... 성진아, 네가 이 못난 아비를 부르는 소리냐... 이 지옥 밑바닥까지 어찌 네 목소리가 들린단 말이냐..."
목탁 소리가 지옥의 구천을 맴돌며 점점 그 소리를 키워가기 시작하자, 이내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최 부자를 단숨에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타오르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무쇠솥 밑의 시뻘건 유황불이,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어루만지기라도 한 듯 목탁 소리의 장단에 맞추어 서서히 그 기세를 잃고 사그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인들의 뼈와 살을 튀겨내듯 달아올랐던 거대한 무쇠솥은 이내 열기를 잃고 본래의 검은 빛을 되찾았고, 펄펄 끓어오르며 사람의 살을 녹여대던 누렇고 끈적한 쇳물은 놀랍게도 차갑고 투명한 맑은 물로 변해갔습니다.
"아아...! 차갑다... 시원해...! 불이 꺼졌다! 나를 태우던 불길이 사라지고 쇳물이 맑은 물로 변했어!"
기적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둡고 탁했던 지옥의 허공에서 한 줄기 눈부신 금빛 광명이 쏟아져 내리더니, 이승에서 아들 최 도령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올리는 청정한 기도와 희생의 공덕이 달콤하고 시원한 감로수(甘露水)가 되어 화탕지옥의 무쇠솥 위로 소나기처럼 무수히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영롱한 감로수가 몸에 닿는 곳마다 짓무르고 녹아내렸던 최 부자의 끔찍한 상처가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낫고, 새까맣게 타들어 갔던 뼈 위에 다시 하얗고 부드러운 새살이 돋아났습니다. 펄펄 끓던 지옥의 끔찍한 가마솥은 어느새 청초하고 향기로운 백련과 홍련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연못으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최 부자는 차갑고 맑은 물속에서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감격과 회한에 겨워 아이처럼 소리 내어 오열했습니다.
"아들아...! 내 귀하고 장한 아들 성진아! 네가 결국 이 못난 아비를 살리는구나! 평생 남의 눈에 피눈물만 내며 재물에 눈이 멀어 살았던 이 몹쓸 늙은이를 위해, 네가 그토록 끔찍한 고행을 대신 짊어지고 있단 말이냐! 아비가 밉지도 않더냐, 내 죄가 이리도 무거운데 어찌 네가 그 고통을 감내한단 말이냐!"
지옥을 지키며 죄인들을 고문하던 흉측한 야차와 옥졸들조차 이 기상천외한 광경에 압도되어, 들고 있던 쇠스랑과 몽둥이를 바닥에 떨어뜨린 채 망연자실하여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명부의 지옥문이 열린 이래 수천수만 년 동안 단 한 번도 불길이 꺼진 적 없던 화탕지옥에, 이승의 공덕이 비처럼 쏟아져 불을 끄고 연꽃을 피워낸 이 엄청난 사태는 즉각 명부전에서 모든 것을 통괄하는 염라대왕에게 보고되었습니다. 보고를 받은 염라대왕은 옥좌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경악을 금치 못했고, 즉시 이승을 굽어보는 거울인 업경대를 가져오라 명했습니다. 거울 속에는 무릎이 다 해지고 이마에서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고통에 굴하지 않고 아버지를 위해 49일째 마지막 기도를 피 토하듯 올리고 있는 최 도령의 숭고하고 거룩한 모습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염라대왕의 엄숙하고 차가운 얼굴에도, 일찍이 본 적 없는 깊은 감동과 인간에 대한 경외감의 파문이 잔잔하게 일고 있었습니다.
※ 5: 염라대왕의 마지막 심판과 감형, 공덕이 빚어낸 광명
어느덧 이승과 저승을 가로지르는 무심한 시간이 흘러, 죽은 자의 영혼이 명부에서 자신의 업보를 결산하고 마지막 최종 심판을 받는다는 사십구일째 되는 날, 즉 칠칠재(七七齋)의 장엄한 날이 밝았습니다. 이승의 백련암 대웅전에서 마지막 49재를 지극한 정성으로 올리던 최 도령은, 마침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체력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마지막 삼천 배의 세 번째 절을 올리던 중 바닥에 엎드린 채 그만 까무러치며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피투성이가 되고 야위어버린 가엾은 아들의 몸 위로, 법당 문틈을 뚫고 들어온 아침 햇살이 마치 부처님의 손길처럼 자비롭고 따뜻하게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각, 저승의 명부전에서는 염라대왕이 중앙의 높은 옥좌에 위풍당당하게 좌정한 가운데 최 부자의 영혼을 심판하는 마지막 재판이 열렸습니다. 화탕지옥의 연못에서 건져져 심판정에 끌려 나온 최 부자는, 처음 이승을 떠나 명부에 끌려왔을 때 악다구니를 쓰던 탐욕스럽고 흉측했던 몰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습니다. 아들이 올려준 49일간의 기도로 영혼이 맑게 씻긴 그는 단정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옥좌 앞에 꿇어 엎드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겉모습의 평온함과 달리, 그의 가슴속에는 지난날 자신의 끔찍했던 과오에 대한 뼈를 깎는 듯한 참회와, 자신 때문에 피눈물을 흘렸을 이웃들에 대한 미안함이 뒤섞여 지옥불보다 더 뜨거운 후회의 눈물이 뺨을 타고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묵직하고 장엄하여 명부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죄인 최 만석은 듣거라! 네놈이 이승에서 육신을 입고 수십 년을 살며 지은 죄악은, 백 번을 죽어 화탕지옥의 끓는 가마솥에 처넣어져도 모자랄 만큼 참으로 무겁고 끔찍한 것이었다. 타인의 가난과 고통을 양분 삼아 너의 배를 불리고, 이웃의 눈물을 쥐어짜 황금을 만들었던 그 극악무도한 업보는 본디 영겁의 세월 동안 지옥불에 타는 형벌로 엄히 다스려야 마땅한 법이다. 아직도 네 죄가 억울하다 생각하느냐!"
대왕의 불같은 호통에 최 부자는 변명 한마디 없이 차가운 심판정 바닥에 머리를 거칠게 찧으며 목 놓아 통곡했습니다.
"대왕마마!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제가 인간의 탈을 쓰고 짐승만도 못한 참혹한 삶을 살았습니다. 쇳물에 뼈와 살이 녹아내리는 화탕지옥의 고통 속에서, 저는 비로소 제가 남의 가슴에 무참히 꽂았던 비수의 아픔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너무도 뼈저리게 느꼈사옵니다. 대왕마마, 제 죄는 천 번 만 번 죽어 마땅하오니, 저를 구원하려 하지 마시고 다시 저 끔찍한 지옥의 맨 밑바닥 무간지옥으로 떨어뜨려 주시옵소서. 저는 그 끔찍한 벌을 영원토록 받아야 마땅한 추악한 죄인이옵니다!"
과거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돈으로 저승사자들을 매수하려 들고 변명만 늘어놓던 49일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진심으로 회개하는 영혼의 모습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은 자신의 죗값을 달게 받겠다며 피눈물을 흘리는 최 부자를 조용히 굽어보며, 판관을 시켜 다시 한번 옥좌 옆에 놓인 거대한 업경대를 이끌어 오라 명했습니다.
"네놈 스스로가 죄를 뉘우치니 다행이로다. 허나 고개를 들어 저 거울을 똑똑히 보아라!"
최 부자가 두려운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업경대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과거 그가 저질렀던 악행 대신 이승에서 벌어지고 있는 놀라운 광경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최 부자가 생전에 사람들의 피눈물을 짜내어 천장까지 쌓아두었던 거대한 곡식 창고가 활짝 열려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나뉘어지는 모습, 그가 사람들의 목줄을 옭아맸던 수백 장의 끔찍한 차용증과 노비 문서가 마당 한가운데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던져져 하얀 재가 되어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평생 최 부자를 저주했던 마을 사람들이 이제는 은혜를 입어 굶주림에서 벗어난 뒤, 매일같이 서낭당과 부처님 앞에 엎드려 "은인인 최 도령의 아버님이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게 해달라"며 진심으로 최 부자의 명복을 빌어주는 기적 같은 광경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그 따뜻한 기도와 감사한 마음들이 모여 거대한 황금빛 강물을 이루고, 그것이 곧장 저승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네놈은 비록 하늘이 노할 끔찍한 죄를 지었으나, 네 등에 업혀 이승에 남은 핏줄이 참으로 부처님과 맞먹는 위대한 성인(聖人)의 덕을 가졌구나. 네 아들은 아비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네가 평생 모은 더러운 재물을 단숨에 흩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구휼하였고, 그로 인해 네가 지은 끔찍한 악업을 찬란한 선업(善業)으로 모두 바꾸어 놓았다. 또한, 제 몸을 깎아내는 극진한 사십구재의 기도 공덕으로 기어이 지옥의 불길마저 잠재웠으니, 그 지극한 효심과 우주를 품은 자비심이 마침내 하늘을 크게 감동시키고 지엄한 명부의 법도마저 뒤흔들어 놓았도다!"
염라대왕의 목소리에는 이승의 아들을 향한 깊은 칭송과, 엄정함 속에서도 한없는 자비로움이 깊게 배어 있었습니다. 판관들이 염라대왕의 신호에 따라 거대한 붓을 들어 장부에 적힌 최 부자의 붉은 죄목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명부의 법은 지엄하여 본디 한번 지은 죄를 함부로 지울 수 없으나, 살아있는 자식이 행한 거룩하고 숭고한 공덕(功德)이 죽은 아비의 무거운 죗값을 온전히 치르고도 족히 남음이 있도다. 네 아들이 베푼 은혜로 말미암아 이승에서 너를 향해 쏟아지던 끔찍한 저주의 원성(怨聲)이 모두 찬탄과 축원(祝願)으로 바뀌었으니, 내 특별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네놈의 죄를 크게 감하여 주겠노라! 여봐라, 죄인 최 만석의 목에 찬 칼을 풀고 지옥에서 영원히 건져내어, 저 맑고 평온한 천상(天上)의 세계로 올려보내라. 그곳에서 남은 작은 업을 마저 닦으며, 훌륭한 아들이 살아가는 이승을 굽어보게 하라!"
염라대왕의 자비로운 판결이 떨어지는 순간, 어둡고 칙칙했던 명부전 전체에 눈이 멀 듯 찬란한 금빛 광명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무시무시했던 저승사자들과 옥졸들의 형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늘에서 오색찬란한 구름을 타고 내려온 아름다운 선녀들이 향기로운 연꽃잎을 뿌리며 최 부자를 영원토록 고통 없는 천상의 길로 안내했습니다. 최 부자는 자신을 지옥불에서 구원해 준 염라대왕과 천지신명을 향해 엎드려 백 번의 절을 올리고, 자신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아들이 있는 이승의 하늘을 향해 하염없이 감사의 눈물을 쏟아내며 그 찬란한 빛 속으로 천천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 6: 꿈속에 찾아온 아버지의 미소, 이승에 남겨진 진정한 유산
사십구재를 모두 마치고 지친 몸을 이기지 못해 불상 앞에서 까무러쳤던 최 도령이 다시 천근만근 무거운 눈을 뜬 것은, 백련암의 스님들이 그를 옮겨다 뉘인 고즈넉하고 따뜻한 객방 안이었습니다. 바닥에 이마를 찧어 찢어진 상처와 짓무른 무릎, 그리고 며칠을 굶어 솜뭉치처럼 무거워진 육신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참으로 기이하게도 그동안 가슴속을 커다란 바위처럼 무겁게 짓누르던 원인 모를 끔찍한 돌덩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는 계곡을 흐르는 맑고 시원한 청량한 기운만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평화롭게 감돌고 있었습니다. 겨우 미음을 몇 숟갈 넘기고 다시 깊고 달콤한 잠에 빠져든 최 도령의 꿈속으로, 어느새 눈부시게 환하고 부드러운 빛이 스르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매일 밤 꾸었던, 구름과 안개가 짙게 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비명만이 가득해 답답하기만 했던 꿈속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대신 그곳은 맑게 갠 화창한 봄날처럼 훈풍이 불고, 흐드러지게 핀 복사꽃이 만발한 천상의 아름다운 정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환상적인 복사꽃 나무 아래, 누군가 뒷짐을 진 채 너무도 인자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진아...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하고 장한 아들아..."
그 목소리는 분명 이승에서 머슴들에게 매질을 하며 고함만 쳐대던 억센 아버지 최 부자의 목소리였지만, 그 음성 안에는 과거의 표독스러운 탐욕이나 분노라곤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직 따뜻한 봄바람과 깊은 호수 같은 평온함만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달려간 최 도령의 눈앞에는, 생전의 흉측하고 병들어 죽어가던 표독스러운 늙은이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눈부시게 하얀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고 온화하고 성스러운 빛을 내뿜는, 젊고 평화로운 시절의 다정한 모습으로 아버지가 환하게 웃고 서 있었습니다.
"아, 아버지...! 참으로 아버지가 맞으십니까! 대체 어찌 된 영문이옵니까, 그 무서운 곳에서는 어찌 지내고 계십니까. 제가 올린 부족한 정성의 사십구재가 조금이라도 아버님의 고통을 덜어드렸사옵니까?"
최 도령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아버지의 하얀 옷자락을 부여잡고 어린아이처럼 오열하자, 최 부자는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손을 내밀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들의 거친 손을 깊은 애정을 담아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다 네 덕분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이승에서 부질없는 재물에 눈이 멀어 수많은 이웃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그 무서운 죗값으로, 죽자마자 무시무시한 화탕지옥의 끓는 쇳물에 떨어져 영겁의 고통을 받고 있었단다. 뼈가 녹아내리는 절망 속에서 몸부림칠 때, 네가 바친 지극한 효심과 숭고한 기도 공덕이 맑은 물이 되어 지옥불을 끄고 나를 그 끔찍한 솥에서 건져내어 주었지. 게다가 네가 아비의 이름으로 곳간을 헐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한 덕분에, 그들의 감사 기도가 염라대왕을 감동시켜 내 죄를 씻어 주셨고, 이렇게 고통 없는 좋은 곳으로 올 수 있도록 크나큰 자비를 베풀어 주셨단다. 나는 이승에서 남을 짓밟기만 했던 참으로 끔찍하고 어리석은 아비였으나, 너는 하늘이 내게 굽어살피신 너무도 위대하고 훌륭한 자식이로구나. 평생 남의 것을 빼앗기만 했던 내가, 마지막 가는 길에 너라는 가장 귀하고 빛나는 보물을 이 세상에 남기고 왔으니 이 어찌 감사하고 축복받은 일이 아니겠느냐."
"아버지... 아닙니다. 당치 않으신 말씀이옵니다. 아버님께서 마침내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을 찾으셨다니 자식 된 도리로서 저는 그것으로 족하고 또 족합니다. 부디 그곳에서는 굶주림도 고통도 없이 영원토록 평안하시옵소서."
"그래, 내 이제 가슴에 맺혔던 무거운 업보의 짐을 훌훌 벗어버리고 맑고 높은 곳으로 떠난다. 부디 이승에 남은 네가 베푼 그 넓은 자비심과 따뜻한 마음을 잃지 말고, 이웃들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며 천수를 누리거라. 내 하늘에서 언제나 널 지켜보며 네 걸음마다 축복을 내리마. 고맙다, 참으로 고맙다 아들아."
아버지는 환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여 주더니, 이내 한 줄기 영롱한 빛이 되어 아스라이 흩어지는 분홍빛 복사꽃잎들과 함께 맑은 하늘 위로 사뿐히 날아올라 흩어졌습니다. 깊은 아침, 꿈에서 깨어난 최 도령의 두 뺨에는 아직도 뜨거운 눈물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지만, 그의 야윈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맑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가 환하게 번져 있었습니다.
절에서 기도를 모두 마치고 다시 산 아래 마을로 돌아온 최 도령의 삶은 이전의 으리으리했던 최 부자 댁 외아들의 삶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가 미련 없이 열어준 거대한 곳간과 깨끗하게 탕감해 준 빚 덕분에,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져 굶어 죽어가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다시금 내일을 향한 희망을 품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빈털터리가 된 최 도령을 비웃기는커녕, 그를 단순한 지주나 양반이 아니라 마을을 구원한 살아있는 부처님처럼 마음 깊이 존경하고 친부모처럼 따랐습니다. 비록 예전처럼 고래등 같은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살며 산더미 같은 황금을 곳간에 쌓아두고 호의호식하며 살지는 못했지만, 그는 손수 땀 흘려 일군 작은 텃밭에서 나오는 소박한 곡식으로 이웃과 정을 나누며 누구보다 부유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고리대금업자의 피눈물 묻은 더러운 재산이, 효성 깊고 지혜로운 아들의 거룩한 결단을 통해 마을 사람 모두의 생명을 살리는 진정한 '생명수'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죽은 아비의 무거운 업보마저 깨끗이 씻어내는 살아있는 자식의 맑고 착한 마음씨, 그것이야말로 최 부자가 이승에 남긴 수만 냥의 황금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진정한 유산이 되어 오랜 세월 동안 한 편의 전설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따뜻하게 전해졌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아들의 지극한 사십구재 공덕으로 지옥불마저 잠재운 최 부자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이승에 남겨진 재물이 누군가에게는 피눈물이 되지만, 또 누군가의 손에서는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기적이 되기도 합니다. 업보를 씻어낸 건 결코 돈이 아니라, 비워낼 줄 아는 자식의 거룩한 효심과 맑은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마음에 큰 울림을 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잊지 마시고요. 다음 시간에도 가슴 따뜻해지는 염라야담으로 어르신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