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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패지에 없는 선비의 이름 <용재총화>

by K sunny 2026.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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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패지에 없는 선비의 이름 <용재총화>

저승사자가 한양의 젊은 선비를 데리러 왔으나, 적패지의 이름과 선비의 이름이 미묘하게 다르다. 확인을 위해 명부로 돌아가 보니 동명이인의 착오였다. 선비는 목숨을 건지고, 저승사자는 그 선비가 훗날 만 명을 살리는 의원이 되는 것을 먼 훗날 지켜보며 "그때 착오가 아니라 운명이었다"고 깨닫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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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 하였습니다. 허나, 만약 저승사자가 들고 온 적패지에 적힌 이름이, 단 한 획 차이로 잘못된 것이라면 어찌 되겠습니까. 조선 한양, 어느 봄날 밤이었습니다. 스물다섯 젊은 선비 유상덕은 사랑채에서 의서를 읽다가 문득 등 뒤로 스며드는 싸늘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검은 갓을 깊이 눌러 쓴 자가 서 있었습니다. 저승사자였습니다. 적패지를 펼쳐 이름을 읽는 그 순간, 선비는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아님을 알아챘습니다. 유상덕이 아니라 유상택. 겨우 한 글자, 아니 한 획의 차이였습니다. 저승사자는 당혹하였고, 선비는 필사적이었습니다. 이 한 글자의 어긋남이 과연 명부의 실수였을까요, 아니면 하늘이 그의 목숨을 거두지 않으려 한 더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일까요. 목숨을 건진 그 선비가 훗날 만 명의 목숨을 살리는 의원이 되었을 때, 저승사자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날 밤의 착오는 착오가 아니었노라고. 이것은 저승의 실수로 시작되어 이승의 운명이 된, 한 선비와 저승사자의 이야기입니다.

※ 1: 저승사자가 적패지를 들고 선비를 데리러 온다

성종 치세의 한양이었습니다. 봄이라 하기엔 아직 이른, 매화가 겨우 첫 봉오리를 틔우던 이월 그믐의 밤이었습니다. 북악산 아래 자리한 유씨 가문의 고택은 깊은 밤의 고요 속에 잠겨 있었고, 대문 앞 돌담길에는 달빛조차 엷게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사랑채 안에는 호롱불 하나가 가느다란 심지를 태우며 타고 있었습니다. 그 불빛 아래, 젊은 선비 하나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유상덕이라는 이름의 이 선비는 올해로 스물다섯이었습니다.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세 번을 낙방한 뒤, 어느 날 저잣거리에서 병으로 쓰러진 아이를 보고는 마음이 돌아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유상덕은 붓을 놓고 의서를 펼쳤습니다. 향약집성방의 빼곡한 처방을 밤마다 옮겨 적으며,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 믿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밤도 유상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의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상한론의 한 대목, 열이 속으로 들어가 진액이 마르면 사람이 어찌 되는가를 되새기며 먹을 갈아 필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붓끝이 한 글자를 막 완성하려는 찰나였습니다. 호롱불이 한 차례 크게 흔들렸습니다. 바람이 분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은 닫혀 있었고, 창호지 너머로 스미는 바람조차 없는 고요한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꽃은 분명히 흔들렸고, 한순간 방 안의 온기가 빠져나가듯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습니다.

유상덕은 붓을 멈추었습니다. 이상한 기운이었습니다. 마치 한겨울 얼어붙은 강가에 선 듯한,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가 등 뒤에서 밀려왔습니다. 유상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이 크게 떠졌습니다.

사랑채 문 앞에, 아무런 기척도 없이 한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검은 도포에 검은 갓을 깊이 눌러 쓴 자였습니다. 얼굴은 갓의 그림자에 가려 반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드러난 턱선과 입매는 사람의 것이되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그 사내의 발이었습니다. 마루 위에 서 있으되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고, 마치 땅 위에 드리운 그림자가 형상을 얻어 서 있는 듯하였습니다.

사내의 손에는 붉은 끈으로 묶인 길다란 나무패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적패지였습니다. 저승에서 망자의 이름을 적어 보내는, 죽음의 증표였습니다. 유상덕은 의서에서 읽은 온갖 병증과 죽음의 이치를 알고 있었으나,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병이 아니었습니다. 병보다 먼저 오는 것, 아니 병조차 거치지 않고 곧장 찾아온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검은 사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낮고 평평하였으며, 감정이라고는 실낱만큼도 섞여 있지 않았습니다. 마치 저승의 공기가 사람의 말로 바뀐 듯한 음성이었습니다. 사내는 말하였습니다. 한양 북부 광화방에 사는 유생, 금일이 수한이 다한 날이라 데리러 왔노라고. 적패지에 이름이 적혀 있으니, 순순히 따라오라고.

유상덕의 손에서 붓이 떨어졌습니다. 먹물이 의서 위에 검은 점을 남기며 번졌으나, 그것을 살필 겨를이 없었습니다. 저승사자였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 속에서나 듣던 그 존재가 자신의 사랑채에, 자신을 데리러 와 있었습니다.

※ 2: 선비가 적패지의 이름이 자신과 다름을 발견하고 항변한다

유상덕은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붙들어 매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저승사자 앞에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선비의 체면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를 세워 놓은 것이었습니다.

저승사자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 한 걸음에 방 안의 온도가 한 층 더 내려앉는 듯하였습니다. 호롱불의 불꽃이 다시 한 번 심하게 흔들렸고, 그림자들이 벽 위에서 일그러지며 춤을 추었습니다. 저승사자의 손이 적패지를 펼쳤습니다. 붉은 끈이 풀리며 길쭉한 나무패의 표면이 드러났고, 그 위에는 검은 먹으로 이름 석 자가 또렷이 적혀 있었습니다.

유상덕은 자신도 모르게 그 글자를 눈으로 좇았습니다. 그리고 숨이 멎을 뻔하였습니다. 적패지 위에 적힌 이름은 유상택이었습니다. 덕이 아니라 택이었습니다. 유상덕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 글자는 택이었습니다. 德이 아니라 澤이었습니다. 획 하나, 뜻 하나가 분명히 달랐습니다.

유상덕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습니다. 유상덕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입을 열었습니다. 저, 저승의 사자님,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그 적패지에 적힌 이름이 무엇이옵니까. 소인의 이름은 유상덕이옵니다. 덕, 큰 덕 자를 쓰는 유상덕이옵니다. 그 패에 적힌 이름은 유상택이 아니옵니까.

저승사자의 움직임이 멈추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변화였으나, 분명히 멈추었습니다. 저승사자는 자신의 손에 들린 적패지를 다시 내려다보았습니다. 유상택. 그리고 눈앞의 선비가 말한 유상덕. 택과 덕. 저승사자는 수백 년을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망자를 데려간 존재였으나, 이승 사람이 자신의 적패지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흔치 않았습니다.

유상덕은 그 찰나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마침 의서를 필사하던 종이 위에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유상덕, 필사라 적은 그 글씨를 저승사자에게 내밀었습니다. 보시옵소서. 소인의 이름은 분명 유상덕이옵니다. 적패지의 유상택과는 다른 사람이옵니다. 한 글자가 다르지 않사옵니까.

저승사자는 종이를 보지 않았습니다. 아니,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승사자에게는 이승 사람의 글씨 따위가 증거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패지의 이름과 눈앞의 사람이 대는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저승사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이름이 다르다 하였느냐. 유상덕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하였습니다. 그러하옵니다. 소인은 유상덕이옵니다. 택이 아니라 덕이옵니다. 광화방에 유 씨 성을 가진 자가 소인만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혹여 같은 고을에 유상택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닌지, 부디 확인하여 주시옵소서.

저승사자는 침묵하였습니다. 그 침묵이 얼마나 길었는지 유상덕은 알 수 없었습니다. 한순간 같기도 하고 한나절 같기도 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승사자에게 이것은 난처한 일이었습니다. 적패지에 적힌 이름을 가진 자를 데려가는 것이 저승사자의 소임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앞의 사람이 자신은 그 이름의 주인이 아니라 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정녕 다른 사람이라면, 잘못 데려간 혼은 저승에서도 이승에서도 갈 곳이 없는 떠돌이가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명부에 혼란이 생기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저승사자의 몫이었습니다.

저승사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으나, 아주 미세한 갈등의 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잠시 기다려라. 명부를 다시 확인하고 돌아오겠노라. 단, 이 자리를 벗어나지 마라. 만약 네 이름이 이 적패지의 이름과 같은 것이라면, 그때는 어떤 항변도 소용없느니라.

그 말을 남기고 저승사자의 형체가 흐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검은 도포의 자락이 연기처럼 흩어지더니, 갓의 윤곽이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적패지를 쥔 손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방 안에 다시 온기가 돌아왔고, 호롱불이 제 빛을 되찾았습니다.

유상덕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습니다. 한겨울 찬물에 빠졌다 건져 올린 사람처럼 이가 딱딱 부딪쳤습니다. 살아 있었습니다. 아직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승사자가 돌아올 것이라는 말이 귓전을 맴돌았습니다. 유상덕은 떨리는 두 손을 모아 눈을 감았습니다. 살려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만약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이 목숨을 헛되이 쓰지 않겠노라는 다짐이었습니다.

※ 3: 저승사자가 착오를 보고하고 명부를 재확인한다

저승사자가 돌아간 곳은 이승의 어떤 곳과도 닮지 않은 세계였습니다. 황천이라 불리는 그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길 양옆으로는 이름 모를 꽃들이 핏빛으로 피어 있었습니다. 피안화였습니다. 죽은 자의 혼이 밟고 지나가는 꽃이되, 산 자는 결코 볼 수 없는 꽃이었습니다.

저승사자는 그 길을 성큼성큼 걸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셀 수 없이 오간 길이었으나, 오늘따라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적패지를 들고 이승에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은 저승사자에게는 없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명부의 적패지는 곧 염라대왕의 명이었고, 그 명에 어긋남이 있다는 것은 곧 명부 자체에 흠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명부전은 황천길 끝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거대한 전각이었습니다. 기둥은 검은 돌로 깎아 세웠고, 지붕 위에는 이승의 어떤 기와와도 다른, 납빛의 기와가 겹겹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전각 앞에는 두 줄로 늘어선 귀졸들이 창을 세우고 서 있었고, 그 안쪽에서는 끊임없이 혼들이 줄을 지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 이승을 떠난 자들이었습니다.

저승사자는 귀졸들 사이를 지나 명부전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전각 안은 밖보다 더 어두웠으나, 정면 높은 곳에 자리한 염라대왕의 좌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기운이 그 어둠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은 거대한 체구를 가진 존재였습니다. 얼굴은 위엄 그 자체였고, 눈은 이승과 저승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하였습니다. 그 앞에 놓인 것은 명부, 이승의 모든 사람의 이름과 수한이 적혀 있는 거대한 장부였습니다.

저승사자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그리고 아뢰었습니다. 대왕마마, 적패지를 받들어 한양 북부 광화방의 유생을 데리러 갔사옵니다. 그런데 그 유생이 적패지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이 다르다 하였사옵니다. 적패지에는 유상택이라 적혀 있으나, 그 유생은 자신의 이름이 유상덕이라 하였사옵니다. 택과 덕, 한 글자가 다르옵니다.

명부전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귀졸들이 숨을 죽였고, 줄을 서 있던 혼들조차 고개를 숙였습니다. 염라대왕의 눈이 느리게 저승사자에게로 향하였습니다. 그 눈빛은 노여움이라기보다는 심원한 무게 자체였습니다. 염라대왕이 입을 열었습니다. 적패지의 이름이 다르다 하였느냐. 확인하지 않고 돌아왔단 말이냐.

저승사자는 머리를 더 깊이 숙였습니다. 만약 잘못된 혼을 데려올 경우 명부의 질서가 어지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먼저 확인을 구하러 돌아왔사옵니다.

염라대왕이 명부를 펼쳤습니다. 거대한 장부의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종이가 스스로 펄럭이며 해당하는 면을 찾아갔습니다. 마침내 한 페이지에서 멈추었습니다. 염라대왕의 커다란 손가락이 그 페이지 위를 짚었습니다.

한양 북부 광화방. 유상택. 수한, 갑진년 이월 그믐. 그 아래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한양 북부 광화방. 유상덕. 수한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수한 란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적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명부에 수한이 적히지 않은 자는 아직 수명이 다하지 않은 자를 뜻하였습니다.

염라대왕의 눈이 가늘어졌습니다. 같은 광화방에 유상택과 유상덕, 두 사람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성이 같고 가운뎃 자가 같으며 살아가는 동네까지 같은, 그러나 엄연히 다른 두 사람이었습니다. 적패지에 적힌 이름은 유상택이었고, 저승사자가 찾아간 자는 유상덕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하였습니다. 동명이인의 착오로다. 유상택은 오늘 수한이 다한 자이나, 유상덕은 아직 수한이 남은 자이니라. 네가 찾아간 자는 유상덕이니 데려올 자가 아니로다. 저승사자는 이마를 바닥에 대며 아뢰었습니다.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즉시 유상택을 데리러 가겠사옵니다.

염라대왕이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멈추었습니다. 명부 위에서 유상덕의 이름 옆에 적힌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그 글씨는 명부의 다른 글씨와 달리 아직 윤곽이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먹이 마르기 전의 글씨처럼 아른아른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운명의 기록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은 그 글씨를 읽었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명부를 닫으며 한마디만 덧붙였습니다. 유상덕에게 돌아가 방면을 알리되, 이승에서 본 것과 들은 것을 발설하지 말라 이르거라. 그리고 유상택을 즉시 데려오너라.

저승사자는 일어서며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나 명부전을 나서는 그의 등 뒤로 염라대왕의 낮은 혼잣말이 들렸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운명을 지닌 자라. 대체 무엇을 하게 될 자이기에 수한이 아직 적히지 않았는고.

저승사자는 그 말을 들었으나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저승사자의 소임은 물음이 아니라 수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가슴 한 켠에 작은 돌멩이처럼 남았습니다. 유상덕이라는 이름이, 수한조차 아직 정해지지 않은 그 이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 4: 저승사자가 돌아와 선비에게 방면을 알리고 떠난다

유상덕은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저승사자가 떠난 뒤, 그는 사랑채 마루 위에 정좌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떠나라 하여도 떠날 수가 없었을 것이었습니다. 두 다리에 힘이 빠져 걸을 수가 없었고, 설사 걸을 수 있다 한들 저승사자의 눈을 피해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유상덕은 다만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호롱불의 기름이 줄어든 것으로 보아 한 시진은 족히 지난 듯하였습니다. 그때 다시 그 기운이 찾아왔습니다. 등 뒤에서 스미는 싸늘한 한기,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서늘함이 방 안을 채웠습니다. 유상덕은 눈을 떴습니다. 저승사자가 다시 서 있었습니다.

유상덕의 심장이 멈추는 듯하였습니다.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확인을 하고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적패지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같은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까, 아니면 정녕 다른 사람의 이름이었습니까. 유상덕은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물으면 그 대답이 사형선고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저승사자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평평하였으나, 처음 왔을 때와는 어딘가 미묘하게 다른 빛이 서려 있었습니다. 유상덕. 네 말이 맞았느니라. 적패지의 이름은 유상택이었고, 너는 유상덕이니 다른 사람이 맞느니라. 명부를 확인하였으니 틀림이 없다. 너는 오늘 죽을 자가 아니로다.

유상덕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참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참을 수도 없었습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온몸을 쓸고 지나갔고, 그 뒤를 이어 감사함이, 그리고 그 감사함 뒤를 이어 형언할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왔습니다. 자신은 살았으나, 유상택이라는 이름의 누군가는 오늘 밤 저승사자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같은 성을 가진, 한 번쯤 길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저승사자는 유상덕의 눈물을 말없이 내려다보았습니다. 수백 년 동안 수만의 죽음을 지켜본 존재였으나, 살아남은 자의 눈물은 죽어가는 자의 눈물과는 다른 빛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승사자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오늘 이 일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저승의 일을 이승에 전하면 화가 미치느니라.

유상덕은 젖은 얼굴을 들어 고개를 깊이 숙였습니다. 명심하겠사옵니다. 감히 한 마디도 발설하지 않겠사옵니다.

저승사자는 돌아서려다 멈추었습니다. 멈출 이유가 없었습니다. 소임은 끝났고, 방면을 알렸으니 이제 유상택을 데리러 가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명부에서 본 유상덕의 이름 옆,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흔들리는 글씨. 그리고 염라대왕의 혼잣말. 대체 무엇을 하게 될 자이기에 수한이 아직 적히지 않았는고.

저승사자는 돌아선 채로 물었습니다. 느닷없는 물음이었습니다. 네가 읽고 있던 것이 의서더냐. 유상덕은 뜻밖의 물음에 어리둥절하며 대답하였습니다. 그, 그러하옵니다. 향약집성방과 상한론을 읽고 있었사옵니다.

저승사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유상덕의 책상 위에 놓인 의서와 필사본을 한 번 내려다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진짜로 돌아섰습니다. 검은 도포의 자락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고, 형체가 흐려지더니 사라졌습니다.

유상덕은 홀로 남았습니다. 방 안에 온기가 돌아왔고, 호롱불이 다시 밝게 타올랐습니다. 창호지 너머로 새벽의 기운이 어렴풋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유상덕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붓을 집어 들었습니다. 먹물이 번진 의서 위에 다시 글씨를 적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낭비하지 않겠노라. 다시는 이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겠노라. 그날 밤, 유상덕은 날이 밝을 때까지 의서를 놓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문 앞까지 갔다 돌아온 선비는 그 밤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 5: 죽음의 문턱을 넘긴 선비가 의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밤이 지나고 해가 바뀌었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어느덧 다섯 해가 흘렀습니다. 한양은 여전히 북악산 아래 그 자리에 있었고,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고 병들고 나았습니다. 그 흐름 속에 유상덕이 있었습니다.

유상덕은 스물다섯의 그 밤 이후, 단 하루도 의서에서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향약집성방과 상한론을 넘어 의방유취를 독파하였고, 동인경을 외웠으며, 침구경험방의 삼백육십여 혈자리를 손끝으로 익혔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유상덕은 책 속의 의술로는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죽음의 문 앞까지 갔다 돌아온 사람이었기에, 그는 병이란 것이 글자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살과 피와 숨결 위에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습니다.

유상덕은 한양의 이름난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하였습니다. 혜민서의 늙은 의관에게서는 맥을 짚는 법을 배웠고, 종로 저잣거리에서 약초를 파는 노파에게서는 산에서 캐온 약초의 쓰임을 배웠습니다. 활인서에서는 돌림병에 걸린 사람들을 직접 돌보며 열이 사람의 몸을 어떻게 삼키는지를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밥 먹는 것도 잊고 병자의 곁을 지키던 날이 허다하였습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유상덕은 마침내 한양 서부 여경방 저잣거리 한 모퉁이에 작은 의원을 열었습니다. 인덕당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덕을 베풀어 어진 마음을 이룬다는 뜻이었습니다. 의원은 크지 않았습니다. 방 두 칸에 마루 하나가 전부였고, 약장에는 기본적인 약재만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간판도 소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상덕은 그 작은 의원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성으로 진맥하였습니다.

처음에 찾아오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이름 없는 젊은 의원의 솜씨를 믿을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을 고치고, 두 사람을 고치고, 석 달이 지나자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 의원은 맥을 짚는 손이 귀신같다더라. 유 의원은 약값을 못 내겠다 하면 그냥 보내 준다더라. 유 의원은 한밤중에 급한 환자가 오면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진맥을 본다더라.

소문은 저잣거리를 타고 퍼졌고, 여경방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광화방으로, 명례방으로, 남산 아래까지 번져 갔습니다. 유상덕의 의원 앞에는 하나둘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였습니다. 양반도 있었고, 상인도 있었고, 종도 있었습니다. 유상덕은 누가 오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양반의 맥이든 종의 맥이든 병 앞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유상덕에게는 남다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병을 보는 눈이 깊었습니다. 다른 의원들이 드러난 증상만을 보고 약을 지을 때, 유상덕은 그 증상의 뿌리를 찾았습니다. 열이 나는 환자에게 열을 내리는 약만 주는 것이 아니라, 열이 왜 나는지를 먼저 물었습니다. 밥은 제때 먹었느냐, 잠은 편히 잤느냐, 근심이 있느냐, 집안에 우환이 있느냐. 유상덕은 사람의 몸을 보기 전에 사람의 마음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유상덕의 의술을 남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병이란 것이 몸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도 온다는 것을 유상덕은 알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문 앞에 섰던 그 밤, 두려움이 온몸을 어떻게 얼어붙게 하는지를 몸소 겪었기에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상덕은 약을 짓기 전에 먼저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환자의 눈을 들여다보았고, 환자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그 손의 온기가 어떤 약보다 먼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유상덕은 알고 있었습니다.

인덕당의 이름이 한양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유상덕이 의원을 연 지 삼 년째 되던 해부터였습니다.

※ 6: 유 의원이 만 명의 목숨을 살리는 대의가 된다

그로부터 다시 세월이 흘러, 유상덕이 마흔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고, 무더위가 가시기도 전에 가을비가 쏟아졌습니다. 기후가 어지러우면 돌림병이 돈다는 것은 의서에도 적혀 있는 바였으나, 그해의 돌림병은 의서의 기록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역질이었습니다. 남쪽 경상도에서 시작된 열병이 충청도를 거쳐 한양으로 올라왔습니다. 열이 높이 치솟고,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으며,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사람이 쓰러졌습니다. 한양 성안에서만 하루에 수십 명이 쓰러졌고, 활인서는 병자들로 넘쳐났습니다. 관에서는 성문을 닫으려 하였으나 이미 늦었습니다. 병은 성 안에 있었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습니다.

혜민서와 활인서의 의관들이 총동원되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열병의 기세가 워낙 거셌고, 이 역질에 듣는 처방을 정확히 아는 자가 드물었습니다. 의관들마저 병에 쓰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유상덕이 나섰습니다. 유상덕은 수년간 의서를 탐독하며 역질에 대한 처방을 깊이 연구해 두었습니다. 상한론의 처방을 바탕으로 하되, 직접 환자를 보며 깨달은 것들을 더하여 자신만의 처방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유상덕은 인덕당의 문을 활짝 열고 역질 환자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시에 자신이 만든 처방전을 적어 한양의 다른 의원들에게 보냈습니다. 약재의 종류와 분량, 달이는 시간과 복용법을 빼곡하게 적은 처방전이었습니다.

유상덕은 하루에 서너 시진밖에 자지 않았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환자를 진맥하고 약을 짓고 약을 달이고 약을 먹였습니다. 인덕당의 방 두 칸으로는 부족하여 마루에까지 환자를 눕혔고, 마루마저 부족하면 마당에 자리를 깔았습니다. 유상덕의 제자 둘과 약재를 다루는 일꾼 셋이 밤낮으로 약을 달였으나,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유상덕의 처방은 효험이 있었습니다. 다른 의원에서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가던 환자들이, 유상덕의 처방을 쓰고는 열이 내리고 반점이 가라앉기 시작하였습니다. 열 명을 살리고, 스무 명을 살리고, 백 명을 살렸습니다. 유상덕이 보낸 처방전을 받아 쓴 다른 의원들에서도 환자가 살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문은 한양을 넘어 경기도로, 충청도로, 경상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조정에서도 유상덕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의원에서 유상덕을 불러 처방을 물었고, 유상덕은 자신의 처방을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 비방이라 하여 감추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처방을 숨기는 것은 의원이 할 짓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유상덕의 처방은 조정을 통해 팔도에 전해졌고, 각 고을의 의원들이 그 처방을 써서 사람을 살렸습니다.

역질이 물러가는 데 석 달이 걸렸습니다. 석 달 동안 유상덕은 인덕당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몸이 야위어 뼈가 드러났고, 눈 아래에는 검은 그늘이 짙게 내려앉았습니다. 그러나 유상덕의 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는 그 마음이 유상덕을 버티게 하였습니다.

역질이 물러간 뒤, 누군가가 세어 보았습니다. 유상덕이 직접 살린 목숨과 유상덕의 처방을 받아 다른 의원들이 살린 목숨을 합하면 만 명이 넘는다 하였습니다. 만 명이었습니다. 만 명의 사람이 유상덕이라는 한 사람의 의원 덕에 목숨을 건진 것이었습니다.

유상덕에게 대의라는 칭호가 붙은 것은 그 뒤부터였습니다. 유상덕은 그 칭호를 사양하였으나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만 명을 살린 의원, 인덕당의 유 대의. 그 이름은 조선 팔도에 퍼졌고, 유상덕은 자신이 뜻하지 않았던 명성 속에서도 여전히 하루하루 환자를 보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승이 아닌 곳에서 지켜보는 눈이 하나 있었습니다.

※ 7: 저승사자가 유 의원의 이름을 명부에서 다시 마주하며 그날의 뜻을 깨닫는다

명부전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검은 돌기둥은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납빛 기와는 한 장도 빠지지 않았으며, 귀졸들은 여전히 창을 세우고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이승에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저승에는 세월이라는 것이 달리 흐르는 듯하였습니다. 아니, 저승에는 세월이 흐르지 않는다는 편이 맞을 것이었습니다. 다만 명부의 장부만이 끊임없이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승사자는 명부전의 한 켠에 서 있었습니다. 오늘도 적패지를 들고 이승을 다녀온 참이었습니다. 한 늙은이의 혼을 데려왔습니다. 평범한 죽음이었습니다. 수한이 다하여 잠결에 숨이 끊어진 것이었습니다. 늙은이의 혼이 명부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저승사자는 문득 오래전의 한 밤을 떠올렸습니다.

한양 광화방, 봄이 채 오지 않은 이월 그믐의 밤이었습니다. 적패지를 들고 찾아간 사랑채. 호롱불 아래에서 의서를 읽고 있던 젊은 선비. 그리고 적패지의 이름과 선비의 이름이 달랐던 그 순간. 유상택과 유상덕, 한 글자의 차이. 저승사자는 그 밤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수만의 혼을 데려갔으나, 적패지를 들고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밤은 그 한 번뿐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승사자는 이따금 명부에서 유상덕이라는 이름을 찾아보곤 하였습니다. 저승사자의 소임에 그런 행위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데려가야 할 혼의 이름만 확인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남은 돌멩이 하나가 저승사자를 자꾸 명부 앞에 세웠습니다. 수한이 적히지 않은 이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운명을 가진 자.

저승사자는 명부를 통해 유상덕의 삶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의서를 독파하는 것을 보았고, 의원을 여는 것을 보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성으로 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역질이 돌았을 때, 만 명의 목숨을 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 명이었습니다. 저승사자는 그 숫자를 곱씹었습니다. 만 명이면 명부의 장부 수십 페이지를 채우는 이름이었습니다. 만약 그 밤, 자신이 적패지의 이름을 확인하지 않고 유상덕을 그냥 데려갔더라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유상덕의 혼은 저승에 왔을 것이고, 명부의 착오가 뒤늦게 밝혀져 혼란이 생겼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일이 벌어졌을 것이었습니다. 만 명이 살지 못하였을 것이었습니다. 역질이 돌 때 유상덕이 없었다면, 그 처방이 없었다면, 만 명의 이름이 명부에 적혀야 했을 것이었습니다.

저승사자는 명부를 펼쳤습니다. 오래전 그 페이지를 찾았습니다. 한양 북부 광화방. 유상덕. 수한 란에는 이제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른아른 흔들리던 먹이 말라 또렷한 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운명이 완성된 것이었습니다. 유상덕의 수한은 아직 멀었으나, 그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의 윤곽은 이미 명부 위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저승사자는 그 이름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 밤의 일이 착오가 아니었다는 것을.

같은 동네에 유상택과 유상덕이라는 동명이인이 있었다는 것, 적패지를 든 저승사자가 유상택이 아닌 유상덕의 집을 먼저 찾아갔다는 것, 유상덕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이 다르다고 항변하였다는 것, 저승사자가 확인을 위해 명부로 돌아갔다는 것. 그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하나가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유상덕이라는 사람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를 향해 촘촘하게 짜여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승사자는 명부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수백 년을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죽음만을 가져다준 자가 처음으로 내뱉는, 삶에 대한 경외의 말이었습니다. 그때 그것은 착오가 아니었노라. 운명이었느니라.

명부전 밖으로 피안화가 붉게 피어 있었습니다. 죽은 자의 꽃이되, 오늘따라 그 빛이 유난히 선명하였습니다. 마치 이승의 봄꽃처럼. 마치 누군가의 살아 있는 한 생처럼.

저승사자는 다시 적패지를 집어 들었습니다. 오늘도 데려가야 할 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걸음을 옮기기 전, 명부전을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그 안에 잠든 수만, 수억의 이름들. 그 이름들 사이사이에 짜인 운명의 실타래들. 저승사자는 비로소 알았습니다. 자신이 가져가는 죽음도, 자신이 가져가지 못한 삶도, 모두 하나의 커다란 흐름 안에 있다는 것을. 저승사자는 황천길 위로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피안화가 그 발걸음을 따라 붉게, 붉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적패지에 적힌 이름 한 글자가 달랐기에, 한 선비가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비가 살았기에, 만 명의 목숨이 살았습니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도 정교하고, 운명이라 하기엔 너무도 아슬아슬하였던 이 이야기. 용재총화에 전해지는 이 야담이 여러분의 가슴에도 닿았기를 바랍니다. 염라야담, 다음 이야기에서 또 뵙겠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은 이승에서 저희를 다시 만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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